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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10/25
    귀향 (Volver, 2006)(6)
    레니
  2. 2006/10/24
    The Dead Angel
    레니
  3. 2006/10/20
    게드전기 : 어스시의 전설 (ゲ-ド戰記, 2006)(4)
    레니
  4. 2006/10/19
    TCP/IP의 이해 #2 - 게이트웨이와 DNS(3)
    레니

귀향 (Volver, 2006)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들(이래봐야 <내 어머니의 모든 것>, <그녀에게>, <나쁜 교육>, 그리고 <귀향>밖에 못봤지만)은 참 특이하다. 남부 유럽의 분위기가 묻어나는 화려한 색채와 라틴 음악, 다양한 성정체성을 지난 인물들이 벌이는 해프닝들은 물론 그의 영화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들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알모도바르는 매우 일관성있는 감독이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혹자는 "감독이라면 당연히 일관적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같은 감독이 만들었다 하더라도 명작이 있는가 하면 졸작도 있고, 그녀/그의 색깔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전혀 다른 스타일을 추구한 작품들도 있다. 하지만 위에서 열거한 네 작품들에서는 "알모도바르 코드"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쉽게 발견된다.

이를테면 알모도바르가 그려내는 여성상이 그렇다. <귀향>를 같이 본 친구는 알모도바르에 대해 (이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른 분들이 많을 수도 있지만) "여자만큼 여자들의 심리를 잘 안다"라는 평가를 내렸다. 내 입장에서 본다면, 게이라는 성정체성을 지니고 있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남성인 알모도바르가 그리는 여성상은, 뭐라고 딱히 정의내리기는 어렵지만 매우 일관성이 있다. 특히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서 드러나는, 힘든 삶 속에서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고 약해 보이지만 결코 꺾이지 않는 여성, 스테레오 타입화된 강한 어머니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어머니의 모습, 이런 점이 알모도바르의 여성상을 더욱 차별화되어 보이게 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귀향>의 카피로 많이 쓰이는 "위대한 모성"은 흔히 쓰이는 말 뜻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된다고 생각한다.<귀향>의 어머니는 극한의 어려움들을 "모성"으로 이겨내는 위대한-그래서 특별하고 영웅적인-어머니가 아니라, 주위의 형편없는 남자들에게 디이고 모진 세상에 시달리며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 누군가의 어머니이다.

<귀향>에서 라이문다의 어머니인 이렌느 역시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딸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인해 딸들 앞에 나타나지 못하고 죽은 사람으로 지낸다. 라이문다는 자신을 겁탈하려는 의붓아버지를 찔려죽인 딸을 감싸주고 홀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꿋꿋한 여성으로 나오지만, 애증이 얽힌 감정의 대상인 어머니를 만났을 때 단지 위로받고 싶었던 딸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귀향>의 여성들은 혼자서도 잘 살 것 같지만 결국 누군가를 필요로 했던 여성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어머니와 딸로 이어지는 모계 속에서 유대를 발견하고 그 속에서 위안받는다.

하지만 이런 무거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귀향>의 곳곳에서 유쾌한 유머를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이런 유머가 알모도바르 영화들의 묘미인 것 같은데, 그의 코미디는 장진의 작품같이 톡톡 튀는 코미디도 아니고, 박찬욱이나 봉준호의 블랙코미디도 아니다. 그의 작품에서 나오는 웃음은 결코 가볍지 않지만 따뜻한 종류의 것으로서, 알모도바르는 분명 다른 영화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특이한 코미디를 그려내는 재능이 있다.

알모도바르는 <귀향>의 의미를 코미디로의 귀환, 여성들의 관계를 다룬 영화로의 귀환, 그리고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라 만차로의 귀환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귀환은 제다이의 귀환-_- 못지 않게 성공적이지 않나 싶다. 헐리웃에서 봤던 그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아름답고 매력적인 페넬로페 크루즈와 유령처럼 살아야 했던 어머니를 소화한 카르멘 마우라,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아구스티나 역의 블랑카 포스티요 등의 캐릭터들도 매우 훌륭하다.

알모도바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망설임없이 <귀향>을 보고 말았지만, 아마도 이런 알모도바르는 일관적인 모습이 그의 이름만으로 영화를 골라도 별로 실패하지 않는 이유가 아니까...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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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ad Angel

 

 

 

의 세번째 트랙.

가을엔 왠지 Kent를 들어줘야 할 것 같은;;;

 


Kent - Den döda vinkel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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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드전기 : 어스시의 전설 (ゲ-ド戰記, 2006)

얼마 전에 지브리의 새 애니메이션 <게드전기>가 스크린에 걸렸다. 미야자키 할배의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상상 너머의 세계를 그려내는 그림과 신비로운 음악, 탁월한 연출로 인해 하야오 옹과 스튜디오 지브리라는 이름에 나름의 신뢰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게드전기>를 개봉 전부터 눈여겨 보게 된 것은 "지브리"라는 이름보다는 "어슐러 르 귄"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아직 르 귄의 작품으로는 <빼앗긴 자들>과 <바람의 열두방향>밖에 읽지 못했지만, SF 문학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탄탄한 세계관과 고유한 사회구성, 그리고 그러한 사회 구조에서 도출되는 캐릭터 등이 매우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이미 개봉 전부터 <게드전기>를 기대한 사람들은 매우 많았으리라.

...그러나-_-

<게드전기>의 평을 검색해보면 대충 분위기가 짐작되겠지만, <게드전기>는 (웬만해서는 이런 평을 하지는 않는데) 엄청난 졸작이다. 일단 연출 자체가 너무나 어설퍼서 긴장감있게 스토리를 끌고나가기는커녕 개연성을 맞추기에도 급급해 보인다. 캐릭터들은 역시 지나치게 평면적인데다가, 그들의 히스토리를 설명해 주는 것이 거의 없어서, 작품과 캐릭터가 따로 노는 느낌이다. 영화는 주인공인 아렌이 그의 아버지를 칼로 살해하고 도망쳐나오는 장면에서 시작하는데, 난 영화가 끝날때까지 아렌의 이 행동이 설명되기를 기대했으나 결국 끝까지 납득하지 못했다. 다만 전형적인 지브리 풍의 아름다운 미술과 배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간 3D만큼은 인정받을만 하지만, 예쁜 그림을 보고 싶으면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을 보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한숨)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원작은 4편으로 이루어진 르 귄의 <어스시의 마법사> 시리즈다. 같은 배경을 공유하면서 서로 다른 이야기인 이 시리즈는, 르 귄이 어린이와 어른 모두가 읽을 만한 작품으로 썼다는 말처럼, 그녀의 작품 중 그나마 어렵지 않고 재밌게 읽을 수 있다고 한다-_- <어스시의 마법사>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하이타카, 즉 게드로서, 원작에서는 <게드전기>에 등장하는 나머지 인물들인 아렌, 테루, 거미 등이 같이 나오지 않는다 한다. 또한 자신의 그림자에 쫒기는 아렌은 원작에서 하이타카의 어린 시절 이야기라고 하니, 독자적인 세계관을 지닌 4편이나 되는 판타지 소설을 한 편의 애니로 압축하는 것이 분명 쉽지는 않았을 것이고, 너무나 성급한 일이었음이 분명한다. (또 한숨)

그래서 하야오 할아버지가 아들은 미야자키 고로에게 감독을 맡긴 것이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다. 뭐 속설에는 하야오 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로가 감독을 맡았다고 하는데, 아무리 잘 봐 줘도 지브리 식의 전형적인 성장 스토리에 짜맞춘 듯한 <게드전기>를 보면, 하야오 옹도 자신의 실수를 통감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르 귄은 지브리 스튜디오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름을 믿고 <어스시의 마법사>를 영화화하기로 했다 한다. 그러다 낮은 완성도의 <게드전기>를 보고 이에 대해 자신의 홈페이지에 답변을 실었다는 뒷 얘기가 있다. 잉글리시의 압박이 느껴지신다면 번역글(#1, #2)을 보시라.

결국 지브리는 강력한 이 한 방으로 <센과 치히로의 모험>과 <하울의 움직이는 성>으로 쌓았던 신뢰를 다시금 무너뜨리고 새로운 우려를 낳게 하고 말았다. 이와 더불어 극장에서 본 애니메이션은 90% 확률로 실패한다는 나의 징크스도 재현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_-; 애니의 세계는 핏줄로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닌가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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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CP/IP의 이해 #2 - 게이트웨이와 DNS

누군가의 말대로, 네트는 광대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네트워크를 흔히 우주에 많이 비유하곤 하죠. 물론 전 세계에 흩어져있는 서버와 클라이언트 컴퓨터(호스트)들이 밤 하늘의 별들만큼 많기야 하겠냐만은, 네트워크가 이루는 세상은 그 크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없을만큼 광대한 공간이라는 사실만큼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주에도 은하계가 있고 행성계가 있듯이, 전체 네트워크 상에 호스트들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나름의 체계가 있습니다. 같은 사무실에서 사용하는 PC들이나 특정한 망에 가입되어 있는 사용자들의 컴퓨터는 네트워크 우주 안에서 하나의 소우주를 이루고 있죠. 이들은 단일한 인트라넷으로 묶이기도 하고, 일정한 IP 대역 안에서 IP를 부여받습니다. 결국 광대한 전체 네트워크는 이러한 소우주 네트워크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게이트웨이는 특정한 네트워크와 다른 네트워크의 연결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게이트웨이gateway의 사전적인 정의와 같이 일종의 관문 역할을 수행하는 셈이죠. 다른 말로 하면, 특정 네트워크의 게이트웨이는 그 네트워크의 시작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보통 게이트웨이 주소를 잡을 때 끝자리가 1번으로 잡는 경우가 많은데요(xxx.xxx.xx.1), 게이트웨이가 네트워크의 시작점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라고도 볼 수 있죠.

예를 들면, 제가 관리하는 www.abc.com이라는 서버의 IP 주소가 211.255.23.39라고 하고, 그 서버가 속해있는 네트워크의 게이트웨이 주소가 211.255.23.1이라고 합시다. 만약 www.abc.com으로 페이지 접속 요청을 보냈을 때, 이 요청은 무조건 게이트웨이를 먼저 통과하여 제 서버로 전달됩니다. 웹페이지를 응답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게이트웨이를 통과하여 요청한 사용자의 PC로 전달하게 되죠.

이렇게 게이트웨이가 하는 역할이 관문이다보니, 통로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검문소의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보안이 필요한 네트워크에서의 게이트웨이는 방화벽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죠. 네트워크를 통해 들어오고 나가는 데이터들(패킷packet이라고 합니다)을 전부 관리할 수 있기 때문에, 악성코드나 특정 데이터에 대해 쉽게 걸러낼 수가 있습니다.

약간은 생소한 게이트웨이에 비해 DNS Domain Name System, 즉 도메인 서버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계실 듯 합니다. 도메인은 네트워크 상의 특정 위치를 결정지어주는 IP 주소 대신 쓸 수 있는 이름입니다. 인터넷 서핑을 할 때 브라우저를 켜고 주소를 치게 되는데, 이 주소가 바로 도메인입니다. 아까의 예에서, 사실 www.abc.com을 보고 싶을 때, 211.255.23.39라고 입력해도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www.abc.com과 211.255.23.39은 둘 다 제가 관리하는 서버의 네트워크 상에서 위치를 나타내는 주소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숫자 네 개로 이루어진 IP에 비해 도메인은 기억하기가 훨씬 용이하기 때문에, IP 주소를 일일히 집어넣는 수고 대신에 도메인으로 간단하게 요청을 보내는 것이죠.

DNS가 하는 역할은 www.abc.com이 211.255.23.39라는 점을 알려주는 일입니다. 즉, 특정 도메인을 IP 주소에 매핑mapping하는 것이죠. TCP/IP 네트워크에서는 IP가 특정 네트워크 포인트를 알려주는 주소라고 했습니다. 만약 도메인을 입력해서 특정 포인트를 찾으려고 한다면, 먼저 DNS가 도메인을 IP 주소로 번역하고, 그 IP 주소로 요청을 날리게 되는 것이죠.

재미있는 것은, 도메인과 IP 주소의 데이터베이스인 DNS를 정해진 누군가가 관리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만약 전세계에 DNS 서버가 한 대만 존재하고 있다면, 만약 그 서버가 다운되었을 때 도메인 이름을 모른다면 어떠한 네트워크 포인트에도 접속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DNS는 세계 도처에 존재하며, 하나의 DNS 서버가 못 쓰게 되거나 효율이 좋지 않다면 다른 DNS를 참조해서 IP 주소를 얻어오게 됩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도메인이 출현했을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일단 www.abcd.com이라는 새 도메인을 발급받아 근처에 있는 DNS 서버에 등록했다고 가정합시다. 그 시점에서는 운좋게도 새 도메인을 등록한 DNS 서버에서 IP 주소를 받아온 사람은 www.abcd.com을 잘 찾아갈테지만, 다른 DNS 서버를 사용하고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www.abcd.com을 주소창에 쳐도 그런 페이지는 없다는 에러밖에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DNS 서버들은 서로의 변경 사항을 주기적으로 교환해서 새로운 데이터베이스를 유지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새 도메인이 등록된 DNS 서버는 www.abcd.com에 대한 정보를 다른 DNS 서버에 전파하게 되고, 대략 하루 정도가 지나면 모든 DNS 서버가 www.abcd.com에 대한 정보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새 도메인을 등록하면 전체적으로 적용되는데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DNS의 분산 환경 때문에 생기는 일이죠.

뭔가 단순하게 설명해놨는데, 실제로는 이보다 더 복잡한 일들이 네트워크 세계에서 일어납니다. 전세계로 통하는 복잡한 네트워크 환경에서 빠르고 정확하게 요청을 주고받게 하기 위해, 인터넷의 발전과 더불어 네트워크 기술도 계속 발전한 셈이죠. 어디서든 네트워크와 연결할 수 있는 유비쿼터스 시대니 뭐니 해도 TCP/IP의 기본적인 구조는 인터넷이 존재하는 한 남아있을 것 같습니다. 왠지 공각기동대의 전뇌 통신도 TCP/IP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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