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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의 이야기 _01

정확히. 아침 7시 15분.

평범 하다하다 못해 세계최고로 평범한 L의 일상이 찬란한 영화속 한 장면으로 변신하는 시각.

 

아침 7시. L은 츄리닝을 꿰고 4층을 꾸역꾸역 내려와 오래된 자전거를 끌고, 그녀의 집 바로 옆 블럭에 위치한 빵집으로 들어간다.

온통 우유빛 고소함과 스트로베리빛 상큼함으로 꽉찬 가게안에서 그 냄새의 천국에 비한다면 터무니없이 작고 소박해보이는 흰 식빵 한줄을 사갖고 집으로 돌아오는건 그녀의 중요한 아침일과.

막 구운 수십 종류의 빵들이 뿜어내는 그 터질듯한 달콤함 속을 거닐며, 고 작고 호물락거리는 것들을 선택할 기회를 누리는 그 3분만큼은,

L도 분홍원피스입고 하늘거리는 작고 귀여운 영화속 여주인공 부럽지 않던 터였다.

 

L이 낡은 자전거를 끌고 나오는 시각, 7시 9분.

자전거를 타고 한 블럭을 와 빵집에 들어가는 시각, 7시 11분.

세계최고로 평범한 식빵을 왼팔 옆구리에 낀채 안장에 마악 발을 얹어 페달을 밟기 시작하는 시각, 7시 15분. 

 

하지만 모든 이야기가 그러하듯

L은, 아침햇살이 유난히 따갑던 어느날. 정확히 아침 7시 15분을 기점으로

새로운 영화속 장면과 마주치게 된다.

 

타이트한 감색이거나 회색의 양복쟈켓을 입고 검은색 날렵한 크로스백을 활기차게 매단채 앞을 향해 페달을 밟으며 지나가는 J.

싱그러운 아침을 배경으로 한 빵집의 고소함으로 이야기는 시작되어 유쾌한 휘파람 소리에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더니 그의 힘찬 페달과 함께 영화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었다.

L의 가슴은 요동친다.

 

그리하여 L은 전날의 과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야근에도 아랑곳않고

7시 15분을 사수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에 그녀는 평소보다 이른 시각에 눈을 뜨고,

평소보다 이른 시각부터 옷장을 열어제친다. 그리곤 화장대 앞으로 간다.

한듯 안한듯 보이는 화장, 차린듯 안차린듯 차려입은 평상복. 최대한 자연스럽고 보통스럽게 치장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짝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터.

그녀는 보고 또 보고 입고 또 입는다. 최대한 평범하기 위해.

 

물론 L의 기상시간은 훨씬 빨라졌으나

그녀가 집을 나오는 시각은 늘 그대로.

L은 정확히 빵집에서 7시 14분 20초에 나오기 위하여 수십번도 더 넘게 머리속으로 시나리오를 그린다.

 

너무 이른 시각 집을 나와 너무 오랜 시간 빵집에 머무르게 되어

수다스런 점원의 말이 길어져 시간상의 오차가 생겨서는 안되며

너무 이른 시각 빵집을 나오게 되어 7시 15분을 기다리기 위해

빵집앞에서 보통 보다 조금더 서성이게 되어 쓸데없이 자전거 앞바퀴를 돌려본다거나 안장을 만지작거리게 된다거나 혹은 식빵 봉지를 왼쪽 옆구리에서 오른쪽 옆구리로, 오른쪽 옆구리에서 다시 왼쪽 옆구리로 옮기게라도 된다면

혹여, 멀리서 그가 엘의 부자연스러운 제스쳐를 보고 뭔가 어색함을 느끼게 된다면.

아- 참을 수 없는 그 유치함이며.

이 평범하다 못해 세계최고로 평범한 L의 모양새가 영화속 장면에 고스란히 노출된다는건 전혀 영화적이지 못한 끔찍함일 뿐.

 

그래서 L은 매일같이 7시 9분이 되면 현관문을 박차고 나왔으며

J의 활기찬 모습에 흡족해했다.

 

그러기를 수십날.

어김없이 상쾌하게 페달을 밟아 빵집에 도착한 엘은 당황하고 만다.

.

.

 

 

'가게 세놓음'

굳게 닫힌 문.

 

엔딩크레딧을 올리기엔 아쉬운 시점 아닌가?

이제 L은 다시 세계최고로 평범한 그녀의 일상속에 묻히고 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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