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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홍신문화사

안식일은 육체적 혹은 정신적으로 노력하지 않는다는 의미로서의 휴식 그 자체는 아니다. 그것은 인간들 사이의,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에 완전한 조화를 회복한다는 의미에서의 휴힉이다. 어떤 것도 파괴되어서는 안 되고 어떤 것도 건설되어서는 안 된다. 안식일은 세계와 인간 사이의 싸움에 있어 휴전(休戰)의 날이다. 사회적 변화도 발생하면 안 된다. 풀잎 하나를 뜯는 일까지도 이 조화를 깨뜨리는 것으로 간주되며, 성냥 한 개비를 켜는 일 또한 마찬가지다. 자기 집 정원 안에서는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것이 허용되는 반면 거리에서는 어떤 것(비록 그 무게가 손수건 하나 정도로 가벼운 것일지라도)의 운반도 금지되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요컨대, 짐을 운반하는 노력이 금지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사유하는 땅으로부터 어떤 물건을 다른 사람의 땅으로 옮기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원천적으로 재산의 이동을 뜻하기 때문이다.
안식일에는 개인은 그가 마치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것처럼 생활하며, 기도하고, 공부하고, 먹고, 마시고, 노래부르고, 사랑을 하는 등, '존재', 즉 자기의 본질적인 힘만을 표현한다.

 

 

 

 

즉, 존재는 생명이며 활동이며 탄생이며 재생(再生)이며 유출(流出)이며 횡일(橫溢)이며 생산성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존재는 소유의 반대이며, 자아구속 자기중심주의의 반대이다. 에크하르트에게 있어 존재는 능동적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능동적이라는 것은 분주하다는 현대적 의미가 아니고, 자기의 인간적 힘을 생산적으로 나타내는 고전적 의미이다. 그는 이것을 여러 가지 어구로 표현한다. 즉, 그는 존재를 '끓는' 과정, '낳는' 과정, '그 자체 안에서, 그리고 그 자체 밖으로 자꾸 흐르는' 무엇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때로 그는 능동적 성격을 나타내기 위해 '달린다'는 상징을 사용한다. '평화를 향해 달려들어가라! 달리는 상태, 평화 속으로 끊임없이 달려들어가는 상태에 있는 사람은 성스러운 인간이다. 그는 끊임ㅇ벗이 달리고 움직이며, 달리면서 평화를 추구한다.' 농동성의 또 하나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능동적이고 활발한 사람은 '가득 참에 따라 늘어나므로 결코 가득 채워지지 않는 그릇'과 같다는 것이다.
모든 진정한 능동성의 조건은 소유양식을 파괴하는 것이다. 에크라르트의 윤리체계에 있어서 가장 높은 미덕은 생산적인 내적 능동성의 상태이며, 이 내적 능동성의 전제는 모든 형태의 자아구속과 갈망을 넘어서는 것이다.

 

 

 

 

소유적 감정은 다른 관계, 예를 들면 의사, 치과의사, 변호사, 사장, 노동자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나타난다. 사람들은 흔히 우리 의사, 우리 치과의사, 우리 일꾼 등등의 표현을 쓴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소유적 태도 이외에도 사람들은 무수한 물건, 때로는 감정까지도 재산으로서 경험한다. 건강이나 병을 예로 들어보자. 사람들은 내 병이니, 내 수술이니, 내 치료니, 내 식이요법이니, 내 약이니 하고 자기의 건강을 소유적 감각으로 얘기한다. 그들은 확실히 건강과 병을 자기 재산으로 생각하고 있다. 나쁜 건강에 대한 그들의 소유관계는 폭락하는 주식시장에서 원가 이하로 떨어지는 주식에 대한 주주(株主)의 관계와 비슷하다.

 

 

 

 

116쪽

 

소외되지 않은 능동에 있어서는 나는 '나 자신'을 내 능동의 '주체'로서 경험한다. 소외되지 않은 능동은 무엇인가를 생산하는 과정이며, 내가 생산한 것과 나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과정이다. 이것은 또한 나의 능동성이 내 힘의 표현이며, 나와 나의 능동성과 그 결과가 하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이 소외되지 않은 능동성을 '생산적 능동'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쓰는 '생산적'이란 말은 예술가나 과학자의 경우와 같이 새롭고 독창적인 무엇을 창조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 내 등동의 산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요, 그 특질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림이나 과학적 논문은 지극히 비생상적인, 다시 말해 불모의 것일 수도 있다. 한편, 깊이 있게 자신을 인식하는 사람들, 나무를 그저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보는 사람들, 또는 시를 읽으며 시인이 언어로 표현한 감정의 움직임을 자신 속에서 경험하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잇는 과정은 비록 거기서 아무것도 '생산된 것'은 없지만 매우 생산적인 과정이다. 생산적 능동성은 내적 활동의 상태를 나타낸다. 그것은 곡 예술작품이나 과학 같은 '유용한'어떤 것의 창조와 연관을 갖지는 않는다. 생산성은 정서적으로 불구가 아닌 한 모든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성격지향이다. 생산적인 사람들은 그들이 접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거세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을 탄생시키며, 다른 사람들이나 물건에도 생명을 불어넣는다.

 

 

 

 

159쪽

 

참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밖에 없다--- 그것은 석가, 예수,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가르친 방법이다. 그 방법은 '삶에 집착하지 않는 것, 삶을 소유물로 경험하지 않는 것'이다. 죽음의 공포는 얼핏 삶의 정지에 대한 두려움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죽음은 우리와 관계가 없다고 에피쿠로스가 말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동안은 죽음은 아직 우리 곁에 없으며, 죽음이 닥쳐왔을 대는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분명히 죽음에 앞서 일어날지도 모르는 고통과 아픔에 대한 두려움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죽음의 공포와는 다른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이와 같이 불합리한 것으로 보이지만 삶이 소유로서 경험될 때에는 그렇지 않다. 그 경우의 공포는 죽음에 관한 것이 아니고 '소유한 것을 잃는 데' 대한 것이다. 내 육체를 잃는 두려움, 내 자아, 내 재산, 내 주체를 잃는 데 대한 두려움이며, 비주체의 심연을 대해야 하는 두려움, '잃어버려짐'에 대한 두려움이다.

 

 

 

 


204쪽

 

나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존재한다면 인간의 성격에 '변혁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우리는 고통받고 있으며, 그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다.
2. 우리는 불행의 원인을 인식하고 있다.
3. 우리는 우리의 불행이 극복도리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4. 우리는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정한 생활규범을 따라야 하며, 현재의 생활습관을 바꾸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위의 네 가지 조건은 석가의 가르침의 바탕이 되는 '네 가지 진리'와 부합한다. 그러나 그 '네 가지 진리'는 특수한 개인적, 사회적 환경에 기인한 인간 불행의 사례들이 아닌 인간존재의 일반적 조건을 다루고 있다.
석가의 가르침의 특성이 되고 있는 변혁의 원리는 또한 마르크스의 구제사상의 기초가 되고 있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다음의 사실을 알아야 한다. 즉, 마르크스 자신이 말한 것처럼 그에게 있어 공산주의는 최종 목표가 아니라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는, 즉 인간을 물질과 기계, 그리고 인간 자신의 탐욕의 노예로 만드는 정치, 경제, 사회적인 제조건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가는 역사 발전의 한 단계였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제시한 첫번째 단계는 그 시대의 가장 소외되고 비참한 노동자계급에게 그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것이었다. 그는 노동자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게 하는 모든 환상을 파괴하고자 애썼다. 두번째 단계는 이 고통의 '원인'을 밝히는 것이었다. 그는 그 원인이 자본주의의 본질과 자본주의 체제가 낳은 탐욕과 허욕과 의존적 성격에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녿오자들의 고통의 원인에 대한 이러한 분석에서 마르크스 저작의 요체, 즉 자본주의 경제분석이 나왔다.
세번째 단계는 이 고통을 낳는 조건이 제거되면 그고통도 제거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네번째 단계에서 그는 새로운 생활의 관습, 즉 낡은 체제가 필연적으로 만들어내지 않을 수 없었던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새로운 사회체제를 제시하였다.
본질적으로는 프로이트의 치유방법도 같은 것이었다. 환자들이 프로이트를 찾아와 진찰을 받은 것은 그들이 고통을 다앟고 있었기 때문이며, 또 자기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대개 '무엇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지를 몰랐다. 정신분석학자들이 보통 처음 하는 일은 환자들이 자기들의 고통에 관해 갖고 있는 환상을 버리고 그들의 불행의 참다운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개인적 혹은 사회적 불행의 원인에 대한 진단은 해석의 문제이며, 서로 다른 여러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불행의 원인에 관한 환자 자신의 상상은 대개는 진단을 내리는 데 있어서 믿을 만한 데이터가 되지 못한다. 정신분석과정의 본질은 환자가 자신의 불행의 '원인'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그 결과, 환자는 다음 단계, 즉 원인이 제거되면 그들의 불행은 치유될 수 있다는 통찰에 이를 수 있다. 프로이트의 견해로는, 그것은 어떤 유아기 사건의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정신분석가들은 내가 위에서 제시한 조건 중 네번째 조건의 필요성에는 본질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것 같다. 많은 정신분석학자들은 환자가 억압받고 있는 것에 대한 통찰 그 자체가 치료효과를 갖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확실히 그런 경우는 흔히 있다. 환자가 히스테리나 강박관념 등 한정적인 증상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을 때는 특히 그렇다. 그러나 일반적인 고통을 받고 있어서 성격의 변화가 필요한 사람들은 '그들이 달성하고자 하는 성격의 변화에 따라 생활의 습관을 바꾸지 않는 한' 어떤 지속적인 효가를 얻을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예를 들면, 개인의 의존성에 관한 분석은 언제까지나 계속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분석의 결과로 얻어진 모처럼의 통찰도 그들이 그 전에 생활해 오던 실제적인 상황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한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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