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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7. 디지털 행동당, 전자교란극장(EDT)

디지털 행동당, 전자교란극장(EDT) 이광석 / 네트워커 편집위원 2000 년 1월 3일 디지털 사빠띠스따 폭격기들은 멕시코 치아빠스의 아마도르 헤르난데즈에 주둔한 멕시코 정부군을 향해 동시다발 폭격을 감행했다. 신자유주의의 기치로 국민경제의 개방과 수출 의존적 성장 정책을 앞세워 노동자, 농민의 목을 조르던 친미 멕시코 정부의 폭압에 저항하는 대규모 전자 네트워크 공세였다. 라깡도나 정글의 민족해방군들이 폭격기를 이끌고 폭탄을 뿌리며 멕시코 정부군을 초토화한다. 가상에나 있을법한 이 신나는 폭격 시나리오는 디지털 네트워크를 이용한 디지털 사빠띠스따 총책인 리까르도 도밍구에즈에 의해 고안됐다. 사빠띠스따 농민해방군(EZLN) 부사령관 마르꼬스가 현실의 게릴라전을 이끌었다면, ‘전자교란극장(Electronic Disturbance Theater)’의 도밍구에즈는 전지구적 네트워크 봉기를 주도한 수장이다. 물론 도밍구에즈는 마르꼬스의 예하 편대가 아니다. 미국에서 행위 예술을 하는 그는, 교란극장의 나머지 단원들, 칼민 카라식, 브렛 스톨바움, 스테판 뤠이와 함께 디지털 폭격기의 핵심 장치 ‘플러드넷’이라 불리는 소프트웨어 툴을 개발한 장본인이다. 플러드넷은 멕시코와 미국 정부 기관의 홈페이지들을 무력화하기 위해 프로그래밍된 것으로, 교란극장이 지닌 급진 정치의 지향과 이를 반영해 제작된 소프트웨어를 통해 인터넷 이용자들이 참여하는 집단행위 예술이다. 플러드넷 제작은 97년 치아빠스 한 마을에서 45명의 아녀자와 어린이를 학살한 멕시코 정부에 항거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실지로 신자유주의와 멕시코 정부의 주둔지인 홈페이지 서버들에 장애를 일으키게 만들고, 이들의 폭거를 반대하는 전 세계 활동가들의 저항을 플러드넷에 담아 디지털 폭탄 세례를 안겼다. 도밍구에즈는 지난 <네트워커> 1월호에도 소개된 바 있는 ‘크리티칼 아트 앙상블(CAE)’ 출신의 예술가다. 현실에서 사빠띠스따 게릴라전을 목도하고, 그는 95?과감히 앙상블과 결별한다. ‘전자불복종’ 개념을 현실화하는데 앙상블에서 한계를 느낀 그는, 사빠띠스따의 저항과 같은 인터넷의 전자불복종의 구체적 실현 방식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이는 전자교란극장의 ‘디지털_아트_행동주의’로 표명되면서, 한군데 머무르지 않는 권력의 유목적 속성에 대응한 앙상블의 전자불복종 개념과 신자유주의에 대항한 사빠띠스따의 정치적 행동주의를 결합한 행위예술 실험으로 그를 옮겨가게 했다. 멕시코 이민 2세대로 젊은 시절 연극을 했던 도밍구에즈는 브라질의 극연출가였던 아우구스또 보알(Augusto Boal)과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실험극들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수동적 관찰자의 역할에서 벗어나 관객 스스로 무대의 주체로서 갈등을 파악하고 대안을 구성하도록 이끌었던 보알과 브레히트의 철학은 그의 교란극장에서 선보였던 디지털 사빠띠스따의 실험에 바로 이어져 내려온다. 전자 네트워크를 통한 비폭력의 집합 행동양식에 의해, 이용자들은 목소리를 함께 내면서 스스로의 정치적 행동주의를 점차 깨닫기 시작한다. 당연히 전자교란극장의 신체-기계관은 앞서 연재된 프랑스 행위 예술가인 올랑(<네트워커> 3월호)이나 호주의 스텔락(<네트워커> 2월호) 보다 진일보해 있다. 올랑/스텔락이 기계를 이용한 개별화된 신체의 확장 능력을 고민한 반면, 교란극장은 사회화되고 정치화된 집합적 신체들과 기계의 관계를 고민한다. 억압적 권력에 대항한 사회변혁과 신체 자유의 욕망을 네트워크에 의해 엮어진 집합적 신체들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교란극장은 보다 건강한 신체-기계관을 지닌다. 한편 교란극장이 구사하는 네트의 비폭력 저항 전술은 현실의 시위 방식과 닮아있다. 빗대어 말하자면, 화염병과 돌로 권력의 바리케이트를 돌파하는 폭력의 미학보단 연좌 농성과 같은 비폭력 전술을 선호한다. 서버의 데이터 파괴와 웹사이트를 훼손하는 전자 폭력을 쓰기보다는 자동 ‘리로딩’ 명령을 반복하며 상대 서버 기능을 떨어뜨리고 접속 속도를 늦추는 합법적 전술을 동원한다. 권력자들이 골려먹는 실정법 위반의 빌미를 차단하고, 저항의 투명성과 합법성을 보여주는 전술로 채택된 까닭이다. 아울러 플러드넷은, 반복적으로 멕시코 정부 홈페이지에서 ‘정의’, ‘인권’ 등의 존재하지 않는 페이지를 요청하게 만들거나, 정부 페이지에 “이 사이트엔 정의/인권이 존재하지 않는다”란 ‘404 에러’ 문구를 연속해 뜨게 만든다. 이는 흔히 거론되는 가상연좌의 발생적 맥락을 넘어선다. 아스팔트 위의 연좌농성을 떠올려보자. 가두 행진을 하거나, 바리케이트에 두루마리 화장지를 감거나, 경찰에 대놓고 프랑스 지식인 푸코의 글을 읽거나, 수천의 종이 비행기를 날리거나, 화형식과 시 낭송을 행하는 등의 행태들은 얼핏보면 무질서하지만, 이것들은 시위의 목적을 다양화하는 행위 예술들로 기록된다. 요는 플러드넷이 단순 가상 연좌농성을 넘어서 ‘개념예술’로 비춰지는 대목이다. 수년 전 뉴욕 동시다발 테러 이후 ‘무질서’와 튀는 행위를 극도로 금기시하는 공권력의 완벽한 무장으로 인해 시애틀, 다보스, 퀘벡, 뉴욕 등 다국적 자본들의 회의장들에 대한 최근 반자본주의 시위 자체가 철저히 무산되고 순화되고 있다. 그러나 2002년 초엽 당시 보여주었던 전자교란극장 등 사이방가르드 집단들의 주도로 이뤄졌던 전 세계 포럼장 웹페이지 시스템 공격은 또 한번 반자본주의 운동의 저항 방식에 새로운 희망을 주고 있다. 청년, 여성, 동성애자, 유색인종, 노동자, 농민, 환경운동가, 원주민 등 수천의 목소리들을 담은 디지털 폭탄들이 서로 갈래치고 합쳐져 하나의 공동 적을 향해 타격을 가하는 디지털 저항의 게릴라전에서, 단순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을 넘어선 인터넷의 새로운 전자 행동주의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 참고: 사빠띠스따(Zapatista)의 네트전 2004/07/03 [네트워커] 제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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