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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강' 사업 이면 드러내는 뮤직비디오 '공개'

(저기 사진 속에 드럼 치는 분이 김반장^^;; 김반장도 윈디시티도 멋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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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강' 사업 이면 드러내는 뮤직비디오 '공개' 

메디컬투데이 2010-04-05 07:40:35 발행   
 
 
 
 
'저수지의 개들' Take 1. 남한강, 인디밴드 '윈디시티' 참가
[메디컬투데이 박엘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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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운동연합은 4대강 사업으로 고통 받고 있는 강의 눈물을 담아 제작 중인 영상 프로젝트 '저수지의 개들' 첫 번째 뮤직비디오 '저수지의 개들 - Take 1. 남한강'을 4일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해 동시 공개했다.

4대강 중 남한강을 배경으로 한 이 뮤직비디오는 인디 밴드 ‘윈디 시티’의 강을 위한 창작곡 ‘위하여’란 곡으로 제작됐으며 다양한 생명의 터전인 강의 소중함을 환기하고 4대강 사업의 이면을 드러내는 내용으로 구성돼있다.

4대강 뮤직비디오의 제목은 우리 강을 죽이는 4대강 사업의 보 건설이 결국 강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끊어 강을 흐르지 않는 호수와 저수지로 만들 것이란 뜻의 ‘저수지’와 4대강을 헤집고 있는 거대한 삽질, 그리고 완공 후 그 저수지에서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할 우리들을 상징하는 ‘개’를 합한 것으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동명 영화제목 '저수지의 개들'을 차용했다는 설명이다.

4대강 뮤직비디오가 촬영된 경기도 여주 남한강 일대에는 3개의 보 건설과 준설 작업, 그리고 하천변을 파괴하며 조성되는 위락단지 공사 등이 진행 중에 있다.

촬영팀은 지난 3월13일, 당초 준설 작업이 진행 중인 신륵사 인근 금당천 공사 현장에서 첫 촬영을 시도했으나 공사 관계자들의 강한 출입 제지로 인해 공사 현장이 바라보이는 제방도로 위에서 윈디 시티의 미니콘서트와 함께 촬영을 진행했다.

아울러 위락단지가 조성되는 신륵사 앞 남한강변과 탁수 발생 등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강천보 공사 현장 등에서도 촬영이 이뤄졌다.

저수지의 개들 - Take 1. 남한강은 추후 20분 내외 단편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될 예정이다. 또한 영상 프로젝트 '저수지의 개들'은 한강, 금강, 영산강, 낙동강에서 각각 다른 개성을 가진 뮤지션들이 참가하는 릴레이 게릴라 콘서트 형식의 로드 무비이자 음악 다큐멘터리로 제작된다.

뮤지션들은 자연과 사람의 조화를 생각하는 음악과 함께 성장 및 개발 지상주의 논리 아래 돌이킬 수 없을 파괴의 위기에 직면한 강의 의미를 돌아보는 내용을 담게 될 것이다. 각 공연은 짧은 뮤직비디오와 20분 내외 단편 다큐멘터리로 제작되며 전체 60분 내외 장편 다큐멘터리 한 편으로 완성될 예정이라고 환경연합측은 밝혔다.

이 뮤직비디오의 감독인 최진성 영화감독은 "커다란 포클레인에 의해 마구잡이로 파헤쳐진 강물과 더불어 그 속에서 집을 잃어버린 나무와 물고기와 새들의 모습은 지금 대한민국의 도시 곳곳에서 개발에 의해 쫓겨나는 힘없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최 감독은 " '세상에서 제일 멋진 밴드' 윈디 시티와 함께한 남한강에서의 즐거운 '놀이'와 더불어 지속적으로 이어질, 낙동강, 영산강, 금강에서의 또 다른 뮤지션들과 함께 이어질 우리의 '놀이'를 기대해 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기계를 멈추고, 같이 즐겁게 뛰어다니며 놀고 싶습니다"라고 연출의도를 밝혔다.

한편 '저수지의 개들 - Take 1. 남한강' 뮤직비디오는 지난 1일 저녁 7시에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인디다큐페스티발 폐막식에서 깜짝 상영됐으며 4일 환경연합 홈페이지 등 온라인으로 에서 동시 공개된다. 또한 15일 목요일에는 환경운동연합 주최로 오프라인 공식 시사회 및 제작 파티가 홍익대 앞 클럽에서 열릴 계획이다.

 



<인디밴드 윈디시티, '위하여' 가사 전문>

세상에 많은 이들이
모두가 밝은 내일을 꿈꾸네
세상에 모든 이들이
모두가 건강하기를 바라네
하지만 우리의 생명의 물줄기 강을 갈라서
흐르는 물을 막아 고이게 한다는 것이
과연 내일을 위한 걸까? 음...?

세상에 어떤 이들은
강을 살린다고 말하네
세상에 어떤 이들은
치솟는 땅값에 비명을 지르네
하지만 홍수가 나지 않는 곳에 대비를 하고
흐르는 물을 막아 고이게 한다는 것이
과연 강을 살리는 길일까? 음...?

강물을 위하여
흐르는 강물을 위하여
이 모든 생명을 위하여

우리의 내일을 위하여
더불어 삶을 위하여
뛰어노는 우리의 아이들을 위하여

사람들아
내 얘기를 좀 들어보소
이 금수강산이
과연 우리들만의 것인가?

탐욕에 눈이 멀어 우리가 얻을게 무언가?
우리는 돈을 먹고 살수는 없다네
잊지 말게나 물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을

강물을 위하여
흐르는 강물을 위하여
우리의 건강한 생명을 위하여

우리의 강산을 위하여
아름다운 강산을 위하여
푸르게 가꿔질 이 강산을
강산을 위하여

riddim

시냇물은 졸졸졸
모래알은 반짝
우리 강산 지켜나가세
시냇물은 졸졸졸
고기들 왔다 갔다
아이들을 뛰놀게 해주세
우리가 전해 받은 이 금수강산에 아름다움을
우리아이들에게 느끼게 해주세 우리 모두 모두 다같이
길이 보전될 강산을 위하여!

파괴와 탐욕으로 뜨는 삽 그만!

조화와 화합을 꿈꾸는 삶 yeah!

거기엔 일등도 꼴지도 없다네
모두가 다르기에 다르기에 다르기에 아름다울 뿐

이 모든 생명이 반짝이는 내일을 위하여
모두가 다르기에 아름다운 내일을 위하여
정겹게 웃으며 함께 나아갈 내일을 위하여  


메디컬투데이 박엘리 기자 (ellee@md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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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동 철거민' 유 이사, 사고 치다&quot;

'금호동 철거민' 유 이사, 사고 치다"

[권은정의 'Social Job'] 철거 운동에서 신협까지 : 논골신협 유영우 이사

기사입력 2009-03-12 오전 7:16:59

<프레시안>은 성공회대학교 사회적기업연구센터와 공동으로 최근 큰 관심을 모으는 '사회적 기업(social entrepreneur)'의 현주소를 확인하고 더 나은 모습을 찾는 새로운 인터뷰 연재를 마련한다.

전문 인터뷰어 권은정 씨가 직접 한국의 다양한 사회적 기업가를 찾아가 그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그 생생한 목소리를 직접 듣는다. 이 연재는 총 20회에 걸쳐 매주 목요일 독자 여러분을 찾아간다.

이 연재를 공동으로 진행하는 성공회대학교 사회적기업연구센터(소장 이영환 교수)는 사회적 기업가 인적 자원 개발 교육과 사회적 기업 발전을 위한 연구 활동을 하는 성공회대학교 부설 연구기관이다. (☞
사회적기업연구센터 바로 가기)

"'금호동 철거민' 유 이사, 사고 치다"
"20대 청년의 반란…빗자루 들고 아줌마와 함께 청소를!"
"일하고 싶은 실업자는 다 모여라"
"중고를 새 컴퓨터로…덤으로 세상도 재생합니다"
"'대박' 연극 흥행 비결은? '옆집 아저씨·아줌마!"

"귀농? 농사 지을 생각은 일찌감치 버리세요"

▲ 유영우 '주거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 상임이사. ⓒ프레시안

철거 운동에서 시작해
신용협동조합을 운영한다고? 어떻게 연결되는 것이지? 금호동 언덕길을 올라가면서 궁금증이 더했다. 이 지역은 그전에 서울의 산동네였다. 가난한 달동네 사람들이 옹기종기 붙어살던 지역에 지금은 말쑥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상전벽해. 도시개발에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지만 그 변화는 놀랄 만하다.

더구나 이곳에 살던 주민들은 강제된 변화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의 능력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그 중심에 서 있었던 사람 유영우 씨를 신협
사무실에서 만났다. 언덕꼭대기 논골사거리에 다정한 듯 보이는 3층 건물이 논골신용협동조합이다. 주민 두엇이 창구에서 예금을 하고 있었다.

논골신협은 1997년 11월에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은 후 10여 년간 한해도 거르지 않고 신장세를 보여 왔다. 현재 전체 조합원 가입 수는 2700명, 자산은 140억 원이다. 자산 3억 원으로 시작해서 이제 명실상부한 지역 사회 서민
금융의 파수꾼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유영우 씨는 초창
기부터 10년 넘게, 바로 며칠 전까지 이사장으로 일했다. 지금은 이사 직함을 갖고 있는 논골신협과 함께 걸어온 사람이다. 늘 개량한복을 입고 다닌다는 이 중년 신사는 백발만 아니라면 충분히 젊은이 대접을 받고도 남을 만큼 경쾌해 보인다. 그의 또 다른 직함은 '주거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 상임이사'다. 이 일 또한 10여 년 넘게 해오고 있다.

▲ "철거 운동에서 신협으로. 유영우 이사가 만들어낸 이 연결점은 우리가 제대로 해낸 운동이 어떤 결실을 맺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다." ⓒ프레시안
약속 날짜를 잡으려고 연락했을 때 그는 당장 시간내기가 어렵다고 했다. 용산 참사 때문에 일정이 바쁘다고, 지방워크숍에도 가야하고 강연도 해야 한다고 했다. 철거민들이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다 죽어가는 세상이니 유 이사가 바쁜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금호동 산동네 철거민이기도 하니 개발 지역에서 곧 내몰릴 주민들에게 해줘야할 이야기가 많다. 요즘 그는 왕십리
뉴타운재개발 지역에 나가 철거 주민들과 상담 활동을 한다. 쉬지 않고 철거민을 생산해내고 있는 도시의 살벌한 재개발.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주거권을 지켜내는 일, 유 이사에게 그 일은 처음이고 끝이다.

철거 운동에서 신협으로. 유 이사가 만들어낸 이 연결점은 우리가 제대로 해낸 운동이 어떤 결실을 맺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다. 그 출발점은 어떠했을까? 유 이사는 철거 운동이 시작된 1993년에 당시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때 저는 그냥 평범한 소시민이었지요."

이렇게 저렇게 잘해보려고 했던
사업이 다 망하자 유 이사는 가족을 끌고 금호동 산동네로 이사를 왔다. 그는 먹고살기에 몹시 바빴고 결국 세상은 나만 잘 먹고 잘살면 되는 거 아닌가하는 생각을 주로 했다. 정치·사회 문제 고민? 그런 건 관심 밖이었다. 초등학생 남매를 둔 아버지로서 어깨도 만만치 않게 무거웠다.

"어느 날 애들 엄마가
공부방에 갔다 오더니 이 동네가 개발을 한다고, 다 나가야 한다고 그러더군요. 제가 그랬지요. 당연히 나가야지, 남의 집 세 살면서 나가라면 나가야하는 거 아니냐고."

그의 아내는 생각이 달랐다. 그냥 나가면 안 된다, 정당한 권리 주장을 해야 한다, 공부방 설명회에 나가서 이야기를 좀 들어보자고 설득했다.

"그때 설명회에 오신 분이 설명을 잘해서인지 이야기를 듣고 보니 뭘 해야 되겠구나 싶더라고요. 마을 주민들 대책회의가 열리고 엉겁결에 제가 바로 위원장을 맡게 되었어요."

본격적으로 철거 운동에 집중하기 위해 그는 다니던
직장도 그만뒀다. 그때 시절을 떠올리면 유 이사는 이렇게 말한다.

"인생이 완전히 바뀐 것이지요. 소시민에서 투사가 된 것이지요."

▲ 유영우 이사는 1993년 금호·행당·하왕 지역 재개발에 맞서 철거민 운동을 조직해 가이주 단지 입주를 쟁취했다. ⓒ프레시안

당시 금호·행당·하왕 지역 전체에 개발의 바람이 몰아쳤다. 철거 대상 지역 주민들 모두가 힘을 모아 연대 활동을 펼쳤다. 위원장인 유 이사가 주거연합 성동지역 지부장 일도 자연스레 떠맡았다. 철거 운동이 진행되어 가이주 단지
입주를 논의 하는 단계에 다다르자 개발업자들과 주민들 간에 더욱 팽팽한 기운이 돌았다.

가이주 단지란 아파트 입주까지 세입자 주민들이 거주할 수 있는 시설 공간을 말한다. 어디나 할 것 없이 개발 지역에 살던 세입자들은 경제적으로 열악한 사람들이다. 세입자들은 주거
이전비와 3개월치 생활비를 받아 나가거나 임대아파트 입주 중에 선택해야했다. 입주를 원한다 하더라도 당장 어려운 형편 때문에 얼마 안 되는 돈을 받고 나가는 이들도 많았다. 임대아파트 입주를 선택한 세입자들에게도 여전히 문제가 있었다. 공사 기간 동안 살 데가 필요한 것이다. 완공까지 7년 길게는 10년도 걸리는데 그 시기 동안 다른 곳에 이사 갔다가 오기란 불가능했다.

인근 지역 전월세 값은 이미 상승해서 멀리 외곽으로 나가야 겨우 살집을 얻을 수 있었다. 다른 데로 이사를 간다는 것은 생활권 이탈을 의미한다. 산동네 주민들은 그동안 살면서 그들만의 살뜰한 공동체가 형성되어
일자리나 금전 거래가 가능했지만 멀리 이사가 버리면 이마저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떨어지지 않고 모여서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가이주 단지가 필요했다. 주민들은 열심히 싸웠다. 세입자 가구 250세대가 3년 동안 철거 운동을 해서 마침내 가이주단지로 입주할 수 있었다. 102세대가 입주했다. 샌드위치패널로 만든 공간은 식구 수에 따라 5평이나 7평으로 배정되었다. 문하나 열면 바로 코앞에 이웃이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그렇게 4년을 지냈으니 어떻게 서로 정들지 않을 수 있었을까.

▲ "주거가 안정되자 철거 운동은 바로 다음 단계로 들어갔다. 지역 주민 운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우리 삶을 어떻게 개척할 것인가. 가난한 우리가 힘을 모아서, 남의 도움 받지 않고 지역 사회에 기여하면서 잘 살 수 있는 그런 운동을 해보자.'" ⓒ프레시안
금호동 지역에 이어 다른 지역에서도 연이어 가이주 단지가 허용되었다. 성공적인 선례 덕분에 힘없는 철거민들이 그나마 약간의 힘을 얻었다. 지금에 와서야 간략하게 정리되는 그 세월이지만 얼마나 고생이 심했을 것인가. 가이주 단지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대형 텐트를 4개나 쳐놓고 40일간 농성한 적도 있었다. 협상 과정이 만만했을 리가 없다. 격렬하게 싸우기도 했을 것이다.

"그럼요 많이 맞기도 하고…. 특히 엄마들이 많이 다쳤지요. 남자들은 싸움이 일어나면 격해져서 크게 부상한다고 해서 철거 싸움 때엔 엄마들이 앞에 주로 나갔는데 많이 다쳤지요. 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도 받고…. 저는 그때 지명수배 되어 도망 다니기도 했었지요. 주민 모두가 늘 일상적으로 긴장 상태에 있었어요. 철거가 언제 들어올지 모르니까 항상 대기상태죠. 우리가 순번 정해서 마을순찰 돌고 그랬는데 공사한다고 다 허물어 놓아서 마을이 완전히 폐허 같았지요."

지금은 대학생이 된 유 이사의 딸은 그 시절을
행복하게 회상한단다. 학교에 다녀와서 대책위 사무실 아니면 공부방에 가서 놀았는데 동네 어른들이 모두 엄마처럼 돌봐주었다. 저녁밥도 다 같이 먹고 밤늦어서야 엄마아빠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갔다. 온동네 사람들이 한 식구처럼 살았던 시대였다.

주거가 안정되자 철거 운동은 바로 다음 단계로 들어갔다. 지역 주민 운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우리 삶을 어떻게 개척할 것인가. 가난한 우리가 힘을 모아서, 남의 도움 받지 않고 지역 사회에 기여하면서 잘 살 수 있는 그런 운동을 해보자.'

운동의 형식은 협동조합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사실 철거 운동과 동시에 진행되었다. 1994년부터 주민자치 협동체
건설을 위한 기획단을 만들어 기초를 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주민, 활동가 중심으로 신협, 생협, 생산자 협동조합, 사회복지 협동조합 4개 분야로 나누었다. 주민들은 각자 분과로 들어가 공부했다. 1996년에 들어오면서 운동이 본격화 되었다. 맨 처음 출발한 게 신협, 그다음이 생산자협동조합이었고, 생협은 중도 포기했다가 이제 올해 다시 출발한다. 사회복지 쪽은 그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다.

당시 그는 기획단 대표를 맡아 주도적으로 이 운동을 이끌었다. 어떻게 그전에 경험도 없었을 텐데 가능했나?

"협동조합운동은 전통적으로 빈민운동에서 해온 실험이잖아요. 저도 이걸 처음 접했을 때 굉장한 쇼크를 받았지요. 그때 공부방
선생님이 <몬드라곤에서 배우자>라는 책을 주셨는데 세상에 이런 것도 있구나 싶었지요. 철거 투쟁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모두 주민운동, 빈민운동 속에서 함께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많이 보고 배웠지요. 현장에 가서 보고 듣고. 우리 동네 주민들과 같이 가서 직접 보게 했지요. 모두가 협동 운동은 당연히 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더라고요. 우리 지역이 짧은 시간에 운동이 가능했던 것은 미리 열심히 공부한 덕이라고 봐요."

▲ 유영우 이사의 철거민 운동은 협동 운동으로 전화했다. 논골신용협동조합은 그 성과다. ⓒ프레시안

유영우 이사는 서울 토박이다. 여럿 누나를 둔 막내아들로 자랐으니 남들 어려운 것에 대해서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살았던 것 같다고 그가 고백한다. 그의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던 것일까?

"글쎄, 그게 미스터리라니까요. 하하하…. 근데 확실한 것은 이거죠. 과거에 제가 소시민으로 살 때는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이나 부조리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어요. 사회 돌아가는 것도 매스컴이나, 신문에서 말하는 대로 알았고, 그런데 여기 뛰어 들어와 싸움하는 과정에서 구조적인 모순을 온 몸으로 느끼게 된 거지요. 경찰이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 왜
철거용역깡패가 가난한 주민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지, 개발에서 나오는 막대한 이익이 어디로 가는지, 직접 보고 경험하면서 제가 눈을 뜨게 된 것이지요. 우리 사회에 구조적 모순이 엄청 많구나, 이것을 고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우리 아이들한테 까지 이런 걸 넘겨주면 안 되겠다, 하는 막연한 사명감, 그런 게 자연스럽게 생겨나더군요. 한번 발을 들여 놓으면서 다시는 못 빠져 나가게 된 거지요. 하하하…".

유 이사는 철거 운동 하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참 신기하다고 했다. 부부가 운동하느라 돈벌이를 하나도 못했는데 그들 가족이 끼니를 굶은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대문 밖에 나가보면 누가 쌀자루를 갖다놓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살림에 보태라고 돈을 건네주기도 했어요. 다 같이 가난한데도 이웃이 그렇게 해주니 제가 열성을 가지고 안할 수가 없었지요."

철거 운동에서 신협운동으로 넘어가면서 주민들은 진정한 운동의 기쁨과
보람을 맛볼 수 있었을 것 같다. 신협을 가장 쉽게 설명하는 슬로건이 있다. '1인은 만인을 위하여, 만인은 1인을 위하여!' 이웃들은 모두가 힘을 모으면 얼마나 큰 위력이 생기는지 목격하게 된 것이다. "어떤 불특정 다수가 이용하는 금융기관과 달리 조합원으로 가입한 조합원만이 이용하는 기관이지요. 조합원이 출자한 돈으로 또 조합원에게 대출해 주는 것이지요. 때문에 철저하게 지역사회 내에서 참여하는 이들이 서로 도움을 주고받게 되는 것이지요."

논골신협은 그동안 꾸준히
성장해왔다. 누구도 이렇게 쑥쑥 커갈 줄 몰랐을 것이다. 그 성공 비결은?

"신협을 철거민이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그것도 아주 가난한 이들이 만들었다는 게 근본 힘이에요. 그때 인근 지역 다 합해서 250세대였는데 각 마을마다 출자금을 거두는 책임자를 정해서 매일 거두었지요. 신협 인가를 받으려면 3억 원은 만들어야 했으니까요. 조합원은 누구라도 될 수 있었으니 어른들은 물론 아이들도 가입했지요.
바구니를 들고 다니면 주민들이 몇백 원, 몇천 원씩 넣었지요. 수기통장에 오늘은 누가 얼마 출자했다하고 도장 찍어주고…. 그렇게 95년 말부터 시작해서 인가날 때 까지 쉬지 않고 했지요."

초창기에 바구니를 들고 조합비를 거두었던 바로 그 사람들이 여전히 신협에서 중심 역할을 한다. 철거 싸움 당시의 그 뭉쳐진 힘이 신협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한때 다들 어려웠던 IMF 위기당시 논골신협도 약간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인가 받자말자 그 위기가 닥친 거지요. 그때 부실경영 신협은 곧바로 퇴출되고 그랬지요. 그런 소식이 언론에 실리면서 신용도가 떨어져 우리도 참 어려웠어요. 예금주들이 돈을 찾아가고…. 우리 조합원들이
초심을 잃지 않고 굳건하게 버티면서 주변에 홍보도 열심히 하고해서 그 위기를 넘겼지요."

▲ 유영우 이사는 신용협동조합 활동이 궁극적으로 지역 주민 통합에 큰 역할을 한다고 강조한다. ⓒ프레시안
유 이사에게 신협은 인생의 보람이면서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제가 협동 운동을 배우면서 가진
비전은 결국 각 지역 공동체가 잘되어야 나라의 전반적 부분이 튼튼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가난하고 힘은 없지만 협동공동체 운동을 통해 지역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민들이 같이 할 수 있도록 만들어 가는 게 목표입니다."

유 이사는 신협 활동이 궁극적으로 지역 주민
통합에 큰 역할을 한다고 강조한다.

"지역 주민들 신협을 개방하며 같이 하자고 했더니 다들 꺼리더군요. 철거 싸움할 때 우리를 봤으니 좋은
인상이 아니었지요. 만날 이런 저런 항의에 온 동네가 떠나가게 스피커로 투쟁가를 틀어놓고 했으니까요. 우리를 빨갱이, 떼쟁이라고 했을 거예요. 그런데 어느날 은행이라고 만들어놓고 있으니, 뭐하나 싶었을 거예요."

지금 건물을 사서 옮겨온 지가 2년 되었다. 그전에는 골목 안에 20평짜리 건물에 세를 살았다. 신뢰도가 더 커지는 것이 분명했다. 인근 주민들, 특히 장사하는 이들이 조합원으로 많이 참여했다. 주민통합을 위해 신협이 애를 쓰자 과격한 이미지에 대한 시각이 변하면서 인근 주민들이 조합원 가입을 시작했다.
야유회, 단오제 행사를 열고 지역에서 모임이 있으면 달려갔다. 신협이 경제공동체로서 인지도와 신뢰를 얻게 되면서 신협으로 모여드는 주민들은 더 많아지고 있다.

유 이사의 가슴에는 철거 운동에서 시작한 협동 운동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있다. 앞으로 더욱 큰 불꽃으로 번져나갈 것이다.

"운동을 통해 배운 것, 그걸 모르고 살았다면 지금쯤, 인생 헛살았다는 생각했을 겁니다. 어렵고 힘들었지만 결코 후회해 본 적 없었지요."

유영우 이사는 결국 혼자만 잘사는 세상이 아니라 다 같이 잘사는 동네를 만들어내
고야 말았다.

▲ "운동을 통해 배운 것, 그걸 모르고 살았다면 지금쯤, 인생 헛살았다는 생각했을 겁니다. 어렵고 힘들었지만 결코 후회해 본 적 없었지요." ⓒ프레시안

세상을 바꾸는 혁신 '사회적 기업'

사회적 기업(social entrepreneur)에 대한 관심이 놀랍게 증폭되고 있다. 불과 수년 전에 빈곤 대책의 일환으로 거론되는가 싶더니 어느새 시민운동의 핵심 화두가 되었다. 지속 가능하고 인간적인 사회를 일구는 대안에 대한 간절한 열망 때문일 것이다. 지난 정부에서 사회적기업육성법(2007)을 제정하는 등 기대감을 한껏 높였고, 복지 정책에 시들한 현 정부에서도 사회적 기업에 대한 기대는 여전하다.

하지만 사회적 기업의 의미에 대한 인식은 다양하고 혼란스럽다. '착한 기업', '윤리적 기업', '대안 기업', '이윤이 아니라 빵을 위한 기업' 등 긍정적인 의미 부여가 많지만, '낮은 질의 주변부 일자리'라는 비판도 무시할 수 없다.

우선 사회적 기업의 개념 자체가 분명치 않다. 사회적기업육성법에서는 '취약 계층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등의 사회적 목적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영업 활동을 수행하는 기업'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러한 정의에는 약간의 문제점이 있다. 왜냐하면 현존하는 모든 기업은 크든 작든 나름대로의 사회적 의미와 목적을 가지기 때문이다. 또 현행법은 사회적 기업에 대한 인증제를 시행하고 있는데, 이에 따라 요건에 맞는 기업이나 단체만 사회적 기업으로 배타적으로 인정됨으로써, 사회적 기업의 정신을 공유하는 수많은 조직체들이 배제되고 있다. 특히 사회적 목적을 추구하지만 영리활동을 하지 않는 수많은 NGO, NPO 등이 체계적으로 배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사회적 기업의 엄밀한 개념보다는 그 기본 정신이 무엇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사회적 기업의 기본 정신에 대해서도 많은 논의가 가능하겠지만, 필자는 그 핵심은 사회적 기업가 정신(social entrepreneurship)이고, 이는 곧 세상을 변화시키는 혁신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실업과 빈곤, 사회적 배제와 소외 등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야기한 사회적 폐해를 해결하고자 하는 혁신적인 모색이 사회적 기업의 기본 정신이라는 것이다. 사회적 기업은 이러한 사회적 혁신을 위해 필요한 새로운 차원의 경제적 활동을 의미한다. 물론 좁은 의미의 상공업 활동에 국한하지 않는다.

실직자를 위해 고용을 창출하거나 창업을 지원하는 일은 물론, 장애인을 교육하고 불우 청소년의 자존감 회복을 지원하는 등 취약계층에게 사회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 장애인이 중심이 되는 일터, 노동자들이 자주적으로 운영하는 기업, 환경을 보호하고 생태마을을 만드는 기업, 농촌공동체를 회복하는 귀농·귀촌운동, 대안화폐로 지역사회 공동체를 만드는 레츠(Lets) 운동, 소규모의 커뮤니티 비즈니스, 가난한 사람들에게 신용대출하는 협동조합, 주민들의 다양한 욕구에 대응하는 워커즈 컬렉티브(workers' collectives) 등 그 영역은 다양하고 무궁하다. 사회적 기업은 현대 사회가 해결하지 못하는 공백을 채워나가는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모색의 너머에는, 사람들 간의 신뢰에 기반을 둔 대안적이고 협동적인 사회경제 체제의 모델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희망이 놓여있는데, 이는 상품과 이윤을 중심으로 조직되는 비인간적인 시장경제 체제를 넘어서고자 하는 희망이다. 사회적 기업이 영리활동에만 의존하지 않고 보다 폭넓은 사회적 자원동원을 필요로 하고, 또 그것을 바람직하게 여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 때, 사회적 기업 운동은 이제까지 우리 사회의 변혁을 위해 애써온 사회운동의 정신과 별개의 것으로 보기 어렵다. 오히려 변혁의 과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이고, 이를 시민들의 삶의 현장에서 출발하여, 창의적이고 지속가능하게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사회적 기업은 사회운동과 사회복지를 보는 새로운 시각(new perspective)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시민들의 방치된 욕구를 충족하고, 낙후된 지역사회를 재생하며, 보다 높은 삶의 질을 향한 혁신을 창의적이고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꾀하는 것이 사회적 기업가 정신일 것이다. 물론 사회적 기업 운동은 사회적 기업가 혼자의 운동이 아니다. 많은 이해관계자들이 소유와 운영에서 주체적이고 민주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이다. 하지만, 이를 조직화하는 것은 사회적 기업가의 사명이므로 사회적 기업의 성패가 이들에게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사명을 체현하고 있는 사회적 기업가와 사회적 기업가 정신을 확인하는 것이 본 기획의 목적이다. 앞으로 '성공회대학교 사회적기업연구센타'와 <프레시안>은 20회의 기획 연재를 통해 이를 확인해 보고자 한다. 위에서 강조한 대로 여기에서 다루는 사회적 기업은 정부의 협소한 개념 정의에 구속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적 기업가 정신을 체현하고 있지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사회의 변혁을 위해 헌신해온 많은 분들을 폭넓게 찾아내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이영환(성공회대 교수·성공회대 사회적기업연구센타 소장)

▲ 프레시안은 성공회대학교 사회적기업연구센터와 공동으로 세상을 바꾸는 '사회적 기업'을 만들어가는 사회적 기업가 20인을 발굴해 소개할 예정이다. 지난 2월 17일 서울 옥인동 프레시안 사무실에서 공동 기획 협약을 하는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왼쪽)와 이영환 사회적기업연구센터 소장(오른쪽). ⓒ프레시안
 
 
 

/권은정 전문인터뷰어

 

-- 6년전 2주간의 연수에서 만났던 아영이가 이 분의 딸이라는 것을 나중에 어쩌고저쩌다 검색을 통해 알았다. 아영인 잘 지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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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행

#1 항상 갈등만 하고 고민만 했다. 그리고 난 글을 잘 쓴다는 생각 절반과, 능력 없다는 생각 절반을 가지고 살았다. 기자가 되고 싶었고 그래서 시민의 소리 기자학교 프로그램도 듣고, 오마이뉴스 시민기자가 되었지만  열심히 쓰지 않았다. 항상 내 마음 한 켠에는 응어리가 있었는데 마을조사단을 하면서 기록자로서 일을 할 적에는 그런 응어리가 많이 풀렸다. 하지만 과거를 기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재를 기록할 필요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꿈을 이루는 방법은 꼭 정답이 없다고 생각했다.

 

직업 기자가 되지 않아도 글을 쓸 수는 있으니까말이다. 그렇게 마음먹고 나니 고민은 많이 줄었고

시민기자로 글을 때때로 쓰던 2001년의 나는..9년이 지나서야 다시 글을 쓰고 있다.그 동안 그렇게 여러 경험을 하고 여러 사람을 만나고 여러 곳에 있었으면서 왜 글을 써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가... 이제 9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내 마음 속에서 쓰고 싶어진 것일까?

강이 나를 움직였다. 강을 걷고 와 이것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겠고 너무 쓰고 싶었기 때문에 쓰기 시작했다

가끔은 시덥쟎은 글도 쓰고 싶지만, 그래도 밥값을 하는 글을 쓰고 싶다. 아무도 쓰지 않는 것에 대해서 쓰고 싶다.. 써야 한다...

 

그 동안 놓친 글감과 열정,경험들이 무지 후회스럽지기는 하다...

예전에 사귀던 선배가 일 하면서 열심히 글을 써 보라고 했던 말이 이제서야 실감난다.

그 선배의 말은 이제서야 내 마음에 박혀온다. 많이 사랑했고, 보지 않지만 선배는 종종 댓글로 나를 격려해준다. 선배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요즈음 내가 드는 생각은 말이다.살아간다는 건, 사랑이라든가 하는 감정따위가 아니라.."서로가 서로를 기억해 주는 것"이 살아간다는 것이라고 여긴단다.

 

그러게요, 그게 맞는 듯해요. 난 기억을 잘 지우지 못하거든요.

 

# 2

어제는 해외에 나가있는 친구에게서 이메일 답장도왔고

돕 님께서 다정한 댓글도 달아주셨고

섬진강 은어님께서 한 달 전에 달아준 댓글을 우연히 확인했다

그리고 기타로 김광석 노래를 연주하는 기쁨도 누렸다.

그리고 땅의 여자를 보고 감독님이 존경스러웠다. 솔직히 질투심도 있다. 여성농민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고, 때때로 하고 있기에... 그래도 존경스럽다.같은 여자로서 더.

그리고 오늘아침엔 이사를 했다. 행거가 필요했는데 마침 하나 있었다. 더 이상 살림을 살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다.고맙고 반가운 인연이다. 행복한 일이 많다.

 

#3.낙동강을 가려다가 여주로 발길을 틀기로 했다.

낙동강은 차편이 이루말할 수 없이 복잡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제 그렇게 낙동강이 확 땡기지 않았던 것이었군

 

#4 

난 지금 이 곳에서 출퇴근하면서 논을 볼 수 있어서 행복하고 곧 흙을 만질 것이기에 행복하다.

사랑과 상처에 대한 부담없이 눈 마주치고 만질 수 있는 강아지가 있어서 행복하다

강아지에게 다시 사랑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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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증처럼 마음 속에 쌓여있는 답답함과 분노와 아픔

--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걷고, 기록하고, 마음에서 잊지 않는 것 밖에 ---

 

아픈 마음으로 만난 4대강 현장... 영산강을 따라 걷다
10.03.09 21:46 ㅣ최종 업데이트 10.03.10 21:55  dmsdlv)

 
 
한동안 잊고 있었습니다. 말로는 4대강 사업을 반대하면서 마음 속에서 잠시 치워두었던 것은 그 사안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답답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몇 달 전 백수가 되어 시간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러다보니 신문을 열심히 구독하게 되었고 하루 걸러 한 번씩 4대강의 문제점을 깊이 다룬 기사들을 보게 됐습니다.
 
점차 내 마음 속에 지금의 공사상황에 대한 궁금증과 답답함이 커지게 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메일을 확인하다가 영산강 도보순례에 대한 내용을 보았고 '그래 영산강으로 가자' 결심했습니다.
 
  
▲ 신성리 이장님의 말씀을 듣는 참가자들 주민으로서 겪은 피해와 앞으로 우려되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주셨습니다.
ⓒ 김하나
4대강

 

보트로만 탐사했을 뿐 내 발걸음으로 영산강과 만나본 적은 없던 터였습니다. 지난 1일, 나주시 다시면 석관정에 도착하니 광주환경운동연합 회원들과 실무자,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성당 신도들이 출발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오전 10시가 조금 넘어 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강의 상황만큼이나 날씨도 좋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내리는 비를 맞고 걸으며 강변을 둘러보니 덤프트럭 10-20대 가량 움직이며 쉴 새 없이 흙을 실어나르고 있었습니다. 물길 우회 공사, 준설 작업, 작업한 토사를 야적하기 위해 덤프트럭 여러 대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영화 속에서 보았던 로봇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 죽산보 공사 현장 물막이 공사와 물길 우회공사가 진행중이다.
ⓒ 김하나
4대강

 

비가 오는 날도 공사는 멈추지 않는다고 합니다. 참가한 사람들은 나주시 죽지마을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1시 30분경 죽산보 공사현장에 다다랐습니다. 죽산보에서는 보를 건설하기 위해 물길을 돌리고 물막이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강을 이렇게 헤집어놓을 줄 상상하지 못했기에 눈 앞에 펼쳐진 공사현장은 충격이었습니다.

 

정부에서는 홍수예방, 물 확보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으나 실제 강 옆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말은 이와 배치됩니다. 참가자들은 신석리 이장님으로부터 지역 주민 입장에서 보는 공사의 문제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도 보리밭이 침수피해를 입었고 공사가 진행되고 나면 수위가 높아져서 피해가 더 커질 것입니다. 그리고 물이 부족하다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국민이라면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일일 터인데 정부의 눈에는 이 침수피해에 대한 것이 그저 간과해도 될 하찮은 일일까요? 정부가 내세우는 목적과 다른 진짜 목적은 수심 6m 확보와 수로 폭 확보 즉, 운하 건설을 위한 기반을 만드는 것입니다. 아래로 수심을 확보하기 위해 무자비한 준설을 진행하고, 위로 수심을 확보하기 위해 보를 만드는 것이지요.

 

  
▲ 논길을 걷는 참가자들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회원, 천주교 신도, 광주환경연합 활동가 및 회원, 시민들이 강을 바라보며 걷고 있습니다.
ⓒ 김하나
4대강

 

강을 살리기 위해서는 강을 틀어막아서는 안 되고 흐르게 두어야 할 터이지만, 지금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그러한 상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것입니다. 4대강 사업에 투입되는 총 예산은 22조이며 이 중 영산강에 투입되는 예산이 2조8천억이고 죽산보 공사는 영산강 공사현장 중 가장 규모가 큰 곳으로 1500억이 투입된다고 합니다.

 

4대강 사업은 전국적으로 내년까지 제반 공사를 마쳐 이명박 대통령 임기 내에 공사를 마무리할 계획으로 진행하고 있으며, 보를 건설하게 되면 수위는 홍수 발생시 지금보다 2-3m 정도 높아져 침수피해를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예측됩니다.

 

  
▲ 승촌보 공사현장 보를 만들기 위한 작업으로 먼저 물막이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 김하나
4대강

 

현장에는 CCTV가 설치되어 있는데 광주환경운동연합 임낙평 의장의 말에 따르면 이것은 다른 지역 공사현장과 속도를 비교해서 독촉하려는 목적에서 설치한 것이라고 합니다. 공사를 하기 전 환경영향평가와 수리모형실험을 거쳐야만 하는데 이것을 생략하고 강행하고 있는 것 또한 졸속으로 진행된다는 증거입니다.

 

걷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한 사람으로서 걷고 있는 것이 이렇게 부끄러울 수 있을까요. 영산강을 걷는 걸음은 그 후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난 7일에는 광주환경연합 소속 소모임인 광주천 지킴이 모래톱 회원들의 승촌보 공사현장~영산포 구간 답사에 동행했습니다. 

 

4대강 사업 일환으로 영산강에 설치되는 보는 2개로 각각 죽산보와 승촌보인데 이날 걸은 곳이 바로 승촌보 공사현장을 포함한 구간입니다. 오전 9시경 용산마을에서 출발하여 승촌마을로 들어서니 미나리꽝이 펼쳐지고 그 곳에서는 어머니, 아버지들께서 물장화를 신고 한창 작업 중이었습니다.

 

  
▲ 미나리 채취 중인 마을 어머니들 이 곳은 광주지역에서 유통되는 미나리의 70%를 생산하는 곳이라고 한다. 하천에 인접한 곳이기 때문에 미나리를 재배하기 좋은 조건으로 생산량도 많고 마을의 안정적인 소득원이다.
ⓒ 김하나
4대강

 

이곳에서 생산되는 미나리꽝은 광주 지역의 70%이며 안정적인 소득을 보장해주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공사가 시작되면 이 곳도 침수될 계획이며, 승촌마을은 저지대이기 때문에 공사를 통해 수위가 높아지면 침수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어서 마을과 강 사이에 제방을 높게 설치할 것이라고 합니다. 강과 단절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곳곳에 만들어진 하중도도 물에 잠겨버립니다. 마을주민들은 대부분 반대하고 있으나 무서워서 적극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현하지는 못한다고 합니다.

 

승촌보 공사현장 역시 죽산보 현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보를 건설하고, 2500톤급 바지선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기본 수심을 4.5m로 유지하고, 수위를 11~12cm 정도 유지할 계획으로 공사를 진행 중이므로, 이름만 보일뿐, 규모는 댐에 가깝다고 합니다.

 

걷는 내내 마음이 콱콱 막혀 왔습니다. 다시는 볼 수 없을지 모르는 풍경들을 마음에 새기며 한 걸음 한 걸음 걸었습니다. 광주땅을 지나 나주에 들어서서 걷다보면, 아름다운 하중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 나주지역 강변에 조성된 하중도와 유채꽃밭 강 가운데에 있는 하중도에는 나무가 자라고 있다. 그리고 아래쪽에는 나주시에서 조성한 유채꽃밭이 있다.
ⓒ 김하나
4대강

 

강 가운데에 만들어진 하중도에는 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강변쪽에는 나주시에서 유채꽃밭을 조성해 놓았지만 공사가 계속 진행되면 내년이면 이곳도 볼 수 없게 된다고 합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광주하수종말처리장 인근의 습지도 없어지게 될 것이고, 멀게는 영산강 상류 담양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습니다.

 

강은 물만 흐르는 곳이 아니라 그 물에 깃들어 물고기와, 풀과 나무, 새들이 살아가고 있는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사람이 셀 수 없는 시간 동안 흘러 만들어온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시 살려내기 어려운 것입니다. 

 

현재 4대강별로 각각 공사중지가처분 신청이 진행 중이며 지역 주민들과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현장답사, 소송, 시민홍보 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라지고 난 후 미래 세대들에게 어떤 자연을 남겨줄 것인지. 어떠한 말과 글로 이 아픈 마음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을까요.

 

덧붙이는 글 | 4대강 막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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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한 통

오마이뉴스에서 전화를 받았다. 글을 써달란다

그런데 주말 근무가 있는 날이다.그리고 행사 취재장소가 서울이다.

그래도 가 보고 싶다.

물론 내 글이 별로 수준높을 것 같진 않다. 지금 쓰는 것은 트레이닝 수준이니까.

하지만 이렇게 전화도 오고 어딘가에 실린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인데...

 

제길..물론 그 전에 일하던 곳에서도 주말 행사는 많았지만...

다른 것 필요없으니 제발 주말을 보장해주던가...지금은 괜히 이런 생각이 든다.

게다가 행사 때문에 낙동강 1박 2일 순례도 못 간다. 공연이 중심인 그 행사보다는 1박 2일 순례가 더 가고 싶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나는 가지 않겠다고 한 번 말해볼 생각이다.  

 

차라리 백수의 길을 선택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아니, 그랬다면 집에서 벗어나기 어려웠겠지. 흠....

그래서 주말은 바쁘다. 4대강 생각에...

내일 이사하고 주말에 쉬고 싶지만,, 다녀오지 않으면 내내 마음이 편치 않겠다. 지금껏 주중에 그랬던 것처럼...

차라리 월급을 조금 줄이고, 근무날짜를 줄일 수 있다면 좋을텐데...

그게 더 원활한, 오래갈 수 있는 진짜 운동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여기 오고 나서야, 그래, 백수로 4대강에 중심적으로 짱박혀 있는 게 좋았을 뻔했다는 생각을 한다.

기록.. 기록... 진짜 기록....

 

어차피좋은 글 못 쓰고 어차피 서울 못 갈텐데 속이 쓰리네... 풀리기는 할까?

꼭 전라도 닷컴에 내 후배 취직됐다는 이야기 들었을 때처럼 ^^:; 그건 금방 풀렸지만 ^^

그리고 나중에 전라도 닷컴에서 내 기사를 싣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꿈같았다.

 

그래도.. 이제 곧 오마이뉴스 기자원고료가 50,000원을 돌파하면 현금으로 받을 수 있다.

오늘은 영광여성의전화에서 땅의 여자를 상영하니 보고 와서 원고를 정리해봐야겠다.

너무나 보고 싶던 그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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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속이 쓰라리다

[화보]지율스님이 영상으로 기록한 낙동강 파괴현장
이 아름다운 곳을 어찌 흩뜨리려합니까 …
 
2010년 03월 31일 (수) 15:09:03 미디어오늘 ( media@mediatoday.co.kr)
 
지율스님, 오늘의 잘못 되돌릴 훗날 위한 기록

천성산의 도룡뇽을 살리겠다며 목숨을 건 단식투쟁으로 맞섰던 지율 스님(사진)이 4대강 개발사업으로 무너져 가는 낙동강에 다시 몸을 던졌다.

지율 스님은 지난해 봄부터 낙동강 순례를 계속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1천 500명의 시민이 그 고행의 길을 함께 따라나섰다. 참혹하게 파헤쳐진 시뻘건 황토길을 따라 걷는 그 길이 고행일 수 밖에 없는 건 한번 파괴한 자연을 영원히 되찾을 수 없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굽이굽이 휘몰아치는 강변을 굴삭기가 한바탕 뒤집어 엎고 나면 반듯하게 깎인 콘크리트 제방이 들어선다. 그것은 마치 전국을 거대한 인공 연못, 청계천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

   
  ▲ 지율스님 ⓒ이치열기자 truth710@  
 
환경을 살린다는 명목으로 자행되는 이 무시무시한 파괴의 현장에서 지율 스님은 피를 토해내는 심정으로 낙동강의 풀 한 포기, 햇살 한 줄기, 바람 한 점을 사진으로 담아냈다. 토건주의의 욕망이 저지른 만행은 처절하다 못해 참혹하고 끔찍하다.

불교환경연대는 지율 스님의 사진을 모아 30일 하루 동안 서울시 종로구 불교역사문화기념관 나무갤러리에서 ‘낙동강 비포 앤 애프터 사진전’을 개최했다.

전시회는 전국을 순회하면서 개최될 예정이다.

미디어오늘은 지율 스님이 엄선한 사진을 제공 받아 이를 지상중계한다. 각각 개발 이전(B)과 이후(A)의 사진들이다.



   
  하빈고개 무성하던 야생버드나무 숲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공사현장.  
 
   
  칠곡보현장강을 통째로 막은 뒤 보 건설이 진행되고 있다.  
 
   
  낙단보현장 강을 통째로 막은 뒤 보 건설이 진행되고 있다.  
 
   
  본포나루터 노래를 좋아하는 주모가 살던 주막이 없어진 자리에 인공제방 쌓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낙동둔치 낙단보 부근의 둔치에 경작중이던 논이 완전히 파헤쳐졌다.  
 

 

 

영산강 가까이 살지만 영산강보다 더 심하다.

사실 영산강은 낙동강에 비하면 경치가 그리 아름답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서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낙동강의 변화된 모습을 보는 것은 영산강과는 또 다른 차원이었다.

 

이것은 ....

망하자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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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습관을 바꾸어보자!'

내 마음의 빚을 갚는 차원에서 물을 조금이나마 덜 더럽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맹물로 머리를 감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 한 번 시도했었지만, 머리가 너무 가려워서 참지 못하고 하루만에 그만두었었는데 이번엔 한 달 이상 시도해보리라 결심했습니다.

때때로 너무 가려울 때 한두 번은 샴푸를 썼음을 고백합니다만, 그래도 아직까지 맹물로 감고 있습니다. 걱정도 있었지만 생각보다 머리가 개운하고, 비눗물, 샴푸물이 나오지 않아서 마음이 가볍습니다.

단지,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보통 이틀이나 삼일에 한 번씩 감던 것을 하루에 한 번씩 감는다는 것이지요. 흠....

 

그리고 한동안 이를 닦을 때에 죽염을 사용했었는데 일을 그만두고 부모님 집에 있으면서 치약을 사용했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독립해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서 다시 습관을 바꿔보기 시작했습니다. 뭐 완벽하겠습니까? 가끔 습관적으로 치약에 손이 가는 경우가 있긴 종종 합니다만~

 

목욕을 할 때도 비누를 쓰지 않습니다. 그래도 몸은 개운합니다. 땀이 나지 않기 때문에 사실 비누를 쓰지 않아도 충분히 씻을 수 있습니다. 샤워기를 쓰던 습관을 바꿔서 대야에 물을 받아 써 보았습니다.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것은 화장실 문제였습니다. 부모님 댁도, 지금 사는 집도 수세식 화장실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재래식 화장실이라고 해도 똥오줌을 퇴비로 활용하지 않는다면 수세식 화장실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결국 하수처리장으로 흘러들어가서 하수슬러지가 되어 바다에 투기 처리 되기 때문입니다. 습관을 바꾸어보고 생각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니 결국은 친환경화장실을 지어서 퇴비를 만들어 쓰기 전에는 문제를 뿌리뽑을 수 없겠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는 당장 해결이 되지 않더군요. 하지만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 말통에 오줌을 모아 삭혀 나중에 농장에서 퇴비로 활용하려고 합니다. 대변을 발효시킬 수 있는 공간과 시설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어렵기에 마음 한 켠이 조금 불편합니다..흠.. 주변에 사람들이 안 살면 구덩이라도 파서 묻겠지만 하하핫.

 

화장실 문제와 관련해서는 강을 살리는 것과는 조금 다른 관점이겠지만, 땅을 살리는 뜻에서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화장지를 사용하지 않고 뒷물을 하게 됐습니다. 예전에 한 번씩 시도해본 것들이기 때문에 큰 거부감은 없었고, 뒤도 시원합니다. 무엇보다 마음이 가볍습니다. 화장실에 쌓여가던 화장지를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 무엇보다 가장 마음도 개운하고, 뒤도 개운한 일이죠^^

 

주변을 둘러보니 바꿔야 할 것이 몇 가지 더 있었습니다. 설거지를 할 때 저는 예전에 밀가루를 사용해서 설거지를 했었지만, 어머니의 핀잔으로 그만두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나마 가장 친환경적이라고 판단되는 친환경주방비누를 사서 사용하고 있는데 훨씬 거품도 적게 나고 헹굼물도 맑습니다. 광주에 있는 '강청'이라는 비누회사입니다. 예전에 일하던 단체 회원이셔서 한 번 만나뵌 적도 있는데, 믿을 수 있는 분입니다. 공장 옆에 수세미도 기르고 있는데 구매고객에게 서비스로 제공하시려고 심으셨답니다.

당시 저는 그 단체에서 소식지를 담당하던 시기여서 그 분을 만나뵙고 비누에 대한 이야기, 가치관에 대한 이야기를 인터뷰해서 실은 적이 있거든요. 그러다보니 그 비누에 애정이 가는거죠 물론 품질도 좋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용으로 주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사실, 친환경비누보다는 밀가루가 나을 것 같아 밀가루설거지를 오랜만에 다시 시도해보았는데 강한 기름때는 잘 지지 않는 단점이 있어서 고민이 됩니다. 그래서 두 가지 방법을 경우에 따라 섞어서 쓰고 있습니다.

 

아직도 바꾸어야 할 것이 여러 가지 입니다. A4 용지를 사무실에서 줄여보려고 해도 잘 되지는 않네요. 그리고 재생지를 주문하려고 했지만 도매로만 판매한다고 합니다. 그 문제와 더불어 생활쓰레기를 줄이는 것, 그리고 전기를 안 쓰는 것 - 일찍 자기 때문에 집에선 전기를 별로 쓰진 않지만 컴퓨터를 쓰며 일하다보니 낮 시간에는 전기를 계속 쓰게 됩니다. - 앞으로 실험해보고 싶고 바꿔보고 싶은 것들입니다.

 

과연 어떻게 바꾸어갈 것인가 쉽고 즐거운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 요즘의 새로운 궁리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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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청라 이모의 오손도손 벼농사 이야기

[서평] 청라 이모의 오손도손 벼농사 이야기
 
  김하나 (rjadmsdlv)
 
 
 
 

이 책은 지은이 정청라 씨가 첫 벼농사를 지었던 경험담과 화가 김중석 씨의 그림이 어우

러진 동화책입니다. 정청라 씨는 29세 되던 해 시골로 내려갑니다. 전부터 시골에 내려가 농사를 짓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엇던 그녀는 뜻을 함께 하는 친구와 함께, 출판사 근무 시절 알게 된 시인의 소개로 그가 살고 있는 동네로 귀농을 하게 되었습니다. 빈 집을 수리하고, 아기자기하게 농사도 짓고 살림을 하며 시골에서의 생활을 만들어가던 그녀는 지금도 그 곳에서 건강한 살림을 꾸려가고 있습니다. 그런 그녀가 시골에 내려와 첫 벼농사를 지었던 이야기를 책으로 펴냈습니다.

 

  
▲ <청라 이모의 오손도손 이야기> 그림책 표지 청라 이모의 오손도손 이야기 그림책 표지입니다. 김중석 작가의 그림입니다.
ⓒ 김하나
벼농사

 

 

책을 읽다보면 그녀가 경험한 시행착오와 재미있는 에피소드에 웃고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과 어린 아이의 놀라운 통찰력에 감동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씨앗을 준비하기 시작한 4월 15일부터 수확한 햅쌀로 처음 밥을 해 먹었던 11월 21일까지 자신의 경험과 주변 사람들의 도움, 이야기를 세세하고 재미나게 기록하였기 때문에 책을 읽는 사람 또한 함께 농사를 짓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고나 할까요?

 

그녀가 농사를 짓게 된 땅은 초승달처럼 생긴 조그만 논이었기 때문에 '초승달배미'라고 이름을 붙여주었지요. 그리고 초승달이 보름달로 부풀어오르는 것처럼 농부가 되고 싶은 꿈도 그 논 안에서 둥실둥실 부풀어올랐으면 좋겠다고 소망합니다. 마을에는 자연을 닮은 맑은 아이 구름이네 가족, 홀로 총각, 시인 아저씨, 설매실 아주머니, 여성 둘이 귀농한 구들과 마루 언니네 등 여러 분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정청라씨는 실수도 하면서 어르신들로부터 농사에 대한 여러가지를 많이 배우게 되지요. 논에 물을 대는  방법도, 논둑에 두름을 치는 방법도 어르신들 덕분에 알게 되지요.

 

그리고 정청라 씨처럼 기계를 쓰지 않고 농사를 지으려고 했던 홀로 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둘은 벼를 수확할 때가 되자 낫으로 벼를 베고 홀테로 훑는 품앗이를 합니다. 그러다가, 벼를 베던 총각이 논바닥에 볏짚으로 "나랑 가치(같이) 살자"라고 쓰고 나락 다발을 들고 프로포즈를 했다는군요. 초승달배미 논에서 그녀는 40킬로그램 쌀 포대로 한 포대 반을 수확합니다. 쌀을 보며 무엇을 해 먹을까 즐거운 상상을 하던 중 총각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씻나락으로 쓸 건 따로 남겨 둔 거죠?"

"씻나락이요? 먹고 남으면 그걸로 하죠 뭐"

"뭐라고요? 남는 걸로 씨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가장 튼튼하고 잘 여문 걸로 씨부터 챙겨 놓고, 그런 다음 남는 걸 먹어야죠"

 

그래서 그녀는 또 한 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결국 둘은 2009년 4월 동네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을 하고 12월에는 아들도 낳았습니다. 

 

책을 읽다보니 몇 년 전 어떤 한 모임을 통해서 이 책의 지은이인 정청라 씨를 알게 되었던 때가 생각납니다. 당시 그녀는 대안학교의 교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모임을 하던 어느 날 뜻을 같이 하는 친구와 함께 시골로 내려가겠다는 선언을 했는데 그 때 참 신선하고도 부러웠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시골에서의 삶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는 젊은이입니다. 건강한 노동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고, 땅과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게 해주는 친구이기도 합니다. 저는 건강한 노동을 하며 살고 있지 못하지만, 친구를 생각하면서 앞으로 제가 살아갈 삶에 대한 용기를 얻게 됩니다. 

 

벼농사는 청라 씨 뿐 아니라 자연과 동네 사람들이 함께 지은 것이었습니다.그리고 청라 씨는 벼농사를 통해 쌀만 얻은 것이 아니라, 한 끼 밥의 소중함과 마을 사람들의 소중함,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꼈겠지요.

 

수확한 쌀로 처음 밥을 해 먹을 때 일곱 살 구름이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모, 밥은 정말 고마운 것 같아요. 우리한테 밥이 돼 줘서 우리를 살 수 있게 해 주쟎아요. 우리들도 이 밥을 먹으면 밥처럼 착해지겠죠?"

 

정말 밥만 먹어도 밥처럼 착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논농사를 마치고 겨울의 문턱에서 청라씨는 이렇게 생각했답니다.

 

"찬바람이 매서워지는 겨울 문턱에서 나는 자꾸 봄을 떠올리게 돼. 아무것도 모르면서 농사를 짓겠다고 결심했을 때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지. 만약 그 때 두려움을 못 이겨서 논농사를 안 지으려고 했다면 논이 준 수많은 추억과 선물을 놓치고 말았을거야. 논아, 정말 고마워. 널 만나서 난 행복해"

 

이 책을 읽고 나서 저 또한 이웃들과 함께 논농사를 지어보겠다는 마음이 더 확고해졌습니다. 그래서 논농사두레에 참여하기로 했답니다.올해 가을에는 저도 함께 농사지은 쌀 한 톨, 밥 한 그릇을 꼭 먹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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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두레

우습게도

시골에서 일하고 집도 구했으면서

논두레는

광주에 가서 하게 되었다

그런데 4월만 해도 벌써 주말 일이 두개가 있어서 행사를 못 가게 되었다.. 젝힐.

 

그래..나 혼자 의지력으로는 약해서라고.. 

이 곳에서 당장 땅을 구하는 것이 어렵다기보다도혼자라 자신이 없다고..^^

근데 나도 내가 농사지은 쌀 한 주먹이라도 먹어보고 싶고 한 주먹이라도 선물해보고 싶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 주먹이라도 우리 부모님께 드리고 싶어서 맘먹었다.

 

청라는 혼자도 잘 했더만..심술나게... 농사짓다가 반려자도 만났다지? ㅎㅎㅎ 꿩먹고 알먹고...

그래 자기 삶의 기적은 자기가 만들어가는 거야. 놀라운 기적...

 

'청라 이모의 오손도손 벼농사이야기'라는 동화책도 내고 말이야..

참..... 샘나죽겄어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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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하하

카라 '엠비심판' 구호 외치자 이벤트 급종료?
선관위 "욕설 많이 올라와 일단 중단... 다시 이벤트 진행할 것"
10.04.04 15:19 ㅣ최종 업데이트 10.04.04 15:19 최지용 (endofwinter)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가 그룹 '카라'를 홍보모델로 내세워 진행했던 이벤트에 '반MB'구호가 대거 등장하자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이벤트를 중단시켜 논란이 되고 있다.

 

중단된 '투표생각 네 글자로 말해요'라는 이벤트는 이번 지방선거와 관련한 사자성어를 누리꾼들이 올리면 화면 속 카라의 멤버들이 사자성어에 해당하는 글자를 하나씩 들고 외치는 방식이었다. 지난 1일에 시작한 이벤트는 선거일인 6월 2일까지 진행될 예정이었다.

 

이번 이벤트는 선관위가 아이돌그룹 카라를 내세워 젊은 유권자층의 투표를 독려하기 위해 준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벤트의 상품으로는 아이팟 터치, 닌테도 Wii, 영화예매권 등이 걸려 있었고 "자유롭게 네 글자로 말하고 우수작품 추천하고, 행운선물도 받아보세요"라며 누리꾼들의 참여를 독려해 왔다.

 

  
선관위 홈페이지에서 진행된 지방선거 관련 사자성어 만들기 이벤트.걸그룹 카라가 '엠비심판'이라는 구호를 들고 있다.
ⓒ 인터넷화면캡쳐
지방선거

 

 

 

하지만 이벤트가 시작되자 많은 누리꾼들이 '엠비심판', '명박타도', '엠비탄핵', '정권심판' 등의 '반MB'구호를 올리기 시작했다. 또 누리꾼들이 올린 글이 그대로 반영이 되고 있어 일부 내용에는 비속어나 욕설도 섞여 있었다. 이런 상황을 예상치 못한 선관위는 이벤트를 시작한지 3일만인 지난 3일 오후 급하게 이벤트를 종료시켰다.

 

누리꾼들은 선관위 이벤트에 대해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누리꾼 아이디 'chan2030'은 "카라가 선관위 덕에 개념 아이돌 인증 받았다"며 치켜세웠고 아이디 'lazy2010'도 "'반독재도 카라를 따라!'라고 외치는 삼촌팬"이라며 응원했다.

 

아이디 'diesel290'은 "역시 선관위, 카라와 함께 하는 사자성어 이벤트에 국민의 목소리가 나오자마자 종료... 답이 안 나온다"며 선관위의 급작스런 이벤트 중단을 비판했다.

 

이벤트가 진행되던 사이트는 "준비에 미진한 부분이 있어 이벤트가 예고 없이 종료된 점 사과 말씀드립니다"라는 선관위의 사과문만 팝업창으로 뜰 뿐 페이지를 열어 볼 수 없게 되어 있다. 누리꾼들은 선관위의 사과문에 "그럼, 추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라고 적혀 있는 것을 지적하고 "더 재미있는 이벤트가 있나보다"며 기대를 감추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선관위는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이벤트에)욕설이나 비속어 등이 많이 올라와 일단 중단시켰다"며 "앞으로 적절한 방안을 강구해, 이벤트를 다시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벤트가 진행되던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선관위 사과문.
ⓒ 인터넷화면캡쳐
지방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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