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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얘기

  • 분류
    단상
  • 등록일
    2008/04/28 17:36
  • 수정일
    2008/04/28 17:36
  • 글쓴이
    서른즈음에
  • 응답 RSS
 

어느 행동대원의 기억-

1. 간단한 개인 소개를 좀 해주시죠.


30년이나 지난 일을 기억하라는 건 저처럼 기억력 없는 사람에겐 애초부터 무리이니까 생각나는 대로 말하기로 하죠.


77년 가을 방위를 마친 저는 계림파출소 앞에 있는 어머니가 하시던 가게 일을 도우면서 소일하는 건달이었다고나 할까… 집안 형편도 어려웠지만 저의 정서는 현실이나 기성 제도와 정치에 대해서 밑도 끝도 없이 부정적인, 한마디로 룸펜 프롤레타리아 정도였습니다.


아무튼 그 무렵 가게와 가까운 곳에 민청출신인 김상윤 형이 사회과학 전문서점인 녹두서점을 열었고, 뚜렷한 일거리가 없는 저는 무시로 녹두서점에 들락거리면서, 거기 드나드는 대학생들이 읽는 책이나 혹은 상윤형이 권하는 책을 읽기도 하면서 이 사회의 부정적인 현실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키워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읽은 책으로는 대지에 저주받은 자들이나 농업경제학, 박현채 선생의 글 등 등…


당시 녹두서점은 단순한 사회과학 서점이 아니라, 광주 전남권의 모든 의식있는 사람들이 들리고 소식을 교환하고 사귀는 일종의 사랑방의 역할을 했지요. 거길 가면 좋은 신간은 물론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소식을 들을 수 있었으니까요. 저도 녹두서점의 단골이었는데, 때로는 사람들을 만나 그 주변에 가서 술을 마시기도 하고 서점의 뒷방에서 얘기도 나누고 쉬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고구마 사건 전에는 김남주 형이 뒷방에서 박현옥 등의 학생들과 (파리 콤뮨을) 공부하시는 걸 본 적도 있고... (남주형은 나중에 이게 발각돼서 서울로 도피를 하셨고... )



2. 1970년대 후반의 정치상황이나 당시 알고 계셨던 선후배, 동료는?


78년 초가 되어, 아마 이 때가 민청학련 출신들이 뭔가 해볼려고 움직이던 때였던 거 같은데, 저는 이강 형이 고등학교 선배이기도 하고, 워낙 인품이 고매하고 늠름하셔서 제가 좋아해서 막 쫒아 다녔지요.


그 때 이강, 정상용 형 등 민청 형님들 몇몇이 꼬마가게라는 채소류 프랜차이즈를 만들었는데, 카농(카톨릭 농민회)하고도 깊은 연관이 있었습니다. 78년 3월 무렵엔 형님들을 쫒아 다니면서 자연스레 함평고구마 사건을 계획하는 모임에 시중을 들게 되었습니다. 회의는 대강 7-8명 정도 모였는데, 이강, 김운기 조계돈 형도 있었고, 서경원 카농회장님과 노금노 총무님 그외에도 지금 잘 기억나지 않은 많은 분들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밤 늦게 회의를 끝내고 이강형 가게로 돌아왔는데, 형수님이 큰아들인 청천을 업고 집을 나가시겠다면서 이강 형과 부부싸움을 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하였습니다. 운동에 미쳐서 집안은 돌보지 않는 형님과 현실의 존재로서 살아가야 되는 형수의 다툼! 아무튼 당시에 제 눈에는 형수의 고충을 이해할 것 같으면서도 신념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이강 형이 존경스러웠지요.


저는 또 이 무렵 윤한봉 형과도 자주 만났지요. 윤한봉 형은 저의 큰형인 박석률 형과 중학교 동창이기도 하고 같은 민청출신이라 저를 예뻐하기도 하였고 또 저를 키우기로 하신 거 같았습니다. 아마 한봉 형에게는 저와 같은 많은 제자들이 있었겠지만…

한번은 서부경찰서 근처의 이강 형 가게에서 한봉 형과 밀담을 나누는데, CIA놈들은 500m 밖에서도 도청을 할 수 있다면서, 만년노트에 필담을 하시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강 형은 대중운동의 지도자라면, 윤한봉 형은 지하조직운동의 대부라고나 할까… 아무튼 두분 형님이 저를 많이 아껴주시고 가르쳐주시고 일도 많이 시키셨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이강, 윤한봉형을 중심으로 김상윤, 이양현형 등 민청선배들은 일종의 네트웍이랄까 암묵적인 역할분담이 있었던 것같습니다.



3. 1978년 당시 함평고구마투쟁 등에 대해서....


당시에 저는 24살의 비교적 팔팔한 나이였기 때문에 선배들이 많은 일을 맡겼었지요. 유동성당의 농성장 잠입을 준비하고, 해남엔가 가서 황석영 형으로부터 선언문을 받아오기도 하고(그때 한국일보에 연재하고 계셨던 장길산의 애기를 재미있게 들었던 기억도 납니다.) 고교 때 전교 응원부장과 오락부장의 경력을 살려 사다리 데모를 선동하면서 징을 치기도 하고…


당시에 유동성당의 정문 양쪽으로는 전경이 대기하고 있다가 농성 대오가 정문 앞으로만 진출하면 바로 양쪽에서 달려들어 체포할려고 했기 때문에, 대오의 양쪽으로 긴 사다리를 어깨에 끼고 사다리 길이의 절반 정도만 정문 앞으로 진출하여 구호를 외쳤었는데, 이 때에 제가 대오의 옆에서 징을 치면서 리드를 하는 일종의 선봉장의 역할을 한 셈이지요. 이게 전무후무한 사다리 데모지요. 그때 제가 경찰에 많이 찍혔다고 합니다.


공용터미날(현재, 롯데백화점) 앞 북동성당의 농성이 장기화 되자, 서경원 회장과 이강 형 등 농성지도부는 타개책으로 외부에서 지지데모를 꾸리기로 하고 제게 임무를 주셨지요. 농성이 닷새째 되는 날 밤에 뒷담을 넘어(농성중 외부와의 연락을 위해 수시로 담을 넘었지만) 모 중국집에서 모 학생과 만나 각본을 확인하고, 충장로에서 데모를 했습니다. 그런데 데모를 준비한 모 학생과 그 팀에 대해서는 이강 형이나 윤한봉형이 아실 것 같은데, 저는 전혀 모르는 팀이었습니다. 함성을 지르면서 달려가던 중, 한 5m앞에서 달려가던 한 학생이 경찰에 붙들리는 것을 보곤, 제가 달리던 힘으로 경찰을 차버렸지요.(날라서 이단 옆차기라고나 할까 이소룡 흉내를 낸 셈이지요) 그 학생은 도망가고 저는 뒤에서 쫒아오던 경찰에 붙들려서 경찰서인지 파출소인지 끌려갔는데, 모두 훈방되고 저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 중국집에서 음모를 꾸미던 것을 중국집 종업원이 신고를 했었는데 그게 저로 확인되고 결국 데모 주동자로 찍혔지만 다행히 다음날 박정희가 농민들의 정당성을 인정해서 저까지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고구마투쟁은 4월이었는데, 그 뒤로 학생들이 뭔가 해보자고 하여 동일방직에 관한 삐라를 만들어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뿌리기도 했습니다. 이 때부터 노동자의 누나 고 박기순 열사(당시 전남대 국사교육과 3년)와 호흡을 맞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차에 제가 좀 늠늠하고 믿음직하게 보였던지 박기순 동지가 저를 많이 신뢰해 줘서, 둘이 호흡이 잘 맞았습니다. 삐라투쟁 후에 박기순 동지가 세미나 팀을 만들어 보자고 해서 5월 중순 정도에  삐라 투쟁을 했던 전대생들을 기반으로 팀을 만들었습니다. 그 무렵 계림동 5거리 가는 초입에 제가 방을 하나 얻어서 세미나 팀이 모이는 아지트로 삼았지요. 전대생들은 대부분 박기순 동지가 끌어 들였고, 서울에서 야학을 했다던 휴학생들은 이양현 형이나 김상윤 형을 통해서 소개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서울 휴학생들을 포함해서 총 10명 남짓 되었던 것 같은데, 김선출, 노준현 외에는 이름이 잘 생각이 안 납니다. 아무튼 말이 세미나 팀이지 사실은 광주에서 노동운동을 어떻게 할 것인지 혹은 현장으로의 이전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는 목적의식적인 모임이었기 때문에, 비공개로 운영을 하면서 참여시킬 사람들에 대한 평가를 먼저 신중하게 한 다음 조심스럽게 끌어들였지요. 당시엔 세미나도 하면서 노운-노동현장으로의 이전에 대해 많이 얘기하였고, 그 사업의 일환으로 광천동 공장밀집지역에 대한 노동현장의 기초조사 작업을 하기도 하고, 야학을 꾸리는 작업도 했었는데 서울에서 온 휴학생들의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아무튼 저는 윤한봉 형의 지도를 받으면서 이강 형님을 시중들기도 하고, 녹두서점에도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여러 의식있는 학생들과 친해졌지요. 대부분의 학생들은 저보다도 더 학습을 체계적으로 한 거 같았지만, 제가 한 두 살 더 먹은 것도 있고, 학생도 아니니깐 좀 대접을 해준 거 같기도 하고…


4. 교육지표사건에는 어떻게 관여가 되었고 그때 하셨던 역할은?


저는 교수들이 선언문을 읽었다는 다음날(6월28일) 여느 때처럼 오후 2-3시쯤 무렵 녹두서점에 갔었습니다, 김상윤, 정용화 형과 김은경, 박현옥 등등 7-8명이 모여서 어떻게 할거냐를 논의하고 있었는데. 대강 송기숙 선생님의 자택에 가서 농성을 하자는 의견으로 모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거기서 제가 이건 데모를 해야 한다고 단호히 주장한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저는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다른 친구들 얘기로는, 그날 오후에 저와 정용화, 조봉훈 형(당시 출소한지 얼마 안됐음)과, 박몽구 김선출 등등 8-10명 정도가 이황(이강 형의 동생)의 자취방에 가서 다음날 데모에 대한 논의를 했다고 합니다. 아마 녹두서점이 논의를 계속하기는 부적당해서 이황의 집으로 옮긴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튼 제 기억으로는 그날 밤 제가 전대 근처의 송기숙 교수님 댁의 농성장에 가기 전에(혹은 갔다 온 후에) 계림동의 저의 아지트에서 세미나 팀 7-8명이 다시 모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자리에는 박기순 김선출 노준연 박몽구 그리고 야학팀 등 7-8명이 모였던 것같은데 기억이 잘 안납니다. 결론은 데모를 하되 역량을 다 날릴 수는 없으니깐 노동 쪽에 들어갈 팀과 학운 쪽에 들어갈 팀으로 나누고, 학운 팀이 데모를 목적의식적으로 꾸리기로 했습니다. 그때 박몽구가 준비해온 선언문을 함께 검토했던 것같습니다.


그날 늦은 밤에 김은경(?)(당시 한신대2년, 현재 목사로 전주 성폭력상담소 소장))의 주선으로 YWCA의 김경천 간사님이 인쇄소(정호철 사장)를 알선해주어 유인물을 만들어, 학운팀이 나누어 옮겼습니다.


다음날 29일은 전대도서관에서부터 농성 시위하였고, 이날 오후에 박기순과 함께 상황을 점검했지요. 일단 내일은 틀림없이 휴교령이 내려지고 경찰이 정문을 폐쇄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과, 정문 앞에서 대치하다가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선동할 사람을 구하고 학운 팀이 중간 중간에서 데모를 리드하기로 했지요. 이런 판단을 박기순동지가 학운팀에게 전하고 저녁에 다시 만나기로 했지요.


그날(6월29일) 밤 마침 초등 동창인 문승훈이 저희 아지트에 왔습니다. 문승훈은 낮에 데모를 앞장섰다가 제게 피신을 온 것이었는데, 그날 밤은 문승훈과 같이 자고 다음날 아침 일찍 박기순 동지가 와서 상황을 같이 얘기하다가 주동을 설 사람이 없다는 얘기에 문승훈이 정문 앞에서 선동에 나서기로 했었습니다. 그런데 정문에서 해산당하면 그대로 끝날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이 들어서, 데모가 해산되면 1시 쯤에는 금남로 3가에 있는 한국은행 앞에서, 오후 4시에는 조대, 저녁 8시에는 충장로 파출소앞에서 계속 데모하기로 하고, 다음 일정은 오후에 다시 판단하기로 했지요. (처음에는 한국은행 앞만 얘기가 된 것같기도 합니다.) 이런 판단을 박기순 동지가 학운 팀을 통해서 정문 앞에 있는 학생들에게 전파했고, 그후로도 저와 박기순은 수시로 만나 상황을 점검하고 다음 행동에 대한 판단을 하고, 박기순이 데모대 속을 누비며 다음 지침을 전달했습니다. 당시에 박기순과 학운팀의 역할은 절대적이었고, 특히 박기순 동지는 열정과 헌신 그 자체였지요. 그에 비하면 제가 한 역활은 시위대와 떨어진 안전한 장소에서 박기순동지와 의견을 나눈 정도지요.


그날(6월30) 전남대 정문앞에서 시위를 하다가 100명 정도의 학생 시위대는 서방을 거쳐서 계림파출소까지 진출했다가 점심 무렵 한국은행 앞에서 다시 모였는데, 저도 한국은행 앞으로 나갔지요. 그 후로 2박 3일 동안 예정데모 혹은 예고데모는 하나의 틀이 되어 그전에는 볼 수 없는 데모의 새로운 전형이 만들어졌습니다. 계속되는 데모에 얼마나 분위기가 흉흉했던지…


그날 밤인가는 박기순 동지를 자전거에 태우고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두암동 근방에 갔다가 밤 10시가 넘어 돌아와서 다음날 계획에 대해 얘길하고 헤어졌지요. 그리고 그 날 밤이 박기순 동지를 본 마지막이었지요. 진정한 동지애는 투쟁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말이 있는데, 저는 그때 너무나 헌신적인 박기순 동지에게 깊은 동지애를 느꼈지요.


다음날(7월1일) 저는 윤한봉 형의 지시로 서울로 올라와 백낙청 교수와 성내운(?) 교수를 화곡동의 고은 시인의 집에서 만나 교육지표 선언문을 전달하고 광주의 사정을 전한 뒤, 그 다음날 아침 광주로 돌아왔습니다. 잠자리에서는 세분으로부터 서울과 경상도의 운동 상황이라든지, 함석헌 선생의 부정적인 면모라든지, 여러 흥미있는 얘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다음날(7월 2일) 오후에 광주에 돌아오니 즉시 서울로 피신하라는 윤한봉 형의 전갈이 있었습니다. 광주역이나 고속터미날은 위험하니까 송정리역을 이용하라는 당부와 함께... 계림동의 저의 본가에는 옆집을 통해 출입할 수 있는 구조가 되어 있어서 저는 옆집에서 몰래 넷째 동생 박석준을 불러내어 상무대 가는 길에 있는 피정센타로 갔지요. 누가 잡혀갔는지 학운팀은 어떻게 됐는지 저의 존재가 어떻게 어디까지 경찰에게 파악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경찰이 잡으러 왔다는 거, 제가 쫒기는 몸이라는 거는 분명하였고…


피정센타에서 석준이와 함께 바라본 하늘은 참으로 파란 하늘이었습니다. 석준이가 나중에 전교조 투쟁에 헌신한 것은 그때의 기억도 한 몫 했을 겁니다. 그렇게 저는 어머니 얼굴도 못 본 채, 그날 밤 송정리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서울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음해 박정희가 땅에 묻힌 79.11.3. 제가 남민전 사건으로 피체되기까지 1년 반에 걸친 피신생활이 시작되었지요.



5. 피신의 와중에서도 남민전 사건에 관련한 일을 하신 걸로 아는 데 이에 대해서....


서울에 올라와 박석률 형이 살고 있는 미아삼거리의 하월곡동엘 가니, 거기에 김남주 형이 피신해 있었습니다. 가까운 돈암동엔 현장에 들어간 이학영 형(현 YMCA 사무총장)의 자취방이 있었고… 피신자들끼리 몰려 있으면 안된다는 판단에 따라 저는 태능에 있는 전수진 할머니(남민전 사건으로 옥사)의 집에 있기도 하고, 다음해 봄에는 홍세화 형집에서 세화 형이 프랑스로 가기까지 한달간 숨어 있기도 하고… 이학영형이 잡히고 난 뒤엔 공개수배된 김남주 형과 차성환 동지(현 부산민주광장 관장) 등과 함께  잠실에 있는 아지트에서 추석 때까지 같이 생활하게 되었지요. 추석 전날 석률 형과 만나기 위해 저만 외박을 한 사이에 잠실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잡혔고, 저는 그 뒤로 한달여를 더 피신하다가 결국 피체되었습니다.


남민전과 관련한 활동은 이글의 주제가 아니니깐 생략하기로 하는데, 김남주형과 저는 피신자의 처지라 일상 시간에 구애받지 않았기 때문에 행동대에 편성되었고, 아무래도 제가 건장하고 어리니까 행동대 역할을 전담했지요. 특히 79년 여름 청량리 광장에 ‘살인마 박정희를 타도하자‘라는 수만장의 삐라가 눈보라처럼 쏟아져 내렸는데, 이 사건이 엄혹한 암흑의 시절에 서울 시민에게 끼친 충격은 정말 컷다고 생각합니다. ‘살인마 박정희는 YH 어린 딸을 벽돌로 찍어 죽이고도 저만 잘했다고 큰 소릴 치고 있다’로 시작되는 이 글을 제가 쓴 글이지요. 이 삐라는 조직의 학생팀이 청량리역 건너편에 있는 학원 옥상에서 시한 폭탄 처리를 해서 뿌렸는데, 청량리 역 광장에 수만장의 삐라가 눈처럼 쏟아지는데, 엄청 기분이 좋았습니다. 긴급조치와 중앙정보부가 판을 치는 살벌한 유신독재 하에서 모두 숨을 죽이고 사는데 이렇게 통쾌하게 삐라를 뿌린 것은 행복 그 자체였지요.


광주 소식은 간간히 들었는데, 노준현이 징역을 5년이나 받았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78년 가을에 우연히 김은경을 만나, 마침 일행이 있어서 담에 만나기로 약속을 정했는데, 제가 늦는 바람에 광주에 대한 아무런 소식도 못 듣다가 그 해 겨울 크리스마스 무렵에 박기순동지가 연탄가스로 죽었다는 얘길 듣고 화장실에 가서 한참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납니다.


박기순 동지는 데모 뒤에 별 처벌을 받지 않고 노운 팀에 합류해서 광천동 공장에 취직을 했다는 것과, 노운 팀이 만든 야학은 나중에 이름을 들불야학으로 바꾸고 여공들을 의식화하는 작업을 했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저는 광주를 떠나면서 학운 팀은 물론 노운 팀과도 연결이 끊어졌지만, 나중에 5.18. 항쟁 때 선전 작업에 기여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늦게 잡힌 까닭으로 별 고문은 받지 않았고, 박정희가 죽은 뒤라 긴급조치가 해제되어 교육지표사건과 관련한 내용은 처음에 조사는 받았지만 공소장에는 빠졌지요.


어쨌든 저는 민주교육지표 사건과 관련하여 피신을 하게 되고, 그렇지 않았더라면 5월 항쟁에서 제 성격으로 보아 분명 설쳤을 것이고 죽지 않았더라면 다른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르지만, 어쨌건 그 사건을 계기로 저는 지하조직에서 활동하고 무기징역을 구형받고 15년의 형을 받아 전두환이 백담사로 떠났던 88년 크리스마스 때까지 9년 2개월의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석방이 되고도 한달동안 양심수 석방농성을 하다가 89년 1월에야 11년만에 광주에 잠시 들렀지요. 83년에 돌아가신 아버님 산소에도 그때 들렸지요.


그렇게 보면 교육지표사건은 제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전기인 셈이지요. 저는 피신하는 동안 고전들을 엄청나게 읽을 수 있는 행운을 누렸고, 그 때의 독서로 감옥 속에서 새로 들어오는 학생들에게(그 중엔 내가 무척 아끼고 하나라도 더 가르쳐 줄려고 했던 이철규열사도 있었지요) 철학과 경제학을 매일 밤 강의하는 즐거움을 갖기도 하였고, 지금의 제가 꿋꿋하게 서 있을 수 있는 토대가 되었지요.


6. 감옥 생활은 어땠었나요?


감옥생활은 체질에 맞았던 것같습니다. 물론 지금은 자신 없지만...

80년 말에 광주교도소의 정치범 독거사동으로 이감왔는데, 민주교육지표 선언을 하셨던 송기숙 명노근 교수님이 5월항쟁과 관련하여 들어와 계셨고, 제가 존경하는 이강, 김남주 형도 있었고, 전국기자협회회장이셨던 김태홍 선배도 있었고... 한번은 처우문제 때문에 문짝을 차고 샤우팅을 한 적이 있었는데 엄청 재미 있었습니다. 제 경우는 그동안 많이 위축되어 있었는데, 그 사건으로 제가 자신감을 회복했던 것같습니다. 그리고 싸워도 되는구나. 싸워야만 하는구나라는 것을 느꼈지요.


아무튼 열심히 공부하고 토론하고, 쓸만한 학생들 들어오면 끼고 가르치고... 가끔은 정치범이나 일반수들까지 선동해서 투쟁을 꾸리고 많이 싸웠지요. 단식투쟁도 많이 했는데, 보통 16일이나 17일째 되면 꼭 강제급식을 당하지요. 고무호스를 코를 통해 식도로 집어 넣는데 온몸이 묶인 채 반항하다 보면 식도가 뒤집어지는 것같이 구역질이 나고 고통이 심했지요. 아무튼 강제급식도 엄청 많이 당했고, 이학영형과 같이 강제급식을 당한 적도 자주 있었는데 그렇게 마지막까지 남아 고통을 함께 당하는 동지들의 비명소리 속에서 깊은 동지애를 느끼곤 했지요.


제 개인으로 보면, 함평고구마 투쟁이든 교육지표투쟁이든 혹은 지하조직 속의 투쟁이든 간에, 당시에 제가 어리기도 했고 선배들도 많아서 몸으로 때우는 일이라면 무조건 나서거나 동원되는 전천후 행동대원이었다고 한다면, 징역을 살면서 비로서 운동을 깊이 이해하게 되고 한사람의 운동가가 될 수 있었던 것같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제가 워낙 강경한 입장을 주장하다 보니깐 꼭 투쟁을 선도하고 책임지는 위치가 되었지요. 그래서 투쟁에서 패배하고 강제급식을 당하고 강제이감이나 먹방에 가는 것은 고통이 아니었는데, 저 때문에 혹은 저를 믿고 함께 나선 동지들에게 고통이나 죄절감을 안길 때에는 너무나 죄스러웠습니다.


83년엔가 전주교도소에서는 일반수들까지 선동해서 왕창 크게 붙었다가 격리된 상황속에서도 사동 소제나 위생(똥푸는 소제)들까지 저희를 도와줘서 매일 투쟁 속보를 밖으로 내보냈지요. 그때 밖에서는 문정현 신부님이 애쓰셨는데, 재작년인가 대추리 미군기지 반대투쟁에 갔다가 신부님을 만났더니 지금까지도 제 이름을 기억하셔서 놀랐습니다.


87년엔 대구교도소에서 다시 광주교도소로 이감을 왔었는데, 6.29. 직전에 일반수 폭력문제로 크게 붙었다가 저와 남민전 공범인 김부섭 동지등 3명이 통닭구이를 당한 적이 있었지요. 양손 양팔을 몸 뒤로 당겨서 꽁꽁 묶였는데, 어깨쭉지를 찢어내는 것같은 고통이 너무 컷지요. 무려 사흘 동안 짐승같은 비명을 질렀는데, 교교한 교도소의 밤에 어디선가 끊임없이 들려오는 짐승같은 비명소리를 생각해 보세요. 당시 광주교도소가 흉흉하고 살벌했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에 강제이감을 당했는데, 저는 안동교도소의 먹방으로 옮겨져서 한달만에 나온 후에야 저희가 고문당할 때가 6월항쟁의 피크였다는 것을 알았지요.


제 경우는 감옥생활을 통해서 성장하고 유식해지고 단련이 되었던 것같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80년대의 감옥은 그 자체가 운동의 거대한 훈련장이자 양성소였지요. 동지들을 만나는 사교의 공간이자 투쟁 연습장이기도 했구요... 제게는 참으로 소중한 경험이었고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7. 교육지표 사건 등에 관한 의미에 대하여 한 말씀 하신다면...


먼저 78년 4월의 함평고구마투쟁은 우리 운동사에 길이 남을만한 참으로 중요한 투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해방후에 우리 운동은 승리의 경험이 없습니다. 87년 대항쟁이후 최근에도 부안항쟁을 비롯하여 파병반대건 FTA 반대건 간에 큰 싸움은 있었지만 투쟁해서 이겨본 경험이 없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군사독재하에서 정권과 싸워서 기층운동이 승리를 쟁취한 경험은 그 전이나 그 후에도 거의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투쟁에서 배출된 인재들이 이후 우리나라 농민운동의 성장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나중에 카농 전국회장이 되시고 북에 갔다오신 서경원회장님이나 기농회장이 되신 노금노 총무님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전국적인 투쟁을 이끌고 있는 정광훈 민중연대 상임의장님이나 문경식 전농의장 역시 고구마투쟁이 배출한 인재들인 것입니다. (문경식 의장이 저하고 동갑인데 우연히 얘기하다가 사다리 데모를 같이 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함평고구마투쟁은 우리나라 농민운동만이 아니라 전체 운동사에서도 중대한 의미를 갖는 투쟁이라고 할 수 있고, 저는 이런 역사적 투쟁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을 큰 행운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5월에 있었던 동일방직투쟁에 연대하는 삐라투쟁은 비록 그 규모는 작았지만, 학생들이 반 유신과 같은 부르죠아 민주주의의 과제만이 아니라, 노동계급에 대한 연대를 표현했다는 점에서 서울 등에서 민주화를 촉구하는 선언문 운동 등과는 다른 투쟁이고, 현장이전과 노동운동의 본격적인 조직화로 운동이 전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광주의 학생운동사에서는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삐라 투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세미나팀으로 합류하고 나아가 교육지표투쟁의 조직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육지표사건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저는 세 가지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전남대는 74년말 학군단에서 유신 지지데모를 한 이후 한번도 데모를 한 적이 없습니다. 민청학련 사건이 전국의 쓸만한 학생 인자들을 초토화했기 때문에, 다시 성장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민청 선배들이 다시금 자기 위치를 추스르고 자생적으로 성장한 학생들이 선배들의 지도와 만나 조금씩 소규모의 학습써클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수님들의 선언에 뒤이어 곧바로 행동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학생들의 호응도는 폭발적이었지요. 그것은 두어달 전의 고구마 투쟁이나 삐라 투쟁이 조성한 분위기도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가 전국에서 처음으로 예정데모를 한 이후 그해 가을에는 서울 명동에서 처음으로 예고데모가 있었습니다. 즉 공공연하게 며칠날 몇시에 명동에서 반유신(긴급조치 반대)데모를 한다는 것을 예고를 하면 그 시각에 경찰과 학생이 침묵 속에서 뒤섞이는 상황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게릴라적인 구호가 선창되고 명동의 골목을 서로 쫒고 쫒기는 상징적인 저항 투쟁이 되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교육지표 투쟁이 5월 항쟁의 선행 학습이었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한번 부딪치고 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지점에서 해산이 되더라도 완강하게 다음 행동을 계속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80년 5.18때에 군대가 학교를 장악하고 정문을 봉쇄했을 때, 2년전과 동일한 상황에서 예정데모를 해봤던 경험이 그대로 반복되었던 것입니다. 유독 광주가 저항의 불씨를 키워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지방과는 달리 데모를 해본, 그것도 완강하고 끈질긴 데모라는 선행학습의 경험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데모를 준비하고 참여했던 수많은 인자들과 학습써클이나 야학팀과 같은 소써클과 광주라는 좁은 도시에서 상호간의 활성화된 네트웍, 그리고 이런 상황을 전반적으로 파악하고 리드할 수 있는 윤한봉 형을 중심으로 하는 네트웍(애석하게도 이강 형 등은 당시 감옥에 있었지요)이 있었기 때문에, 비록 자발적인 시민항쟁의 전부에 대한 지도력은 발휘하지 못했지만  윤상원. 박관현. 신영일 등의 들불 야학팀이 선전 선동작업은 물론 항쟁지도부에 적극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이전에 투쟁의 경험과 네트웍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면, 교육지표사건은 5월항쟁과 관련하여 10월 혁명의 예행연습으로서의 2월 혁명과 같은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처럼 모든 투쟁은 어느날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투쟁이 가능하기 위한 선행적인 훈련과 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점에서 교육지표 투쟁의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8. 교육지표사건 등과 관련하여 그것이 선생님께 준 의미라든지 기타 감회가 있으시다면....


징역을 한참 살고 나온 뒤에 가끔 저를 무슨 대단한 신념을 갖은 혁명가로 착각하여 존경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이 항상 부담스러웠는데, 분명히 말하지만, 감옥은 내보내주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오래 산거고, 초파일이나 크리스마스 때 행여나 특사라도 있을까바 혹시라도 꾸무럭거리면 석방이 안될까바 미리미리 짐 챙긴 적이 수없이 많았던 그냥 소시민이었습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당신은 왜 그때 그 자리에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그 때는 제가 아무 것도 모르면서 설치는, 그냥 농민가만 부르고 있어도 가슴에 벅차고 흐믓해지는, 뭔가 모르지만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을 하는 것같아서, 앞뒤 안가리고 뛰어드는 한마디로 단순한 사람이어서, 그냥 선배들이 끼워주고 시키는 일이 너무 체질에 맞아서 그런 거였다고 생각이 듭니다. 한마디로 저는 운동의 정의를 조금도 의심치 않으면서 존경하는 선배와 동지들과 함께 몸으로 때우는 일이라면 뭐든지 앞장서는 믿음직한 행동대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당신은 왜 아직도 인간해방을 외치며 이 자리에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동안제가 알게 된 진실이 너무 많아서, 그리고 이 야만의 자본의 시절에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눈감기는 제가 너무 마음이 여려서 지금도 이 자리에 서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직 인생을 회고하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이고, 기억도 잘 나지 않은데 두서없이 얘기하다 보니 제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도 많을 것같고 마치 제가 모든 일의 중심인냥 표현된 거 같아서 마음에 걸립니다. 어쨌거나 죽은 박기순동지에 대한 기억은 모두가 갖고 있겠지만, 저는 이 자리를 빌어서 박기순 동지야 말로 참으로 훌륭한 심성을 지닌 로자 룩셈부르크만큼이나 순순하고 고귀한 혁명적 열정의 화신이었다는 것을 밝히고 싶습니다. 저에게 깊은 동지애를 보여주었던 박기순 동지를 끝까지 지켜주지 못하고 함께하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도 마음에 빚으로 남아 있습니다. 동지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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