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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의 최대 업적은 '전두환·이순자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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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의 최대 업적은 '전두환·이순자 시리즈'?
그 살벌했던 시대의 농담과 은유들
텍스트만보기   정윤수(jys2003) 기자   
전두환과 그 살벌했던 공화국에 대한 기억은 늘 씁쓸하다. 수난의 기록과 상처의 기억이야 이제는 '공식 역사'에 등재되기 시작했으므로 이 좁은 지면을 빌릴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그 씁쓸했던 자괴감, 심각하게 교란되었던 심리적 박탈감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시절은 자책과 두려움으로 뒤엉킨 난처한 시대였다. 늦은 밤 카페에서 들국화 노래도 맘 놓고 듣지 못했고 서울 근교 어디쯤의 여유 있는 산책은 꿈도 꿀 수 없는 사치였다. 그렇다고 연애도 못하고 밥도 못 먹었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연애의 절정 속으로도 찬 바람이 불었고 허름한 설렁탕 속에도 뉘우침이 번져 있었다.

그때, 이른바 '전두환 시리즈'라는 농담마저 없었다면 어쩔 뻔 했는가?

전두환 시리즈, 니가 있어 80년대를 견뎠다

▲ 전두환 시리즈에서 시작된 무수한 정치콩트집들.
ⓒ2005 오마이뉴스 조경국
전두환의 유일한 '업적'이라면 자신을 소재로 한 농담, 그것도 정치적 민주화 이후의 공허한 농담이 아니라, 진짜 농담, 웃기되 그저 웃을 수만은 없으며 그 짧은 우스갯소리에서 그야말로 '심금을 웃기는' 절묘한 농담이 가능하게끔 무자비한 탄압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시인 보들레르의 표현대로 '이빨 달린 웃음'의 마당을 제공해 줬다.

'인간은 개가 아니기 때문에 웃는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전두환 시리즈'로 요약되는 80년대의 숱한 농담들은 그때 그 시절을 겪어야 했던 사람들에게 비로소 농담이 있음으로써 우리가 개가 아니라 인간이며, 그것도 비판의 칼을 문 풍자의 웃음으로 어려운 시절을 버텨낼 수 있는 인간적 품위를 지닌 존엄한 생명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전두환 시리즈는 굉장히 단순했다.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전두환이 책가방을 낙하산인 줄 알고 뛰어 내렸다느니, 소화기를 산소통인 줄 알고 잠수함에서 빠져 나갔다느니 하는 식이었다. 그 중 한편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전두환의 호는 '오늘'인데 그 이유가 당시 9시 뉴스는 항상 "오늘 전두환 대통령은..."하는 멘트로 시작했기 때문이란다. 또, 부인이었던 이순자의 호는 '한편'인데 그 이유가 전두환 보도가 끝나면 바로 "한편 이순자 여사는..."하는 멘트가 이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너무 단순하고 유치해 헛웃음이 나올 정도다.

물론 농담과 우스갯소리와 풍자는 그 직접적 대상과의 힘겨루기에서 늘 패배한다. 가장 극명한 사례는 루드빅이라는 남자일 텐데 그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의 주인공이다.

루드빅은 만인의 여인 마르께따, 아름답고 명석하며 '쿨'한 여인의 호감을 사기 위해 정치적 은유가 배어있는 농담 한마디를 적어 주는데, 이 쪽지가 그만 루드빅의 인생을 완벽하게 파괴시켜 버린다. 열정의 과정을 좀 더 촉진하기 위해 슬쩍 써먹었던 농담은 스탈린주의의 체코 검열 기관에 접수되고 그 이후 루드빅은 대학에서 추방당하고 수용소와 강제 노역장을 거치게 된다.

농담이 한 사람의 인생을 철저히 파괴시킨 것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박살냄으로써 파시즘이 어떻게 유지되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깡패 통치 시대에 있어 농담은 요즘의 '웃찾사'나 '개콘'이 흉내내기 어려운 어떤 정치성으로 단단하게 무장하게 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농담과 우스갯소리는 등장인물의 현실적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다. 농담 속의 전두환은 독재자라는 기표를 달고 있는 비웃음의 역할을 맡는다. 기의는 그 아래로 깊이 스며든다. 이 농담 속에서 전두환은 시골 아이로부터 'X도 모르는 게 대통령이래'라는 핀잔을 듣고, 이 농담 속에서 이순자는 '미스 리'가 되어 그 순간만큼은 무장해제 된 상태로 웃음거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요컨대 농담은 현실에 개입하지 못하되 현실을 생각하게 만들며 현실의 어떤 지점을 비틀어 버림으로써 사실은 그 현실 자체가 비틀어진 것임을 인식하게 만든다. 마치 축제나 여행이 그렇듯이 농담은 현실을 벗어나는 행위이며 동시에 현실의 바깥으로 현실을 생각하게 만드는 '문화적 은유'가 된다.

전두환 시리즈는 80년대식 문화 실천 운동?

물론 농담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쓸모도 없으며 현실의 힘도 갖지 못한다. 어떤 점에서 정치가는, 그리고 심지어 독재자마저도 사진의 이미지를 대중적으로 순화시키기 위해 "나를 코미디의 소재로 써도 좋다"는 식의 발언을 하기도 한다. 때문에 농담은 현실의 무게는 물론이고 자칫 원래의 풍자적 의도 대신 그 대상자의 살벌한 이미지를 누그러뜨리는 역효과를 내기도 한다.

그러나 전두환 시절만큼은 예외다. 전두환은 자신을 닮은 연예인의 방송 출연을 정지 시킬 정도로 경직된 환경과 옹색한 지지 기반 위에서 늘 전전긍긍했던 사람이다. 또 그 어떤 정치적 동의나 절차 없이 권력을 찬탈했기 때문에 자신이 농담의 소재가 되고 우스갯소리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 그야말로 적나라한 풍자와 비판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그런 점에서 다른 수많은 농담과 유머 시리즈와 달리 '전두환·이순자 시리즈'는 적어도 각설탕보다는 훨씬 더 큰 무게와 의미를 지녔던 문화적 실천이었다. 이 시리즈는 그들의 무모하고도 잔인하며 철저하면서도 처절했던 폭력 통치의 현실적 억압 관계로부터 우리를 잠시 이탈하게 만든다. 그 이탈의 '사이버 공간'에서 잔인한 독재자를 절묘하게 비웃고 통렬하게 풍자하는 것은 비록 현실적 긴장관계를 조금도 바꾸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상당한 의미, 그것도 정치적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 시절, 전두환 시리즈라는 농담과 우스개가 있음으로 해서 우리는 현실의 바깥으로 잠시 나가 현실을 비틀고 돌아보고 개입의 여지를 타진할 수 있었다. 그렇게 비틀고 웃음으로써 안면 근육을 과장되게 변형하는 방식으로 절묘한 쾌락을 얻는 영장류임을 확인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들국화가 제대로 들렸으며 깊은 밤의 연애도 절정의 숨가쁜 8부 능선을 넘어갈 수 있었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mbc의 정치 드라마 <제5공화국>이 매우 길게 지은 농담처럼 보인다. 사실 이 드라마에 대한 '호의적' 관심이란 주 시청자들인 남성들, 그러니까 군대 체험을 공유하고 있는 남성들의 은은한 '마초 심리'가 파편적으로 자극됨으로써 발생한 것일 뿐인데, 촌철살인의 농담이 그러하듯이 <제5공화국>은 그때 그 역사를 떠올리게 하고 생각하게 만들 뿐 긍정적 복원이나 부정적 왜곡은 일어나기 어렵다.

현실이란, 그리고 우리 모두가 체험했던 그 역사란 농담이나 드라마로 변형이나 왜곡이 가능하지 않은 견고한 실물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라도 나는 <제5공화국>이 좀더 그 시절을 '바깥에서 생각’하게 만드는 드라마가 되길 바란다.
2005-06-02 00:17
ⓒ 2005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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