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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현 교수 강의에 대한 몇 개의 메모


* '빌리 엘리어트'와 노동자계급 문화의 남성적 전통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 보면 전투적이고 계급적인 의식을 가진 남성 노동자들이 남성성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자존과 긍지를 지켜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학교와 계급재생산'에 대한 글에서 고민했던 것도 이런 지점인데, 남성노동자들의 계급의식과 남성성의 강조, 성차별주의/가부장제와의 결합이 문제다.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극복해갈 것인가이다. 노동자 계급의 상징을 남성적인 것에서 전위시킬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남성성은 노동자계급을 민족국가가 동원하며 여성노동력을 평가절하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반동적인 기원을 갖고 있다. 이것은 언제든지 다시 민족국가에 동원될 수 있다. (또 파시즘의 주요한 이데올로기적 특성이 반여성주의라는 점을 기억하자) 따라서 당장 남성 노동자대중을 동원하는 데 있어서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흡인력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상징을 활용해서는 안 된다. (전술적 필요에 의해서 전략적 원칙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원칙일 텐데, 잠시 후에 언급할 다른 쟁점과도 연관된다.)

노동자 투쟁에서 여성노동자 투쟁의 전통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계승하고 현재적으로 활성화하는 것, 노동자계급의 단결의 새로운 상징들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여성노동자 투쟁의 폄하/분리는 계급본질주의적 시각과 연결된다. 계급본질주의는 내적으로 남성중심적으로 노동자계급을 사고하고 있다. '밥꽃양'은 억압-분리되고 7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단지 미약한 前史로 취급된다.)

문제는 그것이 단지 운동문화일 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일상문화에 침투해야한다는 것이다. 불행히도 이를 성공적으로 해낸 사례는 다른 나라의 대중운동에서도 별로 없는 것같다. 여튼, 이를 위해서는 노동조합과 같은 대중조직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문제는 여기서 활동가들의 위상이다.
 
* 활동가들의 위상, 이론의 위상, 이데올로기
 
대중운동의 활동가들은 대중과 끊임없는 전이-역전이의 관계에 있다. 활동가들이 가지는 의식은 이론으로부터 형성된 것으로부터 대중으로터 전이된 것까지 복잡하게 혼재되어 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이론과 이데올로기를 혼동하게 되고 상호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변용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운동문화(결국 이데올로기의 영역이다)를 변화시켜내는 활동에 있어서도 현존의 대중 이데올로기에 깊이 침윤되어 있는 활동가들에게 있어서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활동가들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것은 이론에 있어서도 정도는 다르더라도 사실일 수 있다. 특히 계급투쟁을 직접적인 대상으로 하는, 계급투쟁 속의 이론에 있어서는 그러한 역전이는 이론에 있어서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맑스주의가 여성억압의 문제에 대해서 무지했다면 이것은 이론의 영역에 대해서 대중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같다. (후대의 맑스주의자들은 물론 맑스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시 활동가들로 되돌아오자. 활동가들에게 있어서 대중과의 전이-역전이는 필연적인 것이지만, 이 속에서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대중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할 수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 복수의 정체성과 '국면'
 
임지현 교수는 본질주의와 환원주의를 비판한다. 복수의 정체성, 복수의 모순을 사고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점. 복수의 정체성을 사고하고 주체 내의 모순에 대해서 사고해야할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복수의 정체성들이 드러나는 어떤 '국면'인가의 문제일 텐데, 그것을 무시하게 되면 단일한 기원과 본질의 환원주의로 나가게 된다.

그렇다면 주체의 내적인 복합성은 어떤 국면-정세에서 외부와 만나고 각각 다른 식으로 작동한다는 것. 따라서 대중은 정치적 쟁점들에 대해서 일관되게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인정해야만 노동자계급의 단일성 혹은 이를 반영하는 당의 무오류성을 부당전제하지 않을 수 있다.
 
* 오리엔탈리즘과 페미니즘

페미니즘이 서구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것은 왜일까? 서구는 식민지를 야만으로 인식하면서 제국의 남성이 식민지의 여성을 봉건적인 질곡에서 구출한다는 플롯을 창조했다. 식민주의자들의 텍스트 속에는 이런 식으로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형상화한다. 이것은 비극적인데, 페미니즘이 서구적인 것으로 인식되면서 민족주의자들에게도 이질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그밖에도 제국주의자들은 식민지를 여성으로 표상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있다. 아직도 그러한 영향은 깊게 남아 있는데 임권택 감독이 상을 받는 영화들은 서구의 시선 속에서 한국의 전통을 재구성하기 때문이라는 사례
 
* 파시즘의 주요한 특징으로서 반여성주의

남성적인 노동자계급 문화가 남성중심성, 여성폄하와 함께 파시즘에 동원될 우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민족국가의 남성 시민은 민족국가가 징병제를 통해서 자신들의 전쟁에 남성들을 동원하면서 형성되는데 내적 기원에 있어서 민족국가와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미국에서 네오콘의 경우도 반여성주의의 특징을 보여준다. 남한에서도 새롭게 형성되는 우파들의 주요한 이데올로기적일 수 있다.
 
* 모성보호법안

임지현 교수는 모성보호법안이 '국가경쟁력을 위한 것'으로 제기되는 것에서 국가주의의 혐의를 읽어낸다. 우에노 치즈코의 <내셔널리즘과 젠더>를 언급하는데, 국가에 대한 의무를 통해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받으려는 일부 여성진영의 시도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태평양전쟁에 대한 전시 동원에 여성운동의지도자들이 여성이 국민으로 인정받는 계기라고 판단하고 적극 협력하였다. '국가를 위한' 출산장려정책의 일환으로서 모성보호법안은 위험할 수 있다. (이것도 전술적 필요에서 전략을 희생하는 사례일 것)

최근에는 한겨레21이 여성도 군대를 가야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을 소개한 적이 있는데, 이런 식의 편의적인 입장이 여성운동 내에 존재하는 것은 문제다. 특히 모성보호를 '국가경쟁력을 위한' 출산정책과 연결할 경우, 여성의 자기 육체에 대한 권리를 증진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운동이 오히려 국가를 위해 여성의 육체를 동원한다는 역설에 직면하게 된다. 따라서 모성보호도 보호지만, 더욱 강력하게 국가의 출산강요를 비판할 수 있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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