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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선생 강연 중에.

노조 교육에서 오랜만에 백기완 선생 강연이 있었다. 나이가 나이이신만큼 예전처럼 힘이 넘치지는 않았지만, 좌중을 사로잡는 카리스마와 말씀은 여전하시다. 이날 말씀이나 평소의 내용에 모두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러 내용이 있었지만 이 부분은 생각해볼만하다. (아래는 나의 언어로 정리한 것)


"누구나 나누고 고르게 잘 사는 사회라는 이념, 평등사회라는 이념은, 단지 200년짜리의 이념이 아니라 인류 역사 전체를 통해서 형성되고 내재화된 이념이다. 그래서 이것은 어느 시대에나 어느 지역에서나 항상 존재하고 부활한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계급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진보사상의 위기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평등사회를 지향하는 이념 자체의 위기라기보다는 표면적인 것이거나, 운동 주체의 위기이다."



[이날 강연 것을 갖고 있지 않아서, 인터넷에서 찾은 다른 사진. 나중에 이날 사진은 구해서 올려야겠다]


몇가지 생각해볼 부분.

발리바르가 「공산주의 이후에 어떤 공산주의가 오는가?」에서 언급하는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와 비교해볼 수도 있다.(번역글 보기) 평등사회라는 유토피아, 이를 실현하기 위한 공산주의 운동이라는 전통. 그것은 (중세적인 형태, 발리바르에 따르면 "첫번째"인 공산주의로서 "청빈형제회(fraticelli) 혹은 급진적 프란체스코주의의 공산주의"처럼) 단지 역사의 어느 시점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훨씬 이전부터, 인류가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가면서부터 만들어진 보편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백기완 선생의 말에 담겨있다. (“천년왕국-메시아”마저도 중세가 아니라 그 천년도 전에 중동에서 제기된 한 시기의 사상이다.)


재미있는 부분인데, 평등사회에 대한 지향은 인간의 사회적 본능 자체의 내용(혹은 그 필수적인 일부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어려운 정세에서도 완전히 압살되는 경우는 없고, 매시기 다시 부활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것은 마치 함석헌-김상봉이 말하는 씨알과도 유사하지만, 민족적이지 않으며, 보편적이다. 인류 전체에 그렇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의, 인류의 보편적인 이념인 평등사회-공산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의식”의 형태를 띤다는 것. 보편적 해방의 주체로서 노동자계급이라는 사고와도 통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노동자 계급의식의 선험적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 백기완 선생의 말씀 안에도 그런 씨앗이 있다.

여기서 더 주목한 부분은, 계급의식이라는 것의 원래의 형태가 인류의 보편적 해방에 대한 사상이라면 그 내용이 그에 걸맞아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계급”이라고 불리는 인구의 특정부분에 특수적인 이해가 아니라 끊임없이 인류의 보편적인 해방을 위한 것으로, 자신의 이념을 보편화시켜 가야한다. (그런 측면에서 전투적인 경제투쟁을 계급의식의 핵심적이고 주된 발현형태인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들에는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평등사회-공산주의가 대중들의 정서 속에, 사회적 본능 속에 내재되어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현재 다시 표면에 드러날 수 있는 형태로 만들 것인가가 문제이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이 매번(장소와 시간에 따라) 같은 형태를 띠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 시대, 우리 장소에서의 그 형태, 그렇지만 보편적인 내용을 채워가는 형태가 무엇일까를 생각해야한다.


강연 끝무렵에는 카프 작가 강경애의 단편소설 “원고료 이백원”을 소개한다.(찾아보니 범우사 판의 <인간문제(외)>에 실려있다.) 한번 읽어보기는 해야겠는데, 사람은 자신의 (자본주의적인) "교환가치“를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되며, ”사회적 가치“를 높여야한다는 소설의 한 부분을 소개한다. 사람에게 어떤 ”가치“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볼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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