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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부산2호]노동운동에 돌을 던져라? 노동운동 논쟁을 바라보며

다시 읽어보니, 노동운동 위기에 대한 근본적 전략전술보다는 박승옥에 대한 네거티브한 진술이 주를 이루네요. 그게 이 글의 한계인데요. 요즘의 산별노조를 둘러싼 다른 글들이 많이 보충하고 있습니다. 찾아보세요. 말하자면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노동운동 외부의 논쟁이 주였는데요. 이제 주요한 조직노동과 정파그룹간 논쟁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런 점에서 박승옥에게 고마워해야할지도...)

노동운동에 돌을 던져라? - 노동운동 논쟁을 바라보며 -

출처: 민주노동당 부산시당 소식지 <진보부산> 제2호(2004.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양솔규(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부산시당 웹진 소식지 <진보부산> 2호 원고청탁을 받고 필자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논쟁 중’인 사안에 대해 뭐라 글을 쓸 것인가. 더군다나 부산시당 상집에서 <진보부산> 1호의 내용이 너무 “무거웠다”는 평가가 있었다는 후문을 듣고 더욱 힘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노동운동 논쟁’이라는 무겁디무거운 주제를 떠넘기면서도 깃털처럼 가벼운 소식지 2호의 탄생을 바라는 부산시당 간부들의 욕심은 얼마나 과한가? 이게 간부들이 ‘평당원’에게 바랄 수 있는 주문인가? 부산시당 간부들이 내게 던져 준 ‘무겁디무거운’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아니, <진보부산>이 가뜩이나 무거운 현실을 마주하며 살고 있는 우리 당원들에게 명징하고 상쾌한 10월의 가을하늘처럼 다가가는 것이 진정한 본령이라면, 부산시당 간부들이 필자에게 부리는 욕심은 너무나도 정당하다. 그렇지만… 그렇다면… 필자 선택이 잘못되었다. 나는 노련한 릴리프 피쳐(구원투수)가 아니다. 패전 전담투수 감사용의 마음이 이랬을까? 서론이 이렇게 길어지는 것만 봐도 내가 적격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진보부산> 3호부터는 부산시당의 대표선수들이 1진을 구성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나의 꿈은 소박하다. ‘아름다운 퇴출’!


이 무겁디무거운 ‘노동운동 논쟁’이라는 주제가 왜 <진보부산> 2호에 실려야 하는지 의문을 가진 당원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는 일차적으로 ‘담론투쟁’이라 한다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쟁점에 대해 예의 주시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또한 민주노동당이 노동자 민중의 정당이라고 한다면 노동운동을 둘러싼 논쟁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 논쟁에 불을 붙인 박승옥(前 전태일노동자료연구실 대표, 존칭 생략)은 92년에도 계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글을 실으면서 소위 “노동운동 위기 논쟁”을 촉발시킨 바 있다. 그 박승옥이 돌아왔다.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내용으로 노동운동에 대해 ‘매스’ 혹은 ‘채찍’을 들이밀었다. 단지 ‘생태주의’가 추가되었고, 지면이 <당대비평>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번에도 수많은 반론자를 양산했고,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그의 글 “한국 노동운동, 종말인가 재앙인가”는 2004년 계간 당대비평 가을호에 실렸고,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 재게재 되었고, 동아일보, 매일경제, 한국경제신문, 국민일보 등 보수언론들의 ‘띄워주기’도 이어졌다. 이에 운동진영 내 다양한 사상적 스펙트럼을 반영하는 반론과 재반론이 이어지면서 어느새 A4 50장이 넘는 “노동운동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9월이 그렇게 지나갔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예전의 논쟁들은 논쟁의 ‘주제’가 명확했지만, 지금의 논쟁은 두루뭉실하다. ‘노동운동 위기’ 논쟁도 아니고, ‘노동운동 논쟁’이라는 애매모호한 타이틀이 붙어 있다. 또한, 반론과 재반론은 1탄, 2탄… 6탄 이런 식의 ‘선정적인’ 시리즈물이 되어 버렸다. 학술적 논쟁이든, 전략전술적 논쟁이든 주제의 경계선이 있기 마련인데, 지금의 논쟁은 경계선이 없다. 곧, 한국 노동운동의 조직적 전망, 이념적 전망, 운동방식, 구체적 정책, 항변과 소박한 소망 등이 모두 뭉뚱그려져 있다. 어떻게 이런 논쟁 속에서 ‘옥동자’를 양산할 수 있을까?


또한, 보수언론의 ‘띄워주기’ 이전에 이미 <프레시안>의 ‘띄워주기’가 있었다. 박승옥은 “현재의 한국 노동운동은󰡐왕자병 환자’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고 했지, “왕자병 걸린 노동운동”이라고 하지 않았다. 2탄 류동기 교사의 글 제목을 “진정 박승옥님 주장을 ‘저주의 굿판’으로 보십니까”라고 단 것 역시 <프레시안>의 의도였다. 선정적 타이틀과 1탄, 2탄으로 이어지는 화려한 장식은 전적으로 <프레시안>의 책임이었다.

사실, 운동사회 내 중요쟁점들에 대해 <프레시안>이 증폭시켰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얼마 전, 오마이뉴스의 김태경 기자가 월간 ‘인물과 사상’ 9월호에 쓴 ‘노 정권과 시민단체들, 유착 혹은 상생?’이라는 글 역시 <프레시안>이 재게재했고 이후 <미디어 참세상>, <프레시안> 등에서 치열하게 시민운동 성격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80, 90년대와는 다르게 인터넷신문이라는 미디어가 ‘논쟁의 격전장’을 마련해 준다는 의미를 폄하하거나 무시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문제는 ‘누구의 격전장’인가 하는 점이다. <미디어 참세상>을 제외하고는 논쟁의 격전장은 운동진영의 매체가 아니었다. 이 점은 진지하게 논의되어야 할 운동진영의 쟁점들이 선정적으로 검토되는 현상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 글의 주제와는 다른 문제이므로 넘어가지만, 운동진영 내(또는 서로 간) 미디어의 문제, 운동진영의 대외적, 사회적 미디어의 문제는 ‘대 사회적 헤게모니와 운동 수준의 심화’에 있어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문제라는 사실만은 언급해 두어야겠다.


어쨌든, <프레시안>에 실린 1-6탄, <민중의 소리>, <하종강 홈페이지>, <노사저널>, <노동사회>에 실린 글들 모두에 대해 여기서 자세히 언급할 수는 없다. 반론과 재반론이 이어지면서 충분하게 논의된 부분들도 있고, 다양한 쟁점들이 해소가 된 측면도 있기 때문에 굳이 모든 부분들을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 또한, 진지하고 내공에 찬 다양한 사상을 가진 부산의 당원들에게 <진보부산> 성격상 내 개인 입장을 나열하는 것도 낯부끄러운 일이며 불필요한 일일 것이다. 다만, 박승옥의 글을 중심으로 문제점들을 짚어보는 것은 논쟁의 이해와 고민의 진전을 위해서 필요할 것이기에 몇 가지 언급해야겠다.


첫째, 박승옥이 분석하는 위기의 근저에는 신자유주의를 사상적 지렛대로 하는 자본의 지구화운동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노동에게 강요하는 구조적 조건이 박승옥이 말한 것처럼 ‘단지 외부의 요인은 외부의 조건일 뿐’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 누구보다도 한국의 노동운동은 외부의 조건을 간단히 취급하고 넘어갈 수 있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외부적 조건과 내부적 조건을 분리하는 순간 박승옥의 분석은 분석이 아닌 강요가 되고 만다.

박승옥은 노동조합이 투쟁의 과실을 누리고 있다고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다. 아마 일선의 노동조합 간부들에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고 느낄 것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박승옥은 자본과 정권의 논리를 너무 쉽게 믿는다.

둘째, 전투적 노동조합주의에 대한 비판 역시 예전이나 지금이나 박승옥에게는 중요한 주제인 것 같다. 92년 논쟁 당시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를 대표했던 전국노운협을 대중조직인 전노협과 동일시하면서 논리적 비약을 했던 것처럼 그는 이번에도 ‘전투적 투쟁의 밑 빠진 물붓기식 투쟁’을 비판하면서 ‘전투성=생디칼리즘=현재 노동운동의 지도노선’으로 등식화시키고 있다. 당사자는 부정하는 이러한 등식은 박승옥 개인의 주관적 판단에 불과하다. 박승옥은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를 비판하며 사회발전적 노동운동을 주창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 운동은 그런 진행경로를 밟지 않았다.

92년 당시의 논쟁에 대해 노중기는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노동자계급의 전략적 선택의 폭은 매우 제한” 되어 있었고, 따라서 “민주노조를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의 전략적 선택은 부분적인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합리적’인 것”이었으며, “새로운 운동노선은 불가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필요치 않았다”(노중기(1995),「국가의 노동통제전략에 관한 연구: 1987-1992」,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박사학위논문)

한국 노동운동이 생디칼리즘이라면 예전 한노당*과는 기반과 성격이 다른 민주노동당이 어떻게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는가? 박승옥이 정확하게 얘기하고 싶은 것은 92년 전노협 중심성의 해체를 바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변혁성의 포기’, ‘사회주의의 포기’, ‘협력과 온순함’이다.

2003년 수많은 열사들이 우리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때, 박승옥은 얼마나 현실을 안타까워했을까? 노동자들의 가슴에 번지는 분노는 그에게 두려움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박승옥은 노동운동이 사회의 문제점을 극복할 능력과 철학이 없는 집단으로 매도하고 있지만, 과연 한국의 노동운동 말고 어떤 세력이 사회의 진보와 변화를 위해 다방면에 관계하면서 역량과 경험을 축적해 왔단 말인가?

셋째, 박승옥은 노동운동의 시민권을 이야기하면서 노동운동이 노동자중심주의를 버리고 시민운동을 주도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나는 정말 궁금하다. 노동운동이 노동자중심주의를 버린다면, 노동운동이라 부를 수 있을까? 한국의 사회운동세력 중 민주노총이 끼지 않는 그 어떤 캠페인이 성공했던가? 96-97 총파업은 단순한 경제총파업이 아니었으며, 박승옥이 걱정해 마지않는 비정규노동자들의 양산에 대한 반대, 민주주의의 후퇴에 대한 방어, 사회적 가치의 수호, 공동체성의 회복을 위한 투쟁이었다. 이 파업의 국내외적 반향을 차치하고라도 노동운동이 ‘사회발전’에 이바지하고 ‘사회 민주화’를 진전시킴으로써 노동운동의 시민권을 획득했다는 것이 이 투쟁의 가장 큰 의미였다.

넷째, 생태주의를 제기하는 박승옥의 진정성을 의심하지는 않으나, 걱정은 된다. 이 수다스러운 발언 때문에 노동운동과 노동자들이 생태주의와 담을 쌓으면 어쩌나 하는 우려 말이다. 전태일의 어린 벗들에게 ‘적게 소비하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에게 ‘자본주의식 물욕을 버리’라고 한다면 이건 고상한 이념의 체화나 교육이 아니라 폭력이 된다. 박승옥은 생태주의와 노동운동의 결합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생태주의와 노동운동의 분리를 바라는 것 같다. 자본주의의 극복 없이는 생태주의가 발붙일 곳은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반도는 자본에 의해 파헤쳐지고 썩어가고 있다.

다섯째, 박승옥은 이야기한다. “우리는 노동의 건강한 능동성을 되찾아야 한다. 자신의 노동을 비하하면서 대안을 모색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아름다운 말이다. 박승옥이 말하고 있는 것은 맑스가 말했던 바, 노동의 소외를 극복하고 노동의 본래적 의미를 되찾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노동의 건강한 능동성’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박승옥은 노동의 개념을 자본주의의 임노동으로 한정하는 경직된 인식을 버려야 한다고 하지만, 고통은 마취제로 치유할 수 없다. ‘임노동으로 한정’시키는 주체는 우리가 아니다. 자본주의가 우리의 노동을 임노동으로 한정한다. 박승옥의 비약 속에서 사이비 종교가 등장한다. 생태주의가 단순한 생활방식 이상의 철학인 것이 진실이라면, 그것은 사회 속에서 시스템화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역시 진실이다.

여섯째, 박승옥은 비정규직 문제를 풀지 못하는 아니, ‘풀 생각이 없는’ 현재의 노동운동을 비판한다. 2004년 10월 월간 비정규노동의 편집자는 박승옥의 이러한 태도를 ‘립서비스’라는 한 마디로 압축해 표현했다. 왜? 비정규노동자에 대한 언급이 정규직 노동운동 또는 노동운동 일반에 대한 비판으로 비약될 때 이는 현실에 천착한 진지한 성찰이라기보다는 노동운동 일반에 대한 테러무기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홧김에 “노동운동 망해봐야 정신 차려”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욕의 기능은 스트레스 해소 말고는 없다.

비정규 노동자에게 정규직 노동자가 연대해야 할 대상이라면, 마찬가지로 정규직노동자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동지이다. 조직노동자가 거세될 때 세상은 자본가의 천국이 될 것이다. 설마 박승옥이 그걸 바랄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구구절절 비판했지만 박승옥에 대한 반박으로 노동운동을 둘러싼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위의 생각 역시 내 개인적인 소회에 불과하다. 이번 논쟁을 통해 우리 노동운동의 발전과 사회변화를 바라는 다양한 입장, 전망들이 제시되었다. 100% 올바른 논쟁도 없지만, 얻을 게 없는 논쟁도 없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전통적 사회주의자, 사민주의자, 자유주의자 등 다양한 입장들이 개진되었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예전과는 다른 발전의 징표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대안, 우리의 숙고는 정확히 박승옥이 놓치고 있는 지점, 바로 ‘노동의 대지’에 뿌리를 내리면서 진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박승옥을 돌아오게끔 한 소위 위기의 현실, 종말의 기운은 정확히 바로 여기, 이곳, 땅위에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당원 동지들도 한 글 한 글 찾아 읽어보면서 자신의 입장을 가다듬고 세워보시길 바란다. 노동운동에게 돌을 던지는 박승옥은 아름답게 퇴출되기를 빌며, 진지하고 쌈박한 고수 당원들이 전면에서 우리 노동운동을 둘러싼 문제들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모임을 기대해 본다.

<더 읽을꺼리>

박승옥 “‘왕자병’ 걸린 노동운동, 이대로 가면 죽는다” 

출처: 2004-09-02  <프레시안>

황광우 “지금은 ‘70만 힘’을 이끌지 못하는 무능력을 고민할 때” 

출처: 2004-09-06  <프레시안>

류동기 “진정 박승옥님 주장을 ‘저주의 굿판’으로 보십니까” 

출처: 2004-09-07  <프레시안>

이광일 ‘왕자병론’의 외피 쓰고 재생한 ‘종양론’이라는 유령 

출처: 2004-09-08  <프레시안>

전지윤 노동운동의 ‘전투성’과 ‘계급성’을 방어하며

출처: 2004-09-10 <프레시안>

박태주 동전의 다른 한 면은 노동운동의 미래를 가리킨다 - 박승옥씨의 ‘노동운동 위기론’에 대한 단상

출처: <노사저널> 제675호(2004.9.20) http://www.nosanews.com/

하종강 노동운동을 비판할 때에는…

출처: (하종강 홈페이지 2004/9/10   http://www.hadream.com)

김성희 사회연대적 노동운동의 상을 기획하는 '퇴비'로 삼자

출처: <노사저널> 제676호(2004.9.27)

 

이정식 양대노총 진보정당 시민단체가 한 축이 돼 정세 변화시키자

출처: <노사저널> 제677호(2004.10.4)

최병천 노동운동 󰡐네덜란드-스웨덴 모델’에서 대안 찾자 - 박승옥씨 문제제기에 공감하며

출처: 2004-09-16  <프레시안>

 

하부영 대공장 노조, ‘왕자병’ 걸릴만큼 한가하지 않다

출처: 2004-09-22  <프레시안>, <노동사회> 2004년 10월호(통권 92호)

 

<92년 논쟁과 관련한 글>


박승옥,  한국 노동운동, 과연 위기인가, <창작과 비평>, 1992년 여름호

최규엽,  사회발전적 노동운동을 비판한다, <노동운동>, 1992년 7월호

박승호,  전투적 민주노조운동의 조합주의적 한계를 시급히 극복하자, <노동운동>, 1992년 7월호

임영일, 정세변화와 노동운동의 과제, <경제와 사회> 1992년 가을호, 한국산업사회연구회

박승희, ‘신조합주의’의 현실성에 대하여, <경제와 사회> 1992년 가을호, 한국산업사회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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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부산1호]감사원 감사로 불거진 경제자유구역 현황과 의미

 

출처: 민주노동당 부산시당 <진보부산> 제1호 (2004.10월)              

         

 감사원 감사로 불거진 경제자유구역 현황과 의미

        

양솔규 중동서지구당당원,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최근 부산과 광양의 경제자유구역 사업에 대한 전윤철 감사원장의 비판이 알려지자, 부산과 전라도 지역의 여론이 비등(沸騰)하고 있다.

8월 20일 전윤철 감사원장은 “3개 경제자유구역 추진사업에 대한 감사를 해보니 걱정스럽고, 문제점이 많다”며 “지역 현실을 감안하지 않은 채 경쟁적으로 물류, 첨단, 관광산업을 유치함으로써 예산의 중복투자 등이 우려된다”고 밝혔다.

감사는 감사원 내 국가전략사업평가단(이하 평가단)을 통해 2003년 말부터 이루어지고 있고, 9월 중 경제특구사업 개선방안을 내놓을 것으로 알려졌다. 평가단은 ‘국가전략사업에 관한 감사’, ‘동북아 경제중심 추진사업에 관한 감사사항’, ‘신행정수도 건설 등 국가균형발전사업에 관한 감사’ 등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이렇게 되자, 부산일보는 사설에서 ‘중복 투자가 되거나 과당경쟁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면 처음부터 경제특구로 지정하지 말았어야 옳았다’고 지적했다. 또한, ‘경제특구 지정시 전윤철 감사원장이 경제부총리로 재직 중’이었기에 지금에 와서 특구 선정이 잘못됐다고 운운하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부산항을 사랑하는 모임’과 ‘부산경제살리기시민연대’ 등도 전 감사원장의 발언을 성토하고 나섰다.

그러나 전윤철 감사원장은 인천 경제자유구역의 경우에는 적극적인 집중 지원을 언급했다. 이를 두고 ‘신지역주의 단체(?)’들은 ‘감사원장의 중앙집권적 사고방식, 지역균형발전을 위해하는 발언’ 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부산 지역의 ‘일부’ 여론이 침소봉대되고 있는 가운데 파이낸셜타임즈의 사설은 다소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 신문은 ‘경제특구가 실적없이 표류하고’ 있는데 늦게나마 ‘감사원이 특별감사에 나선 것은 다행스럽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내세우는 근거 중 하나는 교통개발연구원이 실시한 부산, 광양항에 대한 다국적기업들의 동북아 물류거점 선호도 조사에서 9개 조사대상 중 8위를 기록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파이낸셜타임즈는 경제특구의 성공을 위해 정부의 적극적 지원은 언급하지만, 구체적인 문제점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경제자유구역 주무부처인 재경부뿐만 아니라, 각 부처와 동북아시대위원회, 국가균형발전위원회 등 다른 부처, 기관들도 다양한 정책들을 내놓고 있다. 2004년 6월 교육인적자원부는 경제자유구역 내 외국인학교에 내국인 학생비율을 해당 학교장이 결정할 수 있게 하고, ‘해외송금 금지 장벽’도 없애기로 결정했다. 이는 전교조 등 교육단체들이 강력하게 반대했던 ‘교육개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사항이기도 하다.

2004년 8월, 오갑원 재정경제부 경제자유구역 기획단장은 외국계 병원에서 내국인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방침을 확정했다. 보건의료노조와 의료개방공대위의 반대는 간단하게 무시되었다. 국내의료법에서는 금지된 영리(營利)병원 설립도 허용키로 했고, 그에 따라 수익금의 해외 송금과 자본투자 등이 자유로워지게 되었다.

작년 경제특구법이 통과된 이후 노동계와 시민사회단체들의 움직임이 둔화된 가운데 현재 제반 사항들이 아무 저항 없이 강력하게 관철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현재 구역지정과 구역청이 출범했으나 투자유치 실적은 극히 미미한 실정이다. 부산-진해경제구역청의 경우에는 3월 개청 이후 양해각서 체결 실적마저 전무한 상태이다. 공장용지도 아직 마련되지 않은 상태이고, 인프라 구축에 필요한 재원 역시 부족한 상태이다. 지원에 필요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예산은 현재의 상황에서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으며, 게다가 재계는 감세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무엇보다도 현재 경제자유구역의 문제점은 한국 산업 성장엔진에 대한 숙고 없이 노동, 환경 등의 희생을 대가로 ‘저진로(low road)'를 지원하는 마인드를 가지고 구성되었으며,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기조가 유지되는 한 정책추진력의 소진이 불을 보듯 뻔하다는 사실에 있다.

그렇다면, ‘자본의 천국’처럼 보이는 경제자유구역에 왜 외자유치가 되지 않고 있는 것일까? 추후 세밀한 비교 검토가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우선적으로 들 수 있는 것은 IMF 위기 이후 한국의 경제시스템의 변화이다. 현재 한국에 들어온 해외자본들은 ‘투기자본’들이다. 이들은 장기적인 투자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단기 수익률에 관심을 갖는다. 또한, 중소기업 및 벤처보다는 우량 대기업을 투자 대상으로 설정한다. 결국 우량 대기업들이 경제자유구역에 투자를 해야하지만(해외자본 10% 이상이면 투자 조건이 성립한다. 따라서 한국의 대부분의 우량 대기업은 경제자유구역에 투자할 자격이 있다), 이들은 현재 경제 조건 하에서 (정부의 각종 지원에도 불구하고) 설비투자보다는 내부 유보 내지는 해외투자를 선호하고 있는 상황이다.

두 번째로는 경제자유구역보다는 기업도시를 선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80년대 말부터 추진된 한국의 ‘생산의 세계화’ 전략은 ‘금융의 세계화’에 하위 종속된 상태이다. 자본의 입장에서는 대등한 노사의 ‘대타협’에 의한 고진로(high road)가 아닌, 노동의 배제 속에서의 고진로(high road)를 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깨끗한 도화지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싶은 것이다. 소위 산업 클러스터라고 일컫는 지역혁신체제를 자본은 기업도시와 등치시키면서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세 번째로는 현재 경제자유구역과 관련한 제반 사항이 미흡하다는 것이다. 부산, 인천 등은 전통적인 도시이기 때문에 용지확보가 쉽지 않고, 인프라들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설사 정부의 지원이 이루어지더라도, 기업도시처럼 효율적으로, 빨리, 이해당사자들의 저항 없이 이루어지는 길보다 나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기에 자본은 망설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추후 전경련이 추진하고 있는 기업도시와 경제자유구역을 비교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상의 최근 불거진 부산, 광양 경제자유구역 축소조정 논란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지역의 개발을 둘러싼 각 이해당사자들의 ‘성장연합’이 ‘경제자유구역’의 취지와는 무관한 이권 지키기에 나서고 있다. 경제자유구역은 ‘지역분권’ 또는 ‘국토균형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신지역주의’의 물질적 토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양적 성장 지상주의’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지역민 전체의 고른 발전이라는 관점보다는 ‘특정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논의가 집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단지, 경제자유구역 문제뿐만이 아니라, 영도대교 문제, 지역 산업정책 등 모든 부분에서 드러나고 있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 전체가 지역개발의 블랙홀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으나, 합리적 룰과 통제 시스템은  전무한 ‘개발 지상 무정부’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런 속에서는 당연하게도 행위주체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셋째, ‘부산시민’이라는 호명 속에서 시민 일반이 ‘이해당사자’처럼 보이는 착시현상이 발생한다. 결국 노동자, 서민, 농민, 중소제조업자, 주부, 학생 등 다양한 계급계층들의 이해는 사라지고, 각 주체들에게 다르게 적용되는 정책 효과는 논의의 장에서 빠져버리게 된다. 이 틈을 지역 언론사와 개발업자, 이권관련자들이 ‘부산시민 전체를 대리, 대표’하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경제자유구역 문제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실질적으로 경제자유구역이 노동자 서민의 목을 죄어오고 있는 상태가 아니다. 국민의 삶을 담보로 한 경제자유구역 설립은 초입 단계에 있다고 봐야 한다. 법안 통과가 곧 투쟁의 종결을 의미할 수는 없다. 재계와 정부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노동자, 서민의 삶을 중심에 놓는 ‘산업정책’을 만들지 않는 한 민주노동당은 ‘반대하는 존재’ 이상의 의미를 얻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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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부산1호]감사원 감사로 불거진 센텀시티 조성사업 문제점

 

감사원 감사로 불거진 센텀시티 조성사업 문제점    

 

                                                          양솔규 중동서지구당당원,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2004년 7월부터 8월 사이, 감사원은 부산시 감사결과를 공개했다. 그 중 센텀시티 조성사업과 관련해서 많은 문제점이 드러났다.


감사원의 감사결과를 보자.


"센텀시티 마스터플랜과 실시계획에서 지원시설용지를 전시, 문화관광, 상업업무, 유통시설 용지 등 4개 구역으로 구획하였으나, 각 구역별로 건축물의 제한 등 세부개발계획을 수립하지 아니한 채 분양하였기 때문에 유통시설 용지와 상업업무시설 용지 등에 공동주택이나 오피스텔 등이 건축되거나 건축예정으로 있어 당초의 도시개발 구상과 다르게 주거단지화 우려"


센텀시티 조성에 소요되는 자체재원이 부족하여 1996년부터 2001년까지 계 4,900억 원을 차입함에 따라 2003년 말까지 1,729억 원의 이자를 부담하였고, 앞으로도 연간 167억원의 이자를 부담하여야 하는 등 재정압박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어 조성된 부지를 조속히 매각하여야 하나......도심위락지역을 최고가에 의한 경쟁입찰이 아닌 부지 전체를 동일인에게 일괄 매각하는 것으로 계획하고 있어 매각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거나 매각성사 여부 불투명


감사원, “감사결과 처분요구서 -부산광역시 일반감사”, 2004년 3월


문제는 마스터플랜 단계에서부터 졸속 계획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뿐만이 아니라, 계획 조차도 수시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국민들의 세금은 개발업자와 금융업계에 넘어가게 되고, 다른 노동자, 서민들에게 쓰여야 할 돈은 바닥나고 정부 재정은 압박 받게 된다.


부산시는 센텀시티 개발과 관련해 특히 제2 BEXCO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BEXCO는 작년부터 흑자(당기순이익 3억6000여 만원)로 돌아섰고 가동률은 해마다 증가해 2001년: 26%, 2002년: 40%, 2003년: 46%, 2004년: 51%에 이르렀다.


하지만, 국내외 컨벤션 산업의 과잉투자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어 제2 BEXCO는 위험성이 매우 높다.


중국은 90년대 이후 매년 컨벤션 산업이 20%씩 급성장해왔으나, 공급 과잉 폐해가 심각하다. 일본 역시 과잉성장한 컨벤션 산업을 다시 부흥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각 자치단체들이 경쟁적으로 컨벤션센터를 추진하고 건립하면서 2007년-2009년에는 과잉포화상태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현재 서울(COEX), 부산(BEXCO), 대구(EXCO), 제주(ICC)가 운영중이고, 경기 고양, 광주, 경남 창원, 3곳이 2005년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울산과 대전, 인천도 컨벤션센터 건립을 추진중이며, 경북도 정부에 예산 지원을 건의한 상태이다. 현재의 가동률을 기준으로 제2BEXCO를 건립하겠다는 것은 무모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창원의 컨벤션센터와 부산 BEXCO는 인접거리에 있어 중복투자가 될 것이 뻔하고, 서로가 제살 깎아먹기를 할 것이다. 이미 건립중인 창원 컨벤션센터 운영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제2벡스코의 경우에는 민주노동당 부산시당과 민주노동당 경남도당이 함께 대책을 세워야 할 것으로 보인다.


내년 중으로 BEXCO 타당성 용역 조사가 끝나 보고서가 나올 예정이다. 울산의 경우에는 타당성이 없다는 결과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컨벤션센터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부산시의 과잉중복투자에 대해 대비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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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섬마주섬>

부산실업극복지원센터 <일어섬마주섬>에 실린 글

분노 바이러스? 사회적 연대로 퇴치하자

 

 양솔규(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트레인스포팅>을 만든 영국 영화감독 대니 보일은 2002년 좀비 호러물 <28일후>를 발표했다. 이 영화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동물권리 운동가들은 영장류 연구소에 침입해 침팬지들을 '해방'한다. 그러나 쇠사슬에 묶여 있던 침팬지들은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였고, 분노 바이러스는 영국과 전 지구를 휩쓸고 지나간다. 주인공은 살아 남은 자들과 함께 상황을 헤쳐 나간다. 특이한 것은 이 영화는 헤피엔딩과 세드엔딩 두 가지 결말이 관객들을 기다린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장면이 하나 등장한다.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된 침팬지들에게 폭력적인 비디오 장면이 강제로 상영된다. 그 장면들 중 하나는 대우자동차 노동조합원들이 1001 기동대에게 폭력을 당하는 장면이다. 한국의 경찰 폭력은 드디어 이런 방식으로 세계와 접속했다.

우리는 장밋빛 전망을 쏟아내던 21세기 새해 벽두의 요란스러움을 기억한다. 그러나 불과 얼마 되지 않아 21세기 역시 20세기만큼이나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예측을 쉽게 할 수 있었다. 이라크에서는 수만 발의 포탄이 떨어졌고, 한국에서는 빈곤층과 노동자들의 분신, 자살, 동반자살이 이어졌다. 눈에 보이는 직접적 폭력과 위험성은 점점 더 증가되고 있다. 비록 부시는 자신의 황제등극 이후 세계는 더 안전해졌다고 믿고 있는 것 같지만, 불행히도 우리는 그런 사실을 감지할 수가 없다.

단지 눈에 보이는 폭력뿐만 아니라, 자살로 내몰고, 증오를 부추기고, 사회적 관계를 파괴하는 '은밀한 폭력' 역시 증가했다. 지배와 피지배의 연쇄고리는 사회 최상층부터 가장 밑바닥까지 전일적으로 확산되어 있다.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에게 증오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피지배계급 내부에도 서로간에 적개심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의 상황은 매우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조지오웰의 소설 <1984>에는 '증오주간'이라는 설정이 등장한다. 이 증오기간에는 모든 사람들이 '증오'를 실천해야 한다. 이 그럴듯하지만, 끔찍한 설정은 불행하게도 한국에, 중동에, 유럽에, 세계에 현시되고 있다.

조지오웰은 증오 '주간'을 예상했지만, 현재 상태는 전지구적 차원에서 '영속적인 증오령(憎惡令)'이 내려진 상태다. 이주 노동자들을 바라보는 경멸과 멸시의 시선, 동성애자들을 억압하는 사회, 일하는 사람들의 정당한 권리인 '파업'을 범죄시하는 풍토, 실업자에 대한 방치,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증오의 부산물'들이다. 자신을 해방시켜준 동물 권익 운동가들을 살해하는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된 침팬지들처럼, 세상의 다수는 노동자, 농민, 실업자, 여성, 동성애자 등등의 세상 다수를 해하고 경멸하며, 위협한다.


이라크 무장단체에게 죽임을 다한 故 김선일씨를 바라보며, '테러리스트에게 복수의 불벼락 내리자'고 외치는 젊은 우익들의 눈빛은 2차대전 자위대의 눈빛이고,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서 이라크 포로들을 학대, 고문하던 미군의 눈빛이다.

'증오령'은 '계엄령'과는 달리 시작일자와 종료일자가 없다. 따라서 증오령의 종식일은 누구의 명령으로 내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누가, 어떻게 증오령을 거둬들일 수 있을까? 증오령에 복속되어 있는 평범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연대를 통해 '증오령'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매시각 내리꽂히는 '분노와 증오'의 명령을 거부하고, '사회적 연대'라는 무기를 통해 우리는 지금도 전선에 서 있다.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가? 증오인가, 연대인가? 파멸인가, 해방인가? 당신과 내가 '지금'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21세기는 해피엔딩이 될 수도, 세드엔딩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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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실>2005.8 도전과 응전의 파노라마, <노동의 힘>

리뷰 출처 :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연대와실천> 2005년 11월호 (137호) 

양솔규 |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 redstar@jinbo.net

 

비버리 J.실버 / 그린비 /

2005.8월/15,900원

도전과 응전의 파노라마,《노동의 힘》

비버리 J.실버 / 그린비 /

2005.8월/15,900원

9월 4일, 현대차비정규노조 조합원 류기혁 동지가 노동조합 사무실의 옥상에서 자결하였고, 9월10일에는 화물연대 조합원이자 민주노동당 당원으로 활동하던 김동윤 동지가 신선대 부두 앞에서 분신하였다. 김주익․곽재규 열사, 이현중, 이해남 열사 등과 박상준, 최복남, 고성학 동지 등 화물운송 노동자들의 죽음에 이어 도대체 끊이지 않고 있는 이 죽음의 행렬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강승규 비리 사건으로 민주노총 이수호 집행부가 사퇴하였고, 울산 북구 선거 패배 후 민주노동당 김혜경 대표와 최고위원회가 사퇴하였다. 혹자는 ‘사퇴정국’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짧은 만개와 때이른 조락이 낳은 불안한 기운이 여러 사람들의 얼굴빛을 어둡게 한다.

부산 서면에서 열린 김동윤 열사 추모 촛불집회를 마치고 참담하고 허탈한 마음을 안고 지하철에 올랐다. 부산대 앞에서 전두환 아들이 운영하고 있는 서점(리브로)에 들려 새로 나온 신간들을 살펴보려 했지만, 인문사회과학 신간 코너는 새학기를 맞아 어느새 대학교재 코너로 바뀌어 있었다. 경영경제 도서나 예술, 컴퓨터 실용서들은 버젓이 자신의 보금자리를 가지고 있지만 인문사회과학은 어느새 답답하고 돈 안되는 천덕꾸러기가 되었나보다.

이곳저곳 찾아다니며 책을 뒤지던 중, 최근에 나온 책 하나가 눈에 띄었다. 비버리 J. 실버가 지은 ‘노동의 힘’이 그것이다. 표지에는 멕시코의 예술가 디에고 리베라의 프레스코 벽화 가 전면에 그려져 있다. 이 표지 그림으로서는 도저히 ‘노동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왼쪽 옆에 관리자인지 자본가인지가 안경 너머 매서운 눈초리로 일하는 노동자들을 ‘꼬나보고’ 있고, 노동자들의 눈동자는 보이지 않는다. 정신없이 작업에만 매달려 있는 모습들. 더군다나 노동운동의 위기를 말하고, 노동 연구의 위기라 말하고 있는 이 시기. 신자유주의 광풍을 힘겹게 맞이하고 있는 한국의 노동운동과, 일시적인 ‘열사정국’이 아니라 ‘열사의 시대’ 아니, ‘죽음의 시대, 절망의 시대’라 할 수 있는 바로 이 땅에서 ‘노동의 힘’을 선언하기에는 도무지 자신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이 책을 꺼내봤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역자 중 한 사람인 백승욱 선생은 최근 중국 노동의 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저작들과 논문들을 발표하고 있고, 이매뉴얼 월러스틴과 같은 세계체제론자들의 책들을 번역했는데, 그 긴요성을 간취하는 뛰어난 능력에 걸맞게 좋은 책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었다.

이 책은 1870년 이후의 노동자운동을 세계노동운동집단 데이터베이스에 기반해 몇 가지 개념을 가지고 분석하고 있다. 그 개념이란 첫째, 맑스식 노동소요와 폴라니식 노동소요이다. 맑스식 노동소요는 ‘역사적 자본주의의 발전이 과거의 노동계급을 해체시키는 와중에 의도치 않게 낳은 결과로서 출현해 잇달아 형성, 강화되어 가는 새로운 노동계급의 투쟁’을 뜻한다. 폴라니식 노동소요는 전지구적인 경제적 전환 탓에 해체되어 가는 노동계급이 벌이는 저항을 뜻한다. 둘째, 노동소요에 대응하는 자본의 방식은 공간 재정립과 기술 재정립, 제품재정립, 금융적 재정립으로 나눌 수 있다. 재정립을 통해 자본은 노동소요를 무력화시키고 안정적인 자본 축적 구조를 만들고자 하지만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하다는게 저자의 생각이다. 셋째, 노동의 힘은 연합적 힘과 구조적 힘(시장교섭력, 작업장교섭력)으로 나누고 있다.

저자가 주목하는 바는 전세계 노동운동이 위기에 빠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재정립을 통해 노동소요를 파괴하고 피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최종적’으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본이 가는 곳에 갈등이 따라간다’는 주장을 저자는 책 한 권을 통해 증명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저자들은 먼저 20세기 자본주의의 선도산업인 자동차산업에서의 노동소요와 자본이동을 다루고 있다. 자동차산업의 노동소요는 자본의 공간재정립에 따라 지리적으로 변화되어 왔다. 미국에서 서유럽으로, 다시 제3세계(브라질, 한국, 남아공 등)로 이동해온 이러한 자동차산업 노동소요는 이제 최종적인(?) 거대한 노동소요의 진원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바로 세계의 생산기지 중국이 그러한데, 아직 현상적으로는 조용하지만 그 거대한 대륙이 요동칠 시간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자동차산업 내부를 들여다보면 우리가 보통 린생산(Lean Production)이라고 부르는 일본식 생산방식이 전세계로 확산되어 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바로 기술재정립의 과정이다. 그런데 일본의 린생산방식(이중적 린생산)보다는 ‘인색한 린생산’ 방식으로 변형되었고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90년대 후자의 방식을 도입했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재정립은 오히려 노동의 강력한 작업장교섭력을 증대시켰다. 연합적 힘을

그러나 19세기의 섬유산업의 노동소요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산업에 노동소요의 역사적 임무를 넘겨줄 운명에 처해 있다. 노동-자본 갈등의 장소가 부문간으로 이전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부문이 21세기의 노동소요를 책임질 것인가? 이를 포착하기 위해 저자는 ‘제품재정립’이라는 용어를 도입했다. 이는 바로 ‘혁신적이고 더욱 이윤이 높은 새로운 생산라인과 산업으로 자본을 이동’하는 것을 말한다. 한 제품의 후기 단계(경쟁이 격화되면서 이윤율이 낮아짐)는 새로운 제품 산업의 시작과 겹쳐진다. 바로 지금의 시기는 자동차산업과 새로운 산업이 겹쳐지고 있는 시기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산업이 자동차산업의 계승자가 될 수 있을까? 저자는 반도체산업, 생산자서비스 산업(도시 시설관리. 바로 SEIU가 행했던 건물관리인을 위한 정의 캠페인을 상기하라. 이는 젊은 활동가들을 흥분시키는 캔 로치 영화 “빵과 장미”에 잘 묘사되어 있다.), 운송과 교육산업을 검토한다. 결론적으로는 21세기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은 20세기의 자동차산업보다는 19세기 섬유산업과 비슷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도체산업은 섬유, 자동차와는 달리 고용성장의 원천이 아니며, 고소득 국가에 집중되었고, 자동화되고 있다. 교육과 생산자서비스는 제조업과 달리 공간재정립이 힘들다. 그렇다고 이러한 산업들에서 우리가 자동차산업과 같은 폭발적 전투력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21세기 노동의 ‘구조적 힘’이 침식되는 것만큼 우리는 19세기 섬유노동자들이 그랬듯이 ‘연합적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이 힘은 ‘지역’을 근간으로 한다. 바로 도시 시설관리나 교육산업과 마찬가지로 지역 차원의 연합적 힘이 필요하며 이는 젠더, 시민권, 계급 등의 여타 다른 범주들의 동원과 협력, 수용이 필수적이다.

최근의 상황에 대해서는 저자는 ‘금융적 재정립’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전세계적인 경쟁의 압력은 무역과 생산에서 이탈해 자본이 금융과 투기로 옮겨지게 만들었다. 현재의 과잉축적된 금융적 재정립은 사회협약의 붕괴와 기존의 조건의 후퇴에 대항하는 폴라니식 노동소요의 전세계적인 확산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금융적 재정립은 곧 노동운동의 위기를 불러왔고, 19세기의 금융적 재정립과 유사한 패턴을 보이고 있다.

마이크 데이비스는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에서 미국 노동의 힘이 거세당하는 과정과 원인을 추적하면서 결국 자신의 대안을 제3세계 노동자에게 찾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약 20여년이 지난 지금, 혹 우리는(아니 나는) 우리의 대안을 ‘중국 노동자’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만큼 중국이 세계노동정치에 주는 함의는 대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활동가는 이 책의 저자 실버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거대한 노동소요의 물결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마틴 하트 랜즈버그 역시 <중국과 사회주의>(한울)에서 노동자들의 광범위한 투쟁이 유발되고 있으며 이는 중국 자본주의의 복고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도 마찬가지로 노동소요의 거대한 진원지로 중국을 파악하고 있다. 그에 따른 광범위한 중국 노동자들의 폴라니식 노동소요가 분명한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맑스식 노동소요는 분명치 않은 것 같다. 어찌되었든, 결국 자기대안은 자기가 마련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유일하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중국의 노동소요가 전세계 노동계급의 재생의 힘이 될 지는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국을 찾은 중국 공회의 간부가 공산당의 발전주의이데올로기를 읊는 것을 보면서 황망했던 기억이 있다. 수많은 중국 인민들과 더 많은 전세계 노동자들이 슬기롭게 자신의 힘을 낙관하지도, 비관하지도 않으면서.

이제 21세기의 노동이 마주한 거대한 전환점에서 우리는 우리 노동운동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 파악 하에서만이 정확히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와 한계, 전략이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효과적으로 우리 자신의 힘을 이용해야 한다. 실버의 ‘노동의 힘’은 바로 ‘노동의 힘’을 증대시켜줄 뿐만 아니라 효과적인 방법을 생각하게 해주는 책인 것이다. 우리가 자본이 이윤을 위해 추구하는 재정립이라는 도전에 끊임없이 응전하는 이유는 그것이 나의 삶의 본질적인 회복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나의 구성요소이자 내가 그 일부분인 공동체의 본질적인 회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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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실> 2005.10월 노동, 조직, 민주주의

노동, 조직, 민주주의

 



《노동과 조직, 그리고 민주주의》

/한울/조효래,김재훈/22000/2005년 9월

리뷰 출처: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연대와실천 10월호 136호

양솔규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흔히 회자되듯이 노동운동의 위기는 현실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운동’ 자체의 위기(토대?)이기도 하거니와 더불어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사상, 정체성, 지향점을 나타내고 재정립해 나가는 노동연구의 위기(상부구조?)이기도 하다. 이미 배출된 노동관련 연구자들 외에 새롭게 성장하거나 준비된 연구역량이 거의 바닥난 상태이기도 하거니와 그나마 있는 연구자원 조차 정부․자본에 급속하게 편입되어가고 있는 상태이다. 현장과 대학의 새로운 세대들은 집단적 미래 설정보다는 개인적 미래 설정에 더 관심이 많은 듯 하다.

한국의 노동운동이 눈부신 성장을 보였다는 것은 분명하고 이에 세계의 진보적인 지식인 집단과 노동형제들이 한국의 노동운동에 주목했던 것도 명확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 공세에 힘겹게 대응하고 있는 지금의 전세계 노동운동은 한국의 노동운동에 힘겨운 만큼 공세기와는 다른 새로운 기대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주지하듯이 ‘계급정치의 영역에서 대항권력에 의해’ 규제되어야 하는 시장은 그러나 노동의 성찰적 실천의 부재 속에서 ‘자본의 자기전복적이고 파괴적인 결과’를 양산해 내고 있다. 그야말로(노동사회를 포함하여) 사회를 자본 자신의 얼굴 그대로 구조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힘겹게 싸우고 있는 화물연대 노동자들과 완성차 비정규직 조합원들, 중소사업장 노동자들은 그 결과물이며,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는 양극화의 문제 역시 그러하다.


이러한 때에 조용히(?) 노동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연구자 두 사람이 자신의 논문들을 모아 ‘시장’에 내밀었다. 김재훈 교수와 조효래 교수가 낸 『노동과 조직, 그리고 민주주의』(한울, 2005.9)는 두 연구자가 공동집필한 것은 아니지만 공통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한국 노동운동과 노동연구의 현재 상태와 과제들에 대해 나름대로 정면으로 맞이하면서 쓴 책이다. 두 연구자는 시장의 폭력이 제도적으로 규제되어야만 하는데, 이를 규제할 수 있는 것은 계급정치의 영역에서 중층적으로 형성되는 대항권력이며 이는 곧 ‘조직화된 노동의 힘’이라고 보고 있다. 이 ‘조직화된 노동의 힘’은 안으로는 작업장 민주주의와 노조민주주의, 밖으로는 사회적 민주주의 혹은 실질적 민주주의의 확장과 제도화를 추구하는 이중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며 이는 곧 대항권력의 확장과 ‘조직화된 노동의 힘’의 ‘사회적 힘으로의 전화’를 가져오는 동인이라 할 수 있다. 두 연구자는 노동연구의 쟁점부터 정리하고, (생산직, 사무직)노동의 ‘현재적 상태’를 분석한 후, 조직과 민주주의를 분석하고 있다.

저자들은 영화 ‘올드보이’의 주인공 오대수의 질문과 이우진의 답변에 빗대어 ‘“왜 시장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라고 묻기보다는 “시장의 야만성을 규제하기 위하여 노동은 어떻게 조직화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분석의 시기는 1997년 경제위기 이후이다. 복수노조 허용과 노조전임자 임금지급이 금지되는 2007년이 곧 새로운 노동체제로의 이행의 분수령이 될 것으로 저자들은 전망하면서 한국의 97-2005년까지 9년을 분석대상으로 삼아 2007년 이후 노동체제를 보다 내실 있게 맞이하기 위한 쟁점과 고민을 풀어내고 있다.

이 책에 실린 10개의 절대로 만만치 않은 논문들은 그동안 각종 학술지(경제와사회 등)와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 사회과학연구총서(한울)에 실렸던 글들이다. 또한 《연대와실천》에도 6개의 글(조효래 4개: 1,5,8,9장, 김재훈 2개: 6,7장)이 소개되기도 했었다(연대와실천 이번호에 김재훈의 논문 6장 수록). 열 개의 논문 중 5개는 조효래(1,5,8,9,10장), 5개는 김재훈(2,3,4,6,7장) 선생이 쓴 글이다.(이하 존칭 생략)

‘1장 노동조합 조직연구의 동향과 쟁점’은 그간의 한국 노동연구의 동향을 살펴보고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조효래에 따르면 이전까지의 노동조합 내부정치에 대한 분석들이 이념형과 유형화에 의존해왔지만 각 유형들에 대한 인과적 변수(예를 들어 외부적 환경의 변화, 내부 조합원, 간부, 상급조직 간부의 인식, 노동조합운동의 가치, 조합목표 정의방식, 의사결정과정과 그 통로 등)에 대한 연구가 심도있게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분석한다.


앞으로의 노동조합 조직연구에서 해명되어야 할 과제들은 첫째, 노동조합 조직의 여러 수준들의 기능과 역할이 어떻게 분화되고 내부통제와 조정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둘째, 단위노조와 상급노조 수준에서 노동조합 리더십의 가치와 태도,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에 관한 연구이다. 셋째, 내부 균열구조와 조직적 분파들의 선거경쟁에 대한 분석을 필요로 한다. 넷째, 조합원들의 참여수준과 형태에 대한 분석이다.

 

‘2장 노동력 재생산연구의 동향과 쟁점’은 97년 이후 노동계급의 노동력 재생산구조가 어떤 변화를 겪어 왔는가 하는 문제의식을 핵심으로 가지고 출발하고 있다. 앞으로의 연구과제로는 첫째, 소득과 자산의 계급 간 불평등 구조와 변화과정이 연구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둘째, 계급간 소득지출의 불평등을 연구 대상으로 해야 한다고 본다. 셋째, 거시적 수준의 분배 및 복지제도에 대한 연구과제이다. 넷째, 기업 내 노동조건의 변화가 노동력 재생산에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이다.

‘3장 생산직 노동자의 노동력 재생산구조’에서 김재훈은 생산직 노동자의 노동력 재생산구조를 가계소득구조와 소비구조의 측면에서 분석하였다. 심각한 고령화 수준, 유일한 대안인 초과노동 수용, 국가복지나 기업복지 대신 시장복지 대안 선택, 노동계급 내부의 이질화의 심화가 바로 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김재훈은 이러한 노동력 재생산의 특징들은 노동체제의 특징과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변수로 두고, 따라서 ‘초과노동과 집합적 소비재 부담의 악순환’은 기업규모별 계급 내부의 이질감과 불신감을 증폭시키고, 노동력 재생산의 차이가 ‘산별노조 전환을 통한 노동체제의 전환’을 가로막는 요인이 되고 있다고 분석한다.

‘4장 생산직 노동자의 고령화와 초과노동’은 금속노조를 사례로 하여 고령화와 초과노동이 노조에 미치는 효과를 분석하고 있다. 금속노조의 각 지회들을 고령화와 초과노동을 두 축으로 놓고 평균을 상회하는 곳과 평균 이하인 곳을 교차시켜 네 가지 지회 유형으로 분류하고 있다. 연구 결과를 보면, 노동력 재생산의 차이가 연대의 수준을 낮추는 효과를 제어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나 ‘최저임금제’로는 한계가 많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적용대상이 적어 조합원 동원이 어렵거나(최저임금제), 소득극대화를 위한 수단(노동시간 단축)으로 변용되기 쉽다는 것이다. 김재훈은 따라서 생활임금제로 초점을 맞추어야 포괄 지회가 넓어질 수 있고, 동원 수준을 높일 수 있으며 초과노동의 동기를 약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하고 있다.

‘5장 사무전문직 노동자의 구성과 상태’에서는 사무전문직 노동자들의 계급상태 변화를 추적하고 이러한 변화가 사무전문직 노동조합운동에 갖는 함의를 분석하고 있다. 97년 경제위기 이후 사무전문직 노동자 내부구성에서의 변화를 보면 여성 비중의 급격한 증가와 평균연령 상승, 임시일용직의 급격한 증가, 고학력화 현상 속에 학력과 고용형태의 상관관계 약화, 상용직의 고령화와 젊은 층의 비정규직화로 요약할 수 있다. 근속기간, 노조유무, 고용형태별로 상대적 임금격차가 97년 이후 급격하게 확대되고 있고 노동시장 분절과 양극화가 심각해지고 있다. 조효래는 따라서 여성과 비정규직을 노조운동의 중심으로 조직하는 것이 노조운동의 역동성뿐 아니라 장기적 생존을 위해서도 무엇보다 필요하며 미룰 수 없는 과제라고 역설하고 있다.

‘6장 노동시장 분절과 노동조합 조직변화’는 《연대와실천》본 호에 실려 있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김재훈은 산별전환의 다섯 가지의 경로 중 소산별전환 후 대산별 단계전환론은 소산별노조 유지론에 머물 가능성이 높으며, 결국 기업별연맹체계의 경로와 대산별체제의 경로 간 경쟁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또한 김재훈은 전략적 산업군내에서 업종노조내의 수직적 통합보다는 수평적 통합전략이 더 현실성이 있다고 보고, 제조업 산별노조로서 조직 확대와 발전을 꾀하는 것을 장기적으로 추진해볼 필요가 있다고 제언한다. 즉 금속산업과 화학섬유간 제조산별노조로의 확대는 불확실한 환경과 목표의 불명확함 속에서 하나의 준거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7장 산별노조의 조직자원과 조직유형’은 금속노조를 사례로 하여 노동조합의 조직능력을 구성하는 조직자원을 분석하고 조직의 유형적 특징을 밝히고 있다. 김재훈에 따르면 금속노조의 조직능력은 기업별노조의 특징이 강한 조직자원들에 의해 제한되고 있으므로 상대적으로 동원 수준이 높은 전략적 자원에 의존하는 ‘전략적 자원 동원형’으로 유형화할 수 있다. 이는 조직전환의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산별노조로의 발전 속도를 늦추게 만든다는 것이다. 김재훈은 대공장노조 조직전환은(외연적 확대전략)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대공장노조의 리더십에 그 관건이 달려 있기에 금속노조는 이와는 별개로 각 지회들이 양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제도적 조건을 마련하는 ‘내포적 발전전략’을 구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만 산별노조로서 금속노조의 정당성과 중소지회의 제도적 안정성, 조직의 견고성을 높일 수 있다. 또한 대규모 지회에 걸린 부하를 줄이고 거대지회의 영향력을 낮출 수 있다. 이는 규모별 갈등의 가능성을 최소화하는데 도움을 주며 미전환 대규모 사업장의 전환에도 간접적으로 유인하는 효과가 있다.

‘제8장 산별노조 지부의 조직과 운영 - 경남 1, 2 지부의 사례’는 2003년 경남 1, 2지부가 통합되어 경남지부로 되기 전에 쓴 논문이다. 금속노조 경남 1, 2 지부에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공히 대기업 지회의 영향력이 지역지부의 활동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조효래는 기업별 노조의 관행의 극복이 시급하며 지역지부의 집행력을 강화하는 것, 대기업노조의 산별 전환을 가속화하는 것이 산별노조 전환의 성공여부를 결정할 것으로 보고 있다.

‘제9장 기업별노조의 조합민주주의’는 부산, 울산, 경남지역의 금속연맹 소속 단위 노동조합 및 금속노조 지회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토대로 기업 수준의 노조민주주의의 실태를 분석한 논문이다. 선거경쟁 측면에서는 대체로 양당제적 구조가 정착되어 있으며 조직운영과 의사결정 측면에서는 조합의 의사결정이 다수조합원들의 의사에 따라 집행부가 결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조합원들은 보고 있다. 또한, 기업수준의 조합원 참여는 높은 편이지만 그 참여는 헌신과 희생을 수반하지 않는 소극적 참여라는 점을 보여준다. 금속 조합원들의 상대적으로 높은 ‘집합주의적 지향’에도 불구하고 이는 이데올로기적 헌신에 기초하기 보다는 ‘도구적, 경제적 지향’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금속산업의 노동조합 민주주의는 여전히 활성화되어 있으나 점차 실리적 태도와 도구적 참여의 성격이 강화되고 있다. 또한 실리적 목표에 한정된 단체교섭 선호에 기초한 노동조합 선거는 높은 참여도에도 불구하고 계급적 연대와 사회적 수준의 참여라기보다는 사업장 수준의 실리적 목표에 한정되어 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전투적 경제주의’ 정체성이 유지되고 있으며 노동조합 선거는 이념과 전략에 따른 경쟁보다는 전술상의 차이로 수렴되고 있다.

‘제10장 산별노조 전임간부의 리더십과 가치지향’은 금속노조, 금융노조, 보건의료노조 전임간부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토대로 한 논문이다. 세 노조의 전임간부들은 비교적 개별적 단체교섭 등보다는 전체 노동자들의 사회적 지위와 정치세력화와 같은 사회적 수준의 기능에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또한 사회주의적 지향, 변혁적 지향을 가진 간부의 비중도 높은 편이다. 그러나 세 노조 각각을 비교해 보면 차이 또한 나타나고 있다. 금속과 보건에 비해 금융노조 간부들은 보다 정치적으로 온건하며 실리적, 도구적 지향이 강하며, 직업적 전문성을 강조하는 경력 지향적 리더십이 보다 높게 나타난다. 반면 금속과 보건은 이념적 헌신에 기초한 리더십이 다수이다.


조합 내부로 보면 본조 및 지역간부와 기업지부 간부 간 인식 격차가 존재하기도 한다. 이는 곧 기업별 노조체제에서 산별로 전환하면서 직접적인 조합민주주의를 어떻게 정치적, 전략적으로 조율된 민주주의로 발전시킬 것인가, 그리고 이를 누가(중간간부) 담당할 것인가와 관련이 있다. 보건과 금속의 경우 사업장 지부 간부들의 간부기피현상은 산별노조의 조합민주주의 형성과 관련해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상당히 많은 내용들을 검토하고 있으며 가볍지 않은 주제들을 다룬 학술적인 글이기 때문에 지역 동지들이 선뜻 읽기 쉬운 글은 아닌 것 같다. 또한 주로 금속노조를 중심으로 한 연구가 많다. 하지만 그 외에도 사무전문직 노동자의 상태, 보건과 금융노조에 대한 연구 역시 포함되어 있으며 조합민주주의나 노동력재생산의 문제 등 전체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에게 해당되는 포괄적인 주제들 역시 많이 다루고 있다. 때문에 지역의 동지들과 (살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예비 연구층들이 한국의 노동자의 현재 상태를 파악하고 앞으로의 전망을 고민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글들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한울출판사의 책이 대개 비싸다는 점이 걸리기는 하지만 술렁술렁 넘어가는 책보다는 우리에게 밀접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권하고 싶다. 산별전환을 지겹도록 얘기했고, 2007년이 이제 불과 얼마 안 남은 이 시점에 특별한 관심이 필요로 하지 않겠는가? 비록 재미는 떨어지는 머리 아픈 논문들이기는 하나 우리에게 이만큼 다가온 ‘친절한 연구서’에 조금은 가까이 해야 하지 않겠는가? 머리의 작동은 점차 느려지기 마련이고 시간은 뒤로 흐르지 않는다. 2007년은 2년만큼이나 우리를 늙게 만들 것이고 오늘은 결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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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실>2005.8월 존 리드와 혁명의 불꽃-《세계를 뒤흔든 열흘》과 《레즈》

 

존 리드와 혁명의 불꽃-《세계를 뒤흔든 열흘》과 《레즈》


 <연대와실천> 2005년 8월호 통권 134호


우리는 중국의 수많은 제국들이 명멸했다고 해서 그들의 역사를 기억의 저편에 묻어버리지는 않는다. 또한 로마가 멸망했다고 해서 그들의 역사를 잊어버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현실의 흐름 속에서 되살려 내고 비유하며 반추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영국의 맑스주의 역사가 홉스봄이 ‘단기 20세기’를 나누는 기준이 되는, 세계 역사상 최초로 ‘현실 사회주의 국가’를 탄생시킨 ‘러시아혁명과 소련(제국?)’만은 회자 대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마치 <역사유물론>지(誌)가 묶어 낸 ‘레닌에 대해 말하지 않기’처럼.


과연 러시아 아니 소련은 잊혀져 버렸단 말인가? 아니다. 역사의 연속선상에서 사라진 깊이만큼, 역사에 각인된 상처의 깊이만큼 소련은 침잠해 있을 뿐이다. 소련을 다시 되돌아보기 위해서는 15년의 세월이 너무 짧은지도 모른다.


《중국의 붉은 별(에드가 스노우)》,《카탈로니아 찬가(조지 오웰)》등과 함께 세계 3대 르뽀 문학 중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세계를 뒤흔든 열흘》(책갈피)은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이자 (정치가라고 하기엔 너무나 이상적인) 정치적 이상주의자인 존 리드가 러시아혁명의 격동을 페테르부르크에서 직접 겪고 난 후 쓴 책이다. 이 책은 1917년 러시아혁명에 관한 고전적인 텍스트이다. 1986년에 한국에서도 두레출판사를 통해 상당 부분이 생략된 채 소개된 바 있었다. 당시의 판매고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2005년의 이 책의 판매고는 그리 높지 않을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21세기 한국은 아직 그것을 묻어두고 싶은 게다. 그러나 우리가 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와 병사들처럼, 또는 거대한 대륙의 농민들처럼 무언가 뒤흔들 계획을 세우고자 할 때 우리는 이 역사적 대사건을 다시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어쩌면 ‘혁명의 고양기’와는 거리가 먼 지금의 이 시기가 러시아혁명을 다룬 고전적인 이 책이 다시 등장하기에 더 적절한 시기인지도 모르겠다.


20세기 세계의 광활한 영토를 거대한 대륙의 사회주의로 물들인 두 혁명, 러시아 혁명과 중국 혁명을 다루고는 있지만,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과 《세계를 뒤흔든 열흘》이 다른 점은 무엇보다 초점에 있다.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에는 그들의 인구만큼이나 무수히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등장한다. 모택동, 주덕, 주은래 뿐만 아니라 이들의 부인들, 구추백, 진독수, 하룡, 팽덕회 등 당과 홍군의 무수히 많은 간부와 혁명가들이 곧 그들이다. 따라서 책 말미에는 ‘중국혁명 인물사전’과 비슷한 분량으로 인물 소개로 차 있다. 그런 만큼 마치 중국 고전 ‘삼국지’나 ‘수호지’처럼, 또는 PC 게임 ‘리니지’처럼 다양한 인물 군상들이 총출동하는 역동적인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한마디로 무협지다.


반면 《세계를 뒤흔든 열흘》은 레닌이나 트로츠키 등 혁명가 인물들이 중심이기 보다는 ‘사건 그 자체’에 대해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전대미문의 사건. 스노우는 러시아혁명의 전형을 앞에 두었으나 존 리드는 그렇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존 리드에게 초점은 혁명 그 과정에 놓여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약 100쪽에 달하는 방대한 후주와 부록은 바로 러시아의 정치세력들과 조직들, 러시아의 신문기사 등 자료들로 꽉 차있다. 이 후주와 부록이 독서의 속도를 가로막기는 하지만 이해를 배가시키기도 한다.


물론 이 책에도 수많은 인물들이 나오지만 그들은 이름 없는 노동자, 병사, 농민들이다. 즉, 존 리드는 지도자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볼셰비키가 어떻게 노동자, 병사 등 대중들과 호흡하면서 혁명을 전진시켰는가를 다루고 있다. 모든 계급의 정파와 투쟁하기를 거부하지 않았으며, 또한 주장이 같은 자들과 연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볼셰비키. 그래서 코민테른은 존 리드에게 미국의 공산당 분열 이후 공산주의노동당과 공산당의 통합을 결정하고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의 합작을 강력하게 주문했던가.

20세기 영화사에 길이 남은 러시아의 영화감독 에이젠쉬타인은 이 책을 원작으로 삼아 혁명 10주년인 1927년 영화 ‘10월’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 ‘10월’은 스탈린의 비판으로 인해 재편집되기도 했고 존 리드의 책 《세계를 뒤흔든 열흘》은 금서(禁書)로 분류되었다.


헐리우드의 진보적인 배우이자 유명한 바람둥이 워렌 비티(Warren Beatty)는 1981년, 존 리드의 생애를 다룬 영화 《레즈》(Reds)를 제작했고 감독했으며 그 자신이 존 리드로 출연했다. 1967년 《세계를 뒤흔든 열흘》을 처음으로 접한 그는 영화 제작의 마음을 굳혔지만 그러나 영화화 하는 데에는 15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도 ‘빨갱이’에 관한 영화에 투자할 사람이 없었다. 어쨌든 그는 이 영화를 통해 82년 아카데미상 감독상, 촬영상,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지옥의 묵시록’, ‘마지막 황제’ 등을 촬영한 비토리오 스트라로가 촬영을 맡았고, 지금은 늙은 배우가 된 연기파 배우 잭 니콜슨이나 진 핵크만 등이 조연으로 출연하기도 한다. 나이 든 무정부주의자 ‘엠마’로 분한 모린 스테이플턴은 이 영화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존 리드와 그의 부인 루이스(다이안 키튼)의 만남을 시작으로 해서 둘의 운명은 혁명의 기나긴 여정과 함께 한다. 진보적인 저널리스트인 리드는 좌파 노동조합 조직인 IWW(세계산업노동자동맹)의 활동에도 참여했고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부인 루이스와 함께 혁명을 직접 경험하기 위해 러시아로 떠난다. 이들은 그 후 미국으로 돌아왔고, 존 리드는 1919년 이 책을 집필하였고, 루이스는 미국 전역에 사회주의 러시아 혁명을 설파하러 다닌다. 친공반전(親共反戰)적인 기사들로 인해 법정에 선 루이스는 신을 부정하는 빨갱이 나라 소련을 지지하며 여성의 투표권도 없고 기만적인 정치가 판치는 미국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선다.

존 리드는 사회당의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만 반대파에 밀려난다. 반대파를 결집해 공산주의노동당을 만들었지만 코민테른은 공산당과의 합당을 결정한다.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돌아오기로 약속했지만 혁명정부는 그를 돌려보내지 않았고 그 시각, 루이스는 경찰의 미행과 침입 등을 감수하고 있었다.


그의 오랜 친구이자 무정부주의자인 엠마는 함께 10월 혁명에 열광했으나 이후 빈곤과 질병을 타파하지 못하는 혁명정부, 민주주의가 질식되는 모습, 무정부주의자들의 투옥과 사형 등을 지켜보며 소련에 대한 희망을 버린다.


존 리드는 엠마의 이러한 회의에 대해 강력하게 볼셰비키와 혁명을 변호하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도 이 역사적 사건의 결말에 대해 불길한 감정이 싹튼다. 아내와 미국에 남겨둔 동지들을 만나기 위해 그는 목숨을 건 여정을 시작한다. 철길을 통해 핀란드의 국경을 넘지만 그는 투옥되고 이곳에서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는 병에 걸리고 만다.


루이스는 존 리드가 투옥된 사실을 듣고 ‘산넘고 바다건너’ 목숨을 걸고 찾아가지만 이미 존 리드는 핀란드의 교수들과 포로 교환을 통해 모스크바로 후송된 뒤였다. 결국 그들은 다시 만나게 된다. 영화 포스터의 사진은 그들의 극적인 해후를 담고 있다. 하지만 존 리드는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혁명이 일어난 지 3년이 지났으며, 《세계를 뒤흔든 열흘》을 펴낸 지 1년 만에 그는 루이스의 곁을 떠나고 만다. 그의 나이 겨우 33세였다. 혁명의 와중에 멋지게 퍼지는 ‘인터내셔널가’ 노래 소리는 이 영화의 백미이기도 하다. 그 울림만큼이나 진지한 역사적 사건은 그렇게 미국과 헐리우드를 뒤흔들어 버렸다.

존 리드의 역을 맡은 워렌 비티는 할리우드에서도 유명한 진보적인 배우이다. 베트남전 참전 반대운동을 하기도 했다. 헐리우드를 통해 미국 정치계, 민주당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 그는 99년에는 대통령 출마설이 나돌기도 했다.

때문에 미국 대선 때마다 그의 행보는 뉴스거리였으며, 클린턴 정부 시기에는 클린턴과 민주당의 우경화, 고어 대통령 후보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다. 워렌 비티의 현실 정치에의 참여적인 모습은 존 리드와 많이 포개져 있다. 존 리드는 저널리스트 또는 (글의) 예술가로서 혁명에 기여하며 남기를 바라는 루이스의 간절한 바램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노동당의 승인을 위해 조국인 미국을 등지고 소련으로 잠입한다. 존 리드는 스스로 혁명가가 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세계의 진보와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그 어떤 기여를 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이상은 실현되지 않았다. 물론 워렌 비티는 존 리드가 품었던 이상이 민주당을 통해 실현될 것이라고는 생각지는 않을 것이지만. 미국이라는 하나의 제국에서 소련(제국)의 부활을 점치는 것은 당분간은 힘들 것이다.

불타오르기도 전에 식을까봐 미리 두려워하는 우리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러시아혁명과 존 리드의 생애를 다룬 《세계를 뒤흔든 열흘》, 《레즈》는 시대는 어떻게 불타올라야 하는가, 무엇을 통해 혁명은 불타오르는가를 생생하게 드러내 준다.


혁명은 가능한가? 모르겠다. 혁명은 그 자체로 선인가? 모르겠다. 하지만. 혁명은 필요한가? 그래! 레닌이 만든 불꽃이라는 신문의 이름을 달고 나온 ‘록그룹 이스크라’의 외침, 그대 아직도 혁명을 꿈꾸는가? 각자의 대답이 궁금하다. 어쩌면 혁명은 꿈꾸는 것을 포함하는 미완성의 상상을 전제로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이상성의 불꽃은 후퇴하는 현실 속에서 더욱 빛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존 리드를 잘 알던 노인의 음성이 흐른다.

"당신 애가 혁명을 이어받을지도 모르죠. 왜 그랬냐고? 에디슨이 왜 했는지 아는가?
......기억은 희미하지만 그는 앞에 굉장한 것이 있댔지. 생사를 걸만한 것이......
그가 그랬어."

양솔규(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리뷰 출처 : 영남노동운동연구소(
http://www.ynlabo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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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실>2005.7월《한국적 생산방식은 가능한가?》-Hyundaism의 가능성 모색

리뷰 출처: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연대와실천> 2005년 7월호 133호


http://www.ynlabor.net

《한국적 생산방식은 가능한가?》-Hyundaism의 가능성 모색


양솔규(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redstar@jinbo.net

 

개인적으로 나는 ‘한울 출판사’를 아주 싫어한다. 단순하지만 분명한 이유가 있다. 가격이 너무 비싸다. 잘 팔리지 않는 도서들을 발간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수지타산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알지만 풍족한 재력을 지니지 못한 나로서는 기분이 나쁘다. 게다가 다른 인문사회과학 서적들에 비해 품도 별로 팔지 않는 것 같아 비싼 가격에 비해 디자인도 단순하기 그지 없다. 인문사회과학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는 이 출판사에 고운 시선이 갈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한울 도서들을 정기적으로 체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많은 사회과학 도서들이 어쩔 수 없이(?) 이 출판사에서 발간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검색을 하다가 도발적인 제목의 이 책을 발견했다. 조형제 교수는 울산대 사회학과 교수인데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자동차산업분야 전문가이기도 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동차산업에 대해 내가 아는 바는 거의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순간 이 책의 내용이 궁금해졌다. 한국 최대의 수출품인 자동차, 한국 최대 단위노조인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인정을 하든 안 하든, 하고 싶든, 안 하고 싶든 여전히 중요할 수밖에 없는 단위인 현대자동차에 올인하기로 했다.


낭패다.
되도록 쉬운 책, 되도록 읽기 편한 책을 고르려고 했으나 운명은 그렇게 정해졌나보다. 책을 받아 드니 재생지를 써서 그런지 부피에 비해 아주 가볍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내용은 가볍지 않다. 조형제 교수가 《경제와사회》, 《산업노동연구》, 《한국사회학》 등에 실었던 본인의 글을 모아 놓은 책이다. 논문 모음집이라니! 자동차 산업과 관련한 생소한 용어들 하며 논문 특유의 딱딱한 틀거리를 따라가려니 안 그래도 일상에 머리가 아픈데 고문이 따로 없다. 그래도 여러 사람이 쓴 글을 엮은 게 아니라서 다행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조형제 교수의 문제의식은 이렇다. 새롭게 성공의 신화를 쓰고 있는 “현대자동차는 포드나 도요타와 구분되는 의미에서 자동차산업의 또 다른 최고의 관행을 구현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를 분석하기 위해 여러 가지 요소들을 다각도로 살펴본다.


생산방식과 작업조직

조형제 교수에 의하면 현대자동차는 생산기술의 유연성은 높아지고 있으나 이에 상응하는 작업조직의 유연성이 높아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는 한편으론 현대자동차 회사측이 유연자동화가 진행될수록 노동의 역할이 낮아진다고 보는 시스템합리화론 입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대립적 노사관계로 인해 노동에 투자하는 것이 위험부담이 높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동화에 기반한 생산기술의 유연성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도요타 미야타 공장과의 비교를 해보면 현대 아산 공장은 미야타 공장을 벤치마킹 했음에도 불구하고 승진체계와 임금체계의 한계로 인해 작업자들의 창발성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현대 에쿠스 공장은 자기완결형 직렬 라인을 설치했음에도 불구하고 볼보의 우데발라 공장과 같은 셀 생산방식은 도입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에쿠스 모델이 주력 모델도 아니었고, 고급 노동력 확보가 어렵지도 않았으며(노동시장적 요소) ‘노동의 인간화’를 위한 노동조합의 압력도 없었다. 또한 투자부담 및 생산관리 기술의 부족에도 원인이 있었다.

인적자원관리와 노사관계

현대자동차는 보다 유연한 생산방식을 추구하지만 그에 걸맞는 인적자원관리 방식을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대립적 노사관계 때문이다. 노사간 불신은 회사 측의 교육훈련에 대한 투자를 기피하게 만든다. 직능자격제도의 도입을 노동자 단결 와해의 우려 때문에 노동조합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98년 정리해고 투쟁 이후 최고경영진의 교체와 연이은 99년의 호황으로 인해 필요성 역시 감소하면서 숙련형성을 위한 제도 개편보다는 의식교육에 치중하게 된다.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기업지배구조가 변화하게 되고 주식시장의 단기적 평가에 따라 움직이게 되는 경제시스템 속에서 숙련형성을 위한 교육훈련의 가능성은 더욱더 힘들어질 것이라는 게 조형제 교수의 예측이다.


80-90년대 한국노동운동의 중요한 축이었던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를 비교해 보자면, 현대자동차 노조는 생산합리화에 효율적으로 대응하면서 현장 통제력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는 반면, 현대중공업의 경우 그렇지 못함으로써 현장 통제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는 조선산업과 자동차산업의 기술적 특성 등의 구조적 요인도 영향을 주었겠지만 이보다는 당사자의 행위 양식의 차이로 인한 귀결이라는게 조형제 교수의 판단이다. 하지만 자동차 노동운동이 작업장 참여를 외면하는 점을 한계로 지적하고 있다.


부품산업과 산업구조조정

모듈화가 진전되면서 대규모 모듈 부품업체들을 중심으로 부품공급시스템이 변화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일본업체들의 적기조달 시스템에(JIT) 근접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자동차와 현대모비스의 비용절감 압력은 부품업체들의 기술개발 및 임금지불 능력을 고갈시킨다. 결국은 수평적 협력은 약화되고 수직적 위계가 급속하게 강화되고 있다. 자동차전문 그룹으로 분리된 현대자동차는 시장 독점자로서 부품업체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고 있다.

과제

조형제 교수가 제시하는 과제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고숙련의 노동자들이 적극적으로 노동과정에 참여하는 작업조직을 실현해야 한다.
둘째, 노동자들의 숙련을 향상시키고 생산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교육훈련 제도를 대폭 확충할 필요가 있다.
셋째, 대립적 노사관계를 해결하기 위해 쉬운 사안, 예컨대 교육훈련 투자와 같은 부분부터 협력해 나가야 한다.
넷째, 부품업체와의 진정한 동반자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다섯째, 현대자동차의 경영능력 혁신이 요구된다.

조형제 교수는 현대자동차와 관련하여 세 가지 비교 연구(미야타 공장, 우데발라 공장, 현대중공업), 그리고 숙련형성과 교육훈련제도, 노사관계, 생산합리화에 대한 노조의 대응, 부품공급시스템, 산업구조조정 등 산업연구 측면에서 거의 모든 부분을 다루고 있다.


사실 조형제 교수는 자동차 분야 뿐만 아니라 관련지어 산업도시에 대한 연구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산업도시의 재구조화와 거버넌스 :피츠버그와 디트로이트의 비교>(국토연구 2004 제43권), <울산 지역 노사관계의 현황과 과제 :지역노사정협의회의 가능성 탐색>(울산발전 통권 제6호 2004. 여름), <울산의 지역경제와 노사관계>(울산발전 통권 제2호 2003.4), <지역경제의 혁신 모델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관계를 중심으로>(경제와사회 통권57호 2003), <울산 지역의 산업구조조정과 테크노파크 건설>(울산대 사회과학논집 10,1. 2000년8월) 등이 그것이다.

사실 운동권의 ‘한 이론 하는’ 교수들은 너무(?) 많지만 지역에 천착하면서 지역 노동운동(혹은 자동차산업)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연구를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울산의 활동가들은 관점의 차이를 떠나 조형제 교수의 글을 무리를 해서라도 읽어볼 기회를 갖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가능하다면 많은 동지들과 함께 형식을 갖춰 읽어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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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실>2005.4월 - 주식회사 한국의 구조조정》, 재벌 부활 프로젝트?

주식회사 한국의 구조조정》, 재벌 부활 프로젝트?


《주식회사 한국의 구조조정》/ 창비 / 13000원 / 신장섭, 장하준

양솔규(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리뷰 출처: <연대와실천> 2005년 4월 통권 130호

IMF 경제위기가 터졌을 때, 많은 사람들은 한국 자본주의의 전대미문의 상황 전개에 대해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낙관적인 기대는 끝도 없이 추락하는 상황 속에서 산산이 부서졌고, 국정을 책임지는 관료들과 대통령 김영삼에게 분노의 화살을 마구 쏟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마냥 분통만 터뜨리기에는 상황은 너무 안 좋았다. 당장 노동자의 목을 정확하게 겨누며 진행되는 구조조정과 노동시장에서 비껴난 실업자군, 생존의 사각지대에서 몸부림치던 노숙자 및 빈민들은 넘쳐나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은 뭔가 해보아야 될 일이었다.
운동권에서는 그동안 잘 이야기되지 않았던 얘기들이 회자되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사회적 안정망을 얘기했고, 실업자동맹(운동)을 얘기했다. 모라토리움(파산)을 선언해야 한다는 얘기도 들렸다. 자본의 위기는 곧 노동의 기회라고도 했다. 지나고 보니 노동의 기회이기는커녕 노동의 위기이면서 자본의 기회인 것으로 판명났다. 실업극복과 관련된 수많은 단체들이 생겨났으며 일주일이 멀다하고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김대중은 해외자본 유치를 선동했고 TV에는 ‘한국을 사달라’는 광고가 연일 등장했다. 나(한국)를 사주는 사람에게 모든 걸 내주겠다는 식의 요염한 구애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대출이 되지 않아 도산하는 중소기업들의 더 처절한 구애가 있었다. 또다른 한편에서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빈곤의 바다가 울부짖는 끔찍한 비명들이 있었다.
변할 수 없는 현실이 있었다. 한국이라는 작지만 거대한 배가 파산했고,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진행되면서 더 이상 이전의 한국과 지금의 한국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달라져 버렸다.
경제관료들, 정치인들, 재계 자본가들 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에게도 널리 퍼진 시각은 이제 살아남기 위해서는 모든 걸 개방하고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춰 빡세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불 가릴 것 없고, 예전의 ‘좋았던(?)’ 기억들은 다 잊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과거의 것은 모두 철밥통으로 낙인찍혔고 전면적인 개혁의 칼날은 포청천의 작두처럼 정의의 상징이 되어 목전으로 날아들었다. 과연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한국 경제에 불가결한 요소였는가? 위기는 한국 경제의 내재적 원인 때문이었는가?

사상 유례없는 출판시장 불황에도 불구하고 작년 사회과학 분야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 중 하나는 《주식회사 한국의 구조조정》의 저자중 한 사람인 장하준의 《사다리 걷어차기》였다. 또한 두 공저자인 장하준, 신장섭은 <대안연대회의>에 관여하고 있으며, 2004년 8월에는 <투기자본감시센터>가 만들어졌는데 여기에도 <대안연대회의>의 주요 인사들 뿐만 아니라 민주노총, 사무금융연맹의 주요 간부들도 참여하고 있다. 그만큼 한국 사회의 반신자유주의 대항 담론으로서 폭넓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들이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 경제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거론되던 것에 대한 논박이다. 위기의 원인으로 많은 비판을 받아왔던 한국의 발전주의 국가는 사실은 위기 이전에 해체되었기 때문에 위기의 원인이라고 할 수 없다. 또한, 위기의 또다른 한축이라고 비판받고 있는 ‘재벌’ 역시 위기의 원인이 아니다. ‘재벌’은 미국 경제사가인 거셴크론이 제시한 후발국의 추격전략에 따르자면 자본의 부족 속에서 그나마 한국이 취할 수 있었던 합리적인 조직형태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기의 진짜 원인은 무엇인가? 한국은 이미 김영삼 정부 시절, 자본자유화와 산업정책 포기를 통해 이전의 한국 발전주의 국가 모델에서 벗어났다. 이러한 전환은 곧 지구화의 과정에서 대규모 해외투자를 추구하던 재벌에게 기회를 가져다주었고, 단기자본의 대규모 유입이 도래되었다. 위기는 단기부채의 급속한 증가에 기인한 것이었으며, 이를 직접적으로 추동한 것은 발전주의 국가의 후퇴와 자본 자유화, 재벌의 공격적인 상품시장의 지구화 전략이었다는 것이다.


둘째, IMF 경제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한국 경제를 급속하게 영미식 신자유주의 모델로 변화시켰다. 이전 한국 경제의 주요 축, 추격모델의 축이었던 ‘국가-은행-재벌’ 시스템은 해체되었다. 이를 통해 ‘주식회사 한국’으로 표현되는 한국 시스템의 강점은 사라졌고, 해외자본의 급속한 유입, 통제하지 못하는 정부, 성장 동력 형성을 위한 장기투자에 인색한 은행 및 금융권으로 변모했다. 재벌은 이전에 자원을 집중시키던 내부거래 관행들(무기들)을 빼앗겼다. 따라서 저자들이 보기에는 ‘제2의 추격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전 모델의 강점을 살리는 방식, 즉 국가의 재활성화, 기업그룹의 강점 활용, 해외 자본 통제 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책은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 즉 해외자본의 급속한 유입으로 인해 한국 경제를 제어할 방법과 주체가 없는 현재의 신자유주의경제에 대한 비판적 해석을 가능하게 해주는 풍부한 사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일면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반성없이 일방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의 일련의 흐름들에 대해 비판적 재고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제2의 추격 시스템’의 구축을 위해서는 국가의 재활성화를 통해 해외자본을 견제하고, 산업정책 등의 재가동이 필요하다는 점 역시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들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결론은 재벌에 이르게 된다. 왜 하필 재벌인가? 마치 ‘자유기업센터’가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전경련의 오른팔이라면 이들과 대안연대회의는 제도주의 경제학으로 무장한 전경련의 비주류 왼팔쯤 되는 것이다.

먼저 비판할 점은, 저자들은 재벌의 합리성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합리성을 강제하는 요소는 전지구화된 상품시장과 금융시장이며 이 구조 속에서 재벌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합리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선험적인 전제는 역사적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대우그룹의 엄청난 규모의 분식회계는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중소기업과의 원하청 불공정거래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기업총수와 그 가족의 비정상적인 기업지배구조는 재벌을 여타의 기업그룹들과는 차별적이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들은 마치 재벌을 보편적인 기업그룹의 한 형태로 강조하고 있다. 그동안 비난받아 왔던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에 대해서도, 다각화가 부정적이었다는 실증은 없으며, 이는 강점으로 봐야 하며, 최적의 다각화란 없고 과도한 다각화가 있었다면 재벌이 알아서 줄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재벌이 재벌일 수 있는 이유는 단지 다각화뿐만 아니라, 극소수의 주식소유를 가지고 총수와 가족들이 수많은 기업을 좌지우지하는 행태이다. 정부가 재벌에게 또다른 (재벌)기업을 헐값으로 넘기던 수많은 은밀한 거래들도 과연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저자들은 기업의 투명성 제고와 비민주성 제고를 재벌의 강점인 ‘고위험부담과 시장확대 능력’을 훼손하는 것으로 본다. 저자들이 우려하는 집중투표제는 의무화되지 않았으며, 정관을 통해 배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의미가 없다. 저자들이 재벌의 강점으로 보는 고위험부담과 시장확대 능력은 그에 걸맞는 위험 감시 시스템과 합리적 투자를 전제로 하는데, 재벌이 합리적이라면 왜 대우부도와 같은 사태가 발생했는가?

저자들은 중소기업과 재벌과의 관계가 상호대립적이지 않으며, 협력적인 관계라고 강변하고 있지만, 이는 전경련의 중소기업인 조사나, 민주노동당의 중소기업인과의 대화 과정에서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내부 거래 메커니즘이 크게 약화된 재벌은 해외자본의 공세에 무기력하게 대응하는 ‘힘 없는’, ‘불쌍한’ 상태로 보인단다. 과연 재벌에게 다시 힘을 실어주면 이들이 해외자본과 피터지는 싸움을 할 것인가? 그 결과 승리의 전리품들을 노동자 민중에게 나누어 줄 것인가? 저자들이 주장하듯이 재벌과 중소기업의 관계가 협력적인 것이라면, 해외자본과 재벌과의 관계는 협력을 넘은 연합의 상태 아닌가?
소유구조든 자본동원이든 저자들이 전제하는 이러한 재벌의 합리성은 그러나 수많은 재벌 기업과 하청 중소기업의 노동자들에게는 비합리적이고 전근대적인 노동자 통제와, 권리박탈의 물질적 조건일 뿐이다.

두 번째로, 저자들은 재벌의 책임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다. 삼성자동차, 대우 구조조정 과정에서 든 막대한 비용, 금융구조조정 과정에 투여된 막대한 돈은 누구의 돈인가? 단지 정부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보여준 관리에 있어서의 무능력만을 지적하지만, 일차적 책임은 재벌에게 있음을 저자들은 지적하지 않는다. 저자들은 재벌의 실책은 정부의 무능력에 비하면 미미한 정도일 뿐이며, 구조조정의 성과는 재벌의 강점에 비하면 미미할 뿐으로 본다. 저자들에게 남은 것은 재벌의 부활뿐이다.

세 번째로, 저자들의 재벌 옹호 관점은 반신자유주의적일 수는 있으나, 노동배제적 관점이기도 하다. 해외 자본과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비판한다고 해서 곧 우리가 무조건 차용할 수 있는 관점은 아닌 것이다. 저자들은 성장동력 신장을 얘기하고 있지만 노동자, 서민 경제가 파탄나고, 거시 경제 성장과 서민 경제 부문의 연관이 파탄난 지금 이 시점에서 노동자, 서민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저자들이 98년말부터 시작된 경제위기의 극복의 진정한 원인으로 얘기하는 케인즈주의적 거시경제정책 패키지는 그러나, 노동자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몫으로 자신의 목을 겨누는 칼날에 불과했다. 저자들은 말한다. 재벌을 약화시킨다고 해서 중소기업이 잘된다는 보장이 있는가? 바꿔 말할 수 있다. 재벌의 확장능력이 강화된다고 해서 국민경제가 건강해지고 노동자 서민이 행복해지는가?


네 번째로, 저자들은 여전히 성장 중심주의적 사고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제2의 추격시스템? 무엇 때문에? 왜? 라는 질문은 없다. 저자들에게 재벌 체제의 복구는 목적 없는, 이유 없는 자본의 이윤 추구와 마찬가지로, 확장, 추격을 위한 것이다. 이왕 ‘체제 이행’이 필요하다면 어떤 이행인지에 대한 성찰을 제공하는 것이 배운 사람의 기본적인 소양이어야 되지 않은가?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은 그동안 서로 논쟁을 벌이며 대립각을 세우던 <참여연대>와 <대안연대회의>의 담론들을 광범위하게 수용해 왔다. 두 단체의 논자들은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각급 조직의 각종 토론회에 참석해 왔다. 이러한 어정쩡한 상태를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 한편으론 이들이 제공하던 담론들의 강점이 존재했다. 이 두 단체간의 논쟁은 한국 경제의 장기적 전망과 관련된 시스템의 구축을 둘러싸고 진행되었다. 즉, 현재의 시점을 넘어 미래를 바라보는 정치한 주장들을 제기했다는 점이다.


현재의 ‘분배요구’에 머물러 있는 민주노동당의 담론은 그 자체로 의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비전을 제시하는 측면에서는 한계가 있다. 자금 동원 및 장기 투자, 성장과 관련한 입장과 전망, 재벌 구조 개혁 및 기업지배구조, 산업의 재편, 노사관계 변동 등에 대해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은 시스템적인 담론 구축이 필요하다. 여기에 더해 이러한 시스템적인 담론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이행 전략과 맥을 같이 해야 한다는 점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쉽지는 않겠지만, 따라서 순식간에 마련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임에는 분명하다. 언제까지나 주류담론과 비주류담론의 격돌에서 비껴나 있을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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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실>2005.2월 - 칭찬받아 마땅한 하루 정복! 중남미 참고서

     콜럼버스에서 룰라까지 - 중남미의 재발견


서평 출처 : 영남노동운동연구소(http://www.ynlabor.co.kr)
            <연대와실천> 2005년 2월호


칭찬받아 마땅한 하루 정복! 중남미 참고서
『콜럼버스에서 룰라까지』


양솔규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이 책을 읽는 이유는 무엇을 알고자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앎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 하더라도 내용이 너무 어렵다면 그 욕구는 금방 사라지고 말 것이다. 가뜩이나 힘든 노동과 활동에 지쳐 있는데,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일요일 오후에 ‘어려운’ 책을 인상 쓰면서 볼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물론 필요하면 죽도록 고생하면서 봐야 하지만 말이다.) 사람들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이유로는 ‘재미’를 찾기 위해서이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라든지, 흥미 있는 사실들을 섭렵하기 위해서라든지 등등은 모두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모두 취하기는 일상 속에서는 쉽지 않다. 일단 외국 저자의 책을 번역한 경우에는 생소한 문체 때문에 글 읽기가 쉽지 않다. 설사 자연스러운 문장으로 번역을 했다손 치더라도 너무 전문적인 내용일 때가 많다. 그렇다고 판타지 소설이나, 통속적인 수필집들은 ‘재미’는 있을지 모르지만 남는 게 없다. 누구 말처럼 ‘노동운동은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 따라서 ‘뭔가 있어 보이’면서도 ‘재미있고 쉬운’ 책이 필요하다. 왜 그런 책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필수적이고도 전문적인 내용을 쉽고도, 재미있게 글을 쓰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이다.

얼마 전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다시 세계사회포럼이 열렸다. 전세계 운동권이란 운동권들은 모두 모였단다. 이번 세계사회포럼에서 단연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사람은 브라질 대통령 ‘룰라’가 아니라, 베네주엘라의 대통령 ‘차베스’였다. 이를 계기로 다시 한 번 한국에 남미 바람이 불었다. 몇 년 전부터 불고 있는 남미 바람은 단지 이국적인 정서의 한때 유행이라기보다는 신자유주의 광풍에 대한 저항의 구심으로 성장하고 있는 남미의 ‘좌파 바람’ 때문이었다. 90년대 후반의 유럽 좌파 바람이 힘없이 지나가고 나자 공허한 가슴을 남미의 좌파세력이 채워 주고 있는 것이다. 세계사회포럼이 여러 번 개최되면서 한국 사회단체나 노동조합 기관지 등에서도 사람들의 다양한 참관기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고, 국제연대와 사회포럼에 대한 분석글들과 비판들이 발표되기도 한다. 어떤 젊은 활동가들에게는 이러한 전세계적 연대의 흐름이 열광적인 대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아저씨 활동가들에게는 ‘생뚱맞은’ 철없는 아이들의 유행처럼 보이기도 하는 듯 하다. 어쨌든 간에, 이런 새로운 흐름은 속도는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일관된 추세가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우리도 일년에 엄청난 숫자의 유학생이 가고, 그것의 몇 십 배의 배낭여행족들이 떠나고, 그것보다 훨씬 많은 수의 여행객들이 해외로 떠나는 이 시점에, 우리 노동운동은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일반 여행객들보다야 훨씬 지적이고, 수준 있게 놀아야 되지 않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쌍심지를 키고 배타적인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그게 뭐 대순가?’, ‘우리 이야기나 하자’고 말하기도 한다. 직접적으로 ‘그 나라가 우리의 대안이냐?’하면서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엄마가 아빠 역할은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엄마가 아빠가 될 수 있는 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너무 당연한 말을 자기만 아는 거대한 진리인 양 얘기하면 정말 할 말 없다. 창원만 알면, 울산만 알면, 서울만 알면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창원 사람이 보는 서울, 서울 사람이 보는 울산, 울산 사람이 보는 창원이 더 정확할 수가 있다. 그리고 세상은 내 눈에 보이는 사람들 0.01%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 99.99%가 함께 사는 곳 아닌가? 우리는 우리를 제대로 알고, 얘기를 나누고, 어깨를 나누고, 우리의 길을 좀 더 (특수한 길이 아니라) 보편적인 길로 만들기 위해서 서로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어떤 분은 이러실 지도 모르겠다.‘배우려면 앞서가는 놈들을 배워야지. 뒤쳐진 걸 배워서 뭐하게?’ 하지만, 남미는 뒤쳐진 곳이 아니다. 20세기 최초의 혁명은 남미 멕시코에서 일어났으며, 21세기 벽두 변화의 가장 큰 진원지 역시 남미라고 할 수 있다. 산업화, 이념정당, 민주화투쟁, 노동자대투쟁, 노동자 정치세력화, 게릴라 투쟁, 무장봉기, 혁명, 선거를 통한 혁명, 게다가 미국 영토를 침범한 역사까지 그 어느 것 하나 우리보다 못하지 않다. 미국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외국어는 스페인어이며, 가장 많은 사람들이 배우는 언어도 스페인어이다. 미국의 안마당이라 일컬어지는 곳에서 변화를 일구고 있는 남미를 어떻게 쉽게 무시할 수 있겠는가. 친구를 사귈 때는 편견을 버리는 게 좋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생활 속에서 터득한 진리 아닌가.

또다른 분은 이러실 지도 모르겠다. ‘기껏 다른 거 대충 공부했더니 이번엔 남미야?’ 맞다. 아직도 진도가 한참 남았는데, 다른 걸 공부하자면 열 받는게 당연하다. 그런데,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좋은 참고서 하나 나왔기 때문이다. 이 책 『콜럼버스에서 룰라까지』는 거의 눈으로 보는 무협지, 또는 중남미 발‘시사주간지’수준이다. 우리가 스페인 말을 아나, 포르투갈 말을 아나, 당연히 모른다. 그런데 이 책만 있으면 라틴 아메리카 전 나라를 한번씩 훑게 된다. 게다가 동료들한테도 잘난 척 할 수 있는, 이빨 세울 수 있는 풍부한 이야기 거리들이 넘쳐 난다. ‘너 △△가 뭔지 알아? 그게 말이지. 이래저래 된거야. 알아 짜샤!’ 아주 손쉽게 3시간 만에 업그레이드 된다. 그렇다고 이 책에 나오는 내용들이 간단한 것이냐? 아니다.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중남미 전문가인 송기도 교수의 글들은 아주 꼼꼼하게 체크한 고급 정보들로 짜여져 있다. 오죽하면 작년 11월 APEC 정상회담 참석과 브라질, 아르헨티나를 순방하기 위해 출국하기 전 노무현 대통령이 이 책을 꼽아 읽었겠는가? 쉽고 간결하고, 그러나 고질의 책을 고를 시간도 능력도 그에게는 없었을 것이고, 비서진 중 하나가 추천을 했겠지만 말이다.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또다른 중남미 전문가가 남미를 둘러본 후 기행문을 책으로 엮어 출간을 했었다. 워낙 학문적으로 좋은 글들을 많이 쓰는 사람이고, 제목도 아주 그럴 듯해서 잔뜩 기대를 품고 읽어 봤는데, 영 책이 읽히지를 않았다. 학문적인 글에 비해, 기행문은 기대 이하였다. 하지만, 송기도 선생의 책 『콜럼버스에서 룰라까지』는 정말 괜찮은 책이다. 아버지(또는 어머니)와 초중고등학생, 아들, 딸이 함께 읽어도 손색이 없다.

내용을 상세하게 전달하고 싶지만, 책 읽는 재미를 서평자가 빼앗는 것은 월권이 될 것 같아 그만 두도록 하자. 다만 간단한 목차와 저자의 목소리를 소개하고자 한다.
1부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본 중남미의 역사이다. 이 역사에는 쿠바 등 중남미와 미국, 식민지배와 독립, 분열과 중남미 통일단결을 위한 노력들 등이 포함된다. 세세한 사건들보다, 현재의 남미를 이해할 수 있는 핵심적인 내용들을 역사적으로 해부하고 있다. 말하자면 친구를 이해하기 위한 호구조사라고나 할까?

인물 비평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송기도 선생답게 2부는 인물을 통해서 본 현재의 중남미 정치사회사에 대한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 브라질 노동자당 출신 대통령 룰라, 룰라와 함께 메르코수르(남미공동시장)를 주도하고 있는 아르헨티나 키르츠네르. 피노체트 군부 쿠데타 이후 최초로 정권을 잡은 사회당 출신 라고스 칠레 대통령, 반미와 남미 통합을 추진하는 베네주엘라의 차베스 등 좌파적인 정권들의 지도자. 또한 신자유주의를 추진하는 ‘우파 정권’이긴 하나, 남미 역사의 큰 획을 그은 두 나라의 대통령, 즉 500년만에, 국가 건설 이후 최초로 탄생한 페루의 인디오 출신 똘레도 대통령과 1910-1917년 멕시코 혁명 이후 71년만에 최초로 정권교체를 이룩한 멕시코 비센떼 폭스 대통령 등을 통해 현재 한반도의 지구 반대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남미의 ‘거대한 전환’을 실감할 수 있다.

이 책을 보면 우리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중남미에 대한 이미지의 근원과 오류들을 파악할 수 있다. 사실 어떤 공부라는 것이 기능적으로 특정 부문과 관련 있는 내용만 쏙 뽑아 본다는 것은 자칫 ‘숲은 못 보고 나무만 보는’ 오류를 범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남미를 보는 재미있는 망원경과 같은 책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말한다.

아직까지도 중남미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기’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미국이 씌워준 안경을 쓰고 코끼리를 쳐다보고 이해하던 수준에서 이제 코끼리의 다리라도 직접 만질 수 있는 수준이 됐으니, 한 단계 나아졌다고는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미국이라는 ‘창’을 통해 그들을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 눈으로 직접 보고 느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해방과 민주화를 위한 중남미인들의 험난한 투쟁을 차가운 머리가 아니라 뜨거운 가슴으로 함께하고 이해할 때, 그들도 우리를 열린 가슴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이 책은 그 첫 시작이다.

이 책은 세계사회포럼에 가는 사람들, 또는 세계사회포럼에 ‘가고 싶은’ 사람들, 아니 세계사회포럼에 ‘못가는’ 사람들이 읽어야 하는 책임에 틀림없다. 독자들은 이 책을 다 읽을 때쯤이면, 318쪽밖에 안 되는 이 책의 분량을 아쉬워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책값은 단돈 만원밖에 안 되니 금상첨화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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