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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그리고 나병환자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간청하며 “선생님은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였다. 41 그러니 예수께서는 측은히 여기시고 당신 손을 펴 그를 만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시오” 하였다. 42 그러자 즉시 그에게서 나병이 물러가고 그는 깨끗하게 되었다. 43 그리고 그에게 호통치시며 즉시 그를 쫓아내셨다. 44 그러시며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느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가서 제관에게 당신을 보이고, 당신이 깨끗해진 것에 대해서 모세가 명한 제물들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시오.” 45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많이 선포하고 또한 그 일을 선전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도시로 들어가실 수 없었고 바깥 외딴 곳에 계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왔다.
“측은히 여기시고”는 그리스어 ‘스플랑크니조마이’를 옮긴 것인데 ‘창자, 내장’을 뜻하는 ‘스플랑크논’의 동사형이다. 한국어에는 기막히게도 같은 말이 있다. ‘애끊다’는 말이다. ‘애’는 바로 ‘창자, 내장’을 뜻하고, ‘애끊다’는 말은 ‘몹시 슬퍼서 창자가 끊어질 듯하다’는 말이다. 고통받는 사람 앞에서 측은한 마음이 드는 건 정상적인 인간성을 가진 사람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애끊지는 않는다. 우리가 애끊는 순간은 낯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제 아이나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대면할 때다.
그런데 예수는 난생처음 만난 나병환자에게 애끊는다. 바로 이것이 예수라는 사람의 속내이며 행동의 원천이다. 예수의 모든 행동은 ‘모든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애끊는 마음’에서 시작한다. 그의 분노 역시 애끊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애끊는 마음이 자연스레 그들의 고통을 낳는 사람들과 사회체제에 대한 강렬한 분노로 이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따르거나 예수에게서 배우는 일 역시 ‘모든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애끊는 마음’을 갖는 일에서 출발한다.
‘스플랑크니조마이’는 「마르코복음」에 세 번 나온다. “그러니 예수께서는 측은히 여기시고 당신 손을 펴 그를 만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시오’ 하였다.”(1:41) “그래서 그분은 (배에서) 내리면서 큰 군중을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6:34) “군중이 측은합니다. 그들이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있는데 먹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8:2)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병자는 누구보다 도움과 보호를 받아야 할 사람이지 자신의 어떤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병자는 죄가 있어서 하느님의 벌을 받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만성 질병 환자일수록 하느님께 용서받기 어려운 큰 죄를 지은 사람으로 여겨진 건 물론이다. 그런 사고방식 속에서 만성 질병일 뿐 아니라 외관마저 흉하게 일그러지는 ‘나병’(오늘의 한센병을 포함하여 좀더 넓은 범위의 만성 피부병을 뜻한다) 환자는 공동체에서 완전히 버림받았다. 나병환자는 사람들이 다가오면 “불결! 불결!” 하고 소리 질러야 했으며, 마을에는 들어갈 수도 없었다.
병자는 병으로 인한 고통에 보태어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인간적․사회적 고통을 받아야 했다. ‘개인’이라는 개념이 없던, 모든 사람이 가족이나 지역 같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만 제 존재와 삶의 가치를 확인하던 사회에서 공동체로부터 버림받는다는 건 죽음과 같았다. 요즘도 신유나 안수니 해서 기독교의 테두리 안에서 병을 고치는 행위들이 있지만 예수의 치유와는 차원이 다르다. 예수가 병자를 고치는 일은 단지 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 아니라 그의 잃어버린 인권을 회복시키고 죽음 같던 삶을 회복시키는 일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병자 본인에게 병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온 우주가 다시 열리는 벅찬 순간인 것이다.
애끊어 어쩔 줄 모르던 예수는 나병이 나은 사람에게 ‘제관에게 가서 정해진 절차를 거치라’고 말한다. 나병 환자가 다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려면 예루살렘 성전의 제관에게 가서 병이 다 나았음을 인정받은 의례를 거치도록 되어 있었다. 예수는 기쁜 얼굴로 그에게 말하는 것이다. ‘자 이제 누구도 당신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가슴을 펴고 세상으로 걸어 나가세요. 하느님은 당신 편입니다.’
(37-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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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그리고 그분은 다시 호숫가로 나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모두 그분께 왔고 그분은 그들을 가르치셨다. 14 그리고 지나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나를 따르시오” 하셨다. 그러자 그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5 그리고 그분은 그의 집에서 식사하시게 되었다. 그런데 많은 세관원들과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자리 잡았다. 그들은 (수가) 많았으며, 그분을 따라왔던 것이다. 16 그런데 바리사이파 율사들은 그분이 죄인들과 세관원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저 사람이 세관원들과 죄인들과 어울려 먹다니?” 했다. 17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의사는 건장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앓는 사람들에게 필요합니다. 나는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왔습니다.
예수가 세리(세관원)를 제자로 삼은 건 파격적인 사건이다. 그들은 하느님과 이스라엘을 배신한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유일하게 계약을 맺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걸 더할 수 없는 모욕으로 여겼다. 게다가 세금은 관리가 직접 징수하는 게 아니라 입찰을 통해 민간인 징수 대행업자에게 맡겼다. 징수 대행업자는 입찰시 적어낸 금액을 선납한 다음 세금을 징수했다. 세금을 얼마나 많이 거두어들이는가에 따라 징수 대행업자의 수입이 결정되었으므로 징수업자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내는 것 자체가 모욕인 세금이 징수 과정의 공정함마저 없었으니 인민들의 반감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세리는 그 징수 대행업자 밑에서 일하는 말단 징수인이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앞에서 인민들과 접촉했으므로 로마에 대한 적대감을 한 몸에 안아야 했다. 예수가 레위를 제자로 고른 건 그가 제자로 삼을 만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굳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세리를 제자로 부를 필요는 없다. 그런 행동은 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공격할 빌미를 제공하는 일이며 예수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들고 결국 예수의 활동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보란 듯이 그렇게 한다.
예수의 행동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세리는 대단한 세속적 야망이나 기득권을 구하기 위해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먹고 살기 위해 그 짓을 하는 사람이다. 만일 다른 품위 있는 일을 해서 비슷한 벌이를 할 수 있다면 세리 노릇을 지속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비난받아야 할 그들의 배후보다 더 심한 비난과 경멸을 받아야 했다. 경건한 사람들에게서 죄인 취급 받는 사람들조차 그들을 경멸했다. 예수는 대놓고 세리를 제자로 삼음으로써 그 위선과 허위를 까발리고 환기한다.
오늘날 ‘바리사이인’은 기독교나 성서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서조차 ‘위선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즉 바리사이인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히려 이스라엘 사회를 통틀어 가장 양식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 사회는 오랜 외세 침략으로 그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었다. 헬라 문화의 유행은 상류층에 만연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헬라식 운동경기 구경을 위해 제의 시간을 바꿀 정도였다. 성전 지배세력이자 귀족계급인 사두가이파는 로마와 야합하면서 온갖 영화를 누렸다. 대제관의 임명권도 이미 로마가 갖고 있었다.
바리사이이인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전통이 완전히 결딴나려는 그런 상황 속에서 분연히 일어난 사람들이다. ‘바리사이’라는 말은 ‘분리하다’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모든 이방 문화로부터 이스라엘을 분리시켜 그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사람들이었다. 바리사이인들은 사두가이인들이 장학한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지역의 회당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인민들은 로마와 야합하고 타락한 사두가이인들을 존경하지 않았지만 바리사이인들은 존경했다. 바리사이인들은 오늘 윤리적이며 정의감에 넘치는 시민운동가들과 같은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바리사이인들이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 사회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하느님이 주신 율법, 즉 토라를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었다. 바리사이인들은 토라를 분석해서 일상생활의 모든 세세한 부분에까지 적용할 수 있도록 정리했다. 바리사이인들의 율법주의는 그 자체론 나무랄 데가 없었다.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의무요 자부인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인민들에게 율법주의는 재앙이었다. 그 세세한 율법을 다 지키다가는 굶어 죽기 십상이었던 것이다. 훌륭한 바리사이인들 덕에 인민들은 ‘죄 없는 죄인’이 되었다. 그리고 인민들은 그런 현실을 체념했다. 그들 역시 ‘율법을 지켜야만 제대로 된 사람’이라는 생각에 깊이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바로 그 ‘죄의식의 체제’에 주목한다. 예수는 그 체제를 깨트리기 위해 기존의 생각을 뒤집는다. “의사는 건장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앓는 사람들에게 필요합니다. 나는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왔습니다.” 예수는 오로지 율법을 잘 지키는 의로운 사람들에게만 하느님의 사랑이 닿는다고 생각하던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뒤집는다. 예수는 하느님의 관심이 율법을 잘 지키는 경건한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먹고 살기 위해선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인들에게 있음을 선포한다. 그들이 하느님 나라의 주인공이고 기존의 모든 가치들은 그들을 중심으로 재정리되어야 한다.
(...)
사람은 아무하고나 밥을 먹지 않는다. 식사 약속엔 엄격한 사회적 맥락에 들어 있다. 식사에 초대하는 건 그 사람을 내 사회적 관계와 질서 속에 들이는 일이다. 이를테면 한 아버지가 마땅치 않아하던 아들의 여자 친구를 식사에 초대했다며 그건 단지 함께 끼니를 해결하자는 게 아니라 둘의 교제를 허락한다는 의미가 된다. 하물며 고대사회 특히 이스라엘 사회에서 식탁 교제는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에 속했다. 누구와 먹는가, 어느 자리에 앉는가 따위는 곧 사람의 신분과 명예를 표현했다. 그래서 점잖은 사람들은 절대 죄인들과 식사하지 않았다. 그들과 식사하는 건 자신을 더럽혀 하느님께 죄를 짓는 일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세리나 죄인들과 기꺼이, 아니 보란 듯이 어울려 식사를 했다. 고상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이스라엘 민족의 현실과 미래에 대해 담소할 때 예수는 죄인들과 어울려 유쾌하고 떠들썩한 식사를 했다. 예수는 식탁 교제의 법칙을 해체함으로써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다시 한 번 선언한다. ‘하느님은 고상하고 훌륭하다 칭송받는 사람들만 가까이 하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천대받고 멸시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분이다. 하느님은 자신의 명령이라 주장되는 율법에 의해 삶이 옥죄어진 사람들 때문에 가슴 아파하는 분이다.
양식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식탁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천박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죄인 취급을 받는 사람들은 예수의 식탁에서 비로소 인권을 가진 한 인간이 되었다. 예수의 식탁에서 기존의 가치관과 위계는 모조리 전복되었다. 말하자면 예수의 식탁은 ‘선취된’ 하느님 나라의 풍경이었다.
(45-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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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리고 예수께서는 당신 제자들과 함께 호수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로부터 큰 무리가 따랐다. 8 또한 유다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아, 요르단 강 건너편, 그리고 띠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큰 무리가 그분이 하신 모든 일을 전해듣고 그분께 왔다. 9 그러자 군중이 당신을 밀어붙일까봐 당신을 위해 작은 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당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0 사실 그분이 많은 이들을 낫게 하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을 만지려고 그분에게 밀려들었던 것이다. 11 또한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자 그분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소리 질렀다. 12 그러자 그분은 당신을 밝히지 말라고 그들을 몹시 꾸짖으셨다.
예수는 마지막 며칠을 제외한 공생애 기간 내내 갈릴래아 시골 마을로만 돈다. 예수의 고향인 나자렛에서 고작 6킬로미터 떨어진 세포리스는 원형경기장까지 잇는 번성한 그리스식 도시였지만 예수가 그곳에서 활동한 흔적은 없다. 예수의 활동 방식은 사회운동의 일반적인 속성을 거스른다. 모름지기 운동이란 그 이념이나 목적을 막론하고 더 많은 사회적 영향력을 갖기 위해 되도록 크고 번성한 지역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 가려는 속성이 있다. 그러나 예수의 독특한 활동 방식은 이른바 사회운동의 성장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깨우침을 준다.
운동이란 기존의 사회체제를 변화시키는 것이지만, 운동이 갖는 숙명적인 모순은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 또한 기존의 사회체제와 그 사고방식에 이미 깊이 물들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운동하는 사람들도 운동의 외형적 성장, 즉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세상에 널리 알려지며 조직이 커지는 것을 운동의 성장과 등치시키는 경향이 있다. 물론 운동이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려면 그런 외형적 성장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운동의 외형적 성장은 두 가지 위험을 수반한다. 하나는 외형적 성장과 운동의 정체성의 훼손이 비례하는 경향이다. 또 하나는 운동의 외형적 성장은 기존의 사회체제에 포섭되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결국 운동의 껍데기는 커졌지만 정작 운동의 알맹이는 어느새 사라져 버린, 비대한 운동 조직이 사회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운동 조직 스스로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예수는 우리에게 운동의 진정한 성장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예수는 애당초 운동의 외형적 성장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예수는 오로지 제 운동, 즉 ‘하느님 나라 운동’의 본대 목적과 내용에만 집중한다. 예수는 시종일관 하느님 나라의 주인공, 즉 고통 받는 인민들을 찾아다니며 하느님의 위로와 초대를 전하는 일에만 집중한다. 예수가 갈릴래아 시골 마을로만 돈 것은 무엇보다 그들이 그곳에 많이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흐트러짐 없는 활동은 결국 그 공간적 제약을 뛰어넘어 팔레스타인 전역, 예루살렘을 비롯한 유다 지역뿐 아니라 요르단 강 건너편 이방 지역에서까지 사람들에게 울림을 준다.
지금 여기에서 고통 받는 사람과 죄인들이 하느님 나라의 주인공이라는 예수의 말은 혁명에 대한 우리의 편협한 이해에 의해 자칫 오해될 수가 있다. 예수의 말은 고통받는 사람과 죄인들이 지배계급이 리던 부와 권력을 빼앗아 새로운 지배계급이 된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가 말하는 하느님 나라는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그 본래 모습을 회복하는 세상이다. 지배와 피지배가 없는,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서로를 존중하는, 이기심이 아니라 우애에 의해 운영되는 세상이다. 그것은 당연히 다른 사람의 수고와 고통 덕에 안락을 누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 인권을 회복하는 일을 기초로 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회복이 세상의 회복이며, 그들이 하느님 나라를 향한 도정에서 주인공인 것이다.
더러운 악령들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소리 질렀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시점상의 혼란’을 줄 수 있다. 「마르코복음」은 AD 70년경, 기독교의 교리나 신학의 기초가 만들어진 후 쓰였다. 「마르코복음」은 이미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보는 시각에서 쓰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활동했던 당시에 예수는 전혀 그런 사람으로 여기지지 않았다. 예수는 기껏해야 랍비 혹은 세례자 요한의 뒤를 잇는 예언자로 여겨졌을 뿐이다.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전제하고 복음서를 읽는 건 예수의 절절한 삶을, 다시 말해서 복음서를 읽는 이유나 가치를 내팽개치는 일이다. 복음서는 ‘한 평범한 시골 c jd년이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로 여겨지게 되었는가’를 증언한 책이지 ‘하느님 아들의 인간 흉내 쇼’를 적은 책이 아니다.
아주 오랫동안 기독교 교회는 그 ‘시점상의 혼란’을 방기하거나 오히려 부추겨 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신도들이 복음서를 읽으며 의문이나 토론 과정을 거쳐 예수에 대해 이해해하는 쪽보다는 무작정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게 하는 쪽이 신도들의 교회에 대한 복종심을 관리하기에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60-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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