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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

요새 미루는

가늘고 긴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특히

꼭 방 구석을 따라 놓여 있는

전선 같은 걸 잡고 놉니다.

 

아무리 방을 열심히 쓸고 닦아도

전선에 진하게 묻어 있는 먼지는 잘 안 닦는데

인제 그런 것 까지 신경 써야 합니다.

 

전선 말고 미루가 또 관심 있는 건

볼펜입니다.

 

'벌써부터 볼펜을 좋아하다니

책도 입으로 안 빨고 열심히 보기만 하는 거 보면

앞으로 공부 잘 하겠군' 같은 생각은 전혀 안 합니다.

 

공부 잘 해봐야

자기만 알고 사는 사람들 많이 봐와서

썩 달갑지도 않습니다. 진짭니다.

 

아마 볼펜도 가늘고 긴 것에 속하니까

잡고 놀기 편해서 좋아 하는 것 같습니다.

 

또 가늘고 긴 것에는

제 인생이 있는데

미루는 아마 아빠의 인생을 나중에 좋아할 것 같습니다.

 

"상구~미루가 볼펜으로 막 쓰는 시늉을 했어~~!!"

 

주선생님이 언제나 그렇듯이

미루의 작은 몸짓에 큰 호들갑으로 반응합니다.

 

볼펜으로 쓰는 시늉을 했다니

아까는 숟가락을 잡고 흔들었는데

주선생님이 봤으면 밥 푸는 시늉이라고 했을 겁니다.

 

주선생님이 너무 심하게 좋아하길래

제가 조용히 한 마디 해줬습니다.

 

"정말? 우와~미루 잘 한다~~!!"

 

근데 좀 위험하기도 하고 해서

다른 장난감을 손에 쥐어 주고 볼펜은 뺏었습니다.

가늘고 길면서도 다치지 않을 만한 걸 좀 찾아야겠습니다.

 

"상구, 얘 봐~지 허벅지에 낙서했어~"

"어디? 정말이네~~"

 

금방 볼펜을 뺏었는데

그 새 허벅지에 볼펜자국이 주욱 나 있습니다.

중간에 끊어진 곳 없이

한번 붓을 대서 끝까지 쭉 나갔습니다.

 

이런 걸 일필휘지라고 합니다.

 

우리는 오늘 미루가 허벅지에 그은 볼펜자국을

미루 인생 최초의 낙서라고 부르기로 할려고 했는데

주선생님이 방을 청소하다가

방 바닥에서 또 다른 낙서를 발견했습니다.

 

"히히..방바닥에다가도 낙서를 했네..."

 

주선생님이 아까 말한 게

사실이었습니다.

 

미루는 볼펜으로 쓰는 시늉을 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썼습니다.

 

나중에 본격적으로 볼펜을 휘날릴 때가 되면

온 집 안이 난장판이 되겠지만

그래도 오늘 낙서만큼은 매우 뿌듯합니다.

 

그리고 주선생님한테는

또 호들갑 떤다고 혼자 생각했던 게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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