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진보부산8호]미술과 도시, 좌파와 공공예술(다니엘 뷔렝과 콩소르시움, 크리스토와 잔느 클로드)

출처: 민주노동당 부산시당 <진보부산> 8호(2005년6월)

미술과 도시, 좌파와 공공예술

양솔규(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중동서 당원), redstar@jinbo.net


다니엘 뷔렝과 콩소르시움

다니엘 뷔렝(Daniel Buren)은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설치미술가이다. 이 작가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은 모든 형태를 사상하고 수직으로 뻗은 선으로 구성한 작품 때문이다. 때론 공원에 때론 유적지에 때론 지하철 선로 옆에 설치된 작품들은 기존의 전통적인 형태의 전시회 즉, 미술관에서‘만’ 열리던 전시를 거리와 의외의 장소로 곳곳에 옮겨 놓았다.
파리의 팔레 로얄(Palais Royal-프랑스혁명기에 혁명군중들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기 위한 행군을 이곳에서 시작하기도 했다)에 전시되어 있는 다니엘 뷔렝의 전시물은 프랑스 사회당이 정권을 잡은 시기에 계획되었다. 그러나 작업이 진행되던 와중에 정권은 우파에게 넘어가게 되고, 전통과 보수의 정신이 살아 있는 이 곳에 ‘전복적’인 작품이 설치되는 것에 대해 반발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현재 이곳은 다니엘 뷔렝의 작품으로 인해 더욱 유명해졌다.
미술관이 예술의 제도적 형식을 보증하는 중요한 기제라는 점에서 다니엘 뷔렝의 작품들은 반(反) 미술관적인 것뿐만 아니라, 반(反)정부적이고 반(反) 제도적인 예술이기도 하다. 다니엘 뷔렝 역시 유럽의 68혁명의 와중에 몇몇의 미술가와 함께 좌파적 그룹을 결성하고 활동을 전개한다. 거리미술(street art)로 일컬어지는 이러한 조류는 마야코프스키의 언급, ‘거리를 우리의 붓으로 만들자, 광장이 우리의 팔레트가 되게 하자’던 선동과 연결된다. (중국 목판화운동이 영향을 미친) 멕시코 벽화운동이나 젊은이들의 그라피티 역시 이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시대가 바뀌었다. 예술에 있어서의 좌파들은 퐁피두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2002년 여름,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 센터에서는 다니엘 뷔렝(1939~)의 작품전이 열리고 있었다. 또한, 다니엘 뷔렝과 오래전부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디종의 ‘콩소르시옴’ 아트센터는 퐁피두센터에서 자신들의 컬렉션전을 열었다. 퐁피두(프랑스의 중도우파 대통령의 이름을 딴) 센터에 좌파 미술가들이 입성을 한 것이다. 물론 좌파들이 기치로 걸었던 반 제도의 기치가 이제 사그러 든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콩소르시옴은 여전히 정치사회적 변혁을 꿈꾼다. 이들의 퐁피두 입성은 투항의 의미보다는 확산의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콩소르시옴은 보르도 지방의 누보 뮤제(신미술관)와 함께 노동자들의 참여 속에서 77년에 만들어진 좌파 미술운동의 작지만 중요한 ‘진지’ 중 하나이다. 예쁜 그림과, 완성된 형태의 액자 속 고정물이 아닌 ‘과정 중인 작업work in progress’을 통해 관계와 새로운 형태로의 변화를 곧 작품 안에서 구현하려는 이들의 시도는 설치된 장소에 따라 그 의미를 달리하는 다니엘 뷔렝의 작품과도 일맥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대지 미술가, 크리스토(Christo)와 잔느 클로드(Jeanne-Claude)

 

부부인 크리스토 야바체프(Christo Javacheff, 1935~, 불가리아 출생)와 잔느 클로드(프랑스 출생)는 대지 미술가(Land Artist)로 알려져 있다. 두 부부는 각종 자연적 경관이나 거대한 인공물에 천을 덮어씌우는 것으로 유명한 설치미술가들이다. 이들의 작품 역시 하나의 완성된 작품이 물체로 형태상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황의 맥락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현대 개념미술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거리, 자연, 관공서 등은 그 자체로 공공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오브제에 포장을 씌우는 의미는 곧 천과 태양에 따라 작품의 일시적 성격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덧없는 작품의 일시성이라고나 할까? 따라서 이들의 작품 역시 작품이 구성되는 맥락, 과정이 중요하게 부각된다. 물론 현대미술의 중심에 서 있는 설치미술의 대부분이 이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말이다. 크리스토 야바체프는 말한다. ‘작품은 새로운 것이며,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덧없는 것이다’
이들의 작품은 오랜 기간동안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실행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실례로 79년에 계획한 ‘문 the Gate 프로젝트’는 2005년 2월, 뉴욕 센트랄 파크에서 짧은 2주간의 설치로 막을 내렸다. 40여년을 뉴욕에서 살아온 이 부부의 프로젝트가 완성되기까지는 장장 26년이 걸린 셈이다. ‘과정’은 한편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논의를 촉발시킨다. 미술계의 인사들뿐만 아니라, 환경단체들, 일반시민들이 논의에 참여하게 된다. 공공미술의 공공적 성격은 곧 예술의 대중화뿐만 아니라 공공미술을 둘러싼 미와 형식, 자연과 미래에 대해 나름의 견해가 폭발처럼 분출된다. 어쩌면 거대한 규모의 작업은 그 규모만큼이나 커다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점은 이러한 사회적 논쟁 과정이다. 독일제국의회 건물을 뒤덮는 프로젝트 역시 기나긴 논쟁을 동반했다. 렌조 피아노와 리차드 로저스의 퐁피두센터 설계안을 둘러싼 논쟁 역시 마찬가지이다. 도시공간의 구획을 둘러싼 논쟁은 앞으로 중요한 좌파 의제가 될 것이다. 이명박의 청계천 프로젝트는 그 시발점이었다.
모든 예술과 문화에 있어 소외된 상태를 오랫동안 강요당해 온 한국적 현실에서는 예술을 둘러싼 공론의 장에 참여하는 서구의 경험들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한, 그 소외 덕분에 노동자 민중과 예술은 서로가 다른 영역으로 침범할 수 없는 장벽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예술과 사회를 연결시키는 상상력과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일은 곧 정치사회적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가 분석했듯이, 학력과 직업에 따른 문화적 자본을 소유한 계급과 그렇지 못한 계급이 서로 다른 미적 기준을 가지고 있다. 노동자계급의 기준은 강요된 기준이기도 하다. 꽃과 바닷가의 풍경만을 아름답게 느끼게끔 하는 이러한 기준은 곧 노동자계급을 타계급과 구별을 짓게 만든다. 이러한 구별의 기준들은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문화적 좌파와 계급적 좌파가 만나는 지점은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고 공통된 실천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는 과정에 있다. 단지 도덕적 헤게모니만이 아니라, 문화적 헤게모니를 쥐지 못할 때, 객체화되고 소외된 상태의 지양은 절대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정치적 좌파가 성장한 도시들의 대부분은 수많은 예술가들을 가진 문화적 도시이기도 하다. 이러한 곳, 파리, 센프란시스코, 베를린, 런던 등에서의 공공미술과 건축물을 둘러싼 논쟁들은 그 도시의 노동자계급과 좌우 이념의 운명과 관련이 있다. 한국의 일방적인 우파 헤게모니 아래서 당의 문화적 실천은 곧 이러한 여지를 넓힐 수 있는 시야를 확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80년대 민중미술 이후 수많은 미술작가들은 새로운 조류(미니멀리즘과 설치미술)들을 형성했다. 이들의 정치적 지향이 노무현으로 쏠렸다가 다시 중립으로 회귀하고 있다. 이제 당은 천 개의 눈 중 단 몇 개의 눈만이라도 도시 문화정치에 돌려야 한다. 칸딘스키와 러시아 아방가르드 작가들은 러시아혁명을 지지했고, 트로츠키는 이들을 열렬히 옹호했다. 레닌 역시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이들의 예술을 묵인해 주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이후 추상회화를 인정하지 않았다. 21세기의 진보정당, 민주노동당은 범람하는 이미지 속에서 자신의 눈을 확고하게 그러나 폭넓게 업그레이드해야 할 것이다.

<추천 사이트>

다니엘 뷔렝(Daniel Buren)의 사이트 : http://www.danielburen.com/
장 클로드 & 크리스토 야바체프의 사이트 : http://christojeanneclaude.net/index.html.en
쌈지 스페이스 : http://www.ssamziespace.com/
대안공간 풀 : http://www.altpool.org/
포럼 A : http://www.foruma.co.kr/ 영화감독 박찬욱의 동생인 박찬경이 주도하는 모임.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