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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아랍민중혁명-튀니지, 이집트, 리비아를 중심으로

이 글은 진보전략 준비호(타흐리르 출판사)에 실린 글이다.

책소개는 ->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category2=175&nid=65091 (참세상)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681640X (알라딘)

 

 

2011년 아랍민중항쟁의 분석과 평가

-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를 중심으로

 

박석삼┊진보전략회의

 

 

들어가며

 

2010년 말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민중들의 항쟁은 북아프리카에서 중동을 포함한 전 아랍세계로 일파만파 번져갔다. 돌이켜 보면 2008년 시작된 세계 경제위기는 2009년과 2010년 재정위기에 직면한 남부 유럽의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에서 노동자계급의 저항을 야기하였고, 자본의 일자리와 연금개악 등의 복지축소 공격에 저항하는 프랑스 노동자계급의 거센 저항이 있었다. 특히 2011년에는 ‘아랍의 봄’만이 아니라, 구조조정과 복지개악에 반발하는 ‘유럽의 여름’, 주로 높은 등록금에 반대한 ‘남미의 가을’, 1%의 금융자본의 탐욕에 반대하는 99%의 점거운동으로 나타난 ‘북미의 겨울’이란 말처럼, 전 대륙적, 전 지구적 투쟁이 전개되었다. 이것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체제가 한계에 달해 독점자본가들의 위기와 손실의 사회화와 타국화 시도에 대해 전 세계 민중들이 반발하는 모습이다. 결국 2011년 아랍민중혁명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축적체제’가 강요한 고통과 세계경제의 위기가 심화되는 가운데, 억압이 가장 극심한 아랍 국가들의 민중들이 자본과 지배계급의 위기전가로 인한 고통을 가장 많이 받은 나라에서, 그리고 체제의 재생산이 위기에 처한 세계자본주의의 가장 약한 고리에서 폭발한 것이다. 이 의미에서 아랍민중들의 항쟁은 세계자본주의가 강요하는 경제적 질서에 대한 범대륙적인 도전임과 동시에, 이 지역에 강요되는 정치적, 군사적 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발전할 수 있는 세계사적 의미가 있는 투쟁이었다.

야만 그 자체인 자본주의 체제가 강요하는 고통에 괴로워하면서도 대안을 찾지 못한 채로 순응과 체념을 강요당했던 전 세계 민중에게 아랍민중들은 학살을 불사하는 무자비하고 야만적인 공권력에 맞서 21세기에 가능한 혁명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

이 글의 목적은 첫째 똑같은 신자유주의와 경제위기가 강요하는 고통을 받으면서도 왜 아랍지역에서는 혁명적 투쟁으로 발전하였는지, 그들이 도전하였던 낡은 질서는 무엇인지에 대하여 알아보는 것이다. 둘째는 아랍민중은 어떻게 하여 지독한 장기독재를 끝장내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는지를 전략과 전술의 차원에서 검토하는 것이다. 현대 국가의 군사력과 경찰력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최루탄과 곤봉, 납치와 투옥, 고문과 살인 등 온갖 야만적인 폭력과 억압에 시달리고 있는 전 세계 민중들의 절실한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이들 아랍민중의 혁명을 제국주의자들과 군부를 비롯한 낡은 지배계급들이 그들 계급의 이해를 관철하기 위하여 어떻게 책동하고 있으며, 강온 이슬람주의 세력을 비롯한 중간계급과 민중 간의 투쟁이 어떠한 계급모순을 축으로 어떻게 진행되고 있으며, 어떻게 전개되어야 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등 북아프리카 3국의 민중들이 혁명적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배경과, 전개과정과 양상, 투쟁의 결과로 도달한 새로운 질서, 의의와 과제 등을 분석하여 이들 혁명에 대한 인식을 깊게 하고 유의미한 함의를 찾고자 한다. 

 

제1장 혁명의 배경

 

2010년 말 튀니지에서 시작된 민중들의 항쟁은 알제리, 수단, 오만, 이집트, 리비아, 바레인, 예멘, 요르단, 이란 등 전 아랍세계로 번져 나갔다. 이들 항쟁은 같은 처지에 있는 민중들이 이웃나라 민중의 투쟁과 승리에 고무되어 서로를 고무하면서 확산되고 상승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랍민중이 항쟁에 나선 이유는 무엇이며 왜 2011년이란 시점에서 항쟁에 나선 것인가? 혹자는 그 주된 이유로 2008년에 시작된 세계경제의 위기를 말한다. 그러나 똑같은 경제위기이고 혹은 아랍국가들이 더 심각한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하여도 유럽을 비롯한 다른 대륙과는 달리 유독 아랍지역에서만 폭발적인 혁명투쟁의 양상을 보인 것은 아랍국가들만이 갖고 있는 정치적, 사회적 특수성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1. 세속적이고 민족주의적인 후견독재의 성립

1952년 냉전이 한창일 때 나세르가 이끄는 자유장교단은 쿠데타를 일으켜 친영 이집트왕조를 무너뜨렸다. 나세르 체제는 냉전 시기 사회주의국가들이 이룩한 성과와 식민지나 반식민지 보호국에서 해방된 민중의 열망에 부응하여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와 토지재분배에서 보듯 반제 반봉건 자주국가를 주창하고, 종교적 근본주의라는 봉건적 억압을 타파하는 세속주의, 그리고 교육, 의료, 생필품 보조, 일자리 등에 대한 국가의 공적부조를 통치의 정당성으로 삼으면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억압하고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을 추구하는 ‘세속적이고 민족주의적인 후견독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나세르의 혁명은 많든 적든 전 아랍세계에 영향을 끼쳤고, 이에 따라 값싼 혹은 무료의 교육과 의료 그리고 생필품 보조와 일자리 주선을 하고 있는 튀니지나 리비아가 높은 교육수준과 낮은 영아 사망률을 자랑하게 된 것이다.*1 특히 1969년 친영 이드리스 왕조를 쿠데타로 무너뜨린 카다피는 ‘이슬람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영국군과 미군을 철수시키고 석유기업의 지분을 50%에서 79%로 끌어올렸다. 또한 금융, 보험, 무역 등을 국유화하고, 유휴토지와 이탈리안인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촌장들의 토지확장을 금지하고 토지를 재분배하였다. 1970년대에는 고유가 덕분으로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를 제공하고, 대학교육과 주택에 융자정책을 폈다. 1981년에는 경제제제로 인한 어려움이 가중되자 소매업을 금지하고 국가가 관리하는 슈퍼마켓에서 생필품을 저가로 공급하기도 하였다.**2

따라서 이들 국가의 통치의 정당성은 반제민족자주와 공적 후견과 세속주의에서 찾을 수 있는데, 뒤에서 보듯 이들 국가는 친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추진하면서 세속주의 이외에는 정당성이 상실 또는 훼손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시기는 2차 대전 이전 제국주의에 의해 강요된 반식민지 하의 친제 이슬람주의 지배계급을 몰아낸 반제 세속주의의 승리와, 냉전시기에 강요된 제국주의의 군사적, 정치적 질서로부터 북아프리카 지역의 이탈을 의미하는 시기였고, 제국주의 중심부가 강요하는 경제적 질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국가주도의 경제개발을 추진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2. 권위주의 국가의 고착과 부패

세속적이고 민족주의적인 후견독재로 출발한 이들 국가들은 국가주도의 경제발전을 추구하는 한편 체제의 위협이 되는 기층운동과 이슬람주의자들을 철저하게 억압하였다.

튀니지의 경우 1957년부터 권좌에 있었던 부르기바를 밀어내고 권력을 잡은 벤 알리는 1989년 합법적 선거 후, 90년대의 시작과 함께 이웃 알제리 내전에서 드러난 이슬람주의의 정치적 영향의 위험을 보면서 어려운 경제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이슬람주의 운동을 막아야 했다. 벤 알리는 알나흐다당Al-Nahda party을 포함한 10,000명 이상의 이슬람주의자들을 감옥에 보냈다. 정부에 대한 사소한 비판이나 불평도 이슬람주의자들을 돕고 선동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벤 알리는 국가기구와 집권당을 구분하지 않았고, 집권당인 RCD(Rally for Constitutional Democracy 입헌민주연합)는 국가였고, 국가는 벤 알리에게 봉사했다. 국가가 정한 모호한 기준의 금지를 넘는 어떤 기사도 실릴 수 없었다. 기업가들도 대통령에게 충분한 충성을 보이지 않으면 허가를 얻을 수 없었다. 제복경찰과 사복경찰은 체제의 수호자가 되었고, 대통령과 내무부 장관의 지휘 하에 움직였다. 9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이슬람주의자들이 제거되고 어떠한 반대도 조직하지 못한 채 지하화되자, 인권활동가와 언론인들이 목소리를 높였고, 사복경찰들의 폭력이나 마구잡이 연행과 고문이 회자되었다.***3

한편 이집트의 경우는 사다트가 시작했던 인피다(개방)정책에 대한 분노가 1977년 1월 식량 가격 인상을 계기로 폭발했다. 사람들이 카이로 중심가를 점거했지만 사다트는 가까스로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사다트는 좌파, 노조원, 자유주의자, 무슬림형제단 등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1981년 이슬람주의자들이 사다트를 암살하자, 당시 부통령이었던 무바라크는 사다트를 이어 대통령이 됐다. 그는 사다트의 경제 정책과 탄압 정책을 계승했고, 통치 기간 내내 비상조치법의 적용을 해제하지 않았다. 이슬람주의자 수백 명이 군사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보안경찰은 정치 활동가 수만 명을 잡아 가두고 고문했다. 1989년에는 철강 공장 노동자 파업을 진압하려고 탱크를 공장에 보내기도 했다.****4 무바라크의 경찰은 악랄하였다. 2010년 선거는 심하게 조작되었고, 집권여당인 NDP는 97%의 의석을 얻었다. 2010년 선거는 2011년 무바라크(82세)의 아들 가말에게 권력 승계를 보장하기 위한 사전작업이었다. 권력승계에 대해 야당만이 아니라 권력 내부의 군대와 관료들도 회의적이었다.*****5 이처럼 무바라크는 31년간에 걸친 집권 동안 체제에 대한 반대를 용납하지 않았고 사복경찰의 납치와 고문은 일상사였다.

그러나 가장 가혹한 체제는 리비아였다. 카다피는 “의회란 인민의 잘못된 대의이고, 의회적 정부란 민주주의 문제에 대한 잘못된 해결이다. 의회의 구성원은 인민이 아니라 그들의 당을 대변한다. 그러한 제도 하에서 인민은 희생자들이고, 정치체에 의하여 기만당하고 착취당한다. 대의제도는 사기다”*6라고 주장하면서 혁명의 원리에 반대하는 어떤 정치적 집단의 활동도 반역으로 처벌될 수 있는 1972년의 법률 제71호의 효력을 유지하면서 1977년 국가를 자마히리야(대중의 공동체 혹은 국가) 체제로 바꾸었다. 자마히리야 체제를 살펴보면,

 

  “중앙에는 전국인민총회General People’s Congress(의회) 그리고 그에 의해 선출되고 그 결정을 집행하는 전국인민위원회General People’s Committee(내각)가 있고, 지역에는 모든 리비아 시민들이 정치적인 사안에 대하여 토론하고 투표하기 위한 포럼으로 기능한다는 기초인민회의Basic People’s Congresses가 있다. … 자마히리야 체제는 빈사상태에 있었는데, 예를 들어 2011년에는 유니스 기초인민회의의 연례회의에는 두 사람이 참석했고, 카라와르샤 연례회의에는 몇 사람만 참석했다. 이러한 양상은 전국적으로 비슷했다. … 각 인민위원회는 서기국이 있고 거수로 선출되지만, 이러한 서기국은 일반적으로 보통 ‘혁명위원회운동’의 회원들인 체제의 충성파들의 영역이다. 혁명위원회운동은 리비아인들의 생활의 모든 부분에 침투한 준법률적인 집단이다. 리비아는 샤비앗(Shabiat 행정영역)으로 나뉘어 있고, 각각은 지역행정에 책임지는 행정위원회governing council가 있다. 이 위원회들 또한 거의 체제 충성파들의 영역이 되어 왔다. 게다가 가장 높은 단계까지의 모든 기구에 감시조직이 달려 있다. 이러한 감시조직은 혁명위원회의 구성원들이 실무를 맡고 있고,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체제를 지배해 온 관료층과 비효율성을 추가하고 있을 뿐이다.”**7

 

이처럼 카다피의 자마히리야 체제가 대의 민주주의의 허구성을 부정하고 모든 시민의 직접 참여를 기반으로 지방과 중앙의 의회와 그에 의해 선출되는 내각 혹은 서기국을 구성하는 것은 파리코뮌에서 보듯 의결과 집행의 통일체라는 직접민주주의의 이상을 추구하는 체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운용에 있어서는 혁명위원회운동의 구성원들이 요직과 권한을 독점함으로써 인민의 참여를 허구화하고 모든 시민을 무권리 상태로 소외시켰다. 결국 카다피가 만든 자마히리야 체제는 모든 대의제도와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모든 권력을 집중한 카다피 1인을 위한 체제였고, 그에게 줄을 서는 혁명위원회에 소속된 충성파들이 권력을 휘두르는 체제였던 것이다. 이번 리비아 항쟁에서 정보경찰인 국내안전부ISA:Internal Secury Agency와 혁명위원회 건물이 가장 먼저 타겟이 된 것은 이들에 대한 원성이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다. 카다피는 체제에 대한 사소한 저항도 용납하지 않았고 체제의 위협이 될 이슬람주의자들에게 가혹했다. 1996년에는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이슬람주의자 수감자들을 1,200명이나 학살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 국가의 집권층의 부패는 참으로 심각하였고 성장의 열매는 소수에게만 집중되었다. 무바라크와 그 가족들은 400억 달러에서 700억 달러의 재산을 모았고, 무바라크의 아들 가말과 가까운 39대 관료와 사업가들은 10억 달러 이상을 모았다. 벤 알리와 그의 가족은 지난 20년 동안 호텔, 은행, 참치 수출, 건설, 신문, 제약회사 등 수많은 회사와 공장을 통해서 부를 축적했다.***8 벤 알리의 처인 트라벨시는 튀니지를 탈출할 때 5,000만 달러 상당의 금괴(1.5톤)를 가지고 달아났을 정도로 벤 알리 일족의 부패는 광범한 분노를 샀다. 그리고 석유산업과 각종 이권에 관여하는 카다피 일가의 재산은 1,500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카다피 일가는 해외 부동산과 기업에 공개적으로 투자했고, 한때 식민모국이었던 이탈리아의 정유회사와 통신사 등에 지분을 갖고 있었다.****9

이처럼 권력의 독점과 지독한 부패, 성장 과실의 소수에의 집중과 다수의 배제 역시 이번 항쟁의 한 원인이었다.

 

3. 신자유주의와 경제위기가 강요한 민중들의 고통

1950년대와 60년대에 자본주의 세계체제 혹은 제국주의 세계체제가 강요하는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질서를 거부하고 성립한 이들 3국은 1970년대부터 90년대에 걸쳐 ‘신자유주의 세계화 축적체제’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아랍민중들이 항쟁에 나선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지난 30년간에 걸친 신자유주의적인 배제와 수탈과 억압이 있었다.

튀니지의 벤 알리는 취임 이후 사적 투자를 유치하는 시장지향개혁으로 마그레브(북아프리카 지역)에서 가장 건강한 경제라는 평판을 받았고, GDP 성장률은 연간 5%에 달했다. 튀니지의 경제활동은 식민지 시절부터 북부와 동부에 집중되었지만, 1956년 독립 이래 경제계획은 중부와 남부, 서부에 일자리를 창출하고 생활수준을 높이는 데 맞춰졌다. 정부투자는 식수, 전기, 교통, 의료, 교육에 대한 용이한 접근이라는 점에서 시골지역을 변모시켰다. 그러나 정부는 급격한 인구증가 때문에 내륙지방에서 충분한 일자리를 만드는 데 성공할 수 없었다. 튀니지의 개발전략은 70년대 초반부터 수출과 사적투자에 의존하고 있었고, 빈약한 자원과 유럽과의 근접성은 관광과 유럽시장을 위한 저숙련 제조업 생산(의류와 농산물 생산)에 대한 강조로 이어졌고, 운송비용을 최소화할 필요성 때문에 상대적으로 많은 관광객이나 수출업자를 내륙으로 끌어당길 수 없었다. 국내 생산의 80%가 해안지방에 집중되었고, 나머지 20%가 인구의 40%가 사는 중서부와 남서부에서 이루어졌다. 교육에 대한 문화적 배경은 대학교육을 중시했지만, 대학교육은 관광과 의류제조 등 저숙련 기술에 의존하는 경제에 필요한 사람들을 생산하지는 않았다. 튀니지의 실업률은 13-16%였고 특히 내륙지방인 시디 부지드의 실업률은 25-30%에 달했다.*****10

한편 이집트는 1970년대 초부터 국가주도의 경제발전이 한계에 부딪히자 막대한 부채와 고물가, 고유가 등 경제위기에 처했다. 1970년 나세르가 죽자 권력을 이어받은 사다트는 사적 투자를 촉진하는 여러 조치와 사유화 등 개방정책(인피다)과 이스라엘과의 화해를 추진하였다. 1981년 사다트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은 무바라크는 90년대 초반 감당할 수 없는 외채수준 때문에 세계은행과 경제개혁에 관한 협정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20년간 이집트 정부는 사회적 프로그램에 대한 지출을 삭감하고 무역과 상품가격, 이자율을 자유화하고, 오랫동안 시행되어 온 대졸자에 대한 정부고용을 보류하고, 수많은 공공부문 회사를 사유화하고, 많은 상품에 대한 보조금을 보류하는 일련의 구조조정 정책을 시행하였다. 국가 지출이 감소하자 교육, 의료, 교통을 포함하는 사회서비스에 대한 공적 지출이 정체되고 이들 서비스의 질이 악화되었다. 공장 노동자들, 무토지 농민들 그리고 수출이 아닌 내수시장을 위한 상품을 생산하는 사람들이 가장 큰 고통을 받았다. 그들은 정부의 서비스와 보조금 그리고 시장보호에 의존하였기에, 그들의 고통을 ‘경제자유화’의 결과로 보았다.*11

그리고 석유수입이 수출의 95%, 정부수입의 75%, GDP의 50%를 차지하는 극단적인 석유의존경제인 리비아는 80년대 이후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제제**12와 유가 하락으로 1인당 GDP가 42%로 축소되었다. 카다피는 1990년대 이후 서방과의 관계개선을 모색했다. 2000년 카다피는 “리비아는 단지 리비아의 이익만이 아니라 유럽에게 리비아가 관문이 되고 있는 전 아프리카 대륙을 위해서 외국자본의 투자와 참여를 고무하길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투자를 위한 적절한 환경을 조성할 것입니다”라고 선언하였다.***13 2003년엔 대량살상무기 포기 선언을 했고, 40년 만에 석유채굴권 공개입찰에 다국적 기업들도 참여하도록 허용했다. 사실 이런 경제개방 정책은 이미 1990년대에 시작됐다. 공기업 특혜폐지와 사기업화, 외국인 투자유치 강화를 위한 법 개정, WTO 가입 등을 추진했다. 반대로 경제개방 정책 속에 리비아 민중의 삶은 악화됐다. 1990년대부터 카다피 정권은 공공지출을 크게 줄였고, 보조금 제도와 실업수당을 폐지했다. 게다가 IMF 권고를 받아들인 결과 허약해진 통화 때문에 인플레이션마저 발생해 노동자들은 실질임금의 하락으로 고통받았다.****14

 

이처럼 리비아의 경우는 1980년대와 90년대에 경제제제라는 고통에서 벗어날 필요도 있었지만, 3국 모두 최근 20-30년 동안 사적투자와 시장을 개방하면서 충분한 일자리를 만들어내지 못한 채 사회적 안정망을 해체하여 민중들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다음은 이를 뒷받침하는 여러 보고들이다.

 

  아랍국가에서는 인구의 절반이상이 30세 이하이고 15-29세 사이의 인구가 1/3 이상이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중동은 교육수준이 가장 빠르게 증가하고 청년실업률(25%, 세계 평균은 14.4%)이 가장 높다. 청년실업률은 학력이 높을수록 높다. 2006년 이집트에서는 고졸 이상 청년의 95%가 실업자였다. 일자리가 있는 사람들도 낮은 임금과 나쁜 환경에서 일한다. 높은 실업과 낮은 임금은 많은 이집트 청년들이 결혼이나 가정을 꾸리는 것을 막았다. 25-29세 사이의 절반 이상이 싱글이다.*****15

  리비아 시민의 20.74%가 실직 상태이고, 약 3분의 1이 빈곤선 이하에서 살고 있다. 안정적 수입을 얻는 가족이 한 사람도 없는 가구가 16% 이상이고, 43.3%는 오직 한 사람만 소득이 있다.*16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축적체제, 즉 ‘인피다’로 상징되는 개방정책과 IMF 등이 강요한 신자유주의적 개방과 구조조정은 지난 30년간 아랍민중들을 만성적인 빈곤과 실업에 빠뜨렸다. 여기에 2008년 세계대공황과 식량가격 등의 폭등, 선진국 시장과 일자리의 축소는 고통을 배가시켰다.**17 결국 세계 대공황은 자본주의 재생산 체제가 취약한 혹은 고통을 감당할 힘이 가장 취약한 곳인 아랍세계에서 폭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튀니지나 이집트 등은 관광업과 수출경제에 의존하는 국가였기 때문에 세계경제위기에 취약하였다. 이것이 IMF가 강요한 신자유주의의 모범생 국가들이 맞을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 3국은 모두 정보경찰에 의존하여 고문과 납치와 살인도 불사하는 가혹한 권위주의 독재국가였다. 이들 나라의 정권들은 노동운동이나 정치적 반대운동을 억압하고 특히 체제의 위협이 될 이슬람주의자들을 철저히 탄압하였다. 탄압의 이유가 독재자의 장기집권을 위한 것이었든 혹은 개방정책(즉 신자유주의 세계화정책)으로 인해 고통받는 민중의 저항에 대한 필연적인 탄압이었든 간에 이들 정권이 그토록 장기집권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최소한의 삶을 지탱해주는 후견(복지)제도의 영향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한 후견제도의 형해화와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보듯 이들 정권의 친미(서방) 친이스라엘 정책 즉 제국주의가 강요하는 군사적, 정치적 질서로의 편입, 동조 또는 야합은 ‘반미’와 ‘박애’(혹은 자선charity)를 앞세운 이슬람주의자들이 성장하는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3국은 극심한 정치적인 억압과 신자유주의와 경제위기가 강요하는 고통의 크기에 있어서 세계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아랍지역의 특수성을 보이지만, 정치적 억압의 정도나 민중들의 처지 그리고 계급투쟁의 지형이 상이하였고 이러한 차이점이 항쟁의 폭과 치열함에서 차이를 가져왔다. 먼저 정치적 억압의 정도를 보면 리비아가 가장 심했고, 튀니지, 이집트 순이었는데, 운동역량은 이집트, 튀니지, 리비아의 순으로 크기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다. 이번 항쟁에서 리비아는 무장투쟁의 양상을 보인 반면, 튀니지는 화염병을 든 폭동이나 소요에 가까웠고, 이집트는 화염병을 든 사람도 있었지만 대중시위와 행진 등 상대적으로 평화적인 시민혁명의 모습을 보였다.

세계은행의 통계(2008-2009년) 등에 따르면,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는 실업률에 있어서 각 9.4%, 14.2%, 20.74%이고, GNI는 각 4,160달러, 2,420달러, 12,320달러이다. 청년실업률은 보통 일반 실업률의 두 배에 달하고, 학력이 높을수록 취업률이 낮다는 점을 감안하면 교육받은 젊은 실업자들이 항쟁에 앞장선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결국 항쟁참여자의 폭이나 항쟁의 격렬함에 차이를 가져오는 것은 빈곤이나 소득의 절대적 수준보다는 정치적 억압의 정도와 분배정의의 왜곡 정도, 그리고 일자리 문제 등과 관련한 체제에 대한 절망과 분노의 크기의 차이 등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제2장 혁명투쟁의 전개과정과 양상

 

1. 튀니지***18

1) 부아지지의 분신과 시디 부지드의 고립된 투쟁

튀니지 중부 내륙의 도시인 시디 부지드Sidi Bouzid에서 6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난 모하메드 부아지지Mohamed Bouazizi(26)는 대학까지 졸업하고도 직장을 구하지 못하여 시장근처에서 가판대를 놓고 청과물을 팔아 가정을 부양하는 처지였다. 그런데 2010년 12월 17일(토) 아침 뇌물을 요구하는 시청단속반인 여성은 부아지지의 수레를 부수고 과일을 압수하고 뺨을 때렸다. 이에 부아지지는 수치와 절망을 이기지 못하고 도청 청사 앞에서 온몸에 석유를 붓고 분신하였다.(분신 후 즉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2011년 1월 4일 사망하였고 1월 5일 장례식이 치러졌다.) 이 소식은 즉시 시디 부지드 시 전역에 알려졌고, 사람들은 도청 청사에 몰려가 항의하였다. 경찰은 시민들을 해산시킬 수 없었고, 노골적인 항의시위로 변하였다. 시민들은 ‘당국은 수치를 알라!’, ‘너희들의 뇌물이 분신시켰다.’ ‘도적놈들로부터 정의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날 하루 종일 시디 부지드는 대중시위가 계속되었고, 시 입구와 시내 주요지역에서 구호를 외치는 시민에게 최루가스를 뿌리는 경찰과 폭력적인 충돌이 있었다. 분노한 청년들과 경찰 간의 충돌이 계속되면서 밤늦게까지 50여 명의 청년들이 연행되었다. 다음날 연행사실이 보도되자 시위는 오히려 확산되었다. 연행은 고문과 감옥행을 뜻한다는 것이 상식인 나라에서 이러한 시위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3,000여 명의 시위대는 주변 도시로부터 병력을 보강한 무장경찰과 폭력적으로 충돌하였고, 시디 부지드 인근 도시와 마을에서도 충돌이 일어났다. 지방당국은 시위대를 겁주고 테러하기 위해 국가가 뒤를 봐주는 사병(용역깡패집단)들을 동원했고, 보안기관과 정보원들은 주모자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지만, 시민들은 ‘모든 연행자 석방!’, ‘인민은 배고프다! 도적놈들을 감옥으로!’, ‘일자리, 자유, 민족적 자존심!’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월요일은 시디 부지드 도의 졸업생 임용시험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시디 부지드 도의 모든 도시와 마을의 수천 명에 달하는 졸업생들이 시디 부지드 시로 모였고, 지난 이틀간에 있었던 사건을 공유하면서 시위가 시디 부지드 도 전체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경찰이 시디 부지드 시와 주요 지역, 도청과 집권당의 당사에 배치되어 삼엄한 상황이었지만, 화요일엔 시디 부지드 도의 모든 지역에서 강력한 저항과 투쟁의 대중행동이 일어났다. 지역노조는 시위와 점거 항의를 조직하였고, 청년들은 최루가스와 고무탄으로 무장한 경찰과 충돌을 계속하면서 주요도로를 점거하였다. 지역언론은 침묵하였고, 사람들은 ‘프랑스24’, ‘알자지라’, ‘알아라비아’ 등의 외국매체와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에서 정보를 얻었다. 수요일(12월 22일)엔 부아지지를 뒤따라 후세인 나지가 분신하였고 시위는 계속되었다.

 

2) 중부 내륙으로의 확장과 탈라 전투

시디 부지드 도내에 있는 부자이엔과 메크나시에서 격심한 충돌이 계속되자, 경찰은 야만적 폭력과 실탄 그리고 마구잡이 연행, 활동가 가택의 습격 등으로 대응하였고, 여기에 12월 24일 대졸 실업자인 알 암마리가 부자이엔에서 희생되었다. 알 암마리의 ‘순교’ 소식은 대중의 저항과 투쟁에 다시 한 번 불을 붙였다. 중무장한 사병들과 경찰은 최루가스와 고무탄, 실탄, 경찰견을 사용하면서 전 도시들을 포위하였고, 전기와 인터넷을 끊었다. 시위는 시디 부지드와 인근한 중부의 다른 도인 케프, 카세린, 카이루안, 가스파, 케빌리로 옮겨 붙었다.

연말이 되자 사회적인 폭발의 징후가 나타나고, 수만 명이 거리로 진출한 카세린과 탈라Thala가 투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시위자들은 나중에 전 아랍의 주문이 된 ‘인민은 정권의 퇴진을 요구한다The people demand the downfall of the regime’는 슬로건을 이때부터 외치기 시작했다. 한편 12월 27일 튀니스에서는 독립노조 활동가들이 시지 부지드 투쟁과의 연대를 표명하면서 일자리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는데, 1,000여 명이 참석한 이 집회는 경찰에 의해 중단되었고, 12월 28일엔 300여 명이 모인 법률가들의 집회도 있었다.****19 이날 벤 알리는 TV에서 시위대를 극단주의자들과 용병들이라고 비난하면서 엄중처벌 하겠다고 밝혔지만 시위는 연말까지 계속되었다. 1월 3일 탈라에서 주로 학생들로 이루어진 약 250명의 시위대가 참석한 집회에 경찰이 최루탄을 사용하였고, 그 중의 하나가 모스크로 날아들자 분노가 폭발하였다. 시위대는 타이어를 태우며 RCD 건물을 공격했다.*****20 부아지지의 장례식이 있었던 1월 5일에는 중무장한 보안부대와 맞서 인구 4만 명의 탈라 시의 청년들이 시 입구에 ‘탈라는 북아프리카의 스탈린그라드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1월 6일 수천 명의 변호사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다음날엔 교사들도 합류하였다.*21

3주째 토요일인 1월 8일이 분수령이었다. 보안부대는 최루 가스와 뜨거운 물, 고무탄, 습격과 연행에 뒤이어 실탄을 사용하였다. 이날 카세린과 탈라에서 62명의 ‘순교자’가 나왔다. 1월 9일(일) 아침 이들 도시는 최종적으로 살인자들의 즉각 처벌을 요구하는 ‘혁명가들’에게 장악되었다. 그들은 국가기구를 장악하였고, 튀니지 내륙의 많은 도시들이 국가와 보안기구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여기엔 이들 지역의 지역노조와 전국변호사연합 그리고 ‘부분파업과 점거, 항의 시위를 조직하여 저항한다’고 선언한 교사노조의 뒷받침이 있었다.

 

3) 수도에서의 결전 - 타다몬 전투

혁명은 이제 수도 튀니스의 대중시위로 결정적인 순간에 달했다. 전국을 휩쓴 학생들의 시위가 있었던 1월 10일 수업은 취소되었다. 당국은 ‘사전 작전’에 따라 노조활동가와 변호사들을 폭행하고 집회를 금지하고, 지지를 조직하려는 모든 사람을 겁주고 위협하면서 수십 개 도시의 인터넷과 통신을 끊었다. 튀니지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내륙지방이 당국의 장악력으로부터 해방되었고, 구호는 정치적으로 변했다. ‘RCD 타도!, 인민의 살인자와 고문자 타도! 파시스트 배반자 타도!’ 1월 10일 벤 알리는 30만 개의 일자리 창출을 약속했다.

체제의 마지막 순간은 수도 튀니스의 가장 큰 구역이자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타다몬Tadamon 지구의 젊은이들과 진압경찰이 충돌한 1월 11일 밤이었다. 피와 폭력으로 얼룩진 이 싸움에서 고무탄과 최루가스는 사람들을 오히려 격앙시켰고, 타다몬의 승리가 알려지자 튀니스 시내의 수많은 인근 지구에서도 봉기가 일어났다. 정부는 야간통행금지를 실시하고 군대의 동원을 요청하였다. 마침내 13일 밤 벤 알리는 경찰에게 실탄사용을 중지하라고 명령하고 국민에게 사과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1월 14일 아침 튀니지 전국에서 ‘인민은 정권의 퇴진을 요구한다’는 구호를 외쳤다. 특히 어떤 형태의 시위나 항의도 금지되어 온 수도의 중심도로인 부르기바에 50만 명의 대중들이 모여 내무부 청사로 향했고, 청사 앞에 연좌하여 벤 알리와 그의 처가인 트라벨시 집안이 튀니지에서 사라질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살인책임자들의 처벌과 모든 정치범의 석방도 요구하였다. 그리고 총탄이 발사되었고 혼란이 뒤따랐다. 군부는 등을 돌렸고 벤 알리는 사임을 강요당했다.

 

2. 이집트

1) 첫 동원의 성사와 동력의 확산

1월 14일 튀니지 민중이 벤 알리를 축출하자,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29년에 걸친 장기집권과 독재에 대한 분노의 시위가 시작되고, 1월 18일에는 세 사람이 분신하였고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었다. ‘4.6 청년운동April 6 Youth Movement’은 ‘경찰의 날’인 1월 25일에 대규모 봉기를 일으키자고 소셜 미디어를 통해 호소하였고, 며칠도 안 되어 9만 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지지를 표명하였다.

1월 25일은 ‘분노의 날’로 명명되었다. 이집트에서는 수백 명의 항의자를 검정 제복을 입은 수천 명의 진압경찰로 압도해버리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이날 처음으로 시위대가 경찰의 수를 압도했다. 경찰은 팔짱을 낀 시위대에 최루가스로 대응했다. 군중들은 과거와 달리 남자와 여자, 늙은이와 젊은이, 무슬림과 기독교인이 뒤섞여 있었다. 경찰은 늦은 오후 타흐리르 광장으로 방향을 바꾸고 광장을 장악하려는 시위대에게 물대포, 최루가스, 곤봉을 사용했지만, 이른 저녁 수천 명의 시위대는 광장으로 들어갔다. 무슬림형제단은 주초부터 회원들이 개별적으로 참가하는 것은 허용하지만, 조직적으로는 참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카이로에서만 1만 5천 명 이상이 거리로 나왔고 알렉산드리아, 아수안, 만수라, 이스마일리아 등 다른 도시들에서도 시위자들이 함께 거리를 점거하고 행진하였다. 그리고 이슬람교도들이 합동예배를 드리는 안식일인 금요일(1월 28일)에 다시 ‘분노의 날’을 갖자고 제안되었다.

시위 초기에 경찰들은 매우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수많은 시위자들이 여러 곳에서 경찰저지선을 무너뜨리고 타흐리르 광장에 도착하자 경찰은 방패와 곤봉 그리고 최루탄과 물대포로 시위자들을 해산시키고자 했다. 도심을 방어하기 위해 3만 명의 경찰이 소집되었고, 특히 상당한 수의 경찰이 정부청사와 의회를 에워쌓았다.

1월 28일(금) 금요기도가 끝난 후 카이로에서만 10만여 명을 비롯하여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여러 도시에서 시위에 참가하였고, 정부는 인터넷과 이동전화를 차단하였다. 시위대는 최루가스와 소방호스, 고무탄, 실탄을 무릅쓰고 수천 명의 진압부대를 압도하면서 타흐리르 광장으로 쇄도했다. 많은 정당과 단체들이 시위에 참가하였고, 시위에 참가한 즉시 수백 명의 지도자들은 체포 구금되었다. 이날 시위로 62명이 사망하였고, 시위대는 1월 28일부터 타흐리르 광장을 고수하였다. 1월 29일부터 카이로의 주요 도로와 타흐리르 광장의 입구 그리고 다른 도시의 중심부에 탱크를 탄 군대가 배치되었다. 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병사들에게 다가가 포옹하고 탱크 위에 올라가 이집트 국기를 흔들고 ‘군대와 국민은 하나다’라고 외쳤다. 젊은이들은 탱크에 무바라크 반대구호를 써넣기도 하였다.**22 1월 31일에는 타흐리르 광장을 넘칠 정도로 많은 수십만 명의 군중들이 시위에 참가하였고, 2월 1일까지 총 300명 이상 사망하였다. 1월 30일에는 노동자 계급이 이집트 독립노동조합연맹(FETU)을 건설하고 전국 총파업을 호소하였다. 이처럼 이집트는 1월 25일 첫 집회 이후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내면서도 참여 동력이 계속 확장되었고 타흐리르 광장을 중심으로 정권과 대치하는 전선을 확보하였다.

 

2) 군부의 중립과 친정부 시위대의 격퇴

2월 1일 이집트 군부는 시위대에 무력사용을 않겠다고 선언하였고, 무바라크는 두 번째 연설에서 가을에 시작되는 6번째 임기를 포기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밤에도 수천 명의 시위대는 ‘정권 타도’를 외치며 타흐리르 광장을 지켰다. 그리고 이날부터 2월 4일까지 친무바라크 시위대와 격렬한 충돌이 벌어졌다. 2월 2일 ‘100만인 행진’에서는 친정부 시위대와의 충돌로 카이로 15명, 알렉산드리아 52명, 수에즈 13명이 희생되었다. 채찍과 단도, 체인과 화염병으로 무장한 친정부 시위대와의 충돌은 많은 희생자들을 내었고 타흐리르 광장에는 부상당한 사람들로 가득 찼다. ‘퇴진의 날’로 정해졌던 2월 4일(금)은 인터넷이 차단된 가운데 수십만 명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날까지 시위대는 5,000명의 부상자를 내면서도 타흐리르 광장을 고수하였고 친정부 시위대를 격퇴하였다.

 

3) 타협의 거부와 총궐기

주말인 2월 5일 이집트 총리 술레이만은 강제해산을 하지 않겠다고 발표하였고, 무슬림형제단을 포함한 자칭 ‘현자들Wise Men’이 술레이만과 협상하려고 하였다. 2월 7일 군인들이 탱크로 시위대를 이집트 박물관 남쪽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하자, 여기에 십여 명의 무슬림형제단의 청년회원들이 지도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탱크 아래로 몸을 던져 막았다. 야권은 ‘정권교체협의 25인 위원회’를 구성하고 개헌위원회 등의 설치에 합의했지만 시위주도단체와 시위대는 무바라크의 퇴진 전에는 어떠한 협상도 거부한다면서 ‘혁명방어위원회’를 발의하였다.***23

그리고 2월 8일 두 번째 100만인 행진과 수에즈 운하 노동자들을 비롯한 운송, 통신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시작으로 무바라크가 물러난 2월 11일까지 매일 수십만 명의 이집트인들이 시위에 참가하여 끝장투쟁을 벌였다. 2월 8일 오전엔 카이로 대학의 수백 명의 교수들과 판사와 의원들이 무바라크 타도를 외치며 타흐리르 광장으로 합류하였고, 2월 9일부터는 시위대가 의사당 앞 도로를 장악하고 텐트를 치고 연좌에 들어갔다. 특히 2월 10일은 아침 9시부터 수만 명의 사람들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이 날 밤 기대와는 달리 TV 연설에서 무바라크가 사임하지 않겠다고 발표하자 시위대는 국영TV 빌딩을 봉쇄했다. 그리고 2월 11일 무바라크가 이집트는 아닐지라도 카이로를 떠났다는 소문이 나돌자 거의 전국민이 거리로 나왔다.

 

3. 리비아

1) 폭발적인 대중봉기와 무장의 확산

리비아는 튀니지나 이집트 등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항쟁이 초반부터 폭발적인 대중봉기와 적극적인 무장투쟁으로 발전하였다. 리비아의 항쟁은 제2의 도시이자 주요항구인 동부지역(시레나이카)의 벵가지Benghazi에서 시작되었다. 리비아의 동부 사람들은 서부보다 더 차별받는다고 생각하였고 카다피에 대한 적개심과 두려움도 컸다. 벵가지에서 시작된 항쟁은 불과 3-4일 만에 동부는 물론 중부와 서부 등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 벵가지의 시위와 카티바 전투****24

벤 알리에 이어 이집트에서도 시위가 격화되자 리비아에서도 SNS 상에서 2월 17일 시위하자는 제안이 이루어지고 공유되었다.*****25 시위 예정일 이틀 전인 2월 15일 리비아 보안대가 테르빌Fathi Terbil*26을 비롯한 벵가지와 리비아의 유명 활동가 12명을 연행했다.

2월 15일 저녁 이들의 연행 소식이 알려지자 감옥에서 살해당한 사람들의 가족들이 ‘벵가지여 일어나라! 기다렸던 날이 왔다!’를 외치며 테르빌의 체포에 항의하기 위하여 거리로 나섰다.**27 벵가지 경찰서 앞에서 200명으로 시작된 시위는 500-600명으로 불어났고, 보안요원 10명을 포함한 38명이 부상당하는 충돌 끝에 시위는 경찰에 의해 폭력적으로 분쇄되었다. 다음날 벵가지의 중심지에 수백 명이 모였고, 경찰은 물대포로 시위대를 해산하려고 하였다.

‘분노의 날’인 2월 17일 보안대가 시위대에 발사하여 14명이 죽었다. 시위대는 정부 건물과 경찰서를 방화하였다. 다음날인 2월 18일 수천 명의 장례행렬이 군부대가 있는 카티바 단지Katiba compound를 지나갔다. 조문객들이 먼저 돌을 던졌는지 카티바의 군인들이 먼저 총을 쐈는지는 사람마다 말이 다르다. 결국 24명이 죽었다. 경찰과 군대는 벵가지가 시위대에게 압도되자 카티바 단지로 철수하였다. 군인들 일부는 시위대에 가담했고 그들은 지역방송국을 장악했다. 18일 밤 벵가지에서 카다피 충성파들이 모여 있는 유일한 지역은 카티바 단지뿐이었다. 2월 19일 또 다른 장례행렬이 묘지로 가는 도중에 저항하는 행동으로 카티바 단지를 지나가다가 또다시 단지 안의 카다피 충성파들로부터 총격을 받았다. 장례식에 대한 두 번째 공격에 뒤이어 반정부 시위대는 격심한 사격에 후퇴를 반복하면서도 불도저를 징발하여 카티바 단지의 벽을 부수려고 하였다. 젊은이들은 돌멩이와 화약을 넣은 깡통으로 사제 폭탄을 만들어 던지기도 하였다. 싸움이 계속되자 한 무리의 군중은 벵가지 외곽의 군부대를 공격하여 군인들이 세 대의 작은 탱크를 포함한 무기를 버리게 하였다. 반정부 시위대는 이들 탱크로 카티바 단지의 벽을 들이받았다. 전투는 20일 아침에 끝났다. 하루 사이에 30명이 더 죽었다. 장례차로 위장한 트럭에 가스통을 실은 자살 폭탄차량이 단지의 입구를 공격하여 폭파하였다. 반정부 세력은 바이다와 데르나로부터 보강을 받아 기지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기지에 대한 마지막 공격 동안 42명이 죽었고, 오후에 내무장관인 유니스Abdul Fatah Younis 소장이 포위된 보안대를 구출하기 위하여 ‘벼락Thunderbolt’이라고 부르는 특전여단을 데리고 나타났다. 유니스는 발포를 하지 않도록 하고 반정부 시위대와 협상 끝에 카다피 충성파들이 도시를 안전하게 빠져나가도록 허용한 후 2월 22일 반군에 가담했다.***28

 

(2) 봉기의 급격한 확산

동부 - 2월 15일 테르빌의 연행 소식에 바이다에서는 수백 명의 시위대가 ‘인민은 정권의 퇴진을 요구한다’고 외치며 시위에 나섰고, 진탄에서도 수백 명의 시위대가 행진에 나서 보안대와 경찰서 건물을 방화하고 도심에 텐트를 쳤다.****29 2월 16일 바이다에서는 경찰서와 경찰차 두 대를 방화하고 6명이 죽었다. 18일에는 시위대가 비행장을 장악했다.*****30 2월 16일 “데르나에서는 육군 대령이 ‘Islamic Emirate of Barqa’라는 이슬람주의자 그룹에 가담하여 로켓추진 수류탄 발사기와 대공화기와 70개의 소총을 제공한 후 병기창을 공격하여 250정의 총기를 획득했다. 이 과정에서 4명이 죽고 16명이 부상당했다. 그들은 2월 18일 바이다에서 두 명의 경찰관을 교수형에 처하고, 군인과 시민들을 인질로 잡고 자신들의 동료를 석방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31 2월 23일 토브룩에서는 장교와 사병들이 시위대에 가담했다.

 

중부(미스라타 공방전) - 미스라타에서는 2월 17일 수십 명이 벵가지의 투쟁을 지지하며 시위하다가 연행되자 다음날 더 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나섰다. 보안대의 총격에 70명이 죽자 도시 전체가 분노하여 궐기했다. 시민들이 돌멩이와 화염병을 던지자 보안대는 탱크와 중화기를 동원했다. 시민들은 탱크의 진입을 막기 위해 모래를 넣은 컨테이너로 주요 도로를 막았다. 나중에는 기름을 묻힌 담요를 깔아 탱크의 바퀴에 엉키게 만들고 화염병을 던졌다. 카다피군은 빈 건물에 저격병을 투입하여 도로를 하나씩 장악해왔다. 수백 미터마다 모래산이나 콘크리트 파이프, 사다리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만들었다. 반란군은 중심은 없고 소조로 나뉘어 각 길목을 지키는데 그들은 서로 닉네임으로 불렀고 그 가운데에는 의대를 다니는 학생도 있었다.**32 2월 18일부터 비행장을 장악한 반군은 2월 24일 공항수비대에게서 대공화기를 빼앗았고 나중에는 공군학교 장교들이 반란을 일으켜 반군에 가담하였다. 다음날 카다피군은 탱크로 반격해 왔다. 이때부터 카다피군은 미스라타를 탈환하려고 수없이 시도하였고, 3월 12일에는 자위야를 진압했던 카다피의 정예부대인 카미스Khamis 여단이 투입되었다. 하지만 장군을 포함한 32명의 공격군이 반란을 일으키고 반군에 합류하였다. 3월 19일 나토군의 공습이 시작되었고 카다피는 끝내 미스라타를 굴복시키지 못했다.***33

 

서부(트리폴리의 시위와 자위야 봉기) - 트리폴리에서는 2월 20일 AFP가 취재한 목격자에 따르면 시위대에 의해 TV와 라디오 방송국이 파괴되었고 경찰서 한 군데와 혁명위원회 건물과 ‘인민의 광장’이 불에 탔다.****34 뉴스에서는 트리폴리 시내를 지키는 수천 명의 용병의 등장부터 시작하여 시내에 검색대의 설치, 이동전화와 인터넷의 단절을 보도했다. 트리폴리는 2월 25일 수천 명의 시위를 마지막으로 반정부 시위가 최종적으로 진압되었다.

한편 트리폴리의 서쪽에 있는 자위야에서는 2월 24일 카다피 충성파와 군대가 며칠 전부터 시위대가 점거 농성을 하고 있는 모스크를 공격하여 10명이 죽고 150명이 부상당했다. 이에 분노하여 수천 명의 시민들이 모스크 근처의 ‘순교자의 광장’으로 ‘떠나라! 떠나라!’고 외치면서 행진했다. 이날부터 시위대는 자위야를 장악했다.*****35 2월 26일과 28일 정부군은 중화기로 공격했다. 자위야는 많은 사상자를 내고 3월 10일 최종적으로 진압되었다.

 

2) 내전으로의 전화와 제국주의의 개입

2월 20일이 되자 동부는 대부분 해방되었고 반군은 서부의 반란을 촉구하였다. 미스라타와 자위야, 트리폴리도 합류하였고, 2월 21일 법무장관 잘릴Mustafa Abdul Jalil과 22일 내무장관 유니스를 비롯한 수많은 정권핵심들과 외교관들의 사퇴와 반군으로의 이탈이 잇따랐고 2월 23-24일에는 항쟁이 피크에 달했다. 누구나 이제 카다피의 시대가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대중이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민중주도의 혁명은 2월 20일이 지나면서 왜곡되기 시작하였고, 끝내 내전과 제국주의 개입전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 항쟁 초기의 카다피의 대응과 태도

동부가 무장폭동의 양상을 보이고 충성파들이 카티바 단지에서 포위되자 카다피는 2월 18일 ‘시위대와 협상을 위해’ 법무장관인 잘릴과 내무장관인 유니스 소장을 벵가지로 급파하였다.*36 2월 20일 카다피의 아들 사이프Saif al-Islam Gaddafi는 국영 TV에 출연하여 동부에서 희생된 80여 명에 대해 조사기관의 설치와 체제 내의 개혁을 발표했다.**37 무바라크가 시위초기에 소극적 대응을 한 것처럼 카다피 역시 적극적인 진압이 역효과를 낼 것을 두려워하여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소극적 대응과 타협을 추구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이프는 2월 20일 사실상의 내전을 경고하였고 카다피는 2월 22일 시위대의 진압을 명령했지만, 그리고 2월 하순부터 사실상의 내전상태에 있었음에도 유엔의 결의를 피하고자 혹은 서방 언론의 비난을 피하고자 노골적이고 적극적인 대응을 억제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2월 21일경 카다피에 의해 트리폴리가 ‘피바다’가 되고 ‘집단학살’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보도는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2) 노골적이고 무책임한 왜곡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자지라를 비롯한 서방언론들은 용병과 중무기, 대량학살, 비행기 등을 운운하며 마치 카다피가 항쟁의 초기부터 대량학살을 자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도하였다. 알자지라의 보도를 보자.

 

  (2월 21일) 7:56pm: 알자지라 아랍어방송은 지금 트리폴리의 활동가와 대화하고 있는데, 그는 지금 트리폴리 전체에 공중 공격이 행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거기에는 죽음과 두려움과 함께 여성들이 어디에서나 울고 있다. 공격은 가두 시위자들이 많이 나온 지역에 집중되어 있고, 사람들에게 총을 쏘는 외국인 전사로 가득 찬 차량들이 있다. 그는 지난 24시간 동안 최소한 250명이 죽었으며 국제적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고 말했다. 트리폴리는 외국인 전사들이 장악하고 있으며 물과 전기도 끊어졌고 음식과 의료품도 부족하다고 말했다. 이것은 ‘집단학살’이라고 그는 말했다. 트리폴리 동부의 미스라타는 가장 최근에 전투기에 의해 공격받았다. 탱크가 시내로 들어와 중화기가 빌딩을 초토화하고 있다고 목격자들이 알자지라에 말했다.

9:51pm: 트리폴리의 줌후리아 도로에 새로운 공중 공격이 가해지고 있다고 목격자들이 알자지라 아랍어 방송에 말했다.

10:49pm: 또 다른 공중공격이 트리폴리 서부의 자위야의 시민들을 지금 목표로 하고 있다고 목격자들이 알자지라에 말했다. 사망자나 부상자의 수에 대하여는 아직 보도가 없다.

(2월 22일)1:20am: 알자지라 아랍어 방송은 기니아와 니제리아에서 용병이 되면 하루에 2,000불을 주겠다는 광고가 나타났다고 보도했다.***38

 

그러나 ‘전투기에 의한 공중공격’과 ‘대량학살’ 주장은 3월 1일 게이츠 미국방장관이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추궁에 “우리도 언론보도를 보고 알았는데, 어떠한 확증도 없다”고 고백한 데서도 사정을 짐작할 수 있지만,****39 “집단학살이란 주장은 2월 21일 다바쉬가 만든 것으로 그는 카다피 체제가 리비아에서 집단학살의 직전에 있는 것 같다고 AP 통신에 말했다. 그런데 AP는 지상에서 보안대의 시위대에 대한 총격을 보도하면서도 주요 해변도로를 맴도는 헬리콥터와 밤에 트리폴리를 낮게 급강하하는 전투기의 위협효과에 대해서만 보도했다. 동부를 취재하고 돌아온 두 명의 언론인은 반군이 장악한 벵가지나 다른 도시에서 시위초기에 정권이 항공기를 사용할 것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40는 ‘국제위기그룹International Crisis Group’의 보고서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완전한 허위보도였던 것이다. 결국 알자지라는 익명의 목격자를 빙자하여 무고한 시민들이 전투기와 탱크로 유린되고 있다고 무책임한 왜곡방송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왜곡보도를 BBC를 비롯한 서방언론*41들은 알자지라의 보도를 운운하며 전 지구인들의 가슴을 졸이게 하고 있었다.

 

(3) 왜곡보도와 이탈파들의 상호동조

2월 21일 유엔 주재 리비아 부대사 다바쉬는 “우리는 트리폴리에서 진정한 ‘집단학살Genocide’을 예상하고 있다. 항공기는 여전히 용병을 공항으로 실어 나르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카다피를 이탈하였다. 같은 날 법무장관 잘릴은 카다피의 ‘과도한 폭력의 사용’을 비난하면서 사임하였다. 2월 22일 전 인도 대사 이사위Isawi도 전투기가 민간인에게 폭격하며 아프리카에서 온 용병들이 인민들을 학살하고 있다는 것을 알자지라에 확언하였고, 이후 외교관들의 이탈이 줄을 이었다. 정권이 위기에 처했을 때 지배층 내에서의 분열과 이탈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외교관들인 다바쉬나 이사위가 아무런 근거가 없는 ‘용병’과 ‘학살’을 확언하는 발언은 ‘카다피의 악마화’를 조장하는 왜곡보도와 서로 부응하는 행동들이었다. 또한 사이프가 벵가지 희생자들을 위한 조사기관의 설치와 개혁을 약속하면서 무력진압이 아니라 유화적인 해결자세를 보이던 바로 그 시점에 벵가지의 폭동을 무력이 아닌 협상으로 마무리하라는 카다피의 명령을 받고 유니스와 함께 평화적으로 해결하였던 잘릴이 오히려 과도한 폭력을 운운하며 이탈한 것도 마찬가지 행동이었다.

 

(4) 왜곡보도에 대한 권위있는 당국자들의 무책임한 동조

2월 21일 참으로 무책임한 보도를 하였던 알자지라는 다음날인 2월 22일부터 자신들의 보도에 화답하는 국제적으로 권위있는 당국자들의 분노와 흥분을 보도하였다.

 

  (2월 22일) 11:09am: 영국의 전 외무장관 데이비드 오웬은 비행금지구역 설정을 통한 군사적 개입이 즉각 필요하다고 알자지라에 말했다.

12:15am: 미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은 “지금은 이처럼 받아들일 수 없는 피바다를 막을 때이다”고 말했다.

12:45am: 알자지라의 정규기고자인 마르크 린치는 리비아에 대한 외국개입의 장단점을 저울질하면서 “지금은 이미 피바다가 된 상황을 더 악화되지 않도록 미국과 나토, 유엔, 아랍 연합이 강력하게 행동에 나설 때이다”라는 흥미있는 기사를 썼다.

1:40am: 유엔 부대사 다바쉬는 “비행금지구역No fly zone이 리비아에 설정되어야만 한다”고 유엔에 말했다.

1:42am: 반기문은 성명을 통해 리비아 당국이 전투기와 헬리콥터로 시위대에 사격했다는 보고에 분노했다면서 “그러한 공격은 국제인권법의 심각한 침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42

 

이후 알자지라는 “2월 24일 이슬람 공화국 방송은 국제형사재판소ICC:International Criminal Court가 사망자를 10,000명으로 평가했다고 보도했다. 3월 2일 WTO는 대략 2,000명이 죽은 것으로 평가했다. 반군은 6,500명이 죽었다고 주장하고, 반군 대변인은 사망자가 8,000명에 달한다고 주장했다”면서 사망자 수의 과장에 앞장섰고,***43 3월 중순 비아그라 박스와 관련한 강간설을 보도하였다. 하지만 비아그라 박스는 반군들이 카다피군의 불타버린 탱크에서 주웠다고 하는데 박스만 그을리지도 않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대하여 코크번과 포르테의 폭로를 들어보자.

 

  비아그라 얘기는 처음에 카타르 정권의 지원을 받는 알자지라가 반군과 협동하여 퍼뜨렸고, 거의 모든 주요 서방언론에서 재분배되었다. 국제형사재판소의 소장인 오캄포Luis Moreno-Ocampo는 서방 언론에 “카다피가 강간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하여 그의 군대에게 비아그라를 나눠주고 수백 명의 여성을 강간하도록 명령한 증거가 있다”고 말했다. 수잔 라이스 유엔주재 미국 대사는 “카다피가 대량강간을 고무하기 위하여 비아그라를 나눠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카다피 군대가 리비아에서 광범한 강간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강간과 물리적 위협, 성희롱 심지어 처녀성 검사까지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44

  미 군사당국과 정보당국이 강간설에 대한 어떠한 증거도 없다고 말했다는 것은 이미 NBC 뉴스에서 밝히고 있었고, 엠네스티는 3개월간의 현장조사보고서에서 “강간을 당했다는 단 한사람의 여성이나 강간당한 사람을 보았다는 단 한 명의 의사도 발견할 수 없었고, 용병은 단 한 사람도 확인할 수 없었다. 초기에 죽은 사람은 (초기의 비무장 시위의 희생자 수십 명을 포함하여) 벵가지 100-110명과 바이다 59-64명뿐이다”라고 밝혔다. 아프리카 연합African Union의 의장인 핑Jean Ping은 최근에 “NTC는 흑인들을 용병과 혼동하는 것 같다. 모든 흑인들이 용병이라면 리비아 인구의 3분의 1인 흑인이 용병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들은 인간 즉 정상적인 노동자를 죽이고 있고 잘못 다루고 있다”고 주장하였다.*****45

 

결국 서방 언론들은 카다피가 전투기까지 동원하여 자국민을 학살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벵가지가 함락되면 피바다가 될 것처럼 보도하였지만, 내란이 시작된 지 일주일이 지난 3월 1일까지 미국방부를 비롯한 아무도 카다피의 전투기가 시민을 무차별로 학살하는 것을 본 사람이 없고, 3월 중순 벵가지까지 진격한 카다피군이 그동안 재점령한 반군지역 역시 무차별 학살은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아프리카 용병, 전투기, 공중공격, 대량학살, 강간 등등의 주장은 카다피 이탈파를 포함한 반군과 협동한 알자지라가 앞장서서 조장하고, 서방언론들이 집요하게 퍼뜨리고, 반기문, 힐러리 클린턴, 수잔 라이스, 오캄포 등 국제적으로 책임있는 당국자들도 미국방부의 보고로 이런 보도가 근거가 없는 줄 알면서도 이들 언론의 ‘카다피 악마화’에 적극 동조하였던 것이다. ‘인도주의적 개입’ 여론은 이렇게 조성되었다.

2월 26일 유엔 안보리는 알자지라 등이 만들어낸 이런 왜곡보도를 근거로 ‘카다피 일가의 자산을 동결하고 국재형사재판소의 조사를 위한 혐의’를 회부했다. 그리고 카디피군이 벵가지 근처까지 진격하자 카다피가 들어오면 ‘피바다’가 될 것이라고 애원하는 NTC와 알자지라 등이 조성한 여론을 바탕으로 3월 17일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는 유엔결의안 1973호를 의결하고, 이틀 뒤 프랑스를 필두로 나토와 미군이 공습에 나섰던 것이다.

 

3) 제국주의 개입전쟁과 카다피의 패전

2월 23일 이후 리비아의 거의 전 지역이 내전상태에 들어가자, 2월 26일 카다피는 충성파 시민들에게 무기를 지급하면서 반정부 시위 봉쇄에 나섰고, 2월 27일 벵가지에서는 유일합법정부를 자처하는 과도정부의 내각 명단이 발표되고 3월 2일에는 과도국가위원회(NTC : National Transitional Council)가 공식 출범하였다. 이로써 리비아 민중의 항쟁은 카다피가 중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는 공식적인 내전으로 발전하였고 정부군은 3월초부터 본격전인 반격에 나섰다. 3월 10일에는 프랑스가 NTC를 유일합법정부로 인정하였고, 3월 16일엔 정부군이 벵가지 근처까지 진격하였다. 3월 17일 유엔결의안 1973호가 중국과 러시아, 독일 등이 기권한 가운데 통과되어 비행금지구역이 설정되고, 3월 19일 프랑스의 공습이 시작되었다. 3월 28일 미국주도 연합군의 공군작전 지휘권이 나토로 이양되었고, 나토는 반군을 무장시키지 않겠다고 밝혔다. 4월 1일 반군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유엔의 조건부 정전 조건을 수락하였고, 4월 5일엔 카다피가 그리스와 터키를 통해 중재를 요청하였다. 4월 10일 아프리카 연합(AU)이 리비아를 방문하여 쌍방의 적대행위 중지 등 중재에 나섰으나 반군이 거부하였다. 이후 나토의 적극적인 공습과 지원 아래 정부군과 반군은 공방을 거듭하였다. 나토의 공습이 계속되었지만 카다피의 잘 훈련되고 잘 무장된 정규군을 민간인과 이탈한 병사로 이루어진 반군이 이길 수는 없었다. 반군은 계속 몰리고 있었고 지상전은 교착상태였다. 그러나 외부로부터 고립된 카다피군이 점차 몰리게 되고 반군이 8월 하순 트리폴리 근처까지 진출하게 되자 8월 20일 트리폴리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8월 22일 시민군이 수도의 80%를 장악하자 반군들은 트리폴리에 무혈 입성할 수 있었다.*46 트리폴리를 탈출한 카다피는 저항을 계속하다가 자신의 출신지인 시르테에서 10월 20일 생포되었다가 사살되었다.

 

제3장 혁명투쟁의 분석과 쟁점

 

1. 튀니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튀니지에서는 2010년 12월 17일 부아지지의 분신에 뒤이은 시위가 1주일 뒤엔 중부 내륙의 다른 도로 확산되었고, 1월 8일 62명이 학살되면서도 탈라를 최종적으로 방어한 이후인 1월 10일에야 튀니스가 움직이기 시작하여, 도시하층민이 많은 타다몬 지역에서 1월 11일 밤 격렬하게 충돌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시디 부지드에서 혹은 탈라에서 목숨을 걸고 투쟁하면서 학살당하고 있을 때 변호사와 교사들의 파업 등의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튀니스를 비롯한 튀니지 민중들은 숨을 죽이고 지켜만 보았던 것이다.

1980년 공수단의 만행에 분노한 광주시민들이 목숨을 건 투쟁을 통해 광주를 해방시켰지만 1주일간의 고립 끝에 진압당한 역사를 생각할 때, 튀니지 당국의 언론통제가 있었지만 튀니지 민중들의 항쟁은 초반부터 알자지라를 비롯한 위성방송과 인터넷을 통해 튀니지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투쟁 상황이 공유되고 있었음에도 이 좁은 나라에서 항쟁이 시작된 지 무려 25일만에야 수도에 도달했다는 것은, 한편에선 시디 부지드 시나 시디 부지드 도나 탈라에서의 영웅적 항쟁이 고립될 수도 있었고 따라서 패배로 끝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도와 떨어진 많은 내륙지방에서 경찰력을 압도하자 비로소 튀니스의 시민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숨을 죽이고 있었던 것은 그만큼 권력이 잔인했고, 항쟁에 나선다는 것은 잔인한 보복과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내면화된 두려움과 자기검열이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튀니지 민중들이 숨을 죽이고 있었던 것은 SNS의 선동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수십 년간 지속된 폭력과 억압으로 내면화된 두려움 속에 있었던 튀니지 민중들이 절망만을 강요하는 권력에 의해 마지막 자존심까지 짓밟히자 싸워야만 되고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자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과 진압 그리고 시위 지역의 고립화와 분리 차단을 뚫고 노도처럼 일어나 체제를 압도한 것이었다. 일단 봉기에 나선 이상 주변이 아무리 침묵하더라도 절망만을 강요하는 그 권력에 대하여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과, 더 이상 참고 고개를 숙이고 살 수 없다는 자각과 분노가 저항을 폭발시키고 확산시켰다. 따라서 항쟁의 고비였던 탈라 전투와 타다몬 전투에서 민중들이 권력에 의해 강요된 고립과 잔인한 공격에 맞서 목숨을 건 항전을 벌인 것이 최종적인 승리를 가져온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결국 이 투쟁은 ‘지역고립을 극복하고 격전 끝에 승리를 쟁취한 민중혁명’이었던 것이다.

 

항쟁의 참여자들은 학생, 교사, 변호사, 언론인, 인권운동가, 노조 활동가, 야당 정치인 등 다양하였지만,**47 권력과 맞대결한 투쟁은 탈라와 타다몬이 말해주듯 주로 가난한 지역의 청년들이었고 그들의 대부분은 교육받은 젊은 실업자였다. 그러나 그들의 전투력은 경험 많고 전투적인 지역노조와 결합되었을 때 발휘되었다.***48 이처럼 전투적인 지역노조는 청년들과 함께 이 투쟁을 승리로 이끈 핵심세력이었다. 또한 이 투쟁에서 눈에 띄는 것은 변호사와 같은 인권활동가들이다. 계급운동이 철저하게 억압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인권활동가들의 역할이 컸던 것이다.

 

2. 이집트

1) 승패의 갈림길과 승리의 요소

이집트 민중의 항쟁 역시 몇 번의 고비가 있었다. 먼저 1월 25일 첫 집회가 대중의 압도적 참가로 성공한 것과, 뒤이어 흐름을 끊지 않고 1월 28일 집회를 성사시키고 경찰의 발포에도 불구하고 타흐리르 광장을 사수한 것, 2월 1일부터 3일간 친정부 시위대와의 싸움을 이겨낸 것 그리고 2월 4일 이후 지배계급 - 술레이만의 회유와 일부 야당인사들의 타협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고 단결을 유지하면서 무바라크가 물러날 때까지 수십만 명이 매일 모여 정권과 끝장투쟁을 벌인 것이다. 그러나 2월 1일부터의 친정부 시위대와의 싸움은 많은 부상자가 난 치열한 싸움이기는 했지만 투석전으로도 해볼 만한 싸움이었고 2월 4일까지만 버티면 희망이 있다는 확신이 있었고, 무엇보다 군부가 2월 1일부터 무력사용을 않겠다고 발표한 직후였다. 그리고 1월 28일부터 5일간의 300여 명의 희생자는 군대가 진주한 타흐리르 광장이 아니라 카이로를 비롯한 다른 도시에서 경찰에 의해 발생했다. 무바라크는 시위대를 학살하면서도 항쟁의 상징인 타흐리르 광장을 점거하고 있는 농성자들을 살육할 수가 없었다. 승패는 여기에서 결정되었다.

결국 이집트 민중의 승리는 1월 25일 혁명투쟁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수도 카이로에서 15,000명이라는 아주 많다고는 볼 수 없지만 이집트에서는 이례적으로 많은 대중이 경찰의 저지선을 뚫었을 때, 그리고 그 흐름을 깨지 않고 동력을 확산시켜 1월 28일부터 2월 1일까지 5일간 경찰의 학살에도 굴하지 않고 전선을 확보했을 때 결정되었던 것이다.****49 그 이후 지배계급은 반격은 했지만 한 번도 전세를 역전시키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 투쟁은 ‘중앙집중을 성사시키고 확산하여 승리를 쟁취한 대중혁명’이었다.

한편 1월 29일 군대가 출동한 상황을 보면 하급병사들과 시민들과의 우호적인 융합으로 인해 군부는 진압명령이라는 강경책을 쓸 경우 하급병사의 이탈과 군대의 와해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압도적인 대중의 폭발적 진출과 대중이 갖는 정당성이 하급병사의 이반을 가져오고 군대를 중립화시킨 것이었다. 이로써 승패는 거의 결정되었지만, 만약 무바라크가 2월 2일부터 친정부시위대를 동원하여 시위대를 격분시키지 않고 유화책에만 전념했다면 무슬림형제단의 상층부 등 기회주의 세력을 회유할 수 있었을 것이고 전선의 균열을 가져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들 기회주의 세력들은 2월 8일 100만인 행진이 있기 전에 술레이만과 합의에 도달하였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우리나라에서 자유주의 세력이 직선제 약속만으로 전선을 이탈하여 동력이 와해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무바라크의 어리석은 강경책이 전선의 균열을 막아준 것이었다.

외신들은 군부가 무바라크에게 등을 돌린 것은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이었다고 보도하였다. 그것은 사실이이지만 단지 현상적 사실에 불과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중의 분노가 폭발할 때, 피지배계급이 노도와 같이 달려들 때, 더 이상 폭력으로 민중의 힘을 억압할 수 없을 때 지배계급들이 분노의 표적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는 본질적 사실이다. 이것이 현상을 규정하는 본질(현상과 본질의 변증법)이다. 폭발적인 대중의 봉기 앞에서 지배계급과 군부는 무바라크만 피신시킨 것이었다.

혹자는 현상만을 보면서 ‘페이스북 혁명’이라는 말을 지어내기도 하고, 혹자는 승리의 요인으로 무바라크의 사임 이틀 전 수에즈 운하와 알렉산드리아 등지에서 있었던 강력한 노동자계급의 총파업이 결정적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50 그러나 후자의 경우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승패가 거의 결정난 1월말 이후인 2월 8일부터였다는 점과 항쟁의 초점이 타흐리르 광장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전국적으로 200만 명이 참가한 2월 8일의 투쟁이 무바라크에게 최종적인 타격을 가한 것은 분명하지만 수많은 대중의 일부로서 몇 십만 명이 참가한 지방도시들의 노동자총파업만으로 승리의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승리는 타흐리르 광장의 시민들(주로 카이로의 도시하층민들과 청년들)이 목숨을 걸고 쟁취한 것이다.*51

 

2) SNS와 청년들의 민주화 운동

이집트 혁명이 한창일 때 ‘페이스북 혁명’이란 말이 회자되었다. 여기서는 이 투쟁에서 절반의 승리를 확보한 1월 25일 집회의 동원과 관련된 이집트 청년들의 민주화운동과 SNS에 대하여 살펴볼 것이다.

2004년 무바라크는 5번째 임기에 도전하기 위해 국민투표를 발의했다. 이 시점은 무슬림형제단을 비롯한 야당은 물론 노동운동과 대중운동이 내무부와 정보경찰에 의해 거의 질식당한 상태였다. 이때에 정치적인 색깔이나 종교적인 색깔에 개방적인 즉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최우선으로 하는 청년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케파야(Kefaya 이제 그만)’라는 연대체가 꾸려졌다. 이들은 대통령의 임기와 비상조치법의 끝낼 것을 요구하는**52 주로 200-300명 정도의 기습시위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에 이들을 모방하는 많은 조직들이 생겨났고 서로 연대하였다. 2005년 100명이 넘는 판사들이 총선결과를 승인하기를 거부하고 항거하자 이들의 징계재판에 많은 사람들이 연대하고 시위하였다. 이 투쟁으로 250명 이상이 구속되자 2006년 5월 무슬림형제단이 대중집회에 동참하여 카이로 시내를 마비시켰고 격심한 탄압을 받기도 하였다.***53

그리고 2006년부터 노동자들의 투쟁이 터져 나왔다. 2008년 초 마할라El-Mahalla el-Kubra에 있는 국영 섬유공장 노동자들은 높은 식품가격과 낮은 임금에 항의하기 위해 4월 첫 일요일(6일)에 파업할 것이라고 밝혔다. 여기에 관심을 보인 젊은이들이 노동자들과 연대하여 4월 6일 항의와 파업을 조직하는 페이스북 그룹을 만들었고, 2009년 말에는 7만 명의 지지를 받았다. 경찰은 공장을 점령하고 파업을 막았다. 시위대는 건물에 불을 질렀고, 경찰이 발포하면서 두 명이 죽었다. 이집트 전역의 연대 시위는 경찰에 막혀 흐지부지되었다.****54 “그들은 파업을 고무하기 위해 페이스북과 트위터, 블로그 등을 사용하여 사건을 알리고, 참가자들에게 위험상황을 알리고, 보안부대에 둘러싸인 사람들에게 합법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들은 2010년 11월의 국회의원 선거에도 개입하였다.”*****55

이처럼 케파야나 4.6 청년운동은 기층노동운동에도 연대하고 때로는 자유주의자인 엘마라데이에게 지지를 보내기도 하는 한마디로 민주화를 열망하는 활동가들이 주축이 된 광범한 네트워크이고, 페이스북과 인터넷을 활용하는 데도 익숙한 청년들이었다. 또한 그들의 핵심에는 다양한 조직이 참여하고 있는 느슨한 연대체였다.*56

결국 ‘케파야’와 ‘4.6 청년운동’은 이미 대중에게 알려지고 신뢰를 얻은 집단이자 페이스북 모임이고, 1월 14일 튀니지의 승리가 전해지자 1월 25일 집회를 제안한 것인데, 여기에 많은 단체들이 인터넷상에서 호응하자 야당을 비롯한 여러 단체들도 호응한 것이다. 이들은 집회를 제안한 뒤 일체의 인터넷 접속을 자제하고 지하로 숨은 뒤 중요 활동가들이 전술을 논의하였다. “조직자들은 오래전부터 경찰을 오도하기 위해 내무부 외곽에서 모일 것이라고 밝혔지만, 점심 직후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통해 집결장소를 바꾸었다. 인터넷에서는 ‘#jan25’라는 태그를 사용했고, 대오는 150명부터 1,000명이 넘는 경우까지 다양했다.”**57 이들 여러 대오들이 유동적으로 움직이다가 오후에 기습적으로 일제히 타흐리르 광장으로 쇄도하였던 것이다.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1월 25일의 동원은 단순히 페이스북에서 집회의 제안과 선동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핵심활동가들의 긴밀하고 치밀한 작업에 의해 성사된 것이다. 인터넷상에서 9만 명이 넘는 호응을 얻고, 거짓정보를 흘리며 경찰을 혼란시키면서 여러 곳에서 모여 대중을 타흐리르 광장으로 인도한 것이 결정적이었고, 여기에 체제의 변화를 갈망하는 도시하층민과 청년들이 합류하여 전투력을 형성한 것이다. 따라서 ‘페이스북 혁명’을 운운하며 동원의 현상적 형태를 물신화하는 것도 우스운 얘기지만, 그렇다고 현대인의 문화적 조건인 인터넷 공간이나 소셜 미디어의 역할을 너무 폄하하는 것도 잘못이다.

 

3. 리비아

 리비아의 경우는 벵가지라는 동부지방의 주요 도시의 폭발적인 항쟁이 불과 3-4일 만에 전국적인 봉기와 적극적인 무장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트리폴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에서 공권력을 몰아내었음에도 정부군에게 중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명분을 주는 공식적인 내전으로 발전하였고, 끝내 제국주의의 개입을 불러왔다. 따라서 무장투쟁과 공식적인 내전과 제국주의의 개입이 어떠한 동인과 배경에 의해 관철되었는지를 먼저 살필 필요가 있다.

 

1) 카다피의 패망 이유

리비아의 대다수의 민중들은 카다피를 증오하였지만 카다피는 트리폴리에서 친정부 시위대를 조직할 만큼, 그리고 충성파 시민들에게 총을 나눠줄 만큼, 나아가 내전을 8개월이나 끌 만큼 충성파도 상당수에 달했다. 그러나 9,600번에 달하는 나토의 지독한 공습과 전쟁물자의 결핍을 강요하는 장기에 걸친 국제적인 고립과 내부의 사기저하로 무너졌다.***58 이것은 카다피의 정부군이 무장반군의 전투력에 의해 무너진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모름지기 현대 국가에서는 아무리 무도한 학살정권이라고 하더라도 군사력과 시민의 무장력 간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비대칭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집트 혁명에서 보았던 것처럼 군대가 개입할 명분을 안 주고 중립화시키고 민중의 편으로 끌어당기려는 고려, 즉 목적과 수단의 정당성을 확보하면서 광범한 대중의 지지와 참여로 권력을 무력화시키려는 고려가 참으로 중요하다. 튀니지나 이집트의 군대가 중립을 지킨다든지, 카다피의 군대가 와해되고 패배하거나 보안대와 군대가 총을 버리고 도망가는 것은 대중의 무장력이 그들을 군사력으로 압도했기 때문이 아니다. 공권력이란 최종적으로 민중의 투쟁이 갖는 압도적인 정당성 앞에서 무너지는 것이다.****59

 

2) 동부의 특수성과 무장투쟁과의 연관

리비아는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항쟁의 초기부터 이루어진 적극적인 무장과 내전이 특징적이다. 무장투쟁은 어떠한 조건하에서 발전하는가? 공권력의 노골적인 폭력에는 자위무장이나 대항무장이 등장하지 않을 수 없다. 1980년 광주항쟁에서도 시민들은 자위무장을 하고 계엄군을 몰아내었다. 이때의 무장은 무차별적인 학살에 대한 당연한 대응이었다. 그런데 튀니지나 이집트, 시리아도 역시 시위대에 총을 쏘았고 화염병이 등장하였지만 리비아처럼 총기를 든 무장투쟁으로까지 발전하지는 않았다. 즉 공권력의 대응이 비슷했음에도 리비아 인민은 무장투쟁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것은 시민에 대해 총기의 사용도 불사하는 카다피 통치의 잔인함이라는 특수성도 영향이 있겠지만, 여기에 더하여 리비아 혹은 리비아 동부만의 특수성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국제위기그룹의 연구보고이다.

 

  “리비아는 원래 서부의 트리폴리와 동부의 시레나이카 그리고 남부의 페잔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1950년대에 처음으로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지향이나 정체성은 서로 달랐다. 동부는 보다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지향을 갖는 이슬람주의가 강력한 곳이었다. … 최근 수십 년 동안 동부는 다양한 이슬람주의 반대파 운동들-온건파인 무슬림형제단의 지부인 LIG : Libyan Islamic Group*****60나 전투적 지하드 조직인 LIFG : Libyan Islamic Fighting Group*61 참가자들의 저수지였다. 1996년 아부 살림 교도소에서 학살당한 사람들도 주로 동부 출신이었다. 최근에 풀려난 무슬림형제단이나 LIFG의 대부분은 동부로 돌아갔다. 이라크에서 싸운 사람들의 대부분도 동부출신(88명 중 60.2%가 데르나 출신이고 23%가 벵가지 출신이었다)이었고, 2003년 이후 전투적 경향성 때문에 구속된 젊은 사람의 대부분도 동부 출신이었다. … 1980년대 말 보안대는 전투적인 이슬람주의 소조직cell들을 적발하고 1989년에는 이슬람주의 용의자 수천 명을 일제 검거했다. 1990년대 중반 군사적 그룹이 반란을 일으킨 후 동부는 중무장한 보안대가 지키는 사실상의 보안구역이 되었다. 이러한 비극적인 역사가 카다피 정권이 반란에 대한 처벌로써 이 지역을 저개발 상태에 묶어 두려고 하고 북서부에만 투자를 집중하려고 한다는 동부인들의 믿음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62

 

이러한 상황과 연관하여 볼 때 전투적인 이슬람주의자들이 선도한 데르나에서 보는 것처럼 무장투쟁의 경험과 은닉무기의 존재가 대중의 불만과 분노와 맞물려 적극적인 무장투쟁으로 나아가게 하고 이후 투쟁의 양태를 규정지었다고 할 수 있다. 초기에 리비아에서 무장투쟁으로 발전하지 못한 유일한 지역이 트리폴리였는데 이집트처럼 수도가 중심이 되어 투쟁이 전개되었다면 다른 양상을 띠었을지도 모른다.

 

3) 봉기의 추동력과 항쟁의 주체인 리비아 민중

이러한 배경을 근거로 혹자는 리비아 항쟁에서 동부의 소외감과 이슬람주의적인 배경을 강조하기도 한다. 카다피 역시 동부에서의 무장반란에 대하여 알카에다나 제국주의 세력들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비난해 왔다. 데르나를 비롯한 일부 지역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이 선동하고 개입한 사실이나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2011년 2월 벵가지의 시위가 동부에서만이 아니라 불과 3-4일 만에 리비아 전역의 폭발적인 항쟁으로 발전한 것은 단순히 이슬람주의자나 외부세력의 선동만으로는 설명될 수가 없다. 거기에는 이미 카다피 체제에 대한 폭발 직전의 불만과 분노가 있었다고 해야 한다. 국제위기그룹과 엠네스티의 보고를 보자.

 

  리비아의 봉기에 기름을 끼얹은 불만은 중동이나 북아프리카에서는 친숙한 얘기다. 부패와 그릇된 처리와 결합된 수십 년에 걸친 정치적 억압과 권위주의는 광범위한 계층을 소외시켜 왔고 일단 불꽃이 튀자 인민들은 두려움을 잃고 일제히 도로를 장악하고 정권을 굴복시키려는 목표에 결합하였다. 시위대는 반카다피 슬로건을 외쳤다. ‘카다피가 아니라 알라를!, 카다피는 알라의 적이다! ,부패 타도, 부패한 자 타도!, 꺼져라! 카다피는 지옥으로!’***63

  북아프리카의 다른 불안정한 나라들과 비교되는 리비아 경제의 상대적 안정성에도 불구하고, 실업과 다른 사회경제적 불만이 ‘2월 17일 혁명’을 추동했고, 전 리비아인들이 단결하여 투쟁하게 만들었다. 시위자와 반정부 투쟁의 지지자들은 부패와 실업 그리고 불평등이 봉기의 핵심적인 방아쇠였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국가는 부유하지만 인민은 가난하다. 왜냐 하면 카다피 치하에서 국가의 부는 그의 지지자들의 이익으로 분배되어 왔기 때문이다”고 엠네스티에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또한 석유로 얻는 부와 현저하게 대비되는 지방의 사회기반시설, 교육, 의료 서비스의 빈약한 현실을 지적했다.****64

 

결국 극심한 정치적 억압과 실업난, 억눌려진 삶의 질이라는 사회경제적 처지가 항쟁의 배경인 것이지, 단순히 동부의 소외감이나 이슬람주의자들의 반란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바로 그 때문에 동부의 봉기세력은 서부를 비롯한 전 리비아 민중의 봉기를 호소했던 것이고, 미스라타와 트리폴리, 자위야 등 전국에서 봉기에 나섰던 것이다. 이처럼 리비아 항쟁의 전 국민적이고 전국적인 성격은 명백한데, 이를 인남식이 ‘부족 기반 내전’ 운운한다든지, 정상률이 ‘친카다피 부족과 반카다피 부족 간의 갈등’*****65 운운하는 것은 사실과도 맞지 않고, 항쟁에 나섰던 민중의 정체성에도 맞지 않다. 리비아 민중은 친카다피 부족과 싸운 것이 아니라 카다피 체제와 싸운 것이다. 부족 지도자들은 단지 기회주의적인 낡은 지배계급으로서 NTC라는 이권에 참여하고 있을 뿐이다.

리비아 항쟁의 주체는 누구였을까? 벵가지를 비롯한 동부지역에서 시위에 나서고 투쟁에 앞장선 것은 리비아 민중들이다. 8개월이 넘는 내전에서 카다피의 정규군과 일선에서 싸운 사람들도 바로 그들이다. 반군이 진격하기 전에 스스로를 해방시킨 자위야나 트리폴리의 무장봉기도 리비아 민중들이 일으킨 것이다. 토브룩에서 항구와 지역은행과 석유 저장소를 지키고 시위대를 지원한 자원자들이나,*66 전사들을 위해 매일 8,000개의 피자를 공급한 미스라타의 시민들**67도 카다피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민중이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청년들이었다.***68

 

4) 내전으로 발전한 이유

리비아 민중이 항쟁에 나선 이유도 다른 아랍 국가들과 비슷하다. 42년에 걸친 장기독재와 지독한 부패와 억압,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한 생활고와 절망적인 실업 등등. 문제는 왜 다른 나라와는 달리 내전으로 발전되었고, 서방 제국주의국들의 개입전쟁으로 확대되었는가이다. 혹자는 허구화된 자마히리야 체제와 카다피의 비정상적인 억압 때문에 군대가 정권과 시위대를 중재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고 말한다. 혹은 카다피가 그동안 보여준 무자비한 억압과 보복이 사생결단으로 나아가게 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무장반란은 필연적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69 그러나 사생결단의 투쟁이나 무장을 동반한 투쟁이 반드시 군사력과 군사력 간의 정면대결인 공식적인 내전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하여 필자는 회의적이다.

튀니지에서도 지방도시에서 시위가 시작되었을 때 경찰의 발포가 있었고,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 그리고 바리케이드로 저항하였다. 탈라 전투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싸움은 어쨌든 시민과 경찰 혹은 공권력과의 싸움이다. 1980년 광주의 시민군이 아무리 무기를 들어도 그것은 정권에 대한 항쟁이었지 내란은 아니었다. 그런데 리비아에서는 2월 20일 시위가 수도에 도착하기 이전에 이미 벵가지를 비롯한 동부지역에서 방화와 군부대의 이탈과 그로 인한 적극적인 무장으로 소요 수준을 넘는 상태에 있었다. 그들은 탈취한 탱크 위에 올라가 구 왕정의 3색기를 흔들었다. 이러한 행동은 4.19혁명 때 반정부 시위대가 독재자 퇴진이나 이승만 타도에 멈추지 않고 북한의 인공기를 흔드는 것과 비슷한 행위인 것이다.

정권의 부정과 체제의 부정 그리고 국가의 부정은 성격이 다르다. 체제의 부정이 혁명이라면 국가의 부정은 내란인 것이다. 영국 제국주의의 꼭두각시였던 구 왕정의 복귀는 대다수 리비아인의 정서나 의식에 부응한 것이 아니었고 결코 바람직하지도 않았다. 3색기는 카다피로 하여금 외부의 사주에 의한 내란이라고 비난할 수 있는 명분을 주었고, 군대를 사용할 명분을 줄 수 있었다. 순수한 내란일 경우 외국은 개입할 권리가 없다. 이런 점에서 보면 분노한 벵가지의 대중들이 군부대를 공격하여 무장을 한 것은 당연하지만 3색기를 흔든 것은 실로 잘못된 일이다. 사망자의 대부분은 15-35세의 청년들이었다. 42년에 걸친 카다피 집권 동안 이들은 태어나기도 전에 사용되었던 3색기를 본 적도 없고 향수도 없었다. 결국 카다피 체제에 대한 극단적인 반감 때문에 누군가가 흔든 3색기를 반카다피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지만 이것은 실로 잘못된 일이었다.

역사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이지만, 혁명은 수도에서 결판이 나는 것이다. 만약 수도에서 광범한 대중의 진출로 저항이 시작되었다면 설령 카다피가 무차별 사격으로 잔인한 진압을 시도하고 대중도 무장하여 싸웠다면 그것은 내전이 아니라 항쟁이었을 것이고, 제국주의의 개입 없이 카다피를 타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방도시가 아닌 수도는 폭격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총으로 시가전을 하더라도 시위대와 일반시민에 대한 중무장한 군사작전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70 카다피의 무장대가 아무리 총을 쏘더라도 벵가지나 바이다나 미스라타, 트리폴리에서 보는 것처럼 대중들이 폭발하면 공권력을 몰아내고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는 것이다.

불과 2-3일도 안되어 동부 전역을 포함한 폭발적인 대중항쟁으로 발전한 시기에 리비아 인민들은 무엇을 해야 했을까? 그것은 각 지역 세력의 연결․연합과 수도로의 집중 그리고 항쟁의 중심을 만드는 것이었다. 공권력을 몰아내거나 무력화시킨 공간에서는 파리코뮌이나 소비에트처럼 자발적인 대중의 투쟁조직과 자치조직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런 자생적인 대중의 투쟁체가 서로 연대하여 항쟁의 중심부나 지도부를 만들고 카다피를 몰아냈어야 했을 것이다.*71 그 중심부는 임시정부를 자칭할 것이 아니라 이집트에서 보았듯이 ‘혁명방어위원회’나 ‘민중위원회’ 혹은 ‘카다피퇴진운동본부’ 정도면 충분했다. 임시정부를 자칭하는 순간 공식적인 내전이 된다는 것을 법무장관이나 내무장관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전으로 인정되는 순간 카다피에게 군대와 중화기를 사용할 명분을 주게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카다피에 대한 항쟁이 피크에 달했던 2월 24일 “반정부 정치인, 이탈한 군 간부, 부족 지도자, 학자, 경제인들은 바이다에서 회합을 가졌다. 며칠 전 정부에서 사임한 잘릴이 의장이 된 이 회의에서 대표자들은 리비아 국가의 통일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트리폴리를 수도로 삼는다고 말했다. 그들은 리비아에 대한 ‘유엔 개입을 요청할’ 많은 대표자들로 이루어진 과도정부에 대한 제안을 토의하였다. 회의장에는 구왕정의 깃발이 놓여 있었다.”**72 그리고 이들은 2월 27일 임시정부의 구성원을 발표하고 3월 2일 NTC를 공식 출범시켰다. 이제 리비아 민중의 항쟁은 카다피의 정부군과 구왕정의 깃발을 든 임시정부와의 공식적인 내전이 되었고 카다피는 중무기를 사용할 명분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리비아 민중을 학살의 위험에 빠뜨린 NTC가 저지른 가장 큰 범죄이다.

트리폴리를 제외한 리비아 전역에서 공권력을 몰아내고 민중들이 트리폴리에서 마지막 결전을 벌이고 있던 즉 항쟁이 피크에 달했던 그 순간에 왜 이들은 NTC를 서둘러서 출범시켜야만 했던가? 그들의 출범 이유인 유엔 개입을 요청해야할 아무런 필요성도 없던 바로 그 시점에서 NTC의 출범을 서두른 것은 이들이 민중의 승리가 아닌 다른 목적을 가졌다고밖에 볼 수 없다. 제국주의자들은 튀니지와 이집트 혁명에서 군부를 통해 개입할 수 있었지만 리비아에서는 개입할 고리가 없었다. 이 부족한 고리를 NTC는 참으로 훌륭하게 제공했던 것이다. 결국 잘릴을 비롯한 카다피 정권의 이탈파들과 낡은 지배계급들은 제국주의자들이 개입할 수 있는 고리가 되기 위해 그리고 카다피의 유혈진압을 유도하여 제국주의자들이 개입할 명분을 주기 위해 유일합법정부를 자칭하면서 나토의 충실한 도구가 되었다고 해도 부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리비아 민중의 투쟁이 항쟁이 아니라 내전이 되게 한 가장 큰 과오는 NTC를 만들어 유일합법정부를 자칭한 것과 3색기를 흔든 데서 연유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오 때문에 군사력으로 대결하는 내전이 되었던 것이고 잘 짜여진 각본처럼 제국주의의 개입전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5) 제국주의자들의 개입 이유와 공작 의혹

서방이 왜 개입하였는가에 대하여는 많은 사람들이 석유이권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페트라스와 지게디의 글을 비교해 보자.

 

  그들의 안전에 어떠한 위협도 보이지 않고 있고, 그들은 이미 석유와 우호적인 투자환경에 충분히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석유보다는 군사적인 이유에 주목해야 하며, …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새로운 시장과 천연자원의 착취에 의존하는 독일, 중국, 러시아, 브라질과 같은 나라들은 전쟁보다는 시장의 안정을 바라면서 개입에 반대했는데, 미국,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 개입에 앞장 선 나라들은 자신들의 더 많은 몫을 위해서 이 구도를 깰 필요가 있었다.***73

  2003년 이후 서방자본이 리비아로 열광적으로 쏟아져 들어왔지만, 카다피가 강요한 ‘EPSA-4’라는 새로운 규칙에 의하여 생산량의 90% 이상을 리비아 국영석유회사에 주어야 했기 때문에 많은 석유자본들이 계약연장을 포기하였고, 특히 이탈리아의 Eni-SpA가 냉대를 받아 불만이 컸기 때문에 나토의 공격을 행운이라고 했고, 8월 중순에는 임시정부와 리비아의 모든 가스와 석유수요를 충당하는 계약을 했다.****74

 

이처럼 페트라스는 군사적 이유가 우선이고 제국주의간의 경쟁도 작용했다고 주장하고, 지게디는 석유를 둘러싼 이권을 강조한다. 석유나 군사적 이익 모두 제국주의 개입의 동기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의문이 남는 것은, 2월 22일 리비아 국영방송이, 카다피가 “사퇴하거나 떠나지 않고 순교자로서 죽겠다”고 연설한 후에 베를루스코니에게 전화를 걸어 깊은 우정을 나눈 사실을 보도한 것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설령 카다피가 불만스러웠다고 할지라도 서방자본의 특별이윤을 어느 정도는 보장하였고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 협력해 오고 아프리카인들의 불법이민에 대한 나토국들의 고민을 해결해 주고 있는 상황에서*****75 왜 그 시점에 군사적 개입까지 불사했는가이다. 그 이유는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자들은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는 민중들의 투쟁을 친제적이고 친미적인 군부를 통하여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었지만, 리비아의 경우는 카다피에 의해 모든 정치세력이 압살되어서 민중들의 투쟁을 방치할 경우 제국주의의 이익에 도전할 수밖에 없고 반제적인 이슬람주의 강경파들의 성장도 용인할 수 없기 때문에, 이미 원성의 대상이 된 카다피를 적극적으로 버림으로써 리비아를 제국주의의 영향력 하에 두는 것이 필요했다. 리비아는 결코 리비아 민중의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자들을 위해서 존재해야 했던 것이다. 이것이 어제까지만 해도 서방 지도자들과 깊은 우정을 나누었고 그다지 불만스럽지 않았던 카다피에게 안면을 바꾸고 군사적 개입을 결정하게 된 가장 큰 이유이다. 또한 잘릴과 유니스를 비롯한 낡은 지배계급 역시 민중들의 성장과 전투적 이슬람주의자들의 성장이 두렵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제국주의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야합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돌이켜보면 알자지라나 서방언론 그리고 제국주의의 책임있는 당국자들의 발언은 사전음모에서가 아니라 지나친 편견에서 나온 발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2월 20일 무렵 카다피측이 유화적인 수습책을 발표하고 사태를 대화로 풀려는 노력을 하고 있던 시점에서 전투기에 의한 집단학살이나 과도한 폭력을 운운한다든지, 항쟁이 정점에 달해 누구나 카다피 체제가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던 바로 그 시점에 유엔개입을 요청할 유일합법정부를 자칭하고 NTC의 출범을 서두른 것은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행동들이고, 이 행동들은 오직 리비아 혁명에 개입할 명분과 고리를 찾고 있는 제국주의자들에게 커다란 기쁨을 주는 맞춤행동이었다. 따라서 내전과 제국주의 개입전쟁으로의 발전은 제국주의자들의 주도면밀한 공작에 의한 것이라는 의혹을 벗어날 수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포르테가 2월 중순부터 벵가지에서 파견된 CIA의 공작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것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76

 

6) 제국주의 개입을 둘러싼 좌파의 분열

제국주의의 군사개입이 시도되고 있을 때 많은 논쟁들이 벌어졌다. 전투기까지 동원하여 민중을 학살하고 있는 상황에서 서방의 군사개입은 필요하다는 주장과, 제국주의의 군사개입은 또 다른 예속과 비극을 낳을 것이기 때문에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있었다. 어떤 좌파에선 비행금지구역 설정은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좌파는 비행금지구역이 아니라 ‘리비아 인민을 무장시켜라’는 구호를 내세우기도 하였다.**77 여기서는 가장 정교한 개입찬성론이라고 할 수 있는 타스님 퀴테트의 주장을 살펴본다.

 

  리비아에 대한 국제적인 군사개입은 특히 좌파진영을 둘로 분열시켰다. 개입찬성론자들은 이러한 개입이 없다면 봉기가 궤멸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개입반대론자들은 이러한 개입을 이라크 전쟁과 똑같은 군사적 공격이라고 주장한다. … 개입반대론자들이 가장 즐겨 드는 것은 서방측의 두 개의 잣대에서 보이는 위선이다. 똑같이 살인적 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예멘이나 바레인이 아니라 왜 리비아냐는 것이다. … ‘외국간섭 반대, 리비아 인민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벵가지에 걸려있는 현수막에는 외국개입 반대는 전면적인 지상군과 리비아 점령을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비행금지구역과 국제공동체로부터의 지원 요청이 함께 있었다.***78 … 몇몇 좌파들은 서방은 그들 자신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많은 서방국가들이 카다피 체제를 도와왔다고 지적한다. … 만약에 카다피가 리비아의 봉기를 짓밟는 데 성공한다면 그것은 아랍의 봄에 어떤 영향을 가져올까? 보다 더 큰 자유를 위한 그들 인민의 커져가는 요구에 대처하는 방법을 찾고 있는 아랍의 독재자들은 카다피의 미친 행동 속에서 몇 가지 방법을 찾을 것이다.****79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엔결의안을 빙자한 ‘인도주의적 개입’은 날조된 이유에 기반한 것이고, 그 날조마저도 내전인 이상 결의안을 통과시킬 명분이 못 되는 것이지만, 설령 서방 언론이 퍼뜨린 카다피의 학살만행이 사실이고 현지의 리비아인들이 집단학살의 두려움을 느꼈다고 할지라도, 제국주의자의 개입을 요청하고 지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혁명은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 하지만 혁명이란 민중들이 외세의 힘을 빌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퀴테트가 제기한 고민은 어려운 문제이기는 하지만 군사력 대 군사력의 대립으로 생각한다면 답이 없다. 튀니지의 탈라 전투나 미스라타 봉기에서 대중이 총을 가졌거나 무장력으로 압도했기 때문에 공권력을 몰아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총 지상군이 25,000명인 나라에서 이미 전 국민적인 항쟁이 시작되었고 군대의 상당수도 이탈하여 최소한의 무장은 있는 상황이고 무엇보다도 카다피가 아무리 전투기와 탱크가 있다고 하여도 석유기지나 시내 중심가나 민간인 지역을 폭격할 수는 없고 더구나 지상요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도시를 점령하여 주둔군을 배치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3월 중순 카다피의 공습에도 불구하고 토브룩과 데르나에서 반군은 전면대결이 아니라 밤에 활동하면서 공습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석유기지를 볼모로 삼아 슬기롭게 저항하고 있었다.*****80 미스라타 투쟁에서 보듯 고립되어 각개격파를 당하지만 않고 전선에 집착하거나 진지전에 매몰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카다피를 후방에서 교란한다면 저항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분명 어려운 문제이지만 이 상황에서 좌파가 해야 할 일은 카다피의 잔인한 심성과 우월한 군사력을 걱정하여 논쟁할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여 카다피의 약점을 찾아 대중과 함께 저항하는 길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퀴테트의 주장에는 대중노선의 관점이 결여되어 있다. 퀴테트의 주장대로 만약 외부의 도움이 없으면 학살당할 수밖에 없고 혁명이 궤멸될 수밖에 없다면 수천 명이 학살당하고 있는 시리아나 예멘의 대중은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역사는 되돌릴 수 없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민중은 어떠한 억압과 고난도 그들의 단결된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

 

제4장 혁명의 중간 결산과 평가

 

1. 혁명의 중간 결산

1) 튀니지

1월 14일 이미 70명을 학살하고 117명이 희생되었음에도 거세어지는 민중의 항쟁을 더 이상 억압할 수 없게 되자, 미국과 군부를 비롯한 지배계급은 이용가치가 없어진 벤 알리를 버렸다. 그리고 벤 알리의 심복이자 공군장성 출신인 모하메드 간누치를 수반으로 하는 여야통합 ‘과도정부’인 임시정부(국가통일정부)를 구성하고 6개월 내에 새로운 입법부와 대통령을 선출할 것이라고 밝혔다. 1월 17일 간누치 총리는 23인의 새 내각 구성안을 발표하였는데, 새로운 장관들 대부분은 은행과 사기업의 전 경영자, 임원, 매니저 등 신자유주의적인 ‘골든 보이즈’들이었고, 벤 알리 시절의 구정부에 있던 6명의 장관이 포함되었다. 이에 내각에 들어간 UGTT 소속 3명의 장관은 헌법개정, 집권당(RCD) 해체 등을 요구하며 과도내각에 반발해 사퇴하였다. 한편 벤 알리가 물러나자 그동안 억눌려져 왔던 대중들의 투쟁이 폭발하였다. 마사케니스나 벤자, 탈라와 같은 일부지역에서는 공권력을 몰아내고 대중들의 자치조직인 코뮌의 단계까지 발전하는 지역도 있었다.*81 그리고 반동적인 군부는 중간계급에 대하여 유화적이면서도 노동계급의 요구와 운동은 철저히 짓밟아 왔다.**82

벤 알리 퇴진 이후의 이러한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삶을 위한 투쟁은 1987년 6월 항쟁 때 기만적인 직선제 개헌안을 지도부가 받아들이고 많은 시민들이 집으로 돌아간 후 7월부터 9월까지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난 것과 비슷하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처럼 정치혁명은 그때까지 억눌려왔던 경제투쟁에 기름진 토양을 제공하는 것이다. 군부를 앞세운 온갖 정치적, 경제적 엘리트를 포함한 구 지배계급은 벤 알리를 도피시키고 집권당의 당명을 바꾸고 몇몇 학살책임자들을 희생시키면서 그대로 온존해 있다. 단지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 몇 가지 양보를 했을 뿐 지역노조를 비롯한 노동자계급과 반정부 시위대에 대해 총을 쏘는 등 단호하게 억압하고 있다. 7월 24일로 예정되었던 제헌의회 선거는 10월 23일로 연기되었는데, 이 선거에서 세속적 이슬람주의 정당인 엔나흐다당이 40%의 득표를 얻어 제1당이 되었다.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라는 미명하에 낡은 지배계급은 노동자계급을 포함한 기층 민중은 배제하면서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 소부르주아적인 이슬람주의 세력과 연합하여 형식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틀을 갖추는 것이다. 그리나 이 체제는 민중의 바람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투쟁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83 투쟁은 더 전진해야 하지만 민중운동 진영의 헤게모니는 미약한 듯하다.

 

2) 이집트

  “무바라크를 몰아낸 혁명은 정권의 일부만 해체했다. 무바라크의 가족과 그들과 연계된 경제인, 국가 관료제와 NDP의 중요인사, 국가보안기구의 많은 사람들과 정권의 기본 구조는 그대로이고 군부와 국가 관료제는 국가를 강력하게 통제하고 있고 과도기간의 이행과정을 지배하는 위치에 있다.”****84

 

무바라크가 물러난 뒤 군사최고위원회SCAF는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정지하면서, “자유롭고 민주적이며 문민적인 당국에 권력을 넘겨주는 작업을 계속할 것이다. 군부는 모든 지역적, 국제적 협정은 존중될 것”이라고 밝혔다. 군부의 이러한 발언은 낡은 지배계급이 민중의 혁명을 형식적 민주화로 수렴하고 민중들의 고통의 근원이었던 신자유주의 세계화 정책과 제국주의 패권주의에 야합하는 이스라엘과의 ‘차가운 평화Cold Peace’ 정책을 계속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85 그동안 반동적인 군부는 새 정부 구성을 지연하고 국가비상조치법을 재가동하면서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기층 민중들의 요구와 운동을 철저히 짓밟아 왔다. 군부가 내무, 주택, 관광 장관 등 구정권의 일부 핵심과 철강재벌을 구속하고 6개월 내에 선거를 통하여 권력을 이양한다고 밝히자 시위대의 대부분은 타흐리르 광장을 청소하고 집으로 돌아갔지만 소수의 시위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구체제 인사의 철저한 처벌과 청산 그리고 군부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한 시위가 3월부터 다시 성장하였고 그 흐름은 이슬람주의자들의 타협적 태도와 상관없이 계속되었다.*86 특히 9월로 예정되었던 선거를 연기한 군부가 11월 2일 기성정당과 군부에 유리한 선출방식과 “민선정부가 헌법 원칙을 위배할 경우 군이 헌법을 수호하는 기관의 역할을 하도록 하고, 의회는 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법률을 발의하기 전에 군의 승인”을 받도록 하는 헌법원칙을 발표하자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가 폭발하였다. 11월 18일 수만 명으로 시작된 시위는 11월 25일에는 전국적으로 100만 명이 참여하였다. 이날 10명이 죽고 1,000명이 부상당했다. 이제 이집트 혁명은 군부와 낡은 지배계급과 기회주의적인 이슬람주의 세력을 한편으로 하고**87 혁명을 배반당한 민중을 한편으로 하는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하였다. 혁명이란 계급지배의 사회에서 단지 독재자라는 간판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성립된 질서 속에서 어느 계급의 헤게모니가 관철되느냐의 문제이다. 이집트 민중의 혁명이 한국의 87년 민주항쟁처럼 형식적 민주화로 수렴될 것인지 보다 근본적인 사회혁명으로 나아갈 것인지는 이집트 민중의 투쟁에 달려있다. 그러나 ‘무바라크 없는 무바라크 체제’가 계속되는 한 민중들의 투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3) 리비아

제국주의의 개입을 애원하기 위해 혹은 개입의 명분을 위해 만들어진 NTC는 애초에는 반군의 지도체가 아니라 대외 접촉부 정도의 위상이었다. 2월 24일 바이다에서의 첫 모임에 합류한 반정부 정치인, 이탈한 군 간부, 부족 지도자, 학자, 경제인 등의 구성이나, NTC가 발표한 내각의 구성***88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들은 기본적으로 친제국주의적인 낡은 지배계급들이다. 그리고 오직 제국주의가 개입할 고리와 명분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NTC는 민중주도의 혁명과 전투적인 이슬람주의자들을 두려워하여 제국주의자들과 결탁한 가장 반동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집단이다.

한편 반군의 구성을 보면, “주로 시민들 즉 교사, 학생, 법률가, 석유 노동자 그리고 리비아 군대에서 이탈하여 반군에 합류한 직업군인들의 파견대”****89로 이루어져 있다. 카다피와 싸운 반군 전투원들은 대부분 일반 시민들이고 체제에 절망한 젊은이들이었다.*****90 그들은 지역적 혹은 부족적으로 구성된 부대에 결합하고 여기에 군사경험이 있는 군 이탈자들이 합류했다. 또한 반군 부대들 가운데는 초기에 벵가지에서 만들어진 ‘2월 17일 순교자 여단17 February Martyrs’ Brigade’*91과 같은 부대도 있고, 주로 아부살림 교도소 수감자 출신으로 이루어진 ‘자라 여단Obaida Ibn Jarrah Brigade’과 같은 이슬람주의자들의 부대도 있다. 그리고 2월 16일 데르나의 무장봉기를 선동한 이슬람주의자들이나 LIFG의 리더였던 압델 하킴 벨하지처럼 트리폴리 시 군사령관의 경우도 있지만, 카다피가 이슬람조직들을 철저하게 억압했기 때문에, “반군 가운데에 알카에다의 흔적이 있기는 하지만, 의미있는 알카에다나 테러리스트의 존재가 있다고 확신할 만한 충분한 정보가 없다”는 나토 사령관이 밝힌 정보보고서**92처럼 시위대나 반군 전체에 있어서 전투적인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비중은 크지는 않은 것 같다. 그리고 반군이 장악한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벵가지에도 주로 이탈한 경찰과 보안대로 구성된 수십 개의 자경단이 있다. 이들이 중화기로 무장한 픽업 트럭을 몰고 다니면서 혁명을 전복한다는 이유로 카다피 충성파나 무고한 흑인들을 색출하여 ‘카다피의 개’나 ‘용병’으로 비난하면서 살인행위와 사적 린치와 약탈을 저지르고 있다는 수많은 보고가 있다.***93

 

이제 카다피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개입으로 몰락하였다. NTC는 8개월 후(2012년 6월)에 민주정부를 수립한다는 구상을 밝혔다. 카다피 치하에서는 정당이나 사회운동 세력이 성장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온갖 기회주의적이고 반동적인 세력이 NTC와 반군의 상층부를 장악하고 있다. 이들의 기본적 성격은 친제국주의적이고 기회주의적인 낡은 지배계급이다. 또한 카다피에게 억압을 당했든 혹은 혜택을 받았든지 간에 본질적으로 이해관계로 다투는 낡은 세력들인 부족 원로들이 있다. 그리고 자경단들의 횡포에서 보는 것처럼 경찰이나 보안대 출신의 기회주의적인 세력이 있다. 한편 기본적으로 반제적이고 민족주의적이지만 보수적이고 여성에 대해 억압적인 이슬람주의 세력과 보다 정의롭고 더 나은 삶을 원하는 민중이 있다.

따라서 NTC의 상층부는 제국주의자들의 도움으로 주도권을 장악하겠지만 이들의 친제국주의적 성격은 전투적 이슬람주의자들이나 민중의 바람과는 충돌할 수밖에 없다. 모든 세력이 합의할 수 있는 것은 다당제 민주주의와 여성에게 억압적이지 않고 타 종파에게 관용적인 세속주의 정도이다. 혹은 NTC와 반군 상층부의 낡은 지배계급들이 온건 이슬람주의자와 야합하기 위하여 샤리아(이슬람 율법)를 앞세워 반동적인 근본주의적 정치체제를 받아들일지 모른다. 그러나 리비아 민중들이 무엇보다 바라는 것은 부의 공정한 분배와 일자리 그리고 보다 나은 삶이다. NTC는 이러한 바람을 배반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갈등은 계속될 것이다.

대중의 자발성과 투쟁성이 한껏 고양되던 지난 2월 하순에 조금만 더 밀어 붙였으면 카다피를 몰아 낼 수 있었을 텐데도, 민중이 주도하는 혁명을 두려워한 제국주의와 기회주의 세력들이 혁명이 아닌 내전으로 성격을 바꾼 뒤 끝내 제국주의의 개입전쟁으로 발전시켰다. 이런 점에서 리비아 내전의 승자는 리비아 민중이 아니라 제국주의와 기회주의 세력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결과는 자마히리야 체제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반군은 무장을 해제하지 않고 있지만, 엄밀한 의미의 공권력이 없다. 그 때문에 지난 12월 13일 벵가지에서 일어난 시위****94에서 보듯 정당한 요구를 하는 민중들을 억압하는 공권력이 없고 아무리 반동적인 NTC라고 하여도 당분간 민중에게 적대적인 억압을 할 수 없다. 이것이 리비아 민중이 희생 끝에 얻어낸 소중한 자산이다. 그들은 낡은 지배계급의 국가기구를 일소해버린 것이다. 파리코뮌 이후 이처럼 낡은 국가기구를 철저하게 파괴한 혁명은 없었다. 그러므로 리비아 민중의 혁명은 자본가 계급까지 전 국민적으로 참여한 항쟁이자 ‘제국주의 하수인인 낡은 지배계급이 왜곡하는 국민혁명’이다. 비록 낡은 지배계급과 제국주의 세력이 또다시 낡은 질서를 강요하려고 하고 있지만 낡은 질서와 총을 들고 싸웠던 민중을 억압하고 순응시키는 일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리비아 민중은 이들 제국주의와 기회주의적 친제 반동세력과 싸워 진정으로 자주적이고 민주적이고 민중적인 사회를 건설할 과제가 남아있다.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2. 혁명의 총체적 평가

1) 제국주의 질서와 아랍민중혁명

  사회적 봉기가 실제 혁명으로, 다른 말로 하면, 이 체제에 진정한 위험으로 변하기 전에 소모된 독재자를 포기하고 그의 후계자를 조직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고 워싱턴에 보고됐다.*****95

 

아랍 혹은 중동에는 무엇보다도 석유 이권을 중심으로 미제국주의가 압도적인 군사력을 앞세워 배타적인 패권주의를 관철하는 가운데 영국과 프랑스 등 서방 제국주의가 보조적 군사력으로 이권의 분배에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제국주의 질서는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를 축으로 하여 전개되어 왔고, 이 질서에 반항하는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이란이나 과거의 리비아는 혹독한 응징이나 고립과 경제제제가 강요되었다. 1967년 이스라엘의 침략전쟁과 점령은*96 이 지역 아랍민중의 커다란 고통이었고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아랍민중의 분노와 저항을 낳았다. 이 점에서 사다트가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을 체결한 것은 아랍의 대의를 저버린 것이었다. 제국주의가 강요하는 중동질서에서 이집트는 참으로 중요하다. 나아가 튀니지나 리비아 등 어떤 나라에서도 이 질서를 위협하는 세력이 권력을 장악해서는 안 되고, 그것은 친미적인 군부의 주도하에 반제의 대의를 앞세운 전투적 이슬람주의자들의 배제와 함께, 체제의 안정을 위해 본질적으로 중간계급적 혹은 소부르주아적이라고 할 수 있는 타협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온건 이슬람주의자들의 포섭과 매수로 나타났다. 튀니지의 엔나흐다당과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의 부상이 그것이다. 그리고 리비아에서는 제국주의가 개입할 고리가 없었기 때문에 NTC를 급조했다. 그러나 제국주의적 질서를 위해 개입전쟁으로까지 발전하였지만 지상군의 투입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군의 점령은 이 지역에 있는 하수인 세력의 질서 장악력의 부족 때문이었지만, 이 지역 민중들의 저항으로 점령의 명분을 잃고 철수했거나, 철수해야 할 운명에 있다. 또한 이스라엘의 아랍민중에 대한 학살은 노골적이기는 하지만 이 지역 민중의 저항과 선진국 여론은 노골적인 군사적 개입을 제약하고 있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도 미제국주의의 개입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노골적인 개입이 아니라 친미적인 군부를 앞세운 은밀한 공작이었다. 이러한 모든 것은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가 군사력과 경제력에 있어서 막강하지만 흔들리고 있고 쇠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은 반제의 과제가 자주적 권력의 수립 즉 친제 세력의 타파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한다.

2011년 아랍민중들의 혁명적 투쟁은 특히 이집트의 경우처럼 제국주의 질서를 잠시 흔들거나 위협할 가능성을 보여주기는 하였지만 깨트리지는 못했다. 이제 3국 모두 반민중적인 지배계급은 체제의 유지를 위해 혹은 민중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서 서방자본의 지원과 투자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것은 이들 나라의 민중들이 싸울 수밖에 없었던 고통을 강요했던 구질서로 회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석유이권을 둘러싼 군사적 질서와 신자유주의 세계화 축적체제라는 경제적 질서는 한층 더 높은 수준의 혁명투쟁을 요청하고 있다. 그리고 현대의 제국주의가 과거처럼 배타적 식민지나 군사적 위협 혹은 점령과 같은 무력에 의존하기보다는 각국의 군부나 독점자본가계급을 매수하거나 또는 이들 세력과 야합 혹은 동맹에 의존하고 제국주의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나라에게 경제적인 압박, 보복, 제제에 의존하는 측면이 강하다는 점은 자주적 권력의 수립과 유지에 또 다른 성격의 극복과제와 고민을 남기고 있다.

 

2) 이슬람주의 운동과 계급투쟁

그동안 제국주의는 물론 제국주의와 야합한 권위주의적 독재권력의 탄압을 받았던 다양한 이슬람주의자들**97은 반제 반이스라엘 투쟁에 앞장섬으로써 위신을 쌓을 수 있었다. 그런데 2011년 아랍민중혁명은 제국주의에 대한 군사적 저항을 위주로 하였던 전투적 이슬람주의자들의 투쟁과는 맥락이 다른 것이었고 팔레스타인과 아랍 전역의 연대투쟁이었던 인티파다(대중들의 거리에서의 저항)와 맞닿아 있다. 체제에 대한 거대한 전 대륙적 투쟁에 있어서 전투적 이슬람주의자들은 리비아에서 약간의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거의 무기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2011년 아랍민중혁명은 무장노선과 대중노선의 대결에서 대중노선의 최종적인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전투적 이슬람주의자들은 제국주의에 의해 철저히 억압되었기도 하지만 이번 혁명의 결산에서도 거의 배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전투적인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은 제국주의에 의해 물리적으로 배제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군사적 지향은 아랍혁명에서 폭발된 대중운동 앞에서 매력을 잃을 것이고 이미 세속화된 민중들 앞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도 매력을 잃을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억압받아왔던 온건이슬람주의 운동 역시 체제에 편입되거나 야합함으로써 당장은 이들 지역에서 정치적인 부상은 하겠지만 대중들에 대한 위신은 축소되어갈 수밖에 없다.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여성 억압적인 봉건적 이데올로기는 그들의 정치적 위신의 추락과 함께 민중들이 추구하는 세속주의 지향을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친제 봉건적인 이슬람주의세력을 몰아낸 뒤 성립한 반제 세속적인 후견독재를 뒤이은, 친제 반민주적이면서 세속적인 신자유주의 권위주의 권력과 봉건적인 반제 반독재 이슬람주의세력의 대립은, 다시 친제 친신자유주의 온건 이슬람주의세력과 반제 반신자유주의(반자본) 세속주의적인 민중세력의 대립으로 귀결될 것이다. 따라서 반제 반독재라는 진보적 측면과 여성억압이라는 반동적 측면을 가지고 있는 이슬람주의 운동은 강온 이슬람주의의 쇠퇴 혹은 위신의 추락과 함께 이 지역에서 친제 친신자유주의와 반제 반자본이라는 계급적 모순을 명료히 할 것이다.

 

3) 아랍민중혁명의 의의

2011년 아랍민중의 투쟁은 단순한 반독재 민주화투쟁이 아니다. 이 투쟁이 세계사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1980년대 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 전 세계적으로 완성된 ‘신자유주의 세계화 축적체제’에 대한 범대륙적 규모의 혁명적 저항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제국주의 독점자본이 강요한 경제적 질서에 대한 도전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번 아랍민중의 혁명은 이집트에서 보듯 이스라엘-사우디아라비아-이집트를 축으로 하는 제국주의의 군사적, 정치적 질서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는 아랍세계의 어떠한 나라도 자신들이 강요하는 질서를 위협하는 세력을 허용할 수 없다. 아랍세계의 민중들이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반미, 반제, 반이스라엘 정서와 친팔레스타인이라는 범아랍민족주의***98는 본질적으로 이 지역에 제국주의가 강요하는 군사적, 정치적 질서에 대한 반감을 담고 있다. 비록 이번 항쟁에서 반제 범아랍 민족주의적 슬로건이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2011년 아랍민중의 항쟁이 설령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외관을 띤다고 할지라도 그 운동의 성장 그 자체가 제국주의에 야합하거나 매수된 세력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에 제국주의가 강요하는 질서에 대한 도전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2011년 아랍민중의 혁명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축적체제라는 제국주의의 경제적 질서만이 아니라 2차 대전 이후에 이 지역에 강요된 군사적, 정치적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발전할 수 있는 혁명적 저항과 투쟁으로서 세계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고, 그동안 아랍사회에서 계급의식과 계급투쟁의 성장에 악영향을 끼쳤던 봉건적인 이슬람주의에 대한 극복으로 이어지는 중대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고 할 것이다. [진보전략]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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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에 있는 인터넷 페이지들은 모두 2011년 12월 15일 최종적으로 검색된 것이다.


* 2008년과 2009년 World Bank 자료에 따르면,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3국의 문자 해독률은 각 66%, 78%, 89%이고, 기대수명은 각 73세, 74세, 75세였다.


** 카다피 정권의 이러한 혁명적 조치로 볼 때 비록 1980년대부터 제국주의의 경제봉쇄로 리비아 민중들의 삶이 어려워졌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혁명 후 20년 동안은 반제자주를 앞세운 카다피 정권이 민중들의 지지를 받는 통치의 정당성은 가지고 있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 Christopher Alexander,“The Rise and Fall of Ben Ali” in Revolution in the Arab world-A Special Report from Foreign Policy, Foreign Policy, 2011,(이하 Foreign Policy로 표시함) pp. 50-52.


**** 매튜 쿡슨, “이집트 민중 저항의 역사”, 『이집트 혁명과 중동의 민중반란』, 알렉스 캘리니코스 외, 책갈피, 2011, pp. 67-68


***** Dina Shehata, “The Fall of the Pharaoh : How Hosni Mubarak’s Reign Came to an End”, Foreign Affairs : The New Arab Revolt, (may / june 2011 volume 90, number 3), Foreign Affairs,(이하 Foreign Affairs로 표시함) p. 27.


* Muammar Al-Qaddafi, The Green Book, (Tripoli, undated), pp. 7-8. International Crisis Group, Popular Protest in North Africa and the Middle East (V): Making Sense of Libya, (North Africa Report N°107, 6 June 2011), p. 7에서 재인용.


** International Crisis Group, op. cit., pp. 7-9.


*** Guardian, “Tunisia’s former president Ben Ali goes on trial”, (20 June 2011) at http://www.guardian.co.uk/world/2011/jun/20/tunisia-former-president-ben-ali?INTCMP=SRCH


**** 김하영, “리비아혁명, 어떻게 볼 것인가?”,『마르크스21』, (9호 2011년 봄), 마르크스21 편집팀, 책갈피, pp. 156-158. 위키리크스에는 페트로-캐나다가 30년간의 석유채굴권을 얻은 대가로 카다피와 그의 동료들에게 10억 달러를 주기로 한 사실이 폭로되기도 했다. Doug Saunders, “The business of doing business in Gadhafi’s oil kingdom”, (26 Feb 2011) at http://www.theglobeandmail.com/news/opinions/opinion/the-business-of-doing-business-in-gadhafis-oil-kingdom/article1921542/, John Riddell, “How Can We Aid Libya’s Freedom Movement?”, (28 Feb 2011) at http://www.socialistvoice.ca/?p=1443에서 재인용


***** Christopher Alexander, “A Month Made for Drama” in Foreign Policy, pp. 46-48.


*1 Jack A. Goldstone, “Understanding the Revolutions of 2011” in Foreign Affairs, p. 11.


** 1981년 시작된 대 리비아 경제제제는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1992년부터는 유엔제재가 추가되었고, 1996년부터는 ‘이란·리비아 제제법’으로 석유개발마저 봉쇄됐다. 레이건은 1996년 트리폴리와 벵가지에 폭탄 60톤을 쏟아 부었다. 이 공습으로 무고한 리비아인 100여 명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 김하영, 앞의 책.


*** International Crisis Group, op. cit., p. 15.


**** 김하영, 앞의 책.


***** Dina Shehata, op. cit., p. 28.


*6 Reuters, “Libya’s jobless rate at 20.7 percent: report”, (2 Mar 2009) at http://af.reuters.com/article /investingNews/idAFJOE52106820090302


** 자국 내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한 수많은 아랍의 젊은이들은 유럽에서 일자리를 찾았고, 그들의 송금액 또한 적지 않았다. 그러나 공황으로 인해 고국으로 되돌아오고, 수출시장의 축소로 일자리는 더욱 줄어들었다.


*** 튀니지 혁명의 전개과정은 Malek Sghiri(25세, 대학 3학년 재학 중인 학생활동가)의 증언을 기본으로 여러 자료를 종합하여 재구성하였다. Malek Sghiri, “Heroic Resolve in the Face of the Omnipresent Machine of Oppression: Recounting the Events of the Tunisian Revolution” in Political analysis and commentary from the Middle East, (#2 May 2011, Special Issue), Perspectives,(이하 Perspectives로 표시함) pp. 202-207.


**** Aljazeera “Tensions flare across Tunisia”, (28 Dec 2010) at http://www.aljazeera.com/news/africa/ 2010/12/2010122819724363553.html


***** Aljazeera, “Violent clashes continue in Tunisia”, (04 Jan 2011) at http://www.aljazeera.com/news/ africa/2011/01/201114101752467578.html


*1 Los Angeles Times, “Rioting spreads across Tunisia; unrest also reported in Algeria”, (08 Jan 2011) at http://articles.latimes.com/2011/jan/08/world/la-fg-tunisia-riots-20110108


** 사메 나기브, “계속되는 혁명-무바라크 몰락 이후의 이집트”, 『마르크스21』, (12호 2011년 겨울), 마르크스21 편집팀, 책갈피, p. 142.


*** “광장 그 자체를 운영하는 조직은 가끔 투쟁을 선동할 때 신뢰를 받았던 페이스북 그룹이나 정당 혹은 운동들과는 완전히 절연된 하나의 실체다. 1,000명이 넘는 타흐리르 운영위원회의 멤버의 한사람이 말한 바에 따르면, 소수의 자원봉사자들이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프락치를 색출하고, 임시 의료소를 운영하고 있고, 100명 정도인 조정위원회가 중요한 결정을 하는데, 이들은 대부분 1주일 전만해도 서로 몰랐던 사람들이고, 활동가들도 아니다. … 타흐리르 광장 안에서는 점차 구역으로 나뉘게 되고, 확성기를 장악한 무슬림 형제단은 광장 남쪽, 완전한 스피커 장비를 갖춘 좌파들은 광장 서쪽, 그리고 그보다 작은 그룹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Blake Hounshell, “February 7: A New Leader for Egypt’s Protesters” in Foreign Affairs, pp. 96-99.


**** 벵가지 투쟁에 대하여는 엠네스티의 현장조사가 가장 엄격하고 정확하다. WP에 실린 Paul Schemm의 기사도 이에 부합한다. 여기서는 두 자료를 바탕으로 서술한다. Amnesty International, The battle for Libya : Killings, disappearances and torture, (September 2011. Index: MDE 19/025/2011), Paul Schemm, “Battle at army base broke Gadhafi hold in Benghazi”, (25 Feb 2011) at http://www.washingtonpost.com/wp-dyn/content/article/2011/02/25/AR2011022505021. html


***** 이날은 2006년 2월 17일에 있었던 벵가지 학살을 기념한다는 의미가 있는 날이었다. “2006년 2월 17일 벵가지에서 정치변화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 단지 유럽에서 인쇄된 선지자 무하마드(를 모욕한-인용자) 만화에 분노를 표시하는 시위가 일어나자 보안대는 12명을 죽였다. 2007년 트리폴리에서 10여 명의 활동가들이 이 비극적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평화적 시위를 계획하였다가, ‘정치체제를 전복하려고 시도하고, 리비아 정권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리고, 적들과 교류하였다’는 죄목으로 6-25년의 징역형에 처해졌다.” Amnesty International, op. cit., p. 13.


*6 테르빌은 1996년 아부 살림 교도소에서 학살당한 1,200명의 이슬람주의 운동과 관련된 죄수들의 가족을 대변해온 벵가지 출신의 유명한 변호사이다. 학살당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동부지역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 Alan Woods, “After the death of Gaddafi: Revolution and counterrevolution in Libya”, (21 Oct 2011) at http://www.marxist.com/gaddafi-dead-revolution-and-counter-revolution-in-libya.htm


*** Amnesty International, op. cit., p. 42, Paul Schemm, op. cit.


**** Amnesty International, op. cit., p. 7, Aljazeera, “Libyan police stations torched”, (16 Feb 2011) at http://www.aljazeera.com/news/africa/2011/02/20112167051422444.html


***** Guardian, “Libya protests: massacres reported as Gaddafi imposes news blackout”, (18 Feb 2011) at http://www.guardian.co.uk/world/2011/feb/18/libya-protests-massacres-reported. 리비아는 큰 나라이고 도로사정이 참으로 빈약하기 때문에 봉기를 한 시민들이 정부군을 막기 위해서는 비행장부터 장악해야 한다.


*1 AFP, “Libyan Islamists seize arms, take hostages”, (21 Feb 2011) at http://news.smh.com.au /breaking-news-world/libyan-islamists-seize-arms-take-hostages-20110221-1b19c.html


** Xan Rice, “Libyan rebels pay a heavy price for resisting Gaddafi in Misrata”, (21 Apr 2011) at http://www.guardian.co.uk/world/2011/apr/21/libyan-rebels-heavy-price-misrata


*** Wikipedia, “Misrata battle 2011” at http://en.wikipedia.org/wiki/Misrata_battle,_2011


**** AFP, “Libye de nouveaux morts lors d une operation des forces libyennes”, (19 Feb 2011. modified 21 Feb 2011.) at http://www.ladepeche.fr/article/2011/02/19/1019008-libye-de-nouveaux-morts-lors- d-une-operation-des-forces-libyennes.html


***** AP, “The Associated Press has news from Zawiya, Misrata and Tripoli”, (24 Feb 2011) at http://feb17.info/news/this-just-in/


*6 AFP, op. cit.,


** 조사위원회는 위원장은 리비아 판사가 맡되 국내외 인권단체 인사들로 구성된다고 밝혔다. 사이프는 2003년 이후 서방자본의 투자를 유치하는 개방정책과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유화정책을 추진했는데, 이슬람주의자와 협상하여 2006년부터 LIFG를 비롯한 850명의 이슬람주의자들을 석방하였고, 2011년에만 360명을 석방하였다. 2월 16일 테르빌과 함께 이슬람주의자 수감자 110명이 석방되자 이슬람주의자 수감자는 30명만 남게 되었다. Alexander Cockburn, “Libya rebels: Gaddafi could be right about al-Qaeda”, (24 Mar 2011) at http://www.theweek.co.uk/politics/6801/libya-rebels-gaddafi-could-be-right-about-al-qaeda


*** Aljazeera, “Live Blog - Libya” at http://blogs.aljazeera.net/middle-east/2011/ 02/17/live-blog-libya #feb17


**** Maximilian C. Forte, “A Victory for the Libyan People? : The Top Ten Myths in the War Against Libya”, (31 Aug 2011) at http://www.counterpunch.org/2011/08/31/the-top-ten-myths-in- the-war -against-libya/


***** International Crisis Group, op. cit., p. 5.


*1 사이프는 알자지라, 알아라비아, BBC 등이 고의적으로 리비아 사태를 왜곡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 Aljazeera, op. cit.


*** Aljazeera, “Aljazeera Live Blog Libya – Feb 22”, (22 Feb 2011, Retrieved 26 Mar 2011), at http://blogs.aljazeera.net/africa/2011/02/22/live-blog-libya-feb-22.


**** Patrick Cockburn, “Amnesty questions claim that Gaddafi ordered rape as weapon of war”, (24 Jun 2011) at http://www.independent.co.uk/news/world/africa/amnesty-questions-claim-that-gaddafi -ordered-rape-as-weapon-of-war-2302037.html


***** Maximilian C. Forte, op. cit.


*6 8월 20일 일몰 후 신도들이 단식을 끝내자 많은 교외에서 모스크가 울린 경종에 반응하였지만, (트리폴리 교외인) 줌마Suq al-Juma 지역의 봉기의 조직과 규모가 제일 컸다.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전 지역이 낡은 냉장고나 불타버린 차량들, 전쟁의 잔해들로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입구에 무장한 사람들을 배치했다. 트럭들이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집에서 만든 화염병과 젤라틴이라고 부르는 수류탄을 나누어줬고, 늦은 밤에는 6개월 전에 한 자루에 3,000디나르를 주고 샀던 총을 나눠줬다. 미리 작성한 블랙리스트에 따라 자경단이 100여 명의 정권의 앞잡이 즉 정보원들의 집에 쳐들어가 무장을 해제하고 끌고 갔다. 카다피 지지자들로 득실거릴 것으로 생각했던 아부 살림Abu Salim과 같은 지역에서도 전투는 거의 없었다. 지방 은행의 은행원인 칼리드는 저격용 총을 들고 말했다. “우리는 그들이 강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전투는 두어 시간도 안 걸렸지요.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에 편을 바꾸었지요.” … 줌마 지역을 책임졌던 이슬람주의자이고 트럭 소유자인 이삼Issam은 “그의 동료들은 처음에는 무기도 거의 없었지만, 친카다피 사람들을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무기를 넘기고 집에 있어라고 당부하여 무기를 갖게 됐는데 아무도 거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Alan Woods, op. cit.


** Christopher Alexander, “A Month Made for Drama”, op. cit., p. 45.


*** “맨 처음 부아지지의 가족과 친척들이 도청 앞에 모였을 때 그들과 결합한 것은 지역노조의 리더들이었고, 그들은 대부분 초등학교와 중등학교의 교사 부문 소속이었으며, 이들은 UGTT 내에서 가장 숫자도 많을 뿐 아니라 기회주의적인 중앙집행부에 대립하는 사람들이었다. … 시위를 조직하고, 시위대의 불분명하고 머뭇거리는 요구를 보다 분명하게 정리하고, 정치적, 사회적 요구를 보다 더 깊은 정치적 맥락에 뿌리내리게 하고,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고, 더 광범위한 대중들을 촉발시킨 것도 지역노조였다.” Mehdi Mabrouk, “The Youth Revolution : A First Reading of the Social and Cultural Conditions Surrounding the Tunisian Revolution” in Perspectives, p. 144.


**** 2008년 촛불항쟁 역시 첫 집회부터 성공적인 동원이 이루어졌지만, 특히 대책회의의 상층부의 기회주의적 태도가 끊임없이 투쟁의 고양을 가로막았기 때문에 분노를 고양시키지 못했고 결국은 패퇴하고 말았다. 그들은 투쟁의 집행위원장이 아니라 투쟁의 관리위원장들이었다. 박석삼, 『2008년 촛불항쟁 : 배반당한 개미떼들의 꿈』, 문화과학사, 2010, pp. 77-81.


***** Blake Hounshell이나 Dina Shehata 등 여러 필자들의 글을 종합해 볼 때, 나중에 독립노총을 만드는 노조 간부들이 1월말부터 타흐리르 광장에 결합하기는 했지만 타흐리르 광장은 물론 이집트 혁명의 전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의 존재감은 크지 않았다. 이 점에서 노동자계급의 결정적 기여를 강조하는 캘리니코스 등의 주장은 현실과도 다르고 이집트 민중의 인식과도 다르다고 생각한다. 알렉스 캘리니코스, 앞의 책, p. 46 등


*1 이집트혁명의 사망자 수는 카이로 232명, 알렉산드리아 52명, 수에즈 18명, 베니 스에프 17명 등으로 카이로가 압도적으로 많다. Wikipedia, “Egypt protests” at http://en.wikipedia.org/ wiki/Egypt_protests


** Dina Shehata, op. cit., p. 28.


*** 라밥 엘 마흐디, “이집트 민주화 운동”, 『마르크스21』, (9호 2011년 봄), 마르크스21 편집팀, 책갈피, pp. 244-245.


**** Tina Rosenberg, “Revolution U” in Foreign Policy, p. 127.


***** Maryam Ishani, “The Hopeful Network” in Foreign Policy, pp. 143-144.


*6 “2004년 12월 12일 키파야는 첫 (침묵)집회를 열었다. 이 집회는 맑스주의자, 나세르주의자, 이슬람주의자, 자유주의자 등 고참 활동가 일곱 명이 저녁모임에서 대중운동 단체에 관한 생각과 ‘키파야’라는 구호를 처음 논의하고 난 뒤 석 달도 안 되어 성사됐다.” 키파야 사무국장인 조지 이사크와 한 인터뷰 (2006년 8월 9일, 카이로) - 라밥 엘 마흐디, 앞의 글에서 재인용


** Ashraf Khalil, “January 25: Tear Gas on the Day of Rage” in Foreign Policy, p. 74.


*** “전에 병사였던 어떤 사람은 나토의 비행기가 끊임없이 친카다피 방어지를 공격할 때 … 게임은 끝났고 탱크 안에서 불에 타기를 기다릴 만한 장소도 없다고 간단히 결정하고 옷을 벗고 도망쳤다. 트리폴리 안의 정권의 지지자들도 끝나버린 명분을 위해 죽을 이유가 없다고 간단히 결론지었다. … 아부 살림의 칼리드는 초여름에 카다피가 미스라타를 장악하는 데 실패하고 나토가 폭격을 강화하자 전쟁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 후 카다피측은 후퇴하였고 누가 최종 승리자를 선택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고 말했다. 마지막 순간에 정권은 마치 사상누각처럼 무너졌다. 트리폴리 방위군은 카다피의 병사들이 이미 잃어버린 대의를 위해서 싸우고 죽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무너졌다.” Alan Woods, op. cit.


**** “2월 17일 벵가지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비무장한 시위대에 발포하여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경찰들 대부분은 발포를 억제하고 일부는 시위대에 가담하였다. 보안대는 도망가거나 탈영하여 시위대에 가담했다. 일부는 그들의 총구를 군인들 쪽으로 돌렸다.” Amnesty International, op. cit., p. 37. 이 점에서 한국의 일부 혁명가들이 무장봉기나 무력양성론을 운운하면서 혁명을 무력이나 폭력의 대립으로 보는 관점은 권력의 타도와 장악을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맑스주의적 방법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투쟁이 고양되고 격화되는 과정의 특수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무장 등의 특정 투쟁형태나 공장위원회나 노동자평의회 등의 조직형태에 대한 집착은 이러한 형태로 발전하게 하는 힘과 조건에 대한 고려가 없는 사고방식으로, 본질의 우월성이 아닌 현상에 매몰되고, 내용의 우월성이 아닌 형식에 대한 집착으로 유물변증법적 사고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 무슬림형제단의 리더인 알 살라비는 2007년 사이프와 협력하였고, 사이프와 LIFG 간의 대화를 중재하였다. 외국군의 군사개입에 대해서도 반란과 같다면서 처음에는 반대하였다가 나중에 찬성으로 돌아섰다. 그가 처음에 NTC를 찬성하자 그의 동료들은 그를 비난했다. International Crisis Group, op. cit., p. 27.


*1 LIFG는 1998년 빈 라덴이 주도한 성명서에는 참여하기를 거부했지만, 서방 언론에는 알카에다의 일부로 알려져 왔다. 2007년 LIFG는 빈 라덴 운동에 연대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또한 2009년에는 사이프와 자파 조직원들의 석방 협상 후에 국가에 대한 무기 사용을 포기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LIFG는 알카에다의 일부로 알려져 왔으나 알카에다의 대의를 비현실적으로 생각하는 간부들도 많고, 2011년 내전에는 ‘Libyan Islamic Movement for Change’라는 이름으로 참가하고, 새로운 정치적 과정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op. cit., p. 21.


** op. cit., pp. 17-18.


*** op. cit., p. 1.


**** Amnesty International, op. cit., p.14.


***** 인남식, “2011년 중동 민주화 운동의 원인, 현황 및 전망”, 「주요국제문제분석」 (2011.5.24.), 외교안보연구원, p. 1, 정상률, “빵의 혁명, 자유의 혁명, 어디까지 갈 것인가?-중동 민주화 혁명의 배경과 남아있는 문제점”, 『내일을 여는 역사』, (제43호 2011.6), 내일을 여는 역사, 2011, pp. 216. 카다피는 모든 정치적 불만층이나 반대자를 압살했지만 사회적 제도화의 수준이 낮기 때문에 사회적 안정을 위해 부족적 지지기반이 필요했다. “카다피는 종족들을 대립시켜 어부지리를 얻고자 했고, 부족적 충성심을 사고자 했다. 카다피의 부족인 카다파Qadadfa는 10만 명 정도로 상대적으로 소수이고 주로 시르테Sirte에 기반이 있다. 자기 부족의 유약함 때문에 카다피는 자기 부족과 중서부의 샤트Wadi Al-Shatt에 기반한 마가라Magarha 부족과 주된 기반이 왈리드Bani Walid이지만 전국에 흩어져 있는 100만 명이 넘는 와르팔라Werfella, Warfalla 부족과 동맹을 맺었다. 카다피는 전통적으로 자신의 보안 세력을 정권에 필수적이고 끝까지 충성할 것으로 여긴 이 두 부족에서 뽑았다.” 그리고 이들 부족과 부족의 원로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다. 결국 카다피는 특정 부족과 부족의 원로들 그리고 각지의 혁명위원회 소속의 멤버들을 친카다피 세력으로 육성하였다. International Crisis Group, op. cit., p. 11. 그러나 2월 20일 반정부 시위가 전국적으로 번지자 “‘자유 리비아 네트워크Network of Free Ulema – Libya’로 잘 알려진 이슬람 원로들과 성직자들은 모든 무슬림은 카다피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와르팔라, 투아레그Tuareg, 마가라 부족은 시위에 대한 지지를 천명했고, 동부의 주와야Zuwayya 부족은 보안대가 시위대를 계속 공격한다면 석유수출을 끊겠다고 위협했다.” Wikipedia, “2011 Libyan_Civil_War” at http://en.wikipedia.org/wiki/Libyan_Civil_War에서 재인용. 결국 분열과 특혜로 얻은 카다피의 부족 동맹 전략은 거대한 민중의 저항 앞에 무너졌다고 할 수 있다.


*6 Adrian Blomfield, “Libya: protest leaders threaten independence for eastern Libya” (24 Feb 2011) at http://www.shabablibya.org/news/libya-protest-leaders-threaten-independence-for-eastern-libya


** Wikipedia, “Misrata battle 2011” at http://en.wikipedia.org/wiki/Misrata_battle,_2011


*** “나는 병원과 시체 안치소에서 피묻은 옷을 입은 수많은 젊은이들을 보았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카다피의 제거뿐이었다. 많은 젊은 사람들-학생, 예술가, 운동선수, 의사, 법률가, 그리고 약간의 이슬람주의자들-이 카다피 군대와 싸우기 위해 집을 나섰다.” Lourdes Garcia-Navarro, “As Tide Turns, Rebels’ Dream Of ‘Free Libya’ Dims”, (16 Mar 2011) at http://www.npr.org/2011/03/16/134594253/as-tide-turns-rebels-dream-of-free-libya-dims?ft=1&f= 1001


**** International Crisis Group, op. cit., pp. ⅰ-ⅱ.


***** 2011년 3월초 카다피군은 미스라타 공방전에서 북쪽의 항구를 제외한 3면을 포위했다. 이때에 카다피군은 많은 비난을 받으면서도 항구를 로켓포로 공격하였지만 미스라타 시내 혹은 시민들의 거주지를 공격하지는 못했다.


*1 항쟁 초기 데르나나 미스라타, 벵가지 등 카다피 세력을 몰아내고 해방된 지역에서는 자생적인 자치기구와 투쟁조직이 만들어지고 다른 도시와 연대하였지만, 카다피의 악랄한 분할통치로 인하여 시민사회보다 부족적 질서가 강하게 작용한데다, 전투가 우선인 상황에서 군사경험과 행정 경험이 있는 전직 군인이나 경찰이나 보안대 등 카다피 이탈파들이 반군에 대거 합류하여 골간을 장악했기 때문에, 러시아 혁명 때처럼 대중의 자기지배 기구이자 투쟁기구인 소비에트로 발전하지 못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전투경험이 있는 이슬람주의자들이 전투를 지휘했다.


** Wikipedia, “Mustafa_Abdel-Jalil” at http://en.wikipedia.org/wiki/Mustafa_Abdel-Jalil에서 재인용


*** James Petras and Robin E. Abaya, “The Euro-US War on Libya: Official Lies and Misconceptions of Critics” at http://petras.lahaine.org/?p=1847. “카다피는 199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최대의 다국적기업들이 리비아의 석유를 채굴하는 것을 환영해왔다. 전 세계의 대부분의 석유생산지역에서보다 리비아에서 영업하는 거대석유회사가 더 많다. 여기에는 7년간 두 개의 채굴권과 1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한 BP가 있다. BP의 거대한 지역에 대한 채굴권은 하나는 쿠웨이트보다 크고 하나는 벨기에보다 크다. 여기에 미쓰비시와 니폰 석유를 포함한 일본의 5대 회사, 이탈리아의 Eni Gas, British Gas, 미국의 엑슨 모빌이 2010년 10월에 채굴계약을 했다. 2010년 1월에 체결된 석유계약은 주로 미국계 석유회사 특히 Occidental Petroleum에 이익이 되었다. 리비아에서 활동하는 다른 다국적 기업에는 Royal Dutch Shell, Total(프랑스), Oil India, CNBC(중국), 인도네시아의 Pertamina 그리고 노르웨이의 Norsk Hydro가 있다.” ibid.


**** Zoltan Zigedy, “Imperialism Unmasked”, (7 Sep 2011) at http://mltoday.com/subject-areas /commentary/imperialism-unmasked-1206-2.html. 졸탄 지게디, “가면을 벗은 제국주의”, 『정세와 노동』, (제73호 2011년 11월) 채주헌 번역, 노동사회과학연구소.


***** “2008년 베를루스코니는 카다피와 양국 간 우호 동반 협력 조약을 체결했다. 베를루스코니가 말했듯이 불법 이민자의 감소와 더 많은 석유를 보장할 것이다. … 이민자들이 EU국가에서 리비아로 추방되면 그들이 박해받아 도망나왔던 나라로 강제송환될 운명에 처해진다. 리비아가 말타나 프랑스 등 EU 개별국가나 유럽위원회와 맺은 조약들은 이탈리아와 맺은 조약처럼 이민자들의 억류와 강제송환을 받아들이고 있다.” Urs Fruehauf, “EU-Libya Agreements on Refugees and Asylum Seekers : The Need for a Reassessment” in Perspectives, pp. 244-245. “카다피는 오래전에 그의 혁명적 유산(1969-1988)을 포기했고, 최소한 2003년에는(사실상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이 이끈 테러와의 전쟁에 그 자신을 받쳤다. 카다피의 감옥은 CIA와 유럽 정보기관과 이집트 정보부가 이용한 중요한 고문 센터였다.” Vijay Prashad, “NATO’s Agenda for Libya : Qaddafi, From Beginning to End” in <Counterpunch>, (Weekend Edition October 21-23, 2011) at http://www.counterpunch.org/2011/10/21/qaddafi-from-beginning -to-end/


*6 “3월 30일 뉴욕 타임즈는 수주 동안 CIA 작업팀이 리비아 내부에서 활동하였고, 이것은 2월 중순 즉 시위가 시작된 때부터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수십 명의 영국 특수부대와 MI6(영국 정보기관-인용자) 정보원들과 함께 작업하였다는 것을 보도하였다. NYT는 같은 기사에서 수주 전에(2월 중순경) 오바마 대통령이 가능한 비밀공작을 위한 다른 지원과 함께 CIA가 리비아인들에게 무기와 다른 지원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하는 첩보활동에 서명하였다고 보도하였다.” Maximilian C. Forte, op. cit.


** Internationalviewpoint 홈페이지의 <Libya, the resistance, the no-fly zone>라는 토론방에서 진행된 여러 논쟁들(http://www.internationalviewpoint.org/spip.php?rubrique169)과, 국내의 관련글로는, 임필수, “리비아 공격을 둘러 싼 국제좌파의 분열에 대한 우리의 시각”, 『사회운동』, (통권 100호 2011, 5·6), 사회진보연대, pp. 98-109, 김하영, 앞의 책, pp.143-164, 등을 참고하라.


*** 이 주장은 퀴테트의 주관적인 해석인 것 같다. “중요한 것은 군사개입의 요청이 리비아 내에서는 거의 들리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민족적 주권을 보호할 필요에 가득찬 반정부 운동에 대한 제국주의적 영향력의 결여를 보여준다.” John Riddell, op. cit. “벵가지의 NTC는 나토의 개입을 촉구하였다. NTC는 그들을 초기에는 의심스럽고 적대적으로 간주했던 반군세력에 대한 어떠한 장악력도 없다. 반군의 태도를 바꾼 것은 카다피의 끝장 공격이라는 즉각적인 위협이었다. 카다피의 아들 사이프는 항쟁의 초반 ‘리비아는 튀니지나 이집트가 아니다. 거리는 피로 물들 것이다’고 말했다. 카다피 자신도 집집마다 골목마다 반군을 쥐새끼처럼 쫓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카다피의 연설로 인한 학살의 두려움 때문에 대중들과 처음에는 반대했던 사람들도 NTC가 요청한 제국주의의 무장개입에 반응을 보이게 된 것이다.” Alan Woods, op. cit.


**** Tasnim Qutait, “The Price of the Divide on Libya : Why I support the No Fly Zone” in Perspectives, pp. 248-250.


***** Ryan Lucas and Zeina Karam, “Gadhafi’s government controls the skies by day; sundown brings rebels out in”, (14 Mar 2011) at http://www.washingtonpost.com/wp-dyn/content/article/ 2011/03/14/AR2011031403415.html


*1 “프랑스의 <르 쿼티디엥> 신문은 1월 25일 마’사케니스M’sakenis의 시민들이 일시적으로 권력을 접수했다고 보도했다! ‘그들은 며칠 동안 국가권력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으로 생활했다. 심지어 자신의 시민경찰을 구성했다. 이들 시민의 유일한 목표는 매일의 과제를 챙기고 도시의 평화와 안전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구정권의 민병대와 약탈자들을 몰아내는 데에도 성공했다.’ 며칠 후 이 신문은 도시 벤자가 유례없는 파업운동으로 마비됐다고 보도했다. … 설탕공장의 5백 명의 노동자들은 회사경영자와 그의 부패한 직원을 쫒아냈고 ‘행복위원회’를 세웠다. 다음날 탈라에서는 시장이 도시에서 도망쳤다. 지역 관리들의 도주 이후 주민들은 권력을 잡았고, ‘민중위원회’로 공공적인 재산과 사적인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모였다.” <사회주의적 대안>의 튀니지 통신원, “기로에 선 튀니지 혁명”, 정은희, (2011.2.5.), <참세상>에서 재인용. 탈라의 민중위원회는 코뮌에 가깝다. 이러한 대중의 자주적 저항조직과 자치조직은 러시아 혁명 때 병사 소비에트나 노동자 소비에트에서 보는 것처럼 대중의 봉기가 절정에 달하거나 공권력을 몰아낸 뒤에 조성되는 (준)이중권력의 상황 속에서 전형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권력의 공백기에 출현하는 대중의 자치조직은 궁극적으로 권력을 타도하지 않는 한 소멸될 수밖에 없다.


** “튀니지 통신사 TAP에 따르면 2월 5일 약 1천명의 사람들이 다시 거리로 나왔으며 권력남용을 이유로 지역 경찰청장 크핼레드 카초우아니의 파면을 요구했다. 이때 시위자들에 대한 경찰 발포로 4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17명이 부상당했다., 그리고 6개의 행정구역에서 총파업이 진행되었고, 주로 가난한 지역 출신의 수많은 사람들이 정부청사 앞에서 구 정권의 모든 잔재의 청산을 요구하면서 5일 동안 농성하였다. 2월 7일 집권여당이던 RCD의 활동 정지와 해산이 발표되었고, 2월 20일 수천 명의 시위자들이 과도정부 해산을 요구하며 시위하였다. 지난 수 주 동안 모나스티르, 가프나, 벤자 그리고 소우세 등 여러 지역 노동조합 건물은 매일 공격받았다. 일요일 아침에는 ‘알려지지 않은’ 한 조직이 레 케프에 있는 UGTT의 지역 사무실을 방화했다. 마찬가지로 몇몇 노동조합 활동가들과 좌파에 대한 공격도 보도됐다. 1월 28일 여성들의 권리를 위해 모였던 3백 명의 시위자들은 무장한 깡패들의 곤봉으로 공격받았다. … 이날 이후 튀니스의 부르기바 도로에는 수백 명의 청각장애인들이 모였고 자신들을 위한 특별 학교와 공공기관을 요구했다. 초등학교, 중등학교 등에서도 학생파업이 벌어졌고 인간적인 일자리를 위해 청년 실업자들도 시위에 나섰다.” <사회주의적 대안>의 튀니지 통신원, 앞의 글에서 재인용


*** 선거결과가 발표된 지난 10월 27일 밤 시디 부지드에서는 선거의 불공정성을 항의하며 3,000여명이 엔나흐다당과 방위청 건물, 국영철도 건물을 방화하면서 격렬하게 충돌하였다. Offnews.info, “Tunisia - Sidi Bouzid Protests Erupt”, (29 Oct 2011) at http://www.offnews.info/ verArticulo.php?contenidoID=35450. 지난 12월 1일에는 수천 명의 시민들이 튀니스에서 종교적 극단주의와 실업률 상승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있었고 여기에 교원노조도 합류하였다. <뉴시스 통신사>, “튀니지, 종교 극단주의·실업률 상승 항의 대규모 시위”, (02 Dec 2011), at http://www.newsis.com/article/view.htm?cID=&ar_id= NISX20111202_0009905441


**** Dina Shehata, op. cit., pp. 30-32.


***** 1979년 이집트는 미국의 주선으로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이제 이스라엘은 배후의 이집트의 군사력에 대한 불안 없이 주변 아랍국들을 유린하고 팔레스타인을 억압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과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아랍민중의 대의를 배반한 것이었다. 1981년 사다트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은 무바라크는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군사원조를 받았고, 1993년과 2000년 미국이 일으킨 이라크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였다. 심지어 이라크 포로들의 고문까지 대행하였다. 그 당시의 내무부장관이 무바라크의 뒤를 이어 과도정부를 맡았던 술레이만이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와의 평화협상으로 군사비 부담을 GDP의 25%에서 7%로 줄일 수 있었다. “1979년 이후 미국은 해마다 이집트에 군사원조 13억 달러, 군사원조 8억 1,500만 달러씩을 제공했다. 1975년 이후 이집트가 미국에서 받은 돈은 모두 합쳐 500억 달러가 넘는다” Chales Levinson, “$50 billion later, taking stock of U.S. aid to Egypt”, (4 Apr 2004) at http://www.csmonitor.com/2004/0412/p07s01-wome.html


*6 3월 5일에는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한 몇몇 도시의 국가정보원이 습격당하였다. 나슬Nasr의 국가정보원 건물에서는 대중감시와 선거조작 문서를 비롯해 무바라크 시절의 범죄를 밝혀주는 문서를 시위대가 입수했다. 3월 19일엔 헌법 국민투표가 77.2%로 통과되었고, 3월 22일 내무부 건물이 방화되자 공적, 사적 건물을 파괴하는 시위를 조직하면 징역형과 10만 달러의 벌금에 처한다는 법률이 발표되었다. 4월 1일 4천명, 4월 8일에는 수만 명의 시위대가 타흐리르 광장을 장악하고 구체제에 대한 링거를 치우라면서 무바라크 일당의 재판을 요구하였다. ‘2차 혁명의 날’인 5월 27일 수만 명이 참석한 카이로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민간인에 대한 군사재판 반대, 의회선거 전에 헌법제정, 구체제 인사와 학살자들의 재판 등을 요구하였다. 7월 1일과 8일 수십만 명이 모여 군사최고위원회가 혁명일정을 5개월간 연기한 것에 대해 항의하고 즉각적인 개혁과 구체제 인사의 축출을 요구하였다. 7월 23일 수천 명의 시위대가 국방부로 행진을 시도하다가 곤봉과 돌멩이, 화염병으로 무장한 강도단에게 짓밟혔다. 시위대는 이 사건을 군사최고위원회 의장인 ‘탄타위의 쿠데타’라고 불렀다. 8월 1일 군대와 시위대의 충돌로 66명이 연행되었고, 8월 6일에도 군대에 의해 공격당했다. 이후에도 시위는 금요일마다 계속되었고 10월 9일 카이로에서 콥트교도와 무슬림이 연대하여 행진하자 군대가 공격하여 24명이 죽고 300명이 부상당하였다. Wikipedia, “Timeline of the 2011 Egyptian revolution” at http://en.wikipedia.org/wiki/Timeline_of_the_2011_Egyptian_revolution


** 11월 28-29일의 1차 선거에서는 기회주의적인 무슬림형제단의 자유정의당이 43%,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인 살라피주의자들의 알누르당이 25%, 자유주의 정당 연합인 ‘이집트 블록’이 15%를 차지했다. 상원의원 선거는 2012년 1월 29일로 예정되어 있다. <한겨레신문>, “이집트 1차 총선 ‘이슬람주의’ 압승”, (2011.12.04.) 국제면.


*** “10명으로 된 내각은 서부의 강력한 부족과 동부의 전통적인 엘리트들, 카다피 정권에서 이탈한 관료들로 이루어졌다. 31명으로 된 전국위원회의 핵심인사로는 의장을 맡고 있는 전법무장관 잘릴, 사이프에게 발탁되어 경제발전장관을 맡았던 미국 유학출신의 자브릴Mahmoud Jabril, 경제장관이자 인도대사였던 이사위Ali al-Issawi(반군의 외무장관 역할을 하고 있는 자브릴과 이사위는 개방파이고 친기업적이다) 반카다피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15년간 유폐된 장성 출신인 하리리Omar Hariri, 이드리스 왕의 후손으로 31년간 수감되었던 세리프Ahmed Zubeir Sherif, (그리고 사이프와 함께 석유투자의 유치를 맡았던 NTC의 재무와 석유 장관 타루니Ali Al-Tarhuni - 인용자 삽입) 그 외 법학교수, 미국에서 유학한 정치학 교수, 왕당파이자 농산물 수입업자, 변호사 등” Charles Levinson, “Rebel Leadership Casts a Wide Net”, (10 Mar 2011) at http://online.wsj.com/article/SB1000142405274870462910457 6190720901643258.html


**** Wikipedia, op. cit.


***** 그들은 일자리가 없거나 임시직이었고 대부분 결혼하지 않았다. 8남 4녀의 형제가 있는 모하메드(32)는 “우리는 남부에서 온 부족인데, 혁명을 위해 싸운다. 우리는 일자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24명의 형제와 3명의 어머니가 있는 마부룩(28)은 “나는 돈도 없고 아내도 없다. 우리는 결혼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지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돈을 빌릴 수도 없고 일자리도 없다.” Usatoday, “Libyan rebels: ‘We’re not al-Qaeda”, (30 Mar 2011) at http://www.usatoday.com/news/world/2011-03-30-libyans30_ST_N.htm


*1 “자원자들의 부대인 ‘2월 17일 순교자 여단’은 2월 말에 만들어졌는데, 일부는 군대나 경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주로 ISA 멤버나 혁명위원회나 혁명수호대, 그리고 혁명의 전복자로 지목된 사람들을 붙잡는다.” Amnesty International, op. cit., p. 74. 2월 17일 순교자 여단의 훈련장을 방문했는데, 이탈한 군 장교들이나 퇴역 군인들이 자원병들을 4주 동안 훈련하고 있었다. Barak Barfi, “The War in Libya: Boot Camp Revamp” at http://www.tnr.com /article/world/89598/libya-qaddafi-rebels-war. 한편 미스라타의 반군은 ‘검은 피부를 가진 노예들을 숙청하는 여단brigade for purging slaves, black skin’이라고 자칭하기도 했다. Richard Seymour, “Libya’s spectacular revolution has been disgraced by racism”, Guardian, (30 Aug 2011) at http://www.guardian.co.uk/world/libya?page=29


** John Simpson, “Halt To Rebel Advance Creates Libyan Divide”, (29 Mar 2011), BBC News at http://www.bbc.co.uk/news/world-africa-12901820. Wikipedia, op. cit.에서 재인용


*** Amnesty International, op. cit., pp. 70-75.


**** AFP 등에 따르면, 2011년 12월 13일 잘릴이 이끄는 NTC의 구성원과 운영의 투명성을 요구하며 벵가지에서 약 20,000만 명이 그리고 트리폴리에서는 수백 명이 시위를 하였다. 유엔에 의해 압류되어 있는 카다피 정부의 자산은 1,680억 달러에 달한다. 시위대는 NTC의 투명성뿐만 아니라 과거 세력과의 타협적 태도에 대해서도 불만을 표시하고 있고, 소수의 출세가 아니라 모든 리비아인의 일자리와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싸웠다고 말했다. NTC는 구성원의 명단조차 제대로 공개하지 않고 있다. News24, “Benghazi protesters stay put”, (13 Dec 2011) at http://www.news24.com/Africa/News/Benghazi-protesters-stay-put-20111213-2에서 재인용, Chris Stephen, “Libyans March in Tripoli, Benghazi Calling for Less Secrecy”, (13 Dec 2011) at http://www.businessweek.com/news/2011-12-13/libyans-march-in-tripoli-benghazi-calling-for-less -secrecy.html, Defence of Marxism, “Libyans protest against NTC stealing the revolution”, (14 Dec 2011) at http://www.marxist.com/libya-ntc-protest.htm 등 참조


***** 벤 알리의 도주 전에 튀니지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워싱턴에 보고된 내용. <사회주의적 대안>의 튀니지 통신원, 앞의 글에서 재인용.


*6 이스라엘은 1967년 기습적인 공격으로 이집트와 시리아, 요르단에 궤멸적인 타격을 가하고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 시나이 반도, 골란 고원을 점령하였다. 이 사건은 오늘날까지도 중동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는 근원이 되었다.


** 하나의 종교로서의 이슬람교는 코란만이 아니라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도 기본 경전으로 하고 여호아 하나님이라는 유일신을 믿는 종교이다. 식민지시절인 1928년에 출발한 무슬림형제단 운동은 이슬람식 근대화를 추구하는 부흥운동이었는데, ‘이슬람이 해결책이다’라는 모토 하에 반제투쟁에 참가하고 나세르 혁명도 처음에는 지지하였다. 이들은 세속정권에게 탄압받으면서 특히 국가후견이 약해지자 모스크를 중심으로 하층민에게 자선사업을 하면서 세력을 보존하고 확장할 수 있었다. 무슬림형제단은 그 구성원이 자본가계급부터 빈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상층부의 타협적 태도와 기층의 민중적 지향이 끊임없이 갈등하면서 정치적 태도를 보다 타협적이고 실용적인 방향으로 변화시켜왔고, 타 종교와 여성에게 보다 관용적으로 바뀌었다. 최근의 주장을 보면 사회정책 면에서는 거의 사민주의와 유사하다. 무슬림형제단의 일원인 하마스도 최근엔 주류 판매나 여성의 복장에 대해 관용적으로 혹은 실용주의적으로 바뀌고 있다. 한편 현실정치에 참여를 주장하는 온건 이슬람주의자들과는 달리, 반제 혹은 반정권 투쟁을 비타협적으로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투적 이슬람주의자(지하드)들이 있다. 온건파와 강경파(지하드)를 합쳐 ‘정치적 이슬람’이라고 한다. 그리고 살라피주의자처럼 샤리아(이슬람 율법)가 사회의 질서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이슬람근본주’의라고 하는데 이들은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하는 ‘세속주의’와 대립하고, 현실에서는 다양한 중간적 입장이 있다. 노엄 촘스키 외, 앞의 책과, 사메 나기브, “이슬람주의의 과거와 미래” 「마르크스21」, 마르크스21 편집팀, (9호 2011년 봄), 책갈피와, 임필수, “2011년 튀니지 혁명의 미래”, 『사회운동』, (통권 102호 2011, 9·10), 사회진보연대, pp. 118-119 등 참조


*** 나세르 시절에는 범아랍민족주의가 반제뿐만 아니라 아랍권 통합 혹은 아랍단일국가의 지향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팔레스타인 연대운동인 인티파다에서 보듯 현재의 범아랍민족주의란 단일국가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아랍민중들의 연대를 지향한다. 이 점에서 정상률이 범아랍민족주의가 아랍의 통합을 지향한다면서 그 쇠퇴를 운운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정상률, 앞의 책, pp. 22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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