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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좌파정당에 대한 노동조합의 반란
- 독일과 영국의 최근 사례를 중심으로
노동자의 힘/이명재 
오늘날 서구의 사민당이나 노동당이 더 이상 노동자계급의 당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대중적 차원의 정치적 심판은 대안부재 속에서 지연되고 있으며, 이것이 그들의 유일한 생존기반이 되고 있다. 이는 이번 유럽의회 선거에서도 뚜렷이 드러난 바 있다.

그러나 냉전체제의 종식과 사민주의의 우경화 또는 신자유주의로의 포섭으로 창출된 정치적 공백은 새로운 노동자계급정치에 의해 채워지지 못하고 있다. 이는 비록 사민주의가 사실상 정치적 소멸의 길에 들어섰음에도, 그들의 강고한 제도적·조직적 기반은 아직 붕괴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물론 이런 사민주의 제도정치의 해체과정은 긴 역사적 과정이겠지만, 이 균열과 해체현상은 새로운 계급정치의 주체들의 노력에 의해서 가속화될 수도 있다. 특히 최근 4∼5년간 반세계화운동과 국제반전운동, 노동운동의 전투성 회복 움직임 등을 통해 나타난 새로운 계급적 역학의 역동성과는 대조적으로 제도정치 또는 선거정치에서의 새로운 세력재편은 주체형성의 지연으로 상당히 왜곡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근 영국과 독일에서 사민주의의 조직적 기반인 노동조합운동에서 상당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이는 일차적으로 최근의 노동자투쟁에 힘입은 바 크며, 사민주의의 지도부에 대한 노동조합의 반란의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커다란 변화를 알리는 시작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영국 : 신노동당은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대변하지 못한다!

최근 영국 노동당과 노동조합간의 전통적 관계에 균열이 발생하고 있다. 많은 논란과 논쟁에도 불구하고, 노동당을 지지했던 노동조합들이 노동당에 맞서고 있다. 특히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은 '제3의 길'이란 포장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대처주의'에 다름 아니라는 점은 이미 대중적으로 폭로되었다.

지난 6월 17일에 열린 특별대의원 대회에서 소방관노조(FBU, Firefighter Brigade Union)는 35,205표 대 14,611표의 압도적 비율로 노동당과의 관계를 청산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지도부의 타협안, 즉 노동당에 대한 정치 지원금을 5만 파운드에서 2만 파운드로 삭감하자는 수정안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노동당과의 관계를 청산한 결정이었다.

지난 2002∼03년에 걸친 소방관 파업에서 블레어 정부의 반노동자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좌파 지도부에 대한 조합원 대중의 불만이 고조되는 가운데 이번 결정이 이루어진 것이다. 일반 조합원들은 지난 파업의 성과가 미흡하다는 인식 하에서, 재파업에 들어갈 것을 촉구하고 있다.

한편 올해 2월 7일에는 전통적 노조 중의 하나인 철도항만운수노조(RMT, Railway, Maritaime, and Transportation Union)가 노동당에서 축출당했다. 이는 작년 RMT의 스코틀랜드 지부가 스코틀랜드 노동당(SLP)을 탈당하고, 새로운 통합좌파 정당인 스코틀랜드 사회주의당(SSP) 지지를 선언하였고, 지도부가 이를 승인하자 철도노조 자체를 당에서 축출한 것이다. 이에 대해 위원장 봅 크로우는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 노동당은 필요 없다"며 반박했다.

또한 최근 통신노조(CWU)는 국영우체국인 로열 메일의 민영화에 대한 정부의 태도 여하에 따라 30만 파운드의 정치자금의 지불여부를 결정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볼 때, 2002년부터 본격화되고 있는 영국의 노동자투쟁은 신노동당 블레어 정부에 대한 정치투쟁의 성격을 띄고 있으며, 이는 낮은 수준에서 노동당에 대한 정치헌금 문제에서 FBU, RMT의 경우와 같이 노동당과의 관계 청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준에서 논쟁을 촉발하고 있다.

이와 같은 변화는 영국노총(TUC) 내에서 좌파블록의 등장과 전투적 좌파지도부의 확산, 다양한 형태와 수준의 파업 등 영국 노동자계급운동의 변화가능성을 예고하고 있다. 1980∼90년대 대처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이은, 블레어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선 계급적 저항이 이와 같은 내적 변화와 맞물려, 과연 노동당을 포함한 영국 노동자계급운동 자체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예측하기 힘들다. 그러나 신노동당과 노조의 분열은 새로운 정치지형으로 나아가는 신호탄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독일 : 사민당에 대한 좌파적 대안이 필요하다!

사민당에 대한 노동조합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슈뢰더식 제3의 길에 대한 광범위한 불만과 분노는 상대적으로 운동후진국이었던 독일에서도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작년 11월과 올해 4월 각각 10만명과 50만명이 나선 전국적 반슈뢰더 투쟁은 새로운 변화의 길잡이였다. 이와 같은 대규모 대중투쟁은 사회운동과 좌파를 중심으로 '선거대안 2006'(WA2006)이라는 연대체를 출범시켰다.

슈뢰더의 '아겐다 2010' 프로젝트는 한마디로 사민주의 복지국가의 해체전략에 다름 아니며, 이에 대한 대중적 반란 속에서 사민당의 정치적 위기는 시작되었다. 지난 유럽의회 선거는 사민당에게 사상 최악의 패배를 가져다 주었고, 이 위기의식은 지도부에 저항하는 노조 지도자 4인의 숙청으로 드러났다. 이들과 사민당에서 탈당한 노조지도자 2명 등 사민당 탈당파 6인은 '노동과 사회정의'(ASG)라는 캠페인 그룹을 출범시켰다.

그리고 이 양 그룹이 지난 6월 20일 베를린에서 전국모임을 갖고, 새로운 연대체인 '선거대안 노동과 사회정의'(Wahlalternativ Arbiet und sozial Gerechtigkeit)를 출범시켰다. 이날 모임에는 아니 하이케, 토마스 헨델, 클라우스 에른스트 등 반슈뢰더 노조그룹(ASG), 사민당, 녹색당, 민사당 탈당그룹, 다양한 좌파정당, 금융과세연합(ATTAC)을 포함한 사회운동단체, 반제·반파쇼 청년단체 등에서 온 700여명의 활동가들이 참석하였다.

이 날 모임에서는 전반적인 상황에 대한 인식과 반슈뢰더 정서의 공유가 이루어졌으며, 선거참여를 둘러싸고는 시기 상조론의 신중론과 2006년 총선 참여론이 맞섰다. 아직은 초동단계여서 많은 부분에서 모호한 점이 존재하지만, 당 건설의 문제는 10월 또는 11월의 전국총회에서 결정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이전에 현재 가동할 수 있는 70여 개 지역조직을 결성하고, 정강문서 작성팀을 구성하여 토론용 문서를 작성하기로 하였다.

한편, 흥미로운 것은 최근 좌파성향의 TV잡지인 <파노라마>의 여론조사 결과이다. 전체적으로, 사민당 22%, 기민련 45%, 녹색당 12%, 자민당 8%, 민사당 6% 등의 결과가 가온 가운데, 응답자의 6%가 새로운 좌파정당에 투표할 것이라고 응답했고, 32%의 응답자는 지지를 고려하겠다고 답했다.

최근의 이런 좌파적 흐름은 사민당에 대한 노동자계급 대안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을 넘어 조직화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민당, 민사당, 녹색당 등 제도좌파의 집권이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는 역설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새로운 좌파운동은 한국의 노동자들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사민주의의 사실상 해체의 시작과 새로운 계급정치

독일 사민당과 영국 노동당에 대한 노골적인 반란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린다. 물론 아직은 새로운 계급정치의 가능성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반란은 이미 드러난 사민주의의 정치적 사망에서 조직적인 사망으로의 이행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며, 이것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추세이다.

여기에서 문제의 핵심은 노동조합운동이다. 현재의 반란은 노동조합 또는 그 내부의 좌파지도부들이 주도하고 있지만, 문제는 이런 위로부터의 반란이 아래로부터의 대중투쟁과 충분히 결합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흐름이 제도좌파의 역사적 오류를 다시 반복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다.

현시기 일국적 계급투쟁, 반세계화투쟁과 반전투쟁 등 대중투쟁의 정치적 성과가 제도정치 내로 수렴되거나 실종된 채, 외부로부터의 압력으로 끝나는 한계를 넘기 위해, 이 대중운동은 전술적으로 제도정치로 진입해야 하지만, 전략적으로는 제도정치의 해체를 위한 투쟁을 시작해야 한다. 이 과정은 사민주의의 조직적 해체를 뛰어넘어, 21세기의 새로운 계급정치를 창출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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