특집 2015/08/09 14:03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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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영|사회주의노동자신문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이 등장한지도 이제 거의 20년이 흘렀다. 90년대 초중반 이념적 대중운동의 잔해 속에서 등장한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은 민주노조운동의 보수화․우경화에 맞서 원칙성과 계급성을 지켜내고 2000년대 대공장하청노조운동을 불러일으키는 주역이 되는 등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으나 노동자계급 속에 뿌리 내리는데 실패하고 안타깝게도 점차 사멸하는 운동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성과 성찰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사회주의노동자신문은 창간 10주년을 맞아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을 점검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1. 한국에서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형성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이란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을 풍미한 PDR과 NDR 등 스탈린주의 이론에 기초한 민주주의 혁명론과 단절하고 보다 철저하게 ‘맑스-레닌주의’에 기초한 노동계급 운동을 창출하려 했던 일군의 정치그룹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그룹들은 해외의 사상이 아니라 8․90년대 한국 운동의 독특한 현상인 혁명적 민중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해방 이후 한국의 혁명운동은 대부분 북한정권과 연계 속에서 형성되었으며, 그 외에는 대개 낭만적 자유주의 운동에 불과했다. 그러나 72년 유신체제가 성립되면서 갓 형성되고 있던 시민사회는 억압되었고, 가장 기본적인 민주주의 권리조차 평화적인 방식으로는 관철시킬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이로부터 한국의 민주주의 운동은 1970년대 후반 민청학련 세대를 거치며 급진화 되기 시작했으며, 이 세대의 일부인 이태복, 장기표, 장명국, 김승호 등은 광주항쟁을 겪으면서 더욱 급진화‧민중화‧이념화되었다. 특히 이태복은 1980년 한국에서의 혁명운동은 한국의 독자적인 당에 의해 수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전민노련과 전민학련(학림)을 건설했는데, 아마 이를 한국의 자생적 좌익운동의 출발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소부르주아 지식인이 주도하는 급진적 민주주의 운동으로서 민중주의는 1980년대 중반 들어 사회구성체 논쟁이라고 불리는 두 차례의 논쟁을 거치며 이론적으로 더욱 완결적인 운동으로 등장했다. 사구체 논쟁의 첫 번째 국면은 1984년대 말 CNP 논쟁으로 나타났는데 이 논쟁에서 전민노련/전민학련 계열이 주장한 NDR이 승리했고, 이는 CA그룹/서노련으로 이어지며 86년까지 민중운동의 주류가 되었다. CNP 논쟁을 통해 민중운동진영 내부에서 개량주의적 CDR론이 기각되고 운동의 사상적 기초로서 ‘맑스-레닌주의’의 위치가 확고해졌다. 일본어 서적을 통해 수입된 <무엇을 할 것인가>에 입각한 정치투쟁론과 정당 건설론이 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1985년 「강철서신」의 등장과 함께 NL이라는 새로운 세력이 급부상하였다. 「강철서신」은 CA그룹의 엘리트주의에 소외된 “평범한” 운동권들을 빠르게 사로잡았고, NL은 짧은 시간에 CA를 압도하며 다수파로 등장했다. 1987년 6월 항쟁을 거치며 CA그룹은 결국 붕괴되고 민중운동에 NL의 주도성이 확립되었다. NL의 등장 이후 1988~89년 두 번째로 사회구성체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은 본래 좌파 성향의 소장 연구자들이 NLPDR(민족해방민중민주혁명)에 대해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과 PDR론을 제기하면서 시작되었지만, PDR을 주장하는 <현실과 과학>과 CA의 노선을 물려받아 NDR을 주장하는 사노맹의 <노동해방문학> 사이의 논쟁도 주요한 축으로 떠올랐다. 이 논쟁은 사실상 보다 정교한 PDR 이론의 승리로 끝났다. 사구체 논쟁을 통해 이른바 ‘맑스-레닌주의’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이와 함께 PDR 이론이 학생운동으로 침투하여 다양한 PDR론이 등장하면서 좌파 다수가 PDR론을 수용하게 되었다.

 

따라서 1984년에서 1989년까지 이론적 논쟁을 통해 혁명적 민중주의 운동이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이 운동은 형성과 동시에 해체될 운명을 맞고 말았다. 민중주의 이론이 사회주의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동구권과 소련 등 소위 ‘현실 사회주의권’이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를 시작으로 급속히 무너져 내렸다. NDR, PDR 같은 민중주의 이론은 근본적으로 스탈린주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1930년대 코민테른에서 발표한 디미트로프 테제에 기초한 인민전선 류의 스탈린주의가 민중주의 이론의 기초가 되었다. 

 
민중주의의 특징은 80년대 노동운동의 미약함 속에서 이른바 기층 민중을 운동의 주체로 설정한 급진적 민주주의 운동 노선이었다. ‘민중주의’라는 용어 역시 이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우선 민주주의혁명, 그 다음에 사회주의혁명이라는 2단계 혁명론을 주장한 NDR이나 민주주의혁명에서 사회주의로 성장·전화 한다는 1단계 2과정 이론을 주장한 PDR이나 모두 당면 과제를 민중을 주체로 한 민주주의혁명으로 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민중주의자들은 인민전선을 통한 민주연합정부를 당면 목표로 설정했으며, 스탈린주의로부터 엘리트주의 전위관을 그대로 받아 들였다. 

 

ND가 조악하고 거친 스탈린주의였다면 PD는 그보다 좀 더 세련된 스탈린주의에 불과했다. 오히려 이론적으로 정교했던 PD들이 현실의 소련을 사회주의 모델로 이상화한 더욱 철저한 스탈린주의자들이었다. 그 결과 1990년 소련이 몰락했을 때, 좌파 민중주의는 ND든 PD든 모두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1989년 천안문 사태로부터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 스탈린주의에 대한 의심은 1990년 소련 인민들이 레닌 동상을 끌어내리는 것을 목도하고 커다란 경악으로 바뀌었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좌파들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규모 공동전선으로 백기완 선본(이하 ‘백선본’)을 결성했지만 채 1%도 안 되는 득표라는 무기력한 실패를 맛보았다. 이는 이미 이론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한 민중주의 운동의 붕괴를 실제적으로 본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맑스-레닌주의(스탈린주의)에 대한 회의가 지식인 사회를 휩쓸었으며 지식인 사회는 급속히 포스트 담론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민중주의 운동은 급속히 붕괴했다. 무엇보다 김영삼 정권의 등장과 함께 민주주의 운동 전선이 해체되었다. 초기 김영삼 정권의 하나회 해체, 금융실명제 실시 등 급속한 개혁정책은 높은 지지를 이끌어냈고, 혁명적 민주주의자들 대부분이 제도 내의 민주주의자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변절자들이 그러했다면, 운동진영 내부에서도 우경화 흐름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1991년 당시 가장 큰 정치그룹이었던 <인천지역 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폐기한 이른바 신노선을 제기했다. 기존 민중주의 정치조직들의 노선전환은 합번적인 민중정당 건설운동으로 현실화되었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인민노련은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를, 사노맹은 사회당추진위원회(사추위)를 건설했고, 여타 다양한 PD그룹들은 <민중회의>로 결합하여 본격적인 합법 정당건설 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이 주도한 백선본의 강령에서 나타나듯이 이들이 지향하는 정치노선은 사민주의와 유로코뮤니즘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정치적 절충주의에 불과했다.  

 
이러한 우경화 흐름을 비판하는 민중주의 운동 내의 좌익 세력들로부터 90년대 초반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맹아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두 가지가 국내 사회주의 운동의 (이론)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데, 첫째 소련 붕괴의 충격을 틈타 국내에 들어와 자리를 잡은 IS의 영향이 있을 것이다. 둘째 사구체 논쟁의 연장선상에서 PTR론의 등장이다. 기존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의심은 1989년 천안문 사태로부터 시작되었다. 천안문 사태 당시 거의 모든 운동진영이 이를 반혁명에 대한 당연한 진압이라고 보았으나 삼민동맹만이 이를 공산당의 배신행위이자 반(反)민주주의적 폭거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인식은 이후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이 발전하는 중요한 단초가 되었다. 


1990년대 초반에 국내에 들어온 IS(국제사회주의) 경향의 지지자들이 SWP(영국 사회주의노동당)의 이론을 전파하기 시작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했던 것은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는 토니 클리프의 이론이었다. 국가자본주의론은 토니 클리프만 주장한 것도 아니었으며, 그가 1940년대 주창한 국가자본주의론은 소련에 대해 그렇게 비판적인 이론도 아니었다. 이 이론은 1960년대를 지나며 IS 내부에서도 망각된 이론이었으나, 90년대 초 동구권 몰락 이후 트로츠키주의 진영 내부에서 타락한 노동자국가론을 지지하는 트로츠키주의 운동 주류와 IS간에 국제적인 논쟁이 새롭게 진행되었다. 이 논쟁은 사실상 IS의 승리로 돌아갔으며, 국내에서도 이른바 ‘현실 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의 충격과 혼란을 틈타 빠르게 전파되었다. 천안문 사태를 비판한 삼민동맹 일부 역시 국가자본주의 이론을 받아들이며 IS에 합류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후 IS를 이론주의, 엘리트주의, 지식인 운동이라고 비판하며 분리하여 <혁명적국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이하 ‘혁사노’)>를 형성했다. 


한편 1990년대 전진출판사는 레닌저작선집을 출판하는 동시에 PDR론과 NDR론을 비판하며 한국에서 당면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 사회주의혁명(PTR)이라고 주장하는 일련의 팸플릿들을 발행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소박한 물음에서 출발했다. PD와 ND가 한국사회를 아무리 그 앞에 ‘신식민지’라는 제한을 둔다하더라도 가장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인 국가독점자본주의로 규정한다면, 왜 한국에서 혁명의 과제가 굳이 민주주의혁명이 되어야 하는가? 당시 전진 그룹이라 불리던 이 그룹은 이로부터 한국사회의 당면 혁명을 프롤레타리아가 주도하는 사회주의혁명이라고 명확히 정식화하였다. 그러나 그밖에는 많은 부분에서 여전히 스탈린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던 전진 그룹은 90년대 초반 한국의 운동진영을 강타한 이론적 혼란기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의 영향으로 PTR론을 받아들인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사회주의자들 (이하 ‘노해투사’)>, <해방의 심장 (이하 ‘해심’)> 같은 새로운 그룹이 등장했고, 이 그룹들의 조직원들은 2000년대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까지 인적으로 이어지며 이 운동의 주요한 기초가 되었다.  


따라서 1990년대 초에 등장한 혁사노, 해심, 노해투사를 최초의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민정부’를 표방하는 김영삼 정권 출범 이후 유화적인 분위기 속에서 민중주의 운동단체들의 전반적인 합법화 단계를 밟았지만, 비합법 운동을 유지하는 조직들에는 탄압이 집중되었다. 이로 인해 계급동맹, 혁사노, 노해투사 등 비합법 정치조직들은 93~95년 사이 공안기관의 국가보안법 탄압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이 속에서 초기 사회주의 그룹들은 사실상 소멸했다. 


초기의 비합법 사회주의 그룹들은 국가의 탄압으로 활동이 정지되었지만 1994년 말부터 민중주의 운동의 전반적인 우경화 흐름 속에서 일부 민중주의 그룹에서 좌익적인 분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것은 어느 정도 노동자투쟁이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의 반영이었다. 94년에 전국기관차협의회(전기협)의 파업 투쟁이 있었고, 95년에는 한국통신노조의 파업이 벌어졌으며, 같은 해 울산 현대자동차에서 양봉수 열사의 분신과 열사투쟁을 계기로 현장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학생운동에서도 95년부터 김영삼 정권의 등장 이후 잠시 사라졌던 화염병이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1994년 말에서 1995년 초, 민중주의 운동세력의 주요한 축 중 하나였던 사노맹/전학련에서 좌익적인 분파가 분리하여 <새벽별>과 <사회주의학생연맹 (이하 ‘사학련’)>을 건설했다. IS에서도 특유의 인민전선 활동에 반발하며 전투적·노동자적 지향을 보이던 세력이 분리되어 「노동해방의 불꽃 (이하 ‘노해불’)」이라는 기관지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초기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잔존세력들과 두 번째 분화한 그룹들이 이합집산하며 96~98년 사이에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이 다시 형성되었다. 90년대 초반과 달리 이들은 자신들을 기존의 좌파 운동과 명확히 구별되는 다른 운동으로 규정했으며, 대략 96년경부터 이들이 발간하는 팸플릿에 “비합법 사회주의” 혹은 “혁명적 사회주의”라는 말과 함께 기존 운동을 비판하는 ‘민중주의’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은 공통적으로 기존 스탈린주의적인 민중주의 운동과 의식적으로 단절하려고 노력하면서 스탈린주의와 구별되는 맑스-레닌주의의 원칙들을 사상적 깃발로 견고히 내세우려 했다. 90년대 말에 들어가면 이들 그룹들은 거의 모두 IS의 국가자본주의론을 받아들여 소련사회를 자본주의 사회로 규정했다. 민주집중제 원리에 기초한 비합법 전위정당의 건설, 프롤레타리아트 사회주의 혁명, 인민전선 같은 상층연대 방식이 아니라 노동자 대중투쟁에 입각한 전술, 평의회 권력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등이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이 내세운 공통의 지반이었다.


이런 지점에서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은 노해투사와 사학련 일부가 결합한 <노동해방의 길 (이하 ‘노해길’)>의 흐름, 새벽별에서 전환한 <빛> 그룹, 해심과 몇몇 소규모 학생그룹들이 결합한 <노동자권력 쟁취를 위해 투쟁하는 사회주의자들 (이하 ‘노투사’)>, 노해불과 혁사노 잔존 세력이 결합한 <선진노동자의 길 (이하 ‘선노길’)> 정도로 볼 수 있을 듯하다. <현장과 정치>와 <신질서> 그룹도 흔히 이들과 유사한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으로 꼽히지만, 기존 사회주의에 대한 평가에서 타락한 노동자국가에서 벗어나지 못한 <현장과 정치>나 유고식 자주관리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내세운 <신질서>는 여러 면에서 민중주의의 잔재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했다는 면에서, 그리고 이후 행보를 보아서도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범주에서 제외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90년대 후반까지 이데올로기 세력으로 존재해오던 이들 그룹들은 97년 총파업과 IMF 이후 이어진 구조조정 분쇄투쟁을 계기로 선전 활동에서 현장투쟁에 대한 개입으로 활동의 중심을 변화시키기 시작했으며, 2000년대 들어서는 현장이전을 통해 주로 대공장 하청노동자운동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은 그 속에서 전투적 선진노동자 운동에 개입하고 그들을 정치적으로 조직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즉,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이론과 전투적 조합주의의 결합을 꾀했던 것이다.

 

2. 현실 노동운동으로 결합과 조합주의


90년대 후반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은 여전히 미숙한 운동이었다. 핵심인물들은 대개 30대 초중반을 넘지 않았고, 조직원들도 대부분 20대 초중반에 불과했다. 합법주의․의회주의로 넘어간 노회한 민중주의자들에 대한 거부와 적대감 속에서 이들은 가진 능력에 비해 완전히 새로운 운동을 창출해야 한다는 지나치게 큰 과제에 짓눌려 있었으며 주장은 과장됐고 편협했으며 자기중심적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활력이 있었다.


80년대 민중주의자들의 맑스주의 문헌에 대한 이해는 천박했다. 제대로 번역된 맑스주의 서적이 거의 없다시피 한 현실에서 사실상 레닌의 단 두 개의 저작(<무엇을 할 것인가?>와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자의 두 가지 전술>)에 남미에서 나온 종속이론과 스탈린주의 교과서를 버무린 것이 민중주의 이론의 전부라 해도 그다지 과언이 아니었다. 민중주의자들은 맑스와 레닌의 원전에 무지했으며, 스탈린주의에 의해 이단으로 단죄된 로자 룩셈부르크, 그람시, 트로츠키 및 유럽의 좌익공산주의 등 다른 혁명적 전통들의 이론과 실천에 대해서는 더더욱 무지했다. 소련을 포함한 이른바 ‘현실 사회주의 블록’이 붕괴한 뒤 옛 민중주의자들은 제도권 민주주의자로 변절하지 않으면 스탈린주의의 변형물인 알튀세르와 발리바르를 거쳐 대부분 이른바 포스트주의로 넘어갔다. 합법주의 민중주의자들은 대개 사민주의나 유로코뮤니즘적인 경향으로 빠져들었다.  


한 세대 전체가 민중주의적 인식과 이데올로기에 깊이 침식되어 있었으므로 그것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어느 정도 이론적 노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민중주의자들이 철지난 이론이라고 버린 맑스와 레닌, 로자, 그람시, 코민테른 테제 등을 파고들며 자신들의 노선을 정립하려 노력했다. 예를 들어 그람시를 시민사회 이론가로 해석한 인민노련/진정추와 달리 혁사노는 초기 그람시의 공장평의회 이론을 보다 좌익적으로 해석해서 아직 총회민주주의의 전통이 식지 않은 한국의 대공장 노조운동에 적용하려 했다. 이는 향후 십 수 년 동안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실천을 규정한 중요한 이론적 성과였다. 


이런 노력 속에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IS에 대한 근본적인 혐오감에도 불구하고 토니 클리프 류의 국가자본주의론으로 현실사회주의를 규정했으며 이 역시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다. 이것은 기존 민중주의자들의 국유화 사회주의와 단절하고 소비에트(평의회) 형 국가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노동자대중투쟁에 대한 적극적인 강조로 귀결되었다. 


때문에 이들의 초기 활동은 불가피하게 각자의 연구 성과를 집약한 기관지 발행과 학습 중심의 활동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미성숙의 시기를 거치며 생긴 불가피한 하나의 편향일 뿐이었다. 하지만 노해길 같은 그룹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보편적으로 거쳐야 할 선전적 단계가 있다고 표명했다. 다른 그룹들은 이를 선전주의라고 비판했지만, 96년 경 울산으로 중심을 옮겨 대공장 현장조직 운동과 결합한 선노길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회주의 그룹들 역시 활동방식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90년대 후반 고양되는 대중운동은 이들이 선전활동에 머무르기 어려운 환경을 제공했다. 


90년대에서 2000년대로 넘어가는 사이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들 내에서는 두 가지 중요한 논쟁이 벌어졌다.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두 논쟁은 총파업 논쟁과 그에 뒤따른 선전주의 논쟁이었다. 1996년 말에서 97년 초, 예상치 못했던 총파업 투쟁이 터져 나왔다. 87년 6월 항쟁과 이어진 7․8․9 노동자대투쟁으로 급속히 고양된 남한의 대중투쟁은 89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노동자 대중투쟁은 91년 열사투쟁의 패배로 급속히 꺾였고 92년 문민정부 등장 이후 완연히 하강세를 탔다. 이를 반영하여 첫 번째 노동운동 위기 논쟁이 벌어졌는데, 기회주의적 세력들은 전투적 조합주의의 한계를 제기하며 노동운동이 보다 온건하고 합리적인 노선으로 나아가야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투쟁은 94년 전기협 투쟁, 95년 한국통신 파업투쟁 등으로부터 이미 조금씩 되살아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에 맞서 95‧96년 NL을 비롯한 반정부 세력들에 대한 강력한 공안탄압이 쏟아졌지만 96년 말 노동법 날치기 사태와 함께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조직노동자들의 투쟁이 격렬히 터져 나와 정권을 강타했다.  


총파업 투쟁 당시, 새벽별 그룹은 <혁명적사회주의자(RS)>라는 명의로 「활화산」이라는 유인물을 발행하며 수도권을 중심으로 집회와 가두투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하지만 민중주의 운동에서 갓 분리해 나온 새벽별의 인식은 아직 민중통일전선(즉, 인민전선)이라는 민중주의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혁사노, 노해투사, 해심 같은 초기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은 모두 민중주의자들이 주도한 92년 백선본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며 새로운 운동을 위해서는 이들과 완전히 단절해야한다는 공통의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사노맹의 잔존세력에 뿌리를 둔 새벽별은 민중회의와 사추위가 통합한 민중정치연합(민정련)에 대한 개입노선을 버리지 못했다. 이러한 한계는 민주주의 과제가 포함된 사회주의 혁명을 당면 과제로 제시하고 전선체를 소비에트의 맹아라고 주장하는 새벽별의 이론적 한계로 드러났다. 이는 전진 그룹을 따라 당면 혁명을 프롤레타리아트 사회주의혁명으로 규정하고 소비에트를 코뮌 국가라고 이해한 노해길이나 노투사, 그리고 혁사노의 영향으로 공장평의회야말로 소비에트  같은 평의회 권력의 맹아라고 생각한 선노길의 인식에 비해 뒤떨어진 것이었다.

 

(전문은 파일로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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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9 14:03 2015/08/09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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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민들레홀씨 2015/08/09 18:57 ADDR EDIT/DEL REPLY

    사회주의라는 노동자국가 건설운동이, 쉽게 말하면 혁명적 노동운동이 매우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치는 것은 당면한 전략전술 이론이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뒤떨어져서라기 보다도 이러한 혁명적 노동운동이 아직은 자본주의 내에서 날마다 착취당하는 노동자계급의 상부구조, 즉 자본가국가와 싸우는 정치운동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혁명적 노동자단결운동이 계속 현장대중에게 지지받지 못하는 뚜렷한 이유는 다만,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들의 경제적 조건으로 인하여 자신들의 상부구조를 세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다시말해 계급사회의 피지배 경험으로 국가라는 착취질서를 단호히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유야 어쨌던 노동해방을 목적으로 삼는 선진노동자들은 착취받는 세상에서 제국주의적 상부구조를 무너뜨리는 운동을 하려면 더욱 현장을 중심으로 단결해야 한다. 노동자에게 의지할만한 조국이 없기 때문이다. 현장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의지할만한 조국이 없음을 깨닫고, 자기 조직의 투쟁으로 생산계급의 조국이 되기위해 스스로의 단결투쟁으로 정치투쟁을 벌일 수 밖에 없는 처지의 조건을 가지게 된다. 마르크스 깃발아래 단결하라!!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

  • 민들레홀씨 2015/08/09 20:24 ADDR EDIT/DEL REPLY

    민주노총은 대의원 직선제를 실시하라!!

  • 민들레홀씨 2015/08/09 20:49 ADDR EDIT/DEL REPLY

    혁명적 사회주의가 민주노총 타협적 노선에 반대한다면, 그리고 현장노동자의 입장에서 현장민의를 민주노총 집행부 전달하게끔 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남한사회주의자들은 즉시 민주노총 점거농성에 들어가라!!! 사회주의자가 노동자계급 정치부대로서 민주노총을 혁명하고자 한다면, 대의원 직선제 선출을 전술적 요구사항으로 내걸고, 민주노총내 혁신 활동가와 대의원들을 조직하여 농성투쟁에 돌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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