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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만이 희망이다?

기술만이 희망이다? [한겨레]2001-10-27 01판 12면 1290자 국제·외신 컬럼,논단 기술에는 사회적 '코드'가 내장돼 있다. 겉보기엔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듯하지만, 한 사회의 사회.문화적 지배 논리에 쉽게 이끌리는 것이 기술의 타고난 속성이다. 과학기술자들이 머리를 쥐어짜면서 독창적 기술을 고안하더라도 정작 그 선택과 방향은 사회의 중심 가치들에 의해 좌우된다. 기술 생성의 코드는 그만큼 한 사회의 지배 정서에 쉽게 굴복한다.미국 동시다발 테러는 무엇보다도 미국내 기술 발전의 코드를 확실히 '우향우'하는 계기가 됐다. 애국주의의 명분과 테러에 대한 일상적 공포감이 한데 뒤섞여 감시.통제 기술의 개발 붐을 불러오고 있다. '지연된' 후속 테러의 불안감을 최첨단 기술로 떨칠 수 있다는 근거없는 믿음이 일고 있는 것이다. 언론들은 연일 테러에 대비한 각종 기술 대비책을 제시한다. 보안 장비들을 판매하는 온라인 업체들은 가격 경쟁에 열을 올린다. 방독면.세균방지복 등 생화학 테러에 대비한 제품들은 동이 나서 못 팔 정도다. 때아닌 호재를 맞은 이동통신 업체들은 각자의 생존을 위해선 잘 터지는 휴대전화를 구입하라고 외쳐댄다. 경기 후퇴가 몰고온 대중 구매력의 쇠퇴가 테러 대비용 제품들의 헛된 소비로 반짝 빛을 발한다. 또한 첨단 기업들의 기술 개발은 군사적 목적으로 용도 변경된다. 사양길에 접어들었던 대학의 한 생화학 테러 연구팀은 돈벼락을 맞아가면서 실험에 박차를 가한다. 한 디지털 잡지는 지금의 분위기를 반영하듯 테러에 노출된 현실에선 '기술만이 희망'이라고 여론몰이를 해댄다. 이렇듯 기술 코드의 심각한 왜곡은 준전시 체제에 기댄 정부의 정보통제 욕구에서 비롯한다. 최근 과학기술 전문가들은 미 정부의 과도한 통제욕이 기술 발전의 경로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실제로 공유 분산형 기술이 위축되고 각종 집중형 감시.통제 기술의 개발이 늘 전망이다. 역설적이게도 집중형 기술은 타격을 입을 경우 더 심각한 재난으로 돌변한다. 게다가 가상의 적을 막기 위해 개발된 기술조차 다시 상대에 의해 공격 수단으로 전도되는 경우가 흔하다. 문제의 해법에서 첨단기술이 능사가 아니란 얘기다. 테러에 대한 불안과 공포의 근본 원인은 이슬람권에 대한 미국의 잘못된 대외정책에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현실은 원인의 치유는 멀리하고 부작용에 대한 액막이로 기술을 끌어들인다. 지금처럼 테러분자들의 씨를 말리려는 것도 상황 종결과 무관하다는 점에서 같은 이치다. 잘 다듬어진 기술 수단조차 지나친 통제 욕구에 휘둘리면 기형으로 뒤틀린다. 허튼 진단에 부적절한 기술의 처방전은 액땜은 고사하고 독약이 되기 쉬운 법이다. 이광석 뉴미디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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