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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도 음악’ 전위적 도발

침묵도 음악’ 전위적 도발

 
[한겨레] 존 케이지의 <4’ 33”>(1952년)

1952년 8월 29일, 뉴욕주 우드스탁의 ‘매버릭 콘서트 홀’에서 있었던 현대음악 피아노 연주회에서 기이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연주자 데이빗 튜더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계를 보며 악장마다 피아노 뚜껑 여닫는 일을 반복했다. 창밖을 서성이는 바람과 빗방울의 아련한 소리만이 공연장을 채우고 있었다. 잠시 후 웅성거림이 시작되었고 급기야 퇴장하는 관객들이 생겨났다. 그럼에도 튜더는 “4분 33초” 동안 그 어떤 연주도 하지 않았다.

보이코트가 아니었다. 데이빗 튜더는 악보에 기재된 내용을 고스란히 수행했을 뿐이다. 작곡자의 의도에 충실하게 퍼포먼스를 펼쳤다는 것이다. 다만 그 의도와 내용을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작곡자 존 케이지는 1980년대의 어느 인터뷰에서 초연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관객들은 웃지 않았다. 아무 것도 연주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깨닫고는 짜증을 냈을 뿐이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은 그때 일에 화를 낸다.”

<4’ 33”>를 발표했을 당시 존 케이지(1912~1992)는 이미 명성 높은 현대음악가였다. 1946년 설립되어 유럽 현대음악의 산실로 자리매김한 ‘새로운 음악을 위한 다름슈타트 국제 여름학교’에서 테어도어 아도르노, 칼하인즈 스톡하우젠, 에드가 바레시 등과 강의하며 ‘우연성 음악(찬스 뮤직)’과 ‘구체음악(뮤지끄 콩크리트)’ 사조에 깊숙이 관여했다. 더불어 뉴욕에서는 라몬트 영, 백남준 등과 함께 전위예술 집단 ‘플럭서스’를 이끌기도 했다. <4’ 33”>는 그의 위명(혹은 악명)을 드높인 해프닝이었다.

존 케이지는 <4’ 33”>를 통해 소리와 음악의 관념과 관계를 재설정하고자 했다. 그는 완전한 묵음(默音)이란 없다고 믿은 사람이었다. 개인적인 경험이 작용했다. 완벽한 방음시설이 돼있다는 녹음실에서 케이지는 자신의 심장박동과 머릿속 이명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기묘한 ‘침묵의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그것을 통해 케이지는 음악을 연주한다는 의식적 행위가 없더라도 이미 우리는 끊임없이 소리에 노출되어 있고, 그 소리들의 우연한 조합이 생성시키는 음악을 통해 “인생의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도가와 불가의 사상에 심취했던 이답게, 단지 주변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음악적 호접몽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케이지는 화가이자 동료교수였던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하얀 그림>에서도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 바 있다. “오브제가 아닌 관상의 방법”이라는 측면에서 라우센버그의 그림은 그가 음악에 접근하는 태도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야스미나 레자의 연극 <아트>(1994)에서 백지와 다름없는 하얀 캔버스가 세 친구에게 그랬던 것처럼, 존 케이지의 <4’ 33”>는 음악에 대한 우리의 오랜 고정관념을 시험하고 도발하고 있다. 이 곡은 세상 어느 누구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음악인 동시에 지금 이 순간 모두가 듣고 있는 음악이기도 하다. 뒷날의 앰비언트, 인더스트리얼, 노웨이브, 포스트록 따위 경향은 케이지의 관점에서 대중음악에 접근했던 록 뮤지션들의 전위적 실험결과물이었다. 또한 녹음된 소리를 싫어했던 존 케이지가 그 후예들에 의해 레코드에 ‘봉인’되었다는 사실은 우연성 음악의 필연적 아이러니기도 했다.

박은석/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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