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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자기 역사를 말하다>

 

출처: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연대와실천> 2006년 1월호, 통권139호

<노동자, 자기 역사를 말하다 >

양솔규/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redstar@jinbo.net

 

노동자에게 ‘역사’란 무엇인가? 혹자는 ‘계급투쟁을 배우는 계기’라고 대답할 것이고, 다른 이는 현재를 위한 길잡이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노동자의 어깨에 심대한 ‘역사적 짐’을 올려놓는 그 언사는 진정성과는 별개로 역사를 노동자로부터 멀게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 노동자에게 역사는 살아있는 역사이며, 살아가는 역사다. 다르게 얘기하자면 노동자에게 역사는 자신이 주인공이며 역사의 주체임을 가르쳐 주는 의미가 있다.

역사학연구소 지음, 󰡔노동자, 자기 역사를 말하다󰡕, 2005.11, 서해문집, 14,900원.

그렇다고 우리 노동운동이 발전하지 않았는가? 단순한 양적 발전뿐 아니라 안정적인 조직이 있고, 부족하나마 교육도 진행된다. 위기가 얘기되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노동자들이 자동차도 몰고 다니고 심지어 외국여행이나 연수를 떠나기도 한다. 그런데도 노동자에게 역사는 당시보다 더욱 멀어진 듯 한 느낌은 왜일까?

 

이 책의 백미는 ‘2장 노동자, 역사 기록의 주체로 서다’이다. 책 제목과도 어울리는 이 장은 노동자가 역사를 어떻게 획득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면서 생생하게 밝히고 있다. 전노협 편집실에서 일하였으며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노동운동자료실 연구위원으로 있는 정경원 동지의 글은 노동자가 자기 역사를 쓰는 집단적 작업으로 ‘백서 작업’을 들고 있다. 필자 역시 전노협 백서의 작업과정에 참여하였으며, 한국통신계약직노동조합의 백서작업과 발전산업노동조합 투쟁백서에 참여하기도 했다.


정경원 동지가 가르쳐 주는 해법은 이런 것이다.

①기록을 남길 때 수단에 얽매이지 말 것 ②백서작업의 기본은 자료수집이며 투쟁 과정에 조직적인 자료수집이 이루어져야 한다 ③가능한 주체 스스로, 최대한 주체를 추동해서 기록하자 ④백서는 과거의 기록과 미래의 평가뿐 아니라 현재적 의미를 지닌다.


변화를 위한 투쟁은 역사기록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국통신계약직노조 백서작업과 발전노조 백서작업의 생생한 사례들에서 묻어나오는 것은 ‘역사기록 과정’이 곧 투쟁의 과정이었으며, 이 과정 속에서 투쟁시기만큼의 변화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바로 그 지난하고 힘들었던, 때로는 끔찍했던 투쟁기억을 돌아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이지만, 그 ‘돌아보기는 새로운 인식의 출발점’이기에 노동자의 자기 역사 쓰기는 변화의 과정인 것이다. 한통계약직노조 이운재 선전국장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는 투쟁한 거에 대해서 글로 써달라고 해도 거부반응이 안 생긴다. 왜냐면 필요성을 공감했기 때문에.’ 단지 거부반응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를 노동자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몸에 베였다는 뜻이다.

‘투쟁 한복판에서는 투사였던 노동자들이 투쟁의 결과로만 판단해 자신의 능동적인 경험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돌리는 경우가 허다하고, 상처를 받았다고 하면서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돌아보기는 과정을 묻어두지 않기 위함이다. 돌아보기를 통해 스스로의 삶이 변화했음을,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자신이었음을 자각하게 된다. 즉 돌아보기는 행동의 주체인 노동자가 기록의 주체로, 한발 더 나아가 자신을 새롭게 하는 주체로 서는 길이다.’(95쪽)


평가가 부담스러워 기록하지 않거나, 시간에 쫓기거나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여 아예 시도조차

평가에 대한 부담 때문에 차라리 건드리지 않는 길을 택하기도 한다.


이 책에는 노동자교육과 관련하여 전노협 이전부터 노동자교육에 힘써왔으며 민주노총을 거쳐 노동자교육센터 대표로 활동하고 있는 김진순 대표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또한 70년대부터 청계피복에서 노동운동을 해온 민종덕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위원의 인터뷰도 실려 있다. 말하자면 이 두 글은 노동자, 노동교육활동가의 일종의 생애사인 셈인데, 추상적인 역사적 흐름 속에서 두 인물이 어떻게 대응해왔고 어떻게 상황을 받아들였는지 재미있게, 의미 있게 읽을 수 있다. 두 글 모두 유경순 연구원이 기록했다.


또 다른 장은 현대 한국 노동운동사 연구 현황과 과제인데, 다소 어렵기도 하거니와 제목과는 조금 거리가 있고 견해의 차이가 느껴질 수도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짧막한 글들이기에 해방 이후, 70-86, 87년 이후 세 시기에 대해 참고하고자 할 때 읽어두면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마지막 장은 노동자교육운동과 관련한 역사이다.

1930년대 최초의 사회주의 학교인 경성 고학당에 대한 글과, 70-80년대의 민중교육운동 속의 파울로 프레이리의 사상의 영향에 대한 글, 더 좁혀 90년대 초반 노동자대학에 대한 사례를 통해 사회 변화 속에서 실패 또는 (노동조합으로의)이전, 중단되고 만 노동교육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각 지역에서 노동교육에 대한 새로운 욕구들이 높아지고 있는 지금, 노동교육의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지은이들은 머리말에서 라다크의 격언인 ‘‘지혜’란 지금 여기에서 하고 있는 일을 나중에 지금의 아이들이 어떻게 평가할까 생각하는 것’을 들어 돌아보기의 중요성을 얘기하고 있다. 우리가 노동자의 역사 형성과 그 역사에 대한 교육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역사는 다른 누군가가 죽이려고 해야 죽일 수 없고, 살리려고 해야 살릴 수 없는, 노동자들 스스로 해야만 하는 작업이며, 그것이 세상을 만들고, 기억하는 유일하게 올바른 길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노동자에게 역사는 자기 역사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역사책들에는 역사의 주인이자 주체인 노동자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며, 노동자들은 역사를 고리타분한 먹물들의 전유물로 여기거나 관심을 두지 않았다. 기억해보자. 80년대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던 ‘노동자의 역사’, ‘노동의 역사’ 등의 책들은 내용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당시의 학문적인 성과를 체계적인 정리, 쉬운 문체, 짧은 분량으로 많은 청년 노동자들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켰다. 그러나 이제는 서울 주변의 헌책방이나 부산 보수동 골목으로 숨어들었고 그마저도 이제는 ‘헌책방의 헌책’으로 Kg당 얼마씩의 가격으로 팔려나가는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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