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뒤에 든 단상...

[잡생각]

오랜만에 학부에서 강의를 하고 나서 감상을 적어둔다. 밤 12시를 지난 시각, 아는 분이 K대에서 교양강의 중인데, 급한 집안일로 휴강을 해야 하나, 저번 시간에도 휴강을 한지라 연속으로 휴강하기에는 좀 거시기 하다고, 땜빵을 부탁해왔다. 강의 내용은 여가에 관한 것인데, 알아서 좀 해달라고 하길래, 대충 알겠다고 접수했지만, 곁다리로 여가를 취급하기는 하지만, 막상 강의를 한다고 하니까 뭘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그냥, '왜 우리는 기본적인 여가도 누리지 못하는가'에 대해서, 특히 1997년 이후 고용불안과 장시간 노동의 연속으로 인한 조건을 중심으로 내용을 짰다. 뭐, 유연축적 시대를 맞아, 상층 노동자들은 고용불안과 경영담론의 가치를 내면화한 탓에 자기계발과 미래대비하기 빠빠서 여가가 없고, 하층 노동자들은 워낙 임금이 바닥인지라 장시간의 힘든 노동을 반강제적으로 감내할 수 박에 없어서 여가가 없다는, 그래서 하층 노동자들은 말초적인 형태 -- 도박, 성매매, 게임, 노래방과 음주, 그것도 싸고 빠르게 격렬하게, 내일 다시 출근할 정도로만 -- 의 여가가 주도하고, 상층 노동자들도 말초적이긴 마찬가지나 기업 생산성과 경력 추구를 위한 소비와 라이프스타일의 개발에 치중된 형태라는, 여기에 TV와 등산과 같은 형태를 더하면 대략 오는날 여가 형태가 나온다는, 그리고 이 시대의 디즈니랜드인 '마트' 몰링이 가족 여가의 대부분이라는, 다소 뻔한 내용이다. 뭐, 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평소 생각에서 약간 살만 붙인건데, 그냥 생각하기 싫어 날로 먹겠다는 심사였지만, 밤 12시가 지나서, 갑자기 새로 강의안을 짜기도 뭣하잖은가?

그래도 SKY에 속하는 K대생들인지라, 앞으로 상층 노동자나 전문직 '핵심인재'들이 될 가능성이 높고, 또한 워낙 좋은 집안 자제들이 많은데다가, 이들이 제조업과 밑바닥 인생들에 관한 상식이 부족할 것 같아서, 나름 의미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강의도중 한 80명 정도 들어오는 강의실에서 그래도 한 10명만 재웠으니, 나름 선방했다고 해야 하나? 걔들이 학습태도가 좋은 건지, 흥미가 있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하지만, 명문대생들 앞에서, 특목고 출신을 거진 30% 이상 뽑고, 영어강의를 따라오는 비율이 50%가 넘는 학교에서, 일년에 고시합격생을 기천명씩 배출하는 학교에서, 시급 4천 얼마 노동과 비정규직, 자영업의 현실이 아무리 비참하다고 말해도, 얼마나 마음에 닿았을까? 말하는 나도 좀체 포인트를 못 찾겠는데. 쩝, 아, 요새 명문대에서 강의하는 게 이런거구나. 웬지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은 기분? 그래도, 강의 끝나고, 한 학생이 찾아와 '그럼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되나요?'라고 물어보긴 하더라. 하긴 이른바 '88만원 세대'니까. 뭐, 할 수 있는 건 다해야죠, 라고 답했지만. 속으로는, 실은 '여러분이 희망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 말은, 강의를 마치면서, 끝내 하지 못했던 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기득권자를 예비하고 있고 이미 '승자'의 가치를 내면화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자신있게 '당신들이 진보의 희망이다'고, 말하지 못하겠더라. 그건 너무 무책임한 발언이고!!! 그냥 눙쳐서, '투쟁을 하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앞으로 심정적인 지지는 보내라고' 마무리 지었다.

그런데, 인in서울이 아닌 대학교 학생들 한테도, 투쟁하라고 못하겠더라. 그 역시도 무책인한데다가, 그냥 안쓰러워서, 그래도 지잡대는 아니기에 '비정규직으로 입직하지 않게 열심히 하시고...'로 마무리했던 기억도 있다. 나름 기업 인사채용의 실태를 어느 정도 알기 때문에, 가령 최근에 공기업에서 공개된 출신학교와 학교의 차등 점수제를 학생들에게 '사실'로 전달하면서, 여러분들은 기득권자가 아니니 열심히 뭉쳐야 합니다, 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턱 걸릴 수밖에 없다. 솔직히 그날, 무지 속으로 쪽빨렸다. 아, 내용은 정말 진보적인데 결론은 정말 현실 순응적이구나! 내가 보수적으로 변한 건지, 그네들에게 강권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위치에 있는 건지. 어느 순간, 20대들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자신있게 입을 떼지 못하겠더라. 그런 때는, 그냥 무미건조하게 마치 객관적 이론과 현실만 전달하는냥 거리를 두는식으로 말을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씁쓸하다. 물론, '강남좌파'가 있듯이 '강북우파'가 있다는 사실을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명문과 비명문으로 사회적 분절선을 나누는 것의 한계도 잘 안다, 하지만, 내 말은 어떤 익명의 장소에 가서 요즘은 뭐라고 일률적으로 주장하기가 참 난처하다는 것이다. 청중들이 워낙 분해되어 있거나, 아니면 반대거나하니 하는 말이다. 아님, 이것도 나의 지레 짐작인지 모르겠다.

 

여하튼, 요새는, 그냥 나가서 혁명하자는 식으로 언급하는 사람들을 보면, 요새는 그냥 '신기하다.' 너무나 '낭만적'이라서, 그리고 너무나 '순진해서' 무슨 천연기념물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궁핍하면 봉기한다는, 가설보다 궁핍하면 먹고살기 바쁘다는, 주장을 더욱 많이 듣는 현실에, 알면 투쟁한다는, 주장보다는 알면 겁쟁이가 된다는, 가설을 더욱 많이 듣는 현실에 말이다. 이른 마당에 들고 일어나서 점유하자는 주장, 좋기는 한데, 안하는 것 보다 훨씬 나은 편인데, 그게 누구한테 하는 소리란 말인가? 먹고살기 바쁘고 겁쟁이인 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심리상태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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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9 18:42 2010/11/29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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