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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2004/11/03

  • 분류
    단상
  • 등록일
    2005/03/13 15:03
  • 수정일
    2005/03/13 15:03
  • 글쓴이
    서른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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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한겨레에 와다 하루끼의 글이 실렸다. 최근 공개된 소련의 자료속에서 코민테른과 한국전쟁 등의 자료를 뒤지다가 스탈린과 김일성, 박헌영의 대담록을 확인했다는 글이었다.

1952년 김일성은 정전을 원했고 박헌영은 전쟁을 계속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까닭은 나와 있지는 않지만 남노당이 기반인 박헌영으로서는 자기의 정치적인 기반의 몰락을 의미하는 정전을 원하지 않했을 것이다. 이 때에 중요한 것은 판단의 기준이 남북의 민중의 삶이 아니라 자기의 입지였다는 점이다.

그가 후에 미제의 간첩으로 몰려 숙청을 당한 사건에 대해서는 증거가 명백했다고 우기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 또한 스탈린이 사용했던 정적을 제거하는 더러운 방법의 희생양이었을 것으로 생각은 된다.

 

유명한 진보적 학자였던 김대환이나 노동운동가였던 김문수가 변절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말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변절했다고 보지 않는다. 조국과 민족, 혹은 민중과 운동을 위해서 차선 혹은 차악의 선택이었다고 강변하는 그들의 말을 믿어서가 아니다. 나는 그들이 항상 운동보다는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의 그릇에 따라서 일찍 드러나기도 하고 늦게 드러나는 차이는 있겠지만, 박헌영이 조선의 민중보다 자신의 입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 역시 항상 자기를 먼저 생각하면서 운동을 위해 산다고 대중과 자신을 기만하고 살아온 것 뿐이다. 이건 고문에 못이겨 어쩔 수 없이 동지를 분 것하고는 다르다.

 

 

한 2-3년 전에 꽤나 유명한 지금은 민노당의 최고간부이기도 한 어떤 운동가를 만난 적이 있다. 여러 얘기 끝에 나보고 부위원장도 시켜줄 테니까 자기 지역구에 와서 같이 일하자고 한다. 이 얘기 속에 그가 그 지구당을 자기 사유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가끔 어떤 지구당이나 운동단체가 (보수당은 물론이고) 봉건영주들의 당이나 운동체라고 느낄 때가 있다.

모두의 운동, 함께하는 운동이 아니라 지도부 몇사람이 좌지우지하는 혹은 끼리끼리 음모가적으로 작당질하는 운동, 이런 모든 것들이 모두를 위하고 민중을 위하고 운동을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 실은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운동 혹은 자기 소그룹이나 종파, 당파를 중심에 두는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고, 나는 그 속에서 해방되지 못한 인격 즉 소외된 인격을 본다.

 

이들과 대중의 차이는 무었일까? 대중들 역시 자기를 앞세우고 자기를 먼저 생각하지만 최소한 자기나 남에게 자기 행동이 남이나 민중을 위한 행동이라고 기만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착한 사람은 어려운 사람 보면 도울 줄도 알고, 나눠 먹을 줄도 안다는 것이다.

 

보수신문을 보면 여야의 정쟁과 정책이 나오고 배경설명이 나온다. 수도이전이 충청권 표심을 위한 것이었다는 둥, 이명박이나 이해찬이 대권을 염두에 두고 그런 행동을 했다는 둥, 한마디로 정치가 한 개인을 중심에 두거나 한 정당의 당리당략적인 관점에서 보기를 강요한다. 아니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 진보와 운동을 얘기하는 사람들도 이런 사고에 물들었을지도 모른다. 싸우다가 닮는다고 했으니까..

 

자기를 앞세우는 것,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 것, 자기중심 혹은 자기가 속한 그룹이나 조직이나 당파를 먼저 생각하는 것, 바로 그것이 병이다. 어떤 운동체나 조직이 자기 것이라는 생각, 혹은 자기의 공적과 기여, 자기 몫이 있다는 생각, 조직의 대의보다는 자기 입지나 위치를 앞세우는 생각, 이런 모든 것들이 병이다.

 

결국 운동 역시 자기를 버리는 것부터 시작한다. 불교에서는 아집을 버리는 것, 내가 있다는 생각, 내가 잘났다는 생각, 내가 공이 있다는 생각, 이런 생각들을 버리라고 한다. 제법무아諸法無我(모든 진리는 나라는 게 없는 것이다)나 무주상보시 無住相布施(나도 없고 남도 없고 주었다는 생각도 없이 베풀어라) 등이 그런 삶을 표현하고 있다.

 

어찌됐건 운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도덕뿐만 아니라 엄청 높은 수양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내게 누가 책을 권하라고 한다면 나는 금강경과 최인호의 길없는 길을 권하고 싶다. 금강경은 모든 것을 다 버리라는 혹은 진리에는 내가 없다는 것과 세상에는 집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달마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와서 양나라(수나라 다음 왕국)의 무제를 만났다. 양무제가 불심이 깊어 많은 탑과 절을 지었기에 자신의 불심과 공덕을 자랑할 만 하였다. 양무제 왈 ‘스님 저의 공덕이 어떠합니까?’ 달마 왈 ‘무(없다)’

제왕의 심기를 건드린 달마가 신변의 위험을 피하고자 소림의 깊은 동굴에 가서 9년동안이나 면벽하였다는 얘기는 잘 알려져 있는 얘기다. 물질적인 것, 내가 뭔가를 했다는 것, 그런 모든 것이 참된 가치는 없다는 게 불교의 핵심이기도 하다.

 

경허스님은 구한말의 한국불교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로마교황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던 그가 어느날 제자 만공에게 ‘자 이제 떠나자’고 말했다. 교황과 맞먹는 대선사라는 지위도, 심지어 깨달음의 세계도 집착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니 다 버리고 가자는 뜻이다.

경허는 혼자서 시골촌부로 꾸미고 북만주의 어느 시골농가에서 훈장일을 하면서 밥을 얻어 먹고 살다가 입적하였다. 원효가 무애 無碍(걸림이 없다)가를 불렀다지만 제대로 된 무애는 경허가 실천했을 것이다.

 

제대로 된 운동가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다 헌신한 성직자의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 버렸다는 생각과 헌신했다는 생각까지 다 버려야 제대로 된 경지다.
나는 언제쯤이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 수 있을까? 과연 그런 날이 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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