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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어보니, 노동운동 위기에 대한 근본적 전략전술보다는 박승옥에 대한 네거티브한 진술이 주를 이루네요. 그게 이 글의 한계인데요. 요즘의 산별노조를 둘러싼 다른 글들이 많이 보충하고 있습니다. 찾아보세요. 말하자면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노동운동 외부의 논쟁이 주였는데요. 이제 주요한 조직노동과 정파그룹간 논쟁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런 점에서 박승옥에게 고마워해야할지도...)
노동운동에 돌을 던져라? - 노동운동 논쟁을 바라보며 -
출처: 민주노동당 부산시당 소식지 <진보부산> 제2호(2004.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양솔규(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부산시당 웹진 소식지 <진보부산> 2호 원고청탁을 받고 필자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논쟁 중’인 사안에 대해 뭐라 글을 쓸 것인가. 더군다나 부산시당 상집에서 <진보부산> 1호의 내용이 너무 “무거웠다”는 평가가 있었다는 후문을 듣고 더욱 힘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노동운동 논쟁’이라는 무겁디무거운 주제를 떠넘기면서도 깃털처럼 가벼운 소식지 2호의 탄생을 바라는 부산시당 간부들의 욕심은 얼마나 과한가? 이게 간부들이 ‘평당원’에게 바랄 수 있는 주문인가? 부산시당 간부들이 내게 던져 준 ‘무겁디무거운’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아니, <진보부산>이 가뜩이나 무거운 현실을 마주하며 살고 있는 우리 당원들에게 명징하고 상쾌한 10월의 가을하늘처럼 다가가는 것이 진정한 본령이라면, 부산시당 간부들이 필자에게 부리는 욕심은 너무나도 정당하다. 그렇지만… 그렇다면… 필자 선택이 잘못되었다. 나는 노련한 릴리프 피쳐(구원투수)가 아니다. 패전 전담투수 감사용의 마음이 이랬을까? 서론이 이렇게 길어지는 것만 봐도 내가 적격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진보부산> 3호부터는 부산시당의 대표선수들이 1진을 구성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나의 꿈은 소박하다. ‘아름다운 퇴출’!
이 무겁디무거운 ‘노동운동 논쟁’이라는 주제가 왜 <진보부산> 2호에 실려야 하는지 의문을 가진 당원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는 일차적으로 ‘담론투쟁’이라 한다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쟁점에 대해 예의 주시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또한 민주노동당이 노동자 민중의 정당이라고 한다면 노동운동을 둘러싼 논쟁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 논쟁에 불을 붙인 박승옥(前 전태일노동자료연구실 대표, 존칭 생략)은 92년에도 계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글을 실으면서 소위 “노동운동 위기 논쟁”을 촉발시킨 바 있다. 그 박승옥이 돌아왔다.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내용으로 노동운동에 대해 ‘매스’ 혹은 ‘채찍’을 들이밀었다. 단지 ‘생태주의’가 추가되었고, 지면이 <당대비평>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번에도 수많은 반론자를 양산했고,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그의 글 “한국 노동운동, 종말인가 재앙인가”는 2004년 계간 당대비평 가을호에 실렸고,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 재게재 되었고, 동아일보, 매일경제, 한국경제신문, 국민일보 등 보수언론들의 ‘띄워주기’도 이어졌다. 이에 운동진영 내 다양한 사상적 스펙트럼을 반영하는 반론과 재반론이 이어지면서 어느새 A4 50장이 넘는 “노동운동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9월이 그렇게 지나갔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예전의 논쟁들은 논쟁의 ‘주제’가 명확했지만, 지금의 논쟁은 두루뭉실하다. ‘노동운동 위기’ 논쟁도 아니고, ‘노동운동 논쟁’이라는 애매모호한 타이틀이 붙어 있다. 또한, 반론과 재반론은 1탄, 2탄… 6탄 이런 식의 ‘선정적인’ 시리즈물이 되어 버렸다. 학술적 논쟁이든, 전략전술적 논쟁이든 주제의 경계선이 있기 마련인데, 지금의 논쟁은 경계선이 없다. 곧, 한국 노동운동의 조직적 전망, 이념적 전망, 운동방식, 구체적 정책, 항변과 소박한 소망 등이 모두 뭉뚱그려져 있다. 어떻게 이런 논쟁 속에서 ‘옥동자’를 양산할 수 있을까?
또한, 보수언론의 ‘띄워주기’ 이전에 이미 <프레시안>의 ‘띄워주기’가 있었다. 박승옥은 “현재의 한국 노동운동은왕자병 환자’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고 했지, “왕자병 걸린 노동운동”이라고 하지 않았다. 2탄 류동기 교사의 글 제목을 “진정 박승옥님 주장을 ‘저주의 굿판’으로 보십니까”라고 단 것 역시 <프레시안>의 의도였다. 선정적 타이틀과 1탄, 2탄으로 이어지는 화려한 장식은 전적으로 <프레시안>의 책임이었다.
사실, 운동사회 내 중요쟁점들에 대해 <프레시안>이 증폭시켰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얼마 전, 오마이뉴스의 김태경 기자가 월간 ‘인물과 사상’ 9월호에 쓴 ‘노 정권과 시민단체들, 유착 혹은 상생?’이라는 글 역시 <프레시안>이 재게재했고 이후 <미디어 참세상>, <프레시안> 등에서 치열하게 시민운동 성격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80, 90년대와는 다르게 인터넷신문이라는 미디어가 ‘논쟁의 격전장’을 마련해 준다는 의미를 폄하하거나 무시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문제는 ‘누구의 격전장’인가 하는 점이다. <미디어 참세상>을 제외하고는 논쟁의 격전장은 운동진영의 매체가 아니었다. 이 점은 진지하게 논의되어야 할 운동진영의 쟁점들이 선정적으로 검토되는 현상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 글의 주제와는 다른 문제이므로 넘어가지만, 운동진영 내(또는 서로 간) 미디어의 문제, 운동진영의 대외적, 사회적 미디어의 문제는 ‘대 사회적 헤게모니와 운동 수준의 심화’에 있어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문제라는 사실만은 언급해 두어야겠다.
어쨌든, <프레시안>에 실린 1-6탄, <민중의 소리>, <하종강 홈페이지>, <노사저널>, <노동사회>에 실린 글들 모두에 대해 여기서 자세히 언급할 수는 없다. 반론과 재반론이 이어지면서 충분하게 논의된 부분들도 있고, 다양한 쟁점들이 해소가 된 측면도 있기 때문에 굳이 모든 부분들을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 또한, 진지하고 내공에 찬 다양한 사상을 가진 부산의 당원들에게 <진보부산> 성격상 내 개인 입장을 나열하는 것도 낯부끄러운 일이며 불필요한 일일 것이다. 다만, 박승옥의 글을 중심으로 문제점들을 짚어보는 것은 논쟁의 이해와 고민의 진전을 위해서 필요할 것이기에 몇 가지 언급해야겠다.
첫째, 박승옥이 분석하는 위기의 근저에는 신자유주의를 사상적 지렛대로 하는 자본의 지구화운동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노동에게 강요하는 구조적 조건이 박승옥이 말한 것처럼 ‘단지 외부의 요인은 외부의 조건일 뿐’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 누구보다도 한국의 노동운동은 외부의 조건을 간단히 취급하고 넘어갈 수 있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외부적 조건과 내부적 조건을 분리하는 순간 박승옥의 분석은 분석이 아닌 강요가 되고 만다.
박승옥은 노동조합이 투쟁의 과실을 누리고 있다고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다. 아마 일선의 노동조합 간부들에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고 느낄 것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박승옥은 자본과 정권의 논리를 너무 쉽게 믿는다.
둘째, 전투적 노동조합주의에 대한 비판 역시 예전이나 지금이나 박승옥에게는 중요한 주제인 것 같다. 92년 논쟁 당시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를 대표했던 전국노운협을 대중조직인 전노협과 동일시하면서 논리적 비약을 했던 것처럼 그는 이번에도 ‘전투적 투쟁의 밑 빠진 물붓기식 투쟁’을 비판하면서 ‘전투성=생디칼리즘=현재 노동운동의 지도노선’으로 등식화시키고 있다. 당사자는 부정하는 이러한 등식은 박승옥 개인의 주관적 판단에 불과하다. 박승옥은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를 비판하며 사회발전적 노동운동을 주창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 운동은 그런 진행경로를 밟지 않았다.
92년 당시의 논쟁에 대해 노중기는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노동자계급의 전략적 선택의 폭은 매우 제한” 되어 있었고, 따라서 “민주노조를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의 전략적 선택은 부분적인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합리적’인 것”이었으며, “새로운 운동노선은 불가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필요치 않았다”(노중기(1995),「국가의 노동통제전략에 관한 연구: 1987-1992」,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박사학위논문)
한국 노동운동이 생디칼리즘이라면 예전 한노당*과는 기반과 성격이 다른 민주노동당이 어떻게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는가? 박승옥이 정확하게 얘기하고 싶은 것은 92년 전노협 중심성의 해체를 바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변혁성의 포기’, ‘사회주의의 포기’, ‘협력과 온순함’이다.
2003년 수많은 열사들이 우리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때, 박승옥은 얼마나 현실을 안타까워했을까? 노동자들의 가슴에 번지는 분노는 그에게 두려움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박승옥은 노동운동이 사회의 문제점을 극복할 능력과 철학이 없는 집단으로 매도하고 있지만, 과연 한국의 노동운동 말고 어떤 세력이 사회의 진보와 변화를 위해 다방면에 관계하면서 역량과 경험을 축적해 왔단 말인가?
셋째, 박승옥은 노동운동의 시민권을 이야기하면서 노동운동이 노동자중심주의를 버리고 시민운동을 주도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나는 정말 궁금하다. 노동운동이 노동자중심주의를 버린다면, 노동운동이라 부를 수 있을까? 한국의 사회운동세력 중 민주노총이 끼지 않는 그 어떤 캠페인이 성공했던가? 96-97 총파업은 단순한 경제총파업이 아니었으며, 박승옥이 걱정해 마지않는 비정규노동자들의 양산에 대한 반대, 민주주의의 후퇴에 대한 방어, 사회적 가치의 수호, 공동체성의 회복을 위한 투쟁이었다. 이 파업의 국내외적 반향을 차치하고라도 노동운동이 ‘사회발전’에 이바지하고 ‘사회 민주화’를 진전시킴으로써 노동운동의 시민권을 획득했다는 것이 이 투쟁의 가장 큰 의미였다.
넷째, 생태주의를 제기하는 박승옥의 진정성을 의심하지는 않으나, 걱정은 된다. 이 수다스러운 발언 때문에 노동운동과 노동자들이 생태주의와 담을 쌓으면 어쩌나 하는 우려 말이다. 전태일의 어린 벗들에게 ‘적게 소비하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에게 ‘자본주의식 물욕을 버리’라고 한다면 이건 고상한 이념의 체화나 교육이 아니라 폭력이 된다. 박승옥은 생태주의와 노동운동의 결합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생태주의와 노동운동의 분리를 바라는 것 같다. 자본주의의 극복 없이는 생태주의가 발붙일 곳은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반도는 자본에 의해 파헤쳐지고 썩어가고 있다.
다섯째, 박승옥은 이야기한다. “우리는 노동의 건강한 능동성을 되찾아야 한다. 자신의 노동을 비하하면서 대안을 모색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아름다운 말이다. 박승옥이 말하고 있는 것은 맑스가 말했던 바, 노동의 소외를 극복하고 노동의 본래적 의미를 되찾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노동의 건강한 능동성’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박승옥은 노동의 개념을 자본주의의 임노동으로 한정하는 경직된 인식을 버려야 한다고 하지만, 고통은 마취제로 치유할 수 없다. ‘임노동으로 한정’시키는 주체는 우리가 아니다. 자본주의가 우리의 노동을 임노동으로 한정한다. 박승옥의 비약 속에서 사이비 종교가 등장한다. 생태주의가 단순한 생활방식 이상의 철학인 것이 진실이라면, 그것은 사회 속에서 시스템화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역시 진실이다.
여섯째, 박승옥은 비정규직 문제를 풀지 못하는 아니, ‘풀 생각이 없는’ 현재의 노동운동을 비판한다. 2004년 10월 월간 비정규노동의 편집자는 박승옥의 이러한 태도를 ‘립서비스’라는 한 마디로 압축해 표현했다. 왜? 비정규노동자에 대한 언급이 정규직 노동운동 또는 노동운동 일반에 대한 비판으로 비약될 때 이는 현실에 천착한 진지한 성찰이라기보다는 노동운동 일반에 대한 테러무기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홧김에 “노동운동 망해봐야 정신 차려”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욕의 기능은 스트레스 해소 말고는 없다.
비정규 노동자에게 정규직 노동자가 연대해야 할 대상이라면, 마찬가지로 정규직노동자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동지이다. 조직노동자가 거세될 때 세상은 자본가의 천국이 될 것이다. 설마 박승옥이 그걸 바랄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구구절절 비판했지만 박승옥에 대한 반박으로 노동운동을 둘러싼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위의 생각 역시 내 개인적인 소회에 불과하다. 이번 논쟁을 통해 우리 노동운동의 발전과 사회변화를 바라는 다양한 입장, 전망들이 제시되었다. 100% 올바른 논쟁도 없지만, 얻을 게 없는 논쟁도 없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전통적 사회주의자, 사민주의자, 자유주의자 등 다양한 입장들이 개진되었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예전과는 다른 발전의 징표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대안, 우리의 숙고는 정확히 박승옥이 놓치고 있는 지점, 바로 ‘노동의 대지’에 뿌리를 내리면서 진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박승옥을 돌아오게끔 한 소위 위기의 현실, 종말의 기운은 정확히 바로 여기, 이곳, 땅위에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당원 동지들도 한 글 한 글 찾아 읽어보면서 자신의 입장을 가다듬고 세워보시길 바란다. 노동운동에게 돌을 던지는 박승옥은 아름답게 퇴출되기를 빌며, 진지하고 쌈박한 고수 당원들이 전면에서 우리 노동운동을 둘러싼 문제들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모임을 기대해 본다.
<더 읽을꺼리>
박승옥 “‘왕자병’ 걸린 노동운동, 이대로 가면 죽는다”
출처: 2004-09-02 <프레시안>
황광우 “지금은 ‘70만 힘’을 이끌지 못하는 무능력을 고민할 때”
출처: 2004-09-06 <프레시안>
류동기 “진정 박승옥님 주장을 ‘저주의 굿판’으로 보십니까”
출처: 2004-09-07 <프레시안>
이광일 ‘왕자병론’의 외피 쓰고 재생한 ‘종양론’이라는 유령
출처: 2004-09-08 <프레시안>
전지윤 노동운동의 ‘전투성’과 ‘계급성’을 방어하며
출처: 2004-09-10 <프레시안>
박태주 동전의 다른 한 면은 노동운동의 미래를 가리킨다 - 박승옥씨의 ‘노동운동 위기론’에 대한 단상
출처: <노사저널> 제675호(2004.9.20) http://www.nosanews.com/
하종강 노동운동을 비판할 때에는…
출처: (하종강 홈페이지 2004/9/10 http://www.hadream.com)
김성희 사회연대적 노동운동의 상을 기획하는 '퇴비'로 삼자
출처: <노사저널> 제676호(2004.9.27)
이정식 양대노총 진보정당 시민단체가 한 축이 돼 정세 변화시키자
출처: <노사저널> 제677호(2004.10.4)
최병천 노동운동 네덜란드-스웨덴 모델’에서 대안 찾자 - 박승옥씨 문제제기에 공감하며
출처: 2004-09-16 <프레시안>
하부영 대공장 노조, ‘왕자병’ 걸릴만큼 한가하지 않다
출처: 2004-09-22 <프레시안>, <노동사회> 2004년 10월호(통권 92호)
<92년 논쟁과 관련한 글>
박승옥, 한국 노동운동, 과연 위기인가, <창작과 비평>, 1992년 여름호
최규엽, 사회발전적 노동운동을 비판한다, <노동운동>, 1992년 7월호
박승호, 전투적 민주노조운동의 조합주의적 한계를 시급히 극복하자, <노동운동>, 1992년 7월호
임영일, 정세변화와 노동운동의 과제, <경제와 사회> 1992년 가을호, 한국산업사회연구회
박승희, ‘신조합주의’의 현실성에 대하여, <경제와 사회> 1992년 가을호, 한국산업사회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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