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스타K: 탈숙련시대, 열광과 퇴행의 드라마

[짧은글]

먼저 밝혀두자면, 다음 포스팅은 여러 지인과의 만담과 잡담에서 나온 내용들을 일부만 요약한 것에 불과하다. 내 생각보다 오히려 그네들의 생각이 더 많을 것이다. 

 

윤삼님의 [<슈퍼스타 K>의 오묘함 … 참여하는 관객성, 친밀한 관음증] 에 관련된 글.

문강형준의 슈퍼스타K2, 가장 황홀한, 그러나 끔찍한 판타지

하재근의 보통총각 허각, 성공시대 & 신자유주의

한겨레신문의 진짜 별들의 세계서 성공? 또다른 하늘의 별따기!

위클리경향의 슈퍼스타K는 ‘방송쇼 종합세트’

 

문화비평의 지나친 과잉을 지양하는 편이라, 블로그에다가 문화비평은 하지 않겠다는 주의였는데, 간만에 입과 손이 좀 근질거려서 몇 자 남겨둔다. 문제는 다름 아닌 <슈퍼스타K>(이하 ‘슈스케’)다. 워낙 많은 글들이 있지만, 참고할 만한 글들만 위에 링크해 둔다. 내가 보기에, 대략  슈스케를 다루는 글은 세 가지 부류로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슈스케 자체의 진행과정과 출연자들을 논평 -- 정확히는 ‘연예가 중계’ -- 하는 글, 둘째는 슈스케를 MB정부와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주장에 방증으로 끌어들이는 글, 셋째는 슈스케 자체의 문화적, 사회적 의미를 다루는 글이다. 첫째와 둘째 부류의 글들은 온오프라인 매체에서 넘쳐나고 있고, 셋째 부류는 많지는 않지만 여기에 링크한 글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모두 일리는 있다.

 

하지만 개인적인 인상평가에서부터, 기성 연예인들의 팬심발휘, 여야 정치권의 논평, 나아가 연예 면이 아닌 신문 사설에까지, 슈스케에 대한 '뽐프질'이 넘쳐 나는데, 좀 차분히 살펴볼 필요도 있는 것 같다. 슈스케가 등장하는 글에서 대략적으로 표출되는 시각은 세 가지로 갈리는 것 같다. 첫 번째는 이른바 불안정 노동자-88만원 세대-루져들...로 이어지는 하류인생들이 ‘허각’이라는 인물에 열광했다는 것, 또 이런 논지를 확장하고 반박해서 일종의 ‘참여’와 ‘민주’라는 코드를 문화산업이 이용한다는 것, 유사한 방식으로 두 번째는 슈스케가 이런 노동자-88만원 세대-루져를 양산하는 현실 자본주의를 은폐하는 문화산업(특히 엠넷)의 이데올로기적 상품이라는 것, 세 번째는 출연자들의 향후 성공 가능성과 관련 된다 -- 단, 심사위원들에 대한 호불호는 넘어가자. 단지, 결승전에서 윤종신에게 '천재'라는 호칭을 사용해서 사실 뒤집어졌는데, 그건 좀 아닌 듯.  

 

먼저, 잠시 세 번째 시각부터 살펴보면, 한겨레신문 기사에서도 나타났듯이, 슈스케 출연진들이 전문 가수로 살아남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유는 매우 단순한데, 문화산업, 특히 음악 산업의 냉정한 논리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음악 산업은 음악 소비재의 '참신함'과 ‘레퍼토리’를 끊임없이 창출해야 한다. 그런데, 슈스케 전 출연자들을 냉정하게 평가했을 때, 기존의 오버와 언더와 비교해 볼 때 어떤 차별적 요소를 찾기가 힘들다. 음악 산업은 이른바 49%의 진부함에 51%의 참신함, 즉 흥행을 만들기가 힘든데, 출연자들이 어떤 참신함이 아니라 기존의 어떤 장르, 즉 진부함에 어필한 면이 크다. 예를 들어, 장재인-홍대 씬. 따라서 출연자들은 엠넷의 쇼를 위한 훌륭한 소재일지언정 음악 산업의 측면에서는 매력적이지 않다. 향후 이들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슈스케1의 출연자들이 아직 인지도 있는 가수가 되지 못한 건 분명 이런 원인이 크게 작용한다. 또한, 이런 측면 이외에 2천대 이후 등장한 레퍼토리 생산 방식의 변화도 중요한데, 아래에서 언급하겠지만, 간단히 말해 장르나 가수를 통한 ‘음악’ 레퍼토리의 변천이 아니라 ‘사생활’ 이야기를 통한 래퍼토리의 증가이다. 슈스케 출연진은 이미 이런 이야기를 너무 많이 사용했다. 여하튼 냉정하게 말해, 시청자들은 음반 기획사 출신이 아닌 사람들이 기성 가수들처럼, 그러니까 이미 한국인들의 음악 인식지도 상에 위치한 상품들(가령, 목소리)을 얼마나 잘 모방하는지를 즐겼던 셈이다. 한국 음악 산업은 그리 진폭 좁지도 않고 깊이가 얇지도 않다.

 

나는 대체적으로 첫 번째 시각과 두 번째 시각에 동의한다. 단, 허각이란 인물을 오늘날 불안정 노동자-88만원 세대-루져...와 단순히 동일시하거나, 슈스케 자체가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적 문화상품이라는 단순화는 피해야 한다. 이런 관점들은 불안정-88만원 세대-루져가 아닌 자들에게 호소하는 슈스케의 흥행을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고, 2천년대 이후 변화한 문화생산의 논리, 특히 음악 산업의 전략을 간과하는 측면도 있다. 그런 관점에서, 방향을 조금만 틀어보자. 단순화를 무릅쓰자면, 현재 한국사회는 하나의 사회에 두 개의 인간 부류를 겹쳐둔 상태이다. 상류인생을 대표하는 형상은 '핵심인재', 즉 이른바 자기계발하는 자들이자 스펙을 쌓아올리는 개인들이라면, 하류인생은 불안정 노동자로 대표되는 '쓰레기' 소모품이다. 눈치 챘겠지만 이는, 경제적으로 이중노동시장에 대응되는 주체형태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내용을 이미 상식적인 이야기일 것이다. 여기서 다른 상식을 덧붙여보자. 그것은 한 사회 구성원의 삶과 심성을 조형하는 '내러티브'의 구성방식 변화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전 87년 체제에서 -- 신자유주의는 그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었기에 이런 표현을 임의적으로 사용하면 --,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국가와 민족, 기업, 군대, 학교 등등에서 정해준 위치에서 순종하고 열심히 일하면 안정적인 벌이가 보장되고 가정을 꾸리고 집을 마련해서 노후를 대비하는 그런 집합적 내러티브 말이다. 예를 들어, <국민교육헌장>을 떠오려보면, 우리에게 국가와 자본은 있을 자리와 임무를 아주 정확하게 지시하고 있다. 물론, 이런 내러티브가 현실과는 엄청난 괴리가 있지만,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미래' 서사가 통용되었다는 것이다. 근검절약하면 어느 세월에는 중산층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사회적 '꿈', 그리고 마이카와 마이홈이라는 중산층적 라이프스타일을 누릴 수 있다는 ‘희망’ 말이다. 무엇보다도, 87년 체제(가령, 관료제-연공급-정규직)의 정서는 기본적으로 숙련을 통한 경제적, 사회적 성취가 가능하다는 논리이고, 이는 장인정신이 미덕이 되고 한국인의 ‘공통적’인 심성에 크게 작용했던 시기였다.

 

이에 비해, 97년 체제 이후에 상류인생은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하는 기업가정신 -- 이것은 어떤 경우에는 '핵심인재'로, '신지식인'으로, '자기계발'로, '아침형 인간'으로, '시테크' 등으로 나타났다 -- 추구하므로, 이들에게 안정적인 삶이란 곧 인생의 열패를 뜻하는 것이다. 이들의 내러티브에는 '안정'이 아니라 '변화'와 '도전'이 이제 중심 테마가 되고, 안정적인 시대의 장인정신은 극복해야할 대상이다. 반면에 하류인생은 극단적으로 말해 미래의 서사가 없는 사람들이다. 꿈과 희망 자체가 없는 삶. 이들에게 삶은 정체 아니면 퇴보인 것이다. 이들은 자본생산에 종속되어 최대한의 에너지를 뽑아내다가 버려지는 쓰레기, 혹은 말초적인 생리리듬에 따르는 자동기계일 뿐이다. 다른 식으로 말해서, 생산과 소비의 유연성을 위한 인적자원인 '탈숙련된 노동자'인 것이다. 여하튼, 97년 체제가 만들어낸 두 가지 인간형은, 한쪽은 '불안정' 자체를 조건으로 설정하고 이에 대한 ‘도전’을 핵심적인 테마로 만들고, 다른 한쪽은 ‘불안정’ 자체를 체념적으로 수용하고 나아가 어떤 이야기도 자기 인생에 체화하지 못한다. 이런 두 가지 이야기 작성방식과 심성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인’ 측면은, 핵심인재와 쓰레기 모두 ‘안정적인’ 미래 서사가 없다는 점이다. 우리 모두는 ‘유동하는’ 정체성의 시대,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유연(화)생산체제 시대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 오늘날 문화산업, 특히 미디어의 논리가 파고드는 지점이 있다. 몇 해 전부터, 케이블TV와 공중파에서 각종 리얼리티 쇼가 성행하고, 최근에는 아이돌 그룹들이 데뷔하기 전부터 일상생활이 공개되고 -- 물론 어느 정도 상품성이 갖춰졌을 때부터 -- 스타로 올라선 이후에도 끊임없이 일상을 공개한다. 이뿐만 아니라,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고, 온라인 매체는 이를 중계한다. 이를 사생활의 상품화라고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은 문화상품이 어떤 내러티브를 창출함으로써 소비자-대중에게 소구하려는 것이다. 예컨대 무한도전과 1박2일의 경우, 출연자들은 그냥 나와서 '노는' 게 아니다. 팩트만 말하자면, 출연자들은 정말 사소한 것들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그들 사이의 배경지식을 유포하여, 우리네 삶에 그들의 삶을 매체를 통해서 이야기를 엮어내는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영화 DVD에 포함되고 영화정보프로그램에 소개되고 있는 메이킹필름과 코멘트리도 비슷한 맥락이다. 현재 문화산업에서 이런 스토리 창출 능력은 위험 감소 방식이자 핵심 경쟁력이다.

 

특히, 음악 산업은 이에 전형적인 형태를 띤다. 과거의 음악은, 슈스케와 비교하자면 대학가요제를 생각하시면 이해가 될 텐데, 음악성과 가창력이라는 기량(혹은 숙련)에 대한 평가가 중요했다. 인순이는 혼혈이 아니라 음악적 요소 때문에 성공한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닌 것이다. 대학가요제에서 대중은 좋은 노래와 가수를 찾았지 신해철이 개인적으로 어떤 인생역정을 밟았는지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반면 요즘 아이돌은 이야기를 팔아야만 한다. 가장 대표적으로 빅뱅과 비스트, 이효리를 대상으로 하는 엠넷 등의 프로그램이 있었다. 물론, 음악 산업이 왜 이렇게 변했는가에 대한 복합적인 원인, 가령 음원의 디지털화 등은 일단 제쳐두자. 여하튼, 슈스케도 이런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단지 차이는 ‘양키’스런 무대와 진행과 함께, 아직 데뷔하지 않는 아마추어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다. 역설적으로 이들은 계속해서 만들어내야 할 이야기를 이미 써버렸기에, 생방송 무대에서 영광을 누리는 순간 모든 것을 잃게 될 운명인지도 모른다.

 

다시 돌아와서, 이처럼 문화산업이 일종의 스토리텔링으로 상품을 창출하는 것, 다시 말해, 새로운 문화자본의 논리가, 왜 대중에게 먹히는가? 앞서 언급한대로, 다소 무리 있는 가설이지만, 한국인들이 일상에서 어떤 ‘안정적’인 내러티브를 더 이상 체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내러티브, 정확히는 미래 서사가 사라진 공백에 문화상품들이 안정한 망,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뭔가 상실한 듯이 느껴지는 시나리오를 통해 우리네 심성에 소구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왜 슈스케는 그렇게 열광을 일으켰는가에 대한 조심스런 결론도 내릴 수 있다. 슈스케라는 쇼가 화면에 보여주는 전시하는 것이, 우리가 익숙했던 과거의 시나리오와 심성을 체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화하자면, 장인적 노력과 숙련을 통한 성공이라는 내러티브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어떻게 보면, 슈스케는 굉장히 퇴행적인 노스탤지어 쇼, 정확히는 드라마이다. 아마도, 불안이 시대의 지배적 정서가 되고, 또한 끊임없이 불안정을 조장하는 시대에서, 슈스케는 우리에게 안정적인 시대를 회고하면서 그나마 심리적 안정을 추구하게 하는 ‘태중’ 드라마일 것이다. 그러므로 슈스케는 단순히 하류인생, 불안정 노동자-88만원 세대-루져...만이 아니라, 상류인생을 포함해서 보편적으로 '먹힐' 수 있는 것이다. 97년 체제가 만들어낸 인간유형들에 소구하는 문화자본의 논리가 이런 게 아닐까? ‘과거를 팝니다.’ 혹은 ‘과거라는 알약을 팝니다.’ 자유롭게 전세계적으로 이동하는 자와 실제로는 땅에 묶여 있지만 그들을 동경하는 자들, 이 모두에게 말이다. 하지만, 나는 굳이 이런 ‘알약’을 토해버리라고는 하고 싶지 않다. 이것이 향락까지는 아니더라도, 너무나 우리에게 ‘구체적’인 삶이기 때문이다. 그런 삶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도, 너무 ‘열광’하지는 말자. ‘거리두기’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조금이라도 방향을 틀수 있지 않을까?

 

예정보다 너무 길게 쓰다 보니 논지가 불명확해졌지만, 한 가지 덧붙이면, 이런 측면에서, 2천대 등장한 일련의 이병훈 표 사극, <허준>, <대장금>, <이산> 등은 탈숙련-기업가 정신의 시대에 장신정신이라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 최근에 끝난 <동이>가 생각보다 '열풍'을 일으키지 못한 이유는 주인공 동이가 원래부터 뭔가를 '마스터' 할만한 인물로 설정되지 않았던 탓도 크다. 마찬가지로, 2010년 ‘최고’의 드라마 중 하나인 <제빵왕 김탁구>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반면에, 작년의 ‘최고’ 드라마는 SBS에서 나왔는데, 하나는 ‘최고’의 복수 막장극, <아내의 유혹>이었고, 다른 하나는 ‘최고’의 착한 드라마, <찬란한 유산>이었다. <찬란한 유산>이 <제빵왕 김탁구>의 선배라면, <아내의 유혹>은 그 이면인데, 자리 잃은 자들의 끊임없는 복수의 윤회를 적나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드라마, 특히 <제빵왕 김탁구>와 <아내의 유혹>은 따로 논해 보려고 한다.

 

정말 사족이지만, 나는 MB가 당선되고 노무현이 당선되는 핵심에도 이런 내리티브적 요소가 있다고 본다. 한계는 있지만 박근혜를 제외하고는 기성 정치인 중에 이런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인 서사 -- 혹은 사연 --를 체현한 사람은 없다. 예컨대, 정동영, 손학규, 강기갑, 이정희 등을 떠올려보면, ‘공중부양’ 에피소드나 얼굴만 떠오르지 않는가? 최근, 손학규 대표의 복귀는 약간의 이야기 거리를 제공했지만, 이들에게는 스토리 창출 능력도, 그런 스토리를 대중들에게 동일시시킬 능력도 아직 보여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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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9 16:23 2010/10/29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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