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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라이히, <파시즘의 대중심리> 발췌독

 

 

새로운 역사적 현상에 변증법적 유물론은 제대로 적용되지 못했다. 맑스나 엥겔스는 파시즘을 알지 못했고, 레닌 역시 파시즘에 대한 분석의 시작을 보았을 뿐이었다. 현실에 대한 반동적 파악은 현실의 모순과 실제하는 관계들을 간과했다. 반동적 정치는 발전에 저항하는 사회적 힘을 자동적으로 이용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것은 반동적인 것이 필연적으로 극복해야 하는 혁명적 힘을 과학이 남김없이 밝혀내지 못할 때에만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

 

맑스에 의하면, '근본적'이라는 것은 '사물의 근원을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물의 근원을 이해하여 모순으로 가득 찬 과정을 파악하게 되면, 확실히 반동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만약 개인이 사물의 근원을 이해하지 못하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결국 기계론적 사고, 경제주의 또는 형이상학에 빠지게 되고 필연적으로 파멸하게 된다. 따라서 비판은 사회적 실체의 모순이 어디에서 간과되고 있는가를 증명할수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고 실천적 가치를 가질수 있다. 맑스의 혁명성은 그의 주장이나 그가 가리킨 혁명의 목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진보시키는 힘으로서 산업 생산력을 인식했다는 점,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의 모순을 실제와 일치하게 묘사했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노동자 운동의 실패는 사회 진보를 방해하는 힘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것, 즉 중요한 요인들은 여전히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37쪽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심리적 구조를변화시킴으로써 인간 속에 스스로를 재생산해 왔다. 그뿐만이 아니다. 더욱 중요하게는 이런 구체적인 변화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모순된 방식으로 행위하는 인간에게서는 활동적 힘, 즉 물질적 권력이 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자신이 발원한 경제적 토대에 반작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오직 이런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반작용'은 사회적으로 행위하는 인간의 성격구조가 수행하는 기능형식으로서 이해될 수 있을 때, 그 외관상의 형이상학적/심리학주의적 성격을 상실하게 된다. 반작용 자체는 자연과학적인 성격연구의 대상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가 경제적 토대보다 느리게 변혁된다는 확증이 더 분명해진다.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 상응하는 성격구조는 유년기 초기에 근본적으로 형성되며, 기술적 생산력보다 훨씬 더 보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로 인해 심리적 구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것이 발원한 사회적 관계의 급속한 발전에 뒤처지게 되며 이후의 삶형태와도 갈등을 빚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전통', 말하자면 과거의 사회 상황과 새로운 상황 사이의 모순이 가진 본질적 특성이다.

- 53-4쪽

 

 

반동적 심리학은 파업이나 절도가 명목상 비합리적인 동기로 인해 일어난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데 이는 언제나 반동적인 설명으로 귀결된다. 사회심리학은 전혀 반대되는 관점에서 문제를 파악한다. 즉 설명되어야 할 것은 배고픈 사람들이 도둑질을 했다거나 착취당한 노동자가 파업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들 중 대다수는 왜 파업을 하지 않는가라는 사실이다. 사회경제학은 인간의 행위와 생각이 합리적이고 목표지향적일 경우에, 즉 욕구만족을 향해 움직이고 경제적 상황을 직접적으로 계속해서 반영할 때 사회적 사실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생각과 행위가 경제적 상황과 모순될 경우, 다시 말해 비합리적일 경우 사회경제학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

 

따라서 대중심리학의 문제제기는 즉각적인 사회경제학적 설명이 실패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대중심리학이 사회경제학과 대립하고 있다는 의미인가? 그렇지 않다. 사회경제적 상황과 모순되는 대중들의 비합리적 생각과 행동 자체는 더 오래 전의 사회경제적 상황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 55-6쪽

 

 

 

히틀러가 대중심리에 끼친 영향력을 연구하려면 지도자 또는 어떤 이념의 주창자가 지닌 개인적 관점이나 이데올로기 또는 강령은 광범위한 계층에 퍼져 있는 대중들의 평균적 성격구조에 조응해야만(비록 역사적 관점이 아닌 제한된 관점에서만 그렇다 하더라도)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해야 한다. (...)

- 73 쪽

 

 

 

비스마르크는 히틀러의 우상이되었다. 왜냐하면 비스마르크는 독일 민족을 통일시키고 오스트리아 왕조에 대항하여 투쟁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반유태주의자 뤼거와 범게르만주의자 쇠네러가 히틀러의 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때부터 그의 계획은 민족주의적-제국주의적 목표에 맞춰졌으며, 그 목표를 예전 '부르주아'민족주의자들이 사용했던 것과는 다른 좀더 교묘한 수단을 사용하여 달성하려 했다. 그가 선택한 수단은 조직화된 맑스주의의 역량에 대한 인식과 모든 정치운동에서 발견되는 대중들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조직화된 맑스주의에 의해 정치적으로 선도된) 국제주의적 세계관이 그와 마찬가지로 통일적으로 조직화되고 인도된 민족적 세계관과 대결하게 된다면, 투쟁의 에너지가 똑같을지라도 성공은 여원한 진실의 편에 머물 것이다.([나의 투쟁], 422쪽)

 

국제주의적 세계관이 서공할 수 있었던 것은 돌격대로 조직화된 정당이 이 세계관을 대표했기 때문이었다. 반대의 세계관이 실패하게 된 것은 그 세계관을 대표할 통일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관점 전반을 해석할 수 있는 무한한 자유가 아니라, 제한되고 통합된 형태의 정치족이 세계관을 싸워 승리하도록 만들어준다. (같은 책, 423쪽)

- 77쪽

 

 

 

따라서 히틀러가 원했던 것은 (그가 공개적으로 시인한 것처럼) 맑스주의와 그것의 대중조직화 기법을 이용하여 민족주의적 제국주의를 관철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대중조직화의 성공은 히틀러가 아니라 대중들에게 달려 있었다. 그의 선동 활동이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인간이 권위주의적이고 자유를 두려워하는 성격구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학적인 의미에서 히틀러를 이해할 때 중요한 점은 그의 인성이 아니라 그가 대중들로부터 부여받은 의미인 것이다. 더군다난 문제를 더욱 더 중요하게 만드는 것은 대중들의 도움으로 제국주의를 관철하고 싶어했으면서도 그가 대중들을 철저히 경멸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점을 중명하기 위해서 많은 예를 드느 대신에 다음과 같은 하나의 솔직한 고백만으로 충분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대중들의 정서는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여론이 무엇을 주입하느냐에 따라 늘 좌지우지될 뿐이다. (같은 책, 140쪽)

- 79쪽

 

 

 

소시민계층이 이런 위기 속에서 조직적으로 결합할 것을 강요받고 있었던 만큼이나 소기업들간의 경제적 경쟁은 산업노동자들에 필적할 만한 (중산계층간의) 연대감 형성을 가로막고 있었다. 소시민들은 자신이 놓인 사회적 상황의 결과로 자신들의 계층과도, 산업노동자들과도 연대하지 못했다. 소시민들은 자신의 계층과는 경쟁 관계에 있었고, 무산계급화를 가장 두려워했기 때문에 산업노동자들과는 연대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파시스트 운도은 소시민계층의 결속을 실현했다. 어떤 대중심리적 기초에서 이러한 결속이 가능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하층과 중산계층에 속한 국가 관리와 시적 관리의 사횢거 지위에서 찾아볼 수 있다. 평범한 관리의 경제적 지위는 평범한 숙력 산업노동자보다 더 열악했다. 이 열악한 지위는 부분적으로는 출세할 수 있다는 매우 희박한 전망에 의해서 유지되었으며, 국가 관료의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종신 연금으로 벌충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정부의 권위에 종속되어 있었고, 동료에 대해 경쟁적 태도를 취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연대의 발전을 방해했던 것이다. 관리들의 사회의식을 특징짓는 것은 함께 일하는 동료와 공유하는 운명이 아니라 국가 당국과 '민족'에 대한 그들의 태도였다. 이 태도는 국가권력과의 완전한 동일시로 이루어지며, 사무직 노동자의 경우에는 그가 고용되어 있는 회사와의 동일시로 이뤄진다. 그는 산업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종속된 사람이다. 그렇다면 왜 그는 산업노동자와 달리 연대감을 발전시키지 못하는가? 그것은 그가 당국과 육체노동자들의 중간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그는 상부에 복종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기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당국의 대리인이 되기 때문에 특권적인 도덕적 (물질적이 아닌) 지위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중심리적 유형의 완전한 모습을 우리는 여러 군대의 하사관들에게서 발견한다.

- 88-9쪽

 

 

 

농민들이 왜 '토지에 묶여' 있으며 '전통적'인가, 그리고 정치적 반동의 영향을 받기 쉬운가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은 이와 같은 가족과 경제의 밀접한 얽힘 속에 놓여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토지유착과 전통이 오로지 경제양식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아니라, 농부의 생산방식이 가족 구성원 모두를 포함하는 엄격한 가족적 유대를 필요로 한다는 점, 그리고 이런 유대는 광범위한 성의 억제와 억압을 전제로 한 다는 점이다. 이런 이중적인 토대에 기초하여 가부장적인 성도덕을 핵심으로 하는 전형적인 농민의 사고방식이 생겨난다. 나는 다른 글에서 소련 정부가 농업의 집단화를 시행하면서 겪은 어려움에 대해 서술한 적이 있다. 그런 어려움을 불러일으킨 것은 농민들의 '땅에 대한 사랑'이었지만 그보다 더 큰 어려움을 준 것은 본질적으로 땅에 의해 조건지어진 가족적 유대였던 것이다.

- 91쪽

 

 

(히틀러 정권이 1933년 5월 12일 공표한 <농업소유관계의 새 질서>라는 법안과 관련하여)

이 법안에서 나타나고 있는 경향은 무엇인가? 이 법안은 중간규모와 소규모의 농업경제를 흡수하고, 토지 소유자와 재산 없는 농촌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차이를 점점 더 크게 하려는 대농장 소유주의 이해관계와는 모순된다. 그러나 대농장 소유주의 또 다른 강력한 이해관계, 즉 자신이 지닌 권력의 대중적 토대를 형성해 주는 것은 농촌 중산계층이기 때문에 이 계층을 계속 존재케 해야 한다는 이해관계는 이런 모순을 덮어두기에 충분했다. 소규모 토지 소유자와 대규모 토지 소유자가 단지 사적 소유라는 점에서만 동일시된 것은 아니다. 소규모/중간 규모 재산 소유자들이 이데올로기적 분위기, 즉 소규모 경제를 꾸리는 가족 안에 존재하는 분위기를 유지시키지 못한다면 그런 동일시는 별다른 비중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최상의 민족주의 전사들을 배출하고 여성들을 변화시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가담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이런 분위기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그 유명한 '도덕을 유지시키는 농민들의 건강한 영향'의 배경이다. 그러나 이 또한 성경제학적인 문제이다.

- 93-4쪽

 

 

 

사회학에 밝지 못한 정신분석학자들이 사회혁명을 '아버지에 대한 유년기적 반항'으로 설명하는 것은 지식인 집단 출신의 혁명가를 염두에 둔 설명이다. 물론 지식인 혁명가의 경우에서는 이런 형편, 즉 아버징 ㅔ대한 유년기적 반항이 실제로 결정적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산업노동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노동계급에서 어린이에 대한 아버지의 억압은 소시민계층의 경우만큼이나 심하다. 아니 사실은 때때로 더 잔인한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 두꼐층의 특별한 차이를 그들의 생산양식과 그 생산양식에 따르는 그들의 성에 대한 태도에서 발견한다. 오해를 오하지 않도록 요점을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즉 산업노동자의 성 역시 부모에 의해 억압되지만, 산업노동자 계층의 아이들이 겪는 모순이 소시민 계층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시민계층에서 억압되는 것은 단지 성생활뿐이다. 소시민계층에게서 성활동은 오로지 성적 욕국와 성적억압 사이의 모순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산업노동자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산업노동자는 자기가 속한 계층의 도덕주의적 이데올로기와 함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각자의 성적 견해을 가지고 있는데, 이 견해는 그들 집단의 도덕주의적 이데올로기와 대치하게 된다. 게다가 그들의 생활 조건과 집단적 존재방식도 ㄱ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들의 도덕주의적 성 이데올로기와 대립한다.

- 111쪽

 

 

 

 

(파시스트 이론가 로젠베르크의 말)

인종의 역사는 자연의 역사이자 영적 시닙주의의 역사이다. 이와는 반대로 혈통 종교의 역사는 민족의 흥망, 민족의 영웅들과 사상가들, 그리고 발명가와 예술가들에 대한 위대한 세계사인 것이다.

 

(...) 이런 신비주의의 정체를 폭로하여 그 근저에 깔려 있는 비합리성을 밝혀내는 대신 그것을 비웃기만 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를 위해 좋은 일이 아니다. 이런 신비주의에서 가장 비중이 크고 중요한 것은 생물학적 에너지 과정인데, 이것은 비합리적, 신비주의적으로 파악된 반동적 성이데올로기의 극단적 표현이다. '영혼'과 그것의 '순수성'에 대한 세계관은 바로 성적 무감각의 세계관, 즉 '성적 순수성'의 세계관인 것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사회에 의해 조건지어진 성의 억압과 성에 대한 수줍음이 외부로 표출된 것이다.

- 135쪽

 

 

 

(성적 존재양식과 성도덕을 둘러싼 모순)

1871년의 독일형법 218조는 '우생학적' 이유로 산모의 생명이 위험하거나, 강간으로 인한 임신이 여성에게 심기가한 사회적 심리저적 문제를 일으킨다고 판단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임신중절을 금지하고 있었다. 당시 독일공산당은 "당신의 몸은 당신 것이다"라는 구호 아래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주장하며 이 조항을 폐기시키려 하고 있었다. 특히 독일 공산당은 원치 않는 임신을 주로 경제적 궁핍과 연결시켰다. "만약 두번째, 세번째 아이가 태어난다면 궁핍이 시작될 것이지만 임금은 오르지 않는다. 산모의 몸에는 굶주릴 작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여성들은 독일공산당의 이런 주장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으면서도 이듬해 총선에서 '순수한 모성'을 주장하고 있던 나치당에게 표를 몰아주는 모순된 모습을 보여줬다. 여성들은 여전히 모성과 성적인 것이 서로 대립한다는 반동적 권위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이 모순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 168쪽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노동자 계급 출신의 젊은 기독교 대중들은 교회에 대한 공격에 저항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왜 젊은 기독교인들은 공산주의자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교회가 '자본주의적 기능'에 봉사하고 있음을 스스로 보지 못했는가? 그 이유는 명백하다. 교회의 이런 기능이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무엇이든 잘 믿도록, 또한 청년 단체에서 교회의 대표자들이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주장을 폈으며, 따라서 서로 대립하는 공산주의자와 성직자의 사회적 입장이 청년들에게 쉽사리 납득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처음에는 단지 성의 영역에서만 둘 사이의 명확한 구분이 존재하는 듯했다. 즉 공산주의자들은 교회와는 반대로 청소년의 성에 긍정적인 태도로를 취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공산주의 조직들은 이 결정적인 영역을 그대로 묵혀두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청소년의 성을 비난하고 금지하는 데 있어 교화와 같은 입장이라는 것이 곧 밝혀졌다. 청소년의 성에 관해서 항상 냉정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을 해결하려 한 독일 성정치 조직에 대항하기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조치는 성직 대표자들의 대책 못지 않게 냉혹했다. 공산주의 신념을 지닌 목사이자 정신분석가인 잘킨트가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성을 부정하는 부문의 권위자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 189쪽

 

 

 

한 청년노동자 단체는 개신교 목사 한 사람을 경제 위기에 관한 토론에 초청했다. 18세부터 25세 사이의 기독교 청년 20여명이 그를 호위하면서 나타났다. 부분적으로 타당한 사실에서 신비주의적 관점으로 도약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중요한 현상이지만, 여하튼 그는 본질적으로 다음과 같은 입장을 취했다. 그는 현재의 고통이 전쟁과 영 플랜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세계대전은 인간의 타락, 비열함, 부정, 죄악의 표현이며, 자본주의적 착취 역시 중대한 죄악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전형적인 입장을 통해서 우리는 신비주의자가 스스로 반자본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그런 반자본주의적 감정이 기독교 청년들에게 받아들여졌을 때, 그 영향력을 없애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확실히 볼 수 있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소련의 사회주의 역시 자본주의으 한 형태이며, 자본주의가 어떤 계급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처럼 사회주의 역시 다른 계급에게 불이익을 준다고. 따라서 우리는 모든 형태의 자본주의를 "발길로 걷어차야" 하며, 볼셰비즘의 종교에 대한 투쟁은 범죄행위이며, 종교는 비참함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잘못은 바로 자본주의가 종교를 오용한 데에 있다고(그 목사는 확실히 진보적이었다).

- 193쪽

 

 

 

(라이히가 직접 기독교인과 소시민계층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대중집회에서 한 발언에서 주요 질문)

 

1. 교회는 피임약의 사용이 자연적인 생식을 방해하는 다른 것들처럼 자연에 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연이 엄격하고 현명하다면, 왜 자연은 사람들이 아이를 낳고 싶은 만큼만 성교하도록 만들지 않고 일생 동안 평균 2~3천 번 정도의 성교를하도록 성기관을 만들었는가?

2. 여기 참석한 교회 대표자들은 아이를 낳고 싶을 때만 성교한다고 공언할 수 있는가? (이 집회에는 개신교 목사들이 참석했다.)

3. 신은 왜 하나의 성기관에 두 종류의 선, 즉 성흥분을 위한 선과 생식을 위한 선을 만들었는가?

4. 왜 생식기능이 시작되기 훨씬 전인 어린 시절부터 성이 발달하는가?

- 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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