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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신문] 디지털혁명, 신화 그리고 현실

[디지털 혁명, 새로운 대안 찾기는 가능한가-(2)디지털혁명, 신화 그리고 현실] 비역사성에 기초한 디지털 신화, 대중의 탈정치화 불러올 뿐 중대신문 (1998년 11월) 디지털 혁명의 여파가 본격적으로 우리 생활에 파급되면서 디지털 혁명은 문화의 생산과 소비, 유통구조를 포함한 일상생활의 전반을 바꾸어 놓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디지털 혁명이 가져올 장미빛 미래에 대한 목소리들이 근거없는 낙관론이 아닌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을지 고찰해 본다. <편집자주> 신화 혹은 이데올로기는 보통 현존하는 권력관계를 유지하고 정당화하는 믿음과 재현의 체계로 언급된다. 지배력은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선전함으로써 정당화시키며, 그들의 신념을 당연시하고 보편화하도록 하여 지배력을 자명하고 형식상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한다. 그 과정은 무언의 체계적인 논리틀로 경쟁적인 사고 형식들을 배제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사회 현실을 축조함으로써 완성된다. 그 과정은 실제적인 모순의 상상적 해결로 이끈다. 이렇듯 지배력 혹은 지배 계급이 시대에 따라 그들의 고유한 신화를 유포해왔다고 본다면 현대의 지배적 신화는 디지털한 것(being digital)에서 출발한다. 일반적으로 신화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특수한 계급의 규범이 자연 질서의 자명한 법칙처럼 당연시된다는 데 있다. 디지털 혁명의 신화가 기정사실화 되는데도 '상식'이 가려있는 것이다. 상식은 상식을 말하는 계급의 자의적인 질서 위에서 멈춘 지식, 즉 상대적으로 고정된 국면이다. 하이테크 이론가인 아서 크로커는 21세기 디지털 시대를 주도하는 집단을 가상계급(virtual class)이라 칭한다 가상계급의 주구성인자는 20세기의 변종인 약탈적 자본가들과 신종 테크노 엘리트다. 디지털한 상식의 조건들은 이들 신종계급의 논리 자체를 보편화하고, 더 나아가 다른 목소리들을 이들의 정서로 함몰시켜 나가고 있다. 즉 가상계급의 신화가 21세기 인류 전체의 미래상으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 거창한 구호에 가려진 상업성 가상계급의 디지털 신화창출의 일차적 조건은 네트에서 정보초고속도로와 글로벌 정보하부구조(GII)로의 이동, 그리고 그 속에서의 신화 구성에서 이루어진다. 즉 가상계급에 의한 인터넷 죽이기. 가상계급에게 있어서 네트는 정보초고속도로의 안티테제이다. 그들은 자유의 인터넷을 격자화된 디지털의 고속도로로 만들고 싶어한다. 유연한 네트워크망을 보다 상업적인 조건에 맞추려는 기획이 정보초고속도로의 의도이다. 자유와 보편의 영역을 글로벌 미디어의 특수한 언어와 의미로 바꾸어내는 것. 디지털 시대의 거창한 슬로건, '대중에게 모든 권력을!'의 밑바닥에는 상품화 논리가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예컨데 정보초고속도로의 기획으로 잡혀있는, 최저 이용요금에서 이용당(pay-per)요금지불 체계로, 정보의 생산에서 소비로, 정보 추구보다는 오락과 쇼핑으로의 전환은 한마디로 인터넷의 상업화 모델을 지칭한다. 인터넷이 더 나은 것, 즉 정보초고속도로로 바뀔 수 있다는 가상계급들의 비전은 물활적으로 움직여 나가는 네트의 본성을 글로벌 기업의 이윤 동기하에 구획화하려는 음모에 가깝다. 네트의 자생을 가로막는 가상계급의 음습한 기도는 인터넷 모델을 역회전하여 새로운 자본 모델로 바꾸려는데서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 올 것은?' 소니사의 이 광고문구는 '그 이전에 있었던 것들(前史)'을 문제삼지 않는다. 디지털 신화는 이전의 역사를 제거하고 단절시킨다. 전사를 구성했던 모든 사물들이 근본적으로 새로운 디지털 세계로 올 때, 그 진정한 가치란 부재하다. 역사의 규정적 성격, 즉 희소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이 제거되고, '역사의 종말'과 함께 디지털 혁명의 한 세기가 도래하는 것이다. 역사의 종말론과 테크놀로지가 결합하면 초월주의적인 '테크노종말론(Techno-eschatology)'에 이르며, 연이어 정치, 사회, 문화 등 과거의 것이 되어버린 '역사적 중력장을 극복하기 위한 속도전(escape velocity)'에 돌입한다. 인간의 역사와 운명을 해방시킬 수 있다는 세속적 신학의 비전, 그리고 무제한적으로 팽창하는 자유시장과 기술에 대한 믿음이 뒤엉켜서 우리는 또 다른 세기를 꿈꾼다. 탈정치화 부르는 비역사적 신화 구역사의 초월과 청산 논리는 특히 가상계급의 이데올로기들, 예컨데 아톰에서 비트로의 이동을 주장한 네그로폰테, 마이크로코즘의 조지 길더, 지식으로의 권력이동을 주장한 토플러, 경영혁명의 드러커, 후기산업사회론을 주장한 벨 등의 미래학자들에 의해 공고히 되어 왔다. 이들 모두는 '비트뱅(Bit-bang)'혁명의 신화, 즉 제한된 물질과 집중된 권력으로부터 해방된 인간과 역사 초월의 기술적 서사를 통해, 과거의 구질구질한 역사성을 탈각하여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의 도래를 맞이할 것을 주장한다. 이들은 구역사를 청산함으로써 권력관계 안에서 파악된 총체적 인간관계인 정치적(politique) 논의를 중단시킨다. 역사적 맥락의 제거는 자연히 대중에게 역사 개입의 무력감을 동반한다. 디지털 산화의 비역사성이 대중의 비/탈정치화를 낳는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 계급은 비/탈정치화의 실제적 담론을 '정치적' 신화의 역공세로 내친다. 예를 들어 전자민주주의와 가상공동체라는 정치적 신화를 통해 정치·사회적 영역의 비/탈정치화를 조성한다. 주로 이같은 신화는 디지털 상품을 소비하며 네트에 접속하는 개인들에게 이루어지는 무한한 '권능(empowerment)'의 유혹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즉 테크노기술의 가능성이 새로운 민주적 커뮤니케이션의 건설과 해방에 대한 언약으로 정치화하는 것이다. 인터넷의 대중화 초기였던 80년대의 신화는 구래의 보수적 정당구조에 디지털 기술을 결합시킨다면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이 지배적이었고, 아직도 그 믿음은 여전한 듯하다. 전자민주주의가 자율적 소수들이 제 목소리를 내고, 컴퓨터로 매개된 의사소통을 통해 다양한 주장들을 공론화하는 시스템을 지칭하는 반면, 정치 현실에선 버튼누르기식(push-button) 선거과정이 전자민주주의를 가름하는 용어인 양 사용되고 있다. 민주주의가 평등한 참여자들간의 의사소통 및 결정이 이루어지는 과정과 결과를 지칭한다면, 구정당 구조내에서의 인터넷 활용이 민주주의를 담보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이버 정당' 정치라는 허울은 네트워크 기술을 업은 재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 정도를 디지털 카운터 장치로 환산하고자 하는 욕구일 뿐이다. 최근 정치인들이 홈페이지 등을 개설하여 네트를 대중적 선전장으로 활용하는 사례가 폭주하는 것을 볼 때 애초의 민주적 가치가 깊이 없이 부유함을 다시 한번 확인케 해준다. 대중의 욕망에 충실한 가상공동체 또 다른 탈/비정치화의 정치적 신화는 온라인 혹은 가상공동체에 대한 믿음이다. 공동체론자들은 육체 이탈의 결과로 현실의 지리/사회/경제적 조건보다는 별명 등 개인사를 보여주는 이름, 프로필, 목소리 등 현실의 주문(mantra)을 벗어난 가상 정체성이 우위를 점한다고 본다. 그러기에 가상의 공동체는 네트워킹을 통해 소속 회원의 다양성과 참여성을 비배타적으로 그리고 평등하게 보장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바라보는 공동체의 정치적 수위가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그들이 가상공동체라 말할 때 게시판, 채팅방, 동호회 등의 느슨한 그룹에서부터 토론그룹, 지역공동체, 글로벌 연합체 등의 보다 정치적인 모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포괄한다. 이같이 공동체에 대한 정확한 계급/정치적 입지점이 불분명함으로써 대개는 모이는 것 자체만을 중요하게 취급한다. 둘째, 현실공동체에 긴밀하게 의존하여 파생된 용어가 가상공동체라고 본다면, 인간적 접촉을 최소화하는 것은 사회적 치유 효과보다는 소외를 상승시킬 수 있다. 현실의 접촉없는 네트워킹은 현실의 목소리를 내는 거리를 차단하고, 비/탈정치화로 가는 지름길을 닦게 한다. 셋째, 공동체적 의도가 온라인 기업의 마케터들에게 놀아날 공산이 크다. 신흥 자본가들은 인터넷 서비스 가입이 곧장 글로벌 온라인 공동체의 일부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선전한다. 사적 소비 자체가 공동체의 본질인양 둔갑하는 것이다. 이같이 논의의 과도한 비약을 하이테크 자본가들이 차용하는데는 공동체에 대한 대중의 욕망을 적절히 간파하는 그들의 능력에 있다. 대중은 현대의 지시물없는 상실감에서 비롯된 치료제로서 전통적 공동체의 대체물인 가상공동체를 희구한다. 글로벌 사기업들은 명민하게도 이를 이용하여, 온라인 공동체를 인터넷의 물적배경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의 역할, 그리고 서비스 기술의 수용을 통한 대중의 의식적 통합과 친근성 확보, 최종적인 상품 소비를 원활하게 이루기 위한 촉진제로 활용한다. 결국 전자민주주의와 가상공동체의 신화는 더욱더 구역사의 초월과 정치적인 것의 실종이라는 기획을 확고하게 만든다. 동시에 가상계급은 스스로의 발생학적인 숙명을 은폐하는 효과도 갖는다. 정치/경제적 근원에서 구역사를 경향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옮겨놓고 있는 계급적 모순 말이다. 이로써 대중에 대한 디지털 신화의 1차 유혹인(誘惑因)은 마련된 셈이다. 이광석 <네트분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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