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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그리고 여러분이 기도하려고 서 있을 때에 어떤 사람과 등진 일이 있으면 용서하시오. 그래야만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도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잘못을 용서하실 것입니다.
예수에 관한 가장 흔한 오해 가운데 하나는 예수가 무조건적인 용서를 설파했다는 것이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갖다 대라’는 그의 말(마태 5:39)은 불의와 폭력에 대한 무기력한 순응을 강요하는 데 활용되어 온 가장 유명한 경구다. 그러나 오늘 좀 더 섬세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의 이 경구가 오히려 저항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아챈다. 사람은 대개 오른손잡이다. 오른손은 ‘바른손’이며 고대사회에선 더욱 그랬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뺨을 때린다는 건 오른손으로 상대의 왼빰을 때리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오른뺨을 때리면”이라고 했다.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으로 때렸다는 말이다. 손등으로 뺨을 때리는 행위는 당시 유다 사회에서 하찮은 상대를 모욕할 때 사용되곤 했다. 그렇게 모욕당한 사람에게 예수는 ‘왼뺨도 갖다 대라’고 말한다. ‘나는 너와 다름없는 존엄한 인간이다. 자, 다시 제대로 때려라’하고 조용히 외치라는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용서하고 순응하라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단호하게 저항하라, 불복종을 선언하라는 것이다.
결국 이 유명한 경구는 사람 취급 못 받는 사람들, 매일처럼 무시당하고 모욕당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예수의 가슴 아픈 위로다. 예수는 그들 앞에서 애끊으며 입술을 깨물며 말한다. “여러분이 당장 여러분의 현실을 뒤집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여러분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부자와 권력자들의 편이 아니라 여러분의 편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주인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믿음을 가지세요. 부디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고 자존심을 잃지 마세요.”
불의한 사회 현실 속에서 분노와 용서는 늘 균형을 잃곤 한다. 현실에 분노하고 싸우는 사람들은 대개 용서를 모른다. 그래서 많은 경우 증오와 보복의 악순환으로 빠져 들어간다. 한편 용서를 말하는 사람들은 분노할 줄 모른다. 그들의 분노 없는 용서, 진실과 정의를 가리지 않는 무작정한 용서는 불의 한 현실을 덮고 그 현실에서 영화를 누리는 세력에게 봉사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에게 분노와 용서는 늘 병행한다. 성전 뜰에서 그의 생애 중 가장 분노하는 모습을 보인 예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용서를 말한다. 두 가지 모습은 얼핏 개연성이 없어 보이나 모두 예수의 모습이다. 예수는 분명히 분노하여 진실과 정의를 가리지만, 끝내 용서함으로써 증오와 보복의 고리를 끊어 낸다.
우리는 흔히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의 순서를 바꾸어 볼 필요가 있다. ‘사람을 미워하지 말되 죄는 분명히 미워하라.’ 우리는 끝내 용서하되, 먼저 분명히 분노해야 한다. 진정 분노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 용서할 줄도 모르며, 진정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 분노할 줄 모른다. 분노와 용서는 실은 하나다.
(187-1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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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축제 때마다 그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죄수 하나를 놓아주었다. 7 마침, 폭동 중에 살인을 한 폭도들과 함께 바라빠라는 사람이 구속되어 있었다. 8 이윽고 군중이 빌라도에게 올라가서 그가 자기들에게 해 온 관례대로 해 주기를 청하기 시작하였다. 9 그러자 빌라도는 그들에게 대답하여 “내가 유다인들의 왕을 여러분에게 놓아주기를 바라오?” 했다. 10 대제관들이 시기하여 그분을 넘겨주었음을 그는 알아차렸던 것이다. 11 그러나 대제관들은 군중을 선동하여 차라리 바라빠를 자기들에게 놓아 달라고 청하게 하였다. 12 그러자 빌라도는 다시 대답하여 “그러면 [여러분이 말하는] 유다인들의 왕을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랍니까?]”하고 그들에게 말했다. 13 그러니 그들은 다시 소리 질렀다. “그를 십자가형에 처하시오.” 14 그러자 빌라도는 그들에게 말했다. “그가 무슨 나쁜짓을 했단 말입니까?” 그러니 그들은 더욱 소리 질렀다. “그를 십자가형에 처하시오.”
예수가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 “호산나!”를 외치던 군중들은 (11:9~10) 왜 고작 나흘 만에 “죽여라!”라고 외치는 걸까? 학자들은 대개 군중들의 생각이 달라져서라고, 혹은 예수를 죽이려는 세력의 사주와 선동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예수를 죽이려는 세력에 의한 사주와 선동이 있었던 건 분명하다. 그러나 군중들의 생각이 달라지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는 군중이 달랐다고 할 수 있다. “호산나!”를 외치던 군중과 “죽여라!”를 외치는 군중은 실은 다른 군중인 것이다. “호산나”를 외치던 군중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던 순례객들, 즉 성전 지배세력의 착취와 억압에 시달리던 갈릴래아 인민을 중심으로 한 사람들이고, 지금 “죽여라”라고 외치는 군중은 예루살렘 사람들, 즉 성전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사람들이다. 예루살렘의 평소 인구가 5만 명가량인데 성전에서 상근하는 사람이 1만 7,000명에 달했으니 예루살렘 사람들은 모조리 성전에서 일하거나 성전 덕에 먹고사는 사람들인 셈이다. 성전의 적은 예루살렘 사람들의 적이었다. 안 그래도 ‘갈릴래아 놈들의 괴수’예수를 마땅치 않아 하던 그들은 지난 며칠 동안 예수의 행태 덕분에 분노가 폭발했다. 그들은 예수가 성전 이방인의 뜰에서 장사꾼들을 내쫓으며 “강도들의 소굴”이라 고함칠 때 당장이라도 그를 죽이고 싶었다. “호산나!”는 그렇게 이해관계의 이동을 통해 “죽여라”로 변한 것이다.
유년 주일학교에서 ‘강도’라 가르치는 바라빠는 “폭도 중에 살인을 한 폭도들”가운데 한 사람, 즉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무장 항쟁을 벌이던 조직의 성원이었다. 군중들은 “차라리 바라빠를 풀어 달라”고 외친다. “차라리”. 그들은 바라빠도 죽이고 싶지만 둘 중 한 사람만 죽일 수 있다면 바라빠를 풀어 주고서라도 예수를 죽이고 싶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반하여 폭동과 살인(다른 입장에서 볼 때 정치적 테러리즘, 혹은 의거이기도 한)까지 한 사람을 석방해서라도 예수를 죽이려 하는 걸 보면 당시 예루살렘 사회가 예수에게 가진 적대감이 어느 정도였는지, 혹은 예수에게서 얼마나 강력한 위협과 공포를 느꼈는지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예수는 정치적인 혁명가가 아니었다.’는 상투적인 견해에 대해 묵상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정치적 혁명성이 ‘주장’되는 게 아니라 지배체제에 의해 ‘증명’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겉보기엔 제아무리 혁명적이라 해도 지배체제가 별 다른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건 더 이상 혁명적인 게 아니다. 학술적, 문화적 차원에 머무는 혁명 이론 따위가 그렇다. 반대로 겉보기엔 그다지 혁명적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데 지배체제가 어떤 과격하고 급진적인 혁명운동보다 더 위협을 느끼고 적대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혁명적인 것이다. 예수는 비폭력주의자였고 국가권력을 접수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건 다 안다. 그런데 왜 지배체제는 폭력을 사용하고 국가권력 접수를 목표로 싸운 바라빠보다 예수에게서 더 큰 위협을 느끼는가? 예수의 정치성에 대해 말하려면 먼저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총독 빌라도가 예수를 죽이기를 꺼리는 모습은 빌라도에 대한 다른 역사적 기록들과는 거리가 있다. 요세푸스를 비롯한 유력한 역사가들은 빌라도를 매우 냉혹하고 영악한 인물로 기록한다. 빌라도는 예수가 죽고 7년 후 해임되어 송환되는데 그 주요한 이유도 소요 사태를 지나치게 잔인하게 진압했기 때문이었다. 빌라도에 대한 호의적인 묘사는 「마르코복음」집필 당시 기독교인들이 처한 사회적 상황에서 비롯한 것이다. 로마에 의해 탄압받고 있던 그들은 자신들의 그리스도가 로마에 대한 반역죄로 처형된 사람이라는 사실이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예수가 정치적 반역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며 로마 총독도 예수를 죽이고 싶어 죽인 게 아니라 유다 지배세력의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음을 강조하면서, 그들의 종교가 로마와 적대적이지 않음을 애써 주장한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분명 사실과 다르지만 그들의 신앙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역사 속에서 실제로 살아 숨 쉰 예수보다 ‘죽음으로서 내 죄를 대속한 그리스도’ 예수, 즉 신학과 교리 속에 갇힌 예수를 선택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246-2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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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부활이 사실인가를 둘러싼 논쟁은 끝이 없다. 기독교도들은 ‘부활이 없엇다면 기독교도 없었다’며 굳세게 예수의 부활을 주장한다. 반면 부활은 많은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불신하는 가장 주요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은 역사 속에 실재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예수가 부활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가장 극적인일은 예수가 잡히자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이 어느 순간 “예수가 부활했다!”를 외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를 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의 달라진 모습 사이에 예수의 부활 사건이 있다.
문제는 예수의 부활이 사실인가가 아니라 부활이 무엇인가다. 예수의 부활을 둘러싼 모든 주장과 논란은 예수의 부활이 육체의 부활, 즉 예수의 죽은 세포들이 재생한 사건이라는 전제를 갖는다. 그러나 부활이 단지 죽은 육체가 되살아난 것이라면 부활은 ‘영원한 생명’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살아난 육체는 즉시 노화를 시작하고 어쩌면 그날 다시 죽을 수도 있다. 죽은 육체가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건 단지 육체가 사흘 동안 노화를 멈추었다는 의미일 뿐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이적이지만, 그런 이적이 우리의 존경이나 신앙을 불러일으킬 수는 없다.
이 문제에 대해 예수는 이미 제자들 앞에서 충분히 이야기한 바 있다. 사람은 대개 육체를 사용하는 시간을 목숨이 유지되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 유한함은 우리를 겸허하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집착에 빠지게 한다. 금방이라도 인생이 지나가 버릴까 아쉬워, 혹은 반대로 인생이 영원하기라도 한 것처럼, 집착하는 것이다. 예수는 그렇지 않다고, 육체의 목숨은 진정한 목숨이 아니라고, 육체의 목숨에 연연하면 진정한 목숨을 영원히 잃고 만다고 말한다.
제자들은 예수의 죽은 몸이 살아난 광경을 본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다라면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살아 있는 예수를 떠났었다. 그들은 예수가 말한 ‘진정한 목숨’의 의미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죽지 않았다고, 영원히 살아 있다고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목숨이란, 살아 있다는 것이란 지정 무엇인가? 육체의 젊음과 아름다움은 그것이 찬미되는 순간에도 이미 늙고 있다. 엄청난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보다 힘차게 살아 있는 듯 보이나, 그들은 둘러싼 모든 인간적 호의와 관계들은 대개 그들이 가진 돈과 권력을 향한 것이다. 그들이 살아 있는 게 아니라 돈과 권력이 그들의 시체를 쓰고 살아 있는 것이다 . 스무 살짜리 노인도 있고 여든이 넘은 청년도 있다. 몸은 살아 있되 목숨은 죽은 사람도 있고, 몸은 죽은 지 오래이나 목숨은 생생히 살아 있는 사람도 있다. 목숨이 소중한 것을 모르는 사람은 세상에 없지만 지정한 목숨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묵상하는 사람은 참 드물다. 그래서 육체의 목숨에 집착하느라, 그 목숨이 지속하는 시간 동안의 안락과 이런저런 부질없는 욕망의 충족에 매달리느라 정작 그 시간조차 허비하고 마는 게 우리의 인생이다.
우리는 예수의 제자들이 그랬듯, 내 삶 속에서 예수가 부활하게 함으로써 영원한 목숨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은 오랜 종교적 수련이나 특별한 구도 행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누구라도, 바로 이 순간에 선택할 수 있는 일이다. 남보다 많이 가진 것을 자랑스러워하던 사람이 이 순간 그런 삶을 부끄럽게 여기고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다면 예수가 그 안에서 부활한 것이다. 권력을 얻은 후에 낮고 약한 사람들 편에 서겠다던 사람이 이 순간 스스로 권력을 잃어 낮고 약한 사람들을 섬기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면 예수가 그 안에서 부활한 것이다. ‘옳다는 건 알지만 현실이’,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좀더 경제적 안정을 얻고 나서’라고 되뇌며 제 삶의 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던 사람이 이 순간 고통스러운 삶의 현장으로 새처럼 훌쩍 날아오른다면 예수가 그 안에서 부활한 것이다.
(261-264쪽)
20 그리고 그분은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 와서 그분 일행은 빵을 먹을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21 그런데 그분의 친척들이 듣고서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그분이 정신 나갔다고 말햇던 것이다. 22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사들은 말하기를 “그는 베엘제불에 사로잡혀 있다”고 했고, 또한 “그는 귀신 두목의 힘을 빌려 귀신들을 쫓아낸다”고도 했다. 23 그러자 그분은 그들을 불러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습니까? 24 나라가 서로 갈라지면 그 나라는 지탱할 수 없습니다. 25 또 집안이 서로 갈라지면 그 집안은 지탱할 수 없습니다. 26 이와 같이 사탄도 서로 들고 일어나서 갈라지면 지탱할 수 없고 끝장이 납니다. 27 실상 먼저 힘센 사람을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힘센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그의 세간들을 털 수 없습니다. 묶어 놓아야 그의 집을 털게 될 것입니다. 28 진실히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사람의 아들들은 죄뿐 아니라 독성도, 어떤 독성의 말이라도 모두 용서받을 것입니다. 29 그러나 성령에 대해서 독성의 말을 하는 사람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30 “그는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다”고 그들이 말했기 때문이다. 31 그리고 그분의 어머니와 그분의 형제들이 왔다. 그런데 밖에 서서 그분을 부르러 누군가를 그분에게 보냈다. 32 그리고 그분 주위에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이 그분께 “보시오, 당신의 어머니와 당신 형제들[과 당신 자매들]이 밖에서 찾습니다”했다. 33 그러자 그분은 답변하여 “누가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입니까?”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34 그러고서는 당신 주위에 둥글게 앉아 있는 이들을 둘러보시면서 말씀하셨다. “보시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을! 35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그런 사람이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입니다.”
율법학자들의 비난에 예수는 매우 민감하게, 그들을 불러서까지 대응한다. 예수는 매우 중요한, 한 치의 타협 없이 분명히 해 두어야 할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예수는 ‘신성모독을 해도 용서받을수 있지만 성령을 모독하면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예수는 결국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신앙은 ‘하느님을 대상으로 하는 인간의 종교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활동, 즉 ‘하느님이 진행하는 역사에 인간이 참여하는 행위’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앙은 인간이 만든 종교체제와 교리의 테두리 안에서의 성실과 충성이 아니라, 지금 여기 현실 속에서 하느님이 벌이고 있는 역사, 즉 하느님 나라 운동에의 참여인 것이다.
교회와 교리의 테두리 안에 있지 않아도, 심지어 교회와 교리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다 해도 하느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면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지만, 교회와 교리의 테두리 안에서 제아무리 성실하고 충성스럽다 해도 하느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고 있지 않다면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혹은 다른 종교를 가진 어떤 사람이 열심히 교회에 다니는 그 어떤 사람보다 하느님 보시기에 참신앙을 가진 사람일 수 있으며, 기독교가 전래되기 전에 죽어 하느님이 뭔지 예수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제3세계의 수많은 인민들 가운데에도 하느님 보시기에 참신앙을 가진 사람이 허다한 것이다.
보수 교회에선 이런 사실을 엄격하게 부인하는 것을 마치 하느님을 타협 엇이 섬기는 일인 것처럼 말하지만, 그런 태도는 실은 하느님을 자신들의 교회 체제에 가두어 놓으려는 말도 안 되는 수작일 뿐이다. 우리가 한낱 인간적으로 존경하는 사람이 있어 그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때도, 혹시라도 내 생각이 그의 본디 생각에 못 미칠까 걱정하며, 그런 걱정을 함께 전하는 법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느님의 생각을 전하면서 그리 오만하고 권위에 찬 태도를 가질 수 있겠는가? 하느님을 섬긴다는 건,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려 힘닿는 데까지 노력하면서도 미처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태도이지, 앙상한 교리와 신학을 내세워 자신이 하느님의 권한을 완전히 위임받은 양 구는 태도가 아니다.
예수의 소문을 들은 가족들은 ‘정신이 나간’ 예수를 붙들러 나선다. 가족들의 행동은 예수가 서른 살이 다 되어 가족을 떠나 요한에게 서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까지 전혀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드러낸다. 만일 예수가 어릴적부터 신의 아들이라는 표징을 보였다면, 하다못해 위대한 예언자의 징후라도 보였다면 그가 공적 활동을 시작했을 때 가족들은 그저 ‘올 게 왔구나’ 했을 것이다.
아들이 집을 떠나 ‘미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어머니의 심경은 어땠을까? 어릴 적부터 노동으로 식구들의 생계를 맡아 온 착한 맏아들에 대한 연민, 다른 가족들마저 미쳤다고 말하지만, 또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제 속으로 낳고 기른 어머이기에 직감할 수 있는 아들의 진지하고 존귀한 신념, 그리고 상상하기조차 두려운 그러나 필시 아들에게 닥쳐올 위험과 고난 등에 대한 생각으로 어머니는 번민한다. 그런데 정작 예수는 어머니의 그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어머니를 부인한다.
예수는 마치 출가한 승려처럼 세속의 인연을 ‘초월’하려는 걸까? 이어지는 예수의 말을 곰곰이 살펴보면 예수는 오히려 세속의 인연을 ‘확장’하는 것이다. 흔히 고대인들은 오늘 개인주의에 물든 우리보다 훨씬 덜 이기적이었던 걸로 여겨진다. 물론 그건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그들에겐 집단화한 이기심이 우리보다 훨씬 더 강하게 존재했다. ‘개인’이라는 개념이 없던 그들에게 가족이란 한 사람의 정체성과 사회적 위상을 확인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어떤 사람인가보다는 누구의 자식인가 어느 가문 출신인가가 훨씬더 중요했다. 가족의 이해관계는 전적으로 나의 이해관계였고 단일한 이해관계로 뭉친 가족은 다른 가족이나 사회에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 집단화한 이기심이 하느님 나라 운동에, 모든 인민들이 하나로 연대하는 일에 큰 벽이 되었다. 예수는 그 벽을 자신부터 깨트리는 것이다. 예수는 제 어머니와 형제를 부인하는 게 아니라 어머니와 형제의 의미를 해체하여 하느님 나라 운동을 기준으로 다시 세우며 동시에 무한하게 확장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그런 사람”은 물론 바리사이인들이 말하듯 하느님의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고 참여하는 사람, 즉 하느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이다. 예수는 가족의 의미를 다시 세운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어도 하느님 나라 운동에 함께하는 사람은 가족이지만, 나를 낳은 어머니, 나와 피를 나눈 형제라 해도 그 듯을 같이 하지 않는다면 남과 다를 바 없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베풀러 온 줄로 여기지 마시오. 평화가 아니라 칼을 던지러 왔습니다. 사실 나는, (자식 된) 사람과 제 아버지, 딸과 제 어머니, 며느리와 제 시어머니를 가르러 왔습니다. 제집 식구들이 제 원수들이 될 것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마땅하지 않습니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마땅하지 않습니다.” (마태 10:34~37)
(66-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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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리사이들과 예루살렘에서 온 율사 몇 사람이 그분께 몰려왔다. 2 그런데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부정한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빵을 먹는 것을 보았다. 3 바리사이들과 모든 유다인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먹지 않는다. 4 그리고 시장에서 (돌아오면 몸을) 씻지 않고서는 먹지 않는다. 그 밖에도 지켜야 할 전통이 많이 있으니, 잔과 옹자배기와 놋그릇[과 침대]를 씻는 것이다. 5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은 그 분께 “왜 당신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다라서 걷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빵을 먹습니까?”라고 물었다. 6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사야는 여러분 같은 위선자들을 두고 잘도 예언했으니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섬기지만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도다. 7 헛되이 나를 공경하나니 인간의 계명을 교리로 가르치기 때문이로다.’ 8 여러분은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인간의 전통을 지키고 있습니다.” 9 그러시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립니다. 10 모세는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와 너의 어머니를 공경하라’ 또한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11 그런데 여러분은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코르반이라 하면, 즉 제게서 공양 받으실 것은 예물입니다 하면 그만이다’ 하면서 12 여러분은 그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아무것도 더 해 드리지 못하게 합니다. 13 여러분이 전하는 여러분의 전통에 의해서 여러분은 하느님의 말씀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여러분은 이런 짓들을 많이 합니다.”
예수는 바리사이인들과 “위선자”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는 격정적인 논쟁을 벌인다. 복음서를 읽다 보면 예수의 바리사이인들에 대한 분노가 워낙 불거지다 보니, 마치 예수가 사두가이파나 헤로데 괴뢰 세력보다 바리사이인들을 ‘더 나쁜 놈들’이라 여겼던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실제로 그렇진 않다. 사두가이인들이나 헤로데 괴뢰 세력이 바리사이인들보다 사회적으로 훨씬 더 나쁜 사람들인 건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예수는 그 자신이 ‘선생’(랍비)이라 불리기도 하는, 바리사이인들과 매우 가까운 사회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비판이 반드시 ‘그 사회에서 가장 악한 세력’을 대상을 h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오히려 가장 악한 세력은 그 악함이 이미 일반화되어, 뒤집어 말하면 그들에 대한 인민들의 적대감이나 반감 또한 일반화되어 있어서, 그들을 비판하는 일은 그런 일반화한 적대감이나 반감을 한 번 더 되새기는 일에 머물기 쉽다. 너무나 지당한 일은 하나 마나 한 일이기도 한 것이다. 사회적 비판은 그 사회에서 가장 악한 세력이 아니라 ‘그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주요한 세력’에 집중되어야 한다. 그 세력은 두 가지 요건을 갖는다. 가장 악한 세력과 갈등하거나 짐짓 적대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인민들에게 존경심과 설득력을 가질 것, 그러나 그 갈등과 적대의 수준은 지배체제 자체를 뒤흔들 만큼 심각하지 않을 것. 그 두 가지 요건의 절묘한 좌화가 바로 사회 변화를 가로막는 것이다.
바리사이인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인민들은 사두가이인들과 헤로데 괴뢰 세력을 혐오했지만 이스라엘의 현실과 미래를 고뇌하며 실천하는 바리사이인들을 존경했다. 그러나 바리사이인들은 젤롯당처럼 목숨을 걸고 싸울 만큼 열정적이지 않았고, 성정 지배세력과 완전히 절연하고 광야에서 금욕적 공동체 생활을 하던 에세네파처럼 순수하지 않았다. 적당한 여정과 적당한 순수함으로 무장한 그들은 삶의 안정과 사회적 존경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어지간한 사회 개혁의 실천으로, 지배세력의 폭압이 혁명의 불길로 번지는 걸 차단하고 인민들의 변혁 의지를 중화하는 체제의 안전판이었다. 예수는 놀라운 통찰로 그들의 정체를 꿰뚫어 본다.
2,000년 전 이스라엘에 살던 바리사이인들의 정체를 파악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바리사이인들을 파악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예수 당시 바리사이인들이 자신들이 비난받을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라 생각했듯, 오늘 바리사이인들은 자신들이 바리사이인인 줄 모른다. 오늘 바리사이인들은 2,000년 전 바리사이인들을 매우 진지한 얼굴로 욕하는 것이다. 우리는 2,000년 전 바리사이인들의 모습을 찬찬히 살핌으로써 오늘의 바리사이인들을 파악해 볼 수 있다.
그들은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며, 안정된, 그러나 거부감이 들 만큼은 아닌 경제력을 가진 사람들이며, 상당한 사회의식을 가진 ‘양심적인 시민들’이다. 그들은 탐욕스럽고 불의한 지배세력과 짐짓 긴장과 갈등을 벌이며, 늘 먹고사는 일에 매달려야만 하는 대다수 인민들과는 달리 시민으로서 양식을 충분히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언제나 현실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스스로 그런 변화를 위한 노력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그 노력은 대개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라 현실의 외피를 덜 추악하게 만드는 일에 머문다. 그들은 오히려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를 좇는 모든 노력들을 ‘비현실적’이라고 냉소한다. 그들은 ‘NGO', '시민운동’, ‘개혁운동’, 그리고 ‘실현 가능한 진보’, ‘최소한의 상식의 회복’ 따위 간판과 표어를 걸고 활동한다. 인민들은 탐욕스럽고 불의한 지배세력을 혐오하지만 양식과 윤리로 무장한 그들을 신뢰하고 존경한다. 그래서 그들, 오늘의 바리사이인들은 사회적으로 강력한 영향력과 설득력을 가지며, ‘진정한 변화를 막기 위한 변화’라는 그들 본연의 임무를 지속하게 된다.
(115-1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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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분은 성전으로 들어가셔서 성전에서 사고파는 사람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환전상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 16 그리고 누구든 성전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셨다. 17 또한 가르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집은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구나.” 18 마침 대제관들과 율사들이 듣고서는 어떻게 그분을 없애 버릴까 하고 궁리했다. 사실 그들은 그분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군중이 모두 그분의 가르침을 매우 놀라워했기 때문이다. 19 또 저물게 되자 그분 일행은 성 밖으로 나갔다.
‘성전 정화’ 사건이라 불리는 이 에피소드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행적 가운데 가장 소란스러운 것이다. 순례자들은 성전에 제물로 양을 바치거나 형편이 덜한 사람은 비둘기를 바쳤는데 반드시 성전에서 인정한 ‘정결한 것’이어야 했다. 성전의 뜰에는 ‘정결한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로 넘쳤는데 그 양과 비둘기 가격은 여느 양이나 비둘기보다 수십 배나 비쌌다. 성전에 바칠 돈 역시 로마 화폐가 아닌 잘 사용하지 않는 이스라엘 화폐로 바꾸어야 했는데 성전 뜰의 환전상들은 말도 안 되는 수수료를 받았다. 물론 그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은 성전과 결탁해 있었고, 그 막대한 수익의 대부분은 대제관을 비롯한 성전의 고위층에로 흘러 들어갔다.
사실 성전이 그런 상태에 있다는 걸 인민들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인민들은 성전에 순응했다. 묵묵히 수십 배의 돈을 치로 양과 비둘기를 사고 돈을 바꾸어 제관에게 바쳤다. 타락했지만 ‘그래도 성전인데, 그래도 하느님이 거하시는 곳인데’ 하는 순진한 생각에서였다. 성전이나 제관들에게 대항하는 건 마치 하느님에게 대항하는 것처럼 느껴져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예수가 성전의 문제들을 대화와 비판으로 풀지 않고 ‘난동’을 부린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예수가 성전 지배세력의 비리나 부정들을 고치고 개혁함으로써 성전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굳이 그런 ‘난동’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는 말은 성전에 대한 비판을 넘어 그에 대한 ‘부인’이다. 예수는 그 성전이 ‘문제 있는 성전’이 아니라 ‘성전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그 선언은 성전 지배세력을 향한 공격이자 성전 체제의 권위에 눌려 침묵하는 인민들을 일깨우는 퍼포먼스였다.
예수의 태도는 우선 오늘날의 교회(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스스로를 ‘성전’이라 부르기도 한다)에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깨우침을 준다. 그 교회들이 이미 ‘교회가 아니’라, 교회를 가장한 상점 혹은 기업이라면, 그것은 비판과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부인의 대상일 뿐이다. 예수가 ‘그래도 성전인데’하며 침묵하던 사람들 앞에서 “강도들의 소굴”이라 외쳤듯이 우리는 ‘그래도 교회인데’하며 침묵하는 사람들 앞에서 “강도들의 소굴”이라 외쳐야 한다.
그러나 예수 당시의 성전이 단지 종교적 의미를 넘어 지배체제의 핵심이었다는 사실에서, 예수의 태도를 전 사회적 영역으로 확대해 보아야만 한다. 예수는 억압의 사회체제가 피억압자들의 비굴과 무기력에 힘입어 유지된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앞서 말했듯 인민들은 성전의 실상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저것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다”, “하느님은 저곳에 거하시지 않는다”고 말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침묵했다. 그리고 그 침묵엔 예의 순진함 외에 ‘세상이 다 그런 거지’하는 비굴과 무기력이 들어 있었다.
우리는 대개 어떤 불의한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힘이 전적으로 그 체제의 지배세력에서 나온다고 생각하곤 한다. 이를테면 1970년대 한국의 군사 파시즘 체제를 유지하는 힘은 전적으로 박정희 패거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민은 다만 그 포악한 체제의 일방적 희생자로 묘사된다. ‘박정희 군사 파시즘에 신음하던 인민들.’ 그러나 그 시절 대개의 인민들은 ‘신음’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이 다 그런 거지’, ‘사람이 하는 일인데 완벽할 수야 있나’하며 제 식구들 챙기며 오순도순 살았을 뿐이다. 불의한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더 근본적인 힘은 바로 인민들의 비굴과 무기력이다. 사실 제 아무리 포악하고 강한 사회체제라고 해도 대다수 인민들이 한꺼번에 거부 의사를 표시하면 당장이라도 맥없이 무너지게 되어 있다. 예수는 수많은 인민들 앞에서 그들의 비굴과 무기력을 일깨우는 것이다. 결국 예수의 ‘난동’은 침묵하는 억압의 체제에 균열을 일으키는 장엄한 퍼포먼스였다. 지배자들은 그 퍼포먼스를 통해 하느님의 권위로 은폐된 그들의 썩은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인민들은 ‘인민들의 순진함’으로 가려진 제 비굴과 무기력을 비로소 되새기며 인간적 위엄을 회복할 채비를 할 수 있었다.
(178-182쪽)
40 그리고 나병환자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간청하며 “선생님은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였다. 41 그러니 예수께서는 측은히 여기시고 당신 손을 펴 그를 만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시오” 하였다. 42 그러자 즉시 그에게서 나병이 물러가고 그는 깨끗하게 되었다. 43 그리고 그에게 호통치시며 즉시 그를 쫓아내셨다. 44 그러시며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느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가서 제관에게 당신을 보이고, 당신이 깨끗해진 것에 대해서 모세가 명한 제물들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시오.” 45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많이 선포하고 또한 그 일을 선전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도시로 들어가실 수 없었고 바깥 외딴 곳에 계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왔다.
“측은히 여기시고”는 그리스어 ‘스플랑크니조마이’를 옮긴 것인데 ‘창자, 내장’을 뜻하는 ‘스플랑크논’의 동사형이다. 한국어에는 기막히게도 같은 말이 있다. ‘애끊다’는 말이다. ‘애’는 바로 ‘창자, 내장’을 뜻하고, ‘애끊다’는 말은 ‘몹시 슬퍼서 창자가 끊어질 듯하다’는 말이다. 고통받는 사람 앞에서 측은한 마음이 드는 건 정상적인 인간성을 가진 사람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애끊지는 않는다. 우리가 애끊는 순간은 낯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제 아이나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대면할 때다.
그런데 예수는 난생처음 만난 나병환자에게 애끊는다. 바로 이것이 예수라는 사람의 속내이며 행동의 원천이다. 예수의 모든 행동은 ‘모든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애끊는 마음’에서 시작한다. 그의 분노 역시 애끊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애끊는 마음이 자연스레 그들의 고통을 낳는 사람들과 사회체제에 대한 강렬한 분노로 이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따르거나 예수에게서 배우는 일 역시 ‘모든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애끊는 마음’을 갖는 일에서 출발한다.
‘스플랑크니조마이’는 「마르코복음」에 세 번 나온다. “그러니 예수께서는 측은히 여기시고 당신 손을 펴 그를 만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시오’ 하였다.”(1:41) “그래서 그분은 (배에서) 내리면서 큰 군중을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6:34) “군중이 측은합니다. 그들이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있는데 먹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8:2)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병자는 누구보다 도움과 보호를 받아야 할 사람이지 자신의 어떤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병자는 죄가 있어서 하느님의 벌을 받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만성 질병 환자일수록 하느님께 용서받기 어려운 큰 죄를 지은 사람으로 여겨진 건 물론이다. 그런 사고방식 속에서 만성 질병일 뿐 아니라 외관마저 흉하게 일그러지는 ‘나병’(오늘의 한센병을 포함하여 좀더 넓은 범위의 만성 피부병을 뜻한다) 환자는 공동체에서 완전히 버림받았다. 나병환자는 사람들이 다가오면 “불결! 불결!” 하고 소리 질러야 했으며, 마을에는 들어갈 수도 없었다.
병자는 병으로 인한 고통에 보태어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인간적․사회적 고통을 받아야 했다. ‘개인’이라는 개념이 없던, 모든 사람이 가족이나 지역 같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만 제 존재와 삶의 가치를 확인하던 사회에서 공동체로부터 버림받는다는 건 죽음과 같았다. 요즘도 신유나 안수니 해서 기독교의 테두리 안에서 병을 고치는 행위들이 있지만 예수의 치유와는 차원이 다르다. 예수가 병자를 고치는 일은 단지 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 아니라 그의 잃어버린 인권을 회복시키고 죽음 같던 삶을 회복시키는 일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병자 본인에게 병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온 우주가 다시 열리는 벅찬 순간인 것이다.
애끊어 어쩔 줄 모르던 예수는 나병이 나은 사람에게 ‘제관에게 가서 정해진 절차를 거치라’고 말한다. 나병 환자가 다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려면 예루살렘 성전의 제관에게 가서 병이 다 나았음을 인정받은 의례를 거치도록 되어 있었다. 예수는 기쁜 얼굴로 그에게 말하는 것이다. ‘자 이제 누구도 당신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가슴을 펴고 세상으로 걸어 나가세요. 하느님은 당신 편입니다.’
(37-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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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그리고 그분은 다시 호숫가로 나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모두 그분께 왔고 그분은 그들을 가르치셨다. 14 그리고 지나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나를 따르시오” 하셨다. 그러자 그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5 그리고 그분은 그의 집에서 식사하시게 되었다. 그런데 많은 세관원들과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자리 잡았다. 그들은 (수가) 많았으며, 그분을 따라왔던 것이다. 16 그런데 바리사이파 율사들은 그분이 죄인들과 세관원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저 사람이 세관원들과 죄인들과 어울려 먹다니?” 했다. 17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의사는 건장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앓는 사람들에게 필요합니다. 나는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왔습니다.
예수가 세리(세관원)를 제자로 삼은 건 파격적인 사건이다. 그들은 하느님과 이스라엘을 배신한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유일하게 계약을 맺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걸 더할 수 없는 모욕으로 여겼다. 게다가 세금은 관리가 직접 징수하는 게 아니라 입찰을 통해 민간인 징수 대행업자에게 맡겼다. 징수 대행업자는 입찰시 적어낸 금액을 선납한 다음 세금을 징수했다. 세금을 얼마나 많이 거두어들이는가에 따라 징수 대행업자의 수입이 결정되었으므로 징수업자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내는 것 자체가 모욕인 세금이 징수 과정의 공정함마저 없었으니 인민들의 반감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세리는 그 징수 대행업자 밑에서 일하는 말단 징수인이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앞에서 인민들과 접촉했으므로 로마에 대한 적대감을 한 몸에 안아야 했다. 예수가 레위를 제자로 고른 건 그가 제자로 삼을 만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굳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세리를 제자로 부를 필요는 없다. 그런 행동은 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공격할 빌미를 제공하는 일이며 예수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들고 결국 예수의 활동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보란 듯이 그렇게 한다.
예수의 행동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세리는 대단한 세속적 야망이나 기득권을 구하기 위해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먹고 살기 위해 그 짓을 하는 사람이다. 만일 다른 품위 있는 일을 해서 비슷한 벌이를 할 수 있다면 세리 노릇을 지속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비난받아야 할 그들의 배후보다 더 심한 비난과 경멸을 받아야 했다. 경건한 사람들에게서 죄인 취급 받는 사람들조차 그들을 경멸했다. 예수는 대놓고 세리를 제자로 삼음으로써 그 위선과 허위를 까발리고 환기한다.
오늘날 ‘바리사이인’은 기독교나 성서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서조차 ‘위선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즉 바리사이인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히려 이스라엘 사회를 통틀어 가장 양식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 사회는 오랜 외세 침략으로 그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었다. 헬라 문화의 유행은 상류층에 만연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헬라식 운동경기 구경을 위해 제의 시간을 바꿀 정도였다. 성전 지배세력이자 귀족계급인 사두가이파는 로마와 야합하면서 온갖 영화를 누렸다. 대제관의 임명권도 이미 로마가 갖고 있었다.
바리사이이인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전통이 완전히 결딴나려는 그런 상황 속에서 분연히 일어난 사람들이다. ‘바리사이’라는 말은 ‘분리하다’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모든 이방 문화로부터 이스라엘을 분리시켜 그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사람들이었다. 바리사이인들은 사두가이인들이 장학한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지역의 회당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인민들은 로마와 야합하고 타락한 사두가이인들을 존경하지 않았지만 바리사이인들은 존경했다. 바리사이인들은 오늘 윤리적이며 정의감에 넘치는 시민운동가들과 같은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바리사이인들이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 사회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하느님이 주신 율법, 즉 토라를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었다. 바리사이인들은 토라를 분석해서 일상생활의 모든 세세한 부분에까지 적용할 수 있도록 정리했다. 바리사이인들의 율법주의는 그 자체론 나무랄 데가 없었다.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의무요 자부인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인민들에게 율법주의는 재앙이었다. 그 세세한 율법을 다 지키다가는 굶어 죽기 십상이었던 것이다. 훌륭한 바리사이인들 덕에 인민들은 ‘죄 없는 죄인’이 되었다. 그리고 인민들은 그런 현실을 체념했다. 그들 역시 ‘율법을 지켜야만 제대로 된 사람’이라는 생각에 깊이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바로 그 ‘죄의식의 체제’에 주목한다. 예수는 그 체제를 깨트리기 위해 기존의 생각을 뒤집는다. “의사는 건장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앓는 사람들에게 필요합니다. 나는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왔습니다.” 예수는 오로지 율법을 잘 지키는 의로운 사람들에게만 하느님의 사랑이 닿는다고 생각하던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뒤집는다. 예수는 하느님의 관심이 율법을 잘 지키는 경건한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먹고 살기 위해선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인들에게 있음을 선포한다. 그들이 하느님 나라의 주인공이고 기존의 모든 가치들은 그들을 중심으로 재정리되어야 한다.
(...)
사람은 아무하고나 밥을 먹지 않는다. 식사 약속엔 엄격한 사회적 맥락에 들어 있다. 식사에 초대하는 건 그 사람을 내 사회적 관계와 질서 속에 들이는 일이다. 이를테면 한 아버지가 마땅치 않아하던 아들의 여자 친구를 식사에 초대했다며 그건 단지 함께 끼니를 해결하자는 게 아니라 둘의 교제를 허락한다는 의미가 된다. 하물며 고대사회 특히 이스라엘 사회에서 식탁 교제는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에 속했다. 누구와 먹는가, 어느 자리에 앉는가 따위는 곧 사람의 신분과 명예를 표현했다. 그래서 점잖은 사람들은 절대 죄인들과 식사하지 않았다. 그들과 식사하는 건 자신을 더럽혀 하느님께 죄를 짓는 일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세리나 죄인들과 기꺼이, 아니 보란 듯이 어울려 식사를 했다. 고상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이스라엘 민족의 현실과 미래에 대해 담소할 때 예수는 죄인들과 어울려 유쾌하고 떠들썩한 식사를 했다. 예수는 식탁 교제의 법칙을 해체함으로써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다시 한 번 선언한다. ‘하느님은 고상하고 훌륭하다 칭송받는 사람들만 가까이 하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천대받고 멸시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분이다. 하느님은 자신의 명령이라 주장되는 율법에 의해 삶이 옥죄어진 사람들 때문에 가슴 아파하는 분이다.
양식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식탁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천박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죄인 취급을 받는 사람들은 예수의 식탁에서 비로소 인권을 가진 한 인간이 되었다. 예수의 식탁에서 기존의 가치관과 위계는 모조리 전복되었다. 말하자면 예수의 식탁은 ‘선취된’ 하느님 나라의 풍경이었다.
(45-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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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리고 예수께서는 당신 제자들과 함께 호수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로부터 큰 무리가 따랐다. 8 또한 유다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아, 요르단 강 건너편, 그리고 띠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큰 무리가 그분이 하신 모든 일을 전해듣고 그분께 왔다. 9 그러자 군중이 당신을 밀어붙일까봐 당신을 위해 작은 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당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0 사실 그분이 많은 이들을 낫게 하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을 만지려고 그분에게 밀려들었던 것이다. 11 또한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자 그분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소리 질렀다. 12 그러자 그분은 당신을 밝히지 말라고 그들을 몹시 꾸짖으셨다.
예수는 마지막 며칠을 제외한 공생애 기간 내내 갈릴래아 시골 마을로만 돈다. 예수의 고향인 나자렛에서 고작 6킬로미터 떨어진 세포리스는 원형경기장까지 잇는 번성한 그리스식 도시였지만 예수가 그곳에서 활동한 흔적은 없다. 예수의 활동 방식은 사회운동의 일반적인 속성을 거스른다. 모름지기 운동이란 그 이념이나 목적을 막론하고 더 많은 사회적 영향력을 갖기 위해 되도록 크고 번성한 지역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 가려는 속성이 있다. 그러나 예수의 독특한 활동 방식은 이른바 사회운동의 성장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깨우침을 준다.
운동이란 기존의 사회체제를 변화시키는 것이지만, 운동이 갖는 숙명적인 모순은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 또한 기존의 사회체제와 그 사고방식에 이미 깊이 물들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운동하는 사람들도 운동의 외형적 성장, 즉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세상에 널리 알려지며 조직이 커지는 것을 운동의 성장과 등치시키는 경향이 있다. 물론 운동이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려면 그런 외형적 성장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운동의 외형적 성장은 두 가지 위험을 수반한다. 하나는 외형적 성장과 운동의 정체성의 훼손이 비례하는 경향이다. 또 하나는 운동의 외형적 성장은 기존의 사회체제에 포섭되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결국 운동의 껍데기는 커졌지만 정작 운동의 알맹이는 어느새 사라져 버린, 비대한 운동 조직이 사회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운동 조직 스스로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예수는 우리에게 운동의 진정한 성장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예수는 애당초 운동의 외형적 성장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예수는 오로지 제 운동, 즉 ‘하느님 나라 운동’의 본대 목적과 내용에만 집중한다. 예수는 시종일관 하느님 나라의 주인공, 즉 고통 받는 인민들을 찾아다니며 하느님의 위로와 초대를 전하는 일에만 집중한다. 예수가 갈릴래아 시골 마을로만 돈 것은 무엇보다 그들이 그곳에 많이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흐트러짐 없는 활동은 결국 그 공간적 제약을 뛰어넘어 팔레스타인 전역, 예루살렘을 비롯한 유다 지역뿐 아니라 요르단 강 건너편 이방 지역에서까지 사람들에게 울림을 준다.
지금 여기에서 고통 받는 사람과 죄인들이 하느님 나라의 주인공이라는 예수의 말은 혁명에 대한 우리의 편협한 이해에 의해 자칫 오해될 수가 있다. 예수의 말은 고통받는 사람과 죄인들이 지배계급이 리던 부와 권력을 빼앗아 새로운 지배계급이 된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가 말하는 하느님 나라는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그 본래 모습을 회복하는 세상이다. 지배와 피지배가 없는,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서로를 존중하는, 이기심이 아니라 우애에 의해 운영되는 세상이다. 그것은 당연히 다른 사람의 수고와 고통 덕에 안락을 누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 인권을 회복하는 일을 기초로 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회복이 세상의 회복이며, 그들이 하느님 나라를 향한 도정에서 주인공인 것이다.
더러운 악령들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소리 질렀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시점상의 혼란’을 줄 수 있다. 「마르코복음」은 AD 70년경, 기독교의 교리나 신학의 기초가 만들어진 후 쓰였다. 「마르코복음」은 이미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보는 시각에서 쓰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활동했던 당시에 예수는 전혀 그런 사람으로 여기지지 않았다. 예수는 기껏해야 랍비 혹은 세례자 요한의 뒤를 잇는 예언자로 여겨졌을 뿐이다.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전제하고 복음서를 읽는 건 예수의 절절한 삶을, 다시 말해서 복음서를 읽는 이유나 가치를 내팽개치는 일이다. 복음서는 ‘한 평범한 시골 c jd년이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로 여겨지게 되었는가’를 증언한 책이지 ‘하느님 아들의 인간 흉내 쇼’를 적은 책이 아니다.
아주 오랫동안 기독교 교회는 그 ‘시점상의 혼란’을 방기하거나 오히려 부추겨 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신도들이 복음서를 읽으며 의문이나 토론 과정을 거쳐 예수에 대해 이해해하는 쪽보다는 무작정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게 하는 쪽이 신도들의 교회에 대한 복종심을 관리하기에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60-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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