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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에서 만났던 어느 아나키스트 여성동지

  • 분류
    단상
  • 등록일
    2005/03/13 15:00
  • 수정일
    2005/03/13 15:00
  • 글쓴이
    서른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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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9월, WTO각료회의가 열렸던 캐러비안 해안에서 유명한 휴양도시, 멕시코 캔쿤. 특히 농업시장의 개방과 지적재산권협상, 그리고 의료와 교육시장의 개방이 주요 이슈였다. 대형 할인점이 들어오면 동네 구멍가게나 웬만한 수퍼마켓은 줄줄이 도산하지 않던가? 한줌의 강자를 위해 수많은 낙오자가 생기고 경쟁력과 합리화를 위해서 낙오자들은 숨을 죽여야 된다.

 

이름하여 개방의 논리. 신자유주의 세계화. 농업시장의 개방으로 공동체를 이루고 밥이라도 먹고 살았던 농민들이 토지를 잃고 도시빈민이 되어간다. 그래도 안되면 이주노동자가 되고. .. 일제하 조선의 농민들의 삶이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고, 멕시코, 브라질, 인도, 필리핀 등 수많은 제3세계의 농민들이 오늘도 그들의 삶의 터전에서 쫒겨나고 있다. 공정한 경쟁과 합리화를 위해서.

 

의료와 교육시장이 개방되면 경쟁을 통해서 질좋은 서비스가 제공되고 소비자들의 선택의 자유를 주는 대신에, 없는 놈은 치료비가 비싸 병원에도 갈 수 없고, 없는 집 자식은 공정한 교육을 받을 기회를 잃게 된다. 결국 소수의 귀족같은 삶은 위해 절대다수를 낙오시키는 것, 그것이 개방과 경쟁의 논리다.

 

이런 까닭에 작년 9월의 캔쿤은 제국주의 독점자본과 제3세계 민중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된 전세계적인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장이었다.

 

이경해 열사가 자결하기 전날이었던가 당일이었던가 정확하지는 않다. 경찰의 바리케이트는 꼼짝도 않고 도무지 투쟁의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다. 그 때에 뒤에서 전갈이 왔다. 전면을 맡고 있는 한국친구들(전농이 대오의 전면에 있었다.)은 뒤로 빠져라. 자기들이 나서겠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수십명의 블랙 전사들이 쇠파이프를 들고 바리케이트를 공격한다.

 

30도를 훨씬 넘는 찜통 더위 속에 블랙 전사들! 검은 바지, 검은 옷, 모자, 마스크, 쇠파이프 등, 어느 것 하나 검지 않은 게 없다. 노동자대회 때의 사수대의 모습과 비슷하다. 내게는 더할 수 없이 늠름하고 믿음직스러운 전사들로 보였다. 아나키스트들을 만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런데... 미국과 유럽에서 온 활동가들은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 듯 하였다. 싸움의 돌파구가 보이지 않을 때, 누군가가 앞장서서 부딛혀줬으면 하고 바라면서도, 앞장서서 싸우는 사람들을 고마워하지 않는다.

 

여하간 그 친구들이 되게 맘에 들었는데, 당일 투쟁이 정돈된 다음, 우연히 그들 중 하나의 그룹과 만나게 되었다. 5명으로 된 그룹의 리더는 30대 초반의 그렛나룻이고 다른 친구들은 20대 후반의 청년들, 그런데 그중에 키도 조그마한 20살도 안되보이는여성동지가 쇠파이프를 들고 있었다. 호기심이 갈 수 밖에..

 

통성명을 하고 서로에 대해 묻는다. 보안때문에 5명이하의 소그룹으로 움직이고 소그룹끼리는 아주 느슨하게 연대를 한단다. 그런데 이 여성동지 어깨의 문신이 희한하다. 주역에 나오는 풍택중부라는 쾌를 새겼다. 자연히 얘기는 주역부터 시작해서 동양고전과 불교까지 걸친다. 얘기가 한참 재밌게 되가는데 조직원들이 움직이니까 아쉬어 하며 헤어졌다.

 

다음날 농성장에 앉자 있는데 이 여성동지가 토론을 하자며 찾아왔다. 나이가 스물하나라는 것, 다른 조직원들은 다 대학교육을 받았는데 자기는 미국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 가출하여 떠돌다가 아나키스트 그룹에 들어갔다는 것, 가출한지 5년째라는 것..

 

아나키즘은 맑시즘과 함께 세계좌파운동의 두 축이라 할 수 있다. 맑시즘이 국가는 혁명후 서서히 소멸해간다고 얘기할 때, 그들은 아예 국가권력자체를 부정한다.

한국의 좌파운동은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적인 전통이 강해서 아나키즘은 언급할 가치도 없을 만큼 이상한 운동으로 규정되어 왔고 나 또한 그런 인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지라, 그 아가씨가 마치 정상적인 불교도 아닌 남묘호랑개교 혹은 조용기나 박태선의 사교에 빠져있는, 한마디로 구제해야하는 안타까운 존재로 보였다.

 

그래서 어떻게해서든 토론을 통해서 그 삿된 의식과 이론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었고, 또 무었보다도 자본주의와 소시민 의식에 절어있는 나로서는, 학벌도 없이 밑바닥을 박박기는 그 여성동지의 삶이 영 안타까운 것이었다. 꽃다운 나이에 쇠파이프가 아니라 우리회사 여직원처럼 하이힐도 신고 제또래 얘들처럼 멋도 부리면서 밝게 사는 것과는 정 반대의 코스다.

 

그래서 투쟁지도부에서 만든 반 WTO 투쟁에 관한 리플렛을 보여 주면서 이런 걸 읽어 봣느냐고 물었더니 다 읽어 봤단다. 맑스고전을 읽어 봤느냐고 했더니 한 술 더 떠서 맑시즘을 비판하고 아나키즘을 찬미한 촘스키 등의 글을 읽어 봣느냐고 되묻는다.

 

자신들은 토지없는 농민들과 자율공동체를 건설하고, 그들과 함께 일하고 그들을 위해 살고 항상 학습을 한다고 한다.

돈 많은게 부럽지 않느냐고 했더니 자신들은 돈도 없지만 또 필요도 없단다. 왜냐? 돈이 있으면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다 나눠 줄거니까...

 

바리케이트를 뚫고 WTO협상이 무산되었다는 승전보가 날라온 그날 밤, 힘든 싸움끝에 이겼다고 생각하자 모두들 배가 고픔을 느끼고 있는데, 누군가가 봉고차에 가득 음식을 실고와서 2000명이 넘는 대오에게 배식을 한다. 얻어 먹을려고 가까이 가보니 이 여성동지를 포함한 몇몇 아나키스트 그룹들이 배식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 자기들이 노동을 해서 모은 돈으로 장만을 했단다.

 

현지사정에 어두웠던 한국팀은 호텔에서 지냈고, 외국에서 온 활동가들은 임대로가 싼 다운타운의 방을 얻어서 생활했는데, 이 친구들은 빈민굴에서 바닥에 거적대기만 깔고 함께 지내고 있다고 한다.

 

좌우간 악착같이 부를 챙기고 축적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사고방식이었다. 소유하지 않고 갖지 않는다는 것,  맨 밑바닥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조금이라도 생기면 나눈다는 것.이것이 부처가 얘기한 혹은 스님들이나 신부님들의 무소유의 삶이 아닌가.

 

하기는 불교도 모든 권위를 부정한다. 제법무아 (諸法無我) 내가 없으니 나와 상대되는 모든 것이 없다. 그러니 약견제상 若見諸相 비상 非相 즉견여래 卽見如來라, 존재하는 모든 외양적인 것(appearance)에 걸리지 않으면 진리를 본다는 것은, 모든 외적인 존재와 권위를 부정할 때 진리를 본다는 것으로, 돈이나 권력이나 편안함이나 일체의 애증을 넘어선 그 세계가 자기를 버리고 갖지 않은 것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당연한 진리일 수 밖에.. 그러나 그것을 승려나 신부가 아닌 속인이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들의 주장이나 사상이 나와 다른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찌됐건 그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세상을 건설하기 위하여  모든 속물적 삶을 버리고 실천하고 있지 않은가? 투쟁이 끝날 무렵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서로의 삶을 존경하는...

 

보도진을 가장하고 회의장을 잠입하여 기습시위를 벌였던 미국친구들의 초청을 받아 축하파티에 참가하였다. 파티가 열린 다운타운의 광장에는 300명 가까운 각국의 활동가들이 락과 디스코로 모처럼 기분을  내는 자리였다. 그들과 헤어져 혼자 돌아오던 길에 왠 빌라같은 집인데 철문을 걸어 잠그고 50 여명의 청춘남녀들이 디스코 파티를 하고 있었다. 들여다보니 경찰의 습격을 경계하며 따로 파티를 하는 팀은 아나키스트들이었다.

 

가장 열심히 그리고 헌신적으로 싸우던 그들과 다른 활동가들의 사이에는 커다란 장벽이 있었던 것이다. 사색당파부터 시작하여 우리들은 대의로 뭉치기 보다는 선배, 후배, 자기 조직을 따지면서 파벌을 만들고 종파질하는데 익숙하다. 우리가 만약 진정으로 인류의 이상을 위해 싸우고 헌신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공동의 적앞에서 서로 다르다고 편을 가를 것이 아니라 서로 존중하고 뭉쳐야 한다.

 

헤어질 때 그 여성동지의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우리는 자본주의에 대해 분노하고 있어요! (We are angry at capitalism!)

 

당신은 이 불합리한 사회의 모순에 분노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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