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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기억의 정치를 보증한다

건축, 기억의 정치를 보증한다.


승효상, 《건축, 사유의 기호》, 돌베개, 2004, 18,000원


*리뷰 출처: 민주노동당 부산시당 소식지 진보부산 10호 8월호 http://busan.kdlp.org/
건축, 기억의 정치를 보증한다.

                                                                     양솔규(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가끔 여러 분야에 일을 하는 사람들의 글, 즉 글과는 별로 상관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쓴 글을 읽다가 화들짝 놀랄 때가 많다. 소위 ‘글발’이 글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보다 훨씬 더 뛰어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반대로 ‘글 쓰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글이 지식전달과 감동은 고사하고 고치며 읽어야 할만큼 초보적 훈련도 되지 않은 것을 볼 때도 있다. 건축가 승효상의 글발은 장난이 아니다.

필자의 이런 경험이 처음은 아니다. 승효상이 중앙일보에 건축과 관련한 글을 연재하면서 책을 펴냈다면, 건축가 서현 역시 동아일보에 글을 연재하였고 책을 펴냈다. 서현이 다룬 주제들은 대개 서울이나 광주, 부산 등 한국의 거리에 대한 에세이였다.

얼마 전 한 당원이 자기 동생에게 선물할 책을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불현듯 나는 서현의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를 추천했다. 건축에 대한 문외한(門外漢)인 내가 건축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볼 계기를 준 책이었다. 하지만 곧 도서 추천을 후회하게 되었는데 책 추천이라는 게 그렇게 심오한 행위는 아니지만 자기 경험을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들었다. 어쩌면 책을 권한다는 것은 책 한 권을 뛰어 넘어 삶의 변화를 권하는 것은 아닐까. 일종의 책임감이 드는 것이다. 더더군다나 ‘건축’이라는 가깝고도 먼 주제에 대한 책이라면 더더욱.

다른 어떤 미디어보다 책이 주는 장점은 장르와 시공간을 뛰어 넘어 모든 부분을 다룰 수 있다는 점이다. 공간을 바탕으로 하는 미술이나, 시간을 기반으로 하는 음악, 영화 등 직접적 감각에 의존해야만 하는 장르조차도 책을 통해 우리는 그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공급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2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직접적 감각의 체험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어떤 감동과 울림은 때때로 말과 글을 통해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어느 부분보다도 건축은 직접적 체험과 그에 대한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 건축계의 대부라 할 수 있는 건축가 김수근의 수제자로서, 한국의 현대건축계를 버티고 서 있는 건축가 승효상은 그 누구보다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 독창적인 자기세계를 구축해 오고 있는 사람이다. 직접적 체험이 무엇보다 중요시될 수밖에 없는 ‘건축가’라는 직업을 가진 이가 책을 펴냈다. 그것도 건축에 관한 책이다. 건축가의 글은 어떤 모습을 지닌 것일까? 삶의 직접적 체험을 기반으로 하는 건축(가)에 대해 2차적인 책이라는 미디어를 통해 전달한다는 것,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책은 승효상이 자신의 ‘관습과 타성을 씻고 버려 건축의 본질에 가깝게 가려는 데 큰 자극’을 받았던 건축물과 건축가의 삶에 대해 다룬 책이다. 승효상의 화두는 이런 것이다. ‘토탈 이클립스’라는 영화에서 랭보가 베를렌에게 했던 말, ‘당신은 시를 어떻게 쓰는지 알지만 나는 시를 왜 쓰는지 안다.’ 건축의 궁극적 목표, 목적, 왜 건축을 해야만 하는 지에 대해 끝없는 탐험을 승효상은 하고 있는 것이다.

승효상에 의하면 건축에 대한 일반의 상식은 건축이 예술의 한 분야거나 기술의 한 분야로 포함시키지만, 이는 망상이라는 것이다. 굳이 건축을 인접학문 속에 분류한다면 ‘인문학’에 가깝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적 상상력과 논리력, 역사에 대한 통찰력, 사물에 대한 사유의 힘, 이웃의 삶에 대한 애정과 존경 속에서 작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건축이 단순한 기술적 공학이 아님은 물론, 일반 대중의 삶과는 동떨어진 뭔가 고색창연한 예술도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삶이 공간을 기반으로 하고, 건축은 또한 공간, 즉 장소와는 뗄레야 뗄 수 없으며 건축의 존재의의는 인간의 삶의 영위에 있기 때문이다.

사회혁명만 혁명이 아니다. 흔히 건축의 3대 혁명을 이야기한다. 첫째는 2,000년 전, 로마인들이 발명한 콘크리트이다. 재료적 혁명. 이를 통해 재료의 의지보다는 작가의 의지가 중요해진 것이다. 둘째는 고딕양식의 완성이다. 전형적인 고딕양식인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을 기억해보자. 이를 통해 벽은 새로운 기능, 창문을 담당할 수 있었고 건축은 ‘중력에서 해방’되었다.
세 번째 혁명은 바로 파리의 ‘뽕삐두 센터’이다. 각종 배관과 설비가 모두 외관에 드러난 상태의 센세이셔널한 건물. 사회당 미테랑 대통령의 야심찬 문화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던 뽕삐두 센터는 바로 ‘하이 테크놀로지’의 혁명이었고, 그 자체보다는 ‘하이 테크놀로지’를 만든 ‘정신’이 곧 ‘큰 기술’이었다. ‘우리가 가졌던 종래의 건축개념을 뒤집어 우리가 믿었던 신념들을 다시 반추하게 만들었으며 동시에 우리 시대 삶의 방식을 새롭게 제시’했던 그 ‘정신’이 곧 혁명이라는 것이다.

도시와 주거, 지역이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의 도시정치. 민주노동당이 숙명적으로 받아 들여야 하는 우리의 환경이다. 이 외부 환경을 어떻게 바꾸는가 하는 것은 민주노동당의 과제임과 동시에 미래의 환경을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세계에서 가장 밀집된 건축현장이 있으나 건축의 정신과 건축의 목적은 사라진 곳, 재산증식에 철저하게 복무하는 건축물들만이 ‘생존할 수 있는’ 곳, 대한민국. 아파트(부동산) 투기 문제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APEC을 대비해 만드는 누리마루가 부산시민의 뇌리에 뿌리박히는 것. 이는 APEC에 대한 정당성, 도시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의탁, 한나라당과 성장연합의 주도권이 확고해지는 기제가 된다. 소위 ‘기억의 정치’는 도시 건축물 속에서 오랫동안 생명력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한나라당에게는 ‘누리마루’가 ‘기억의 정치’의 기제이다. 부산시민의 바램과 열망을 모아 일체감을 갖게 하고 그 상징을 누리마루에 고스란히 유폐하는 것, 생각보다 강력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도시 곳곳에 프린트된 누리마루의 경관은 내년 선거 때까지 유지될 것이다.

열린우리당에게는 ‘민주공원’이 있다.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정통성을 토대로 만들어진 그 공간은 소위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가 수구 대 개혁의 구도로 허위 전화되면서 ‘누리마루’보다는 약하지만 더 오랫동안 남아 있을 수 있다. 이 역시 역사성을 토대로 부산시민의 일체감을 조성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에겐 도시정치의 상징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아니 우리의 상징성은 그들과는 달라야 한다. 역사적 조형물, 이벤트의 기념물이 아니라 도시 생활, 부산 시민의 삶을 오롯이 담을 수 있는 그 무엇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쌓여 나갈 때에만, 도시는 좌파의 강력한 상징을 기억하고자 할 것이다. 바로 뽕삐두 센터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 종래의 개념을 뒤집고 신념을 다시 반추하는 것, 이를 통해 삶의 방식을 새롭게 제시하는 것, 건축과 정치가 만나는 지점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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