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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 형을 생각하며,

  • 분류
    단상
  • 등록일
    2011/03/15 11:24
  • 수정일
    2011/03/15 11:24
  • 글쓴이
    서른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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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 형을 생각하며,(작은책 4월호-인물바로보기에 실린 글)

 

유신말기였던 77년 말 광주 금남로의 YMCA회관에서 남주형 시낭송회가 있었다. 입추의 여지없이 사람들이 들어차서 출입문을 못 닫을 정도였다. 그 때는 긴급조치 9호로 체제를 비판만 해도 잡아가는 시절이라 청중들도 긴장된 분위기이고 간간히 섞여있는 정보과 형사들도 긴장감을 더해 주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사회자의 소개를 받은 남주형이 “시는 뭔시? 노래나 한곡 부르겠다”면서 18번인 “찾아갈 곳은 못 되더라 내~고향”을 부르고 끝났다. 말이 씨가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방이 이루어지기 전에 어떻게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겠는가?

어쨌든 모두가 낭송을 기다리는 자리에서 뽕짝을 부르고 끝내는 것은 파격이다. 그렇다. 형은 항상 파격적이고 결코 평범한 속인이 아니었다. 남들이 선언문 운동이나 하고 있을 때에 지하혁명조직에 참여했고, 참으로 모범적으로 싸웠다. 그리고 감옥에 가서도 전사의 몫을 다할 수 없는 그 공간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다. 출소해서도 역사와 정면으로 대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끊임없는 반성이 있었다.

남들은 그를 시인으로 부르지만 시인이 아니라 혁명전사라고 부르는 게 올바른 지칭이다. 형이 ‘나 자신을 노래한다’라는 시에서 올바르게 애기했듯이 “혁명은 전쟁이고... 나는 혁명시인... 나는 민중의 벗... 나는 해방전사”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형은 맑스레닌주의자였다. 누구보다도 미제의 잔악함에 대해 분노하고 자본의 세계에 분노했다. 오늘날 민족공조를 운운하며 안기부와 함께하는 통일행사나 하는 사람들이 민족해방의 시인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그러나 “자본의 시장에서 사상은 그 저울이 계급의 눈금을 가져야 적과 동지를 바르게 식별한다는 것을”(사상의 거처)이란 구절에서 보듯 형은 반제의 과제를 계급문제와 통일적으로 사고한 몇 안 되는 소중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이제 빼앗는 자가 빼앗김을 당해야 한다. 이제 누르는 자가 눌림을 당해야 한다. 바위같은 무게의 천녀의 사슬을 끊어버려라. 싸워서 그대가 잃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쇠사슬말고는”(민중), 이 구절은 맑스의 공산당 선언에 나오는 글이 아니던가? “장군들 이민족의 앞잡이들, 압제와 폭정의 화신 자유의 사형집행자들... 나는 싸울 것이다. 살아서 나가서 피투성이로, 빼앗긴 내 조국이 깃발과 자유와 위대함을 되찾을 때까지, 토지가 농민의 것이 되고, 공장이 노동자의 것이 되고, 권력이 민중의 것이 될 때까지”(권력의 담). 이 구절은 레닌의 선동을 듣는 듯하다. 이처럼 남주형은 결코 단순히 민족해방의 시인이 아니다.

 

78년 초 남주형은 광주의 녹두서점 뒷방에서 학생들과 세미나를 했다. 교재는 ‘파리코뮌’. 그리고 후배들에게 남미의 해방시인 네루다와 파울로 프레이리의 책도 권했다. 이 일로 수배되어 형은 서울로 피신했다. 후배들에게 형이 전달하려고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데모 사건으로 수배되어 서울에 왔더니 남주형은 석률형(나의 큰형)과 함께 장위동에서 지내고 있었다. 당시 남민전의 까마귀(장기 수배자)는 이재문, 신향식 선생과 남주형과 나였다. 그만큼 자유로운 처지였기 때문에 형과 나는 자주 (혜성대와 전위대와 같은) 행동대에 동원되었고 기꺼이 자원하였다. 79년 4월 잠시 악덕 재벌의 사적소유권을 무시한 까닭으로 형이 수배가 되자 형이 잡힐 때까지 잠실에서 함께 지냈었다. 형은 이때부터 뭔가 각오가 바뀐 듯하였다. 아침에 일어나 신문을 챙기러 나가면 형은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거실에서 요가(물구나무)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 “왜 아침부터 남의 글을 읽느냐?” 하긴 정신이 가장 맑을 때 내 생각을 정리하고 내 글을 써야한다는 형의 말이 와 닿았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자기 글보다 훌륭한 사람은 없다”는 말도 들었다. 그 말도 공감이 갔다.

 

나는 시도 모르고 문학이나 예술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80년대 초에 학생들이 많이 감옥에 들어왔다. 당시에 문화예술운동을 하겠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고 나의 지론은 역사를 바꾸는 것은 펜이 아니라 투쟁이다는 것이었고... 그런데 하루는 예술운동지망생인 한 학생이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가슴은 너를 잊은 지 오래... 어쩌구 저쩌구”라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이 노래를 듣고 욕이 튀어 나올 뻔 했다. 미친놈! 왜 감옥 좀 산다고 남들이 널 기억해야 해? 그냥 역사 속에서 이름없는 풀잎처럼 무명용사처럼 그렇게 열심히 싸우다가 가는거지... 생각해 볼수록 소부르주아 개인주의에 찌들은 노래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시를 쓰겠다는 놈, 소설을 쓰겠다는 놈, 죄다 자세가 잘못됐다고 혼을 냈다.

그래서 전주교도소에선가 형하고 같이 지내면서도 형이 시를 쓰고 있고 시집이 나왔다는 얘기에도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형은 내게 있어서 전사였지 시인이 아니었다. 형이 투쟁과 예술을 통일적으로 사고한 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꽤나 후의 일이었다. 어쨌든 형이 열나게 우유봉지에 시를 쓰고 있을 때 나는 지나가다가 형님방을 들여다 보고 “형님 그런 거 하지 말고 딸딸이나 치쇼!”하면, 형이 “확! 석삼이 너 죽인다!”면서 보여주던 따뜻한 웃음이 생각난다. 이제 형이 돌아가신 지도 벌써 17년, 형과 이런 농담을 주고받은 지도 벌써 30년이 되어간다. 새삼스럽게 형의 넉넉한 인품이 그립다. 내가 이 나이에 누구에게 어리광을 부릴 수 있겠는가? 형의 영결식 때 바람에 휘날리는 형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속물들은 장례위원장이니 부위원장이니 호상이니 뭐니 온갖 완장을 차고 족보타령이나 하고 있었지만 그 속에 형이 꿈꾸던 혁명의 세계와 그 열정을 아는 이가 몇이나 되었을까?

 

다시 형의 시집을 꺼내본다. 형의 시는 열정과 분노와 사랑의 시이다. 94년 경기대학교에서 있었던 영결식 후에 처음으로 형의 시를 읽어봤다. “빼앗길 것은 족쇄밖에 없다”는 등의 원색적인 선동이 영 맘에 안 들었다. 그냥 착한 대중들에게 이렇게 선동하면 무책임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최근에 다시 형의 시를 읽어봤다. 이제야 비로소 형의 생각을 알 수 있을 것 같았고 인간적인 고뇌를 느낄 수 있었다. 결코 좌절하지 않고 굽히지 않는 혁명에 대한 열정이 비로소 이해가 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형은 정말 누구보다도 넓게 공부하고 끊임없이 역사에 정면으로 도전한 분이다. 남민전은 실패한 운동이고 패배한 운동이다. 조직노선과 투쟁노선이 잘못된 운동이고 우리 운동에 별로 기여한 것도 없이 징역만 많이 받은 사건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하여 그 운동에 참여한 전사들의 열정까지 비난될 일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나는 특히 불행한 사람이기도 하다. 함께 했던 동지들 중 먼저 간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박기순, 윤상원, 이철규... 이재문, 신향식 선생님 전수진 할머니... 모두 나와 적지 않은 인연이 있는 분들이고 남주형과 윤한봉 형이 또한 그렇고... 지금 그들은 열사가 되어 나와 함께 있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항상 그들의 몫까지 살아야 하는 마음의 부채가 있다.

“나는 싸울 것이다 살아서 나가서 피투성이로... 토지가 농민의 것이 되고, 공장이 노동자의 것이 되고, 권력이 민중의 것이 될 때까지”(권력의 담)

이런 구절을 온몸으로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는 형과 하나가 될 수 있고 역사를 한 걸음이라도 전진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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