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 목록
-
- 로스트... 한국을 대체 뭐로...(2)
- 불그스레
- 2006
-
- 묘한 고양이 쿠로... 별로 ...
- 불그스레
- 2006
-
- 신영식 선생이 돌아갔다.
- 불그스레
- 2006
-
- 참 잔인하다.
- 불그스레
- 2006
-
- 야동을 재미있게 보려면...(1)
- 불그스레
- 2005
3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그동안 내 방의 주인은 바퀴벌레였다. 내가 끔찍이도 바퀴벌레를 싫어하는 바람에, 바퀴벌레를 잡기는 커녕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해하는 탓에, 바퀴벌레는 그야말로 무소불위 절대의 권력자로서 내 방의 모든 것을 지배했었다. 심지어 방주인인 나조차도 바퀴벌레가 행차하면 알아서 자리를 비켜주어야 했을 정도로.
그런데 고양이가 들어오고 나서 그 서열이 바뀌었다. 이를테면 바퀴벌레의 수난시대라고나 할까? 벌써 항상 눈에 보이던 손가락 세개 굵기의 바퀴벌레들이 이제 한 마리 겨우 남아 있다. 나머지는 방바닥 어딘가에, 그리고 싱크대 주위 어딘가에 개미가 들끓는 것을 흔적으로 발견했다. 그 주범은? 다름아닌 고양이다.
고양이가 바퀴벌레 사냥을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대략 보름 전쯤. 그 전에는 너무 어려서인지, 아니면 집에 적응이 덜 되어서인지 바퀴벌레를 잡는다거나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언제부터인지 휘리릭 날아다니며 바퀴벌레며 파리며 낼름낼름 잡아서 먹는다.
녀석들이 방안에서 사냥을 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건 날아가던 파리를 앞발로 때려 떨어뜨린 뒤 그걸 낼름 삼키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그날 바퀴벌레 한 마리를 잡아 물고 방안을 누비는 그야말로 살떨리는 경험을 했다. 고양이 입에 물린 채 꿈틀거리는 바퀴벌레 뒷다리라니.(우웩~)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린다.
그 이후 내 방은 고양이의 사냥터가 되었다. 때로는 파리도 잡아먹고, 때로는 모기도 잡아먹고, 가끔 길잃은 잠자리가 날아 들어오면 그것도 먹는다. 귀뚜라미는 고양이밥과 더불어 양대 주식이다. 그리고 또 하나. 먹는 지, 아니면 잡아서 어디다 갖다 버리는 지 알 수 없는, 후자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퀴벌레다.
덕분에 이제 내 방의 서열은 완전 바뀌었다. 서열 1위는 역시 고양이. 이놈들 자리에 누우면 나는 피해서 앉아야 한다. 컴퓨터 앞에 자리를 잡으면 키보드 들고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자판을 두드린다. 가끔 바퀴벌레라도 입에 물고 들어오면 나는 아예 방을 나선다. 그러면 방은 온전히 고양이의 차지가 되어 버린다.
서열 2위는 고양이에게 서열 1위의 자리를 빼앗긴 바퀴벌레. 아직도 나는 바퀴벌레가 보이면 일단 도망부터 치고 본다. 물론 바퀴벌레는 모습을 보이자 마자 고양이 두 마리의 추격에 온몸이 너덜너덜 만신창이가 되어 죽거나 혹은 잡히거나 도망친다. 도망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대개는 잡혀 장난감 신세가 된다. 불쌍한 서열 2위라고나 할까?
마지막 서열 3위는 당연하게도 나다. 고양이 배고프면 밥 차려주고, 오줌 똥 싸면 오줌 똥 다 치워주고, 심심하면 놀아주고, 잘 때는 옆에서 난로역할 해주는 고양이의 종, 고양이의 노예, 바퀴벌레의 압제로부터 해방해주는 댓가로 고양이에게 절대복종을 맹세한 바로 나다. 덕분에 여전히 바퀴벌레에게 쫓기면서도 요즘은 비교적 맘 편하게 지내고 있다. 아아. 바퀴벌레가 한 마리밖에 보이지 않는 쾌적한 한경이라니.
하여튼 걷는 모습에서도 서열의 표가 확연히 드러난다. 고양이 놈들은 항상 자세를 꼿꼿이 세우고, 꼬리마저 치켜들고 걸어다닌다. 나는 주머니가 빈 티를 팍팍 내며 어깨를 구부정하니 숙이고 다니고. 바퀴벌레는? 여전히 빨빨거리며 잘도 쏘다닌다. 누가 보더라도 이 방의 실세가 누구인지 확연히 드러나는 모습이다.
오죽하면 고양이가 내 이불에 오줌을 싸도 한 대 때리지 못했겠는가? 고양이가 똥을 싸는 바람에 가방을 빨아야 했음에도 웃으며 넘어갔겠는가? 밥을 주지 않는다고 얼굴을 핥으며 맛을 볼 때는 발발 떨면서 재빨리 고양이밥을 차려 앞에다 대령했겠는가? 고양이가 내 애완동물인 게 아니라 내가 고양이의 애완동물이 된 기분이다.
하긴 이런 맛에 고양이를 기르기는 한다. 말 잘 듣는 고양이면 고양이가 아니다. 고양이는 항상 주인 알기를 애완동물 알 듯 해야 한다. 항상 자기가 방 주인인 줄 알고 있어야 하며, 그래서 오만과 건방이 털 오라기 하나하나마다 뚝뚝 떨어져야 한다. 그래야 고양이다. 그래야 고양이를 기르는 맛이 있는 것이고.
어쨌거나 예전에는 쥐를 잡으려 고양이를 길렀는데, 이제는 바퀴벌레 잡이용으로 고양이를 기르게 되었다. 쥐를 보기가 그만큼 힘들어진 때문일까? 아니면 바퀴벌레 보기가 쥐를 보기 만큼이나 흔해졌기 때문일까? 예나 지금이나 사냥꾼으로서의 본능이 일생에 도움이 되는 동물이 고양이다. 그러니 충성을 맹세하지.
지크 고양이! 지크 쭈그리! 지크 꼬맹이! 우야뜬둥 고양이 만세! 반자이! 비바 고양이!
고양이 사료를 사러 동물병원에 갔더니 협박을 한다. 고양이에게 사료 이외의 것을 먹이면 안 좋다고. 인터넷을 뒤졌더니 마찬가지 이야기가 나온다. 고양이에게는 사료만 먹이라고. 그래서 지금껏 쭈그리와 꼬맹이 녀석들에게 사료만 먹였다. 어찌되었거나 그게 더 좋다니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렇게 사료만 먹이고 있으려니 꼭 고양이를 기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고양이를 기르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 고양이를 기를 때는 기른다기보다는 함께 살아간다는 생각이 강했다. 먹는 것을 같이 먹었기 때문이다. 생선을 먹으면 생선을 나눠먹었고, 고기를 먹으면 고기를 나눠먹었다. 하다못해 된장국을 먹어도 된장국 안에 들어 있는 멸치는 고양이 차지였다. 그래서 밥상에서는 전쟁이 벌어진다. 뭐라도 하나 얻어먹으려는 고양이와 그것을 막으려는 어머니의.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시장에 갔다 오실 때마다 먹지도 않는 생선대가리와 내장들을 억지로 챙겨오셨다. 고양이를 먹이기 위해서였다. 가족의 밥을 차릴 때면 부엌 한 구석에서는 생선대가리와 내장이 밥알과 함께 익어가는 비린내가 진동하곤 했고, 그 냄새에 이끌린 고양이와 어머니의 싸움이 또 시작되었었다.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을 때 어머니는 애써 종이박스를 구해 산실을 따로 만들어 주고, 미역국을 끓여주셨다. 나나 동생도 먹지 못하는 우유를 뼈에 좋다고 사다 주시고는, 그래도 애 낳았는데 미역국은 먹어야 한다며 닭고기를 찢어 넣은 미역국을 끓여 고양이에게 먹이셨다. 어머니도 고양이를 마치 한가족처럼 여기셨던 것이다.
하기야 사람이 먹는 것 가운데 사람 몸에 좋은 게 몇 가지나 되겠는가? 나처럼 먹는 대부분을 밖에서 사들고 와서 먹어야 하는 사람이라면야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튀김닭에 쓰인 기름이나 양념들은 사람에게도 안 좋은 것들이다. 하물며 고양이에게는 어떻겠는가? 그래서 어제 닭을 먹으면서도 고양이를 쫓기 위해 꽤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었다.
그런데 그러고 있으려니 꼭 고양이와 내가 남인 것 같다. 아니 그보다는 먹을 것을 달라고 외치는 파리 시민들에게 "빵 없으면 케잌을 먹으면 되지 않느냐."는 어떤 바람난 유부녀의 말이 생각난다. 먹는 것과 먹고자 하는 것과 그것을 가로막는 어떠한 보이지 않는 선에 의해 고양이는 같은 집에 살면서도 전혀 별개의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오늘 어제 남은 닭을 데워 먹으며 일부를 떼어 고양이에게 주었다. 그랬더니 내 발 밑에서 잘도 먹는다. 두 마리가 서로 머리를 앞발로 눌러가며, 먹던 것을 빼앗아 도망도 다니며 아주 잘도 먹는다. 먹는 것이 보기 좋아 닭을 조금 더 떼어 주니 더 좋아한다. 같이 먹는다는 기분. 무언가를 나누어 같이 먹는 다는 그 느낌. 그러고 있으니 마치 고양이가 가족이 된 것만 같다.
앞으로도 고양이에게 사료 이외의 것을 먹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고양이를 좋아하기에 고양이에게 안 좋다고 하는 것을 굳이 먹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자칫 고양이가 탈이라도 나게 된다면 무척이나 슬프고 아플 것이기에 가족이라는 느낌이 좋기는 하지만 여전히 사료로만 고양이를 먹일 것이다.
그러나 가끔은 그런 딱딱한 이야기따위 모두 무시해 버린 채 먹던 것을 나누어 먹으며 가족이라는 느낌을 확인해보고 싶을 것이다. 내가 먹는 것을 고양이도 먹고, 고양이가 먹는 것을 나도 먹는다는 예전 고양이를 기르면서 느꼈던 일체감을 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을 것이다. 조마조마. 무슨 탈이라도 날까 가슴을 조이면서도.
어쨌거나 걱정과는 달리 참 잘도 먹는다.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닭고기이건만 자기들끼리 잘도 먹어댄다. 저렇게 잘 먹고 있는 것을 보니 그동안 먹여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 그렇다고 사료 대신 다른 것을 먹이기엔 내가 또 너무 소심하고. 주인을 잘못 만난 탓이다. 불쌍한 것들. 언제고 생선을 먹을 일 있으면 또 먹으라 나눠주어야지. 그 정도는 괜찮겠지?
삼국지 하면 역시 고우영 삼국지! 수호전 하면 고우영 수호전! 초한지 하면 고우영 초한지! 이두호의 임꺽정 이전에 고우영의 임꺽정이 있었고, 가루지기전은 우리의 성문학을 이어받은 섹스를 소재로 한 성인만화의 백미였다. 중국의 쿵후와 일본의 인술을 배운 일지매는 요즘 흔히 유행하는 퓨전물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성인을 뛰어넘어 청소년들에게까지 인기있던 만화였고.
성인만화만 그렸던 것도 아니다. 어린이잡지였던 소년중앙에 연재했던 <거북바위>는 세 형제가 각기 한 가지씩 기술을 배워 부모의 원수를 갚는다고 하는 우리의 전통설화와 무협적인 요소를 조화시킨 수작이었고, 새소년에도 이해창선수의 어린시절 등 다양한 만화를 그렸었다. 흔히 성인만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소년만화도 적지 않게 그려온, 그래서 아직 어린 나이였던 내게도 친숙한 만화가가 바로 고우영 선생님이었다.
천의무봉이라. 선녀가 지은 옷은 바느질 자국이 없다고 하던가? 그야말로 무애의 경지였다. 어디 하나 걸리는 것 없는, 그대로 마음 가는대로 지어낸 인위가 배제된 자연스러운 그림과 자연스러운 연출과 자연스런 이야기들. 때로는 억지스럽고 때로는 유치한 우스개까지도 그 단순하고 엉성해 보이는 그림 속에 하나가 되어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여백의 미라는 것이 만화에도 존재할 수 있음을 고우영 선생님을 통해 처음 알았다. 문인화의 여유와 자유로움이 만화의 컷 안에 담아질 수 있음을 고우영 선생님을 통해 처음 알았다. 내가 선생님이라 부르는 세 분의 만화가 가운데 한 분. 그리고 내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만화가 가운데 한 분이라고 꼽는 분. 한국이라는 나라가 담아내기엔 너무나도 큰, 그래서 한국이라는 틀에 갇혀 오히려 작아졌다고 여겨지는 너무도 크고 너무도 큰 그저 크기만 한 분. 그것이 내게 있어서의 고우영 선생님이시다.
그 고우영 선생님이 오늘 돌아가셨다. 향년 63세. 천수를 누리시고 가셨다면 천수를 누리시고 가셨다고 할 수도 있는 나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 나이다. 요즘 70을 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70을 넘어, 80, 90을 넘겨서도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흔하게 볼 수 있는 시절이다. 그런데 이제 겨우 63살. 10년은 더 살아서 그 천의무봉의 필력을 보여주실 수 있는 나이에 너무도 일찍 가셨다.
솔직히 지금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고우영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니. 그분께서 돌아가셨다니. 믿겨지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오보라며 정정보도가 나올 것 같다. 아니 돌아가신 줄 알았던 분이 다시 살아나실 것 같다. 그래서 항상 그랬던 것처럼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천하에 그 쌍을 찾을 수 없는 필력을 다시 보여주실 수 있을 것만 같다.
돌아가시다니. 그 분이 돌아가시다니. 아득하다. 그야말로 아득하다. 이제 고우영 선생님의 <삼국지><초한지><수호지><임꺽정><일지매><가루지기전>등의 주옥같은 작품들은 유작이 되는 것인가? 처음 그 작품들을 보고 문화적 충격과도 같은 감동에 휩싸였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그 작품들이 선생님의 유작이 되는 것인가? 그저 아득할 뿐이다. 슬프지도 않고 그저 아득하고 아득할 뿐이다.
하긴 선생님은 돌아가셨어도 쉬이 쉬지 못하실게다. 그분의 그림과 그분의 이야기와 그분의 해학을 안다면 하늘에서도 선생님을 그대로 쉬도록 두지 못할테니까. 아마도 지금쯤 하늘 어디에서 새로이 작품을 준비하고 계시는지도 모르겠다. 하늘 저 위 이승을 벗어난 사람들을 위해 그 사람들이 웃고 울고 감동받을 수 있는 작품을 그리느라 다시 책상 앞에 앉으셨을지도 모르겠다. 그러실게다.
그래서 명복은 빌지 않는다. 저 위에서 영원토록 그 재미있는 만화들을 계속 그려주시기를 바랄 뿐. 언제고 그 작품들을 볼 수 있기를 바랄 뿐. 그분은 고우영선생님이시니까. 나 스스로가 인정하는 가장 존경하는 작가 고우영 선생님이니까. 선생님 그곳에서라도 재미있는 만화 많이, 많이, 그려주세요.
사람들이 별로 잘 보지도 않는 일본 드라마. 그것도 일본에서조차 별 인기가 없는 대하역사드라마. 더구나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겐페이 합전 당시의 영웅 미나모토 요시츠네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는 것이 <요시츠네>다. 써봐야 솔직히 뭔 소리 하는 지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일 그런 드라마. 그런데 꿋꿋하게도 매회 감상문을 써대고 있다. 그것도 무쟈게 길게.
확실히 작년 <신센구미>에 대해 쓸 때와는 반응이 확연히 구분된다. 최소한 <신센구미>는 리플이라도 있었다. 뭐 어떻게 생각하느니, 여기서는 나는 이렇게 생각하느니 하는. 그런데 <요시츠네>에 대해서만큼은 반응이 없다. 사실 읽는 사람도 거의 없고. 그야말로 꿋꿋함. 읽는 사람 없어도 나는 쓴다고 하는 악과 깡의 글쓰기라 할 것이다.
젠장. 이러다가는 블로그 방문자 다 끊기겠다. 빠른 시일 안에 남들도 알아볼 수 있는 그런 포스트를 하나 정도 세워야지. 뭘 쓰는 게 좋을까? 이것저것 쓴다고 자료조사 하다가 왠지 쓰지 않아도 배불러져서 때려친 것이 태반이라는... 음... 다카하시 신의 <최종병기 그녀>나 써볼까? 요즘 저작권 문제가 하도 시끄러워서 그림 없이 써야 할 것 같은데... 어쨌든 당분간은 요시츠네로 쎄운다. 방영분 따라잡을 때까지. 아잣!
나는 코미디를 잘 보지 못한다. 코미디를 보는 것이 때로 괴롭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주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본다. 그리고 그 수준을 넘어서더라도 보는 것 자체는 가능하다. 다만 웃지 못할 뿐이다. 웃던 것을 웃지 못하게 되고, 무덤덤하던 것이 괴로워질 뿐이다. 즉 임계점이다. 같은 상황에서도 전혀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되는.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본 영화의 한 장면이다. 사막에서 홀로 떠돌다가 우연히 사막 원주민에게 구해진 아이가, 자신을 구해준 원주민을 오해해서 돌을 던지자 그 원주민은 화를 내며 미련없이 아이에게서 등을 돌려버린다. 그 원주민의 관습에 돌을 던지는 것은 결코 해서는 안되는 금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아이 혼자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사막에 어린아이를 버려두고 떠나버린 것이다.
현실에서도 그런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처음에는 웃고 떠들던 누군가가 어느 순간 갑자기 화를 내며 일어서는 것을. 아니 화를 내고 일어서는 것을 넘어 폭력적이 되어버리거나, 아예 친하던 사이를 단절시키는 것을. 대개는 그런 사람에 대해 주위에서는 비난을 한다. 속이 좁다고.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러냐고. 그러나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결코 건드려서는 안되는 금기였던 것이다.
물론 그것이 처음부터 금기였던 것은 아닐 것이다. 처음부터 결코 해서는 안되는 그러한 경우도 없지는 않겠지만, 대개는 처음에는 어느정도 허용할 수 있는 그런 것이었을 경우가 더 많다. 그렇게 처음에는 같이 웃으며 즐기다가, 어느 순간부터 웃지 못하게 되고 관계를 고려해 참게 되고, 그러다가 한 순간 폭발해 화를 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임계점이다. 허용할 수 있던 것을 더이상 허용할 수 없게 되는 것.
아마 누구나 그러한 임계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 장난을 칠 때 어느 정도 선까지는 대개는 다 참아낼 수 있다. 그리고 그 선을 넘어가면 참지 못하고 화를 낸다. 대개는 그렇다. 장난 그 자체로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장난이 내가 정해놓은 어떠한 선을 넘어서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다. 처음엔 웃음이었던 것이 임계점을 거치면서 인내가 되고 화가 되는 것이다.
웃는 것만 그런 것이 아니다. 웃는 것, 우는 것, 화내는 것, 미워하는 것, 기뻐하는 것, 모든 감정이 임계점을 가지고 있다. 어느 수준까지는 좀더 긍정적이고 우호적인 감정을 갖다가,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좀더 부정적이고 배타적인 감정을 갖게 되는 어떠한 선. 물론 그 선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말하자면 역린이라고나 할까? 건드려서는 안되는. 넘어서는 결코 안되는. 그런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감정의 임계점을 타인은 물론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한다는 것. 대개는 모른다. 자기가 어디까지 참아내지 않아도 되고, 어디까지 참아낼 수 있으며, 어디까지 참아낼 수 없는지. 참아내야 하는 상황이 되고 참아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겨우 알게 된다. 스스로든 혹은 타인이든. 그래서 싸운다. 그래서 갈등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만나고 사귀다 등을 돌린다. 그리고 등을 돌리지 않은 사람들은 깊은 친구사이가 된다.
진정한 친구라 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다. 싸우고 갈등하고 절교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금기와 감정의 임계점을 알고, 그것을 이해하고 존중해주는 사이다. 서로의 금기를 범하지 않고, 서로의 임계점을 넘어서더라도 용서해주는, 설사 참지 못하고 싸우게 되더라도 끝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사이를 진정한 친구라 한다. 처음부터 좋기만 한 사이가 아니라, 상처가 쌓여 어떠한 상처도 이겨낼 수 있는 사이를 진정한 친구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친구라 하는 것은 좁은 의미에서만의 친구는 아니다. 그 친구는 아버지가 될 수도 있고, 어머니가 될 수도 있으며, 여동생이 될 수도 있고, 선생이 될 수도 있다. 나이와 관계를 뛰어넘어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여줄 수 있을 때 그들은 서로 친구가 된다. 그것이 친구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래서 친구를 갖기란 평생을 사랑할 사람을 얻기보다 더 어렵다.
어쨌든 감정의 임계점이라 하는 것은 참 미묘하면서도 사람 관계에 있어 중요한 것이다. 허용할 수 있고 없고의, 공존할 수 있고 없고의, 중요한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고 대개는 알지 못하는 사이 넘어선 그 임계점의 경계로 인해 싸우고 등돌리고 원수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그 임계점을 다루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사람 사이에서 살아가고자 한다면 말이다.
나 자신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가 감정의 임계점이 매우 낮은 선에 머물러 있다는 것. 아주 낮다. 한 마디로 되는 건 되는데, 안되는 건 처음부터 안된다고 못을 박아버린다. 못을 박지 않을 거라면 혼자 끙끙 앓다 아예 폭발해 버리거나. 대개 이런 사람들을 소심하다고 그런다. 감정의 임계점의 폭이 좁은 사람을 일컬어 흔히 소심하다 하는 것이다. 내가 코미디를 보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소심함의 결과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사람 대하는 것이 정말 서툴다. 서툴러서 서툰게 아니라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 대하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닌데 어느 순간 감정을 이기지 못해 지나치게 솔직해져 버리고 만다. 그리고 후회한다. 왜 그랬을까 하고. 그리고 끝. 그래서 이 나이 먹도록 사람 대하는 것이 어렵다. 아마 평생 가도 사람 대하는 것이 더 쉬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한심한 노릇이다.
댓글 목록
갈
관리 메뉴
본문
오늘 신문을 보니 미국에서도 한국드라마 매니아들이 많은데이순신도 열심히 보면서 대사도 따라하고 그런다던데.. 조금 걱정스럽더군요..
부가 정보
onikawa
관리 메뉴
본문
이게 더 큰 문제는 소위 말하는 공영방송을 내세우는 kbs이기에 더 웃기는거죵 ... 쇼프로나 스포츠경기 중계 등에 들일 돈이 있어면 그 돈으로 제대로 된 드라마를 만들어야 되는데 ... 드라마는 드라마라고 하지만, 아무도 역사드라마를 드라마로 생각하지 않죠 .. 지역차별주의로 인해 완전히 왜곡된 소설 동의보감 등을 생각하면 ... 할 말이 없죵 ... !!!부가 정보
불그스레
관리 메뉴
본문
차라리 이순신이 거울을 보며 입술연지를 빤다거나 물위를 걸어 일본 수군을 일검에 전멸시킨다거나 했다면 차라리 재미있었을테죠.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