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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죄는 덮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성경 텍스트 연구는 이래 하는기다.

 

과거의 죄는 덮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등록 : 이사야 (tulip) 조회 : 1898  점수 : 435  날짜 : 2005년9월5일 16시16분 
한 일년 전에 과거사 진상조사 문제를 놓고 어느 집사님과 장시간에 걸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이분은 과거사 진상 조사에 대해서 기독교인들, 특히 목사들이 동조하는 것을 납득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주장하시는 이유를 간략하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 첫 째는 노무현 정부가 자신의 정적들, 특히 마사오의 딸(내가 왜 이렇게 부르는지 뒤에 가면 알 것임)을 제거하려는 음모라는 것이고, 둘 째 이유는 기독교인이라면 자신의 모든 죄를 예수님께서 사해 주셨는데, 그런 은혜를 받고서도 다른 사람의 죄를 정죄하는 것은 잘 못된 것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첫 번째 이유에 대해서는 그 집사님이 나이가 많으신(60세) 분이고, 본래 경상도가 고향이시고, 그동안의 정치권력들이 늘 그렇게 해왔던 것에 대한 경험칙에다가 조중동에 해악에 그대로 노출되셨기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두 번째 주장에 대해서는 참으로 충격적이고 어이 없는 억지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땅에 기독교인이라 자칭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집사님과 동일한 생각을 성경적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왕에게 1만 달란트 빚진 자(현재로는 약 30-40조에 해당)가 그 돈을 탕감 받았는데, 100 데나리온(약 1000만원 미만) 빚진 자를 만나서 용서해 주지 않자 왕이 도로 1만 달란트 빚진 자를 감옥에 넣었다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즉, 이렇게 큰 은혜를 입고서도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 될 자격이 없다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것을 들어서 위의 집사님과 같은 태도가 과거사에 대한 성경적인 태도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과연 성경은 과거의 죄에 대해서는 그냥 용서하라고 하실까요? 그건 성경을 모르는데서 나오는 무지함입니다.


성경에 사무엘하 21장을 보면 위의 주장에 아주 정면으로 대치되는 과거사 진상 조사, 그리고 처벌 사건이 나옵니다.


‘다윗 시대에, 세 해 동안이나 흉년이 들었다. 다윗이 주 앞에 나아가서 그 곡절을 물으니, 주께서 대답하셨다. “사울과 그의 집안이 기브온 사람을 죽여 살인죄를 지은 탓이다”(삼상21:1)’


흉년이라는 재앙이 생겼는데(지금으로 말하자면 경기가 완전히 바닥인데), 그 이유에 대해서 분석해 보았더니(이스라엘은 종교 국가니까 신께 물어 본 것이고, 지금은 시장주의 사회니 시장을 분석해야겠죠^^) 과거에 있었던 학살 때문이라고 답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왕 다윗은 이 피해자들인 기브온 사람들을 불러다 놓고 물어 보았습니다. 어떻게 해주면 당신들 마음이 풀리겠느냐고? 그러자 기브온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사울이나 그의 집안과 우리 사이의 갈등은 은이나 금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을 죽일 생각은 없습니다” 다윗이 그들에게 물었다. “그러면 당신들의 요구가 무엇이요? 내가 들어 주겠소” 그들이 왕에게 말하였다. “사울은 우리를 학살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영토 안에서는, 우리가 어느 곳에서도 살아 남지 못하도록, 우리를 몰살시키려고 계획한 사람입니다.(21:4-5)’


이거 점점 우리 현대사와 비슷하게 오버랩되지 않습니까? 구데타 군사 독재 정권하에서 무고한 사람들, 민족주의자, 민주주의 운동가들이 빨갱이라는 허울을 쓰고 이렇게 죽임을 당했었죠. 이처럼 당한 기브온 사람들의 요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의 자손(사울의 자손) 가운데서 남자 일곱 명을 우리에게 넘겨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주께서 택하신 왕 사울이 살던 기브아에서 우리가 주 앞에서 그들을 나무에 매달겠습니다.” (다윗)왕이 약속하였다. “내가 그들을 넘겨 주겠소”’


이것은 사실 기브온 사람들이 당한 고통에 비하면 너무도 미약한 조치입니다. 그럼에도 일곱 숫자는 완전을 의미하는 상징수였기에 이런 상징적인 과거사 청산 행위로 인하여 기브온 사람들의 원한이 풀리게 되었고, 그 땅에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다윗이 지시한 모든 명령을 따라서 그대로 한 뒤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돌보아 주시기를 비는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셨다(21:14)’- 이상 표준새번역 참조.


이처럼 공의가 실현되고 나자 하나님께서 비로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것은 농사가 잘 되었다는 의미이고, 이것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경기가 좋아졌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뿐만 아닙니다. 성경은 사람들의 과거의 죄에 대해서 아주 철저하게 집고 넘어갑니다. 성경에는 이에 대한 예가 너무 많지만 간단한 것 하나만 더 말씀 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족보가 나옵니다. 거기에는 아주 희한한 문구가 하나 나옵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마1:6)’


눈치 채셨습니까? 다윗은 왜 남의 아내에게서 자식을 낳고 그럽니까? 우리야란 다윗의 충성스러운 특수 부대원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간통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들통날까봐 우리야를 전투에서 죽게 만듭니다. 이것에 대해서 당시에도 하나님의 책망과 문책을 당합니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몇 백년이 지난 후에라도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밧세바는 우리야의 아내라고 하시고 계시며, 다윗은 그 우리야의 아내를 훔쳐가 도둑놈이라고 고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래도 과거에 지은 죄는 과거 문제니까 현재에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그것이 기독교적이라고 우길 겁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죄를 미워하시는 지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소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의 문제를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으신다는 가장 큰 사건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께는 공의 품성이 있으셔서 죄를 참지 못하시기 때문에 그 죄의 문제를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서라도 인간들의 죄를 대신 다 치루도록 하신 것입니다. 복잡한 문제니까 그냥 하나님께서 죄를 없는 것으로 치지 않으셨습니다.


“과거사 문제는 과거의 문제이니까 그냥 넘어가자”


이건 세상 사람들이 혹시 여러 가지 성향과 정치적인 이익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자들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 이 땅 위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혹여 이 일로 핍박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왕따를 당한다고 하더라도 이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억울한 자들의 그 억울함이 풀릴 수 있는 상징적인 조치라도 취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적인 것이고, 성경적인 것입니다.


용산에서 젊은 목사 이사야 드림.


p.s. 제가 블로그를 개설했습니다. 많이 방문해 주시고, 의견을 나눠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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