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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 <예수전> 발췌 - 2

20 그리고 그분은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 와서 그분 일행은 빵을 먹을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21 그런데 그분의 친척들이 듣고서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그분이 정신 나갔다고 말햇던 것이다. 22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사들은 말하기를 “그는 베엘제불에 사로잡혀 있다”고 했고, 또한 “그는 귀신 두목의 힘을 빌려 귀신들을 쫓아낸다”고도 했다. 23 그러자 그분은 그들을 불러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습니까? 24 나라가 서로 갈라지면 그 나라는 지탱할 수 없습니다. 25 또 집안이 서로 갈라지면 그 집안은 지탱할 수 없습니다. 26 이와 같이 사탄도 서로 들고 일어나서 갈라지면 지탱할 수 없고 끝장이 납니다. 27 실상 먼저 힘센 사람을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힘센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그의 세간들을 털 수 없습니다. 묶어 놓아야 그의 집을 털게 될 것입니다. 28 진실히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사람의 아들들은 죄뿐 아니라 독성도, 어떤 독성의 말이라도 모두 용서받을 것입니다. 29 그러나 성령에 대해서 독성의 말을 하는 사람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30 “그는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다”고 그들이 말했기 때문이다. 31 그리고 그분의 어머니와 그분의 형제들이 왔다. 그런데 밖에 서서 그분을 부르러 누군가를 그분에게 보냈다. 32 그리고 그분 주위에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이 그분께 “보시오, 당신의 어머니와 당신 형제들[과 당신 자매들]이 밖에서 찾습니다”했다. 33 그러자 그분은 답변하여 “누가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입니까?”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34 그러고서는 당신 주위에 둥글게 앉아 있는 이들을 둘러보시면서 말씀하셨다. “보시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을! 35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그런 사람이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입니다.”


율법학자들의 비난에 예수는 매우 민감하게, 그들을 불러서까지 대응한다. 예수는 매우 중요한, 한 치의 타협 없이 분명히 해 두어야 할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예수는 ‘신성모독을 해도 용서받을수 있지만 성령을 모독하면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예수는 결국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신앙은 ‘하느님을 대상으로 하는 인간의 종교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활동, 즉 ‘하느님이 진행하는 역사에 인간이 참여하는 행위’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앙은 인간이 만든 종교체제와 교리의 테두리 안에서의 성실과 충성이 아니라, 지금 여기 현실 속에서 하느님이 벌이고 있는 역사, 즉 하느님 나라 운동에의 참여인 것이다.


교회와 교리의 테두리 안에 있지 않아도, 심지어 교회와 교리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다 해도 하느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면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지만, 교회와 교리의 테두리 안에서 제아무리 성실하고 충성스럽다 해도 하느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고 있지 않다면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혹은 다른 종교를 가진 어떤 사람이 열심히 교회에 다니는 그 어떤 사람보다 하느님 보시기에 참신앙을 가진 사람일 수 있으며, 기독교가 전래되기 전에 죽어 하느님이 뭔지 예수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제3세계의 수많은 인민들 가운데에도 하느님 보시기에 참신앙을 가진 사람이 허다한 것이다.


보수 교회에선 이런 사실을 엄격하게 부인하는 것을 마치 하느님을 타협 엇이 섬기는 일인 것처럼 말하지만, 그런 태도는 실은 하느님을 자신들의 교회 체제에 가두어 놓으려는 말도 안 되는 수작일 뿐이다. 우리가 한낱 인간적으로 존경하는 사람이 있어 그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때도, 혹시라도 내 생각이 그의 본디 생각에 못 미칠까 걱정하며, 그런 걱정을 함께 전하는 법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느님의 생각을 전하면서 그리 오만하고 권위에 찬 태도를 가질 수 있겠는가? 하느님을 섬긴다는 건,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려 힘닿는 데까지 노력하면서도 미처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태도이지, 앙상한 교리와 신학을 내세워 자신이 하느님의 권한을 완전히 위임받은 양 구는 태도가 아니다.


예수의 소문을 들은 가족들은 ‘정신이 나간’ 예수를 붙들러 나선다. 가족들의 행동은 예수가 서른 살이 다 되어 가족을 떠나 요한에게 서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까지 전혀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드러낸다. 만일 예수가 어릴적부터 신의 아들이라는 표징을 보였다면, 하다못해 위대한 예언자의 징후라도 보였다면 그가 공적 활동을 시작했을 때 가족들은 그저 ‘올 게 왔구나’ 했을 것이다.


아들이 집을 떠나 ‘미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어머니의 심경은 어땠을까? 어릴 적부터 노동으로 식구들의 생계를 맡아 온 착한 맏아들에 대한 연민, 다른 가족들마저 미쳤다고 말하지만, 또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제 속으로 낳고 기른 어머이기에 직감할 수 있는 아들의 진지하고 존귀한 신념, 그리고 상상하기조차 두려운 그러나 필시 아들에게 닥쳐올 위험과 고난 등에 대한 생각으로 어머니는 번민한다. 그런데 정작 예수는 어머니의 그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어머니를 부인한다.


예수는 마치 출가한 승려처럼 세속의 인연을 ‘초월’하려는 걸까? 이어지는 예수의 말을 곰곰이 살펴보면 예수는 오히려 세속의 인연을 ‘확장’하는 것이다. 흔히 고대인들은 오늘 개인주의에 물든 우리보다 훨씬 덜 이기적이었던 걸로 여겨진다. 물론 그건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그들에겐 집단화한 이기심이 우리보다 훨씬 더 강하게 존재했다. ‘개인’이라는 개념이 없던 그들에게 가족이란 한 사람의 정체성과 사회적 위상을 확인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어떤 사람인가보다는 누구의 자식인가 어느 가문 출신인가가 훨씬더 중요했다. 가족의 이해관계는 전적으로 나의 이해관계였고 단일한 이해관계로 뭉친 가족은 다른 가족이나 사회에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 집단화한 이기심이 하느님 나라 운동에, 모든 인민들이 하나로 연대하는 일에 큰 벽이 되었다. 예수는 그 벽을 자신부터 깨트리는 것이다. 예수는 제 어머니와 형제를 부인하는 게 아니라 어머니와 형제의 의미를 해체하여 하느님 나라 운동을 기준으로 다시 세우며 동시에 무한하게 확장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그런 사람”은 물론 바리사이인들이 말하듯 하느님의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고 참여하는 사람, 즉 하느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이다. 예수는 가족의 의미를 다시 세운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어도 하느님 나라 운동에 함께하는 사람은 가족이지만, 나를 낳은 어머니, 나와 피를 나눈 형제라 해도 그 듯을 같이 하지 않는다면 남과 다를 바 없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베풀러 온 줄로 여기지 마시오. 평화가 아니라 칼을 던지러 왔습니다. 사실 나는, (자식 된) 사람과 제 아버지, 딸과 제 어머니, 며느리와 제 시어머니를 가르러 왔습니다. 제집 식구들이 제 원수들이 될 것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마땅하지 않습니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마땅하지 않습니다.” (마태 10:34~37)


(66-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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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리사이들과 예루살렘에서 온 율사 몇 사람이 그분께 몰려왔다. 2 그런데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부정한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빵을 먹는 것을 보았다. 3 바리사이들과 모든 유다인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먹지 않는다. 4 그리고 시장에서 (돌아오면 몸을) 씻지 않고서는 먹지 않는다. 그 밖에도 지켜야 할 전통이 많이 있으니, 잔과 옹자배기와 놋그릇[과 침대]를 씻는 것이다. 5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은 그 분께 “왜 당신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다라서 걷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빵을 먹습니까?”라고 물었다. 6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사야는 여러분 같은 위선자들을 두고 잘도 예언했으니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섬기지만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도다. 7 헛되이 나를 공경하나니 인간의 계명을 교리로 가르치기 때문이로다.’ 8 여러분은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인간의 전통을 지키고 있습니다.” 9 그러시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립니다. 10 모세는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와 너의 어머니를 공경하라’ 또한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11 그런데 여러분은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코르반이라 하면, 즉 제게서 공양 받으실 것은 예물입니다 하면 그만이다’ 하면서 12 여러분은 그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아무것도 더 해 드리지 못하게 합니다. 13 여러분이 전하는 여러분의 전통에 의해서 여러분은 하느님의 말씀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여러분은 이런 짓들을 많이 합니다.”


예수는 바리사이인들과 “위선자”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는 격정적인 논쟁을 벌인다. 복음서를 읽다 보면 예수의 바리사이인들에 대한 분노가 워낙 불거지다 보니, 마치 예수가 사두가이파나 헤로데 괴뢰 세력보다 바리사이인들을 ‘더 나쁜 놈들’이라 여겼던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실제로 그렇진 않다. 사두가이인들이나 헤로데 괴뢰 세력이 바리사이인들보다 사회적으로 훨씬 더 나쁜 사람들인 건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예수는 그 자신이 ‘선생’(랍비)이라 불리기도 하는, 바리사이인들과 매우 가까운 사회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비판이 반드시 ‘그 사회에서 가장 악한 세력’을 대상을 h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오히려 가장 악한 세력은 그 악함이 이미 일반화되어, 뒤집어 말하면 그들에 대한 인민들의 적대감이나 반감 또한 일반화되어 있어서, 그들을 비판하는 일은 그런 일반화한 적대감이나 반감을 한 번 더 되새기는 일에 머물기 쉽다. 너무나 지당한 일은 하나 마나 한 일이기도 한 것이다. 사회적 비판은 그 사회에서 가장 악한 세력이 아니라 ‘그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주요한 세력’에 집중되어야 한다. 그 세력은 두 가지 요건을 갖는다. 가장 악한 세력과 갈등하거나 짐짓 적대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인민들에게 존경심과 설득력을 가질 것, 그러나 그 갈등과 적대의 수준은 지배체제 자체를 뒤흔들 만큼 심각하지 않을 것. 그 두 가지 요건의 절묘한 좌화가 바로 사회 변화를 가로막는 것이다.


바리사이인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인민들은 사두가이인들과 헤로데 괴뢰 세력을 혐오했지만 이스라엘의 현실과 미래를 고뇌하며 실천하는 바리사이인들을 존경했다. 그러나 바리사이인들은 젤롯당처럼 목숨을 걸고 싸울 만큼 열정적이지 않았고, 성정 지배세력과 완전히 절연하고 광야에서 금욕적 공동체 생활을 하던 에세네파처럼 순수하지 않았다. 적당한 여정과 적당한 순수함으로 무장한 그들은 삶의 안정과 사회적 존경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어지간한 사회 개혁의 실천으로, 지배세력의 폭압이 혁명의 불길로 번지는 걸 차단하고 인민들의 변혁 의지를 중화하는 체제의 안전판이었다. 예수는 놀라운 통찰로 그들의 정체를 꿰뚫어 본다.


2,000년 전 이스라엘에 살던 바리사이인들의 정체를 파악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바리사이인들을 파악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예수 당시 바리사이인들이 자신들이 비난받을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라 생각했듯, 오늘 바리사이인들은 자신들이 바리사이인인 줄 모른다. 오늘 바리사이인들은 2,000년 전 바리사이인들을 매우 진지한 얼굴로 욕하는 것이다. 우리는 2,000년 전 바리사이인들의 모습을 찬찬히 살핌으로써 오늘의 바리사이인들을 파악해 볼 수 있다.


그들은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며, 안정된, 그러나 거부감이 들 만큼은 아닌 경제력을 가진 사람들이며, 상당한 사회의식을 가진 ‘양심적인 시민들’이다. 그들은 탐욕스럽고 불의한 지배세력과 짐짓 긴장과 갈등을 벌이며, 늘 먹고사는 일에 매달려야만 하는 대다수 인민들과는 달리 시민으로서 양식을 충분히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언제나 현실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스스로 그런 변화를 위한 노력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그 노력은 대개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라 현실의 외피를 덜 추악하게 만드는 일에 머문다. 그들은 오히려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를 좇는 모든 노력들을 ‘비현실적’이라고 냉소한다. 그들은 ‘NGO', '시민운동’, ‘개혁운동’, 그리고 ‘실현 가능한 진보’, ‘최소한의 상식의 회복’ 따위 간판과 표어를 걸고 활동한다. 인민들은 탐욕스럽고 불의한 지배세력을 혐오하지만 양식과 윤리로 무장한 그들을 신뢰하고 존경한다. 그래서 그들, 오늘의 바리사이인들은 사회적으로 강력한 영향력과 설득력을 가지며, ‘진정한 변화를 막기 위한 변화’라는 그들 본연의 임무를 지속하게 된다.


(115-1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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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분은 성전으로 들어가셔서 성전에서 사고파는 사람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환전상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 16 그리고 누구든 성전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셨다. 17 또한 가르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집은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구나.” 18 마침 대제관들과 율사들이 듣고서는 어떻게 그분을 없애 버릴까 하고 궁리했다. 사실 그들은 그분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군중이 모두 그분의 가르침을 매우 놀라워했기 때문이다. 19 또 저물게 되자 그분 일행은 성 밖으로 나갔다.


‘성전 정화’ 사건이라 불리는 이 에피소드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행적 가운데 가장 소란스러운 것이다. 순례자들은 성전에 제물로 양을 바치거나 형편이 덜한 사람은 비둘기를 바쳤는데 반드시 성전에서 인정한 ‘정결한 것’이어야 했다. 성전의 뜰에는 ‘정결한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로 넘쳤는데 그 양과 비둘기 가격은 여느 양이나 비둘기보다 수십 배나 비쌌다. 성전에 바칠 돈 역시 로마 화폐가 아닌 잘 사용하지 않는 이스라엘 화폐로 바꾸어야 했는데 성전 뜰의 환전상들은 말도 안 되는 수수료를 받았다. 물론 그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은 성전과 결탁해 있었고, 그 막대한 수익의 대부분은 대제관을 비롯한 성전의 고위층에로 흘러 들어갔다.


사실 성전이 그런 상태에 있다는 걸 인민들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인민들은 성전에 순응했다. 묵묵히 수십 배의 돈을 치로 양과 비둘기를 사고 돈을 바꾸어 제관에게 바쳤다. 타락했지만 ‘그래도 성전인데, 그래도 하느님이 거하시는 곳인데’ 하는 순진한 생각에서였다. 성전이나 제관들에게 대항하는 건 마치 하느님에게 대항하는 것처럼 느껴져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예수가 성전의 문제들을 대화와 비판으로 풀지 않고 ‘난동’을 부린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예수가 성전 지배세력의 비리나 부정들을 고치고 개혁함으로써 성전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굳이 그런 ‘난동’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는 말은 성전에 대한 비판을 넘어 그에 대한 ‘부인’이다. 예수는 그 성전이 ‘문제 있는 성전’이 아니라 ‘성전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그 선언은 성전 지배세력을 향한 공격이자 성전 체제의 권위에 눌려 침묵하는 인민들을 일깨우는 퍼포먼스였다.


예수의 태도는 우선 오늘날의 교회(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스스로를 ‘성전’이라 부르기도 한다)에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깨우침을 준다. 그 교회들이 이미 ‘교회가 아니’라, 교회를 가장한 상점 혹은 기업이라면, 그것은 비판과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부인의 대상일 뿐이다. 예수가 ‘그래도 성전인데’하며 침묵하던 사람들 앞에서 “강도들의 소굴”이라 외쳤듯이 우리는 ‘그래도 교회인데’하며 침묵하는 사람들 앞에서 “강도들의 소굴”이라 외쳐야 한다.


그러나 예수 당시의 성전이 단지 종교적 의미를 넘어 지배체제의 핵심이었다는 사실에서, 예수의 태도를 전 사회적 영역으로 확대해 보아야만 한다. 예수는 억압의 사회체제가 피억압자들의 비굴과 무기력에 힘입어 유지된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앞서 말했듯 인민들은 성전의 실상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저것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다”, “하느님은 저곳에 거하시지 않는다”고 말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침묵했다. 그리고 그 침묵엔 예의 순진함 외에 ‘세상이 다 그런 거지’하는 비굴과 무기력이 들어 있었다.


우리는 대개 어떤 불의한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힘이 전적으로 그 체제의 지배세력에서 나온다고 생각하곤 한다. 이를테면 1970년대 한국의 군사 파시즘 체제를 유지하는 힘은 전적으로 박정희 패거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민은 다만 그 포악한 체제의 일방적 희생자로 묘사된다. ‘박정희 군사 파시즘에 신음하던 인민들.’ 그러나 그 시절 대개의 인민들은 ‘신음’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이 다 그런 거지’, ‘사람이 하는 일인데 완벽할 수야 있나’하며 제 식구들 챙기며 오순도순 살았을 뿐이다. 불의한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더 근본적인 힘은 바로 인민들의 비굴과 무기력이다. 사실 제 아무리 포악하고 강한 사회체제라고 해도 대다수 인민들이 한꺼번에 거부 의사를 표시하면 당장이라도 맥없이 무너지게 되어 있다.  예수는 수많은 인민들 앞에서 그들의 비굴과 무기력을 일깨우는 것이다. 결국 예수의 ‘난동’은 침묵하는 억압의 체제에 균열을 일으키는 장엄한 퍼포먼스였다. 지배자들은 그 퍼포먼스를 통해 하느님의 권위로 은폐된 그들의 썩은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인민들은 ‘인민들의 순진함’으로 가려진 제 비굴과 무기력을 비로소 되새기며 인간적 위엄을 회복할 채비를 할 수 있었다.


(178-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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