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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영, <자본주의 경제 산책> 1장 간단 요약

20세기 경제 산책

- 정운영, 『자본주의 경제 산책』中 1장.

 


1. 세기 초의 형편

① 20세기를 준비하던 1899년의 몇몇 장면

- 보어전쟁 : 1867년 영국 식민지 케이프에서 한 아이가 가지고 놀던 돌멩이가 다이아몬드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케이프에서 독립한 트란스발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당시 금본위제 하의 영국은 이 곳으로 밀어닥침. 영국은 8만 8000명의 보어(뒷날 남아프리카공화국) 연합국을 물리치기 위해 50만명을 파병하여 장악.1) 이로 인해 영국 국내의 반전 운동과 노동당 창설 재촉.

- 레닌의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출간 : 러시아는 국내의 협소한 수요의 문제로 인해 자본주의 미발전이 예견되었고, 그래서 이를 뛰어넘어 농촌 공동체를 통한 직접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한 인민주의(Narodnism)운동이 탄생. 그러나 레닌은 수요 부족 문제는 점차 해결될 것이므로 러시아는 자본주의 발전의 토대 위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

- 하이에크의 탄생 : 초기 ‘페이비언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던 하이에크는 미제스의 세미나 참여 이후 극단적 시장자유주의자로 변신. 전후 자본주의의 황금기에 케인즈 경제학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던 하이에크 경제학은 신자유주의의 득세로 무대 전면에 다시 등장.

⇒⇒ 20세기는 짧은 안정기를 제외하면 제국주의, 공황, 파시즘, 전쟁으로 점철된 파국의 시대.


2. 파국을 향하여

- 제국주의의 물질적 토대는 독점적 생산력의 증대. 이를 감당할 해외 소비시장과 원료 산지를 위해서 식민지 쟁탈을 위한 제국주의로 이어짐. (+ 배타적 민족주의 + 사회진화론)

- 미약한 노동의 대응 : 제2인터에 참여했던 각 국 노동당/사회당은 공동의 결의를 저버리고 참전에 동의. 독일 사민당의 경우 집권 가능성 때문에 투표에 참여.

- 1차 대전의 결과 독일의 호엔촐레른 왕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 등 많은 제국이 붕괴. 전후 자본주의는 제국 없는 제국주의.

- 전후 비용 처리의 문제 : 전쟁이 끝날 무렵 유럽 연합국의 전쟁 채무는 200억 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대부분 미국의 대부를 통한 것. 미국은 이에 대해 전액 상환을 고집했고, 연합국은 패전국인 독일에게 배상금과 전쟁 채무를 합친 330억 달러 지급 요구. 이로 인해 독일은 심각한 인플레를 겪고, 이는 나치의 등장 배경. (전쟁 채무는 1933년 히틀러가 지급 거부)

- 최초의 사회주의 실험 무대로서 러시아 혁명 : 자본주의 성숙 후에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는 기존의 도식이 파괴. ⇒ 제3세계 국가들의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길, 60년대 민족해방 투쟁으로 이어짐.


3. 공상에서 절망으로

- 1차 대전이 끝난 1919년부터 2차 대전이 터진 1939년까지의 전간기(戰間期)는 베르사유 평화 체제가 허공에 쌓은 전반 10년의 희망이 1929년 대공황을 고비로 후반 10년의 참혹한 절망으로 바뀐 시기. 그로써 전체주의가 득세.

- 1929년 10월 미국 증권시장에 대공황 엄습. 이에 대해 다양한 진단이 나왔지만 정부의 개입이 효과적인 처방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음. 자유방임 경제학에 대한 중대한 도전.

-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 과잉과 정치 실패로 허덕이던 독일에서는 위기를 틈타 나치스가 정권 장악. 전체주의적 권력 개입 없이는 독점 이윤 수취가 어렵다는 대자본의 위기감과 예전의 유복한 생활을 빼앗겼다는 대중의 상실감이 파시스트 정권을 지지하는 원천. 나치의 재무장에 기업과 금융계는 불만을 표했지만, 히틀러는 인종 차별과 국수주의 선동으로 대중을 열광시키고 그 지지를 배경으로 반대 의견 억압.

- 러시아 혁명 이후 : 국가자본주의 → 전시공산주의 → 신경제정책(NEP) 등으로 좌편향, 우편향을 넘나드는 곡예.

- 스페인 내전 : 1936년 등장한 인민전선 정부는 소련의 지지, 정부군에서 변신한 반란군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지를 받음. 그러나 내부적 각 진영 내부 갈등은 한 층 더 복잡. 결과는 반란군 프랑코의 승리. ⇒ 『카탈루냐 찬가』(조지 오웰),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어니스트 헤밍웨이) 등의 작품.

- ∴ 대공황의 두 결론 : 뉴딜과 파시즘. 그러나 둘 모두 전체주의적 해결책. (ex: 케인즈가 실업이 왜 발생하는지를 설명하기도 전에 이미 히틀러는 그 대책을 발견했다는 존 로빈슨 여사의 탄식) 스탈린의 승리 역시 전체주의적 승리.


4. 열전에서 냉전으로

- 2차 대전은 민주주의 진영과 파시스트 진영의 대결. 물론 제국주의의 갈등이 여전했지만, 파시즘에 가려 1차 대전만큼 부각되지 않음.

- 그러나 코민테른의 변덕으로 파시즘과의 투쟁에 혼란을 자초함. 사회주의의 주적이 파시즘이 되었다가 제국주의가 되었다가 다시 파시즘이 되는 따위의 우왕좌왕 지도 노선은 일국사회주의와 ‘사회주의 조국’을 건설하기 위한 스탈린 지령에 따른 것.

- 2차 대전과 한국전쟁 이후 냉전의 가시화. 미국은 마셜플랜으로 소련은 코메콘을 통해 각각 서유럽과 동유럽을 장악함. 그러나 70년대 이후 데탕트의 여파로 소련이 파산했다는 것은 냉전의 기묘한 역설.

- 전후 브레튼우즈 체제 확립. 그러나 70년대 금태환 중지 사태로 고정환율제도 포기.

- 1955년 아시아-아프리카 29개국 대표의 반둥 회의는 제3세계의 시각으로 역사를 저하는 최초의 기회. 제3세계의 중립을 강조하고 서구와 소련을 다 같이 제국주의 세력으로 비난.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길’ 역설. 그러나 냉전이라는 세계 정치 구도는 이를 용인하지 않음.


(이하 생략... 별로 중요한 내용이 없어서...)






1) 이 당시 영국은 보어와의 게릴라전에서 혼쭐이 나고는 현대 군복의 시초가 되는 카키색 군복을 입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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