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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의 음모이론

 

http://www.youtube.com/watch?v=re8lOhx1wE8&search=beatles

[MV] Tomorrow Never Knows-The Beatles Carto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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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레논의 죽음에 대한 미스테리 > by 전찬일

레이 코널리 著의 ‘존레논’본문과는 다른 관점으로 임진모씨와 함께 번역한 전찬일씨가 책말미에 수록한 부록을 올립니다. 80년도 레이건 행정부 집권과 관련한 CIA 존레논 암살 음모론에 관한 내용입니다. 재미로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참고로 멜 깁슨,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영화 '음모론(conspiracy theory)'에 보면 멜 깁슨이 CIA가 만든 살인 병기로 나옵니다. 손에 한시라도 호밀밭의 파수꾼이 없으면 돌아버리지요(마크 채프먼처럼). 집에 사서 재놓고…
약물과 히피의 대부 제리 가르시아(그레이트풀 데드의 리더), 비판적인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이 CIA 뿌락찌라는 표현이 참 재밌었습니다.

왜 이런 흥미로운 음모론이 나오는지에 대해서는 아래 762번 글부터 먼저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자구에 얽매이지 마시고 문맥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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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레논의 죽음에 대한 미스테리 > by 전찬일

존 레논을 살해한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은 레이 코넬리의 의견처럼 과연 불행하고 머리가 돈 열광자에 불과 할까?
흔히 얘기되고 검찰측의 공식적인 논리처럼 그는 역사에 남기를 간절히 소망한 사이코 팬 또는 과거의 레논 팬에 지나지 않을까? 간혹 외신을 통해서 전해지듯이.. 어떤 정치적 세력의 사주와 세뇌에 의한 (정치적)암살일 가능성은 없을까?

혹자는 '엔터테이너'요 좀더 후하게 표현해 '팝 아티스트'에 불과한 인물에게 웬 암살이냐 할지도 모르겠다. 1963년 11월22일 미국과 전세계의 역사를 뒤바꾼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살해마저 미국인들의 73%가 그렇게 믿지 않고 끊임없이 암살설이 제기되는 상황에서도 리 하비 오스왈드라는 24세의 한 청년의 단독 범행이라고 단정짓는 판국에 그런 반응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JFK에 이어 60년대에 계속 터진 마르틴 루터 킹 목사와 JFK의동생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의 죽음 역시 모종의 암살이라는 심증이 감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얼 레이와 시런 시런이라는 '고독한 광인들'이 저지른 미친 짓일 뿐이라니까
따라서 아무리 신빙성 높은 증거가 드러나고 결정적 사실이 밝혀진다 할지라도 2000년 12월이 지나야 비로서 사면 여부가 새로 결정될 채프먼이 '진실'을 말하지 않는 한 레논의 암살설은 영원히 미궁 속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물론 얼마전 감옥에서 다시 한 번 음모설을 부인한 채프먼이 그간 진실을 말해 왔다고 할수도 있으리라.
그의 주장대로 그는 J.D. 셀린져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의 열여섯 살 먹은 주인공 홀든 콜필드처럼 이 세상으로부터 '사기꾼들'을 제거하기 위해 레논을 선택해 살해 했는지도 모르니까.. 아울러 그럼으로써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읽게 되고 그 결과 채프먼같은 사명을 이 세상에서 실행에 옮길 수 있을런지도 모르니까..

혹은 그를 정신 감정한 대부분의 정신의들과 심리학자들. 더불어 대다수 언론의 의견처럼 그는 '레논이 되고자 한 인간'(The twisted man who wanted to be Lennon)-<타임> 1980.12.22, p.19- 이고 '레논의 타자아' (Lennon's Alter Ego)-<뉴스 위크>1980.12.22, p.30~31 -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한결같이 그런 주장을 펼치게 한 결정적 단서는 채프먼이 80년 10월 23일. 경비원직을 그만두고서 일지에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이 아닌 '존 레논'이라고 서명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가 자기 자신을 확인 시켜주는 정체성을 상실하고 레논과 완전히 동일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레논과 경쟁을 벌이고 있었으며, 따라서 레논을 살해한 것은 곧 스스로를 죽인것이나, 다름없다는 논리다.

사실 그들이 통설이 되어 버린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닌 듯하다. 이 책을 포함 대부분의 레논 전기는 물론, 기사들을 보면 여러 모로 레논과 채프먼의 삶 사이에 유사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둘다 사춘기 시절에 음악에 빠졌고, 록 그룹을 결성했다. 또한 그들은 아이들을 사랑했고 다른 사람들을 헌신적으로 도왔으며 연상 (레논은 7살,채프먼은 4살)의 일본 여성과 결혼했다. 아울러 그 두 사람으 sdiranf에 탐닉하기도 했고 감정의 기폭이 굉장히 심했다. 반면 그들의 삶은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생산적삶과 파괴적삶,성공한 사람과 실패자로.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레이콜먼과 요코마저도 -레논의 죽음과 관련된 통설을 내세우고 받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살해가 정치적 암살이라는 음모설은 존이 죽은 80년 12월 말부터 이미 나돌기 시작했다.
전적으로 무시되긴 했지만 주로 '암살정보위원회'라는 단체가 유포한 것으로 황당한 구석이 많음에도 다음과 같은 주요 메시지에는 일축해 버리기는 어려운 타당성이 있다.
"비록 레논이 진정한 공산주의자는 아니었고 기회주의적으로 경찰 방탄 조끼기금을 희사하긴 했지만 미국정부와 CIA는 신뢰할 만한 정치적 저항자들이 전적으로 없는 상황에서 그저 속마음으로 털어놓는 친사회주의자요 반종교적 온건파 인물조차도 봐줄 수는 없었다!"

그 외에도 미정부 고위관리들은 레논이 다시 녹음작업에 복귀하는 것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으며, 그가 예전처럼 자신의 강력한 영향력을 평화라는 대의를 위해 행사할 것이라고 우려했다는 다소 거창하지만 신빙성이 높은 주장을 펴는 사람들도 있었다. 매카시와 워터게이트의 나라. 이란 콘트라 스캔들과 걸프전의 당사국인 ,더욱이 단적으로'와스프(WASP: White Anglo- Saxon Protestant 미국의 지배적인 특권계급인 앵글로 색슨계 백인 신교도)의 천국인 미국에서 위의 주장들이 사실이었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일까?

이같은 다소 감정적이고 산발적인- 그렇지만 개연성있는 -주장에서 상당히 발전해 레논의 암살설을 ,미 발표된 풍부한 객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논리적이고 설득력잇게 제시하고 잇는 것이 영국의 저명한 범죄학자이며 변호사인 펜턴 브레슬러가 8년간 조사 끝에 쓴 '존 레논의살해'(The Murder of John Lennon, Sidgwick & Jackson Ltd ,Lodon ,1989)라는 책이다. 그는 여기서 사실상 레논의 살해는 CIA에 의해 수년간 구상되고 계획되었으며.. 마크 채프먼은 그를 통제하는 비밀스런 힘에 의해 총을 쏘게끔 세뇌 당했다는다는 과감한 주장을 하고 있다.


채프먼은 레논을 체제를 전복시키려 한 정치적으로 위험한 인물로 간주한 CIA / 미국 정부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또한 그들은 그때 막 선출된 공화당 출신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의 반동적 정책에 반대하는 데모를 벌이는데 일백만 인파를 동원시킬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존 레논이라고 여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브레슬러가 더욱 황당한 주장을 펴고 있다고 느낄지는 모르지만, 그는 수십 년간 법에 종사해 온 전문가답게 FBI, CIA의 레논 관련 문서, 채프먼의 정신 감정 자료들, 채프먼 선고문 등 레논레 대한 글을 쓴 그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한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접근법으로 치밀하게 레논의 암살설의 가능성을 제고하고 있다.
코넬리의 말대로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이란 인물자체가 존레논의 삶에 그 어떤 중요성을 지닐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존레논의 살해(암살)가 전 세계에 준 충격과 파급 효과를 고려해 볼 때, 이상하리 만치 살인범에 대해 폭넓고 깊이잇는 관심과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본필자 역시 의아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브레슬리의 탐구가 다소 지나치게 문제 의식으로 가득차 있고 기존의 통설을 뒤집어엎는데 초점을 맞춘 것 같은 인상이 들지는 모르지만 채프먼이 명사수처럼 신속하고 정확하게 자신의 대상을 저격 살해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아울러 브레슬 리가 집요한 추적으로 밝히고 있듯이 하와이 호노룰루에서 뉴욕으로 가는 그의 항공권은 조작되었었다.
그리고 그는 뉴욕으로 가기전 시카고에서 아무도 모르고 설명할 수는 없는 3일을 보냈다. 게다가 진실을 밝혀 주리라 예상했던 재판은 채프먼 자신이 변호인의 의사에 반하여 갑작스럽게 스스로 유죄를 인정해 버림으로써 벌어지지도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브레슬리가 다른 전기작가들과 여느 평범한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밝혀내지 못한 문제점들이지만, 그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어떻게, 왜 그런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는 그것을 추적하면서 미국 역사에 등장하는 암살들.CIA가 자행한 약물과 최면술을 이용한 마인드 콘트롤 실험. CIA-FBI-YMCA 등의 관련 CIA가 조직 운영해 온 암살 조직 , CIA FBI 의 존레논 감시 등을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술, 전문가다운 방법을 취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의 주장을 무리하게 강요하지 않고 최종적인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는 현명함을 보이고 있다. 즉 그는 흔히 빠지기 쉬운 센세이셔널리즘의 노예가 되지 않으면서 센세이녀서널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는 어떤 정치적 필요에 의해 국민들에게 주어지는 천편일류적 사실이 결코 진실이 아닐수 있다는 깨달음과 의식을 다시 한 번 각성, 환기시키는 훌류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면은 결코 그가 3백 페이지에 달하는 저서로 제시한 내용을 요약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그것은 별도의 작업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고정관념을 심어주지 않기 위해, 아울러 새로운 정보와 시각을 제시하기 위해 조금 더 상세히 그 책을 다루지 않을 수 없다.
필자의 판단에 브레슬리의 저서가 코넬리의 책과 연관하여 독자에게 시사하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채프먼의 삶과 관련된 '세'가지 중요한 일반적 오해이다. 그 첫 번째가 거의 모두가 아무런 의문없이 인정하는 사실로서 채프먼이 열렬한 존 레논 숭배자라는 것. 그렇다면 헌신적인 팬이 왜 그의 우상을 죽여야만 했을까?? 브레슬러에 따르면 사실은 레논을 살해할 당시 마크 채프먼은 레논의 특별한 팬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표현이 처음부터 꼬리표처럼 따라다닌 것은 법원이 임명한 채프먼의 변호사 허버트 아들러버그의 즉흥적인 진술 때문이었다.

80년 12월 9일 오후에 벌어진 법정 신문에서 그는 판사에게 채프먼이 동문서답을 한다고 얘기하면서 단지 "그(채프먼)는 비틀즈를 대단히 칭송했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자기 자신을 중히 여기고 있지 않습니다.."라고 덧 붙였다.
그는 법정 안에서는 특별히 레논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법정 밖에서 기자단에 둘러싸인 그는 겁에 질려 무심코 채프먼이 10살때부터 레논에게 매우 경도되어 있었다고 말하며 자신의 느낌은 아주 혼란스러웠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혼란스러운'은 어디로 날라가 버리고 채프먼은 갑잡스레 레논의 열광적인 팬이 되어 버린 것이다.

사실 그 후 2개월이 지난 뒤 아들러버그가 밝혔듯이, 그가 채프먼을 만나 충분한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단지 25분 동안 급히 이야기를 나눈 다음 법정에 갔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들러버그는 채프먼에게 그가 레논의 팬인가 물어보았는지 아니면 그가 자진해서 그런 얘기를 했는지, 또는 '팬'이라는 말을 도데체 언급이나 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검찰특 얘기 역시 채프먼이 14살때부터 24살 사이인 지난 10년간 존 레논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 물론 그가 학창시절 비틀즈나 존 레논에 빠졌다 해도 그것은 예외적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당시는 수백만의 청소년들이 다 그랬으니까. 따라서 그는 결코 헌신적 레논 팬인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그가 살해 현장에서 체포될 당시 14시간에 해당하는 비틀즈 테이프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된것인가?? 만약 카세트 녹음기와 테이프가 정말로 있었다면 그는 레논 팬은 아니었더라도 비틀즈의 열광적 팬이란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를 체포한 뉴욕 경찰 스티브 스피로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채프먼이 소지하고 있던 것은 책 '호밀밭의 파수꾼' 그의 뉴욕 호텔 객실 키. 하와이 은행 비자카드가 전부였다는 것. 따라서 그것은 어떤 상상력이 풍부한 기자가 꾸며낸 이야기인 셈이다. 레논 살해 후 한 달이 엄게 하와이에서 마크의 행적을 조사한 호노눌루 경찰서 루이스 L. 수자 경감 또한 같은 의견을 피력했다.

마크 채프먼과 관련된 두 번째 오해는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과의 관계. 그는 알려진 바처럼 레논을 살해한 후 총은 내던지고 조용히 그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책표지 안에다 '홀든 콜필드로부터 홀든 콜필드에게. 이것은 나의 이야기이다.'라고 적어 놓기까지 했다. 그는 1988년 2월 미국과 영국에서 방영된 케빈 심이 만든 영국 TV 다큐 프로<존 레논을 살해한 사나이>에서 자신이 존 레논을 살해한 이유는 세상에 널리 알려져 그 책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그 사건이 벌어지기 바로전까지 채프먼은 그 책을 읽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전세계의 수많은 기자들이 가능한 온갖 각도로 다양하게 그 사건을 다루기 위해 채프먼의 고향을 찾아 갔지만 마크의 학창시절 친구들이나 교사들 중 단 한 명도 그 책의 주인공과의 동일시는 커녕 책자체에 대해 언급한 예를 볼수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 역시 과장, 조작 되었거나 채프먼이 의도적으로 그책이 청소년들에게 미친 영향력을 감안해 일부러 강조할 수도 있었다.

브레슬러는 이 저서를 다완성해 출판사로 보내고 89년 6월2일 마크 채프먼에게 편지를 보낸 5월 후 마크가 자신이 음모에 관련되어 있다는 저자의 주장을 부인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책의 맨 마지막에 각주로 밝히고 있다. 마크는 "레논씨의 살해 이유는 매우 복합적입니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 그것들을 감적으로 구분하려고 여전히 애쓰고 있습니다."라고 적어 보낸 것이다. 아울러 그는 자신의 삶을 밝혀 주고 목적을 부여한 예수님께 자기를 바쳤다고 주장했다. 그가 그렇게도 중시하던 '호밀밭의 파수꾼'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 오해는 마크가 사귀기 힘들고 혼자 있기를 더 좋아한 '외톨박이' 였다는 주장이다. 그의 모친은 1987년 <피플>지의 짐 게인즈에게 단 한 번의 인터뷰에서 그에 대해 강력하게 반박하고 있다. 그녀에 따르면 그는 친구도 많았고 밖에 나가서 좀 놀라고 말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종합해 봐도 그는 언제나 쉽게 여자얘들과 어울렸고 비중있는 연애사건도 2건있었다. 게다가 그는 아이들을 무척 좋아했고 잘지냈으면 남자들과도 깊은 관계를 유지했다.

이처럼 채프먼에 관련된 일반적 믿음이 객관적으로 확증된 사실이 아님에도 그가 대부분의 암살범들과 마찬가지로 또 한명의 정신이상자에 불과 한가. 더욱이 재판부마저도 그가 정상적이라고 판단해 20년부터 종신형까지 징역을 살 수 있다는 판결을 내린 마당에. 채프먼이 재판을 받기도 전에 자신이 유죄임을 시인한 것이 진정 그가 미쳤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정작 본인도 재판당국도 그가 정신이상 이 나니라고 하는 상황에서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그 사실에 집착하는 것일까?? 사실 그가 미쳤다는 것이 요코는 물론, 진실보다는 현실이 더 중요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속편한 생각일 터이다.

유럽 정치가도 한나라의 왕도 대통령도 아니며, 그렇다고 교황도, 종교지도자도, 노벨수상자도 아닌 일개 팝스타가 죽은거 가지고 왜 크토록 심각한 의미를 부여하여 음모,암살 운운하는지 모르겠다는 사람들도 많았고 지금도 역시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그의 죽음에 직면해 보인 슬픔과 분노의 의미는.
JFK의 죽음 이후 한 사람의 죽음이 그토록 엄청난 여파를 미친적이 없다는 그 많은 증언들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
비록 존 레논이 정치적 음모에 의해 암살당햇다는 것을 백일하에 밝힐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간 통념으로 굳어진 나이브한 주장들은 수정,폐기 처분돼야 하지 않을까?

채프먼이 레논을 살해함으로써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레논이 사기꾼이며 평화와 저항을 설파하면서도 다른 초특급 부자 자본주의자들처럼 엄청난 부의 결실을 만끽하고 있던 억만장자 록 스타라고 굳게 믿어 그를 제거하려 했다는 ,또는 인생의 낙오자로서 레논과 같은 세계적 인물을 죽여서 유명해지기를 꿈꾼 '고독한 광인'이었다는 주장은 말이다.
국내의 보통 독자들은 물론 열렬한 비틀즈 / 레논 팬들이라 할지라도 존 레논이 그긔 세대에서 가장 정치적으로 능동적인 록스타였고 좌파적 색채를 띠고 호전적인 활동을 펼쳤다는 것은 거의 모르리라.. 그렇지만 그 진실성은 차지하더라도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가 곧 들어설 반동적 레이건 정권에 반대하는 집단적 저항의 집결지 역할을 할 수 있는 거의 독보적인 강력한 영향력을 느꼈다는 것은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따라서 그 도구로써 채프먼이 조종받고 이용됐다는 브레슬러의 주장이 나름대로 설득력을 지니는 것이다.


어쨌든 레이건의 권력 획득과 레논이 예전의 거대한 존레논으로의 복귀가 일치했다는 것은 분명한 현실이었다.

그는 음악을 통해 자신의 위력을 입증하려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의 정치,사회 활동을 벌일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컴투게더'(Random House, New York, 1984)의 저자 존위너가 밝히고 있듯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잇지만, 그가 저격당한 바로 그 주에 그는 처와 숀과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날아가 웨스트 코스트에서 스트라이크를 벌이는 일본계 미국인 노동자들을 지지하는 집회에서 행진할 예정이었다." 그는 이미 비행기 티켓도 구입해 놓은 상태였다. 그는 다시 거리로 나설 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브레슬러는 이런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있다.
즉 레논은 또 다시 '정치적 동물'이 되고 있는 것이니 만큼 생존해서는 안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의 이유가 명백해지기전, 세상 사람들이 예전의 레논 <평화에게 기회를>을 부른 바로 그주인공이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전 그는 제거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브레슬러는 자신의 주장을 단언하고 강요하지는 않는다

단지 그는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진실'에 근접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관심사라고 못받고 있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간 강요받아 온 사실과 진실은 결코 진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진실을 쫓는 작업은 결코 중단되어서는 안된다 . 그것이 바로 브레슬러 저서의 진정한 가치이며, 필자가 이런 글을 덧붙이는 목적이다. (Rest In Peace J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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