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없음 2017/04/10 21:25

[국제] 피델 카스트로의 정치적 유산

(null)빌 밴 오큰(Bill Van Auken)
옮긴이|이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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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밤(11월 25일), 20세기의 주요 인물들 중 하나인 피델 카스트로가 죽었다. 이 소식은 그가 남긴 모순적인 역사적 유산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들만큼이나 폭넓은 대중의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카스트로는 권좌에서 물러난 지 10년 만에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반세기 가까이 그는 “종신대통령”이자 집권 공산당의 제1 서기 및 쿠바군 총사령관이었다. 카스트로는 권력의 많은 부분을 현재 85세인 동생 라울 카스트로에게 이양했다.
 

카스트로의 통치는 그의 체제를 무너뜨리려고 골몰했던 아이젠하워에서 조지 W. 부시에 이르는 미국 대통령 10인의 임기를 합친 것보다 오래 지속되었다. 미국 정부는 카스트로 정권의 전복을 위해 1961년 CIA가 조종한 피그만 침공을 비롯하여 수백 번이 넘는 암살 시도와 사상 최장기 경제 봉쇄 등 갖은 수단을 다 썼지만 실패했다.
 

카스트로의 기나긴 정치이력은 많은 면에서 놀라운 것이었다. 그의 통치에 라틴아메리카에 전형적인 군사 독재의 성격이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정치적인 경쟁자와 반대세력들에게 무자비한 면을 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부정하기 어려운 개인적 카리스마와 인간적인 면모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쿠바의 억압받는 대중들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넓은 층의 지식인들과 급진적인 청년들의 지지를 얻었다.
 

카스트로의 죽음에 대한 미국 언론의 반응은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신문들은 “잔혹한 독재자”라는 비난 사설을 실었다. 방송들은 쿠바 국민 대부분이 보인 침울하고 진지한 추모 분위기보다 마이애미에 있는 리틀 아바나 거리에서 쿠바 우익 망명자 수 백 명이 춤을 추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권좌에서 내려온 지 십년이 지났음에도 카스트로는 쿠바에서 예전보단 덜 하지만 여전히 큰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는 카스트로가 주도한 1959년 쿠바 혁명이 이 나라의 극빈층에게 명백한 사회 환경의 개선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는 쿠바와 인구 및 국내총생산 규모가 비슷한 이웃나라 도미니카를 비교해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쿠바의 살인사건 발생률은 도미니카의 4분의 1에 불과하다. 쿠바의 평균 수명은 79세로 도미니카의 73세보다 6세 많고, 영아 사망률은 도미니카의 약 6분의 1이다. 쿠바의 문맹률과 영아 사망률은 미국보다도 낮다.
 

카스트로의 정치적 억압성을 강조하는 미국 언론의 논평들은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미국은 한 세기 내내 무수히 많은 독재정권들을 지원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만 이런 정권들은 수 십 만 명의 죽음을 불러왔다. 카스트로와 카스트로주의는 이런 참담한 유혈의 역사가 빚은 산물이었다.
 

카스트로의 정치적 성공은 1898년 스페인-미국전쟁의 승리로 쿠바가 스페인 식민지에서 미국의 반식민지가 된 이래 미국 제국주의가 수십 년 동안 자행한 수탈과 억압의 결과였다. 미국은 이른바 플랫수정조항을 통해 쿠바 내정에 간섭 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고, 관티나모 만을 점령하여 군사기지로 사용했다.

 

미국이 지원한 바티스타 독재정권

 

쿠바 혁명 전, 미국은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권을 적극 지원했다. 바티스타는 외국 기업, 국내 토착 지배층 및 마피아의 이해를 대변하는 흉폭한 독재정권을 이끌었다. 이 세력들은 쿠바를 도박과 성매매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고문은 일상이었고,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조차 바티스타 정부가 20,000명 이상의 쿠바인을 정치적으로 살해했다고 말했다.
 

악랄한 정권이었지만 이 나라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 정부는 도미니카의 트루히요, 아이티의 뒤발리에, 니카라과의 소모사 등이 저지른 유사한 범죄행위를 지지했다.
 

민주적 수단을 통해 기존 체제를 변화시키고자 한 사람들은 폭력으로 제거되었다. 예를 들어 1954년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정권이 CIA에 의해 전복되었다. 그 결과 중남미 전역에서 대중적인 반미정서가 들끓었다.
 

스페인계 지주 가정에서 태어난 카스트로는 민족주의적 학생운동의 온상인 아바나 대학에서 정치의식에 눈을 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청년 카스트로는 스페인의 파시스트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Jose Antonio Primo de Rivera)와 이탈리아 총통 베네디토 무솔리니를 숭배했다고 한다.
 

학생시절인 1948년 콜롬비아 보고타를 여행한 것도 그의 정치의식을 형성시킨 중요한 경험이었다. 당시 미국은 이 지역에서의 헤게모니 유지를 위해 보고타에서 미대륙 국가들의 회의를 소집하여 ‘미주기구’를 건설하고자 했다. 카스트로의 보고타 여행 동안 벌어진 자유당 대통령 후보 호르헤 가이탄 암살 사건은 ‘보고타 폭동(Bogatazo)’으로 알려진 대중 봉기를 불러왔다. 이로 인해 이 콜롬비아 수도의 상당부분이 파괴되고 사망자는 3000명에 이르렀다.
 

카스트로 스스로 인정하듯이 장교출신의 아르헨티나 권력자 후안 페론도 그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그는 페론의 포퓰리즘과 반미주의, 빈민 복지 정책을 찬양했다.
 

카스트로는 20대부터 쿠바 소부르주아에 기반 한 반공산주의 경향의 민족주의 정당 인민정통당(Partido Ortodoxo)에 가입하여 바티스타 독재정권에 대한 투쟁을 시작했다. 1952년 인민정통당 후보로 하원의원에 출마했던 카스트로는 1년 뒤 무장투쟁 노선으로 방향을 바꾸어 몬카다 군병영에 대한 공격을 이끌었다. 비참한 실패로 끝난 이 봉기로 200여 명의 참가자들이 죽거나 체포되었다.
 

짧은 수감생활 이후 망명을 떠난 카스트로는 1956년 말 무장한 소수의 지지자들과 함께 쿠바로 돌아왔다. 정부군과 첫 교전에서 다수의 병력을 잃었지만, 쿠바 부르주아와 미국 정부는 이미 바티스트의 통치 능력을 의심하고 있었다. 불과 2년 만에 권력은 카스트로의 게릴라 조직 <7월 26일 운동>의 수중에 떨어졌다.
 

봉기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보였을 때 카스트로는 폭넓은 국제적 지지를 받았다. 새로운 정권에 대해 지지를 표명한 사람들 중에는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있었다. 그는 바티스타 정권의 전복이 “기뻤다”고 썼다.
 

본래 카스트로는 공산주의에 대한 어떠한 공감대도 부정했다. 카스트로 정부는 해외 자본을 보호하고 새로운 민간 투자를 환영할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미 제국주의와 합의를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쿠바 노동자와 농민들은 혁명에서 성과를 바라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자국 해안에서 90마일 떨어진 나라에 가장 온건한 사회 개량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명확히 했다. 미국의 지배그룹은 바티스타의 실각을 짧게 축하한 뒤 새 정부가 예전 방식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들은 카스트로가 진정으로 쿠바 사회를 변화시키고 가난한 대중의 생활수준을 높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겁에 질렸다. 미국은 기존 질서를 변화시키려는 어떠한 시도에 대해서도 비타협적인 태도로 나왔다.
 

제한된 수준의 토지 개혁에 대한 응답으로 미국 정부는 쿠바로부터 설탕 수입을 줄이고 석유 수입을 금지하여 쿠바 경제의 숨통을 졸랐다.
 

카스트로는 이에 대해 먼저 미국 재산을, 그 다음에 쿠바인 소유 기업들을 국유화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그는 소련에 지원을 요청하는 동시에 쿠바의 스탈린주의 정당 인민사회당(PSP)의 힘을 빌렸다. 이 당은 바티스타를 지지하며 카스트로의 게릴라 운동을 탄압한 전력으로 불신을 받고 있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카스트로가 갖지 못한 정치 조직적 기반을 제공해주었다.
 

카스트로는 2차 대전 이후 식민지와 피억업 국가들을 휩쓴 광범위한 부르주아 민족주의 및 반제국주의 운동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이 운동은 알제리의 벤 벨라, 이집트의 나세르, 가나의 은크루마, 콩고의 루뭄바 같은 주요 인물들을 낳았다. 카스트로와 마찬가지로 그들 대부분은 자기 이익을 위해 미국과 소련의 냉전을 이용했다. 자신이 “마르크스-레닌주의자”라는 카스트로의 선언과 친소련 정책은 확실히 기회주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비록 소련 관료체제가 혁명 지도자들을 말살하고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와 무관하게 된 지 오래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는 또한 러시아 10월 혁명이 43년이나 지난 1960년에도 국제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결과이기도 하다.
 

쿠바 민중들의 치솟는 기대와 미국 제국주의의 완강한 반응은 카스트로를 왼쪽으로 밀어갔다. 하지만 그는 결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다. 쿠바 사회의 개혁에 힘쓰던 초기에 그의 정치지향은 항상 실용적이었다.
 

결국 카스트로는 소련 스탈린주의와 파우스트적인 거래를 맺게 되었다. 소련 정부는 막대한 원조와 무역 보조금을 제공하는 대신, 미국 제국주의와 “평화 공존”을 추구하는데 쿠바를 협상카드로 이용했다.
 

1991년 스탈린주의 관료체제의 최종적 배신인 소련의 해체는 쿠바를 절망적인 사회·경제적인 위기 속으로 떨어뜨렸다. 카스트로 정부는 해외자본 투자를 점차 개방하고 베네수엘라로부터 보조금을 받아서 이를 벌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베네수엘라 경제 위기로 원조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미국과 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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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은 아바나에 미국 대사관이 다시 설치되고 올해(2016년) 3월 오바마가 쿠바를 방문하는 등 미국과 쿠바 사이의 화해를 위한 기초를 놓았다. 쿠바의 값싼 노동력과 전망 좋은 시장을 이용해야 하는 미국 자본주의의 입장에서는 이 나라에 중국 및 유럽의 라이벌들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쿠바 지배층은 미국 자본의 유입을 중국과 유사한 길을 가는 동안 자신들의 지배를 유지할 수단으로 보고 있다. 쿠바 엘리트는 사회 불평등이 급속히 심화되는 상황 아래 쿠바 노동계급을 희생양으로 자신의 특권과 권력을 보장받기를 원한다.
 

이 모든 것이 생애 마지막 십년 동안 카스트로를 괴롭힌 것은 분명하다. 이 시기 동안, 카스트로는 쿠바 언론에 “피델의 성찰”이라는 칼럼을 통해 정기적으로 발언을 계속해왔다. 이론적인 통찰은 거의 제시하지 못하는 이 글들은 성실한 소부르주아 급진주의자의 사고방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칭찬할 만한 일은 카스트로가 죽을 때까지 미국 제국주의가 대표하는 모든 것을 경멸했다는 것이다. 그는 “인권” 수사학을 구사하면서도 제국주의 전쟁과 무인폭격기에 의한 암살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버락 오바마의 위선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오바마의 쿠바 방문 직후, 카스트로는 자신이 쓴 마지막 칼럼들 중 하나에서 미국 대통령이 아바나에서 한 연설을 맹렬히 비난했다. 그는 “…… 우리는 민중의 노력과 지성을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식량과 물질적인 부를 생산할 수 있다. 아무것이나 던져주는 제국은 필요 없다”고 단호하게 썼다.
 

하지만 오바마의 쿠바 방문과 미국 제국주의와 관계를 “정상화”하려는 움직임은 중간계급 세력이 주도한 다른 모든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 및 민족해방 투쟁처럼 카스트로 혁명이 최종적인 죽음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결국 카스트로 혁명은 제국주의적인 억압에서 생겨난 쿠바의 역사적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실패했으며, 예전에 그것이 반대했던 신식민주의적인 관계를 부활시키고 있다.
 

단지 냉소적인 사람만이 카스트로의 생애에서 영웅성과 비극성을, 무엇보다 쿠바 민중들의 오랜 투쟁을 부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카스트로의 유산은 쿠바 내로만 한정해서 평가할 수 없고, 그의 정치가 국제적으로, 특히 라틴 아메리카에 미친 영향을 고려해야만 한다.
 

유럽과 북미의 소부르주아 급진주의자와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민족주의자들은 소규모 게릴라부대의 우두머리에서 국가의 권력을 잡은 카스트로를 노동계급의 의식적이고 독립적인 정치적 개입도, 마르크스주의 혁명정당의 건설도 필요 없는 사회주의로 가는 새로운 길을 열었다고 치켜세웠다. 카스트로 혁명의 신화와 특히 그의 정치적 동료 체 게바라가 전파한 게릴라 이론은 모든 주변부 지역에서 혁명의 모델로 떠받들어졌다.

 

파블로 수정주의의 역할

 

이러한 잘못된 관점의 가장 눈에 띄는 지지자들로 제 4인터내셔널에 등장한 파블로 수정주의 경향이 있다. 이 조직은 유럽의 에른스트 만델과 미국의 조지프 핸슨이 주도했고, 이후 아르헨티나의 나후엘 모레노가 결합했다. 이들은 카스트로의 성공은 소부르주아가 이끄는 소농에 기반을 둔 무장 게릴라들이 “태생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natural Marxists)”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고 주장했다. 객관적 상황은 수동적인 방관자로 위축된 노동계급과 함께 이들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몰아갈 것이다.
 

나아가 그들은 노동자 권력기관이 전혀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카스트로의 국유화가 쿠바에 “노동자국가”를 건설했다고 주장했다.
 

쿠바 혁명 훨씬 이전에 레온 트로츠키는 소부르주아 세력에 의해 시도되는 손쉬운 국유화와 사회주의 혁명을 동일시하는 관점을 명확히 거부했다. 1938년에 작성된 제 4인터내셔널 설립 문서 「이행강령」은 “지극히 예외적 상황(전쟁, 전쟁에서의 패배, 금융붕괴, 대중의 혁명적 압력 등) 하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을 포함한 소부르주아 정당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정도보다 더 나아가 자본가계급과 단절할 이론적 가능성을 미리 단정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건을 진정한 프롤레타리아의 독재와 구분했다.
 

1939년 (히틀러와 협정을 맺은) 폴란드 침공 과정에서 스탈린 체제가 수행한 몰수조치에 대해 트로츠키는 이렇게 썼다 . “우리의 주요한 정치적 기준은 이 지역 저 지역에서 소유관계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만이 아니다. 이것도 중요하긴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세계노동계급의 의식과 조직의 변화이다. 그리고 이들이 과거의 투쟁성과를 보존하고 새로운 성과를 쟁취할 능력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제 4인터내셔널 국제위원회는 파블로주의에 맞서 완강히 투쟁하면서, 카스트로주의는 사회주의로 가는 새로운 길이 아니라, 옛 식민지 세계의 많은 곳들에서 권력을 잡은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의 보다 급진적 변형의 하나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카스트로주의에 대한 파블로의 미화가 마르크스로부터 기원한 사회주의 혁명의 역사적·이론적 개념 전체에 대한 부정이며, 또한 트로츠키주의 운동에 의해 국제적으로 집결된 혁명적 중핵을 부르주아 민족주의와 스탈린주의 진영 속으로 해소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제 4인터내셔널 국제위원회는 원칙적으로 제국주의 침략에 대해 쿠바를 지지하면서도 쿠바에 대한 분석을 제국주의 시대에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역할에 대한 더 큰 틀의 평가 속에 위치 지웠다.

트로츠키의 연속혁명 이론을 옹호하며, 제 4인터내셔널 국제위원회는 1961년 이렇게 썼다. “이런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추켜세우는 것은 트로츠키주의자가 할 일이 아니다. 그들이 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민주의와 스탈린주의가 보인 배신행위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제국주의와 노동자 농민 사이에 완충막이 되었다. 소련으로부터 경제 원조를 받을 가능성은 제국주의자들과 더 공정하게 거래할 수 있게 해 주었고, 심지어 부르주아 및 소부르주아 지도자들 중 보다 급진적인 부위들이 제국주의 국가의 재산을 공격하고 더 많은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이들 나라에서 노동계급이 마르크스주의 정당을 통해 정치적 독립성을 획득하고 가난한 농민들을 소비에트 건설로 이끌며, 국제적인 사회주의 혁명과 연결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의견으로는 트로츠키주의자는 어떤 경우에도 이 문제들을 민족주의 지도부를 사회주의자로 만드는 희망과 바꿔치기해서는 안 된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자 자신의 과제이다.”
 

이러한 경고들은 라틴아메리카에서 비극적으로 입증되었다. 여기서 파블로주의자들이 고취한 이론들은 급진적인 청년과 젊은 노동자들의 한 세대를 자본주의에 맞서 노동계급을 조직하는 투쟁에서 수천 명의 희생을 요구한 자멸적인 무장투쟁으로 방향을 바꾸게 만들었다. 이는 노동자 운동을 잘못된 방향으로 오도하고, 파시스트적인 군사 독재로 가는 길을 닦도록 도왔다.
 

그 첫 번째 예로 이러한 이론들은 볼리비아에서 게바라 본인의 생명을 앗아갔다. 광부들 및 여타 볼리비아 노동계급의 전투적인 투쟁들을 무시하고 농민들의 가장 낙후하고 억압받는 층에서 게릴라를 모집하려는 헛된 노력의 결과 그는 고립되고 굶주리다 1967년 10월 CIA와 볼리비아 군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
 

게바라의 운명은 카스트로주의와 파블로 수정주의가 주변부 전체에서 불러올 재앙적 결과들에 대한 비극적인 전조였다. 아르헨티나에서도 게릴라주의에 대한 숭배는 1969년 코르도바의 대규모 파업으로 폭발한 혁명적 노동계급 운동을 약화시키고 혼란을 주는 역할을 했다.
 

카스트로는 소비에트 블록의 고객이자 자국 체제를 안정시키려고 애쓰는 현실정치가로 행세하면서 다른 라틴아메리카 부르주아 정부들과 우호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했다. 이 정부들은 그를 모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전복시키려는 대상이었다. 1971년 카스트로는 칠레를 방문해 아옌데의 “사회주의로 의회적인 길 (parliamentary road to socialism)”을 찬양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도 그 나라의 파시스트들과 군대는 노동계급을 분쇄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페루와 에콰도르의 군사정부를 반제국주의자로 칭찬했으며, 심지어 1968년 학생들을 학살한 멕시코의 부패한 집권정당 제도혁명당도 끌어안았다.
 

카스트로 정책과 그를 미화한 정치적 경향들이 미친 전반적인 영향은 주변부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지금 제국주의 강대국들, 그 중에서도 특히 미국은 쿠바와 다른 나라들에서 자신의 이익을 증진시키는데 카스트로의 죽음을 어디까지 이용할 수 있을지 계산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는 “역사는 그 나라 민중과 세계에 이 한 사람의 개인이 미친 거대한 영향을 기록하고 판단할 것”이라는 위선적인 성명을 발표하며, “쿠바 국민은 미국이 우방이자 협력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큰소리쳤다.
 

반면 대통령 선출자 트럼프는 “거의 60년 동안 자국 국민을 억압해온 잔혹한 독재자의 죽음”을 축하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 은행과 기업들이 쿠바에 쉽게 쿠바에 침투할 수 있도록 오바마가 제정한 법안들을 폐지하겠다는 트럼프의 위협이 실제로 실행될지에 대해서는 추측이 분분하다.
 

제국주의의 대표자들이 반동적 목적으로 카스트로의 죽음을 이용하려 하는 동안, 노동자들과 청년의 새로운 세대에게 카스트로주의의 역사적 경험과 제 4인터내셔널 국제 위원회가 발전시킨 선견지명적인 비판에 대한 연구는 미래의 혁명 투쟁과 그것을 지도할 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노동계급을 준비시키는 데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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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0 21:25 2017/04/10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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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17/04/04 10:15

촛불 속 우리가 주목하는 목소리 (2)

광장정치의 시대, 페미니즘 의제 고민하기

<페미니즘 새로운 민주주의를 상상하라 - 박근혜 퇴진정국과 그 이후> 토론회 참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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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


2016년 12월 23일, 박근혜 정권 퇴진을 위한 촛불집회에 활발히 참여했던 <강남역 10번출구>, <박.하.女.행(박근혜 하야를 만드는 여성주의자 행동)>, <불꽃페미액션>,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의 주최로 “페미니즘, 새로운 민주주의를 상상하라” 토론회가 열렸다. 주최 측의 발제와 함께 토론자로는 페미니스트 정치덕후라고 자신을 소개한 권김현영, 이현재 여성문화이론연구소 대표, 김현미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가 토론으로 함께 했다. 좁은 토론장에도 불구하고 약 70여 명의 청중들이 토론회에 참가했다.


2015년 여름, 소위 메르스 갤러리를 시작으로 소라넷 폐지를 위한 활동, 2016년 5월의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에 대한 온오프라인에서의 활동들, 낙태죄 폐지 시위 등 지난 2년간의 일련의 흐름 속에서 촛불집회 내 페미존이 탄생할 수 있었다. 페미존은 정권비판에 있어 성차별적 방식들을 비판하는 페미니스트 개인/그룹이 함께 움직이는 하나의 구역이다. 페미존은 11월 12일 ‘페미당당’에서 게시한 혐오없는 집회를 제안하는 웹자보에 ‘강남역 10번출구’,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가 호응하면서 시작되었고, 이후 여러 페미니스트 개인/그룹이 함께하게 되었다. 12월 23일의 토론회는 페미존의 활동에서의 고민을 함께 나누고, 성차별적 콘텐츠를 비판하는 활동을 넘어, 페미니즘 정치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대한 논의를 여는 자리였다.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나영의 발제문은 ‘여성 대통령’이라는 상징을 둘러싼 여야 간의 대결 속에서 박근혜 스스로 구축한 카르텔이 어떻게 은폐되는지에 대해 지적했다. ‘여성대통령’의 상징 뒤에 숨은 카르텔의 성격과 동력을 제대로 분석, 비판하고 단절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2012년 대선에는 박근혜를 둘러싼 ‘여성대통령’이라는 상징이 난무했음에도 정작 페미니즘 정치는 의제화되지 못했다는 점 역시 중요하게 지적되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도 역시 이전 개발, 성장주의는 지속되었고, ‘스스로의 시민자격 유지’가 생존과제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국가적 리더십에 대한 향수와 비(非)시민에 대한 혐오 강화로 이어졌다. 이 상황에서 개발, 성장주의와 다른 패러다임의 페미니즘 정치가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2012년 대선에서 페미니즘 의제는 대두되지 못했다. 단지, ‘노동자’라는 계급적 위치 앞에서 ‘여성’의 위치는 삭제되거나, 박근혜 대선캠프의 경우처럼 정치적 위기 돌파의 도구로서만 존재했다. 나영은 발제문에서 2012년 대선과정을 톺아보며, 페미니즘 정치의 패러다임과 의제가 새롭게 설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남역 10번 출구>의 이지원은 촛불집회 내에서 박근혜와 최순실에 대한 비판이 여성에 대한 비하로 이뤄지고 있는 점에 대해 문제제기했다. 광장이 여성 비하를 통한 희화화와 조롱을 하는 동안 정작 시민들의 공론장에서 다뤄졌어야 할 내용들은 특검이나 헌법재판소 같은 곳으로 넘어가게 된 것은 아닌지 우려했다. 또한 ‘여성혐오’적 비판에 대한 분노와 민주당을 포괄하는 소위 “운동권” 혐오의 정서가 현재 워마드에서 보이는 박근혜 퇴진정국에 비판적인 태도를 낳은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지원은 한 편으로는 페미존과 같이 촛불집회에 집단적으로 참여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있고, 다른 편으로는 워마드로 대표되는 박근혜 탄핵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있는 상황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페미니스트 정치에서 이들 간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졌다.


<박.하.女.행>의 조이다혜는 페미존의 그간 활동과 성과를 중심으로 발제하였다. 정권비판이 박근혜와 부역자들을 ‘여성’으로 격하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촛불집회의 성차별적 발언은 페미존이 촉발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페미존으로 모인 사람들은 ‘여성의 실패가 아니라 박근혜의 실패다’, ‘여성혐오와 민주주의는 함께 갈 수 없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다. 또한 집회 도중 성차별적 발언이나 피켓을 보면 다 같이 항의하는 구호를 외쳤다. 시비와 폭력적 상황에 대응할 수 있게 페미자경단을 꾸리고 집회 내 성폭력 매뉴얼도 만들었다. 무대에서의 성차별적 발언에 대해서는 발언 정정이나 사과를 요청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페미존은 1)박근혜 퇴진, 2)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공론장에서 여성에 대한 성차별, 성폭력에 항의, 3)서로의 안전 보장이라는 목표 하에 31개의 단체가 적어도 한 번 이상 페미존에 함께 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페미존에 참여한 사람들 스스로 성차별적 상황과 경험을 발언하고, 정치적 요구를 외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자신들의 주 활동 공간에서의 성차별 문제에 대해서도 공론화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또한 촛불집회 내에서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가 가시화되었고, 성평등한 집회 문화의 기준선 역할을 하기도 했다. 물론 아직도 친박 대 민주주의자의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문제제기하는 페미니스트들을 ‘친박페미’라고 매도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럼에도 정치적 올바름의 공론화가 페미니스트들의 집단화, 세력화를 통해 이뤄지고 있음을 강조하며 발제는 마무리 되었다.

 

페미니즘과 광장의 정치


발제 이후 이어진 토론에서는 현재 페미니즘 정치의 성격에 대한 논의가 집중적으로 논의되었다. 김현미 토론자는 과거 이명박 정권 당시, 여성가족부 폐지와 관련한 페미니스트들의 대응과 현재의 상황을 대비하면서 페미니즘의 정치적 장이 어떻게 이동하고 있는지 지적했다. 지금까지 여성 정치의 상(像)과 발전 측정 지표는 주요 자리에의 여성 진출로 간주되었다. 예를 들어 과거, 여성가족부는 성주류화의 통로이자 그러한 여성가족부의 폐지는 여성정책의 후퇴라고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가족부나 여성정책이 페미니즘 의제를 풀 수 있는 통로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또한 여성단체 대표의 국회진출, 여성의 정부진출과 같은 대리정치에 대한 기대 역시 별로 없다. 과거에는 국회의원 중 여성비율 등 대표자의 여성비율이 주요한 여성의 역량성장을 보여주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나, 그런 위치는 중요한 변화를 이뤄내기 어려운 남성들이 끼워준 자리에 그치기 쉬웠다. 따라서 기존의 여성가족부, 주요한 자리에의 여성 진출은 더 이상 주요한 페미니즘 정치의 비전이라고 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토론에서 여러 번 제기되었듯이 페미니즘 정치의 공간은 대리정치가 아닌 직접정치이자 온/오프라인의 광장 정치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2년 여 간의 온/오프라인을 넘나드는 페미니스트들의 직접행동들(소라넷 폐지를 위한 온,오프라인의 활동들, 강남역 10번 출구의 추모와 촛불집회, ‘낙태죄’ 폐지를 둘러싼 활동 등)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게 벌어졌다. 페미니즘이 다시 시동을 거는 시기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은 시기다. 역설적으로 “여성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의 집권 시기에 페미니즘 정치는 온/오프라인과 광장에서 직접 행동하는 사람들로부터 다시 동력을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16년 촛불집회의 ‘페미존’은 위와 같은 직접정치, 광장정치로의 이동을 잘 보여주고 있다.
 

광장의 정치, 누구의 목소리로 대표되고 있는가?


탄핵정국에서 페미니스트들은 광장으로 나왔으나 촛불 속에서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는 가시화되기 어려웠다. 이는 결국 현재 탄핵 정국에서의 논의가 ‘누구’의 목소리로 이야기되고 있는가의 문제와 맞닿아있다. 권김현영 토론자의 만민공동회의 사례는 이와 관관련해 흥미로운 지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권김현영 토론자는 1898년 독립협회가 주도한 만민공동회의 예를 통해 현재 탄핵 정국에서 광장정치의 의미에 대해 지적했다. 1898년의 만민공동회를 통해 열린 4월부터 10월까지의 광장은 매우 다양한 참여자와 의제가 분출하는 장이었다. 기생과 백정들도 ‘우리도 시민이다’라고 시민권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며, 1899년 덕수궁 앞에서는 양반 여성들을 중심으로 “축첩제도를 폐지하라”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만민공동회의 경우와 같이 광장정치는 다양한 의제를 제기하며 기존의 정치 체제를 흔들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광장의 다양한 의제가 협소해질 때 그 가능성이 축소될 수 있다는 점도 논의되었다. 현재 광장의 논의는 ‘국민’의 목소리로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는 것으로 단일화되고 있다. 김현미 토론자는 박근혜 퇴진 정국에서 집단적 대동단결을 외치며 민생과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단일화되었을 때, 향후 중요한 정치 개혁의 핵심이 되어야 할 재벌, 대형교회와 깡패집단, 여러 엘리트 계급의 권력이 해체될 수 없음을 우려했다. 소위 좌파나 진보진영 역시 ‘시민혁명’, ‘시민불복종’이라며 현재 퇴진 정국을 환영하고는 있으나, 새로운 의제, 아젠다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임을 지적했다. 즉, 광장의 의제가 단일한 ‘국민’의 목소리로, 박근혜 퇴진으로 축소되었을 때, 광장은 기존 체제를 뒤흔들 수 있는 다양한 의제의 가능성을 상실한 채, 정권에 대한 반대로만 앙상해지는 것이다.


현재 광장 의제에 대한 평가는 페미니스트 정치가 제기해야 하는 의제와 문제의식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다. 이현재 토론자는 지금까지 페미존의 운영을 돌아보며, 그렇다면 지금 페미존에서는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지, 즉 어떤 의제를 제시할 것인지가 더욱 심도 깊게 논의되어야 할 필요성을 지적했다. 지금까지 페미존은 주로 ‘여성혐오’에 기반한 정권 비판에 문제제기하는 활동들을 해왔고 이는 SNS에서 나타난 페미니즘 전략을 잇는 것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촛불 광장에서의 페미니즘 전략이 SNS라는 공간에서의 전략과 동일할 수 있는지,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을 남길 수 있는지 고민해볼 것을 제안했다. 예를 들어 촛불집회 사회와 발언에서의 성차별적 측면에 대한 SNS 상의 비판이 있었던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 당시 온라인 상의 비판이 이어지자 박근혜정권퇴진행동이라는 조직적 주최 단위에서는 사과했으나 그러한 사과가 광장에서 문제의식이 효과적으로 확장되었음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 이후 SNS에서의 역풍은 이를 방증했다. 즉 아무리 현재 정국에서 정권비판 과정에서의 여성비하적 측면을 지적하더라도, 박근혜 정권 비판이라는 단일한 기준으로 환원된는 것이다. 그렇다면 페미니스트들이 어떤 이슈를 제기하고, 어떻게 ‘여성혐오’를 이야기해야 할지 다시 고민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현재 토론자는 이에 덧붙여 ‘낙태죄’ 폐지를 하나의 의제로 제안하기도 했다.
 

‘페미니스트’ 간의 차이


차이에 대응하는 것은 촛불광장에서만은 아니다. 소위 ‘여성’들 간의 차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역시 토론회에서 중요 논의지점 중 하나였다.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활동하는 이지원씨는 발제에서 워마드라는 커뮤니티의 ‘여성’들과 어떤 관계여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제시했다. 워마드에서 추천수가 높은 게시글 중에는 박근혜를 ‘햇님’으로 부르며, ‘사실 남자 대통령에 비해 못한 것도 없다’, ‘현재 상황도 박근혜의 잘못이라기보다 자기 이익만 챙긴 남성 보좌진 때문이다’, ‘그래도 여성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책을 추진했다’등의 평가를 제시하고 있다. 이지원씨는 이를 “여성성에 대한 비하로 구성된 비판담론에 대한 거부감”, “민주당을 포괄하는 진보운동권 혐오”가 강력하게 작동한 현상이라고 본다.


위와 같은 방식의 대응은 젠더 근본주의적 태도에 기반한 것으로 읽힌다. 여성이라는 범주는 단일하지 않고, 계급과 인종 등과 맞물려서 작동한다. 그러나 성별이라는 기준만으로 대응할 때, 여성들 간의 계급적 차이, 인종적 차이 등은 간과되기 쉽다. 따라서 촛불집회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워마드와 촛불집회 내의 페미존 간의 차이는 한 편으로는 성별과 계급, 인종 등과 같은 다양한 범주가 교차하면서 만들어내는 억압에 대한 동의 여부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현미 토론자는 워마드의 대응 역시 페미니즘 정치의 다양한 스펙트럼 중 하나로서, 일종의 미러링처럼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닌지 질문한다. 즉, 페미니즘 진영 역시 장소, 층위, 이데올로기적 다양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마치 카드를 여러 개 가지고 있어야 혐오와 반동의 흐름에 한 번에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에 비해 권김현영 토론자는 ‘정치적 입장 차이를 두고 논쟁할 수 있는 것이 진보’임을 지적하며 더욱 적극적인 논쟁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최근 온라인을 중심으로 젠더 근본주의적 관점이 두드러지는 ‘페미니스트’들이 등장하면서 위와 같은 논의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다양한 범주가 맞물려서 작동하는 억압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억압의 교차성에 대한 토론의 확대가 페미니즘 정치의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닫히는 광장에서 또 다른 길을 내다


2016년 11월부터 이어진 박근혜 퇴진 촛불은 압도적인 규모를 통해 박근혜 탄핵안 가결을 이끌어냈다.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촛불집회가 가진 의제의 확장성은 그다지 넓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퇴진 촛불을 통해서 열린 광장은 다양한 목소리와 의제가 공유되고 논쟁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점차 정권퇴진, 탄핵 인용을 중심으로 닫히고 있다. 그리고 모든 국민의 눈과 귀는 헌법재판소라는 사법적 기관으로 집중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대선 후보 간의 경쟁력을 중심으로 논의가 더욱 협소해지고 있다.


이러한 광장에서 끊임없이 박근혜 비판의 성차별적, ‘여성혐오’적 요소에 문제제기했던 페미존의 활동은 정권퇴진으로 협소해지는 광장에 다른 결의 논의의 장을 열었다. 그리고 참가자 각자의 공간에서 성차별에 목소리를 내는 힘을 기를 수 있는 장이 되었다. 이 날 토론회는 이러한 광장정치의 힘이 앞으로 페미니즘 정치의 비전이 될 수 있다는 방향성을 공유하는 자리로서 의미있는 자리였다. 기존 집회의 ‘여성혐오적’ 문화에 문제제기하는 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방식과 페미니즘 정치 의제가 필요함을 공유한 자리였다. 논의의 장을 연 첫 번째 토론회는 끝났지만 이후 이어질 새로운 페미니즘 정치의 가능성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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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04 10:15 2017/04/04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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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17/04/03 13:20

촛불 속 우리가 주목하는 목소리 (1)

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하며 150일 동안 계속된 광장에서 “박근혜 퇴진”이라는 목소리가 가장 컸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토록 많은 사람들의 물결 속에 한 가지 목소리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평화시위에 대한 논쟁이 있었고, 여성혐오 발언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든 박근혜만의 문제는 아니다. 여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박근혜만 물러난다면 만사가 다 잘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도 아니었다. 사드배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있었고, 반체제 사상에 대한 탄압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으며, 노동탄압에 분노하는 목소리도 있었고, 여성혐오에 반대하는 목소리고 있었다. 청소년들의 목소리도 있었고, 차벽을 넘어 더욱 근본적인 변혁으로 나아가자는 목소리도 있었다. 박근혜 일개인에 대한 감정을 넘어 이러한 다양한 목소리들이 더욱 큰 목소리로 표출되고 그것들에 의해 광장의 시선은 더욱 뿌리 깊은 문제들까지 뻗어나가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광장에서는 박근혜 퇴진, 박근혜 탄핵이라는 큰 목소리에 묻혀 그러한 목소리들이 잘 들리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라는 아쉬움이 있다.  

장기투쟁사업장들이 모인 <투쟁사업장 공동투쟁>은 청와대로 행진하는 가장 앞자리에 있었다. 광장 속의 여성차별과 여성혐오에 항의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집회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목소리와 운동을 만들어갔다.

붉은글씨는 이러한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와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가 이번 광장에서 경청해서 들어야할, 결코 묻혀서는 안 되는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투쟁사업장 공동투쟁>의 콜트콜텍 이인근 지회장의 이야기와 촛불정국에서 활발히 활동했던 페미니스트들이 지난 12월 23일 열린 <페미니즘 새로운 민주주의를 상상하라 - 박근혜 퇴진정국과 그 이후> 토론회에서 제기한 문제의식을 정리하는 기사를 붉은글씨에 실어 띄어본다. [편집자]

 

지난 2월 유난히 찬바람에 몸이 에이던 날씨에 광화문 서울정부종합청사에서 박근혜 퇴진투쟁을 전면으로 내세우고 농성을 하고 있는 ‘노동탄압 민생파탄 박근혜 정권 퇴진을 위한 투쟁사업장 공동투쟁’ 농성장을 방문했다. 거리가 멀다고, 혹은 여러 가지 이유로 연대를 자주 못했던 곳이 정부청사에 다 모여서 농성장을 만들었다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만들어지고 1948년 이승만 전 대통령이 나오면서부터 현재까지 줄기차게 외쳤던 대통령의 퇴진, 너무도 많이 외쳐서 낡고 닳아버린. 그럼에도 지금까지도 너무나 유의미한 대통령의 퇴진과 관련하여 시국 농성을 벌인다니,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는지 그들의 역할이 너무도 궁금하고 함께하고 싶었던 마음에 인터뷰를 요청했다. 10개의 사업장이 공동의 거점에 모여 있는 곳이다 보니 인터뷰가 될까 걱정도 했는데 너무도 쉽게 응해주셔서 편한 마음으로 한편으론 잘 써야겠다는 마음으로 했다.

이 추운 날 농성장에 반나절 있으면서 밥도 얻어먹고 쌍화차까지 후식으로 얻어먹으며 인터뷰를 진행했다. 너무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던 동지들이라 4시간을 했는데도 부족했다. 이것으로 그들의 이야기가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박근혜를 끌어내리겠다고 전국 각지에서 서울 광화문 서울종합청사 바깥 찬 땅바닥에 모여 앉았으니 얼마나 할 것이 많겠는가?


더 이상 아픔과 고통을 강요하지 마라!
더 이상 죽이지 마라!
우리는 인간답게 살고 싶다! 정말로 살고 싶다!


이렇게 외치는 이들이 매일 저녁 6시에 서울정부종합청사 앞에서 문화제를 한다. 오며 가며 동지들이 연대의 정신을 보여 주길 바란다.


이번 인터뷰는 이인근 콜트콜텍 지회장과 대담을 나누었다. 여러 가지 상황에 의해 ‘투쟁사업장 공동투쟁’에 있는 모든 투쟁 단위의 의견을 다 싣지 못했음을 미리 알린다.

‘투쟁사업장 공동투쟁’에는 아사히비정규직지회, 동양시멘트지부, 하이디스지회, 진우삼사, 사회보장정보원분회, 티브로드비정규직지부, 하이텍알씨디코리아분회, KTX 열차승무원지부, 콜트콜텍지회, 세종호텔노동조합, 한국지엠창원비정규직지회까지 11개 지부가 함께하고 있었으나, 최근 한국지엠창원비정규직지회가 나가면서 10개 지부만 남았다.

 

이미진 : 11개의 사업장이 각자 흩어져 있다가 ‘투쟁사업장 공동투쟁’으로 모인 계기가 무엇인가요?

 

이인근 : 각자 흩어져서 싸우지 말고 투쟁사업장들이 공동의 거점을 마련해서 싸우자는 취지로 공동투쟁을 2015년도에 시작했죠. 전국에 있는 투쟁사업장 전국순회를 하면서 같이 해보자는 제안을 했고 한국지엠창원비정규직지회, 현대차비정규직지회가 들어왔습니다. 매월 하루는 대정부 투쟁을 하고, 각 단사별로 집중해야 하는 날에 같이 가서 문화제를 하고, 조합원의 친밀감을 높이기 위해 수련회도 하고, 1년간의 품앗이 투쟁을 진행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최순실 게이트가 터졌습니다. 기회는 지금이다, 각자의 집중 투쟁을 잠시 접고 박근혜 퇴진투쟁에 집중하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작년 11월부터 광화문 정부청사 앞 시국농성이 시작됐습니다.


이미진 :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가 매주 주말마다 일어났습니다. 전국적으로 200만 명이 모이는 촛불정국에 대해 해고자 원직복직을 위해 장기간 투쟁한 동지들은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이인근 : 권력이 만들어놓은 평화적인 프레임에 갇혀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벽이라는 것이 대법원 판결을 통해 불법이라는 것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공권력이 불법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촛불 시민은 그 속에서 평화시위라고 이야기 하지만 어떻게 보면 공권력이 만들어 놓은 선 안에서 우리끼리 놀다 가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죠.

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재벌총수들도 공범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촛불에서는 노동 의제가 없습니다. 박근혜 퇴진과 주변 인물의 구속에 대해 외칠 뿐입니다. 또한 재벌총수들의 뇌물공여로 인해 고통 받는 노동자들은 전혀 배려 받지 못했습니다.

박근혜의 태도를 보면 1, 2차 담화를 발표하면서 특검, 검찰의 조사를 충실히 받겠다고 했으나 촛불집회 인원이 100만 명이 넘는 2016년 11월12일 기점으로 박근혜의 태도가 확 바뀌었습니다.

국민에 대한 분노가 여기까지라는 것을 박근혜 정권은 이미 인지했다고 생각 합니다. 처음 100만 이상 모였을 때 만약에 차벽을 무너뜨리기 위한 행동을 촛불이 했다면 박근혜가 지금처럼 강공모드로 갈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촛불집회를 가보면 시민혁명이라는 깃발이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혁명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혁명은 출혈 없이 이뤄질 수 없고 평화적인 혁명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혁명을 하기 위해서는 격렬한 싸움이 필요하지요. 4.19때 공권력의 발포가 있었지만 그때보다 지금이 덜하더라도 그 못지않은 투쟁이 뒷받침돼야 박근혜가 스스로 사퇴를 하고 하야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만이 뒤에 들어선 정부 역시도 국민에 대해 무서움을 알고 국민을 위한 정책을 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처럼 평화적으로 가다보면 내내 다음 정권이 들어선다 하더라도 국민을 위한 정부가 되지는 않을 것이고 가진 자들을 위한 정책을 펴겠지요.

 

이미진 : 4‧19, 5‧18의 처절한 투쟁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민주주의’가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촛불혁명이라고 일컬어질 만큼의 파급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런 평화적인 것에 갇혀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인근 : 그동안 우리가 살면서 평화라는 것에 대한 세뇌가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투쟁에서 공권력과의 마찰이 꾸준히 이어져왔고, 자본과 권력, 보수언론에서는 폭력이라고 규정해왔습니다. 그래서 폭력이라고, 시위가 아니라 불법 행위라고 인식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보다 민주주의를 훨씬 더 오래 했고 더 안착이 된 서구 유럽 역시 시위를 격렬하게 합니다. 이미 자본과 권력이 심어놓은 테두리 안에서 만성화가 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평화, 질서 누가 정하는 것일까요?  국가가 정하는 것이고 가진 자들이 정하는 것입니다.

 

이미진 : ‘평화’나 ‘질서’는 국민을 국가나 자본이 관리하기 편하게 하는 수단인 것 같습니다.

 

이인근 : 옥죄기 위한 하나의 프레임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너무 관대한 것이 아닐까요? 언론이나 교육에서 그들이 만들어놓은 것만 배우다 보니 의심할 틈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시위 현장에서 질서를 지킨다는 것은 시위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답답합니다. 촛불 집회 가면 촛불 들고 콘서트 구경하고 청와대 걸어갔다 내려오고 그걸로 끝나는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부정을 저지른 권력자들을 보면 촛불에 대한 위기감이 하나도 없고 시간 끌기만 하고 있습니다. 사실 국회에서 탄핵가결을 시킨 것도 국민의 힘인데 사실상 지지부진되면서 국민의 힘은 온데간데없고 그 공은 정치꾼들이 가져가 버렸습니다.

국민들 스스로가 나는 노동자이고 지금 내가 하는 노동이 그리고 노동의 대가가 정당한 것인지에 대해 깨우쳐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국민들이 먹고 살기 바빠서 정치에 신경 쓸 틈이 없다고 하지만 그럴수록 신경 써야 되는데  엄한데 신경을 쓰게끔 국가나 자본이 만들었기에 이승만 때부터 내려온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일을 해도 깨진 독에 물붓기인데 그 깨진 독을 바꿀 생각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미진 : 정치적 무관심 자체가 국가와 자본이 조장하는 것 아닐까요? ‘너희들은 돈만 벌어 나머지는 우리가 할게.’라는 식으로 하는데 국민들을 실험용 쥐처럼 만든 것 같아요.

 

이인근 : 지금은 분배의 시기가 아니라 자본의 축척의 시기라고 이야기하면서 노동자들을 억누르고 기업에게 특혜를 많이 줬죠. 그렇게 거대재벌이 형성된 것이고 국가가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자본들은 거대해졌습니다.

 

이미진 : 박근혜 스스로 내려올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준 것 같은데 언론에서 하는 것을 보니 쉽사리 내려오지 않을 것 같은데요?

 

이인근 : 안 내려오겠다고 선언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특검조사도, 헌재 조사도 안 받으려 하고 변호인들은 판결 늦추려 증인들 무더기로 신청하고 있지요. 국무대행을 하고 있는 황교안 총리가 자기 정책을 다 하고 있고, 심지어 세월호 7시간 관련해서 밝혀진 것은 하나도 없네요. 허나 헌재 소장 하나가 임기 끝나서 나가고 3.14로 임기 만료로 나가는 상황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헌재도 미룰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미진 : 정리하자면, 평화라는 프레임을 인지하고 스스로 깨 부시지 않으면 광장의 요구를 온전히 쟁취하기 어렵고 노동자  착취를 끊어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내 것을 지키려는 행동자체를 국가나 자본이 용납하지 않고 언론에서는 폭력으로 규정합니다. 그걸 끊지 않는다면 우린 계속 지금과 같이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이인근 : 평화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공평한 삶을 영위할 때 그때 유지 되는 것이지요, 지금과 같은 양극화 상황에서 평화가 이뤄질 수가 없습니다. 내가 뺏긴 것을 아무렇지 않게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이미 권력이라는 것이 다 강자 편에 있기 때문이죠.

법으로 해야 한다고 부추기는데, 법이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원래 시위라는 것이 뭔가를 쟁취하기 위해 하는 것이잖습니까. 무언가를 강자로부터 쟁취하려고 하는 것인데 그게 어떻게 평화적일수가 있느냐는 것이지요. 평화적으로 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없습니다. 시위는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행동처럼 보입니다.

분노라는 것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너무 체념을 하다 보니 분노라는 것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이미진 : 공투단에서 박근혜 퇴진을 전면적으로 내세운 상황에서 각 사업장의 의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요?

 

이인근 : 어찌됐든 올해는 대선국면으로 접어들었습니다. 대선관련해서 투쟁사업장의 문제, 노동에 관련된 의제를 가지고 투쟁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공투단은 단순히 투쟁사업장 문제 해결이 아닌 노동법 전면 재개정을 요구하려고 합니다. 정리해고, 비정규직, 노동탄압을 완전히 철폐하자는 요구를 대선투쟁으로 할 겁니다.

2월7일 총연맹 대의원대회에서 정치방안을 이야기한다는데, 사실 민주노총에서 그런 것을 논의할 시기가 아난 것 같습니다. 후보를 내세운다 해서 될 것도 아니고, 이 국면을 투쟁으로 돌파해서 그동안 탄압받아 왔던 공무원노조, 전교조가 노동3권을 온전히 쟁취할 수 있는 그런 투쟁들을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래저래 아쉬운 생각만 듭니다.

 

이미진 : 그렇게 되다보면 가장 고통 받는 것은 노동자계급 본인들입니다. 유성기업 한광호 열사 문제도, ‘투쟁사업장 공동투쟁’에 있는 사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인근 : 그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당사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만약에 현대․기아자동차 노동조합이 갑을오토텍 같은 경우를 겪었다면 총연맹이나 금속노조에서 가만히 있지 않았겠죠. 현대․기아자동차 노동조합이 동조파업을 해준다면 지금까지 끌고 오지 않았을 겁니다. 그건 내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노동자투쟁은 자본한테 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본은 지들끼리 뭉쳐서 싸우는데 우리는 각개전투하고 있습니다.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들에 대한 고충을 이해를 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는 힘들어서 어떻게 해? 라고 하지만 뒤를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맙니다. 이렇게 방치 할 순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백날 비정규직철폐 외치면 뭘 할 수 있겠습니까? 현대차지부에서 부딪혀주면 비정규직지회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나의 이권문제가 아니면 하지 않는 것이고, 그런 문제가 내부에 깔려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지도부에서 교육을 하고 단호한 결단으로 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 하는데 안 하게 되죠. 결국 조합원 핑계대면서 말이죠.

 

이미진 : 관료화가 된 것 같습니다. ‘노동자는 하나’라고 외쳤으나 공허한 메아리 같은 것이 아닌 것이 아닌가요?

 

이인근 : 자기네들이야 월급 나오는데 힘들게 조직하고 경찰서 불려나가는 그러한 일들이 굳이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미 관료화, 관성화가 되어버렸습니다. ‘노동자는 하나’라고 외쳤으나 공허한 메아리 같은 것이 아닐까요?

박근혜가 당선이 되고 노동계에서 박근혜 퇴진을 외쳐왔지만 주기적으로 민주노총에서 전국의 상근자들을 주1회 정도 서울 집회 박아놨어도 이렇게까지 망가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총파업 한번 하려면 교육해야 한다며 시간 다 보내고 실제로 뻥파업만 난무합니다.

계급으로서 노동자가 아닌 자본주의적 노동자가 되어있는 것 같습니다. 혹은 자본주의에 포섭된 노동자라고 해야 할까요? 내 싸움이 아니면 손해를 안 보려 하고, 관심도 없다보니 노동운동에 발전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발전이 없으니 별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여건도 없고, 자본가들은 노동자 탄압하는 것에 대해 새로운 것을 고안해 놓는데 노동자들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미진 : 노동운동이 정체가 되어버린 상황이고 타개할 국면도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을 하고 계신 이유가 뭘까요?

 

이인근 : 싸워야 하니까요. 만약에 여기서 그만두고 다른 생업을 찾아갈 수 있지요. 그렇게 되면 이런 나쁜 짓을 저지른 자본가는 옳은 놈이 되어버리고 우리는 패배자가 되어버리는 게 싫습니다. 역사는 승자가 쓴다고 하죠. 언론을 통해 자신이 옳았다고 선전할 것이고 부당함에 맞서 싸운 노동자들은 잘 되고 있는 공장을 말아먹은 파렴치한이 되어버리죠. 그게 싫습니다. 노동자계급성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물러나기가 싫습니다. 용서하기가 싫습니다. 자본가한테 면죄부를 주고 싶지가 않습니다. 어쨌든 자본가들이 저지른 못된 짓거리들 이런 것들을 자기 스스로 느끼게 하고 싶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이제 와서 돈 더 받으면 뭐합니까. 단지 자신이 행한 짓거리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고, 자기 자식들도 이런 짓을 하지 않고 노동자가 경영자의 파트너라는 인식까지 바라지 않더라도 적어도 자기들의 노예가 아니라는 것만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투쟁하는 사람들 보면 삶, 생계를 위해서 투쟁을 어쩔 수 없이 접는 경우가 많지요. 그 것을 뛰어넘는 투쟁하는 사람들의 개인의 대단한 결의가 필요하겠지만, 그러한 노동자들이 많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요. 생계문제로 중간에 포기해버리고 그렇게 하다 보니 자본가들은 가만히 있으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본가들은 손해 볼 것이 없지요. 사실 노조, 상급단체에서 일정부분 보완을 해줘야 하는데 민주노총이나 타 연맹이 그러한 부분을 못해주고 있습니다.

 

이미진 : 어떨 때는 일상적인 삶을 누리면서 살고 싶을 텐데. 자본이 그렇게 살지 못하게 내버려두질 않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웃음을 보려면 더 열심히 싸우고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인근 : 이것 하나만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노동을 하다가 너무 힘들고 부당해서 노조를 만들고 이 싸움의 정당함을 외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허나 많은 사업장내에서 가정과 운동이라는 것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지요. 투쟁을 접고 가정을 지킨다고 가서 다른 곳으로 취직했을 때 그곳에서 발생되는 부당함을 감내할 수 있을까요. 또다시 노예의 삶을 살아야 할 텐데 말입니다. 언제까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 수 있겠습니까.
사실 노동조합을 만들면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을 못했을까요? 가입을 하면 노조에서 알아서 해주겠지, 사측과 노조와 협조를 해서 조금 더 낳은 월급과 노동환경을 만들어 주겠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노조에 가입했을까요? 너무 힘들고 부당해서 노조를 만들었고, 노조는 저임금과 부당함을 조금 완화시켜줄 것이라 기대를 하고 활동을 했을 것입니다. 그걸 하기 위해선 어떠한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미진 : 이미 노조는 관성화가 되어있고 싸움을 회피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을 왜 해야 할까요? 그리고 민주노조 사수란 것이 필요할까요?

 

이인근 : 별다른 대안이 없으니까!(일동 웃음) 이율배반적인 이야기일순 있겠지만 ‘노동자는 하나’라는 이야기 속에 ‘노동자는 다수다’라는 뜻이 있기도 합니다. 또다시 노동자는 하나로 만들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미진 : 신생 노조를 만들고 있거나 노조 안에서 끊임없이 탄압을 받고 있는 이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인근 : 결국 원론적인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요? 노동자로서 권리와 노동자로서 가져야할 당당함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자본들의 입맛에 맞는 로봇이 아니라 노동자로서 인간으로서 존중받는 그런 일자리에서 일하는 사람이었음 좋겠습니다. 그리고 불평등한 분배의 고리를 끊자! 그것이 나를 위해서 내 자식을 위해서도 옳은 일,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을 가장 드리고 싶습니다. 더 이상 불평하지 말고 행동해라!

 


투쟁사업장 공동투쟁에서는 후원계좌를 열어두고 있다. CMS를 통해 신청하는 것이 좋으나 여기서는 직접 후원을 할 수 있는 계좌번호를 안내한다. 현재 10개의 사업장 중 후원계좌를 갖고 있는 곳이 네 곳밖에 되지 않는다. 한 곳만 선택하기 어렵다면 “투쟁사업장 공동투쟁” 계좌로 후원하면 된다. 이들이 차디찬 땅바닥이 아닌 따스한 집에서 일상을 맞이할 수 있도록 그리고 노동자가 있어야 할 곳인 노동의 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도록 후원을 요청한다. 올해는 원직복직과 비정규직철폐가 한걸음씩 이뤄지길 바란다.

투쟁사업장 공동투쟁 후원계좌 : SC 제일은행(정주현) 363-20-087056
동양시멘트지부 후원계좌 : 농협(강선이) 351-0821-4078-13
콜트콜텍 후원계좌 : 외환은행(이은성) 620-216112-480
아사히비정규직지회 후원계좌 : 농협(권택숙) 301-0056-6137-11
하이디스지회 후원계좌 : 농협(민주노총 이천여주양평지부) 301-0183-658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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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03 13:20 2017/04/03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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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16/10/04 12:00

브렉시트와 유럽 계급투쟁

홍수천



* 지난 9월 8일 발행된 <붉은글씨> 5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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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 즉 영국의 유럽연합 EU 탈퇴는 노동자계급과 계급투쟁에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이로운가 해로운가? 혹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계급투쟁과는 상관없는 일, 노동자계급의 쟁점이 아닌 일인가? 이것은 아주 원초적이고 단순한 질문이지만, 이에 대한 분명한 답변을 회피하는 그 어떤 브렉시트 논평이나 해설, 평가도 무가치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글의 기본 전제이다.


따라서 그 질문에 답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자. 한 마디로 브렉시트는 노동자계급과 계급투쟁에 해악이다. 브렉시트의 승리로, 즉 국민투표가 ‘탈퇴’로 결정 나면서 영국의, 나아가 전체 유럽의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 그리고 진보적 운동 전반에 난관이 조성되었다. 브렉시트 승리로 가장 패배를 입은 것은 “잔류” 지지를 호소했던 ‘기성정치권’(보수당과 노동당 양대 정당 중심의 제도정치권)이 아니라 사실상 노동자계급이다. 개별적으로 잔류를 지지했느냐 탈퇴를 지지했느냐와 상관없이 계급으로서 말이다. 생존권과 사회적 권리의 후퇴 등 당면 수준에서도 손실이고 중장기적인 계급투쟁 진로에서도 퇴행적인 길이, 덫과 함정으로 빠지는 길이 닦여졌다.  

 

1. 브렉시트와 노동자계급


우선, 영국의 수백만 노동자들의 정치적 각성과 계급의식에 타격이 되고 있다. 마가릿 대처 총리 이래 계속되어 온 영국 지배계급의 신자유주의 공격으로 황폐화된 구 공업 지역의 노동자들이 특히 이 타격의 제물이 되고 있다. 이 지역의 브렉시트 찬성파 상당수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허구적 편견과 명백히 연결되어 있다. ‘원주민’ 노동자들의 고용불안과 저임금, 복지 축소를 가져온 주범이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기 때문에 이민자들의 영국 유입을 막을 수 있도록 유럽연합을 탈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거짓말은 영국판 조중동 찌라시라고 할 수 있는 데일리메일, 더선, 데일리익스프레스 같은 억만장자 소유 일간지들이 수 십 년 동안 줄기차게 퍼트려 온 악선동인데, 이번에 국민투표를 통해 이 거짓이 ‘근거 있는’ 것으로 확인되는 효과를 얻게 되었다. 이미 국민투표 이후 반이민 인종주의적 증오범죄가 거리와 노동현장에서 속출하고 있다. 브렉시트 승리로 극우 영국독립당(UKIP)이 득세하면서 인종주의적 포퓰리즘이 창궐할 기세를 보이고 있고, 이제 고립을 끝낸 소규모 파시스트 그룹들에 의한 폭력도 다시 부활할 조짐이다.


이주 노동,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은 장기적으로 국제적 공감과 연대를 촉진하는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경향인데 이제 브렉시트의 승리로 유럽 대륙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찾아 영국에 오는 것이나 반대로 영국의 노동자가 다른 유럽 나라들에서 일하는 것이나 모두 결정적으로 가로막힐 상황이다.


국민투표 후 보수당 캐머런 총리가 사임했지만, EU 탈퇴 과정은 철저히 보수당 정부의 수중에서 진행될 것인데, 저들은 브렉시트 이행 과정에서 이민을 제한하는 데 전력을 기울일 것이다. 남유럽이나 동유럽에서 온 이주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전쟁을 피해 온 난민들에 대해서도 공격이 집중될 것이다.


캐머런을 계승해서 테레사 메이나 보리스 존슨이나 누가 총리가 되든 보수당 정부는 ‘기성정치권’에 대한 민중들의 치솟는 반감을 달래기 위해 당장은 발톱을 감추겠지만, 곧 그 동안 영국과 EU의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쟁취하여 EU 법률과 조례로 명문화시켜 놓은 권리들(노동시간 단축, 야간노동 제한, 임신 출산 유급휴가, 비정규직 고용의제 등)을 폐기시키기 위한 공세에 착수할 것이다. 동시에 교육 및 의료 서비스의 민영화도 박차를 가할 것이다.


적어도 2년은 걸릴 EU 집행위와의 브렉시트 협상 과정이 영국과 EU 양측 간에 적대적인 난타전이 될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빤한데 이 과정에서 영국과 EU 전체의 경제위기 또한 가중될 것이다. 2008년 이래의 공황으로부터 아직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노동자들과 빈민들에게 또 다시 타격이 될 것이다. 또한 현재의 EU에 이르기까지 40여년에 걸쳐 구축된 생산·교환의 국제 연결망이 국경 통제 및 관세 부과가 재개됨으로 인해 뒤흔들리면서 EU가 서로 경쟁하는 정치·경제 단위들로 파편화되고 와해되는 위험성도 대두되고 있다.   


한편, 브렉시트는 유럽의 노동운동을 단일한 공동행동의 틀로 통합하기 위한 기간의 노력들을 분산, 해체시키는 또 하나의 중대한 요인이다. 와해의 위기에 직면한 것은 단지 유럽만이 아니다. 영국(UK, United Kingdom) 자신도 와해될 위기에 처했다. 스코틀랜드의 새로운 분리독립 국민투표 가능성이 다시 제기되고 있고, 이것은 영국 노동계급운동을 파편화 시킬 가능성이 크다.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공화국 사이의 국경 통제가 재개될 조짐이 일고 있고, 이렇게 되면 영국에 절대로 포함되어 있길 원치 않는 북아일랜드의 피억압 민족주의 소수파에게 큰 타격이 아닐 수 없다.


영국의 청년층 또한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로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안 그래도 임시직 저임금 일자리에 비싼 등록금과 주거비로 인한 평생 채무노예로 굴러 떨어질 위기에 있는 청년들에게 그 동안 유럽으로 자유롭게 이동해서 일할 수 있던 권리마저 위협함으로써 그 나마 남아 있던 처지 개선의 여지도 봉쇄해 버린 것이다.


국민투표 결과가 가져온 당장의 악영향만으로도 ‘탈퇴운동’(Vote Leave) 진영의 핵심 주장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참주선동적인지가 폭로되었다. 탈퇴운동 진영의 장밋빛 선동과는 달리,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가 발표되자마자 전 세계에 걸쳐 수조 달러에 달하는 주식 가치 증발과 파운드화 급락, ‘네거티브’로 강등된 영국의 신용등급 전망 등은 브렉시트가 가져올 경제적 악영향에 대한 경고가 한낱 유언비어가 아니었음을 가리킨다. 이 상황은 정부 재정에 강력한 부정적 효과를 미칠 것이고, 보수당 정부는 이를 빌미로 올해 말쯤에는 훨씬 더 혹독한 긴축 및 공공서비스 감축 공세에 나설 것이다.


또한 탈퇴운동 진영은 광신적으로 ‘영국 주권 회수’ 캠페인을 펼쳤다. 그러나 자본주의 역사의 최근 단계에 와서는 어떤 민족국가도 경제적으로 독립적일 수 없으며 경제 ‘주권’을 사실상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객관적 현실이다. 모든 국가가 상호의존적이고 경제적으로 뗄 수 없이 얽혀 있다.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에 뒤이어 나타난 경제적 대혼란이 보여주는 것처럼 세계경제야말로 독립적이고 절대적인 글로벌 실체로서 민족국가에 우선하며 민족국가 위에 군림하고 있다. 금융 시장, 증권 채권 시장은 그 어떤 주권국가에 대해서도 자신의 의지를 강요할 수 있다는 사실은 탈퇴운동의 지도적 이데올로그들 스스로도 과거에 거듭 주장해 온 바이다. 

 

이들 탈퇴운동 진영과는 다른 각도에서지만, ‘좌파적 탈퇴’(Left Exit ; Lexit)를 주장한 일부 반자본주의 좌파들의 경우 영국의 탈퇴와 EU의 해체는 기업주들과 금융자본가들이 강력히 반대하는 걸로 봐서 좋은 일임에 틀림없다는 식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노동자계급은 대기업을 해체해서 소기업들로 쪼개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뒷걸음질 치는 것으로, 당장의 득실에서 보더라도 일자리를 잃게 하고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접근권을 축소시키며 물가 상승을 가져오는 등 당면 수준에서도 노동자 민중들에게 생존권적 손실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사회주의자와 노동자계급은 거대기업들의 사회화를 요구한다. 이들 모두를 단일한 단위로 통합시켜 이윤이 아닌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민주적 계획이 가능하도록 대기업의 몰수 국유화를 위해 투쟁한다.


EU가 고립된 자본주의 민족국가들로 해체 또는 와해되는 것은 국제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전진이 아니라 후퇴일 수밖에 없으며 결코 ‘좋은 일’일 수가 없다. 토대에서 진행되고 있는 경제통합 과정은 전진적인 추동력이다. 비민주적인 EU 정치기구들에 대해 반대하는 것과 통합된 초민족적 경제단위의 해체를 환영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노동자계급은 사회주의 유럽합중국의 기치 아래 정치 · 경제적 통합 과정의 선두에 서서 싸워야 하는 입장이다.


대자본은 세계화를 선호하지만 결코 민족국가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 때문에 탈퇴운동 진영의 정치인 보리스 존슨이나 미국 대통령 후보 도널드 트럼프 같은, 당장의 정치적 이득을 노리고 민족주의와 배외주의에 호소하는 극우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에게도 줄을 댄다. 오늘 전 세계적으로 반동적 참주선동가들이 대중의 불신과 원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기성정치권 엘리트들을 두들기면서 기세를 올리고 있다. 내수 지향 중소 사업주들 및 하층 중간계급 대중이 국제경제의 발전과 반대로 가고 있는 원초적 민족주의나 외국인 혐오 사상들이 널리 전파될 수 있는 대중적 기반을 이루고 있다. EU 탈퇴 캠페인을 주도해 온 영국독립당 같은 극우 세력의 경우도 바로 이 같은 사상에 체계적으로 호소하여 노동당의 주요 근거지인 북부 공업지역에 파고 들어가 이 당의 노동계급 기반을 공략한 사례이다.

 

2.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 : ‘탈퇴’ 승리의 요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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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브렉시트가 노동자계급에 ‘좋은 일’일 수가 없고 계급투쟁에 매우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 오는 반동적인 해악이라면 어째서 상당수 노동자들이 ‘탈퇴’에 찬성한 것인가? 습관적으로 보수당에 표를 찍고 노조에도 가입하지 않는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통상적으로 노동당에 표를 찍는 노동자들 중에서도 브렉시트에 찬성한 비율이 작지 않다. 이를 근거로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를 대도시의 코스모폴리탄(세계시민주의) 엘리트에 대한 노동자 서민들의 반란으로 묘사하는 논평들이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노동당의 핵심 기반인 잉글랜드 내륙 구 공업지대의 노동자들과 영세 소도시 서민들이 그 동안 런던 등 대도시의 세계화 지향 엘리트에 대해 품고 있던 반감과 분노가 이번에 ‘반란’으로 표출되었다는 평가이다. 그러나 이것은 탈퇴파 진영의 선봉대를 이루었던 극우 영국독립당과 반이민·반난민 인종주의적 증오를 부채질하는 데 앞장 선 억만장자 소유 일간지들의 데마고그에 놀아나는 평가이다. 실제 투표 구성을 보더라도 이러한 평가는 현실에 대한 총체적 왜곡이다. 양대 정당인 노동당과 보수당 모두 EU 잔류가 공식 입장인데, 노동당 투표자들은 약 65%가,  보수당 투표자들은 40%가 당의 공식 입장을 지지했다. 잔류 찬성 비율이 보수당 지지자들 보다 노동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훨씬 더 많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 투표자들의 유의미한 수가 이 반동적인 브렉시트 정책을 지지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는다. 여기에는 영국공산당(CPB)과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사회주의당(SP) 등이 렉시트 캠페인을 통해 브렉시트에 ‘좌파적’ 포장을 입혀준 것도 한 몫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CPB와 SP는 심지어 이민이 정말로 문제이고 폴란드 노동자들과의 경쟁이 실제로 임금을 끌어내리는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주장하는 위험한 불장난에 발을 들이기도 했다. CPB는 모종의 이민 통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SP의 국제 조직인 ‘노동자 인터내셔널 위원회’ CWI 는 국민투표 결과를 놓고 노동자계급의 위대한 승리를 선포하면서, 이 승리가 제레미 코빈의 총선 승리로 이어질 수 있게 하자고 제안하기까지 했다. SWP는 올바르게 ‘국경 개방’(Open Border) 요구를 내걸고 있었지만, 이제 열려 있던 국경을 폐쇄하는 브렉시트에 찬성하라고 노동자들에게 촉구했다! 국민투표 결과가 가져온 파장 속에서 SWP는 그들 “승리”의 자명한 결과(?) 때문에 반인종주의 캠페인을 새롭게 갱신해서 해야 할 필요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탈퇴’에 투표한 것은 EU에 남아 있는 것이 그들의 진정한 이익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나? 아니다. 또는 이민에 대한 그들의 공포가 정당한 것이었기 때문에 탈퇴에 투표한 것인가? 아니다. 공포는 현실인 것이 맞지만, 그 공포의 원인은 전적으로 상상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브렉시트 국민투표 과정에서 유행했던 “우리 조국의 자주성 되찾기”, “주권”, “독립” 같은 담론들에 설득력을 부여했는가? 한 마디로 주체적 힘의 상실, 즉 내 주변의 세상을 내가 만들어 가는 권능을 잃어버린 상황이 그러한 담론들에 중독성을 부여했다. 많은 노동자들이 한 때 가졌던 힘,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지니게 해 준 그 힘은 살아갈 만한 월급의 안정된 일자리, 주거에 대한 사회적 보장, 확대되는 공공서비스 같은 것으로부터 나왔다. 이 모든 것을 파괴한 것은 “유럽”이 아니라 영국 자본가계급이다. 민영화, 외주화, 구조조정, 신자유주의 등 그 모든 것의 선두에 서서 자본의 위기 전가를 위한 ‘노동자 죽이기’의 최첨단 기법을 개척한 영국 지배계급 말이다.


일자리와 노동조건을 지키기 위한 제대로 된 투쟁이 부재한 상황, 노동조합과 노동당이 이러한 투쟁을 만들 의지가 이미 오래 전부터 없다는 것이 확인된 상황,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 특히 실업자와 노년층 그리고 쇠락한 옛 공업도시의 노동자들, 주민들이 자신들의 황폐화된 공동체를 가져온 주범으로 지목한 “기성정치권(Establishment)", 즉 중앙 정치인들과 ‘전문가들’과 관료들에게 분개한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노동조합의 쇠락도 관련된 주요 요인이다. 현재 조합원 수는 1980년대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노동조합의 전투성 상실과 함께 이 문제는 점점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일자리 축소, 노동조건 저하, 복지 감축에 맞선 효과적인 단체행동의 경험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이절 패라지가 이끄는 영국 독립당의 극우 포퓰리즘 선동이 사람들에게 먹혀든 것도 이런 상황에서였다.


존슨 같은 엘리트 보수당 정치인이 할 수 없었던 것을 이들 패라지 같은 데마고그들은 할 수 있었다. 국민건강보험 기금의 고갈 위기, 아무리 기다려도 차례가 돌아오지 않는 공공주택 배정, 문 닫는 학교들, 저임금의 만연 등의 사회적 고통에 대해 이들이 좌파적으로 들리는 참주선동을 사용하여 이 모든 책임을 이주노동자들의 탓으로 돌리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번 브렉시트 국민투표로 확인된 셈이다.


또 하나의 요인은 EU에서 잇달아 터져 나온 위기들이다. 먼저 금융위기, 이어서 회원국들의 재정위기, 부채위기, 유로존의 약소 회원국들한테 강요된 긴축위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난해의 ‘난민위기’ 등, 이러한 EU의 위기들이 “유럽”에 대한 대중적 불신과 의혹을 가중시키는 데 기여했다. 유럽에 대해 스트레스를 느끼고 유럽을 멀리하고 싶은 이 같은 충동에 인종주의, 배외주의의 기름을 퍼붓고 불을 지른 것이 브렉시트 국민투표 과정에서 극우 포퓰리스트 참주선동이 한 일이다. 물론, 브렉시트 찬반 양 진영의 정치인들도 영국 자본주의가 2008년의 그 혹독한 위기를 발생시킨 주범이라는 사실을 투표자 대중들이 잊게 하는 데 일조했다. 위기 와중에서 임금과 복지를 대폭 삭감하고 긴축을 강요, 실시한 것은 EU가 아니라 영국 사장들이고 영국 정부들(보수당 정부와 노동당 정부 모두)이었다. 브뤼셀로부터의 어떠한 압력에도 완전히 자유로웠던 영국의 자본가계급, 영국의 자본가 국가가 바로 자본의 위기 전가를 위한 노동자 민중 죽이기의 주범이었다는 사실이 지금 망각되고 있는 것이다.

 

3. 유럽에서 일국적 운동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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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독립당 당수 나이젤 패라지


브렉시트가 이제 현실화 되는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은 어떠한 대안을 가지고 싸울 것인가? 2007-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뒤이은 장기 불황 속에서 유럽 각국의 지배계급은 ‘긴축’을 내걸고 과거 노동자들이 쟁취한 성과물들을 되빼앗기 위한 공격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유럽의 노동자들은 이 공격에 그냥 앉아서 당하지 않았다.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에서 강력한 저항운동이 전개되었고, 그리스에서 이 운동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유럽연합은 자본의 유럽이자 주요 제국주의 블록이면서, 동시에 가장 강력하고 가장 전투적인 노동자운동이 존재하는 계급투쟁 무대이기도 했다. 이 계급투쟁 무대는 고립된 영국에서와 비할 때 역관계가 확실히 노동자계급에게 유리한 무대이다.


영국을 비롯하여 전체 유럽에서 개량주의자들은 이미 오래 전에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포기했다. 그러나 ‘혁명적 좌파’를 자처했던 세력들, ‘반자본주의 좌파’는 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개량주의자들이 지배계급 분파들의 꽁무니를 좇고 그들의 정책을 추수하는 것처럼 ‘반자본주의 좌파’는 개량주의자들의 꽁무니를 좇고 있다. 누구의 꽁무니를, 어느 경향의 개량주의 꽁무니를 좇을 것인가를 선택하는 데서만 다를 뿐이다. ‘사회적 유럽’을 주창하는 개량주의자들을 추수하는 좌파들은 개량주의 프로그램에 기초하여 평화공존 상태로 모든 조류들을 포함하는 ‘범좌파 정당’ 건설을 지지했다.


유럽 좌파당들과 민중주의 세력들이 이러한 범좌파 정당 건설을 포기하자 다수의 ‘반자본주의 좌파’ 그룹들은 EU 탈퇴 쪽으로 이동했다. 개량주의자들이 EU 탈퇴가 케인스주의 경제정책을 통한 개량주의 프로그램의 실현을 용이하게 해줄 것이라고 주장하자 ‘반자본주의 좌파들’은 EU 탈퇴가 “사회주의로 가는 보다 용이한 길”이 되어 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에게 자본주의는 국제적 시스템이 아니라 민족국가들의 집합이며, 따라서 국제주의는 결국 일국 계급투쟁들의 집합일 뿐이다.


‘사회적 유럽’ 주창자들과 EU 탈퇴 주창자들은 두 가지 핵심 문제에서 많은 부분 일치를 보이고 있다. 양측 다 현실에서 개량주의 프로그램을 추수하고 있다. 또한 혁명적 권력 장악 프로그램을 위한 투쟁, 사회주의 유럽합중국 수립을 위한 투쟁은 현재로선 아직 일정에 오르지 않았다고 양측 다 똑같이 주장한다. 그들이 그러한 투쟁을 노골적으로 거부하지 않을 경우에조차도 사회주의 유럽을 위한 투쟁은 다소간에 먼 미래의 과제로 바라본다. 오직 EU를 개혁하는 프로그램만이, 또는 일국적 지형 위에서 더 나은 조건으로 투쟁하는 것만이 “현실적”이라고 주장한다.


지금 영국에서처럼 유럽 전체에서 반동적 민족주의의 성장을 허용하고 있는 최대의 요인은, 긴축을 끝장내고 반이민·반난민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일국 단위 노동자운동들이 보여 온 취약함과 무기력함이다. 자본주의가 2차 대전 이래 그 가장 심각한 공황과 침체의 시기로 들어간 상황에서 유럽의 노동자운동·좌파운동이 오히려 각국의 국경 내 일국적 운동으로 후퇴하다니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이러한 약점에 대한 예외가, 특히 그리스, 프랑스, 벨기에, 스페인, 포르투갈 등에서 중요하게 있었지만, 여기서들조차 일국적 한계로 인해 투쟁이 손상 받고, 전진하고 못하고 주저앉곤 했다. 필요한 것은 단순한 연대의 표시가 아니라, 각국 정부들이 강요하고 있는 긴축과 노동 ‘개혁’을 중단시키기 위한 전 유럽 노동자들의 통일된 공동투쟁이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EU 당국, 즉 EU 집행위원회, 중앙은행 등이 타격 받을 수 있지, 민족별 분할을 조장하는 것은 이것들과 투쟁하는 데서 절대적으로 틀린 방식이다.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고 끝으로 독일 정부들이 강행하고 있는 사회복지 삭감, 임금 감축, 의료·안전·노동시간에 대한 규제 ‘개혁’, 교육 및 의료 공공서비스 민영화 등을 중단시킬 수 있다면, 단지 ‘사회적’ 유럽이 아니라 사회주의 유럽을 위한 전체 대륙 규모 투쟁이 열릴 수 있다. 그러므로 영국에서 긴축과 반이민·반난민 공격, 그리고 브렉시트 이행 과정에서 노동권을 비롯한 사회적 권리들에 대한 공격 등에 맞선 반격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걸친 노동자 공동행동이 필요하다.


이 통일적인 공동행동은 단일한 ‘노동자 유럽’의 깃발을, 즉 난민들을 비롯하여 거기서 일하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국경이 활짝 열려 있는 사회주의 유럽합중국의 깃발을 들어 올려야 한다. 그러한 유럽은 일자리와 학교와 병원의 부족으로 청년들이 바다를 건너 유럽으로 가기 위해 목숨을 걸고 탈출해야 했던 나라들과 지역들에 모든 지원을 다할 것이다. 그 때 사람들의 자유로운 이동은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서로 만나서 돕고 싶은 진정으로 자발적인 소망이 될 것이다. 


모든 유럽 국가의 노동자들 간에 능동적인 연대는 긴축과 인종주의, 착취와 전쟁 없는 대륙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프랑스, 그리스에서와 같은 투쟁을 일국 단위의 국경을 넘어 전 유럽 혁명으로 확산시킴으로써 그러한 목표를 이룰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영국에서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계급이 브렉시트에 반대해야 하는 근본 이유이다.

 

 4. 브렉시트와 노동당 · 노동운동


이러한 대안적인 투쟁 목표와 과제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다루기로 하고, 그 전에 먼저 브렉시트를 둘러싼 논쟁에서 노동운동 및 좌파 제 세력이 취한 입장과 논리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41년 전에도 영국에서는 이번과 같은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있었다. 1975년 당시에 보수당은 압도적으로 유럽 잔류에 찬성하는 ‘유럽’ 당이었고, 노동당은 그 평당원들 대다수가 ‘유럽’에 적대적이었다. 당시 영국의 강력한 전투적 노조운동은 ‘유럽공동시장’에 대해서도 당연히 반대했다. 영국공산당(CPGB)과 노동당 트리뷴그룹 같은 사회주의적 좌파들과 노동조합 좌파 지도부들 모두가 이와 같은 입장을 취했다. 1200만 조합원과 전국적 규모의 전투적 현장위원회 운동이 있는 영국이, 더욱이 막 보수당 정부를 권좌에서 끌어내린 참인데 그런 영국이 무슨 유럽으로부터의 교훈 같은 게 필요하겠냐는 대단한 확신이 노동운동과 좌파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 반유럽주의는 이러한 확신의 일부였다. 게다가 당시 영국의 ‘1등 독식(First Past the Post)’ 선거제도로 인해 의회 다수파로서 노동당 정부가 (당시 대륙의 프랑스나 독일에서는 통례였던) 연립정부 구성의 필요를 느끼지 않고 단독으로 계속 연임할 수 있을 거라는 전망이 대세처럼 보였던 상황도 그러한 확신에 한몫 했다. 이러한 전망과 확신은 노동당을 비롯한 영국 노동운동 ‘주류’의 개량주의 전략을 강력히 뒷받침하는 근거로 동원되곤 했다.


오늘,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어 노동당과 모든 주요 노동조합들은 확고히 EU 잔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제 세가 극히 쪼그라든 공산당과 사회주의노동자당, 사회주의당, 그리고 철도해상운송노조 RMT 만이 과거 1975년 입장을 고수하여 ‘좌파적 탈퇴’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1975년 이래 영국은 (그 빅브라더 미국과 함께) 신자유주의의 본산이었다. 영국 지배계급은 민영화와 긴축정책의 개척자이자 선도적 실행자였다. 1975년에는 잔류든 탈퇴든 어느 쪽이 계급투쟁에 유리한 무대일 것이냐는 관점에서 볼 때 둘 사이에 아무 차이가 없는 동일한 조건이었다. 오늘 그 무대는 훨씬 넓고, 보다 강력한 동맹군들이 존재한다. 프랑스의 2016년 운동, 즉 프랑스 사회당 정부의 노동 ‘개혁’ 시도에 맞선 대대적인 노동자 민중의 저항운동이 오늘의 조건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 노동법 개악안은 설사 그것이 수정 완화 없이 통으로 통과된다 하더라도 영국의 현행 노동법과 비교한다면 그것의 가장 온건한 버전을 넘지 않을 것이다. 1980년대에 영국 노동운동이 겪은 전략적 패배 이후로 프랑스의 2016년 운동과 같은 대대적인 정치파업 운동은 영국 노조 지도부들한테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되어 있다.


노동당을 비롯한 영국 노동운동 ‘주류’가 친(親) EU 입장으로 바뀐 것은 1980년대 초중반의 노동자 투쟁들(자동차 노동자들, 철강 노동자들, 탄광 노동자들, 인쇄 노동자들, 항만 부두 노동자들의 투쟁들)이 패배하고서였다. 이때부터 그들에게 EU는 달리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전에 ‘사회주의’를 향한 영국 노동운동의 전진을 막아설 ‘사장들의 클럽’처럼 보이던 것이 이제는 대처의 신자유주의 공격 이전의 노동조건이 거기서는 아직 펄펄 살아 있는 곳으로, 나아가 그러한 대처리즘 이전 상태로 영국을 되돌려 줄 수도 있을 근거지 같은 것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1997년 토니 블레어가 총리가 되면서 보수당의 18년 집권을 끝내고 정권 교체를 이뤘지만, ‘제3의 길, 뉴 레이버(New Labour)’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대처리즘을 계승, 지속했다. 토니 블레어와 그 후임 뉴 레이버 총리들 하에서 노동당의 친 EU 입장은 바뀌지 않고 지속되어 왔지만, 더 이상 EU는 대처리즘 이전의 노동조건을 복구시키기 위한 거점으로서가 아니라 자본 세계화의 무대로서 의미가 부여되었다. 따라서 EU의 노동권 관련 일부 진보적 법조항들을 영국에 적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노동당 정부도 대처 이래의 보수당 정부가 하던 대로 영국 기업주들의 편에 서서 강경한 반대 입장을 취함으로써 영국은 계속 이 노동권 조항이 ‘면제’ 되는 국가로 남아 있었다.


수 만 명의 평당원과 지지자들의 열정적인 선거운동에 힘입어 예상을 깨고 노동당 대표로 지난해 선출된 노동당 좌파 제레미 코빈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EU 탈퇴 노선을 고수했는데 이제 ‘잔류’를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노동당의 ‘유럽 안의 영국’ 캠페인(잔류 캠페인)을 지지하게 되어서 “자랑스럽다”고 말했지만, 동시에 비판적 입장을 밝히는 것 또한 빼놓지 않았다.


“우리는 EU가 노동인민을 위해 작동할 수 있도록 진보적 개혁을 위한 전 유럽에 걸친 연대 연합 건설에 나설 결의가 되어 있다. 노동당은 EU가 21세기 유럽에서 무역과 협력을 위한 최상의 틀이라고 보고, 영국이 EU 회원국으로 계속 남아 있는 것을 지지한다. 또한 유럽의회의 일관된 인권 옹호 입장에 대해서도 물론 지지한다. 그러나 우리는 EU의 의사결정 체계가 EU 인민들에게 보다 더 책임지는 체계로 되도록 만들고, 일자리와 성장을 EU 정책의 핵심 의제로 올려놓음으로써 진정한 사회적 유럽 속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강화하고 민영화 압력을 끝장내기 위한 노력에 나서야 한다.”


코빈이 노동당 다수 우파의 친 EU 입장으로 빠져버리지 않으면서 기존 노동당 좌파의 브렉시트 노선을 폐기한 것은 올바른 방향이다. EU 탈퇴가 영국에서나 여타 유럽 나라들에서나 노동자들에게 전혀 득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본 것도 옳다. 또한 그가 EU에 급진적인 사회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도 옳다. 그러나 EU의 정치 기구가 개혁될 수 있다고 믿는 것,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유럽 경제의 올바른 발전을 계획할 수 있는 기구로, 노동자의 권리 보장과 환경 보호를 위한 기구로, 노동자계급이 이러한 과제들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기구로 탈바꿈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일국 개량주의 프로그램 못지않게 공상적이다.


이 과제들을 위해서는 혁명적 변화가 요구된다. 목표와 수단 모두에서 혁명적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그냥 ‘사회적’ 유럽(Social Europe)이 아니라 사회주의 유럽이라는 목표를 명확히 해야 한다. 또한 이 목표를 이룰 수단, 즉 전 유럽의 노동자들이 금융자본가들과 기업주들의 정치권력을 분쇄하기 위해 사용해야 할 수단이 무엇인지도 명확히 해야 한다.

 

5. 브렉시트와 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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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혁명적 좌파를 자임하는 세력들은 이러한 과제에 얼마나 부합하는가? 좌파의 양대 조직인 사회주의노동자당(SWP)과 사회주의당(SP)은 40여 년 전에 채택한 입장을 지금까지도 철석 같이 고수하고 있다. 두 조직의 탈퇴 입장은 그 내용에서 큰 차이가 없으므로 대표적으로 SWP의 탈퇴 입장을 검토해보자.


SWP는 조직의 리더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긴 논설로 브렉시트 찬성 캠페인에 착수했다. 그 글로 표현된 SWP 입장의 결정적인 문제점은 영국 지배계급의 문제가 모두 EU의 문제로 환원되고 있는 점이다. EU의 자본주의적·제국주의적 특징이라고 기술되어 있는 내용은 다 정확하며 틀린 지점 하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제시된 특징들 모두가 다름 아닌 영국에도 그대로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절 무시하고 있다. 정말이지, 공공서비스 민영화와 사회복지 감축 같은 정책을 EU가 채택하기 훨씬 전에 이미 선도적으로 실시한 것이 바로 마가릿 대처의 영국 아닌가. 대처 당시만 해도 아직 EU 기구들은 사회헌장(Social Charter) 통과에 애쓰던 중이었다. 대처 총리 하에서 영국은 그 헌장의 사회적 권리 조항들을 대부분 빼고 최소화시키기 위해 최대한의 압력을 행사하다가 나중에는 사회헌장 조인에서 빠져버렸다.


물론 EU도 자신의 사회적 ‘약속’을 2008년 대불황 이후 단계적으로 감축시켰다. 그럼에도 영국에 비해 유럽 대륙의 노동운동이 가진 더 큰 조직력과 투쟁력, 더 확대된 노동조합 권리들과 더 높은 전투성 때문에 아직은 EU 어느 나라에서도 영국에서처럼 사회적 권리들이 철저히 잠식당하지는 않았다. 영국의 자본가들이 지금도 계속해서 유럽의 사회적 권리들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나, 탈퇴운동(Vote Leave) 진영이 이 사회적 권리들의 폐지를 자신의 요구조항 일순위에 올려놓은 것이나 다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더욱이 EU와 그 기구들은 국제 자본의 유일 집행기관이 아니다. 세계은행(World Bank)과 IMF, WTO 등은 모두 국제 자본의 집행기관으로서 동일한 목적을 위해 복무하며, 영국이 EU에 남아 있든 떠나든 자본의 경호실장으로서 제 역할들을 멈추지 않고 계속 할 것이다. 그렇다면 브렉시트는 과연 어떤 방법으로 노동자계급을 위해 투쟁 조건을 더 낫게 해 줄 것인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자들에게는 이것이 잔류냐 탈퇴냐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다.


SWP는 브렉시트 캠페인이 이민자들을 겨냥한 인종주의와 배외주의를 확산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을 한편으로 인정하면서도 결국 대책 없이 이 위험을 부채질하고 있다. EU를 “그 출발부터 자본주의적인 프로젝트로서 미국 제국주의의 강력한 후원을 받고 있고, 문제 많은 그 자신의 신자유주의적 제국주의 버전을 발전시키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리고 이어서 “이로부터 명백한 결론은 EU를 거부하는 것이다. 잔류 지지자들은 이러한 분석을 논박하든지 아니면 자신의 입장을 폐기해야 한다”고 일갈한다.


그런데 이 얘기는 EU 이전에 영국 얘기 아닌가. 정확히 같은 내용이 다름 아닌 영국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이 점을 지적하는 것이 아마 가장 빠른 논박이리라! 영국은 그 출발부터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자본가들의 프로젝트였고, 미국의 후원 덕에 세계 강대국으로 살아남았으며, 미국 지배계급과 더불어 신자유주의를 고안해낸 원조이다. 그리고 의심할 바 없이 사회주의자들은 모두 그러한 영국을 ‘거부’한다. 그러나 지금 문제가 EU든 영국이든 자본가 국가를 ‘수락할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가 아니다. 지금 쟁점은 EU 잔류냐 탈퇴냐 중에 어느 쪽이 국내외의 계급투쟁에 상대적으로 더 유리할 것이냐 이다.


SWP는 영국이 EU에서 떨어져 나가야 하는 논리 근거를 전 유럽에 걸쳐 계급투쟁이 불균등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것에서 찾는다.


“전략적으로 볼 때 문제는 1980년대 이래, 특히 유로존 위기의 결과로 전 유럽 차원의 신자유주의 체제가 건설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분쇄하는 것은 일국적 수준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이 가장 높다. 전체 EU 수준에서 통합 조정된 운동에 의존하여 성공적인 저항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은 이 저항을 무한정 지연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불균등·결합 발전 과정을 놓고 볼 때 투쟁은 일국적 수준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가장 높고, 그러고 나서 일반화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변증법적으로 볼 때 국제주의가 전진하기 위해서는 일국적 수준에서 돌파가 먼저 있어야 한다.”


여기에 변증법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전체 EU 수준에서 통합 조정된 운동에 의존하여 성공적인 저항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전략이 선도적 일국 투쟁을 배제하는 전 유럽 동시다발 투쟁을 상정하는 전략인가? SWP는 마치 그 전략이 어느 일국에서 무언가가 성취될 수 있으려면 그 전에 먼저 전 유럽 수준의 운동이 동시적으로, 그리고 자생적으로 터져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구도를 그리는 전략인 것처럼 몰아간다. 반면에 일국 수준에서의 성공은 “일반화 될 수 있다”고 쉽게 단언한다.


물론, 예컨대 긴축에 맞선 투쟁이 다른 나라들에 앞서 한 나라에서 먼저 시작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한 나라 내에서도 그러한 투쟁이 다른 지역에 앞서 어느 한 지역에서 먼저 시작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나 지금 걸려 있는 문제는, 그러한 투쟁이 다른 나라들로 보다 쉽게 확산되고 일반화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이 나라들이 모두 같은 경제적·법제도적 틀 안에 있는 것이 더 유리한지, 아니면 각 나라들이 투표를 해서 그러한 틀에서 분리해 나오는 것이 더 유리한지의 문제이다. 


SWP는 이 점을 깨닫지 못하고 ‘일국에서의’ 계급투쟁을 위한 전략적 처방을 내놓는다. 영국 노동자들은 EU에서보다 “독립적인” 영국에서 더 잘 그들의 이익을 증진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그러나 계급투쟁의 최근 역사는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지난 세기에 계급투쟁의 고조기들(1917~21년, 1930년대 중반,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은 거의 한 결 같이 투쟁의 이념과 방법들이 국제적으로 교차하면서 서로를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방식으로 일어났다. 한편, 영국의 거대한 계급투쟁들(1926년, 1984~85년)은 대륙과 별개로 떨어져서 일어났다. 이것은 맞다. 그러나 그 투쟁들은 또한 거대한 패배를 가져왔다.


SWP는 2012~15년에 그리스가 EU 트로이카에 반기를 들고 대항한 사례를 인용하면서 이것이 EU 탈퇴와 필연적으로 결부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고의적인 혼동이다. 시리자(급진좌파연합) 정부가 좌파 반긴축 정부로서 국가부채 지불 중단, 복지 삭감 중단을 밀고 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절박한 필요를 마치 브렉시트처럼 ‘자발적으로’ 스스로 원해서 하는, 협상을 통한 탈퇴의 과정인 양 멋대로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시리자 정부는 트로이카에 반항했어야 하지만, 그러나 이 반항은 EU로부터 그리스를 축출하려는 기도에 대한 능동적인 반대 투쟁과 병행하는 것이었어야 했다. 그리스의 축출은 사실상 그리스를 경제봉쇄 하에 몰아넣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반대로 그리스가 ‘그렉시트’를 단행했다면, 이 경제봉쇄의 정치적 책임을 EU 지배자들한테가 아닌 다른 애먼 데로 돌려놓는, 그리스가 스스로 책임을 옴팡 뒤집어쓰는 꼴이 될 것이었다.


단지 그리스에서만이 아니라 EU 전역에서 긴축을 종식시키는 데 초점을 맞춰 전 유럽 노동자들로부터의 연대를 호소하는 투쟁으로 나아갔어야 했고, 이것은 그리스 노동운동을 전 대륙 규모 저항운동의 선봉에 가져다 놓았을 것이다. 이러한 국제적 연대를 위한 슬로건에는 자본가들이 이 위기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는 요구가 포함되어야 한다. 국제적으로 통합 조정되고 상호 상승하는 노동자 행동에 의해 이 요구가 실행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국제적 노동자 공동행동 속에서라면 보다 강력하고 전투적인 노동운동이 성취한 사례가 보다 약한 노동운동 쪽으로 급속히 확산되는 것이 능히 가능했을 것이다.


SWP는 EU가 그리스 인민들을 협박하고 고통으로 내몬 것을 두고 EU의 제국주의적 본질이 드러난 증거라고 지적한다. 이것 또한 맞는 얘기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EU를 지배하는 국가들은 어떠한가? 영국을 포함하여 독일, 프랑스 제국주의들은 EU 제국주의와 별개인가? 갚을 수 없는 부채의 덫 속으로 그리스를 몰아넣은 것이 바로 이들 국가의 은행들, 금융자본가들, 신용평가기관들이 아닌가. 남유럽에 대한 이들 착취자들의 지배는 만약 EU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덜 제국주의적이었을까? 영국 제국주의, 독일 제국주의, 프랑스 제국주의는 EU 이전에도 존재했고, 앞으로도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마찬가지 경우로, 신자유주의는 EU가 없었다면 보다 질적으로 약했을까? 


EU를 탈퇴해도 미국과 초국적 기구들과 글로벌 금융시장은 제 자리에서 그대로 변함없이 동일하게 움직일 것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민족국가들의 현실적 독자성은 ‘탈퇴’를 통해 조금도 나아질 것이 없으며 민족국가 내에서의 계급투쟁을 위한 조건도 더 나아질 게 없다.


결국 ‘브렉시트’는 유럽 노동자들의 통일된 공동투쟁을 위한 객관적 토대(서로 연동된 경제, 낮아진 국경 장벽, 공통의 법제도적 틀)를 축소시키는 결과만 가져올 것이다. “전 유럽 규모의 신자유주의 체제”는 그에 대한 전 유럽 규모의 저항운동을 요구하는 것이지, 이러한 저항을 위한 기회를 끊어놓을 일국 국경 뒤로의 후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6. 유럽 계급투쟁 : 전망과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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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와 함께 서로 경쟁하는 독일·영국·프랑스 제국주의들 간의 끊임없는 긴장과 대립 갈등으로 EU 위기, 유럽 위기는 더욱 심화할 것이고, 유럽의 불안정은 더 커질 것이며, EU 국가들 간에 뿐만 아니라 국가 내부의 모순도 첨예화할 것이다.


이른바 ‘유럽 프로젝트의 위기’, 즉 모든 나라에서 긴축의 지속과 정치·경제적으로 EU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독일의 공세적 행보로 인해 유럽 각 지배계급들 내에 민족주의적 해결책을 택하는 분파들이 발생하고 있다. 그것을 통해 이들 지배계급 분파는 소부르주아지와 중간층의 지지를 끌어내고 있다. 많은 나라에서 민족주의 세력, 우익 포퓰리즘 세력, 인종주의 세력, 극우 또는 파시스트 세력이 부상하고 있다. 이들은 난민들이나 그리스 등 남유럽 인민들을 위해서는 한 푼도 내 줄 수 없다고 한다. 프랑스의 국민전선 같은 세력은 스스로를 ‘프랑스 노동자’의 수호자로 자처하는 데마고그를 펼친다. 이민자들, 특히 무슬림 인들에 대한 인종주의적 공격이 이 모든 세력들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핵심 특징이다. 이들 정당 및 운동들 다수가 유럽 이민자들을 공격하는 선봉대로 나서고 있는데, 언제든 노동자계급에 대해서도 경제위기의 희생양으로 삼기 위한 공격 선봉대로 나설 것이다.


EU에서의 현 정치 위기는 유럽의 만성적 정체, 불균등의 증대, 불황의 도래 등으로 인해 훨씬 더 첨예해질 것이다. 독일 및 독일의 경제 사이클에 매여 있는 나라들은 EU/유로존에서 경제적 지위를 강화시킬 수 있었는데 이 반대급부로 남유럽 및 동유럽의 많은 나라들에서 만성적인 사회적·경제적 쇠퇴를 가져왔다.


독일 제국주의와 영국 제국주의는 산업 또는 금융에서 아직 국제적 우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역사적 강대국들 중 프랑스 제국주의(이탈리아와 스페인은 말할 것도 없고)는 EU의 경제위기에 의해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수 십 년 동안 프랑스 정부는 독일의 대등한 ‘파트너’로 행세했지만, 이제는 ‘대등함’을 주장하는 것조차 어렵다고 보고 있다. 이제 프랑스 지배계급은 잃어버린 지반을 벌충하고자 프랑스 노동자들에게 독일의 ‘어젠다 2010’ 같은 노동 ‘개혁’을 강요하고 있다. 만일 이 노동 개악안을 막지 못하면, 프랑스 노동자계급에게 전략적 패배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프랑스 자본주의를 부활시킬지는 의문이다.


현 위기는 유럽 사민주의 당들이 주로 내걸었던 ‘사회적 유럽’ 계획이 공허한 깃발로 전락했음을 드러냈다. 이른바 유럽연합의 ‘가치들’도 마찬가지다. 난민 위기 동안 메르켈, 융커, 슐츠가 저 ‘유럽적 가치’라는 이름으로 다른 나라 지도자들에게 호소한 것들은 모두 노골적인 경멸로 거부당했다. 독일의 힘의 한계뿐만 아니라 유럽연합의 이데올로기적 위기를 또한 드러낸 것이다.


정치위기가 얼마나 첨예한 상황인지 이제 경제위기에 의해 한층 더 부각될 것이다. 최근에 경제위기는 남유럽을 타격하여 대대적인 저항과 격변을 낳았다. 이제 그것은 또한 프랑스, 독일, 영국 등 핵심 유럽 나라들에 도달하고 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지만. 다가오는 경제적 대혼란은 유럽 위기에 기름을 부을 것이다.


명백하게도 유럽 정부들 간의 분열 및 각국 지배계급 내의 모순의 발현으로 인해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인민에 의한 공동의 반격이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관료 주도의 노동조합 및 대중적 개량주의 정당들(사민주의나 스탈린주의 전통의 정당들)이 부르주아 지배를 위한 안정화 요소로 기능하면서 이러한 반격의 기회가 계속 유실되고 있다.  


따라서 2007-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의 기간과는 달리, 현재의 위기로부터 득세하고 있는 것은 이제 반동적, 민족주의적, 인종주의적 세력들이다. 이것은 지난 시기에 겪은 중요한 패배들의 결과이다. 또한 ‘전통적’ 노동운동의 지속적인 쇠퇴의 결과이자, 노동조합운동의 약화 및 권위 실추의 결과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역사적으로 노동자계급에 의존하고 있는 당들, 대중적 개량주의 당들의 퇴락의 결과이다.


이로써 유럽 노동자계급은 약화된 지위로 그리고 ‘유럽 세력’으로서는 거의 마비된 상태에서 현 위기를 맞고 있다. 물론, 그리스에서 연금 개혁에 맞선 방어적 투쟁이 지속되고 있지만, 그 투쟁은 옥시 Oxi 의 배신 및 제2차 시리자 정부의 취임으로 그리스 노동자계급이 겪은 전략적 패배 속에서 수행되고 있는 한계를 안고 있다.


이 그리스에서의 패배는 유럽의 현 노동자계급 지도부들이 벌인 일련의 배신의 고점이었다. 시리자 지도부가 다른 나라 개량주의자들보다 특히 더 나빠서가 아니라, 시리자의 부상, 그리고 그와 함께 열렸던 준혁명적 정세가 권력의 문제, 노동자정부의 문제를 제기했고, 위기에 대한 혁명적 해결을 제기했기 때문이었다. 이 패배는 그리스에서만이 아니라 유럽 전체적으로 대대적인 반동적 귀결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 패배는 새로운 계급투쟁 분출이 다음 시기에 배제된다는 뜻은 아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새로운 공격 물결이 2017년 대선 후에 예상되고 있는데, 이것은 다시 대규모 저항운동을 촉발시킬 것이다. 이것은 이미 현재 올랑드 정부의 노동 ‘개혁’에 맞선 운동 속에서 부분적으로 현실이 되고 있다. 이 운동은 계속 확대되고 있고, 청년층과 노동자계급 간의 공동투쟁의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동시에 개량주의 지도부들에 의한 배신과 사보타지가 다시 노동자계급의 자신감과 투쟁력을 갉아먹을 수도 있다.


유럽 위기가 지속하는 동안 내내 관료적으로 통제된 노동조합과 대중적 개량주의 사민당들은 계속 우향우 해왔다. 프랑스에서 올랑드 사회당 정부처럼 모종의 도전을 약속하고 출범했을 때조차도 그들은 급속히 지배계급에 투항하여 자신의 노동계급 기반을 배신했다.


현 위기 하에서 개량주의 지도부들은 ‘자국’ 정부, 자국 부르주아지와의 동맹을 추구했다. 모든 주요 정치 문제들에서 그들은 반대투쟁을 수행하길 거절했다. 증대되고 있는 제국주의적 개입과 군사주의에 직면하여 그들은 잘해야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들 대부분은 나토를 지지했고, 중동, 아프리카, 우크라이나에 대한 ‘자국’ 국가의 개입을 지지했다. 그들의 소수파는 평화주의적 반대 입장을 취했지만, 어떠한 대중운동 조직화도 없었다. 정말이지 ‘테러와의 전쟁’ 당시 그들은 민주적 권리의 유린을 지지했고, 반무슬림 인종주의에 공모했으며, 자국 지배계급과의 ‘신성’ 동맹을 체결했다. 심지어는 최근 프랑스에서처럼 테러 사태를 빌미로 한 계엄령 선포를 지지하기까지 했다. ‘난민 위기’ 동안 그들은 모든 이민자들, 모든 난민들과의 연대에 나서서 유럽 국경 장벽을 허물어야 할 판에 오히려 메르켈의 ‘통제된’ 이민 정책을 지지했고 심지어 오스트리아 사민당 정부처럼 국경 봉쇄의 선봉으로 나서기까지 했다.


노동운동과 사민주의 당들의 사회배외주의가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인민을 더 한층 분열시키고 있다. 난민들, 이주 노동자들, 청년들이 그 첫 희생자이다. 영국 정부, 또는 독일 정부, 또는 프랑스 정부가 ‘먼 곳에 있는’ EU의 브뤼셀 관료들에 비해 어쨌든 차악이라는 착각에 빠져 자기 운명을 ‘자국’ 자본의 운명에 붙들어 매어놓은 민족주의적 해결책으로 노동대중들이 빠져들도록 사실상 부추기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제레미 코빈이 영국 노동당의 대표로 선출된 것은 이러한 추세를 거스르는 중요한 예외였다. 수 십 만 명의 당원 및 지지자들이 당을 좌지우지해 온 우파 당관료들 및 의원들을 패퇴시켰다. 그러나 이조차도 당의 우파 및 영국 부르주아지와의 단호한 단절 없이는, 그리고 당 관료 기구의 지배를 극복하지 못하고서는 단지 일시적인 승리로 그칠 것이다.


시리자의 배신, 스페인에서 좌파 민중주의 정당 포데모스의 우향우, 그리고 유럽 좌파당들의 갈지자 행보는 개량주의와 케인스주의가 어디서나 노동자계급에게 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들의 핵심 슬로건은 ‘사회적 유럽, 민주적 유럽, 생태적 유럽, 페미니즘적 유럽, 반인종주의적 유럽’이다. 달리 말하면, 금융자본의 지배를 소위 ‘봉쇄’할 것이라는 사회적 시장에 기초하여 개혁된 유럽연합이 그들의 기치이다. 이 정책의 파산은 최근에 수백만 사람들이 목도했다. 오직 소수의 개량주의자들, 또는 시리자정부의 바루파키스 같은 ‘괴짜 마르크스주의자들’만이 이 프로그램을 부활시켜 죽은 시체에 새 생명을 불어넣으려 한다.


역설적으로 유럽 개량주의의 주류는 다른 시체, 이미 오래 전에 매장된 ‘독립적인 민족국가’라는 시체에서 구원을 찾고 있다. “자본주의 EU를 개혁하는 것이 유효하지 않다면, 왜 우리가 우리 ‘자국 국가’를 재장악해선 안 된다는 것인가?” 사회주의 노동자계급은 어느 민족이든 유럽연합을 탈퇴할 권리를 인정하고 방어할 것이지만(주창하지는 않더라도), 또 EU가 개혁될 수 없음을 인정하지만, 다수의 ‘독립적인’ 자본주의 국가들로 회귀하는 것이 대안이라는 공상적이고 반동적인 생각을 거부한다. ‘독립적인’ 민족국가 하에 ‘독립적인’ 민족 통화와 은행을 갖는, 그리고 국경 통제를 하고 대륙 전체적으로 이동의 자유를 폐지하는 이 모든 조치들은 철저히 반동적이고, 전 유럽에 걸쳐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인민의 통일된 공동투쟁에 더 한 층의 장애물을 놓을 것이다.


자본주의 EU에 대한 이러한 반동적인 대답에 대응하여 노동자계급은 유럽 전역에 민주적·사회적 권리의 확장을 위한, 국경 개방과 긴축 폐기를 위한 공동의 투쟁으로, 전쟁과 제국주의적 개입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맞불을 놓아야 한다. 통일된 전 유럽 규모의 행동을 촉구하고, 노동조합과 노동자 대중정당들에게 ‘자국’ 부르주아지와 단절하고, 위와 같은 투쟁들에 수백만 조합원, 당원들을 동원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일단 그 같은 투쟁이 대중파업과 점거 등의 형태로 대중적 성격을 띠게 되면 그 투쟁들은 권력의 문제를 다시 일정에 올려놓을 것이다. 2015년 중반까지 그리스에서처럼 다시 한 번 노동자정부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2014~15년 그리스의 준혁명적 상황은 지배계급과 단절하여 노동자 민중들을 위한 비상 프로그램에 나서는 정부를 요구하였다. 노동자 통제 하에 대기업과 은행에 대한 몰수 국유화를 단행하고 인민의 필요에 부응하는 민주적 계획을 실시하는 등 비상 프로그램의 실행에 나서는 정부 말이다. 이러한 노동자정부는 오직 노동자평의회 같은 소비에트 유형의 투쟁기관들에 바탕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그리스 계급투쟁은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 같은 혁명적 프로그램은 한 나라에서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독일 경제도 다른 유럽 나라들과의 고리가 끊어진다면 엄청난 경제 파탄과 혼란이 상황을 압도해 버릴 것이다. 이 상황에서 고립되고 봉쇄된 일국 노동자정부는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유럽 노동자계급은 대륙을 크고 작은 자본주의 민족국가들을 얼기설기 엮어놓은 모자이크 같은 것으로 돌려놓는 것에서는 어떠한 대안도 찾을 수 없다. 반대로 노동자계급은, 그리고 한 나라에서 수립되는 그 어느 노동자정부든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전체 유럽을 재조직하는 투쟁에 나서야 한다. 이것은 전체 대륙을 ‘노동자 유럽’의 깃발 아래 하나로 단결시키고 사회주의 유럽합중국을 위한 투쟁으로 나아가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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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4 12:00 2016/10/04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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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16/07/04 13:06

[간담회] "위장도급 분쇄! 정규직 전환 쟁취!" "투쟁의 원칙과 전망에 대하여"

- 동양시멘트지부 투쟁 승리를 위한 간담회

삼척에 소재한 삼표동양시멘트의 사내하청노동자들은 20년 넘게 위장도급으로 옥외광산에서 석회석을 발파·채굴하는 위험한 작업을 하면서도 정규직의 절반도 못되는 임금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을 벗어나고자 동양시멘트 하청노동자들은 2014년 5월 17일 강원영동지역노조에 집단으로 가입하여 동양시멘트지부를 결성했다. 노조 건설 이후 노동부에 위장도급 진정을 내어 2개 위장도급 업체 250여 명의 노동자들이 작년 2월 모두 위장도급 판정을 받았고, ‘입사 때부터 정규직’이라는 묵시적 근로계약관계도 인정받았다. 동양시멘트는 곧바로 2개 위장도급 업체를 계약해지하는 방식으로 101명의 하청노동자들을 부당해고했다. 

2015년 8월 해고자들이 일하던 49광구에서 선전전 도중 사측과 사소한 충돌이 벌어져 지부장, 총무차장 총 2인이 구속되었다. 그 사이 삼표가 동양시멘트를 인수했고 남은 조합원들은 삼표 본사 앞에 농성장을 꾸리고 상경투쟁과 지역투쟁을 병행하며 힘겹게 투쟁했다. 그러나 삼표 자본은 자회사로 고용해준다고 쓰레기 안을 제시하며 조합원들을 흔들었다. 중앙노동위원회에서 부당노동행위, 부당해고를 인정받았지만, 삼표 자본의 쓰레기 안을 받고 27명이 노조를 집단 탈퇴하고 회사로 복귀했다. 실제로는 20% 임금을 더 받고 하청업체로 다시 돌아간 것이었다. 그마저도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투쟁하는 조합원수는 23명으로 줄었다.

2016년 1월 김경래 수석부지부장을 비롯한 조합원 5명이 추가로 법정 구속되었다. 같은 혐의로 기소된 조합 탈퇴자는 집행유예, 벌금 판결을 받고 투쟁하는 노동자만 노린 노골적인 사법탄압이었다. 남은 조합원들은 이후에도 계속 투쟁을 이어갔고, 4월 26일 7명의 조합원들은 전원 석방되었다. <붉은글씨>는 동양시멘트 투쟁이 500일에 다가가고 있는 시점에서 이 투쟁의 승리를 위해 김경래 수석부지부장과 연대 동지들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참석 

김경래 (민주노총 강원영동지역노동조합 동양시멘트지부 수석부지부장)
조한경 (민주노총 강원지역본부 사무처장)
강종숙 (학습지노조 재능교육 투쟁승리를 위한 지원대책위원회
이경문 (사회자, 붉은글씨 회원)
신정현, 한송우 (연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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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자: 동양시멘트지부가 세워진지도 벌써 2년이 지났습니다. 민주노조를 건설해야겠다고 다짐한 계기가 있었나요?

김경래: 꼭 민주노조라기보다도, 노동조합이 앞으로 계속 민주노조로 남아있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습니다.

사회자: 민주노조를 건설하고 나서 김경래 동지의 삶에서 변화한 것은 무엇인가요? 민주노조 활동에서 배우고 느끼는 점이 어떤 것인가요? 

김경래: 노동조합 하면서 달라진 게 있지요. 그동안 살아왔던 역사관과 노동자의 역사관이 부딪치면서 많이 달라졌어요.

사회자: 위장도급, 묵시적 근로계약관계 판정을 받았을 때의 상황과 느낌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세요. 특히 강종숙 동지는 특수고용노동자로서 이를 바라보는 느낌이 남다르실 것 같은데요.

김경래: 그 당시에는 기분이 좋았어요. 며칠 동안 기뻤습니다. 하지만 법에 명시되어있다고 내치는 이상한 나라에 살다 보니 참 답답합니다.


강종숙: ‘중규직’, ‘무기계약직’이란 말이 코스콤 비정규직 투쟁에서 처음 나왔고, 그 이후로 그게 ‘선례’가 되면서 저 정도는 싸워야 잘되면 무기계약직이고 주동자는 복직되지 못하는 이런 것들이 일종의 ‘선’이 돼 버린 것 같아요. 그 이후는 말할 것도 없이 더 비참했습니다. 계속 밀리고 지면서 지도부는 싸울 의사가 없었고, 말로는 비정규직 철폐라고 하면서 뒤에 가서는 비정규직 ‘차별 철폐’였다는 말이 비정규직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 입에서조차 노골적으로 나왔고 때로는 ‘비정규직 철폐가 현실적으로 가능한 얘기냐?’라고 비아냥거리는 자들도 많았죠. 최근 예를 보면 현대차 비정규직을 볼 수 있는데, 대법원 확정판결까지 나와도 자본이 버티면 우리 내부에서 슬금슬금, 좀 지나면 아주 노골적으로 자본의 앞잡이가 되어서, 온갖 추악한 짓을 해도 민주노총 내부에서 아무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거기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탄압받고 배제되는 그런 지경을 쭉 목격하게 됩니다. 그런 것을 바라볼수록 특수고용직이 노동자로 인정받는 것이 더욱 멀어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쨌든 ‘노동자’인 비정규직도 김경래 동지가 말씀하듯이, 중노위에서 다 승리해도 자본이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고, 더 큰 문제는 무시하는 과정에서 우리 내부에서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노동자들 등에 칼을 꽂아도 그게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는 겁니다. 그나마 동양은 칼 꽂고 가버렸으니 어찌 보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투쟁도 그랬고 현대차비정규직도 그랬고 등에 칼 꽂는 것뿐만 아니라 난도질을 해도 민주노총이라는 우산 아래서 버젓이 완장 차고 활보할 수 있는 지경까지 온 것이 우리 운동에서 가장 큰 문제라고 봅니다.

 

# 동양시멘트지부 투쟁 전개 과정
 

사회자: 2015년 11월 중앙노동위원회의 부당노동행위, 부당해고 판정을 받은 직후, 조합원들이 대거 이탈하였을 때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 해주세요.

김경래: 2015년 7월 즈음이었어요. 노조 만들고 투쟁하기 전 생각들이 많이 남아 있었고, 민주노조가 어떤 것인지 충분히 공부하지 못하고 그냥 정규직만 되면 된다는 상황이었습니다. ‘민주노조 상관없다. 정규직만 되면 된다. 돈만 더 받고 복직해야겠다.’ 이런 얘기하면서 한국노총에 갈 수도 있다는 얘기도 있었고요. 거기서 힘을 모으지 못하고 노동조합의 어떤 목표를 정확히 하지 못하고, 분위기에 타서 다 숨기고 있었던 것이지요. 저도 그 당시에, 7월에 갈등을 많이 느꼈습니다. 어쨌든 나도 지도부였지만 그런 생각들이 보이지 않게 작용했죠. 


2015년 8월에 상경투쟁을 시작하면서 사측이랑 교섭을 시작했습니다.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눴고, 그 과정에서 ‘자회사 복직’ 쓰레기 안이 나온 것이죠. 교섭 과정에서 회사는 노동조합 내부의 의견 차이를 간파했고, 서로의 생각이 어떤지 알고 있으니 더 이상 교섭이 안 되었던 거죠. 

제가 볼 때는 조합원 동지들은 교섭에 의존하는 측면이 강했습니다. 평소에 안 나오다가 교섭 때면 나오고, 그런 상황을 제가 반대했지요. 그 과정에서 사측으로 넘어간 사람들이 지능적으로 총회 소집을 요구하면서 민주노조 깃발을 가져가려고 했었어요. 지부장이 감옥에 가있는 상황에서 제가 강력히 반대했고, 완강히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사측으로 넘어간 후배들한테 맞기도 하면서요. 하여튼 민주노조 깃발 지키는 것이 되게 힘듭니다.


조한경: 사실 집단탈퇴와 관련해서 탈퇴했던 사람들의 이해관계는 당시 중앙노동위원회의 부당노동행위, 부당해고 판정 전에도 계속 있었지요. 노동조합을 설립하게 된 취지라든가 이해관계가 약간 차이들이 있었죠. 그게 지도부에서 나타난 것이 지역노조위원장 탈퇴, 사퇴였고, 이런 과정에서 두 가지 부분들이 대립점이 있었습니다. 하청을 인정하고, 하청업체와 교섭하면서 임금인상과 정규직에 비등한 임금 인상과 노동조합 활동을 계속 유지해 나가자는 입장들이 있었고요. 그와 반대로 불법파견 문제를 제기하면서 직접 고용쟁취 투쟁들을 벌어 나가야 한다, 그다음에 그런 소지들이 시멘트업계에서는 노골적으로 있었던 관행이라 현장에서 다분히 정리된 뒤에 투쟁을 하자, 그런 부분들이 이미 노동조합이 설립된 2014년 5월 17일 이후부터 내부 다툼들이 있었던 부분들이고요. 여기에 매각 단계와 해고되는 상황들이 맞물리면서 집단 탈퇴 전에도 이미 대다수 조합원 사이에는 직접고용, 불법 위장도급 철폐투쟁을 매개로 실리를 챙겨야 한다는 입장들이 노골적으로 퍼져 있었습니다. 회사에서는 중노위에서 노동조합이 이길 것이 확실하다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노위 이후 자회사 안을 던짐으로써 노골적으로 갈등이 드러나게 된 것이죠. 전부터 그런 갈등은 있었죠.


사실은 두 가지 문제가 고민이 되요. 노동조합 운동 일반이 노동조건 개선, 임금인상과 같은 투쟁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흐름들이 있는데 과연 이것이 근본적으로 노동자들의 삶을 본질적으로 바꿀 수 있는 부분들인가? 그리고 ‘정규직 전환’ 문제도 정규직이 된다하더라도 임금 노예로 계속 살아가야 하는데 그게 최종목표가 될 수 있는가? 이런 것에 대해 전체 운동 차원에서 많은 고민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노동조합 설립 이후 노동조합 활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이 있어야 할 것이고, 두 번째는 김경래 동지가 얘기했듯이, 사측으로 넘어간 사람들이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이 아니라 총회를 소집하자고 요구를 해왔었어요. 왜냐하면 노동조합의 의결 정족수 이상인 과반수가 서명을 해서 총회소집을 요구해서 노동조합의 투쟁 기조를 바꾸고 그에 따라 안을 받자고 했었어요. 수석부지부장이 총회소집에 대해 완강하게 거부하고 내부에서 투쟁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만약에 그러지 않았다면 총회를 소집해서 과반수가 투쟁 기조를 바꾸고 자회사 쓰레기 안을 받아들였으면, 사실 조합원들의 이탈은 없었을 수도 있었지만 지금의 투쟁 또한 있을 수 없었겠지요.

고민되는 것은 노조 내의 민주주의가 정확하게 원칙과 계급적 입장을 관철해 나가지 못하는 부분들로 작용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계속 수용해야 하느냐 고민이 그 이후에 생기기 시작했어요. 다수결 그 자체가 민주주의는 아니잖아요. 아무튼, 이탈은 아까 강종숙 동지가 얘기했지만 사측으로 넘어간 사람들이 끝까지 노조 내부에서 총회소집을 요구하고 기조 변화를 요구하고 투쟁을 접을 것을 요구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고 차라리 탈퇴하고 나간 것이 현재 투쟁에 있어서는 그나마 다행이지요. 내부에는 ‘임금 받고 그만두자’는 주장이  끊임없이 존재하고 있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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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종숙: 노조민주주의 관련해서 학습지노조 재능교육 투쟁에서도 똑같이 나타났던 상황인데, 재능교육은 특수한 경우죠. 우리는 노동조합이 10년 이상 가까이 지속되었던 상황이고 동양은 없었던 건데, 동양은 그래서 그 측면에서 자유로웠던 것 같아요. 노동조합 민주주의라는 것을 다수결로만 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가들의 이데올로기만이 이길 수밖에 없어요.

재능교육 같은 경우도 2007년 투쟁 시작할 때 어쨌든 공식 의결단위 절차를 다 거쳤어요. 중앙위원회 열어서 표결까지 가서 싸웠는데 우리 쪽이 졌지요. 표로는 게임도 안 됐어요. 재능교육지부 총회에 부쳐서 당시 이현숙 집행부의 부정투표가 있었지만 어쨌든 우리가 졌어요. 정상적인 선거를 했으면 질 수가 없었는데, 저들은 나름의 협박도 하고 ‘우리는 안 싸울 것이니, 반대표 던진 너희들이 나가 싸워라.’ 라고 했어요. 그래서 나타난 결과는 우리가 졌어요. 그리고 규약에 쓰여 있는 대로 중앙위원회에서 승인이 났고. 그것을 막아 나선 것이 우리였던 것이죠. 당시 저는 중앙위원의 일원임에도 불구하고 반기를 들었습니다. 당시 재능지부 현장에 있던 조합원들이랑 제가 대표자로 있는 학습지노조 서울경기남부지역본부 전체 운영위원회를 열어서 우리 본부는 싸운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학습지노조와 상급단체인 서비스연맹에서는 우리를 인정하지 않는 상황이 됐죠.


이게 돌이켜보면 ‘민주노조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과거 한국노총이 장악하고 있는 어용노조들 내부에서는 표결은 어림도 없었죠. 물론 87년에 폭발적으로 일어났던 노동조합들에서는 달랐겠지만, 그렇지 않은 노조들은 집단적으로 모여 있는 어용세력들 때문에 아무 방법도 없었고, 민주노조로 가려고 하면 잡아서 집단린치하고 산에 끌고 가고 … 이렇게 지난한 과정에서 핵심은, 노동자계급을 위한 투쟁원칙 이런 것이 딱 성문화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투쟁의 중요한 고비마다 ‘원칙’이 과연 무엇인가 실천적으로 입증되어 왔던 것 같아요. 동양의 경우도 그 당시에 사측으로 넘어간 사람들이 총회를 요구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총회를 거부하는 것이 맞다’고 봤습니다. 설사 총회가 열리더라도 분리해서 싸우면 된다.

우리는 일방적이었죠. ‘8대2, 9대1’ 이 수준이었는데도 싸웠어요. 노조민주주의는 절대로 다수결이 아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조기구 자체가 보수화되고 관료화되는 상황에서 다수결로는 이길 수 없는 구조가 점점 더 심화될 것이다. 그럼 결국 ‘투쟁파’들이 감수하고 싸워야죠. 대가는 크죠. 자본으로부터의 봉쇄, 국가기관에 의한 구속, 노조 내부에서조차 ‘그 사람들은 완전히 깡패다.’라는 악선동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우리가 진정으로 처음 분노해서 일어났던 원초적인 요구들을 관철시키기 위해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한경: 만약에 상상을 해보면 2월 13일 동양시멘트 투쟁은 위장도급 판결 후 해고가 되지 않았다면 투쟁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고민들이 있었습니다. 어쨌든 정부기관의 판정이 노조한테는 상당히 유리하게 났죠. 하지만 업체 자체는 매각과정에 있었고, 하청업체 도급계약 해지를 통해 ‘해고’라는 조건을 부여했고, 그러다 보니 어떻게 보면 투쟁하겠다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훨씬 수월하게 투쟁을 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매각이나 교섭도 되지 않고 회사 측 안을 던지지도 않고 하다가 매각인수가 확정되면서부터 노조가 조직력에서 요동치기 시작했죠. 그걸 제외하면 노조로서는 해볼 만한 투쟁이었어요. 그런데 사실 동양시멘트는 손 떼고 떠날 자본이었고 그쪽 대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애꿎은 고용노동부나 시청을 상대로 정치적으로 이 문제를 풀려고 했었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정규직 전환, 비정규직 ‘철폐’와 ‘차별 철폐’ 이런 것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 교육이 상당히 부족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11월에 삼표가 던진 안으로 조합원들이 와르르 무너진 것이죠. 투쟁에서 조직과 사람을 남기기 위해서는 원칙 자체를 변경해도 된다, 투쟁 수위를 낮춰도 된다, 이런 입장들이 외부에서도 다양하게 주입됐습니다. 가끔씩 왔던 사람들도 그런 얘기를 노골적으로 했고, 진정과 관련해서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 자체만 유지되면 투쟁을 접고 가도 된다, 그런 부분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겁니다. 결국 23명까지 남았는데 회사에서도 16명 정도 남을 것이라고 예측했었죠. 우리가 봤을 때도 이 사람들은 갈 것이다, 총회요구 전에도 그 정도 남아있으리라 어느 정도 예측은 했었죠.

김경래: 아까 조한경 동지가 얘기했듯이 그런 것들에 대해 교육 자료라는 것이 부족했던 것이 안타깝습니다. 자본주의적 의식 체계 속에 살고 있는 조합원들의 의식적인 부분들을 깨는 작업을 해야 했는데 잘하지 못했거든요.
 

# 수석부지부장으로서 바라본 동양시멘트지부 투쟁


사회자: 2016년 1월부터 4월까지 약 93일간 수감 생활을 하셨는데, 구속 당시의 심경과 수감 생활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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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래: 저는 일정 부분 각오하고 투쟁을 했습니다. 그날도 들어가지 않을까 하고 모든 휴대폰이랑 지갑이랑 다 동료들한테 전하고 … 언젠가는 감내해야 할 정권과 자본의 탄압이기 때문에, 하필이면 한창 추울 때 이 정권이 … 여하튼 각오는 했었습니다. 감옥에 있으면서 솔직하게 좋았습니다. 밖에서 너무 고생했었고, 그 안에서는 고생할 일이 없잖아요. 안에서 욕심났던 것은 그동안 못 했던 공부를 해야겠다 싶어 책을 읽기 시작했고, 처음 두 달간은 종일 읽었는데 그 다음부터 재판을 하기 시작했으니까 재판 끝나면 읽고 그랬습니다. 일 년 정도 살지 않겠느냐 마음을 먹었는데, 죽기를 각오하면 살지 않겠느냐 하는 말처럼 석 달 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하여튼 동지들이 너무 잠을 못 자고 전국 돌아다니면서 CMS 조직하고 그런 것을 볼 때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침 선전전 할 시간에 저는 밥 먹고 있는 게 미안하기도 했고. 마음먹고 가서 그러는지 몰라도 집사람도 몇 개월 지나니까 마음의 정리를 하더라고요. “일 년 정도 살지 않겠느냐? 지부장이랑 못 나오지 않겠느냐?”하면서 … 감옥 안에서 93일이 금방 지나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감옥 안에서 흰 머리가 엄청났습니다.

사회자: 출소 전후로 수석부지부장으로서 공백기를 가졌는데, 답답한 지점은 무엇인지? 향후 동양시멘트지부의 투쟁을 어떻게 펼쳐 나가야겠다는 생각이나 계획이 있는지?


김경래: 전투력이든가 하는 건 동지들이 나보다 많이 뛰어났다고 생각해요. 동지들의 생각이 저를 능가하는 생각이 있더라고요. 감옥에 있던 3개월은 저한테는 소중한 시기였습니다. 전투력을 다시 되살리는 차분하게 생각하는 시기였고, 공백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오자마자 바로 그다음 날부터 결합해서 공백기라기보다 어떤 나의 힘을 만드는 그런 계기가 되지 않았느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싸워야겠다. 싸움의 주체가 무엇인가? 어떤 놈이랑 싸워야 하는가?’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죠. 답답한 것은 사람들이 위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밖에서 투쟁할 수 있는 동지들은 힘을 모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는데, 동지들이랑 대화를 해보니 우리끼리 서로의 투쟁을 제한하고 그러니까 그게 답답한 것이죠. 위축되어 있을 것이 아니라 ‘자본이 쫄아서 우리를 잡아넣은 것이다. 그냥 놔두면 우리가 계속 투쟁하고 난리 날 것 같아서 우리를 잡아넣은 것이다’라고 생각해야한다고 봅니다. 어쨌든 감옥에 갔었지만 그 투쟁 같은 경우는 우리의 승리라고 봐요. 비겁하게 잡아넣어서 우리가 이긴 것이라고 봅니다.  

조한경: 상황 자체는 사실은 4월에 49광구 투쟁부터 계속 묻혔죠. 결정적으로는 회사관리자들이 현수막 철거하는 상황에서 폭행 건이 있었고, 그 투쟁 이후에 계속 소송 들어오고 이렇게 되면서 강원본부에서 중간에 결합한 저로서는 구속 자체가 황당했었습니다. 정말 우리가 그 정도 형을 살 정도로 투쟁을 했으면 억울하지도 않았는데, 93일을 살아야 할 만큼 투쟁을 하진 못 했던 부분이 많았죠. 특히 지부장 관련한 상황을 보면 8월 3일에 회사 측에서 시비 걸고 경찰에서 연행하고 검찰에서 구속영장 청구하고 법원에서 영장 바로 발부해서 8월 6일 구속 확정되기까지 일사천리로 쭉쭉 진행되었습니다. 8월 지부장이 구속된 이후부터 올해 1월 13일 남은 5명의 동지들이 법정구속 되기 전까지 시기 시기별로 많은 투쟁을 배치했죠. 집회도 매월 지역본부 차원에서 집중결의대회도 했고, 노숙 상경투쟁도 있었고, 삼포 회장 정도원 집 앞으로도 갔었고, 23명 중 구속된 동지들 제외하고 매일 노숙투쟁… 사실 대외적으로 동양투쟁이 많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죠. 

사회자: 강종숙 동지는 노숙농성에 대해서 어떻게 보시나요? 노숙농성을 흔들림 없이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경험에서 얻은 교훈 같은 건 없으신가요?

강종숙: 노숙농성만 가지고는 답이 안 나오죠. 아까 잘 말씀하셨는데 자본이 공격을 하려면 그들도 돈이 듭니다. 우리도 돈이 들지만 저들도 돈을 많이 써야하죠. 구속시키면 엄청 저항을 하는구나, 느끼도록 하는 투쟁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정도원 회장 집 가처분 상황과 이후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투쟁하게 되면 대가가 따르기 마련인데, 우리는 구속이든 손배가압류, 벌금이든 주로 몸으로 때우는 쪽으로 돈이 들지만 자본가들 역시 그만큼 돈이 나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 만큼 탄압을 했는데도 우리가 변함이 없거나 더 세게 투쟁하면 당황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자본가들입니다. 물론 그 지점을 넘어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죠. 동양 동지들이 노숙농성을 계속 이어 갔는데 제가 아쉬운 것은 이마빌딩 관리자들도 그렇고, 거기 나오는 경찰들도 그렇고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어요. 항상 ‘이것들이 무슨 짓을 할까’ 긴장돼 있어야 정도원 회장이든 삼표 직원이든 마음 편하게 출퇴근을 못하게 됩니다. 


재능교육 투쟁하면서 7년 동안 한 주도 빠지지 않고 박성훈 회장 집 앞에 갔습니다. 박성훈도 어느 시점에서는 압박을 받게 되는데 동네주민들이 이제 박성훈에 대한 욕을 하죠. 주민들이 다 친할 수 없으니까요. 가진 놈들은 안 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파열구가 있었어요. 저도 거기 가면 가만히 있는데 누가 와서 박성훈 욕하고 가고, 어지간하게 지긋지긋해야 그런 것이 생겨요. 한두 번 가서 그런 것이 생기지 않죠. 어쨌든 종합해보면 노숙농성 유지하는 것은 기본이고, 그밖에 자본이 제일 괴로워할 만한 것 우리가 큰 뭔가를 하긴 쉽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천하고 하다보면 저놈들이 뭘로 가장 괴로워하는지 보여요. 그걸 집중적으로 잡고 흔들어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들고, 우리도 노숙농성 하는 과정에서 몇 번 씩 철거를 당하고 하면서 나아졌어요. 철거를 당하면 반짝 나아져요. 대신 다시 농성장을 차리려면 힘이 듭니다. 우린 천막은 고사하고, 깔판 하나도 깔지 못하고 몰려 있을 때가 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티고 있으면 환장하고 있는 것은 자본가들이죠. ‘안 끝나네.’라는 느낌. 이미 감옥 갔다 왔기 때문에 쉽게 두 번, 세 번 구속 안 됩니다. 그래서 오히려 구속을 계기로 해서 조금 더 사측과 경찰이 괴로울 만한 투쟁을 벌여나가면 이길 수 있다고 봅니다. 
 

# 동양시멘트지부 투쟁의 전망
 

사회자: 동양시멘트지부 투쟁은 다른 사업장 투쟁과 어떤 점이 다르다고 보시나요? 앞으로 어떻게 나아갔으면 하는지?

강종숙: 투쟁을 하다 보면 시작된 이유가 다 있습니다. 보통 크게 보면 해고라든지 아니면 노동조합이 있었던 곳이라면 단체협약 파기라든지. 학습지의 경우도 불안정하지만 어쨌든 단체협약이 있었습니다. 사실 정확하게 얘기하면 법적이든 물리력이든 단체협약을 강제할 만한 힘은 없었던 노동조합이었는데 2007년 당시 정말 노동조합이라면 해서는 안 되는 단체협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싸웠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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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요구는 그 당시 우리 힘을 반영해서 단체협약 전체가 아닌 수수료(임금) 제도 전면 개정이었습니다. 굉장히 방어적인 요구였죠. 자본이랑 싸우고, 노동조합 내부의 어용이랑 싸우고 … 투쟁이 진행되면서 본질은 바뀌지 않았는데 점점 더 내부랑 싸우는 일이 많아졌어요. 자본이랑 싸우는 것은 기본이었고. 자본은 계속 탄압하고 건드렸어요. 손배가압류, 구속, 철거, 매일 벌어지는 용역깡패랑 충돌 … 이런 것들 때문에 자본과 치열하게 싸우는 와중에서 내부에서는 계속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내부의 회의를 통한 결정도 있었지만 조합원들의 힘으로만 싸웠던 것이 아니고 연대 동지의 힘으로 싸웠던 상황이었어요. 제가 위원장이어서 초기 4~5년 동안 집회 때 발언을 거의 저만 했어요. 제가 재능교육 소속도 아니었는데 재능교육지부 간부들도 집회 때 발언을 거의 안 하려고 해서 제가 발언을 하면서 대회사 등등 선제적으로 회의 결정 사항이든지 계속 외부로 공표를 했죠. 재능자본이 귀를 쫑긋이 들고 듣고 있으니까 귀에 못이 박이도록 얘기해서 못을 박았습니다.

“단체협약 원상회복, 해고자 전원복직” 거기에 자본은 치고 들어오죠. 다 보이거든요. 높은 데서 보고 있으니 농성할 때 보면 어떤 사람인지 견적이 나오죠. 사람 성향들을 잘 알기 때문에 어느 시기에 어떤 안을 던지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그들의 예측이 얼추 맞아요. 그렇게 해서 자본은 내부를 계속 흔드는 겁니다. 동양도 비슷한 전철을 밟을 것이라고 봐요. 지리멸렬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싸움이 필요합니다. 노숙농성 하면서 자본이 가장 괴로운 것을 해야 합니다. 저는 10년을 노숙농성을 했는데, 단 한 번도 정시에 시작해서 정시에 끝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제가 피켓을 들 때 서 있던 자리는 용역깡패 대장이 와도 한 번도 제가 서 있던 자리에서 밀려나지 않았습니다. 학습지 대교 투쟁 때부터 이제 그런 것들을 고수하고 지키고, 자본한테 우리 요구는 뭐다 못을 박아놨으니, 행동이든 요구사항이든 자본가들은 이러한 지점들을 ‘자기견적서’에 넣을 수밖에 없어요. 저놈을 솎아내려면 어쨌든 여기까지는 해야겠구나, 라는 인식을 주는 것이죠. 김경래 동지가 말했던 것처럼 예를 들어 노동조합 깃발을 가지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게 노동조합 회의석상이든 집회발언이든 해야 된다고 봐요. 자본가들이 들을 수 있는 모든 곳에서 ‘우리 요구는 노동조합 깃발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노동조합 깃발 들고 들어간다.’라고 얘기해야 합니다. 


단체협약 원상회복! 절대 개별복직 하지 않는다, 재능교육 종탑어용세력들은 단체협약을 지키기 위해 또다시 노숙농성, 구속 불사하면서 싸울 마음이 없었던 것이죠. 저들은 마지막에 정말 그 요구가 필요해서 합의한 게 아닙니다. 지난 삼 년 동안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죠. 그래서 끊임없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자본과 연대 동지, 상급단체, 그리고 조합원 내부에서 … 우리 요구는 거의 항상 최소한의 요구죠. 늘 밀리고 있는데 가장 절박한 최소의 요구, 끊임없이 원안을 고수하고 싸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원안 고수하고 싸울 때, 연대 단위나 원안 고수하는 조합원들이 지지하는 안을 다수가 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야금야금 넋 놓고 바라보면 어느 순간에 그 반대의 경우가 천지가 돼요. 처음에 밀고 들어올 때 간을 보죠. 장악할 수 있다고 판단하면 개떼 같이 들어와서 흔들어대요. 투쟁하는 노동자의 편인 척하면서 실상은 자본가의 앞잡이라든가, 내부를 흔드는 자들이 다수가 되지 못하게 정확하게 중심을 잡아가는 투쟁이 필요합니다. 내부가 안 흔들리면 그런 놈이 안 들어옵니다. 처음에 붙으려고 하다가도 회의 진행되는 것을 보면 들어오려고 하는 마음이 안 생기죠. 그래서 항상 치열하게 내부에서 싸워야 합니다. 밖에서 집회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안 고수가 절대다수는 아니라 해도 결국 처음에 요구했던 원안에 한참 못 미치는 말도 안 되는 안을 들고 와서 마지막에 개별로 복직해버리면 아무 의미 없거든요. 자본은 항상 투쟁하는 대오로 들어온 사람들을 최소한으로 만들어 놔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학습지노조 재능교육 투쟁에서도 그런 측면에서 마지막 남은 3인이랑 합의할 때, 복직해서 너희들 뭐 할 것인지 노동조합 할 것인지 등등 합의할 때 마지막까지 쟁점사항이었고 자본이 궁금해 했어요.

종탑어용세력들이 계속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고, 사측에서 교섭 자리에서 노골적으로 얘기했었어요. 너네 3인과 합의할 수 없는 이유가 종탑 측이 타격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대놓고 말이죠. 그래서 싸움에서 밀리지 않으려면 각오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계속 흔들리기 때문에. 자본만 흔들면 버틸 텐데, 연대부터 남아 있는 23명이 끝까지 가면 좋은데, 이건 이상적인 것이고 현실에서는 계속 흔들릴 텐데, 23명 모두를 중심 잡기 위해서 노력해야지요. 그 동지들을 모아서 똘똘 뭉쳐 결집시켜 나가야 어느 정도 끝까지 원안을 가지고 갈 수 있는 동력이 생깁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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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경: 우리가 지금 ‘이긴다! 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들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단지 나만, 우리 조합원만 정규직이 되면 끝나는 것인지, 복직하고 나면 계속 정규직 임금 노예로 살 것인지, 이런 고민들이 확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 또 지금 현 시기에 있어 고민해야 할 지점은 여러 연대 단위와 함께하면서 7월 9일이면 500일인데, 그동안 우리가 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냐에 대한 고민이 확장되어야 합니다. 작년 12월에 반 이상의 조합원들이 탈퇴했을 때, 그 사람들이 애초에 주장했던 것이 무엇이냐? 그 사람들은 처음부터 임금 몇 퍼센트 인상과 하청업체의 삶을 계속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언젠가는 공론화되고 다툼이 있어야 하지, 계속 놓아두면 고름만 커지고 나중에 수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단호한 부분들이 필요합니다. 투쟁의 원칙 자체가 훼손되는 것을 제어하지 못하면 안 됩니다. 어차피 하기로 했으면 밀고 갔으면 합니다. 자본가들의 입장에서 가장 껄끄러운 것은 정도원 회장의 집이든 정도원 회장이 다니는 교회든 최병길 사장 집이든, 필요하면 96시간, 144시간 등의 투쟁 배치가 필요합니다. 연대 단위는 외곽에서 이벤트와 퍼포먼스 중심으로 투쟁을 배치하는 데, 조합원 동지들은 거점농성장을 어떻게 만들고 투쟁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사람들 모아서 한 번 반짝하는 것이 아닌 농성장을 중심으로 적들이 가장 껄끄러운 것이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결코 무리한 선도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해왔던 부분들에 하나둘씩 좀 더 만들어 가는 고민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김경래: 조합원 동지들이 회의, 간담회, 토론회를 통해서 계속 고민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같이 계속 모여서 얘기하고 토론하면 나아지고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자: 마지막으로 투쟁 주체가 연대 단위에게, 연대 단위가 주체에게 한마디씩 해주시고, <붉은 글씨> 독자들과 투쟁하는 노동자 동지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 간단히 해주시죠.

한송우: 이 싸움이 결코 간단히 끝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원칙을 지키고 초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갔으면 합니다. 옆에서 함께하겠습니다.

신정현: 오늘 말씀하는 것을 듣고 상황 일부를 알게 되었는데 강종숙 동지도 말씀하셨지만, 자본과, 연대 단위, 조합원 내부 세 가지에 대해서 치열한 토론을 통해서 합의점을 찾아나가면 어차피 법률적 싸움은 이기고 있고, 시간과의 싸움인데 견뎌 나가면 이길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김경래: 어쨌든 연대 동지들이 많은 관심 가지고 계신데, 조합원들이 주체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가 가장 고민입니다. 동지들의 역할 제일 중요한 것 같습니다. 변치 않는 원칙을 사수하고 가야지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고 원칙을 버릴 마음이 없습니다. 이런 자리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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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04 13:06 2016/07/04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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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15/10/20 12:10

[현장투쟁] 아래로부터의 가능성을 열어낸 아사히글라스 사내하청노동조합 연대한마당

이경문 
 


동지가 바로 투쟁의 주체다


지난 9월 5일 비가 내리는 경상북도 구미시 4공단 아사히글라스 앞에서 아사히글라스 사내하청노동조합 연대한마당이 열렸다. 박근혜의 도시 구미 4공단에서 최초로 생긴 사내하청노동조합 동지들과 함께 투쟁하기 위해 울산, 군산, 창원, 경주, 아산, 평택, 화성, 삼척 등 전국 각지에서 정규직, 비정규직, 촉탁직, 사내하청, 특수고용, 이주노동자를 가리지 않고 500여명이 모였다. 

관료주의와 조합주의의 병폐뿐만 아니라, 어용세력으로 인해 많은 논란 속에 민주노총 금속노조 가입을 거부당한 아사히글라스 사내하청노동조합을 사수하기 위한 마음이 모인 것이다. (아사히글라스 사내하청노동조합이 민주노총 금속노조 가입을 거부당한 사태와 관련한 경과 및 입장은 본 글 마지막에 전문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별첨했다 - 필자)

상급단체의 공문이나 상명하달 식의 지침 없이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아래로부터의 직접행동에 기반을 두어 만들어진 ‘연대한마당’이었다.


총파업은 지침만으로 성사되지 않는다. 단위사업장 투쟁과 지역, 계층 간의 연대가 이루어졌을 때 가능하다. 오늘 아래로부터 제안해서 여러 지역 동지들이 자발적으로 모였다. 바로 이 자리가 ‘노동자는 하나’임을 확인하는 곳이며, 총파업 조직의 출발점이다. 더는 주저하지 말자! 맥 놓고 한숨만 쉬는 짓은 더더욱 하지 말자! 우리가 나서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노동자 세상을 건설하자!” (2015. 9. 5. 아사히사내하청노조 연대한마당 참가자 일동 투쟁 결의문 中)


최근 비정규직 최장기 농성투쟁 2822일을 마치고 승리를 쟁취한 학습지노조 재능교육 투쟁승리 지대위 동지들부터, 지난 2월 13일 고용노동부로부터 ‘위장도급’ 판정을 받아내고 집단해고를 당하여 ‘정규직 전환을 통한 복직쟁취’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 동양시멘트 동지들, 정몽구 회장에게 불법파견 면죄부를 주는 8•18, 9•14 합의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투쟁하고 있는 현대차 비정규직 동지들, 어용노조와 다를 바 없는 금속노조 구미지부의 만행에 맞서 힘차게 민주노조 사수 투쟁을 펼치고 있는 스타케미칼, KEC 동지들까지 그렇게 연대한마당에 참석했던 한 사람, 한 사람이 투쟁의 주체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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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대한마당에서 발언하고 있는 현대차 울산공장 촉탁계약직 해고자 박점환 동지.



노동자의 피땀으로 성장한 ‘아사히글라스화인테크노코리아’ 


“TFT액정용 글라스기판을 제조·판매하는 것을 목적으로, 2004년 6월 경상북도 구미시에 새로이 설립된 회사로서, 일본의 종합 글라스 메이커로 세계최대규모인 AGC아사히글라스 주식회사 그룹에 의해 설립”된 아사히글라스화인테크노코리아(이하 아사히글라스)에서 일하던 사내하청노동자들은 지난 5월 29일 민주노조로 단결했다.

일본계 기업인 아사히글라스는 구미 4공단에 있는 경상북도 최대의 외국인투자기업으로 유리를 생산하는 곳이다. 정규직은 800여명이고 사내하청업체는 GTS, 건호, 우영 등 3개가 있다. 지난 2005년 아시히글라스는 경상북도, 구미시와 양해각서를 체결하면서 5년간 국세 전액 감면, 15년간 지방세 감면, 50년간 토지 무상임대 등의 특혜를 받았다. 

반면에 아사히글라스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지난 9년간 주말에는 주야맞교대, 주중에는 3교대로 일하면서도 최저임금만을 받았다. 작업복과 안전모도 변변치 않고, 장갑도 스스로 세탁해서 써야했던 노동자들의 고혈을 쥐어 짠 결과, 아사히글라스는 연평균매출 1조, 연평균 당기순이익 800억, 사내유보금(미처분이익잉여금) 7295억 원(2014년 기준)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금일 AFK(아사히글라스화인테크노코리아)로부터 도급계약 해지통보서를 받았습니다”


노동조합 설립 이래 아사히글라스사내하청노조는 사측과 교섭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 6월 30일 아사히글라스 사내하청노동조합 동지들에게 날벼락처럼 해고통보가 찾아왔다. 원청인 아사히글라스에서 하청업체 GTS와의 도급계약을 해지하는 방식으로 부당해고를 자행한 것이다. 

민주노조로 단결한지 32일 째가 되던 지난 6월 30일 아사히글라스는 전기공사를 이유로 휴무를 단행하고, 하청업체 GTS와의 도급계약을 해지했다. 당초 계약기간은 올해 말(12월 31일)까지였지만 7월 31일부로 계약을 해지한 것이다. 원청이 도급계약 해지 사유로 든 것은 ‘플라즈마 디스플레이 패널용 유리 제조 물량의 감소’였지만, 3개의 하청업체 중 유일하게 민주노조 조합원들이 있던 하청업체 GTS 소속 노동자 170명만 부당해고를 당했다. 심지어 아사히글라스 자본은 교묘하게도 조합원-비조합원을 가리지 않고, GTS 노동자 170명 전원에게 ‘문자’로 해고를 통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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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사히글라스 하청업체 GTS의 해고통지 문자. (출처 : 아사히사내하청노동조합)



부당노동행위•노조탄압 백화점, ‘빨간조끼와 용역깡패’


‘문자’ 해고로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밀려나오기 전까지 아사히글라스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은 물론, 인격모독을 감내하며 묵묵히 일해 왔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빨간조끼와 용역깡패’이다. 아사히글라스에서는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사소한 실수나 잘못을 하면 인격적인 모멸감을 주는 의미로 빨간색 조끼를 입힌 채로 일을 시켰다. 또한 ‘원청’이 직접 하청업체에 지시하여 부당해고 직후 용역깡패를 동원, 사업장 출입을 막고 조합원들의 개인물품까지 가져갈 수 없도록 하는 등 온갖 부당노동행위를 자행했다.

6월 30일 부당해고 이후, 아사히글라스 사내하청노동조합은 7월 2일부터 천막노숙농성에 돌입했다. 하청업체 GTS는 원청의 도급계약 해지 시점에 맞추어 업체폐업 및 해고계획을 발표하고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에게 희망퇴직을 종용하는 등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민주노조를 분쇄하려는 공작을 폈다. 아사히글라스 자본은 바로 다음날 위로금과 희망퇴직을 종용하며 7월 29일까지 사직서를 제출하라고 협박했다. 

아사히글라스 김재근 이사는 하청업체 GTS 정재윤 사장에게 공공연하게 노조를 깨라고 강요했다. 정당한 민주노조 활동에 대한 각종 고소고발은 당연지사였다. 그야말로 부당노동행위•노조탄압 백화점이다. 부당해고 이후, 원청 아사히글라스는 자회사인 한욱테크노글라스와 아시히피디글라스코리아 소속 노동자들을 투입하여 해고자들이 담당하던 업무를 대체하고 있다.

원청 아사히글라스는 170명의 부당해고에 대해 물량이 감소하여, 생산 공정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에 하청업체 GTS와 도급계약을 해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민주노조가 설립된 업체만 계약을 해지한 점, 하청업체 GTS에서는 그동안 노동강도 강화에 따라 인력충원 요구가 계속 있었다는 점, 원•하청이 2015년 도급계약을 체결할 때 적정인원을 200여명으로 정한 점, 도급계약 해지 직전까지 하청업체 GTS에서는 200여명 보다 적은 168명이 근무하고 있었다는 점, 안정적인 흑자 순이익을 창출했고, 연차배당•중간배당을 수차례 함으로써 인위적으로 배당률을 높였다는 점, 기획 먹튀 의혹이 짙다는 점, 도급계약 기간은 1년이었는데도 (민주노조 설립 이후) 도중에 계약을 해지한 점, 해고자들이 담당하던 업무를 그대로 자회사 소속 노동자들이 담당하는 점 등으로 볼 때, 노동조합을 와해시키기 위해 부당해고를 자행한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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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사히글라스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사소한
                    실수나 잘못을 하면, 징벌의 의미로 입고 일해야만 

                 했던 ‘빨간조끼’ (출처 : 아사히사내하청노동조합)
 


물량의 감소로 인한 계약해지일 뿐이다? 
기업장부 전면 공개, 영업비밀 즉각 철폐하라!

 

민주노조를 파괴하기 위한 공격이 아니라면, 원청 아사히글라스 자본은 분명하게 밝혀야한다. 자본의 입장에서 ‘도급계약 해지’가 진정 떳떳하다면, 회계장부와 경영실적 등을 전면적으로 공개하여 도대체 왜 170명의 노동자들이 거리로 내몰리게 되었는지 설명해야한다. 경영권•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해고사유를 밝히지 않거나, 노동자들의 요구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기업장부 전면 공개, 영업비밀 즉각 철폐라는 전망으로 투쟁을 더욱 확대해나가야 한다. 우리의 당연한 요구가 정말 문제인 것인지, 기업 장부 전면 공개와 영업비밀 즉각 철폐를 통해 스스로 판단할 수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노예로 살 수 없어 당당하게 민주노조로 일어서 투쟁하는 노동자의 힘으로 기업의 경영권과 소유권을 침해해 들어가야 한다.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침해’이지만,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빼앗긴 것을 되찾아오는 과정이다. 노동자의 집단적이고 민주적인 통제 하에서 저들의 경영과 탄압, 부당해고가 얼마나 기만적인 것인지 폭로해낼 수 있다.

자본가 계급은 언제나 투기자본의 ‘투자’를 이끌어내기 위해, 자신들의 회사가 얼마나 잘나가는지 과장한다. 하지만 노동조합이 설립되고, 노동자들의 투쟁이 일어나면 금세 말을 바꾼다. 최근 논란이 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발언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저들의 말에 따르면, 자본가 계급은 항상 어렵고 노동자 계급은 항상 양보해야한다.
 

“기업이 어려울 때 고통을 분담하기는커녕 강경 노조가 제 밥그릇 늘리기에 몰두한 결과 건실한 회사가 아예 문 닫은 사례가 많다”


이에 맞서는 ‘기업 장부 전면 공개, 영업비밀 즉각 철폐’ 요구는 자본가 계급의 지배이데올로기를 깨부수기 위한 수단으로써 반드시 필요하다. 영업실적이나 회계장부에 대한 일부 공개 등의 형식적인 조치를 넘어서, 자본가 계급의 이윤흐름을 파악해낼 수 있다면 노동자 계급의 투쟁은 한층 더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의 지불능력을 운운하며 노동자 투쟁요구가 과도한 것 아니냐는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전체 자본가 계급의 장부와 영업 비밀을 즉각 공개하라는 요구에서부터 출발하여 이를 노동자계급이 만천하에 드러내는 투쟁으로 나아가야한다.

착한 자본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로, 정당한 정리해고는 없다. 설사 자본의 물량감소로 인한 해고일지라도 그 책임은 여전히 자본가 계급에게 있다. 경제위기와 공황은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물량의 증감과 관계없이 모든 해고는 부당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가 계급이 ‘경영권 행사’라고 주장하는 정리해고•구조조정에 대한 실질적인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현장권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 계급의 ‘통제위원회’가 자본의 회계장부와 영업실적 전면 공개를 요구하고, 조사감독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당면 실천과제 중의 하나는 ‘영업비밀 즉각 철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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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사히글라스 공장 정문 앞을 막고, 출근을 방해하고 있는 용역깡패들.
            (출처 : 아사히사내하청노동조합)


누가 공장의 주인인가? 자본가 계급과의 전면적인 투쟁으로 화답하자!


물론 이와 같이 자본가 계급의 소유권을 ‘침해’하여 노동자 계급의 빼앗긴 권리를 되찾아오는 것은 ‘과연 누가 공장의 주인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한다. 노동자 계급이 일회용품처럼 쓰고 버려지는 삶을 반복하지 않고, 생산의 주인으로 우뚝 서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물음이다. 

그렇다면 몇몇 특정 자본의 사내유보금을 일부 환수한다거나, 생색내기 식 ‘사회 환원’, 우리사주제, 회사 살리기 운동, 노사상생, 사회적 기업, 생활협동조합, 자주관리기업 등의 개량주의•노사협조주의로 해소할 수 없는 독점자본의 착취구조 전체를 노동자계급이 통제해야만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이것이 업체폐업, 단가 후려치기, 먹튀•기획•위장폐업 등으로 산업 전반을 장악하고 있는 독점자본에 대한 우리의 결론이다.

박근혜의 도시 구미에서 최초로 사내하청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 아사히글라스 사내하청노동조합 동지들은 아사히자본의 악랄한 탄압과 민주노조 운동 진영 전반에 만연한 관료주의, 조합주의 속에서 힘차게 투쟁을 펼쳐나가고 있다. 지금은 노동조합 속에서 출발하지만 노동조합에 갇히지 않는 ‘운동’으로, 노동조합만으로 해소할 수 없는 자본가 계급과의 전면적인 ‘투쟁’으로 화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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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첨] 

구미지부가 9월 1일 금속노조 중집에서 아사히사내하청노조가 금속노조에 가입신청을 하지 않았다며, 아사히사내하청노조 연대한마당 기획팀이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금속노조는 연대한마당 기획팀에 확인도 하지 않고 아사히사내하청노조 반론권도 없이 회의결과에 구미지부장 보고를 채택했습니다. 이결과 보고내용을 접하는 조합원이 “아사히사내청노조가 금속노조 가입을 거부한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연대마당 기획팀은 빠른 시일 내에 금속노조 중집 결과에 대한 정정을 요구할 것입니다. 

하지만 금속노조 가입 문제로 아사히사내하청노조 투쟁이 혼란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신속하게 가입하고 힘차게 투쟁하기 위해 아사히사내하청노조는 9월4일 금속노조 가입 절차를 다시 밟았습니다. 이번에는 정식으로 가입원서도 제출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금속노조 가입을 둘러싼 경과를 밝힙니다. 

아사히사내하청노조 연대한마당 기획팀도 빠른 시일 안에 입장을 마련하여 밝히겠습니다. 아사히사내하청노조가 금속노조 조합원이 되어 복직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게 아낌없는 지지를 당부 드립니다.

                   9.5 아사히사내하청노조 연대한마당 기획팀


[참고자료]
    

■ 금속노조 가입에 대한 경과 및 입장


1. 노조 설립을 위해 조합원들을 조직하던 중 5월 20일 10시 차헌호 위원장이 금속노조 구미지부 김준일 지부장과 민주노총 최일배 조직부장을 만나서 한 시간 가량 대화를 나눔.
- 참석자: 차헌호, 김준일 지부장, 최일배 조직부장
- 주요내용 
> 차위원장: 현재 조직 상황 보고.
> 김준일 지부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과정에 대해 견해를 밝히고 어려워도 같이 해보자고 함. 조합원들과 금요일(5/22) 함께 오라고 함. 


2. 그날 저녁 18시경에 최일배 조직부장으로부터 연락이 옴.
- 주요내용: 금속 구미지부의 일부 간부가 차헌호는 구미지부 명예를 훼손한 사람이라 가입자격이 안되고 나머지 조합원들은 가입자격이 된다고 전함. 그리고 민주노총 일반노조로 가입하는 방법도 있다고 의견을 전함.(사진첨부1. 금속 가입관련 규약 사진 2장을 카톡으로 보내옴)


3. 이에 차헌호는 가입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기 위해 본조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도움을 요청함. 본조 박유순 미비국장이 김준일 지부장과 소통했으나 차헌호가 구미지부를 명예훼손 했다는 이유로 가입 자격이 안된다고 해서 다른 방법을 찾아 볼 수밖에 없다고 함. 일단 가입서를 넣어보라고 권유함.


4. 어렵게 조합원들을 조직했는데 금속노조 가입과정에 분쟁이 생기면 그 파장은 조합원들에게도 미칠 것이 뻔한 상태였다. 그래서 결국 5월 29일 기업노조로 노조 설립신고를 함(30여명의 조합원들은 이미 금속노조 가입서를 썼기에 다시 기업노조 가입서를 쓰게 됨)


5. 이후에 민주노총 김태영 경북본부장, 이남진 국장이 차헌호 위원장과 만난 자리에서 김태영 본부장은 “금속노조 가입 가능하다. 안될 수가 없다. 가입 신청하라”고 함. 
차헌호 위원장은 금속노조 본조에서까지 구미지부가 명예훼손을 이유로 가입이 문제가 된다고 답변이 왔고 가입관련 문제로 싸움이 예상되는데 그 파장은 신생노조가 감당할 수 없다고 함. 이후 수많은 연대 동지들이 하나같이 왜 금속에 가입하지 않냐는 질문이 있었고 위와 같이 답변을 함.


6. 9월 5일 아사히 연대마당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제안서 내용 중에 금속 가입 거부당한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서 9월 1일 금속 중집에서 구미지부 김준일 지부장이 가입 신청한 사실이 없다고 보고함. (사진첨부2)


7. 입장
금속 가입을 위해 찾아간 당시에 김준일 지부장은 반갑게 악수로 맞이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에 차헌호는 구미지부를 명예훼손 한 사람이라고 가입자격이 없다며 답변이 왔고, 금속노조 미비국장도 김준일 지부장과 소통 후 동일한 답변을 전해 왔다. 박유순 국장과 김태영 본부장은 다시 가입신청을 하라고 했지만 현실은 문제가 뻔히 예상되는 상황이었고, 초기 노동조합을 만들어서 조합원들을 집중시켜내는데도 어려운데, 가입을 했다가 거부되면 조합원들에게 미칠 영향이 우려되었다. 그동안 간간히 금속노조 가입에 대한 왜곡된 내용들이 들려 왔지만 인내했다.
 
아사히 연대마당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많은 단위들이 왜 상부단체가 없는지, 금속에 가입하지 않는지를 궁금해 한다는 기획단의 요구로 제안서 내용 중 구미지부 가입거부 내용들을 담게 됐고 널리 퍼지게 됐다. 최근 이 사실을 접한 김준일 지부장은 금속노조 중집(9/1)에서 차헌호가 금속노조 가입신청 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보고했다. 기가 막힌다. 참고 있으려 했는데 더 이상은 그럴 수 없는 상황이다. 가입신청을 한 사실이 없어서 구미지부가 아사히사내하청노조의 가입을 못 받았다면 잘 된 일이다. 더 이상의 논란을 없애기 위해서 아사히사내하청노조는 오늘 구미지부에 가입신청을 했다. 가입절차가 정상적으로 진행되기를 바란다.
 

2015. 9. 4
아사히사내하청노조  차헌호

사진첨부1. 당시 사진을 보내고 전화가 왔습니다. 내용은 구미지부 운영위가 심의한다는 것이고 차헌호가 구미지부 명예를 훼손하였다는 사유로 가입이 문제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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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첨부2. 9월 1일 금속노조 중앙집행위에서 금속노조 구미지부 김준일 지부장 보고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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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첨] 


금속노조 규약/규정으로 본 9/7 구미지부 운영위원회 결정 비판
(출처 : 최병승, “아사히사내하청노조 금속노조 가입 좌절 - 9월 7일 구미지부 운영위 결정을 보고” 中)

 

1. 아사히글라스 사내하청노동자는 금속노조 가입 대상이다.
 
금속노조 규약 제2조는 금속산업과 금속 관련 산업 노동자는 조합에 가입할 수 있고, 추가로 ‣조합 활동과 관련하여 해고된 자 ‣조합에 임용된 자 ‣금속산업과 금속관련 산업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자, 구직중인 실업자 ‣기타 제조업에 근무하는 자 ‣기타 가입을 희망할 경우 지부운영위에서 가입을 심의하고 중앙위에서 승인된 자도 조합에 가입할 수 있다.
 
규약 제2조(조직대상) 금속산업과 금속 관련 산업 노동자와 다음 각 호의 자는 조합에 가입할 수 있다.
1. 조합 활동과 관련하여 해고된 자
2. 조합에 임용된 자
3. 금속산업과 금속관련 산업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자, 구직중인 실업자 (2004. 10. 28 개정)
4. 기타 제조업에 근무하는 자 (2004. 10. 28 신설)
5. 기타 가입을 희망할 경우 지부운영위에서 가입을 심의하고 중앙위에서 승인된 자 (2004. 10.28 신설)

 
 따라서 아사히글라스 사내하청노동자는 금속산업과 금속 관련 산업노동자로 금속노조에 가입할 수 있고, 계약해지-집단해고 되었다 하더라고 2조 1항과 3항에 의거 명확한 가입 대상이다.

 
2. 아사히글라스사내하청노동자는 조합이 정한 절차를 준수했다.
 
아사히글라스사내하청노동자는 금속노조 규약과 규정이 정한 가입절차에 따라 9월 4일 차헌호(아사히사내하청노조 위원장), 우석정(아사히사내하청노조 부위원장)이 금속노조 구미지부를 내방하여 가입신청서를 접수했다.
 
규약 제9조(조합원의 분류)
① 제2조에 해당하는 자 중 조합이 정한 가입절차를 밟아 승인받은 자를 조합원으로 한다.
② 조합은 조합원 외에 준조합원을 둘 수 있으며, 조합비 납부, 권리와 의무행사는 중앙위원회의 의결로 별도로 규정한다.(2001. 11. 9 3차 정기대의원대회 개정)
조합원 가입절차 전결 규정 제3조(가입절차)
① 소관 지부나 지회가 설치되어 있음에도 가입신청서를 조합이나 지부에 직접 제출한 경우에는 소관 지부나 지회로 이관한다.
② 소관 지부가 결성되지 아니하였을 경우에는 조합에 가입신청서를 직접 제출할 수 있다.

 
 
3. 구미지부가 10/2까지 아사히사내하청노동자를 가입 시키지 않으면 규약위반이다.
 
구미지부는 9월 7일 운영위원회에서 ‘아사히사내하청노동자 가입’건을 다뤘다. 하지만 9기에서 재심의 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사실상 조합가입을 거부했다. 만일 구미지부 운영위가 10월 2일까지 재논의를 하지 않는다면 사실상 규약과 규정을 위반하게 된다.
 
규약 10조(가입과 탈퇴)는 가입신청 이후 30일 이내에 가입여부를 처리한다고 되어있다. 또, 규약 10조의 효율적인 처리를 위해 제정한 ‘조합원 가입절차 전결 규정’ 제8조(조합 가입 거부)에 의하면 “지회장, 지부장이 조합원 가입을 거부할만한 사유가 있다고 판단될 경우는 접수 즉시 그 사유를 조합 위원장에게 반드시 서면 보고하고 위원장의 승인을 받은 경우에 한해 가입을 거부할 수 있다. 단, 명백히 조합의 자주적 활동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만 가입을 거부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구미지부장은 금속노조 위원장에게 서면보고를 하지도 않았고, 금속노조 위원장의 승인도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9월 7일 구미지부 운영위원회가 ‘아사히사내하청노동자의 가입’을 9기 운영위원회로 이월한 것은 가입 여부를 10월 2일 이후로 미룬 것으로 명백한 규약위반이다.
 
규약 제10조(가입과 탈퇴) 조합의 선언, 강령, 규약에 찬성하여 조합에 가입하고자 하는 자는 조합이 정한 가입신청서를 해당 지부 또는 지회에 제출하며 위원장의 승인으로 조합원 자격을 취득한다. 단, 가입 및 탈퇴는 가입원서 제출 후 30일 이내에 처리하되, 중앙위원회에서 정한 별도의 규정에 따른다.(2001. 11. 9 3차 정기대의원대회 개정)
조합원 가입절차 전결 규정 제8조(조합 가입 거부) 지회장, 지부장이 조합원 가입을 거부할만한 사유가 있다고 판단될 경우는 접수 즉시 그 사유를 조합 위원장에게 반드시 서면 보고하고 위원장의 승인을 받은 경우에 한해 가입을 거부할 수 있다. 단, 명백히 조합의 자주적 활동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만 가입을 거부할 수 있다.

 

4. 금속노조는 구미지부 마지막 운영위에 가입 승인 요청해야 한다.
 
9월 1일 금속노조 중앙집행위원회에서 구미지부 김준일 지부장은 “아사히사내하청노조가 금속노조에 가입하고자 하였으나 구미지부에서 거부하였다는 주장(9월5일 아사히사내하청 연대한마당 제안서 중)은 사실이 아니며, 금속노조 구미지부에 가입 신청한 사실이 없음을 보고”했다.


위 과정에 대한 진실 공방은 차치하더라도, 금속노조 규약과 규정을 무시하면서까지 가입을 거부한 9월 7일 구미지부 결정은 처음부터 아사히사내하청노동자를 받을 의시가 없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금속노조 중앙이 나서야 한다. 조합절차에 따라 문제가 없는 노동자 가입을 승인하고, 조직체계에 따라 지회로 배치하야 한다. 만일 금속노조가 이러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임시․비정규․여성․이주노동자 등 미조직 노동자의 조직화를 위해 노력하며 차별철폐 투쟁을 통해 금속노조의 강화․확대를 위해 투쟁한다”는 금속노조 조직 강령을 정면으로 위반 하는 것이다. 또한 비정규직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민주노조를 지키고자 하는 모든 노동자들의 투쟁의 대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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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12:10 2015/10/20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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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15/08/31 11:19

노동자 투쟁의 원칙과 연대에 대하여

특집: 자본과 어용세력에 맞서 투쟁하는 노동자 간담회


(null)정리|국제코뮤니스트전망

 

[3호_특집_노동자투쟁의_원칙과_연대에_대하여.pdf (1.31 MB) 다운받기]


(* 이 대담은 작년 10월 말에 진행되었습니다. 장소를 빌려주신 노들센터와 참여해주신 동지들께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유명자 (학습지노조 재능지부 투쟁하는 노동자)

봉혜영 (한국보건복지정보개발원 투쟁하는 노동자)

이수지 (동국대 달려라 진보)

정현철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사회자)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노동자운동 200여 년의 역사는 자본에 대한 투쟁만이 아니라, 노동자들을 기만하는 어용과 타협, 변절 세력과의 투쟁의 역사였습니다.

미국의 노동조합연맹(AFL)은 노동조합의 요구를 경제적 요구에 한정시켰고, 투쟁보다는 협상을 고집했고, 더 나아가 아래로부터 투쟁이 터져 나오는 경우 폭력배를 동원하여 진압했습니다. 이처럼 미국의 노동조합운동도 자본에 대한 투쟁만이 아니라, 어용노조와의 투쟁을 통해서 성장했습니다. 1930년대 자동차, 철강, 화학 등 점거파업과 대중파업을 통해 미국의 노조운동은 어용노조와의 투쟁을 통해 성장한 대표적 사례입니다.

미국만이 아니라 68혁명 이후 남미와 북미,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에 걸쳐 전 세계적으로 벌어진 수천 번의 비공인파업(와일드 캣)과 점거투쟁은 자본과 타협하려는 어용과 자본협력 세력에 맞서 노동자 스스로 아래로부터 벌인 투쟁이었습니다. 자본의 도구화, 국가기구화 되어가는 노조들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은 최근에도 세계 각지에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으며, 새로운 주체와 새로운 운동이 탄생하는 근거지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번 기획은 무너질 대로 무너진 민주노조 운동에서 마지막 보루 역할을 하면서 가장 힘겨운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동지들의 이야기입니다.
 

1. 노동자 투쟁의 가장 큰 장벽이자 반드시 넘어서야 할 내부의 적과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과 민주노조운동의 현실과 노동자 투쟁의 원칙에 대해 토론하고자 합니다.

2. 가장 어렵지만 흔들림 없이 투쟁하는 동지들에게 소중한 무기인 노동자연대의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투쟁의 원칙을 지키면서도 노동자 단결을 공고히 하고 확장할 방안을 토론하고자 합니다.■

 

사회자: 투쟁의 전개과정과 어용세력의 등장 배경 그리고 계속 투쟁하고 계신 이유에 대해 봉혜영, 유명자 두 동지께서 먼저 간략히 설명해주실까요.


봉혜영: 저희의 경우는 투쟁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어용세력이 등장했습니다. 사실 서울일반노조(상급단체는 서울본부)에 가입한 뒤 사측과의 만남의 자리에서 우리 싸움에 대한 전체적 개요를 듣고 나서 그들이 제일 먼저 한 이야기는 “일주일 안에 승리할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얘기한 것이 우리가 요구한 “기재된 경력을 인정받고 신규채용이 아닌 경력직으로 고용보장 받아야 하는데, 우리 여력으로는 얻을 수 없으니 겉포장은 신규채용으로 하고 실제 내용은 그것이 모두 포함된 것으로 받아 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잘 몰라서 “겉모습은 신규채용으로 하고 실제내용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믹서해서 받아 오겠다”는 말이 매우 이상하다는 생각을 개인적으로는 했습니다만 노조 활동이나 투쟁을 제대로 해본 경험이 없는 탓에 조합원들에게 제 생각을 말하지 못한 상태에서 투쟁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다 나온 것이 1년짜리 신규채용을 받아오는 거였는데, 그들은 “1년이 넘으면 5만 원을 더 주는 제도가 있는데, 5만 원을 지급 받을 수 있게 했으니 경력을 인정받은 거다”라는 식으로 신규채용 안을 설명하는 거였습니다. 상급단체가 투쟁을 제대로 하지도 않은 채 이 싸움을 빨리 끝내겠다고 판단 한 것 자체를 저는 어용이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회자: “신규채용으로 포장 하되 내용은 그것이 아니다”라는 건 관료적 합의의 전형적 방법인데, 문제는 그것보다도 후퇴된 1년짜리 안이라는 걸 어떻게 해명하던가요?
 

봉혜영: 그에 대한 해명으로 그들은 “우리가 갖고 있던 동력에 비해 분회장이 원하는 것은 너무 크다. 예를 들면 오천 원밖에 없는데, 자꾸 만 원짜리 신발을 달라는 격이다”라고 많이 얘기했습니다. 그나마 1년짜리 신규채용 안이라도 얻어 온 것이 우리의 내용과 외부적인 여러 조건으로 볼 때 굉장히 좋은 안을 받아 온 것처럼 얘기를 했습니다.
 

사회자: 애시 당초 빠르게 승리할 수 있을 것처럼 얘기한 건 상급단체 아니었나요? 서울본부가.


봉혜영: 서울일반노조가 얘기한 것이죠. “일주일 안에 승리할 수 있다. 자기들은 한 번도 진 싸움이 없다”고 했는데 그제야 이해가 되더라고요. 이런 안을 받아와서 합의해 왔으니 질 수가 없겠구나. 신규채용 안 같은 걸 가져와서 승리라고 얘기하는데 어떻게 지겠습니까?


사회자: 그 안은 정확히 서울일반노조가 가지고 온 건가요, 서울본부가 가지고 온 건가요?


봉혜영: 서울본부가 가지고 온 것인데, 저희가 서울본부 “직가입”인데도 아니라고 주장하며 서울일반노조의 문제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회자: 서울본부는 자기네들이 가서 안을 가져왔지만, 지금 공식적인 입장은 그것은 서울일반노조가 한 것이다. 이렇게 발을 뺀다는 것이죠? 전임 집행부 이재웅 씨.


봉혜영: 네. 전임 집행부.
 

사회자: 그러면 그 안이 나왔을 때 조합원들 반응은 어땠나요?
 

봉혜영: 조합원들은 그전 5월에 이미 실업급여가 끊어지는 시점이라 생계문제도 투쟁도 너무 힘들다고 접고 집에 들어간 상태였습니다. 8명 중의 5명이 집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는데, 서울본부가 뒤늦게 조합원들이 투쟁을 중단했다는 것을 알고 다 불러서 모아놓고 “좋은 안을 받아올 테니 투쟁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조금만 더 참고 일상으로 돌아가라.”라고 했습니다.


사회자: 제명 건은 어떻게 된 것인가요?
 

봉혜영: 제명을 철회하거나 아니면 어떻게 한다고 결정된 바가 없습니다. (서울일반노조는 분회와 갈등을 빚자 분회장을 제명하겠다고 위협해왔다. 결국 서울일반노조는 간담회가 있은 지 한 달여 지난 12월 4일 일방적으로 분회 해산을 통고했다 – 편집자)
 

사회자: 필요하면 언제든지 꺼낼 수 있다는 거군요. 지금 정확한 소속은 서울일반노조 개발원 분회이고, 두 분이 해고상태로 있는 것이고, 나머지 여섯 분은 탈퇴한 상태인가요?


봉혜영: 나머지 여섯 분은 탈퇴했습니다. 신규채용 안을 받았을 때 제일 먼저 했던 것이 노조 탈퇴였습니다. 노조 탈퇴서를 정식적으로 쓰지 않고 자동이체를 해지하는 방식이었으니까, 3개월 동안 자동이체가 끊어지면 조합원 자격의 유무를 결정하게 되는데, 그 3개월 유예 때문에 당시 투쟁의 지속 여부에 대한 투표가 유효하다고 주장하는 것이죠.


사회자: 투표 결과는 어떻게 나왔나요?


봉혜영: 당연히 5:3이죠.


사회자: 그래서 서울일반노조는 그 투표결과를 근거로 해서 정보개발원분회 투쟁은 종료된 것이라고 선언한 거죠?


봉혜영: 네. 대의원 대회에 와서도 거짓말을 했습니다. 찬반 투표가 합의안에 대한 찬반 투표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서로 하나씩 나눠 가진 서류에도 “투쟁 지속에 관련된 찬반투표”였는데, 대의원 대회 같은데 와서는 “합의안 찬반투표 ”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상반기, 하반기 결산 보고서에도 열심히 투쟁했고, 그래서 합의안을 이끌어냈고, 합의안에 찬성한 5명은 들어갔고 합의안에 불만을 가진 나머지 3명은 싸우고 있다는 엉뚱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사회자: 현재에도 투쟁하고 있는데, 서울일반노조의 지원은 받고 있나요? 조합비는 내고 있나요?


봉혜영: 전혀 못 받고 있어요. 당연히 조합비를 내고 있었는데도 투쟁 관련해서 도움을 못 받는 건 둘째 치고 오히려 방해하는 수준이었죠. 지금은 아닌데 전에는 연대하는 동지들이나 아는 동지들에게 집회 관련 단체문자를 보냈을 때 “왜 접은 투쟁에 문자를 보내고 연대를 요청하느냐, 그런 얘기들을 왜 하느냐?” 라고.
 

사회자: 소속노조의 동의도 없이 분회가 왜 일방적으로 투쟁계획을 세우느냐? 지금도 그런 말을 하나요?

 

봉혜영: 지금은 모르쇠로 외면하고 있고, 실제로 서울일반노조 운영위에서 각 투쟁 사업장을 소개하는 회의 자료에 저희는 빠져 있어요.


사회자: 사고 분회로 처리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봉혜영: 운영위 참여하라는 문자는 옵니다. 운영위 참여 독려 문자가 없어서 조합원이 있는데 참여를 독려하는 문자가 왜 없느냐고 항의하자 문자는 보내주는 데, 운영위 보고 자료에 저희 투쟁이 빠져서 다른 투쟁하는 사업장들과 상황 공유가 안 되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대화가 안 됩니다. 운영위에 처음에는 계속 들어갔는데, 우리의 입장을 이야기하려고 하면 다른 분회장들이 저에게 “상급자는 스승님이고 하늘이다, 제자인 너희가 스승이 하는 일에 어떻게 반기를 드느냐”고 합니다. 서울일반노조 위원장이라는 분은 안건 상정 요구도 무시하고 “시끄러우니 나가라”고 합니다.


유명자: 재능의 경우는 지금까지의 7년 투쟁에서 최근 어용세력으로 등장한 사람들만을 어용세력이라 볼 수는 없고, 애초에는 2007년 5월 17일 개악된 단협을 체결한 이현숙 집행부부터 어용세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2007년 12월 21일 저와 함께 첫날부터 투쟁했던 사람들이 그들과 손을 잡으면서 다수파가 된 거죠. 당시 이현숙 집행부가 투쟁 중이었는데 회사가 2008년 10월에 단협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면서 현장에 있는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탈퇴공작을 들어갑니다. 2008년 10월 단협 파기 직전에 투쟁하고 있던 조합원들을 차례로 해고를 했는데, 거기에 유득규, 강경식, 박경선, 여민희, 고(故) 이지현 조합원 등이 있었던 거였죠. 2010년 11월부터 전임 이현숙 집행부에서 임원을 했던 사람들은 2010년 11월부터 현장에 복귀해 있는 상태였는데, 12월에 회사가 결국 마지막까지 현장에 있던 조합원들의 색출에 나섭니다. 관리자들이 면대면 면담을 하면서 각서를 앞에 놓고 “지금 계속 투쟁을 하고 있는 조합원이라 주장하는 불법 임의 단체 구성원들이 회사를 상대로 명예훼손을 하고, 불매운동을 불법적으로 주도 하고 있는데, 이 사람들에 대해 회사가 책임을 묻고 있다. 너희가 그 활동을 같이하지 않아도 그 단체의 구성원으로 있는 것만으로도 연대책임을 묻을 수 있다.” 이렇게 협박하면서 눈앞에 탈퇴서를 놓았던 거죠.

그 앞에서 양심에 걸려 차마 노조를 탈퇴하지 못한 조합원들은 아예 퇴사해 버립니다. 현장에서 생계나 경제 사정 때문에 계약을 유지해야 하는 사람들은 탈퇴서를 내게 되는데, 그때 이현숙 집행부에 있던 사람들은 단협 개악하고 집행부를 사퇴하고 나서도 노조에 있으면서 현장에 남아있는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사퇴서를 내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이현숙과 지방에 있는 조합원 3명까지 총 4명이 2010년 12월까지 추가로 해고됩니다. 따라서 2010년 12월부터는 해고자가 11명이 되었고 여기에 2001년 해고된 황창훈까지 포함해서 총 12명이 해고자로 남습니다. 이렇게 되자 그때부터 서비스연맹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2011년 1월부터 한 두 달간 계속 회사와 계속 접촉을 했어요. 우리에게 알리지도 않고. 갑자기 2월쯤에 와서 회사와 만나고 있는데, 회사와 만난다고 하지 않고 한남동의 무슨 라인을 통한다는데, 나중에 보니 경찰청 정보국인가 뭔가가 있다고 하더군요. 장기투쟁 사업장 1,000일을 넘어서면서 투쟁사업장 중에 경찰들이 집중하는 사업장이 되었죠.

혜화경찰서에서도 112 신고가 1년 넘게 전국 1위를 기록할 정도였고요. 서울지방경찰청이나 경찰청에서도 핵심 주요 노사 분쟁 사업장이었고, 계속 그쪽에서 어떤 안을 내면 끝날지를 서비스연맹이 비선을 통해서 조율했던 거였죠. 거기를 통해 회사로부터 건너 건너서 나오는 안을 2011년 2~3월부터 계속 던졌습니다. 그때 초반에 나온 안이 “단협 불가, 해고자 12명 중에서 지부장, 사무장이었던 유명자, 오수영은 3년, 나머지는 18개월, 6개월 유예기간을 두고 단계별 복직, 황창훈은 복직이 불가하고 36개월×50만 원 지급할 테니 퇴사해라.” 이런 안까지도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 안을 서비스연맹 위원장이 초반부터 계속 강종숙, 유명자, 유득규를 만나면서 흘리고 타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이때부터 장기투쟁에 지쳐가고 빨리 끝내고 싶어 했던 조합원들과의 갈등이 불거지게 됩니다. 이 안이 던져지면서 갈라치기가 시작되었던 거죠. 서비스연맹에서 중재한답시고 2012년 4월에 최종적으로 우리한테 던진 안은 “해고자들은 모두 복직 시키겠다. 황창훈을 포함해서 유예기간 6개월인가 얘기를 했고, 그 다음에 단협은 복귀 후 일정을 잡아서 추후 논의한다.” 그때도 말 그대로 ‘선 복귀 후 단협’이었습니다.

일단 그것을 당시 학습지노조 중앙위원의 역할을 했던 유득규, 강종숙, 유명자 3인과 재능지부 임원인 오수영에게 던졌고, 거기에서 2:1:1로 갈렸습니다. 강종숙, 유명자는 반대, 오수영은 세모, 유득규는 그 안으로 교섭하자는 거였죠. 그렇게 해서 그 안을 거부 했더니 서비스연맹이 공식적으로 앞으로 재능지부 투쟁에 관여하는 일 없을 것이고, 지원하는 일도 없을 거다, 그리고 서울본부, 학습지 노조, 서비스 연맹 3 주체가 하고 있던 공투본도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2012년 4월부터 손 털고 나갔습니다. 그전에도 대단하게 연대하거나 지원한 것도 없었지만요. 그렇게 공식적으로 입장 밝혔고, 그러고 나니 회사도 연맹을 통해서 안 된다는 것을 결국 알기는 알았습니다. 결국 사측에서 공식적으로 5월에 학습지노조에 교섭 요청을 해왔고 5월 중순부터 교섭이 시작됐습니다. 투쟁하고 나서 처음으로 공식적인 교섭이 시작되었고, 5월 17일부터 7월 11일까지 11차례의 교섭을 했는데, 결국은 마지막까지 선 단협, 복직과 동시에 단협 체결을 끌어내지 못했습니다. 7월11일 최종적으로 교섭이 결렬됐고, 이후 사측에서는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문구만 바뀐 최종안을 8월 27일에 던졌어요. 우리는 본사 앞에서 하는 결의대회를 통해 8월 29일 “회사의 입장이 바뀌지 않는 한 앞으로 회사와 더 이상 대화는 없다”고 최종안에 대한 최후통첩을 사측에 합니다.

그 이후 이현숙 집행부에 있다가 해고되었던 자들과 타협을 통해 이 투쟁을 빨리 끝내고 싶어 했던 세력이 확실하게 손을 잡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회의석상에서 투쟁계획이나 실천에 관한 논의는 실질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게 됐습니다. 그런 논의가 이루어질 수 없도록 강종숙과 유명자의 폭언 폭행에 대한 사과와 해명요구를 계속하면서 지부 회의, 학습지 노조 중앙위가 계속 파행을 겪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 번도 회사 안을 받자고 공개적으로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계속 두 사람의 도덕성만을 문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자신들의 의도를 완전히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2012년 12월 공식적으로 전체 학습지 노조 임원들의 임기가 끝나는 시점에 임시대대를 요구하면서 대대에 연판장을 들고 옵니다. 한 번도 선거를 보류나 연기하거나 임원의 임기를 연장하겠다는 의도가 어느 의결기구에도 결정된 바가 없고 언급한 바도 없는데도 나머지 재능지부 해고자들의 서명을 받아서 먼저 선수를 쳤던 거죠. 내용상으로도 앞뒤도 맞지 않은 연판장이었는데, 이미 8월에 교섭이 결렬되자 유득규와 오수영이 사퇴합니다. 가장 중요한 교섭이 결렬되어 더 적극적으로 공세적인 투쟁을 펼쳐야 할 시기에 임원 두 명이 사퇴한 거죠. 그 의도야 어떠하든 당시 강종숙 위원장은 유득규를 설득했습니다. 아무 일도 시키지 않을 테니, 사측도 보고 있는데 그냥 직책만 유지해 달라고 했는데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스스로 사퇴했기 때문에 중앙회의 체제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결국은 12월 선거를 해야 한다고 했던 겁니다. 어찌 되었든 선관위를 꾸렸는데 현실적으로 투쟁하는 조합원들을 빼고 나면 사람이 없어서 현실적인 문제의식을 이야기했을 뿐인데, 이들은 선거연기나 임기연장을 막기 위한 선수를 쳤고, 선관위 통해서 대대에 연판장을 제출했습니다. 이에 의장인 강종숙위원장은 물론 대의원 모두 이의제기 없이 선거가 대의원 대회에서 결정되었습니다. 그 사안이 굉장한 논쟁이 될 줄 알았겠지만 막상 이렇게 되자 그들은 선관위를 꾸릴 수도 없었습니다. 이들이 그렇게 투쟁에 대한 고민보다 선거에 집착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나는 이후의 행보들에서 다 드러납니다. 투쟁을 마무리 할 정세였는데도 불구하고 조직내부 분열을 가시화시키며 종탑농성을 한 목적이 무엇이었는가는 이후 비대위 구성, 농성행태, 8·26합의 등으로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2월 11일이 설날이었고, 앞뒤로 5일간 연휴였습니다. 2월 2일 유득규가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만났더니 강종숙, 황창훈, 유명자 세 사람에게 고공농성을 하겠다고 통보했습니다. 누가 올라가는지를 알고 일단은 세 명 모두 반대했고, 사측과의 뭔가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굳이 그런 투쟁방식을 선택 할 상황이 아니었거든요. 어찌 되었든 회사의 안이 나올 상황이었고, 강종숙 동지 같은 경우 마지막에나 어쩔 수 없을 때 선택을 고민해야 하는 고공농성이란 자학적인 투쟁을 싫어했기 때문에 그 안에서도 엄청나게 싸웠습니다. 반대했는데도 결국 당사자들이 결의한다고 해서 그렇게 됐고, 날짜를 왜 굳이 설 연휴 전에 올라가느냐고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올라가자마자 회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 날 교섭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어요. 구두로는 2월 6일 저녁에 교섭요청이 왔고 다음날인 7일에 바로 교섭공문이 왔습니다. 아시다시피 고공농성 시작하고 곧바로 비대위를 띄웠어요. 회사에서도 빠르게 대응하는데 강종숙이 대표자로 있는 학습지노조에 공문을 보낼 수 없으니까요. 비대위에서는 2월 9일에 연휴가 끝난 다음 2월 13일 날 공문을 보내고 13일 이후에 교섭하는 것으로 하자고 결정했습니다. 회사는 설 연휴 때도 교섭하자고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시기에 회사에 보내기로 한 공문도 안 보내고 총회를 열어서 비대위부터 추인했더라고요. 비대위를 띄우는 데서부터 다시 노조권력을 잡고자 했던 이현숙 전(前) 집행부 어용세력과 이 투쟁을 빨리 끝내고자 타협하고 싶어했던 유득규, 여민희, 오수영 세력의 이해관계가 맞으면서 손을 잡고 다수파를 만들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사회자: 한남동 라인이라는 건 경찰청 정보국 경제분실을 말하는 건가요?


유명자: 네. 맞아요.


사회자: 2010년에 네 명이 추가로 해고된 다음에 서비스연맹이 개입하기 시작했다고 하셨는데, 그전에는 개입 안 하고 방관만 하고 있었던 건가요?


유명자: 2007년 12월 21일 천막 농성 투쟁하면서 맨 날 두드려 맞으니까, 어쩔 수 없이 서비스연맹 부위원장이 상근자 한두 명 데리고 몇 번 오긴 했었는데, 그 뒤로는 전혀 오지 않았어요. 지대위가 꾸려지면서 참가조직 동지들이 어떻게 되던지 연맹의 발목을 잡아야 한다고 계속 얘기했습니다. 결국 2008년 7월경에 그 당시 수석 부본부장인 박승희 동지가 더 이상 이렇게 가면 안 되지 않느냐, 2009년에는 공투본을 띄우자며 서비스연맹, 서울본부, 학습지 주체가 뭐든지 해보자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공투본이 아니었고 3자가 만나자 그래서 2008년 9월경 서울본부가 계속 얘기하니까 서비스연맹 위원장도 나왔던 거였고요. 그래서 세 주체가 공투본을 띄우자고 합의하고 8월경에 띄웠는데 9월 추석 가까이 와서 서비스연맹 위원장 강규혁이 추석 안에 끝내자고 하면서 자기가 이런 안을 짜봤다면서 얘기하는 게, 단협은 당장 풀지 못하겠다, 대신 복직 이후 단협을 체결하겠다는 각서가 담긴 공증을 회사한테 받자고.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면서 단협을 뒤로 뺏어요. 해고자들 얘기하면서 황창훈은 복직이 힘들다고 했고. 해고자마다 해고형태가 달라서 계속 강규혁이 갈라치기를 했던 거죠.


사회자: 수지 동지는 많은 투쟁사업장 중에서도 유독 이 두 군데 다 연대를 하시고 계신데요, 재능과 개발원, 일종의 사고 사업장에 가까운 이런 곳에 특별히 연대하게 된 계기나 이유가 있나요?


수지: 학교에서 ‘달려라 진보’라고 이름은 되게 거창한데 PD 계열 운동을 하고 있던 선배들이 너무 제각기 따로따로 하다가 잘 안 되니까 한 번 모여서 해보자고 만든 거예요. 저는 학생회 운동을 하다가 그런 게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어서 2012년부터 활동을 하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연대도 다니고 쌍용차 투쟁 등에 가기 시작했어요. 학교 청소노동자 분들이 일반노조에 소속되어 계신데 거기 연대를 하는 와중에 학교에서 5분이면 보건복지정보개발원 건물에 갈 수 있는데 어떻게 안 가고 있냐 그런 얘기가 나와서 사실 처음에는 그분들과 같이 갔던 거였어요. 아마 정보개발원 투쟁 시작하고 얼마 안 됐을 때였을 거예요. 솔직히 개발원은 거리가 가까워서 시작한 거고, 재능투쟁은 쌍용차랑 현대차 투쟁이 크게 이슈화되고 유명해지면서 시청에서 집회를 많이 했잖아요. 거기를 학생들끼리 모여서 재미있으니까 자주 가고 하다 보니 바로 맞은편에 재능이 있는 거예요. 횡단보도만 건너면 재능이 있는데, 상황이 많이 달랐죠. 쌍용차는 항상 사람 많고 북적거리고 카페도 있는데, 재능은 지금 하는 건지 마는 건지. 사람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고. 농성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데 파라솔 하나 달랑 있고, 농성하는 건지 무슨 시위를 하는 건지 잘 모르는 와중에 거기도 가봐야겠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가게 되었죠. 처음에는 집회만 참여하다가 집회에서 갑자기 저한테 발언을 시키고 노래를 시키고 점점 적극적으로 하게 되면서 처음 본격적으로 한 것이 저희끼리 날 정해서 파라솔에서 농성하실 때 일주일에 한 번씩 몇 시간 농성 지키는 것부터 했고, 나중에 혜화로 농성장을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연대하게 되었죠.
 

사회자: 재능교육 투쟁이나 정보개발원 투쟁보다 앞서서 먼저 가야 한다고 했던 곳은?


수지: 쌍용차와 같이 큰 집회, 그런 곳을 가고 싶어 했고 상대적으로 열악하고 소수인 사업장에 지속해서 연대하는 것은 우리도 힘들지 않느냐, 우리도 소수인데 어떻게 우리가 소수를 연대하느냐, 그런 논쟁이 있었죠. 근게 결국 그게 논쟁이 흐지부지 될 수밖에 없는 게, 어쨌든 연대를 하는 사람만 계속하게 된다는 거죠. 연대는 그냥 하면 되는 거예요. 저희 입장에서는 집회 가면 되는 것이고 가기 싫으면 안 가면 되는 것이고.
 

사회자: 투쟁사업장에서 내부투쟁(대립)이 발생하면서 연대 세력의 지형도 변화했습니다. 예를 들어 2~3년 전엔 재능교육 투쟁에 저와 같이 연대했던 사람들이 지금은 반대쪽에 가 있고, 연대하는 입장에서는 단순히 의견차이일 수도 있는 데 다른 집회에서 만나도 서먹서먹해지고, 어떤 경우는 아예 아는 체 하지 않는 경우도 있더군요. 연대하는 사람이 이 정도인데,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그런 것들이 훨씬 더 노골적으로 많이 보일 것 같은데,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십시오. 그리고 장기투쟁과 내부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소수가 되면서 연대세력의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고 볼 수도 있는데, 연대의 확장에 대한 고민이나 방법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봉혜영: 저희 같은 경우는 처음에는 상급단체(서울일반노조)에서 집중을 해주는 척했는데, 그래서 일반노조 조합원들이 많이 왔었어요. 동국대 청소노동자들이 제일 많이 오셨고, 학생들도 같이 와서 숫자상으로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내부문제가 발생하니까 청소노동자들은 상급단체인 서울일반노조의 손을 들어주고 저희를 외면했습니다. 결국 학생들만 남게 되면서 연대 인원은 지금처럼 줄어들게 되었죠. 하지만 훨씬 더 많이 투쟁하는 동지들을 만날 수 있었고, 저희는 오히려 상급단체를 뛰어넘는 투쟁을 할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투쟁을 시작했을 때부터 재능교육 동지들 포함 그런 동지들을 만나서 같이 투쟁을 하고 싶었는데, 제가 생각하는 투쟁은 그런 투쟁이었는데, 상급단체를 통해 투쟁하다 보니 거의 7~8개월이 다 되도록 그런 관계를 전혀 만들지 못했습니다. 우리 스스로 그것을 깨고 새로운 연대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의가 있고, 재능교육 투쟁 관련해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제 입장이 분명해지는 계기가 되었어요. 그 과정에서 모호한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는 동지들의 모습도 되게 많이 보게 되었고요. 자신들의 연대가 끊길까 봐 자기가 명확하게 누굴 지지하고 왜 지지하는지 구분하지 않고 그런 태도를 보였을 때 답답했어요.

투쟁하는 동지들이 현장에서 가장 첨예하게 느끼는 부분들을 상급단체 상근자들은 한 치 건너 두 치라서 잘 모를 수도 있지만, 함께 투쟁하고 연대하는 동지들은 눈으로 직접 보고 느끼기 때문에, 어용 문제이든, 운동의 방향에 대해서든, 정말 뼈저리게 보고 느끼면서도 오랫동안 투쟁했던 동지들이 자기 입장이 없다는 것에 어느 순간 몹시 화가 났어요. 그래서 목소리를 좀 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재능투쟁 관련해서 아주 가볍게 페이스북에 글 한 번 올리고 저희 집회에서 제 입장을 아주 살짝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그게 일파만파 커져서, 제가 그런 발언 한마디 할 때마다 연대단위가 떨어져 나간다는 이야기가 공대위에서 나왔어요.


사회자: 공식적으로 연대를 안 하겠다고 나간 단위도 있나요?


봉혜영: 아니 없지요. 하지만 이야기가 다시 들려오죠. 저의 발언이 연대 온 동지들을 배려하지 않은 불편한 발언이라면서 그것은 곧 우리 집회에 연대 오지 말라는 이야기와 같다고. 그리고 실제 연대가 줄었어요.


사회자: 장기 투쟁 사업장에서 손 하나라도 아쉬운 시점이 돼버리면 분회장님처럼 그런 얘기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게 딜레마일 것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도 분회장님은 그런 발언을 거침없이 하셨던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나요?


봉혜영: 저는 어차피 상급단체 외면을 받고, 새롭게 시작되는 투쟁이었기 때문에 더는 고립되어도 잃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 명이 남든 두 명이 남든 투쟁을 하겠다고 결심을 하기도 했고. 사측과 맞서 싸우는데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끊임없이 싸워나가는 데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한 명의 연대 숫자가 중요하긴 하죠. 왜냐하면, 맨 날 사측이 머릿수 세고 있으니까. 열 명 오는 것, 이십 명 오는 것, 분명히 중요해요. 맨 날 오십 명 오다가 상급단체 떨어지니까 이십 명을 못 채우네. 그런 파악 다 되고 있지만, 내 투쟁이 정리돼서 끝나는 것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파급효과가 있잖아요. 이렇게 내 투쟁이 어정쩡하게 상급단체 의도대로 하면, 상급단체 말 안 들으면 원하는 투쟁 못 한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셈이죠. 그래서 나만의 투쟁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까 우리가 잘못된 부분들 인정하고 하나씩 고쳐 나가자는 거예요. 한 명의 손이라도 아쉽지만, 그 손이 어떤 손인지 명확하게 진단하고 손을 잡자, 상급단체 관료들이 못 하는 것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사회자: 답변 잘 들었습니다. 사실 유명자 동지가 제일 가슴앓이를 많이 하셨을 거로 생각하는데, 당장 작년만 해도 같이했던 사람들 상당수가 안 보이기도 하고,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와 관련해서도 한 차례 논란이 있었고, 서부비정규센터와 종탑세력이 연대하는 이런 문제와 관련해서도 하실 말씀이 많으실 것 같네요.


유명자: 운동이 점점 상층에서는 관료화를 넘어 어용화로 아니 우경화로 가는 게 있고, 현장단위에서는 이게 친소관계로 가요. 점점 더 심해지는데 우리 같은 경우는 모 진보정당은 내부문제로 서로 반대하는 그룹이면 각각 환구단과 종탑으로 갈라져 연대하고 사실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오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사실은 그 당에서 영향력 있는 몇 동지들이 재능집회에 오지만, 집중결의대회와 같은 비교적 큰 집회 때 자기 당원들을 조직하지 못해요. 왜냐하면 당에서 재능투쟁 연대 가자고 하면 그 안에서 벌어질 일이 뻔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가장 중심에서 처음으로 갈등 관계가 대놓고 드러난 곳이 서부비정규센터였어요. 나중에 들어보니까 거기는 투쟁하는 곳은 특별히 정치 입장을 가리지 않고 다 연대한다는 식으로 활동을 해왔고, 종탑세력 일부와는 지역주민, 회원, 운영위원 등의 관계이기도 했고.


사회자: 최근 들어서 어용화의 한 특징 증의 하나가 상급단체가 어용세력으로 등장하는 건데 거기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제가 보기에 연맹이나 산별노조가 어용화 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의 하나는 투쟁에 의한 교섭력으로 문제를 푸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의존하기 시작하면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교섭이 안 풀리면 국회의원 찾아가거나 하는 방식이 가끔 통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아무래도 자본은 정치권력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두려워하는 속성이 있기 마련이고. 소문이 나면은 자기네들 이미지에 문제가 생기니까. 그러니 이 방식이 쉬운 방식이 되는 거죠. 굳이 회사 앞에서 집회 안 해도 되고, 돈 들이지 않아도 국회의원 한 명한테 가서 잘 해서 나중에 후원금 좀 주고. 이런 게 상급단체들의 어용성을 꽤 심화시키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유명자: 서비스연맹만의 문제가 아니라 상급단체들에 다 벌어지는 일들이죠. 현장투쟁에 의해서가 아닌 그런 방식을 통해서 교섭안을 받아 올 때 수혜자가 누구냐. 상급단체 장이예요. 그런 활동을 하면서 상층부에서 자리매김을 하는 가죠. 그럼 꼭 거기 아니라 딴 데 가서도 그 역할을 할 수 있거든요. 그런 식으로 인맥 고리를 붙잡고서.


봉혜영: 제 생각에는 소위 진보세력이 정권을 잡으면서 더 심해진 것 같아요. 노동세력이 기존에는 같은 테이블에서 권력관계를 다투지 못하고 있다가 국회의원이 되거나 노사정위원회 같은 데 들어가니까 권력의 맛을 보고 어용화 되는 면이 있지 않을까요. 그게 점점 밑에까지 내려오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면서 오늘날 이런 상황에 다다른 거죠.


유명자: 결론은 비슷한데 노동자 정치세력화하면서 비례대표제, 정당명부제로 십 수 명 국회의원 나오니까 다 거기에만 매달리는 거죠. 정치세력화가 아주 독약 같아요. 신생노조를 조직해서 노조 만들고 조합원들 교육하는 것도 우리 때하고 결이 달라요. 내용 자체가 달라요. 요즘 불러들이는 강사들 봐요. 다 색깔이 드러나요.


사회자: 수지 동지께 여쭙겠습니다. 수지 동지가 보시는 어용의 규정은 어떤 것인지? 앞으로 ‘달려라 진보’가 연대하는 원칙에 대해서 내부에서 논의했던 것은 어떤 것인지, 반대로 어용이 아닌 투쟁하는 세력은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


수지: 전 좀 다르게 대답하고 싶은 게, 저는 상급단체라든지 자신의 지위라든지 자신의 권위 이런 것들을 놓지 못하는 순간 어용이 된다고 저는 그렇게 느껴요. 그와 동시에 제가 민주노조운동을 하면서 어렵게 느끼는 건 그렇다면 그런 권위를 완전히 버리는 사람들만 우리와 같이 투쟁하느냐? 그것도 아니에요. 저희와 같이 공대위나 지대위를 꾸려서 같이 운동하는 사람들도 결국은 다 거기에 얽매여 있어요. 마음속으로는 여기가 옳다고 생각하니까, 같이 투쟁하고 연대하겠지만, 사실 속으로는 자기도 더 멋있는 투쟁하고 싶고, 더 좋고 큰 데 가서 발언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어용이 되기는 싫으니까 와서 연대하지만, 제가 느끼기에 왜 우리와 같이 투쟁하시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거든요. 저분들은 진짜 우리 투쟁에 동의해서 같이 하시느냐고 묻고 싶지만, 사실 입 밖으로는 내기 어렵지요. 이분들과 같이 투쟁하면서 굉장히 애매한 것이 주체들이 노동자로서 노동자 원칙을 지켜 투쟁을 해 나가는데, 이분들은 사실 자기 인생이나 운동맥락에서 노동자성이 별로 보이지 않아요.

학생들이 운동하는 것을 봐도 열심히 운동하는 학생이긴 한데, 그 학생이 별로 가난하지도 않고 살아가는데 어려움도 없고 결국은 제가 느끼기에는 그 친구가 투쟁을 열심히 할 수 있는 건 사실 부모님의 도움과 여러 가지 자기 인생의 조건들이 뒷받침해 주니까, 남들보다 열심히 투쟁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 때가 있어요. 이런 세력들이 많이 보이면서 사실은 젊은 세대에서부터 맑스주의를 내세운 권위주의나 계몽주의 같은 것들을 더 많이 흡수하고, 그러면서 자기가 권위의식을 갖게 되어, 사람들을 계몽해야 한다거나, 데려와야 한다거나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운동을 해 나가는 세력들도 많거든요. 그 친구들이 어쨌든 이렇게 같이 와서 운동하고, 틀린 이야기는 하지 않기 때문에 같이 하지만 저렇게 운동하면 과연 민주노조운동인 것인가? 그건 아니라고 보죠. 하지만 그런 세력까지 다 정리하고 가기에는 우리가 너무 소수에요. 그걸 어떻게 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전 더 많아요.


사회자: 말씀하셨던 것 중에 좋은 얘기인데 학생운동세력들이 노동자투쟁에 연대하면서, 관료주의를 일찌감치 습득하고 그것에 젖어서 사회에 나가서 상급조직으로 불리는 곳에서도 똑같은 패턴의 운동을 버릇처럼 또다시 하게 되는 악순환, 이 말씀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유명자: 말 그대로 학생조직에 특히 뒤에 ‘지도 세력’이라 할 수 있는 단체가 있는 학생들이 특히 심하죠.


수지: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자기 생각이 없는 친구들이 많아요.


유명자: 모 정치단체 학생단위가 빠져나갔는데, 아무리 중앙에서 결정했더라도 단 한 명도 자기 소신껏 행동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우리에게 연대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떠나서 미래가 너무 암담했어요.


사회자: 이제 막바지인데 정리를 해야 해서요, 이번 질문은 좀 다른 차원인데 투쟁이 현재 상황에 이르기까지 자기비판의 지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유명자: 재능투쟁을 하면서 원칙을 지키는 투쟁이라 하는데 별로 맘에 안 들어요. 그 얘기 몇 번 했는데, 사실은 처음 투쟁을 할 때 하고자 했던 기본에도 미치지 못하는 거예요. 기본을 지키지 않고 자본에 유연해지면 어용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어용으로 가는 과정은 자리와 직책과 권력을 놓지 않으려고 하면 100% 어용화 되는 척도라고 생각해요. 그들은 쿠데타를 통하든 어용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든 결국 학습지 노조 권력을 장악했어요. 소규모고 작은 조직이고 떠나서 어찌됐던 그걸 붙잡은 거죠. 저는 재능이 원칙을 지키는 척도가 되는 투쟁사업장처럼 된 현실도 너무 화가 나고 서글퍼요. 투쟁 마무리될 때는 처음에 무엇 때문에 투쟁했는지조차 본질도 없어지고 결국 투쟁과정에서 발생한 조합원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마무리 합의가 되곤 해요. 그래서 강종숙 동지와 저는 그런 식으로 투쟁의 마무리에 가도 본래 요구의 본질이 없어지는 그런 합의만은 하지 말자고 했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현장에서 습득한 사람으로 보기에는, 정말 그리고 자기비판의 지점이 있다면 강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항상 이 얘기를 해요. 투쟁 2,500일 하면서 한순간도 후회한 적이 없는데, 단 하나 후회한 것은 2010년 12월 이현숙 집행부 어용세력들이 해고자이기에 투쟁하겠다고 이름 올렸을 때, 철저하게 2007년 임단협에 대한 자기비판과 공개사과, 그리고 반성문 쓰게 하지 못한 거예요, 당시 제가 그것을 내부적으로 제기했는데 나머지 사람들이 “해고돼서 왔는데”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제가 더 강하게 제기 할 수 없었던 것은 12명의 해고자 중에 이현숙 집행부보다 못한 자들이 있었거든요. 그들을 거기까지 붙들고 와서 1,000일, 1,500일, 1,800일 함께 투쟁한 것처럼 끌고 온 강종숙 위원장과 지부장인 저의 원천적인 잘못이 있어요. 사측과 연대 동지들에게 알려 질까봐 싸안고 강하게 쳐내지 못했어요. 분명한 어용세력인 이현숙 집행부가 들어올 때 그걸 막지 못 했던 것, 결국은 그게 씨앗이 돼서 저와 첫날부터 투쟁했던 조합원들이 함께 손을 잡고 다수파가 되도록 어용세력을 키워 준 것이 지금도 후회스럽습니다.

또 하나는 내면적인 부분인데, 제가 그들과 회의 자리 등에서 논쟁하고 설득할 때 좀 더 논리적이고 냉철한 이성으로 상대를 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어요. 제 성향의 문제도 있지만, 저는 그들을 도저히 용납할 수도 상식적으로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어요. 가장 중요한 시기에 누가 봐도 투쟁을 분탕질 치기 위해서, 더욱이 이현숙이 폭언·폭행당했다는 것을 눈으로 본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집단적으로 공개사과와 해명을 요구하면서 지부장의 자질을 문제 삼고 평가하는 수작을 부릴 때, 제가 좀 더 냉철하게 판단하고 세련되게 대처를 해야 했는데 그걸 하지 못한 것을 자기비판합니다. 활동가로서 아니라 대중조직 이끄는 지부장으로서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 생각했어야 해요. 장기 투쟁하는 조직의 리더로서 중요한 시기에 내 행동이 이성적이고 냉철했어야 어용을 물리칠 수 있었는데 …

 

봉혜영: 저는 서울일반노조에 처음 들어갔을 때 전술과 관련해서 제가 원했던 전술이 있었어요. 사실 전술이라고 할 것도 없었지만 제가 낸 계획에 대해서 자기네들이 동력을 맞추지 못해 해 나갈 자신이 없어 그랬는지 어쨌는지 사사건건 반대를 했었는데, 그런 몇 가지를 실천해보지 못한 거에 굉장히 아쉬움이 많아요. 지금 사측이 시간이 2년이 되니까 자기 방어력이 생겨버렸지만, 처음에 그들도 어리바리 했을 때 그런 전술을 밀어 붙였으면 빨리 문제가 해결되어서 상급단체와 그런 어려움도 겪지 않고 바로 해결될 수도 있었던 건데, 나 스스로 내 안에 갇혀서 명확하게 표현하지 못한 것이 있고요. 그 이후에 쓰레기 안이 나왔을 때 저도 마찬가지로 이성적인 대처보다는 감정적으로 용납할 수가 없었어요. 이 바닥에서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 나냐고 하면서 말이에요. 저들과 합리적으로 싸우고 절차에 맞게 똑같이 대응하면서 제대로 처리를 못 했던 거죠. 다른 세력을 규합해서 판을 키웠어야 했었는데 그 타이밍을 놓친 것이 많이 아쉽고 그렇습니다.


사회자: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얘기가 있어요. 책에서 읽은 건데 일본 전공투 시절 학생들이 점거하던 동경대 강당에 “연대를 구해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고, 힘 미치지 못해 쓰러지는 것을 개의치 않지만, 힘 다하지 않고 꺾이는 것을 거부 한다”라고 낙서가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엄청난 연대투쟁을 해왔는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본의 아니게 고립된 측면들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연대 세력이 구해지기보다 쪼개진 측면들이 있고, 이 문제를 타개하는 것이 투쟁의 승리를 위해 나아가는 한 발 전진에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런 의미에서 향후 계획들과 현재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 고민하시는 것이 있다면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해 주시고, 오늘 간담회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유명자: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 주체들이 더는 할 게 없어요. 우리는 이대로 가면 되는 거고. 이 지경까지 온 것에 대해서 사실 할 말이 너무 많죠. 그리고 나는 연대가 갈라졌다 생각하지 않아요. 기본적으로 이미 우리 투쟁에 분열로 인해서 말로만 듣고, 막연했던 세력들이 정체를 확실하게 드러냈어요. 확실하게 갈라졌어요. 좌파 블록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정치조직에서도. 연대세력이 갈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를 공식적으로 지원하고 연대해야 할 세력들이 아예 빠진 거예요. 이제는 자기 합리화, 자기변명을 가지고 빠진 거죠. 그 이외에는 우리는 어느 당이 왔다고 해도 소수세력이었고, 어느 조직이 들어왔다고 해도 항상 소수세력이었어요. 개인과 소수가 연대하면서 고립되기도 하고 연대가 확장되지 않은 투쟁을 해왔지만, 연대를 가져오기 위해 끊임없이 사업을 진행해왔기 때문에, 연대세력이 지금 줄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노동조합을 처음 시작하고 간부가 되고 가서 현장의 조합원들을 교육하라고 하는데, 노동조합 활동 쪽으로 제가 가방끈이 짧아서 제 발로 교육센터를 찾아갔던 적이 있어요. 거기서 배운 거라고는 노동조합은 자본에 굴복하면 안 된다, 자본과 타협하면 안 된다, 이 두 가지 밖에 없어요. 저는 그게 기본이라고 생각해요. 그 소신이 바뀌지 않는 한 지금처럼 싸울 거고, 절대 이 싸움을 지고 싶지 않아요. 사실은 8월 26일 합의하고 나서 복귀자들이 12월 31일 안에 제발 단협 체결해주길 바랐어요. 저도 너무 힘들어서, 속으로는 정말 어용세력이라 하더라도 체결하라고. 그런데 체결도 못 했고 7개월 넘어서 체결한 단협에는 내가 자존심 상해서 투쟁을 접을 수가 없었어요. 최소한 노동조합 활동을 하고, 활동가라는 뭘 씌우지 않아도 왜 노동조합을 왜 만들었는지, 처음의 마음이라면 이 투쟁을 접을 수 없어요. 어용세력에 패하는 투쟁은 하고 싶지 않아요. 누구 때문이 아니고, 무엇 때문도 아니고,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요.


봉혜영: 처음 신규채용 안 나왔을 때도 기존에 같이 연대하던 동지들 증에 떨어져 나갈 사람들은 점차 떨어져 나갔고, 공대위 만들어지고 나서 2년짜리 신규 채용 안 나왔을 때는 주변에 그런 얘기도 있었어요. 노조 이름으로 체결하고 들어가면 2년짜리 신규채용 안 정도는 괜찮지 않으냐는 이야기가 있었죠. 이렇게 두 차례 갈라치기가 됐을 때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저는 그들과 같이 가지 않기 위해서 투쟁하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고립이라 생각하지 않고, 고립됐다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과 같이 갈 수 없고, 절대 같이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자: 수지 동지! 마지막으로 향후 계속 연대를 할 것인데 한 마디.


수지: 저는 저를 포함한 연대 동지들한테 한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나를 포함해서 항상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연대를 했으면 좋겠어요. 이런 말을 하고 싶어요. 우리가 아무도 오지 않는 투쟁사업장에 연대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우리가 잘하는 것처럼, 여기 집회에 와서 내가 이 투쟁을 지지한다고 선언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책임을 다한 것처럼 그런 식으로 자기의 운동을 만들어 가지 마라. 제발 어용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투쟁을 합리화시키지 말고 제발 똑바로 주체의식을 가지고 연대에 임하자. 이런 말을 하고 싶어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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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31 11:19 2015/08/31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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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2015/08/27 13:05

시진핑 중국의 젠더 전쟁과 사회 안정: 다섯 구금자의 친구와의 인터뷰

지난 3월 7일 다섯 명의 중국 페미니스트가 중국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4월 중순까지 한 달이 넘도록 구금된 사건이 있었다. 이에 대해 촹(闯)이 진행한 인터뷰의 영역본이 chuangcn.org과 libcom.net에 올라왔다. 중역하였다는 점에서 온전히 전달하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지만 이 사건을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싣는다. 주석은 번역에 관한 것이나 기사 링크 등을 제외하고 옮겼다. [편집자]

촹(闯, Chuǎng)|김사자 옮김
 

[3호_초점_시진핑_중국의_젠더_전쟁과_사회안정.pdf (642.40 KB) 다운받기]

 

Q: 당신은 매년 양회 기간에 몇몇 사람들이 구금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여성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고 했다. 그들이 계획한 것이 그렇게 위협적이지 않기 때문인가?

사실 그 행동 자체와 관련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매년 양회 기간에 정부가 사람들을 구금하여 어떠한 의지를 표명한다 하더라도 특정한 운동을 대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다른 시기에 여러 운동들의 결합이 주목을 끈다면 정부는 그들을 구금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 다섯 사람은 모두 기본적인 젠더 평등에 관한 운동을 한다. 몇몇 다른 것들과 함께. 예를 들어 왕만은 빈민에 관심이 있고, 웨이팅팅은 바이섹슈얼리티에. 그러나 그들이 주로 하는 것은 젠더평등이다. 중국에서는 “남녀평등”이 기본적인 국가 정책이다! (웃음) 그들 모두는 그들의 작업을 ‘법의 대중화’라고 불렀다.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법이 있고, 그 자세한 내용은 이렇고, 우리 모두는 우리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이 법에 기댈 수 있고 … ” 그들은 법 같은 것들에 반대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은 오히려 항상 온건했다. 그들은 아주 드물게 시위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들이 하는 일의 대부분은 여성들과 LGBT 그룹 등을 위한 워크숍을 운영하는 것이다. 혹은 거리로 나가 퍼포먼스를 보이거나. 해를 끼치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구금된 것을 믿을 수 없다. 난 항상 HIV 활동가들이 젠더평등 활동가들에 비해 먼저 구금될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Q: 이 구금이 중국중앙방송(CCTV)의 춘절전야제(Spring Festival Gala)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청원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분명 관계는 있다. 그러나 생각만큼 크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젠더평등 활동가들이 시진핑 집권기에 체포될 수 있겠다고 생각한 일은 예전에도 있었다. 2013년 시진핑이 막 집권했을 때 난 지금 구금되어있는 사람 중 일부와 함께 대학생들과 젠더평등에 관한 워크숍을 진행하기 위해 광저우에 있었다. 내가 한 것 중 가장 어려운 워크숍이었다. 우리는 호텔에서 진행하기 위해 준비했다. 30여명 정도였는데, 들어가려고 하자마자 쫓겨났다. 다른 호텔 세 곳을 더 알아봤다. 모두 우리를 들여보내려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지금 상황과 아주 유사하다. 광둥에서 온 학생들은 모두 지도원으로부터 참가하지 말라는 전화를 받았으며, 그 중 일부는 이로 인해 참여를 하지 않게 되었다. 이후 대학은 그들을 계속해서 괴롭혔다. 비밀경찰은 하루 종일 우리를 미행했다. 시진핑의 집권이 젠더평등에는 재앙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 당시에 이미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었다.

 

Q: 당시 누군가에게 이 사건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정부가 특별히 젠더평등을 표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 전반에 대한 일반적인 탄압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동의하지 않는 것인가?

그 워크숍을 조직한 NGO는 수년간 적어도 1년에 10회의 워크숍을 열었고, 대부분 젠더와 관련 없는 것들이었다. 그 행사만이 표적이 된 것이었다. 특히 베이징에서는 LGBT 관련활동 또한 표적이 되었다. 작년 6월 4일을 전후로 적어도 20개의 LGBT 관련 행사가 취소압력을 받았다. 심지어 함께 영화를 보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Q: 그 행사들은 모두 같은 사람들에 의해 조직된 것이었나?

아니다. 여러 그룹이 서로 다른 행사를 준비했다. 공통점은 LGBT 관련 주제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이다. 이제 NGO 모임에서 사람들은 “너 LGBT 관련 활동을 하는구나. 너 정치적으로 위험하겠다.”라고 말한다. 내 동료가 한 얘기다. 두려운 일이다.

 

Q: 그러니까 당신은 시진핑 정부의 시민사회 탄압이 특별히 LGBT와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시진핑이 집권한 이래 ‘전통적인 중국 가족의 가치’를 강조해왔다. 펑리위안은 아주 성공한 예술가이지만 시진핑이 집권한 이래 언론은 주부로서의 이미지만을 반복해서 비추고 있다. 중국중앙방송의 춘절전야제도 마찬가지다. 계속 “가족, 가족, 가족 … ”을 강조하고 있다.

 

Q: 시진핑 집권 직후 그가 전통적인 여성관 같은 것에 대해 연설을 했다고 들었다.

맞다. 요즘도 비슷한 말을 했다. 나도 오늘 읽었다. 확인해보고 알려주겠다.

 

Q: 요점이 뭔가?

간단히 말해서 중국 전통 문화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들은 가정에서 그들의 자연스러운 노동을 해야 한다는 …

 

Q: 여성의 자연스러운 노동이 뭔가?

당연히 가사노동이다! (웃음)

 

Q: 시진핑이 그 단어를 사용했나?

그렇다.

 

Q: 흥미롭다. 왜냐하면 젠더와 노동을 직접적으로 연결하기 때문이다. 여성들을 가정으로 돌려보내려는 새로운 노력과 같은 지난 몇 년간의 가부장제 부활이 자본주의 위기와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 있다. 자본은 더 이상 임금노동관계를 통해 그만큼의 노동자들을 흡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사노동과 같은 비임금노동 형태의 노동으로 돌려보냄으로써 ‘잉여인구’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중국에 적용할 수 있는 분석이라고 생각하는가?

확신하진 못하겠다. 지난 몇 년간 모두가 말해온 ‘남아 위기’를 말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다. (웃음) 그들은 학교와 직장 등에서 여성의 점진적인 진전이 남아들의 위기를 초래한다고 생각한다.

 

Q: 여성이 결혼 대신에 그들만의 경력을 추구한다면 남자들이 결혼할 상대를 찾기 어려워진다는 건가?

그건 한 측면이다. 그들은 단지 여성이 남성에 비해 성공하는 것이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여성이 대학 신입생의 51%를 넘었다. 50%를 넘어서기 시작할 때 교육학자들은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안 돼. 우리 교육제도에 문제가 있는 거야. 여자아이들에게 너무 잘 해준 … ”

 

Q: 누가 그런 얘기를 하는가?

뉴스를 보라. 전국인민대표대회(CPCCC)는 공공연하게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2013년엔가 2014년에도 루오라는 성을 가진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성원이 여자는 대학원에 가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 박사학위 담당 교수다. 무서운 일이다.

 

Q: 그의 논리가 뭔가?

여성이 대학원에 가면 남성들이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거다.

 

Q: 정치인이나 교수라기보다는 고리타분한 아버지가 하는 말 같다.

중국에서는 여성들이 결혼하지 않는 것에 대해 모두 걱정한다.(웃음) 남성이 부인을 가질 수 있을지 없을지를 걱정한다. 결혼을 하고 싶어 하는지와 상관없이.

 

Q; 그럼 이건 경제적 이유와는 관계가 없다는 건가? 여성과 남성이 일자리를 가지고 경쟁하는 것에 대한 제기가 있는가? 다른 나라들에서 여성들이 공격당하는 것의 일부처럼 보인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중국은 여성이 가정 밖에서 일하는 것을 막은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정부는 노동력이 낭비되는 것을 원치 않으니까. 중국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유지하려고 한다. 이는 모든 노동력의 배치를 요구하기 때문에 여성들이 가정 밖에서 일하지 말라고 한 적이 없다.

 

Q: 그러니까 집 밖에서도 안에서도 일하라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 또한 임금은 남성보다 적다.

 

Q: 왜 정부가 이 문제에 개입하는가?

글쎄 … 여성의 지위가 남성에 비해 높아지면 남성이 어디 가서 화를 풀겠는가? 집 밖에서 남성이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풀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생각할 것이다. “정치적 개혁이 필요해. 혁명을 원해. 정부를 엎어버리고 싶어.” 등등. (웃음) 그렇지 않다면 다른 출구가 필요하다. 지금은 그 출구가 모든 가사노동을 여성들에게 몰아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화가 난다면 가정폭력으로 분출할 수 있다. 부인을 때려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처벌받지 않는다. 사회 안정을 위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만약 내가 봉기가 적고 안정적인 나라를 원한다면, 사람들이 개혁을 원하고 있을 때 남성들은 상대적으로 중립적일 수 있다. 여성들이 봉기를 준비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런 봉기를 피하기 위해서는 남성들의 스트레스를 여성들에게 향하도록 하면 된다.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쉬운 방법이다.

 

Q: 당신은 가부장제와 사회안정의 유지라는 목표가 구금의 주요 원인이라고 보는 건가?

그렇다. 처음엔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돌아보니 이 구금은 고위층에 의해 사전에 준비된 것임에 틀림없다. 마이지와 웨이팅팅이 연행된 3월 6일 우리는 특별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젠더 관련 NGO들은 종종 심문을 당하고 24시간 안에 풀려났기 때문이다.

 

Q: 그들이 처음으로 연행된 것인가?

아니다. 6일에 연행된 렌민대학교 학생이 처음이었다. 렌민대학교는 우리가 그녀와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또한 처음 풀려난 사람이기도 하다. 그녀의 성은 유다.

 

Q: 6일에 다투가 10시간 넘게 심문 당했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지역경찰은 광저우의 다투와 항저우의 롱롱을 가택연금에 처했다. 다투는 호텔에 구금되었다. 롱롱은 시외로 나가 항저우에 있지 않았는데, 그녀가 비행기를 타고 항저우로 도착하자마자 체포했다. 처음에 나는 광저우와 항저우 지역 경찰들도 지금 이게 어떤 상황인지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둘 모두에게 잘 대해줬다. 심지어 우리와 연락하도록 휴대전화도 사용하게 해줬다. 그들은 집에 가서 저녁을 먹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7일 늦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8일 아침까지도 난 그 소식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베이징의 경찰이 와서 그들을 데리고 갔다.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베이징 경찰이 마이지의 컴퓨터를 뒤져서 무언가를 찾아내어 다투와 롱롱을 구금하는데 사용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왜냐하면 베이징 경찰을 항저우와 광저우에 아직 보내지 않은 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찰이 만약 이를 미리 계획한 것이 아니라면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Q: 당신은 24시간에 대해 언급했는가?

24시간 동안 두 가지 법적 요구가 있었다. 첫째, 경찰이 구금된 자들의 가족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공식적으로 만나지 못했다. 따라서 이 부분은 명백히 불법이다. 둘째, 경찰은 구금된 자들이 혐의를 받고 있는 범죄에 대한 증거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후에야 검찰이나 경비국을 통해 재소자 구금을 2주간 유지할 수 있는 허가가 나올 수 있다.

 

Q: 이런 종류의 불법적인 구금이 일반적인가?

중국에서는 그렇다.

 

Q: 그러면 평범하지 않은 점은 재소자들이 변호사가 아니라는 점과 그들이 계획한 행동이 “사회 안정”을 어지럽히지 않는다는 점인가?

그렇다. 그들이 아무런 공식 문서를 내놓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작년에 다수의 변호사들이 구금되었고, 그것이 설득력이 있는지 여부를 떠나 적어도 어떤 공식 문서가 나왔다. 예를 들어 창보양과 푸지쾅이 소란죄로 기소되었을 때 그랬다.

 

Q: 위챗(WeChat, 중국의 대표적인 모바일 메신저)에 돌아다니는 기소 내용이 적힌 문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건 경찰이 쓴 것이 아니다. 경찰이 기소내용이 무엇인지 알려준 이후에 다투가 쓴 것이고, 그녀의 부모가 지문을 찍은 것이다. 그러나 그건 공식 문서가 아니다. 게다가 마이지의 변호사는 비록 경찰이 마이지를 구금할 때 영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름이 적혀있지 않았다고 한다. 날짜도. 빈칸이었다.

 

Q: 그렇다면 그녀들이 왜 37일씩이나 구금되어있다고 생각하는가?

법에 따르면 2주간 구금하는 동안 찾고자 하는 것을 찾지 못하면 37일까지 연장할 수 있다.

 

Q: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불법 아닌가.

그렇다. 그러나 그들이 37일 동안 가둬둔다면 시민사회가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겠다.

 

Q: 이 모든 것이 무엇을 뜻한다고 생각하는가? 시진핑 정권의 일반적인 시민사회 탄압이 주된 요인인가, 아니면 특별히 페미니즘에 대한 공격의 의미를 가지는가?

난 왜 공식 문서가 없는지에 대해 궁금했다. 모종의 내부 논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정부가 모두 똑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할 수 없다. 작년에 구금되어 아직도 풀려나지 못한 푸지쾅이 대표적인 예다. 경찰은 검찰에 두 번이나 기소했지만 너무 우스워서 두 번 다 기각되었다. 아마 이번 “양회” 기간 동안 젠더 활동가들을 멈춰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누군가 혹은 어떤 집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더 고위층으로 갈수록 분명한 기소를 준비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Q: 그게 공식 문서를 만들지 않는 이유라고 생각하는 건가?

하나의 가능성이다. 다른 하나는, 만약 문서를 발행하려면 어느 정도의 신뢰도를 갖춰야 하는데 이는 정부에 더 많은 문제를 가져다줄 수 있다는 점이다.

 

Q: 어떻게?

그럴 경우 정부가 젠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젊은 활동가들, NGO들과 같은 특정 집단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든 이는 분명한 신호가 될 것이다. 따라서 반응은 훨씬 클 것이다.

 

Q: 그러니까 지금 표적이 공식적으로 분명한 것은 아닌가?

지금 변호사들은 법률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당신들은 이 문서를 발행하지 않았다’ 등.) 그러나 누구도 정부가 특정집단의 사람들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고 말하고 있진 않다 …

 

Q: 위챗에서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소개한) 어떤 사람이 내가 공유한 샤오웨이의 글에 답을 했다. 다섯 구금자에 대한 이 모든 논의 중에 어떤 범죄 혐의로 그들이 기소되었는지 혹은 그들이 죄를 지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고. 그는 만약 그들이 범죄를 저질렀다면 기소당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입장은 온라인 논쟁에서 상당히 일반적이다.

 

Q: 어떤 사람들은 이 구금의 주요원인이 베이징이렌핑센터(北京益仁平)와의 협력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구금자중 3명만이 이렌핑에서 일한다.

 

Q: 과거에는 NGO들이 해외로부터 자금을 받는 것에 탄압의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었다. 이와도 관련이 있는가?

아마도. 왜냐하면 이렌핑은 해외로부터 자금을 받는다. 경찰은 사실상 매주 그들을 심문한다. 그리고 그들은 돈이 어디서 오는지 누가 회원인지 등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다. 몇 달 전 미대사관이 다과회에 이렌핑을 초대했는데, 다과회에 참석하기로 한 이렌핑 간사 여러 명이 바로 그날 “차 한 잔 하자는 초대”를 받았다.

 

Q: 3월 7일 행사의 조직자들은 모두 체포되었나?

아니다. 원래 그들 중 일부가 행사를 기획하기 위해 20명 넘는 사람들과 함께 위챗 그룹을 만들었다.

 

Q: 체포된 모든 사람들이 그 그룹에 속해있는가?

그렇다. 경찰이 그들을 추적하는 데 사용한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왜 20여 명 중 일부만 구금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마 베이징 비밀경찰이 이미 그들을 체포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이 기회를 활용한 것이라고 본다. 아니면 동시에 일어난 것일 수도 있다. 처음에 그들은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렌민대학교 학생을 체포한 것이고, 체포한 후에 그녀가 더 잘 알려진 다른 활동가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Q: 3월 7일 행사는 원하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열려있는 것이었다.

그렇다. 원래 리 마이지같은 사람은 그저 주말에 성폭력과 관련한 무언가를 하기 위해 생각을 나누는 출발점으로 그 그룹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계획을 들고 나와 곳곳에 알리기 시작했다. 흥미를 보이는 모든 이의 참여를 환영했다. 그렇게 참여를 계획한 처음 20명을 분명히 넘었다.

 

Q: 중국중앙방송의 춘절전야제에 대한 청원과 어떤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분명히 관련이 있지만 직접적이진 않다. 청원을 시작한 주요인물들이 체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체포된 사람 중에는 그 캠페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없다. 그 캠페인은 <여성의 목소리>라는 조직과 관련되어있다. 체포된 <여성의 목소리> 성원은 곧바로 풀려났다.

 

Q: <여성의 목소리>는 어떤가? 조직이 아니라고 들었다. 정확히 무엇인가?

호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더욱 설득력을 얻기 위해, 또는 사람들에게 참여의식을 갖도록 하기 위해 이 이름을 사용한다. 동의하는 사람은 누구나 성원으로 여겨질 수 있다.

 

Q: <여성의 목소리> 위챗 계정에 의하면 그들은 해산 비슷한 것이 되었다고 한다.

중심 멤버 중 일부가 안전을 염려했다. 그래서 지금은 더 이상 그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젠더에 관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숨었다. 모든 연락을 끊어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재소자들이 풀려날 때까지 숨어있을 계획이다.

 

Q: 청원, 엽서, 사진을 통한 연대활동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시위는 어떤가? 어떤 사람들은 처음 하루이틀동안 구치소에 찾아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아직 그곳에 있나?

그렇다. 시골에서 온 사람들을 포함하여 마이지를 아는 몇몇의 베이징 지역 여성들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피켓을 들고 거리에 나가는 순간 체포되는 등 과거에 너무나 많은 사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Q: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더 많은 사람들이 알도록 퍼트리는 것이다. 내 생각에 정부가 아직 아무런 성명도 밝히지 않고 아무런 문서도 발행하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모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상당히 많은 사안에 대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대응한다. 그래서 많은 친구들이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춰 글을 쓰고 널리 알리려하고 있다.

 

Q: EU와 미국의 성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득이 될 것인가 해가 될 것인가?

말하기 어렵다. 체포의 주요 원인이 “사회안정 유지”라면 그 성명들은 해가 된다. 중국의 안정 유지를 위한 예산은 아주 많다. 그들은 이 돈을 써야 하는데 어떻게 쓰겠나? 끝없이 “차 한 잔 하자고 초대”하고, 끝없이 24시간 구금하는 것이다. 이게 목표라면, EU와 미국의 성명은 상황을 나쁘게 할 뿐이다. 경찰들에겐 해결책이 없고 체면을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특정 운동을 탄압하는 것에 비해 체포와 지출에 관한 할당량을 채우는 것에 더 신경을 쓴다.

 

Q: 그러니까 더 많은 사람이 저항할수록 더 많이 구금될 것이란 말인가.

부분적으로는 그렇다. 다른 측면은 외관이다. 그들은 재소자들을 기소할 명분을 만들 필요가 있다.

 

Q: 그러나 앞서 당신은 그들이 재소자들을 기소한다면 더욱 많은 관심을 끌게 되어 그들이 페미니스트와 NGO를 표적으로 삼는 것이 명확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푸지쾅의 경우와 같을 것이다. 경찰은 검찰에 두 번이나 기소했지만 모두 거부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1년 넘게 구금되어있다.


Q: 그러니까 당신은 EU와 미국의 성명이 경찰로 하여금 기소를 제출하고 구금을 연장도록 압박할 것이라는 건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친구들이 이에 대해 우려했다. 다른 건 나머지 네 명을 제외한 리 마이지만이 변호사 접견이 허용되었다는 것이다.

 

Q: 왜 그런가?

아마 마이지의 변호사가 덜 유명하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반면, 나머지 네 명을 변호하는 사람이 왕큐시이기 때문일 것이다. 왕큐시는 수많은 NGO를 변호해왔다.

 

Q: 그러니까 비록 EU와 미국의 성명이 경찰로 하여금 기소를 제출하고 구금을 연장하도록 압박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할 일은 널리 알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다. 중국과 해외로.

 

Q: 그렇다면 이 인터뷰가 어떻게든 도움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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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7 13:05 2015/08/27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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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2015/08/27 12:39

사이버 정치검열을 통한 국가보안법 탄압 투쟁으로 돌파하자

[3호_초점_사이버_정치검열을_통한_국가보안법_탄압.pdf (538.43 KB) 다운받기]

황정규|노동해방실천연대(준) 기관지위원장


해방연대는 지난 1월 22일 국가보안법 항소심 선고재판에서 국가변란선전선동단체의 구성과 관련하여 무죄판결을 받았다. 2012년 5월 22일 4명의 회원이 연행되고 자택, 사무실이 압수 수색된 지 2년 8개월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러나 해방연대와 국가보안법의 악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공안경찰은 자신들의 탄압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는지, 2013년 9월경 1심 무죄판결을 받은 직후 해방연대 자유게시판에 올라온 친북게시물이 방송통신위원회에 의해 형사고발되었다. 이에 따라 해방연대는 검열반대와 표현의 자유 쟁취를 위한 투쟁에 임하게 되었다.

정보통신망법이 왜 국가보안법과 관련이 있는지 의아해 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현재의 정보통신망법은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인터넷상의 정보를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이하 방심위)를 통해 삭제 명령하고 불응 시 형사고발할 수 있게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검열은 명백한 표현의 자유 침해이며, 애당초 반인권, 반민주 악법인 국가보안법을 새로운 방식으로 확대적용하는 저열한 탄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식의 검열이 이명박 정권 이후 매우 급격하게 늘었고, 이제는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 글은 국가보안법과 정보통신망법을 어떻게 활용하여 정치적 검열이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관련 법률과 검열실태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해방연대와 다른 단체들이 이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소개하고자 한다.

 

1. 정보통신망법과 결합한 신종 국가보안법 탄압

 

방심위를 통해서 사이버공간 상 친북게시물을 삭제할 수 있도록 만든 관련 법률은 “국가보안법”과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약칭 정보통신망법)이다.

국가보안법은 많은 이들이 잘 알고 있다시피, 악랄한 반민중, 반민주 악법이다. 국가보안법은 헌법보다도 먼저 제정된 치안유지법이 1961년 군사쿠데타 이후 이름을 바꾼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독재정권 시절 정권 보위를 위해 무고한 국민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심지어 많은 이들의 목숨을 빼앗아 간 악법 중의 악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여론이 높았고, 2005년 국민의 정부에서는 공식적으로 국가보안법폐지를 추진하였을 정도이다. 심지어 유엔, 미국무부에서조차 해마다 국가보안법의 개폐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국가보안법은 이제껏 폐지되지 못한 상황이고, 여전히 많은 이들을 탄  압 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한편 87년 민주항쟁 이후 국가보안법의 폐지 여론이 높아졌고, 이에 따라 1989년에 국가보안법에서도 가장 악랄한 조항인 7조에 대해 헌법소원이 제기되었다. 국가보안법 폐지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던 헌법재판소는 1990년 4월 2일 국가보안법 제7조의 위헌여부에 대한 심판사건 판결문(89헌가 제113호)에서 국가보안법의 위헌성을 인정하면서도 ‘한정합헌’이라는 판결을 내린바 있다. 이때 헌법재판소 판결의 취지는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서 무해한 행위는 처벌에서 배제하고, 이에 실질적 해악을 미치는 명백한 위험성이 있는 경우로 처벌을 축소 제한하는 것이 헌법의 전문 제4조, 제8조 제4항 및 제37조 제2항에 합치되는 해석”이라는 것이었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른 국가보안법 개정(1991. 5. 31.)은 제 1조 2항 “이 법을 해석적용함에 있어서는 제1항의 목적달성을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도에 그쳐야 하며, 이를 확대해석하거나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부당하게 제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된다”라는 조항을 신설하였다.

지배계급과 국가기구는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막기 위해 이러한 헌재의 판결과 국가보안법의 개정, 그리고 이러한 취지에 입각한 사법부의 판례 형성이라는 조그마한 양보를 하였다.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지니고 있는 반인권, 반민주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보호하는 방향에서 현재의 국가보안법을 적용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박근혜 정권 하에서 이런 분위기조차 점점 사라지는 모습이며, 특히 종북몰이와 결부되어 사법부는 북과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는 묻지마 유죄라고 할 정도의 “프리패스”를 발급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보통신망법은 국가보안법의 무제한적 확대적용을 가능하게 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구체적으로 국가보안법이 정보통신망법과 접하는 부분은 제44조의7(불법정보의 유통금지등) 1항 8과 3항, 제73조이다.

우선 제44조의 7, 1항 8에 따르면, 누구든 “국가보안법에서 금지하는 행위를 수행하는 내용의 정보”를 유통하여서는 아니 된다. 문제는 “국가보안법에서 금지하는 행위”라는 문구가 매우 애매하고 포괄적이라는 점이다. 특히 자의적인 적용이야말로 국가보안법의 역사자체인 상황에서, 이러한 문구는 위해성을 판단하는 주체에 의해 매우 자의적인 적용이 이루어질 여지를 주는 것이다.

제44조 7, 3항은 위해한 정보의 취급 거부, 정지, 제한을 하는 절차에 대한 것이다. 3항 1.에 따르면, 인터넷상의 정보를 방심위에서 직접 찾아내어 심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중앙행정기관의 장의 요청이 있었을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사이버 상의 정치적 표현물이 검열되는 절차는 대개 이렇다.
 

• 관계 중앙행정기관인 경찰과 국가정보원 등 공안기관이 여러 단체들의 게시물을 모니터링 하여 친북게시물을 확인한다. 그 후 공안기관은 해당 단체에 ‘업무협조요청’이라는 형식으로 게시물의 삭제를 요구하는 공문을 보낸다.

• 이 단계에서 게시물의 삭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공안기관은 방심위에 심의를 요청한다.

• 방심위에서는 게시물에 대한 심의를 하여 취급거부 권고를 결정한다. 이 단계에서 “명령의 대상이 되는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 게시판 관리·운영자 또는 해당 이용자에게 미리 의견 제출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조항에 따라 해단 단체의 의견을 받는다.

• 해당단체가 취급거부 권고에 부동의하여 의견을 제출하면, 재심의를 거친 후 최종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해당단체가 이 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형사고발을 하게 된다. 형사고발로 유죄를 받게 되면 제73조에 따라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3절에서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국가보안법의 자의적 적용과 심의절차에 대해 헌재와 사법부의 판단은 적법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형식적 절차로 이 절차의 본질적 내용이 감추어지지 않는다.

우선 앞서 언급하였듯이 국가보안법 유지의 변명은 축소제한적 적용이었다. 그러나 현재 구조에서는 축소제한적 적용이 불가능하다. 인터넷상의 게시물 삭제여부를 다투는 것이기에 어찌 보면 사소한 사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랑비에 옷이 젖듯 부지불식간에 정치표현물에 대해 상당히 포괄적인 검열을 진행할 수 있고, 실제로도 그렇다. 이에 대해서는 2절에서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더욱이 축소제한의 중요한 부분은 국가보안법 위반의 판단주체가 누구인가라는 부분이다. 국가보안법 자체 적용인 경우에는 위법의 판단을 사법부가 진행하고 있지만, 정보통신망법 상의 게시물 삭제의 경우에는 그 판단주체가 관계 중앙행정기관인 검찰·경찰·국정원 등 공안기관과 방심위이다. 그런데 국가보안법 위반 게시물에 대한 검열이 아니더라도 방심위원들의 구성과 관련하여 많은 비난이 나오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최근에는 해방연대의 국가보안법 재판에서 증인을 했고 국가보안법의 강화를 주장하는 우익인사가 박근혜 정권에 의해 방심위원에 임명되었다. 결국 방심위에서 보수적 정치색을 지닌 세력을 통해 국가보안법 위반 여부의 판단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2절에서 보다 자세히 다루겠지만, 실제 심의 과정을 보면 방심위는 공안기관의 삭제심의 요청을 거의 100%에 이룰 정도로 받아들여주고 있다. 그 수치를 보면 심의, 의견제출 절차는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다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

 

2. 정보통신망법에 의한 검열실태 분석


이 절에서는 실제 적용 실태를 살펴봄으로써 방심위를 통해 사이버공간 상의 정치표현물에 대한 무제한적 검열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정보통신망법과 방심위를 경유하여 국가보안법을 적용하는 것의 문제점은 의외로 언론과 국회의원들을 통해 여러 차례 지적되었다. 이와 관련해 가장 잘 정리된 자료는 3년 전인 2011년 창조한국당 국회의원 이용경이 국정감사 과정에서 밝혀내어 정리한 자료와 미디어오늘 2014년 3월 5일자 기사이다. 그리고 경찰이 직접 삭제요구한 건수는 “국가보안법 제정 66년, 2014 국가보안법 적용 실태 보고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① 우선 이용경의 국정감사 자료를 살펴보면, 검찰의 국가보안법 유죄율이 20%에 불과하고 유죄받은 20% 중 45%인 13건은 집행유예 처분을 받았던 반면, 2008년부터 2011년 8월까지 방심위가 심의한 건수는 4,119건에 달하는 데 100%가 국가보안법 관련 사안이었다. 또한 이중 방심위가 시정요구한 비율은 2010년에는 100%, 2011년에는 99.9%였다. 이 정도라면 방심위의 업무는 사실상 국가보안법 사안에 대한 심의라고 할 정도이다.

보수정당의 국회의원조차 방심위가 “‘무조건 위반’ 결정을 내린 것이라는 의혹이 들기에 충분”하다고 결론내리고, “국가보안법의 경우 ‘찬양고무죄’ 같은 독소조항 때문에 그동안 독재정권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핵심적인 수단으로 활용한 측면이 많이 있”는데, “2011년에 방통심의위가 99.9%라는 검찰도 꿈도 꾸지 못할 수치를 보여주며 국가보안법 위반 심의를 하는 것은 국민의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약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② 미디어오늘 2014년 3월 5일자 기사에 의하면, 이런 상황은 그 후에도 전혀 시정되지 못하였다. “방통심의위는 2008년 1,231건, 2009년 339건, 2010년 1,620건, 2011년 1,431건, 2012년 682건, 2013년 699건 등 총 6,002건에 대해 시정을 요구했다. 시정요구 유형별로 보면 ‘삭제’ 5,210건, ‘이용해지’(‘이용정지’ 포함) 17건, ‘접속차단’은 865건이었다. 시정요구 이행 비율이 99%에 달하는 점을 감안해볼 때, 시정요구를 받은 6,002건은 인터넷망에서 사실상 완전히 사라진 셈이다. 국가보안법 관련 시정요구는 정보, 수사기관인 국가정보원, 경찰이 방송통신위원회로 요청하면 산하 기관인 방통심의위가 대법원 판례에 근거해 시정요구 여부를 판단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또 “국가보안법 위반 여부는 사법부에서 다뤄야 할 영역인데도 방통심의위에서 대법원 판례를 임의적으로 해석해 인터넷상에서의 접근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다”라고 보도하였다.
 

③ 위의 자료들은 방심위의 심의건수에 대한 것이었다. 반면 지금까지 방심위 심의 전단계에서 경찰이 얼마나 삭제요구를 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료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2014년 12월 3일 진행된 “국가보안법 제정 66년, 2014 국가보안법 적용 실태 보고서 발표 기자회견”의 보고서를 통해, 경찰의 정치적 검열규모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 2009년부터 2014년 8월까지 경찰이 게시물 작성자, 관리자에게 요청해 삭제된 게시물 수는 20만6404건에 달한다. 동일기간 이루어진 방심위의 심의건수 4643건도 막대하지만, 경찰의 삭제요구건수는 이것의 50배 이상에 달하였던 것이다.
 

이런 방심위와 공안기관의 행태에 대해 어떠한 제재도 없는 상태이며, 방심위는 무소불위의 정치검열기구로 행동하고 있는 셈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무소불위의 검열에 대해 어떠한 제재도 없고 공안기관이 요구하면 ‘무조건 위반’을 내리다 보니, 이제는 방심위를 통한 심의절차조차도 무시한 채, 일선 경찰서가 직접 인터넷 상의 게시물을 삭제하라고 요구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국가보안법을 위반하였다는 일선 경찰의 자의적 판단 하에 사회단체들의 홈페이지가 수난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렇다보니, 이제 공안경찰들이 사회단체들을 넘어서 중앙 일간지에 대해서도 기사를 내리라는 요구를 공공연하게 하였다. 서울신문사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서울신문 2014년 9월 1일자 기사에 따르면, “경기 안산단원경찰서는 지난 26일 서장 명의로 서울신문에 ‘업무협조 의뢰’라는 공문을 보내 ‘서울신문 사이트에 설립 취지와 맞지 않은 친북 관련 글 6개가 게시됐으니 삭제해 달라’고 요청”하였다고 한다. 이 일이 있고나서 서울신문사 외에도 동일한 요구를 받은 언론사가 다수 있다는 게 확인되었다.

경찰은 언론사에 이어 법학자단체에까지 동일한 요구를 하였다. “전북 전주완산경찰서는 지난달 25일 법학연구자들로 구성된 ‘민주주의 법학연구회(민주법연)’에 업무협조의뢰 공문을 보내 민주법연이 운영 중인 홈페이지의 북한 관련 게시물 13건을 삭제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런 경찰의 행위는 모두 정통망법 제44의7 제1항 8호에 의거하고 있다. 또한 경찰은 이러한 삭제‘협조’요청에 항의하는 경우, 단지 협조요청에 불과하다고 변명하지만, 동 기사의 전북경찰청 보안관계자는 “사이트에 보내는 것은 우리가 방통위에 보내기 전에 문건 삭제를 권고하는 절차로 강요는 아니다”라고 말하여 이런 행위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무조건 위반’ 결정과 연관된 것임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3. 표현의 자유를 위한 해방연대의 투쟁경과


해방연대의 투쟁경과

경찰은 이미 2012년 국가보안법 탄압 직전 수차례에 걸쳐 해방연대 홈페이지 자유게시판 상의 친북게시물 삭제를 요구해왔다. 그리고 서울경찰청가 방심위에 요청하여 삭제명령이 내려진 경우가 한차례 있었다. 해방연대는 이러한 삭제요구에 대해, 이것의 근거가 되는 국가보안법 자체가 악법이며 이에 의거한 방심위의 삭제요청은 정치검열이자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절대 따를 수 없다는 입장을 가지고 대응하였다. 어찌되었든 이때에는 형사고발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1.

영원한 광명성 탄생 70돌에 삼가 드리노라(2012년 2월 16일)

www.hbyd.org/index.php?mid=freeboard&page=22&document_srl=20623

2.

위인의 눈보라 한생(2012년 2월 12일)

www.hbyd.org/index.php?mid=freeboard&page=22&document_srl=20541

3.

북침전쟁책동을 짓부시는것은 절박한 요구(2012년 1월 26일)

www.hbyd.org/index.php?mid=freeboard&page=25&document_srl=20217

그러다가 2013년 초부터 방심위는 서울경찰청의 요청을 받아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의 친북게시물 3건에 대해 심의한 후 삭제 명령을 내렸다. 해방연대가 이를 거부하자, 방통위는 10월 검찰에 해방연대를 고발하였다. 문제가 된 게시물의 항목은 다음과 같다.

고발 건은 그 후 약식 기소되어 300만원의 벌금형이 내려졌고, 해방연대는 곧장 정식재판을 청구하였다. 1심 재판 첫 공판이 2014년 4월 22일 열렸는데, 피고측은 직접 작성하지 않은 게시물에 대해 이적목적성이 있다고 판단하는 부분이 잘못되었고, 해당조항에 위헌성이 있기 때문에 재판부가 위헌법률심판청구를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런 요구가 받아들여져 6월 5일 한차례 더 공판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7월 10일 선고재판에서 유죄가 선고되었다. 판결의 요지는 자유게시판 글에서 한미군사훈련을 북침연습이라고 주장하고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한 것이 북의 주장과 동일해서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점, 방통위를 통한 국가보안법 이적표현물 판단은 신속성과 행정의 제재기능, 이의제기 절차를 보았을 때 문제가 없다는 점, 표현의 자유도 침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와 함께 위헌법률심판청구도 기각되었다. 2심 재판은 10월 17일 동일한 벌금형이 내려졌다. 그리고 올해 2월 있었던 대법원에서도 이러한 판결은 변하지 않았다.

 

‘정보통신망법 제44조의7 제1항 8호’에 대한 헌재의 합헌결정

이와 관련하여 노동전선과 인권운동사랑방은 2011년 말 동일하게 삭제명령을 받고 행정소송과 헌법소원을 진행하였다. 특히 헌법소원은 게시물의 삭제 근거가 되는 법조항의 존치여부를 판가름하는 것이기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2014년 9월 25일 이 헌법소원에 대해, “정보통신망법 제44조의7 제1항 8호에 의거하여 국가보안법에서 금지한 행위를 수행하는 내용의 정보 취급에 대해 방통위가 거부, 정지, 제한을 명하는 것이 합헌”이라는 전원일치 합헌결정을 했다. 이 판결은 헌법재판소가 공안기관, 방통위, 방심위를 통해 인터넷 상의 정치적 의견을 검열하고 억압하는 구조를 용인하였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사법부와 현재의 판결들은 방심위를 통해 무소불위로 자행되는 정치적 검열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이것은 경찰과 방심위의 친북게시물 삭제 요구에 맞선 투쟁이 현행의 사법구조 속에서는 쉽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마치며: 검열반대, 표현의 자유 쟁취를 위해 투쟁하자


경찰와 방심위를 통해 자행된 정치적 검열의 건수가 수십만 건에 달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투쟁은 아쉽게도 보기 힘든 실정이다. 아마도 적지 않은 단체들이 어려운 탄압상황 속에서 혹을 하나 덧붙이는 일을 꺼려했을 수도 있고, 게시물 몇 개 삭제 안 해 형사고발되고 벌금을 내야 하는 상황이 피곤하다보니 별 생각없이 방심위의 삭제명령에 따랐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더해 수구세력의 종북몰이에 편승해 북에 관한 것은 무조건 유죄라는 식으로 프리패스를 발급하고 있는 헌재와 사법부의 일그러진 태도로 인해, 사법질서 내에서는 이러한 정치검열에 대한 브레이크가 사라져버린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이 누적된 결과, 국가의 정치검열의 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더욱이 최근 웹진 사이트 ‘레진코믹스’에 대한 접속차단 조치가 취해졌던 사례에서 확인되듯이, 방심위의 검열은 정치표현물 검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상의 모든 표현물에 대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방연대와 노동전선, 인권운동사랑방 등이 검열에 반대하고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게시물 삭제에 거부하였고, 이로 인해 재판투쟁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런 검열을 막아내는 실질적 돌파구를 만들어 내지는 못하였다. 그 사이 이런 비열한 정치검열은 그 수위와 규모를 더욱 더 키워가고 있으며, 이런 검열의 덫이 많은 단체와 개인을 덮치고 있다. 따라서 비록 당장의 결과들이 좋지 못하더라도 검열과 표현의 자유 탄압에 맞서 투쟁의 가능성을 만들어가고 있는 해방연대의 실천이 작지만은 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제 정보통신망법을 통한 국가보안법 신종활용은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는 수준이 이르렀다. 검열반대, 표현의 자유 쟁취를 위해 함께 투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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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7 12:39 2015/08/27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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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사 2015/08/10 14:52

『붉은글씨』 2호를 내면서


2012년 가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창간했던 『붉은글씨』를 우리의 역량과 사정 때문에 1년을 더 넘겨 이제야 발행하게 되었다. 먼저 독자들과 본지에 관심과 응원을 준 많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드린다. 2호를 발행하는 지금 우리는 무엇보다 이론지 발간에 대한 책임성에 대해 다시 한 번 다짐한다.


2014년 우리 앞에 펼쳐진 세계와 한국의 풍경은 그동안 가려져 있던 모든 가면이 벗겨진 채, 대공황과 재앙, 그리고 유혈 참사와 비극의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얼마 전 결코 있어서는 안 될 비극이 우리 모두를 아프고 분노하게 했다. 총체적인 부실과 무능이 빚어낸 세월호 참사는 자본주의 이윤추구의 시스템, 약육강식-무한경쟁의 시스템이 인류를 위한 시스템이 아닌 것을 새삼 보여주었다. 이제 더 이상 참고 견디는 것으로는 이러한 유혈 참사의 비극을 막을 수 없다. 분노는 잘못된 사회, 무능한 체제로 향해야 하며, 더욱 과감한 직접행동이 필요하다. 이 체제는 이미 충분히 야만적이고 부패해서 개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지난 1년여의 시간은 많은 사람에게 ‘민주주의’와 ‘국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주었다. 동일한 법제도 아래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황제노역 판결’, ‘자본의 노동자에 대한 천문학적 금액의 손해배상 청구’, ‘장애인, 이주노동자, 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수많은 인권 유린’, ‘파시즘, 나치즘을 방불케 하는 정치사상의 자유 억압’, ‘노동자들에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적용되는 노조법, 집시법, 형법’ 등은 바로 ‘국가’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자행한 폭력에 다름 아니었다.


여기서 ‘공권력’을 바로잡거나, ‘법제도’를 노동자에게 유리하게 개정한다고 해서 ‘국가’의 본질이 바뀐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국가는 자본주의 사회를 반영하는데, 이 사회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이 적대적으로 공존하는 계급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민주주의와 국가의 본질과 실체에 접근하려 한다. 그리고 그것을 근본적으로 넘어서려는 운동을 하려고 한다. 비록 지금은 소수이지만, 선거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스스로를 ‘민주주의’로 직접 조직해 자신의 삶을 조절하고 다수가 사회를 통제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려는 사람들에게 주목하고 있다. 자신들의 삶을 위선과 불평등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에 맡기지 않고, 스스로 민주주의를 창조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평등하고 모두가 참여하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인류의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의 개량과 개선이 아닌 새로운 체제, 노동자들의 직접 권력에 기초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코뮤니즘 사회의 건설을 지향할 것이다.” -붉은글씨 창간호 발간사 중-


자본주의의 파괴적인 힘은 더욱 커져서 인류 전체에게 재앙으로 다가와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제도와 국가를 이용해 재앙과 참사를 막을 수 없으며, 이 제도를 이용해서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붉은글씨』는 이제 창간호에서 밝힌 정치 입장을 더욱 명확히 하고 새로운 운동의 창출에 기여할 것이다.


『붉은글씨』는 혁명적인 원칙을 지켜나갈 것이며, 새로운 운동과 주체를 만나려 한다. 우리의 취지에 동의하는 동지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청한다.


무거운 마음으로 2호를 발행하게 되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며, 살아남은 이들에게 우리는 ‘근본적인 대안’이 되는 운동으로 아픔을 대신하고자 한다.


2014년 5월
붉은글씨를 만드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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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0 14:52 2015/08/10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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