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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

 

강신주는 보기 드물게 친절한 철학 선생님이다. 그 동안 대학 새내기쯤을 대상으로 한 철학 입문서로 이진경의 <철학과 굴뚝청소부> 정도가 각광을 받아왔지만, 이 책 또한 잘난척하기 좋아하는 얘들 몇을 빼놓고는 그다지 쉽게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그런데 2006년에 강신주의 <철학, 삶을 만나다>라는 책을 만나고 '요것 참 물건이 나왔구나'싶었다. 그래서 여기저기에 이 책을 추천도 많이하고, 그래서 몇몇 얘들은 그걸 가지고 새내기와 함께하는(^^;;) 철학 세미나를 하기도 했었는데...

 

그랬던 강 선생께서 이번에 또 하나의 물건을 내놓으셨다. '시를 통한 철학읽기'라고 해야 더 정확할 듯 싶은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이 그것이다. 내가 원래 문학과 그리 친한 편은 아닌데, 시는 더더군다나 인연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냥 예전에 '투쟁 자료집' 만들때 빈 공간 채워 넣으려고 갖다 쓰던 브레히트나 도종환의 몇몇 구절 정도가 좀 인연이 있었을 뿐... 사실 시라는게 나같은 범속한 인간이 읽으면 '그래서 대체 뭐 어쩌라고'라는 반응이 나오는게 대부분이어서 딱히 가까이 갈 엄두가 나지 않는 세계였다. 그런데 또 강 선생께서 친히 철학-삶-시의 삼각관계를 자연스럽게 풀어헤쳐주셔서 우리는 또 수줍게 시 속에서 나의 삶과 철학을 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보게 된다.

 

일단 내가 이 책에서 소개된 책 중에 가장 맘에 든 시는 김남주 시인의 '어떤 관료'이다. 원래 김남주 시인의 직설적인 화법과 따가운 질책은 언제나 좋았지만, 이 시는 더욱이나 울림이 크다. 각설하고 감상을~

 

어떤 관료  -  김남주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


일제 말기에 그는 면서기로 채용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근면했기 때문이다


미국정 시기에 그는 군주사로 승진했다

남달리 매사에 정직했기 때문이다


자유당 시절에 그는 도청과장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성실했기 때문이다


공화당 시절에 그는 서기관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공정했기 때문이다


민정당 시절에 그는 청백리상을 받았다

반평생을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봉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아프리칸가 어딘가에서 식인종이 쳐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지배한다 하더라도

한결같이 그는 관리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국가에는 충성을 국민에게는 봉사를 일념으로 삼아

근면하고 정직하게!

성실하고 공정하게! 

 

 

이 시를 소개하면서 저자는 한나 아렌트의 "사유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다"라는 명제를 꺼내드는데, 요즘 내 삶에서 그럴만한 계기는 딱히 없었지만 왠지 이에 공감하는 바가 크다. 구청에서 일하다 보면 내가 조금 귀찮아하는 기색만 보이면 공무원들을 말한다. "이 자식 이거 군대를 보냈어야 하는데..." 지금 우리 사회에선 근면함은 무사유의 다른 표현이다. 군대는 무사유 속에서 근면함을 형성시키기에 가장 좋은 장소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처럼 평범한 삶을 살아가지만 언제나 악인이 될 수 있는 무사유의 일상성.

 

 

어쨌든 이 책은 강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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