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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최원]비극의 의의 혹은 취중결론

사회진보연대 게시판에서 최원씨의 인상적인 메모를 퍼오면서 몇가지.
 
글을 옮기기 전에 내 이야기를 먼저 하자. 내 아이디 '겨울철쭉'은 PC통신이 막 활성화되던 시설에 만든 아이디이다. 당시에는 참세상도 텍스트기반의 '이야기'나 '새롬데이타맨'으로 접속하던 시절이었고 나우누리 '찬우물'은 운동권들의 플라자, 공론장이였다. 이 두 서비스는 한글 아이디를 제공했는데 그 때 만든 아이디다.
 
아이디는 '조국과청춘'이 불렀던 '녹슬은 해방구'의 가사 첫부분에서 따왔다. '조국과청춘' 1집이니까 92년이다. 92년. 지금이나 그때나 정파적 대립에 따라서 즐겨부르는 노래도 달랐지만, 이 노래는 좌파 중에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다.
 
 
녹슬은 해방구
- 글,가락 김석준

그 해 철쭉은 겨울에 피었지
동지들 흘린 피로
앞서간 죽음 저편에
해방의 산마루로 피었지

그 해 우리 춥지는 않았어
동지들 체온으로
산천이 추위에 떨면
투쟁의 함성 더욱 뜨겁게

산 너머 가지위로 초승달 뜨면
머얼리 고향생각 밤을 지새고
수많은 동지들 죽어가던 밤
분노를 삼키며 울기도 했던

나의 청춘을 동지들이여
그대의 투쟁으로 다시 피워라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조국 해방의 약속을
 
 
이 노래를 들으면 빨치산 투쟁이 마지막으로 치닫던 1953~4년의 겨울을 생각하게 된다. 이 노래를 듣거나 부르면서는 알수없는 감정에 빠지고는 했는데, 빨치산 투쟁의 그 비극성 때문이었다. 비극성. 그것을 사고해야한다고 생각했었지만 비극의 의미에 대해서 달리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예정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에서 다른 선택지가 없는 딜레마와 그리고 알 수 없는 어떤 것 그 이상은 말이다.
 

비극의 의의는 어떤 혁명적 시도들의 실패의 장렬함을 보여줌으로써 이후 세대들이 유사한 길을 걷도록 촉구하는 데 있지 않다. 또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이전 실패의 원인들을 과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성공에의 보증을 이후 시도들 속에서 조금이라도 증가시킬 것을 촉구하는 데 있지도 않다.
 
내가 이해하기에, 비극의 의의는 혁명을 원하는 그 모든 동일자의 법칙(혹은 확신)은 예기치 못한 타자의 법칙(혹은 확신)으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실패할 것이며, 따라서 그 모든 혁명적 시도들은 항상-아직 '유한한 것'으로 남을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만드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비극의 의의는 혁명적 시도 속에서 필연적으로 자신이 빠져들 그 모든 '확신'에도 불구하고, 왜 동일자가, 혁명의 주체가, 여전히 타자를 향해, 심지어 자신의 적을 향해, 스스로를 열어내는 운동을 행할 필요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
 
비극을 실패에 대한 찬양으로 이해하거나 혹은 (결국은 마찬가지 이야기겠지만) 끝내 도래하여 그 모든 실패들을 '보상(redeem)'해줄 성공에의 촉구로 이해하는 것은 모두 종말론적이고 결단론적인 비극 이해일 뿐이다. 하이데거와 벤야민이 공유했던 이 위험한 코드를 반복하지 말 것.
 
혁명은 '목표'가 아니라 '정세'일 뿐이라는 점, 우리는 혁명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정세로서의 혁명 속에서 수행하거나 수행할 수 없는 다수의 곤란한 목표들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볼 것. 그리고 혁명 속에서 수행하거나 할 수 없는 다수의 목표들이 문제인만큼, 혁명은 여전히 어떤 '정치'가 가능해야할 공간으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할 것. 만일 혁명이라는 정세가 정치가 불가능해지는 정세로 둔갑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혁명이 아니며 가장 끔찍한 결과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이해할 것. 혁명 속에서 무엇이 정치를 가능하게 만드는가, 혁명 속에서 정치를 가능하게 만드는 또 다른 정치는 어떤 것인가를 사고할 것.
 
"우리에겐 반역해야할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인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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