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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짐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것이 태반이다. 짐을 지는 것으로 사랑이 가늠되기도 한다. 아무 짐도 지지 않는다는 것은 타인에 대해 의무도 책임도 안 지려는 태도이다. 때문에, 짐을 무조건 가볍게 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그것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일 뿐, 무거운 짐을 질 수 있는 영육의 능력을 키우는 것이 짐을 벗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다. - 꿈꾸는섬
김동리와 결혼을 하고 나서도 나는 한 번도 내가 그의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호적상에 엄연한 그의 세번째 아내였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여자가 아니었다. 수많은 날들 저편에서 그는 항상 내 사는 집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린 감춰진 남자였다.
(…) 김동리를 만난 지 3년째 되던 어느 해 정월, 교통이 끊길 정도로 눈이 많이 내렸다.
나는 김동리의 수필집을 보다가 연인을 그리워하는 한시(漢詩)를 인용한 부분이 너무 좋아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 공중전화로 가서 전화를 했다. 손소희 선생님이 전화를 받았다. 그냥 끊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끓어오르는 그리움을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생각다 못해, 그 시를 종이에 써서 봉투에 넣어가지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용두동에서부터 신당동까지 걸어서 가는데 눈이 어찌나 많이 쌓였는지 걸음을 옮기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마침내 김동리의 집 앞에 이르렀을 때는 조금 이르긴 해도 외등이 켜져 있었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틈에 나는 외등 전봇대 밑의 눈을 파헤치고, 또 흙을 파헤치고 가지고 간 봉투를 거기에 파묻었다. 그리고 나서 다시 흙으로 덮고, 눈으로 덮고 나서 되돌아섰다. ‘이 담장 안에 내 연인이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가는데, 내 발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어, 그때 마침 손소희 선생님이 밖으로 나와 본다면, 어떤 발자국이 문 앞에서 끊긴 것을 수상하게 여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가는 길에 공중전화를 보고 안으로 들어가서 전화를 했다. 다행히 그분이 전화를 받았다.
“제가 지금 집 앞 전봇대 아래 편지를 파묻어놓았으니 나가서 보세요.”
“알았어.”
하는 목소리가 이미 한 옥타브 높아져 있었다. 나는 그분이 그 봉투를 눈 속에서 파내서 꺼내어본 소감을 그 다음날 회사에 출근한 뒤에야 들을 수 있었다. 자취방에 전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322~325쪽)
그는 스스로 “나는 김동리란 거물의 온갖 것들, 그의 갈증, 외로움, 정염, 모순, 인색함 등 온갖 인간적인 것들을 붙잡고 씨름해온 사람”이라고 말한다. 쉽사리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사람에게 곁을 주지 않는 것은 남편 김동리가 그에게 남긴 유산이다.
산티아고 길 위에서 길었던 김동리와의 사랑과, 그에 반해 너무도 짧았던 아내로서의 삶을 고통스럽게 또 행복하게 회고한 그는 서울로 돌아와,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김동리의 유품과 그가 남긴 문학자료들을 모두 기증했다.
- 어떤 만남이든 다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다. 추억, 기억 말이다 -
나는 어떤 거짓된 감정으로 나를 위장하고 있는지 잘 살펴볼 일이다.. ^_^
연민
연민의 감정은 두려움, 분노, 슬픔, 그리고 기쁨의 과실로서 온다. 그대가 일상에서 이 두려움, 분노, 슬픔, 그리고 기쁨의 감정들을 알아차릴 때, 그대는 비로소 다른 사람의 삶에서 그 감정들에 공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정확히 필요로 하는 것을 주기 시작한다. 연민은 무조건 상대를 껴안아주는 그런 것이 아니다. 때때로 그것은 상대방의 뺨을 때리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연민은 필요한 것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줄 만큼 충분히 초연해졌을 때, 비로소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이다.
그대는 물론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기쁨,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대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감정이 그대를 그들과 연결시켜준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대가 정말 연민의 마음을 갖고 있다면, 사람들이 그대의 마음을 힘들게 할까봐 저어할 때에도 그대는 그것을 느끼고 그들의 두려움을 자기것처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대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투사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비로소 진정한 연민의 감정을 갖게 된다.
1970년대초에 배우들과 작업을 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들에게 5가지 감정을 표현하도록 요구했다. 그때 나는 무척 놀랐다. 그들은 전문적인 배우들이고,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표현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 모두 5가지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의 감정의 진부한 틀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 보았다. 우리 모두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을. 제대로 자기 감정을 살지 못한다는 것을. 자기 감정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것을....
그들이 가장 표현하기 힘들어했던 것은 연민이었다. 그들 모두 다른 이들의 불행에 눈물이 메마른 듯이 보였고, 동작도 틀에 박힌 행동이었다.
연민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인정하고 그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연민은 카멜레온과 같다. 연민은 그때그때 상황의 필요에 따라 두려움의 표정을 지을 수도 있고, 분노, 슬픔, 기쁨, 심지어 낙담의 표정을 지을 수도 있는 그런 것이다. 그래서 카멜레온 같다고 하는 것이다. 연민을 느낀 부처는 한눈에는 미소를, 한눈에는 눈물을 지었다고 한다. 부처의 임무는 사람들의 손을 잡고 모든 게 다 잘 될 거라고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진정한 자유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부처의 가르침 속에서, 연민은 상대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그에게 필요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무엇이든.
연민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는 이런 것이다. 연민은 다른 사람들의 처지에 대해 미안한 감정을 갖는 거라는. 하지만 그런 감정은 단순한 센티멘탈리즘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동정을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 오히려 참된 연민은 다른 사람들이 처한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뭔가를 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때로는 거짓말일 수도 있고, 잘 될 거라는 장밋빛 위로일 수도 있고, 힘들어하는 부분을 대신 떠맡아서 챙겨주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연민의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자비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연민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한번은 워크숍에서 참가자들을 다섯 가지 감정 중에서 자신에게 맞는 한가지 감정의 그룹에 들어가도록 나누어본 적이 있다. 그들 중 절반이 연민의 그룹 쪽을 선택했다. 분노의 그룹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좋아요. 그러면 연민 그룹에 든 사람들은 이제부터 모두 분노의 그룹에 들어갔다고 생각하기 바래요.” 그러자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전 화나지 않았어요! 전 분노의 그룹에 속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뾰루퉁한 표정들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분노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때때로 연민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함께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한번은 내가 가르치는 맛사지 과정에서였다. 한 여인이 맛사지 테이블 위에 누운 채 히스테릭하게 느껴질 정도로 슬피 울기 시작했다. 그녀의 파트너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몹시 당황했다. 그들은 모두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그들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고통의 감정이 스쳐갔다.
나 역시 그녀의 목소리의 어떤 톤과 그녀의 전신에서 느껴지는 어떤 에너지의 진동이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막았다. 언짢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위로했으며, 그녀의 울음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미소지었다. 그들은 내게 물었다. 왜 선생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계시냐고. 그리고 왜 그녀에게 다가갈 때 선생님한테서 한기가 느껴지는지 모르겠다고. 그녀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 느껴지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마침내 내가 말했다. “그건 아주 간단해요. 그녀가 슬피 우는 건 진짜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여러분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시험해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그녀의 의지가 너무도 강하다는 거예요.”
살다보면 종종 이런 일과 마주하게 된다. 내 경험으로 보자면, 누군가 정말 고통스러워한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그를 위로하고 싶어진다. 내가 아직 젊고 겁이 많았을 때, 에살른에서 있었던 또 다른 경험이 생각난다. 그때는 우연히 어떤 그룹과 만나 처음으로 그룹활동에 참가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목욕탕 욕조 안에 앉아있었다. 그때 갑자기 한 여인이 큰소리로 격렬하게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7년전에 죽은 남편이 생각나 울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자리에 있는 우리가 모두 욕조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 그녀는 아래쪽에 있는 탕 속으로 들어갔다.
리더가 그녀에게 욕조 안을 빙 돌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그녀가 자기 앞에 오면 그녀를 위로해주라고 했다. 우리는 한사람씩 그녀가 자기 앞에 올 때마다 탕 속에 들어가 그녀를 꼭 껴안아주었다. 그녀는 구슬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내가 맨 마지막 차례였다. 그녀가 내 앞에 왔을 때 나는 왠지 그녀가 자기연민에 빠져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는 내게 도움을 청했다. 그때 마음속에서 다음과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물론 도와드릴 겁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내게 오길 바래요. 당신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은 왠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이는군요. 오직 당신이 내게 오실 때만 나는 당신을 도와드릴 수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내가 거칠고 차갑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녀가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뭔지 알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얼핏 그녀의 영혼을 들여다보았고, 그녀는 그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내쪽으로 움직여왔다.
위의 두 가지 경우에서, 연민의 마음은 그들이 있어야 할 본래의 자리에 있게 하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연극에 동조할 마음이 없었다. 정말로 필요한 것은 그들의 손을 잡아주는 것보다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그때 그들은 비로소 또 다른 광장으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상황이라면 정확히 껴안아주고, 위로해주고, 그들이 힘을 낼 수 있도록 옆에서 친구가 되어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대가 정말 연민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대는 값싼 동정보다는 그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그래서 변화에 맞설 수 있도록 인도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미망인이 아무런 희망없는 슬픔의 심연 속에 빠져 있다면, 단순히 그녀를 위로하기보다는 그녀가 그곳에서 나올 수 있도록 인도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녀가 슬픔을 딛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연민은 누군가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 - 그것이 늘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 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그대가 슬픔에 빠져있는 어떤 남자와 함께 있다고 해보자. 그에게 이제 그만 슬퍼하라고 말하는 것은, 그만큼 슬퍼했으면 됐다고 말하는 것은 연민이 아니다. 만일 정말로 됐다면 그는 그대의 말이 아니라더라도 슬퍼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그에게 자신의 슬픔의 핵심을 느끼도록 해주는 것이 최선이다. 그가 그 슬픔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그 슬픔을 온전히 겪어야 한다는 깨닫게 해주는 것이 최선이다. 결코 우회하거나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 최선이다. 그대가 그와 함께 울어주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들 주위에는 거짓된 연민 - 윤리적 의무감이 없는 감상적 센티멘탈리즘이 - 이 만연해 있으며 또한 지나치게 냉정하거나 심장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널려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지나치게 무감각한가 하면, 너무도 쉽게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반응하거나 그로 인해 상처를 받는다.
어느 날 나는 뉴욕에서 워크숍을 하는 동안 잠시 짬을 내어 길을 건너 던바의 카페테리아에 갔다. 그곳은 매달 정부에서 주는 고정수입으로 사는 6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그 지역의 대표적인 장소였다. 나는 친절하게 생긴 한 노인의 뒤에 줄을 섰다. 그는 주의깊게 으깬 감자와 배, 시골치즈, 그리고 제너럴 푸드사에서 나온 젤로를 고르고 있었다. 그것이 그가 매일 먹는 주메뉴 같았다. 그는 계산대에 가더니 점원에게 몇 번이나 다음과 같은 말을 반복했다. “어느 날 새 메뉴가 나올 거라고 믿고 있지. 그런데 도대체 변화가 없어. 똑같애. 물론 나는 원치 않아도 그걸 좋아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내가 들고 온 게 값이 맞지?” 점원은 정면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요. 그건 5불 49전인데요. 다음 손님요!”
그 노인은 몹시 당황하듯, 비틀거리며 내내 혼자 앉아있던 테이블로 돌아갔다. 그가 원한 것은 오직 작은 미소와 다정한 말이었다. 그러나 점원은 그걸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그녀의 에너지를 소모할 뿐이라는 듯이.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녀가 매일 만나는 ‘외로운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대하는 것보다 그처럼 돌처럼 무표정한 표정을 짓는 것이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한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감정은 연료와 같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을 소모하거나 사용하거나 남에게 주어버리면 곧 고갈될 것이라는 듯이. 그러나 이 에너지는 사용하고 나면 고갈되어 버리는 일용품이 아니다. 우리의 몸 속을 흐르는 피처럼, 우리의 감정 또한 흐르고, 사용될 필요가 있다. 그때 그것은 스스로 재충전되고 우리의 삶을 건강하게 해줄 것이다. 감정적 에너지를 사장해두는 것은, 댐에 가두어두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다치게 할 뿐이며, 궁극적으로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계산대의 점원은 외로운 노인에게 그가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을 주기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그의 하루를 따뜻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인간적인 온정을 주기를 거부했다. 그녀는 자신을 감정의 시체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최근의 심리학적 연구는 보여준다. 친절하게 굴면 생리적으로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몸에 활력이 넘치게 되고, 가슴의 어두운 에너지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는 것을.
물론 모든 사람의 주의에 반응할 필요는 없다. 개중에는 좋지 않은 감정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워크숍에서 한 여성이 내가 하는 모든 것에 끼어들어 사사건건 반대를 했다. 그녀의 목적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하려는 것이었다. 상황이 명확해지자 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원을 만들게 한 다음 그녀를 가운데에 세웠다. 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 당신은 우리 모두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때때로 연민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함께 나누는 것을 포함한다. 성난 아이에게 최상의 것은 그의 분노를 다른 데로 돌리거나, 내려놓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분노를 억제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아이의 분노에게 기회를 주고, 스스로 확인하게 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대는 몹시 당황하거나 아이보다 더 성이 나서 펄쩍펄쩍 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의 동료나 애인, 아이들, 또는 친구들로 하여금 그들의 감정을 숨쉬게 하고 적절한 표현을 찾도록 도와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이다. 연민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감정 속에 들어가 그들의 닫혀져 있던 감정의 문을 활짝 열고는 위장된 감정의 베일을 걷어내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많은 가족에서 어떤 감정은 허용되고 어떤 감정은 허용되지 않는 것을 본다. 내 남편의 경우에 분노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 표현은 신성한 것이다. 그와 그의 가족은 분노를 드러내는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가족에서 분노를 드러내는 것은 금기시되었다. 대신 슬픔은 표현하도록 허용되었다. 그래서 나는 내 남편의 분노에 놀라지 않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낯선 감정을 서로에게 가르쳐야 했고 인정하게 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슬픔을 받아들이고, 나는 분노를 인내할 수 있도록.
정말로 건강하고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며 다양한 관계가 지속되게 하려면 이런 종류의 교환도 필요하다. 이러한 교환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 주위에 있는 그 많은 관계들이 너무도 쉽게 지루해지고, 실패로 끝나게 되는 이유이다. 관계의 생명의 핏줄은 억제와 부정의 덩어리들에 의해서 동맥경화가 일어난다. 우리의 창조적이고 건전한 삶의 에너지는 바로 이런 회피의 끊없는 소모적인 전략들에 의해서 사그라드는 것이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연민은 텅 비워진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그대가 상대방의 감정의 진실에 마음의 문을 열 때 그대 역시 그대의 과거의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연민은 텅빈 그릇과 같다. 만일 그대가 그것을 두려움으로 채운다면, 다른 사람들의 두려움을 제대로 담을 수 없게 된다. 오직 그대가 세련되게 조율된 감정의 도구일 때만, 그대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의 서정시가 되고, 노래가 될 수 있다. 만일 그대가 진정으로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느낀다면, 그대는 해결되지 않은 두려움과 분노, 슬픔의 왜곡된 필터를 통해서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 순간에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반응할 것이다.
연민은 텅 비워진 감정이다. 바로 그 텅 비워진 감정으로부터 온갖 감정이 흐를 때 그대의 역동적인 고요함이 모든 삶의 에너지의 근원이 될 것이다. |
기사입력 2010-05-03 오전 9:04:39
▲ 여주군 여주읍 단현리 일대의 강천보 공사 현장의 모습. ⓒ4대강범대위 |
▲ 금사면 이포리의 이포보 공사 현장 모습. 뿌연 탁수가 보인다. ⓒ4대강범대위 |
▲ 이포보 건설 현장에서 나온 탁수가 강 본류로 유입되는 모습이 선명하다. ⓒ4대강범대위 |
▲ 여주보 건설 현장의 모습. ⓒ4대강범대위 |
▲ 신륵사 맞은편에 위치한 금모래은모래강변의 모습. 준설 작업을 위해 강을 가로질러 만든 가물막위 둑 위로 작업 차량이 오가고 있다. 공사장에서 형성된 흙탕물은 양수기를 통해 남한강 본류로 배수된다. ⓒ4대강범대위 |
▲ 금모래은모래강변의 모습. 시민들의 휴식처였던 이곳이, 밤낮으로 진행되는 골재 채취로 인해 파헤쳐졌다. ⓒ4대강범대위 |
▲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백석리섬 상공에서 내려다 본 당산제의 모습. 준설 작업의 일환으로, 강을 가로질러 가물막이 둑이 설치됐다. 사진 우측 아래 탁수를 퍼내기 위한 양수기가 보인다. 사진 왼쪽 상단의 내양지구 준설 현장에서는 얼마 전 1000여 마리의 물고기가 집단 폐사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4대강범대위 |
▲ 역시 준설 작업이 진행 중인 도리섬 일대의 모습. 가물막이둑 왼편으로 뿌연 탁수가 남한강 본류로 흘러들고 있다. ⓒ4대강범대위 |
▲ 도리섬 준설 현장의 모습. 도리섬은 환경영향평가에서 누락돼 논란을 빚었던 단양쑥부쟁이와 표범장지뱀의 자생지이다. ⓒ4대강범대위 |
▲ 바위늪구비습지의 모습. 버드나무 군락이 사라지고, 굴삭기 등 중장비 기계가 지나간 흔적이 흉터처럼 깊게 패였다. 이곳은 세계 유일의 휘귀 식물이자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야생 동식물 2급인 단양쑥부쟁이의 대규모 생육지이기도 하다. ⓒ4대강범대위 |
▲ 여주군 여주읍 연양리 인근 이호대교 하류의 준설 현장의 모습. 강바닥 준설 공사로 인해 드러난 하천 바닥의 고압 가스관(LNG)을 새롭게 매설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4대강범대위 |
예전에 하던 일 하면서 썼던 글들
내가 쓴 건 위의 설명 뿐이고 해석은 문화원장님께서 ㅋㅋ
요거 해석요청하러 다니는 과정, 그래도 재미있었다
집을 지으며 담았던 마음
원운교마을에 살고 있는 전진기 씨는 약 4년 전 예전 집터를 허물고 새로 집을 짓는 과정에서 상량문을 발견하였다. 전진기 씨는 이 상량문을 표구하여 집에 보관하고 있다.
상량이란 기둥에 대들보를 얹고 그 위에 처마도리와 중도리를 걸고 마지막으로 마룻대를 옮기는 일을 말하며 상량을 올리는 날 고사를 지내는데 아래의 문서는 고사를 지낼 때 읽었던 상량고사축문이다.
이 상량문이 작성된 시기는 1817년이며 작성자는 정동기라는 분인데 이 분이 자신의 집을 짓는데 상량문을 직접 작성했는지 아니면 남의 집 짓는데 상량문을 대필해 주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축문에는 백운과 마령 일대의 지명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 중 내동산의 과거 한자표기가 萊東山이 아닌 內洞山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상량문 내용으로 보아 상당히 큰 집이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상량고사축문
維
歲次 丁丑七月癸卯朔十九日辛酉
때는 정축년(1817년) 칠월(초하루 간지는 계묘) 십구(신유)일 (양력으로는 8월 13일)에
幼學 鄭東起 敢昭告于 后土土地神 今營新基建屋宇于日吉辰良 玆以上樑
유학(벼슬하지 않은 유생) 정동기는 삼가 토지신께, 이번 집짓는 공사에 일진이 좋아 이에 상량함을 고하나이다.
述夫 무릇
地已平矣 爰及經始之功 材旣良哉方建棟樑之美
대지는 이미 고르고, 이제 일을 경영하려 하니, 좋은 재목과 동량들이 준비되었습니다.
吉宿照臨之地 福神下降之辰
길성이 비치는 터, 복신이 내리는 때에
惟我 생각하니
舊基移居 家業新創
옛터에서 이거하여 가업을 새로 일으키면서,
美地初奠乃相土地之宜 嘉慶恃期爰占福祿之永
좋은 땅에 먼저 제사지내고 토지의 길흉을 판단해보니, 경사스러움을 믿고 이에 복록이 영원할 것을 점지하나이다.
地靈鍾異下臨百尺之雲橋 天極垂光上照一片之營室
지령이 뭉쳐 백척을 내려와 운교(리)에 이르고, 천극의 광채가 드리워 한조각 영실(건축지)을 비춥니다.
乃營慶(결)之建 爰選工(결)之良 ->
이에 멋진 집을(?) 지으려 함에, 솜씨 좋은(?) 목수를 골라 놓고,(훼손으로 판독이 불가능한 한자가 있어 해석이 미흡함)
礎繡方花已運泰山之玉石 樑掛雲漢爰來遠方之梓桐
방화무늬 주춧돌은 태산의 옥석으로 이미 실어왔고, 대들보에 걸칠 건자재(은하수)는 멀리서 온 가래나무와 오동나무랍니다.
種大德於先世擬高大之于閭 望餘慶於後孫期挑李之狄檻
선대에 대덕을 심고 우공(중국의 인물)의 집과 같은 높고 큰집을 짓는 이유는, 후손들이 경사스럽게 적인걸(중국의 인물)의 도리화원같은 누각을 꾸미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貴則曰卿曰相 富則乃積乃倉
벼슬하게 된다면 공경이나 승상일 것이며, 부자가 된다면 (재물이) 창고 가득이 쌓일 것입니다.
翬飛詹簷末耀壯居之門欄 鷰語簾前賀新成之棟宇
처마 끝은 마치 날아갈 듯 하고, 집은 웅장한데, 제비들은 지지배배 주렴 앞에서 새집 짓는 걸 축하합니다.
夢於霄夢於畵 惟熊惟羆, 寢于地寢于床 弄璋弄瓦
마치 하늘에 있는 양, 그림 속에 있는 양, 꿈꾸며, 오순도순, 바닥에서나 침상에서나 뒹굴며 아들딸 낳고 살으리니
榱桷秩秩 子孫綿綿
서까래는 가지런하고 자손들은 면면할 것입니다.
堂廡向陽人莫及於高明之德 丙峰尖筆世不乏於文士之名
큰집이 양지를 향하니 사람들의 고명지덕이 미치는 않는 곳이 없고, 남쪽(병방)에 문필봉이 뾰족이 솟았으니 문사의 이름이 대대로 줄지 않으리오,
傳之子傳之孫自千世而萬世 居斯土居斯室乃有始而無窮
전하고 또 자손에 전하여 천만세를 이 터와 이 집에 살게 되어 무궁할 것입니다.
抛樑東 (註 : ‘포량’은 들보가 울리는 소리를 의미하는 관용어.)
동쪽 들보 울리니
馬耳峰頭淑氣浮 爲誰雙尖如許立 精神淸爽揷雲留
마이산 봉우리에 맑은 기운이 뜨고, 누구라 뾰족한 두 봉우리 세웠는가, 정신도 상쾌하게 구름 속에 꽂혀있네.
抛樑南 남쪽 들보 울리니
德泰山光垂且奇 美峙村前連地脈 諸峰羅列似孫兒
덕태산 빛이 드리우니 그 또한 기이하다. 미재마을앞 지맥이 이어져, 여러 봉우리 나열한 모양이 마치 손자들 같구나.
抛樑西 서쪽 들보 울리니
內洞山前水抱回 其上鍾生佳麗地 依然金谷好樓臺
내동산 앞 물이 휘감아 도는 가운데, 그 위에는 아름다운 땅이 맺혔고, 금곡의 멋진 누대는 의구하네.
抛樑北 북쪽 들보 울리니
地闢名區是馬靈 多小村家回首處 山光水色繞門欞
땅이 트여 보이느니 이름하여 바로 마령이로구나. 크고 작은 촌가들 고개 돌리는 곳, 산빛과 물색, 창문을 두르네.
抛樑上 위쪽 들보 울리니
上有銀河一帶橫 風起天街雲歸盡 吉星垂影夜三更
하늘에는 은하수가 걸쳐있고, 바람이 하늘에 일어 구름을 밀어내니, 길성이 그림자를 드리워 야삼경일세.
抛樑下
아래쪽 들보 울리니
簾滴靑山若有情 生色門閭千萬載 承承繼繼好家聲
주렴에 청산의 흔적 만약 유정하다면, 집안 문려 천만년 생기가 돌고, 좋은 가문 이어가리.
[축문해석 자문 : 진안문화원장 최규영]
유물․유적과 사람-오래된 물건을 통해 본 백운의 옛 생활사
상백암에서 마을 내 혼례식 때 사용하였던 혼례복 및 물품
상백암 마을에서는 마을 내에서 혼례를 치를 때 입었던 혼례복을 궤짝에 담아 보관하고 있다. 마을에서 혼례를 치를 때 이 옷을 입고 결혼을 하였으며 약 30여년 전까지 사용되었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천이 구겨지고 해지고, 구멍이 나 지금은 입을 수 없다. 혼례복이 만들어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궤짝은 적어도 100여년 이상 되었다고 한다.
주로 큰 마을들을 중심으로 마을에서 혼례복을 장만하여 사용하였으며 이웃마을인 중백암과 백운동에서도 상백암의 혼례복을 빌려 이용하였다고 한다. 궤짝 안에는 신부 혼례복인 신부가 입던 원삼과 족두리, 신랑이 입는 혼례복이었던 사모관대와 신발, 나무로 만든 기러기가 보관되어 있다. 관리는 이장이 담당하고 있다.
지금은 일반적으로 예식장에서 결혼을 하지만 30여년 전까지만 해도 마을에서 혼례를 올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중매쟁이(중신애비)를 통해 양쪽 집안의 부모가 선을 보고,궁합을 본 후 혼사를 결정하고, 신랑과 신부는 혼례를 올리는 날 처음 얼굴을 보았다. 중매를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 마을에 있거나, 주변의 아는 이, 친척이 중매를 서서 결혼이 성사되었었다. ‘중신 셋만 하면 죽어서 천당을 가지만 잘못하면 뺨이 석대’라고 한다. 중신애비에게는 사례로 ‘중채’를 주었는데 주로 음식이나 옷 한 벌을 주었다고 한다.
혼담이 결정되면 중신애비 편에 신랑 측에서 신부 될 사람의 집에 ‘사성보따리’를 전해 보낸다. 사성보따리는 비단으로 만든 보자기로, 그 안에 사성(생년월일시)을 적은 사주단자와 옷 한 벌이 담겨 있었다.
신부는 사성보따리를 받아서 고이 모셨다고 한다. 치마폭으로 받아안아서 방에 쌀을 떠놓고 고이 모시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사주단자를 일종의 결혼서약과 같은 것으로 사주단자가 오고가면 결혼을 물릴 수가 없었다
신부 집에서는 사주단자를 받은 후 답장을 보냈는데 신랑 집과 신부 집이 거리가 멀거나 하는 이유 등으로 신부집에서 사주단자 답장을 보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결혼식은 처가에서 치르는 것이 관례였으나 처가가 가난한 경우에는 경제적 부담을 우려하여 신랑 집에서 결혼식을 치루기도 하였다.
한 동네 혼사는 옛 사람들의 말로는 “3대 적선을 해야 한동네에서 결혼헌다”는 말이 있을만큼 덕을 쌓아야 이루어지는 것이었다고 한다.
신삼주씨
신삼주씨
상백암 태생인 신삼주씨는 18세가 되던 1939년 한 동네에 살던 故 박동곤씨와 결혼하였다. 당시 신랑은 19세였고 마을에서 길을 오고가며 얼굴은 보았지만 이야기를 나누어본적은 없었다. 결혼식은 처가인 신삼주씨의 집에서 올렸다. 중매는 당시 마을에 살던 양씨 성을 가진 이가 섰으며, 혼담이 오고 간 후 신랑 집에서 ‘사성보따리’가 신부 집으로 왔다. 그 안에는 생년월일시를 적은 사주단자와 초록저고리와 빨간 치마 한 벌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사성 보따리는 ‘비단으로 만든 빨간 보자기에 남색으로 수실이 달렸었다’고 신삼주씨는 기억했다. 그리고 신랑 집에서 택일을 하여 결혼식 날짜를 9월 어느 날로 정했다. 결혼식 하루 전날 함잽이가 함을 메고 왔다. 함잽이는 자식들이 잘 장성하는 등 팔자가 좋고 복이 있는 사람이 메도록 했었다고 한다. 함잽이가 메고 온 함에는 비녀와 반지 등 신랑이 보낸 혼수가 들어 있었고 함이 들어오는 날은 함잽이를 위해 신삼주씨의 집에서는 음식을 준비해 대접했다.
주천 태생으로 신삼주씨의 동생인 상백암 태생 신영진씨와 결혼하여 함께 살고 있는 박오목씨는 자신의 결혼식 하루 전 함이 들어오던 날의 풍경을 설명해주었다.
“결혼식 전날 (함잽이가) 함을 짊어지고 들어와. (함 안에는) 옷감 들었지. 명주베도 나서 보내고 비단도 보내고. 세 벌 보낸 사람도 있고 일곱벌 보낸 사람도 있고. 나는 세 필 받았어. 명주비단 물들여갖고 곱게 뚜드려서. 물들여갖고 뚜드리믄 비단이나 같으지. 글고 치마 저고리 떠서 두벌허고 가락지허고 비녀허고 (받았어)‘함 사시오, 함 사시오.’얼굴에다 뭐 발라. (그리고) 마른 오징어 썼지. 싸무락(싸립문) 앞에서부터 막 들어오라그믄 못 들어오고 돈을 줘야 들어와. 속에다 돈을 넣어서 그 놈 밟고 들어와. 쬐깨 넣고 안 넣으믄 안 들어와. 새기고 저 밑에가 있어. 있으면 자꾸 시달리믄, 돈을 놔 주믄 들어와. 들어와갖고 함 벗어놓고 먹고 가. 함 받는 날 밥이랑 반찬이랑 잘 히 놔. 그 사람들 먹고 가라고. ”(박오목)
결혼식 날, 신랑은 가마를 타고, 나무로 만든 기러기 한 쌍을 든 사람과 가족 등을 동행하여 혼례를 치르기 위해 처갓집으로 온다. 이 때 신랑과 함께 오는 행렬을 ‘상객’, 신부에 딸린 행렬은 ‘요객’이라 불렀다 한다. 결혼식을 다른 말로 ‘행례’를 치른다고도 하며 결혼식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신부 집 마당이었다. 그곳을 ‘초례청’이라 불렀고 초례청에는 ‘행례상’을 차렸다. 결혼식 시간은 신랑과 신부의 궁합에 따라서 정했다고 한다. 볕을 가리기 위해 ‘채알’(일종의 천막)을 치고 상 뒤에는 꽃그림이 그려진 열두폭 병풍을 쳤었다. 상 양쪽으로 청사초롱을 불밝혀두었는데 불이 꺼지지 않아야 신랑신부에게 좋은 징조였다고 한다.
행례상에는 양쪽에 화병을 두고 화병 안에 꺾은 대나무 가지를 꽂아 둔다. 그리고 입에 대추를 물린 명태와 잉어모양으로 장식한 무의 입에 대추를 물린다. 대추를 물리는 것은 대추가 ‘씨’를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쌀 한 대접을 퍼서 초 두 자루를 꽂아 불을 밝히고 청실홍실로 술병을 둘렀다고 한다. 술은 청주를 마셨으며 술병과 술잔, 퇴주잔을 두었다. 대추,곶감,밤 등의 과일도 상에 올렸다. 그리고 신랑 측에서 전달받은 기러기 한 쌍을 서로 마주보게 상에 올린다. 상 아래에는 장탈과 암탉을 한 마리씩 두었는데 장탉이 울면 신랑신부에게 좋고, 모든 살을 물리친다는 ‘뱅이’의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신부는 방 안에서 대기하고 신랑은 문 밖에서 대기한다. 신부의 시중을 들기 위해 따라온 이들을 ‘우수각시’라고 하는데 우수각시가 양쪽에서 신부를 부축한다. 각시는 신랑을 못 보도록 긴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신랑도 얼굴을 가리는 도구를 들어 서로 얼굴을 못 보게 한다.
결혼식 순서를 적은 종이를 홀기라고 하는데 홀기는 학식 있는 사람이 쓰고, 결혼 사회를 맡았다. 사회자가 “신랑 출!” 하면 신랑이 문 안으로 걸어 들어와 서서 동서남북 방향으로 절을 한다. 이후 “신부 출!” 하면 신부가 방에서 나와 선다. 먼저 기러기를 전달받아 상에 올리고 신랑과 신부는 대야에 떠놓은 물에 손을 씼었다. 그 다음 신랑이 먼저 1배를 하면 신부가 2배를 하고 다시 신랑이 1배를 하면 신부가 2배를 한다. 이후 잔에 술을 따라 서로 나누어 마신다. 신부가 술을 따라 입에 대고 조금 마시다가 상 위로 신랑에게 잔을 주면 신랑이 받아서 마시다가 상 밑으로 신부한테 잔을 준다. 이렇게 세 번을 술을 나누어 마신다.
손님 중에 아이를 밴 여자가 있을 때는 아이를 잘 낳기를 바라며 좋을 호(好)자를 의미하는 뜻으로 호박을 어깨 너머로 던지기도 하였다고 한다.
결혼을 위해 신부집 식구들과 마을 사람들이 함께 음식을 준비하였고 결혼식에 온 손님들은 축하선물로 ‘국수 한 뭉텡이’, ‘달걀 한 줄’을 가지고 오거나 천원, 이천원을 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결혼식을 치르는데 도와준 마을사람들에 대한 답례로 신부 집에서는 결혼식이 끝난 며칠 후 마을사람들에게 별도로 음식을 대접하였다고 한다. 혼례 전에 신랑 될 사람 집에서 이바지 음식을 해서 보내면 결혼식 날 신부 집에서 신랑 집에 이에 대한 답례로 이바지 음식을 해서 보낸다. 이바지 음식은 셋 혹은 다섯 동고리, 이처럼 홀수로 맞추어서 하는 것이 풍습이었다. 신삼주씨는 인절미, 백설기, 돼지다리, 유과, 흰 떡을 해서 교환했다고 한다. 이렇게 음식을 주거니받거니 해서 먹는 것을 ‘퇴상’이라 한다고 한다. 신부 집에서는 혼례를 치르는 날 입떡치기, 입막이떡 이라 부르는 것을 행하는데 시집살이를 호되게 시키지 말아달라는 의미이다.
“장가드는 날 큰애기 편에서 입막이떡을 인절미를 해서, 시어머니입에다 틀어막어. 각시 숭도 보지 말고 총각 숭도 보지 말아라는 뜻이여.”(신영진)
행례가 끝나면 각시방, 즉 신방으로 신랑과 신부가 들어와 주안상을 차려놓고 마주앉는다. 이 때 친척들이 신랑신부에게 장난을 걸기도 한다고 한다. 날이 어두워지면 첫날밤 치를 준비를 하는데 이때 동네사람들이 문구멍을 뚫어 엿보았다. 신부가 신랑의 사모관대를 먼저 벗겨주는 것이 관례였다고 하는데 신삼주씨는 부끄러움을 타서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결혼 첫날 밤 동네사람들이 문구멍을 뚫어 안을 들여다보는데 ‘큰애기가 몰래 샛서방(결혼전에 몰래 만나던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이 찾아와서 까닥허믄 사고를 낼까봐 못들어오게끔 보고 내우(내외) 간에 비밀로 얘기한 것도 좀 듣고자’하는 이유였다고 한다.
결혼식을 올리고 1년이 지나 설을 쇠고, 그 해 가을 농사지은 것을 가지고, 즉 설을 쇠어야 근친(친정부모를 뵈러 찾아뵙는 일)을 가는 것이 당시 풍습이었지만 신삼주씨는 친정이 한 동네였기 때문에 근친을 가기 전에도 가끔 친정식구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3일만에 재양을 가지 못하면 3년이 지나야 근친을 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결혼식이 끝나면 하룻밤을 처가에서 지내고 다음날 신랑과 신부는 가마를 타고 시댁으로 가서 폐백을 드리고 3일 후에 신부 집으로 ‘재양’을 간다. ‘재양’을 갈 때는 신부 집에서 신랑․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신랑 집으로 사람을 보냈다. 이 때에도 음식을 해서 가지고 간다. 도착하면 친척,동네 사람들이 신랑을 다루는 ‘동상리’를 하였다고 한다.
“처갓집에서 신랑을 달아 먹어. 돈 내라고, 친척들이. 서로 똑같이 너도 어른이 되었다 해서 한 가지 동이라 해서 동상린가...? 우리 동네로 장가왔응게 술 한잔 내라 하고 사랑방으로 데리고 가서 요구를 혀. 돼아지 한 마리하고 뭣을 내라. 신랑이 좋게 낸다고 허믄 좋지만 신랑이 ‘없다, 내가 그렇게 못허고 술이나 한 말 내 마’ 그러믄 안 된다 더 내그라, 그러고 발을 쨈매.(묶어). 그래서 거꾸로 매달리쟎아. 말하자믄 장난이지. 글고 (발바닥을) 때려, 얼마 낼래, 얼마 낼래 함서. (신랑이) 닭 한 마리, 돼지 한 마리(낸다) 하면 이제 풀어놔. 만족허니 대답을 들으면 같이 먹고 놀고.”(신영진)
행례를 치른 후 신랑 집과 신부 집에 인사를 드리고 동네사람들과 안면을 익히고 친목을 도모함으로서 결혼식과 관련된 행사가 끝나면 시댁으로 다시 돌아와 부부는 백년해로를 하게 된다.
여자 혼례복인 원삼족두리를 착용한 모습.
여자 혼례복인 원삼족두리를 착용한 모습.
남자 혼례복인 사모관대를 착용한 모습.
예전에 사용하던 나무 기러기
쉽게 말하면 농촌생활사, 여성생활사.. 이다.
예전에 있었다가 폐간된 디새집이라는 잡지를 아시는가?그 잡지에 실리는 글 정도의 수준으로 쓰고 싶었지만 ^^ 물론 텍도 없었지 ^^그러한 글을 쓰고 싶었다. 물론 지금도....
내가 쓴 것들을 한 번 모아보는 작업을 하고 있다.
떡도 하고 술도 담그고 양잿물도 내리고
- 옹기시루 쓰던 이야기
한 때 왕성하게 쓰였을 옹기시루는 시대가 변하면서 양은시루를 쓰게 되다보니 이제는 쓰임새가 없어 집 한 구석에 보관되어 있다. 대부분 집을 개축하고 이사하면서, 혹은 골동품 수집업자에게 판매하면서 옹기시루는 대부분의 가정에서 사라졌으나 몇몇 집에는 아직도 보관되어 있다. 중백암 김분순 씨(1934년생), 정송 최종애씨(1931년생), 동신 전영자 씨(1941년생)의 옹기시루에 담긴 옛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김분순씨는 17살에 시집을 왔는데 시댁에는 4대째 물려내려오고 있는 시루가 있었다. 시루는 남원에서 사 온 것이었다고 한다. 전영자씨 집의 시루 또한 시집을 오기 전부터 시댁에서 사용하던 것이었다. 최종애씨가 시집와서 살고 있는 정송마을은 옛부터 옹기점이 융성하던 동네여서 시어머니는 동네 옹기점에서 시루 등 그릇을 장만했다.
시루는 큰 시루와 한 되 정도의 용량인 작은 시루를 사용했었는데 현재 김분순씨와 최종애씨 집에는 큰 시루만 남아있다. 보통 큰 시루는 고두밥을 찌거나, 찰밥을 찔 때 썼고, 작은 시루는 제사 때나 생일 때, 고사 때 올릴 떡을 찔 때 썼다고 한다. 김분순씨 댁 큰 시루는 일명 ‘동네시루’로 쓰여서 동네 행사, 이웃행사에 두루 사용하다보니 군데 군데 조금씩 깨어져 있다.
‘정월대보름에 찰밥 해 먹고 제사 때나 명절 때 고두밥 쪄서 술 담아먹고, 아들 여울 때, 환갑 치룰 때’ 등 중요한 행사를 치룰 때 빠지지 않는 음식이었다. 쌀도 부족하던 때라 떡을 쉽게 해 먹기 어려웠기에 생일, 회갑, 제사 등 집안에 큰 일이 있어야 먹을 수 있었다. 생명의 탄생에서부터 제사에 이르기까지 큰 일이 있을 때에는 떡이 함께 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이레가 지나면 떡을 장만하게 된다. 그리고 삼칠일이 지나면 떡을 해 집안 식구들끼리 나누어먹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이를 낳고 첫 이레 때 떡을 하고, 삼칠일 때 시루떡해서 먹고, 마지막 이레 때 떡을 하는 등 일곱 이레를 챙겨 떡을 해 먹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생일에는 백설기, 시루떡 등을 장만했다. 돌때는 붉은 팥을 얹은 시루떡, 백일에는 백설기를 만들었다. 백일이나 돌에 떡을 해서 동네에 돌리면 떡 접시는 빈 그릇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돈 10원도 주고 실 한 타래 째깐한 것도 째깐씩 주고, 쌀도 적어 못 묵고 살아. 우리 딸네들 돌 때 그랬어. 돈도 없으믄 그 때는 닭을 키우쟎아 계란도 서너개씩 갖고 온 사람도 있고. 비누도 맨들어서 하나썩 갖고오고.” (김분순)
결혼을 하고 회갑잔치를 치르고 제사를 지낼 때에도 상에 떡은 빠지지 않았다. 떡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찹쌀을 도정해서 곱게 가루로 만들어야 했는데 방앗간이 생기기 전에는 집에서 절구로 일일이 빻아서 체에 쳐서 쌀가루를 내서 썼다. 떡을 하려면 시루 밑바닥에 있는 구멍을 먼저 막아야 했다. 구멍 위에 삼베나 무명천을 깔거나 무를 잘라서 막기도 했고, 짚을 엮어서 만든 ‘시루밑’으로 막았다. 그리고 시루를 물이 끓는 솥 위에 올려서 김이 올라와 떡이 쪄지는 것이다. 솥과 시루 사이가 틈이 있으면 김이 새기 때문에 ‘시루뻔’이라는 것을 붙여 틈새를 막아줬는데 시루뻔은 밀가루를 반죽해서 만들거나 몽근겨(註: 곡식의 겉겨가 벗겨진 다음에 나온 고운 겨로 속겨라고도 부름)를 이겨서 만들어서 붙였다. 그 다음 쌀가루를 시루에 얹고 팥고물을 얹고 또 쌀가루를 얹고 이렇게 켜켜이 얹고 고르게 한 다음 찐다.
가정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고, 수확에 감사할 때에도 떡을 올렸다. 최종애씨 말에 따르면 장광을 주관하는 가신을 ‘철륭’이라고 하는데 정월이면 떡과 제물을 차려 장광에 놓고 ‘시루떡 고사’를 지냈고 농사수확철에도 떡과 제물을 차리고 고사를 지내고 동네사람들과 떡을 함께 나누어 먹는 ‘도신’이라는 것을 지내 철륭신을 모셨다고 한다. 김분순씨는 딸이 홍역에 걸렸을 때 찬물로 목욕재계를 하고 날마다 떡을 해서 빨리 낫기를 빌었다. 지금은 홍역이어도 주사 한 번 맞으면 일어나지만 당시에는 진안에 있는 병원을 걸어가거나 버스를 타고 전주로 가야만 했다. 버스편도 자주 있지 않아서 아파도 병원에 자주 가지 못했다고 한다. 조순덕씨 말씀에 따르면 홍역과 비슷하게 몸에 이상한 것이 나는 ‘손님’이라는 병이 오면 손님떡을 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찰밥을 하거나, 술을 담기 위해서 고두밥을 찔 때도 시루를 썼다. 제사에 올릴 술을 담기도 하고, 잔치 때 쓸 술, 술멕이를 할 때 동네에 낼 술을 담기도 하였다. 어른들이 많은 집에서는 사흘들이로 술을 담그었었다 한다. 먹을 쌀도 부족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쌀로 술을 빚는 것을 단속했다. 세무서에서 조사를 나왔고 단속에 걸리면 벌금을 내야 했다. 몰래 숨겨도 샅샅이 뒤지면 들켰지만 그렇다해서 술을 담지 않을 수는 없었다고 한다.
시루의 쓰임새는 또 있었다. 비누가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기 전까지는 양잿물로 빨래를 했는데 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떡시루와는 별도의 시루에 콩대나 깻대를 태워 그 재를 시루에 넣고 물을 부어 내려 받아서 썼다. 간혹 비누를 만들어서 쓰는 사람도 있었는데 만드는 방법은 양잿물을 끓여서 등겨를 섞어 굳혀서 칼로 썰어서 비누를 만들었다
시루를 쓰지 않게 된지는 대략 20~30여년이 되었다고 한다. 시대가 흘러오면서 옹기시루 대신 양은시루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60~70년대 들어서면서 평가에 평장떡방앗간, 원촌에 행운떡방앗간이 생기면서 집에서보다 방앗간에서 떡을 주로 하게 되었다. 현재 백운면에는 원촌떡방앗간과 행운떡방앗간 2곳이 남아 있다. 그리고 빨래비누가 널리 보급되면서 양잿물로 빨래하는 사람은 이제 없다. 술을 집에서 담그어먹는 사람도 거의 없다.
“아들 여울라믄 술 하고, 환갑 돌아오믄 술하고, 시방은 안혀. 그전에는 했어, 뭣만 돌아오믄. 지금은 안혀.” (전영자)
어머니들과 고생을 함께 해 온 옹기시루는 이렇게 쓰임새가 없어지면서 대부분 사라졌고 고물장수가 와서 팔 것을 권유하지만 팔지 않고 몇 몇 집에서는 보관하고 있어서 이를 통해 과거를 엿볼 수 있게 한다.
▲ ⓒ최운 |
▲시와의 1집 [소요]. ⓒ시와 |
▲ ⓒ프로필 사진(주성용) |
▲ ⓒ최운 |
▲ ⓒ프로필 사진(주성용) |
'아리랑'은? '분홍신'은?…'홍대 앞 잔혹사'
기사입력 2010-03-26 오전 10:22:24
▲ 홍익대학교 앞 '두리반' 식당은 그곳에 존재해야 한다. 누구도 '여럿이 둘러앉아 먹을 수 있는, 크고 둥근 상'을 의미하는 두리반을 걷어찰 권리를 부여하지 않았다. ⓒ프레시안(최형락) |
퍼온 글^^
단편선이라고 아주 매력적인 음악을 하는 친구를 봤다. 두리반에서
연주하면서 긴장된다고 막걸리를 들이키길래 나도 두 모금 얻어마셨다.
하여간 재밌는 친구다. 병신같지만 멋있어^^;; 요런 느낌 ㅋㅋ
Q: 고황 : 필명이 특이하다. ‘회기동 단편선’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짓게 됐나?
A: 회기동 단편선(이하 단편선) 전엔 친구들이랑 다른 이름으로 밴드를 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이 하나 둘 씩 군대에 가고 혼자 남은 거다. 새로 이름을 짓는데 일단 회기동은 들어가야 할 것 같더라. ‘청량리 브루스’, ‘서교동 하이에나’이런 것처럼. 그리고 05년도부터 소설을 많이 봤는데, 특히 단편소설을 많이 봤다. 단편선이라는 어감도 좋고. 그래서 회기동 단편선이 된 거다. 삶의 단편들을 음악으로……뭐 이런 의미는 차후에 부여했다. [녀석다움을 보여주는 추임새죠. 종윤이는 가식도, 허울도 없는 매우 진솔한 녀석입니다. 덕분에 녀석의 겸손한 얼굴과 스타일이 한껏 빛을 발하는 것인가봐요]
Q: 고황 음악은 언제부터 시작했나?
A: 단편선 중 3때 일렉트로니카에 빠져있었다. 그러다 고1때 밴드 <미선이>의 음악을 듣고 모던락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같이 컴퓨터 게임하고, 오락실 다니던 친구들 모아서 시작했다. 기타는 고3때, 공부하기 싫어서……
Q: 고황 뮤지션으로 꽤 유명한 것 같더라. 공연도 많이 하고, 싸이월드에 음원도 있고.
A: 단편선 아, <초콜렛>. 그 곡은 군대 가기 전에 술값 벌려고 과감히 판 곡이다. 내 스타일과도 많이 다른 곡이다. 원래 내 스타일은 아방가르드한 포크다. [아방가르드한 포크라니! ^^ 이종간의 배합을 통한 언어유희! 이러한 놀라운 재주는 종윤이의 트레이드마크죠. ]
Q: 고황 웹진 <보다>에는 음악 평론도 올리던데, 바쁘겠다.
A: 단편선 바쁘다. 녹음도 해야 하고, 공연도 해야 하고, 글도 써야하고, 빨갱이 짓도 해야 하고. 잠 잘 시간도 없다. 그래도 재밌으니까 한다. 행복하다.
Q: 고황 바쁜 와중에 대자보도 썼다.
A: 단편선 너무 화가 나서. 열폭했다고 보면 된다. 사실 나는 지금 총학생회를 지지하지 않는다. 또 고재석과도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다. 인사도 하고. 그런데 그건 사적인 관계인 거고, 이건 공적인 이야기다. (고재석이 붙인)대자보를 봤는데 이건 너무 뻘글인거다. 내가 언론정보학 전공이라 사진을 이용하는 것에 민감한데, 공개한 사진이 증거로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진이더라. 일반학우 운운하는 것도 황당하고. 아침에 고재석이 붙인 대자보를 보고 수업도 빠지고 글을 썼다. 점심 값 들고 가서 출력해다 붙인 거다. 고황 그게 참 특이하다. 화가 나서 자비를 들여서 자보를 썼다는 게. 더 특이한 건 그 글에 학우들이 반응을 보였다는 거고. 학교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올린 자보는 조회 수가 1500건 가까이 되더라. 직접 쓴 그 글에 대해 얘기를 좀 해보자. 글에 ‘정치 좀 하자’라고 썼다. 단편선 말 그대로다. 사실, 정치 좀 하자는 건 다른 게 아니고, 호구가 되지 말자는 거다. 후배들한테 정치얘기 하면 부담스럽다고 하는데, 그러다가 호구되는 거다. 외면하면 당장은 마음이 편할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 그게 정말 마음이 편한 길인가. 우리가 고등학생은 아니잖나. 집돈 받아쓰는 나이도 아닌데, 자기한테 뭐가 유리한지는 따질 줄 알아야 한다. 잇속 챙기고, 사리사욕 챙기자는 거다.
Q: 고황 우리학교 학생들이 좀 착한 편이긴 하다.
A: 편선 맞다. 화도안내고, 순하고……. 예를 들어, 남학생 휴게실만 해도 그렇다. 물론 여학생휴게실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여학생 휴게실을 먼저 만들었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신축건물에도 남학생 휴게실이 없다.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어제도 나는 청운관 빈 강의실에서 자다 나왔다. 사실, 그래서 남학생 휴게실을 요구하는 투쟁을 계획했다. 완전히 필요에 의한 투쟁. 한 스무 명이 중앙 도서관 벤치에 자리 잡고 누워있는 거다. 음악도 듣고 잠도 자고. 앞에는 남학생 휴게실 만들어 달라고 팻말 세우고. 시간이 없어서 실행하지 못했지만, 이정도 요구는 정당하지 않나.
Q: 고황 같이 행동하는 것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글에도 연대하자고 썼다.
A: 단편선 당연하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 보다 세 사람이라도 모였을 때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원래 진리는 평범한 언어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고, 대개의 평범안 언어는 당연해서 평범해 보입니다. 그래서였는지 종윤이가 늘 말하는 '연대'나 참여'라는 문제를 직면할 경우 사실 저는 방관자의 자세로 대처한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부분이 바로 제가 더 종윤이를 좋아하게 된 이유인지도 모릅니다.]
전태일 추도 공연 중 사진
Q: 고황 실제로 모이는 사람들이 있나?
A: 단편선 전에는 한예종 다니는 친구들이랑 작업을 많이 했다. 대학생 예술행동이나 희망콘서트 같은 것. 요즘은 ‘좌익’을 마케팅 포인트로 잡고, 인디 레이블을 하나 만들려고 계획 중이다. 사실 나도 혁명을 얘기하는 극좌파는 아닌데, 극좌파를 콘셉트로 잡을 생각이다.
Q: 고황 표현 방식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보통 대자보는 정색하고 쓴 글이 많은데, 이번에 올린 대자보는 무엇보다 글이 재밌었다.
A: 단편선 이번 자보는, 사실 내가 좋아하는 문체에 대한 오마주 같은 것이다. 원래는 따뜻한 글을 쓰는 남자다. 다만, 최대한 어떻게 재밌게 쓸까 고민했다. 전에 술 먹다가 갑자기 만든 모임이 하나 있다. 실제로 모인적은 없는데, 플래카드를 재밌게 써보자고 의기투합한 모임이었다. 그때 얘기한 게 이런 거였다. 예컨대, 보통 ‘등록금 동결하라’고 플래카드를 쓴다면, 우리는 ‘교수님, 등록금 인상되건 말건 우리는 A+주실 거죠? - 개념녀들’ 이런 식으로 써보자는 거다. 역설적으로.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환기시킬 수 있는 플래카드를 써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종윤이는 음악보다는 정치가 어울린다고 생각할 때가 있는데 바로 이런 점이죠. 남들이 생각할 수 없는 창의적인 해결 솔루션을 내어놓는 당돌함!]
Q: 고황 목표했던 대로 블로그에 여학우들이 많이 들렀나?
A: 단편선 전혀. 오히려 남학우들 유입수가 늘었다.
Q: 고황 그래도 성과가 있다면?
A: 단편선 경자네(경희 자유창작자 네트워크)라는 사조직을 하나 만들려고 준비 중인데, 이번 일로 뜻이 맞는 친구를 만났다.
Q: 고황 사조직이라면 어떤 건가?
A: 단편선 대단한 건 아니고, 열흘에 한번 정도 정문에서 공연하고, 수공예품을 팔아볼 생각이다. 학교의 구성원이 생산하고 판매하는 거다. 학교가 너무 조용하고 재미가 없으니까 뭐라도 만들어 보려고 계획한 거다.
Q: 고황 맞다. 학교에 이슈가 없다. 왜일까.
A: 단편선 일단, 전에는 학교 안에서 학생운동권이 이슈를 만들어왔다. 이젠 그게 안 된다. 나는 학생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측면에서는 학생운동에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다.
Q: 고황 어떤 측면을 말하는 건가. 왜 학생운동에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나?
A: 단편선 일종의 시스템문제다. 학생운동은 아직 중앙집권적인 시스템인데, 요즘 학생들은 어떤 구심점이 있는 세대가 아니다. 자기 영역에서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세대다. 여기에 맞춰서 권력을 해체시키는 방향으로 운동의 방식이 변화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학생운동은 미래가 없다.
Q: 고황 자기 영역에서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세대라고 했는데, 20대론을 말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20대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사람도 있다. 그 글 봤나.
A: 단편선 봤다. 그냥 뭐, 그 분에게 희망이 안 보인다. 희망을 어디서 찾나. 그야말로 ‘너나 잘하세요’다. 일단, 세대론을 말할 때, 단순히 ‘20대’로 뭉뚱그리지 말고 신자유주의의 직격탄을 맞은 세대로 보는 게 맞다. 90년대 말 학번까지 포함해서 포스트 IMF 세대로 봐야 한다는 말이다. IMF 전후로 사회 전반이 완전히 달라졌으니까. 그리고 이 세대에서 더 세분화 하면 X세대와 구심점이 없는 N세대(우리 세대)로 나눌 수는 있다. 우리 세대에는 2002년 월드컵 이후로 문화적 중심축이 없었다. 마지막 국민가요가 에스지워너비 정도니까. (소녀시대, 원더걸스는 아이돌 씬이 새로 만들어졌다고 봐야한다. 하다못해 이 아이돌 씬도 한 가지 특징으로 설명되기 어렵다. 소녀시대와 투애니원을 비슷하다고 말할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더 이상 문화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하나의 보편성으로 설명이 안 되는 세대다. 누굴 깎아내릴 것이 아니라, 이 세대의 연대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인지를 이야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Q: 고황 그래도 그 글에 일견 맞는 말도 있다. 목소리를 안 내는 세대라는 말은 맞다.
A: 단편선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도 인정하면 지는 거니까. 그리고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활발히 목소리를 내는 20대도 많다.
Q:고황 맞다. 표현욕구가 없는 것 같지는 않다.
A: 단편선 그래서 매체를 하나 만들어 봤으면 좋겠다. 학교의 정책을 세부적이고 논리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매체. 그리고 이 지역, 회기동에 사는 분들의 생활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접목시킬 수 있는 매체.
Q: 고황 잘 진행되면 근사할 것 같다.
A: 단편선 큰 걸 바라는 건 아니다. 그저 뜻 맞는 사람들 열 명, 열다섯 명 정도 모여서 놀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재밌게. 운동이, 정치가 사실은 대단한 게 아니다. 이번 대자보사건에서 ‘운동권’과 ‘정치적 활동’이라는 단어가 도발적으로 사용 됐다. 이 공격이 유효할 것이라고 생각한 글쓴이도 애석하지만, ‘학우의 정치적 활동’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가 오고가지 않은 것도 애석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운동이 뭐 별건가. 정치가 뭐 별건가. 그야말로, ‘합법적으로’ 정의된 기본권 아니었나? 마음 맞는 친구들이 모이면 그게 정치의 시작이고, 노는 것이 운동의 시작 아닐까. 정말이지, 정치 좀 하자. 기왕이면 제대로.
P.S) 그가 04년 08년에 각각 작곡한 '안녕'과 '초코렛'을 첨부합니다.
편의상 곡 전체가 아닌 일부만 게재함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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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그의 블로그입니다: http://danpyunsun.egloos.com/ (여자친구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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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foxxx: 라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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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여성에게 집착하는 노인이 등장하는 소설들을 소개하는 글을 읽고 많은 생각을 했는데이건 반대(?)네요? 아무튼 일흔 가까이 되어도 사랑을 하고 가슴이 설레고 목소리 톤이 높아지고......또 마흔 가까이 되어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눈 속에 편지를 묻어두고 오는 사람들을 본다는 것 부럽기도, 멋지기도 하지만 왠지 두려워지기도 하네요. 그 나이에도 흔들릴 수 있다는 가능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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