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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테러와 피해망상

사이버테러와 피해망상 [한겨레]2002-02-22 05판 10면 1269자 국제·외신 컬럼,논단 프랑스의 철학자 폴 비릴리오는 한때 핵폭탄에 버금가는 기술 재앙으로 '정보폭탄'을 꼽았다. 재화와 자본이 전자 네트워크를 통해 빛의 속도로 이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보폭탄의 파괴력은 걷잡을 수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요즘은 정보폭탄에 대한 경고는 한물 가고 '사이버테러'란 말이 한참 인기를 누리고 있는 듯하다.미국 관리들은 요즘 "오사마 빈 라덴이 총부리로 미국을 위협한다면 그 손자는 마우스 클릭으로 덤빌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부터 사이버테러 권위자로 명성이 높았던 리처드 클라크 백악관 컴퓨터보안담당 보좌관과 이른바 '애국법' 제정을 주도하고 있는 존 애슈크로포트 법무장관은 사이버테러의 위기감을 선전하기 바쁘다. 연방정부는 올해 컴퓨터 보안에 25억달러(3조2천여억원)를, 앞으로 5년 동안 추진될 사이버보안의 연구.개발에는 45억달러(5조8천여억원)를 쏟아붓기로 결정한 상태다. 컴퓨터 보안관련 법도 하나둘씩 만들어지고 있다. 얼마 전 하원을 통과한 '사이버보안 연구개발법'은 컴퓨터 보안.감시 기술을 개발하는 대학과 연구소에 자금지원을 제도화한 내용을 담고 있다. 미국내 컴퓨터관련 과학자와 기술자들의 최대 모임인 '전기전자기술자협회'(IEEE) 회원들이 이 법의 제정을 적극적으로 로비했다. 의회에 계류 중인 '사이버보안 진흥법'은 컴퓨터관련 범죄자의 형량을 최고 종신형까지 늘리고, 인터넷서비스 공급업자들과 경찰이 원활하게 정보를 공유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미국 법무부는 산하 과학기술국의 조직을 대대적으로 확대.개편하고 있다. 이 부서는 사이버테러를 무력화할 수 있는 각종 방안을 마련하는 독립 부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연방정부의 거의 모든 부서들이 사이버테러에 대처하기 위해 예산을 미리 확보하거나 기구를 앞다퉈 신설하고 있는 셈이다. 클라크 보좌관이 염불처럼 외우고 있는 '디지털 진주만기습'이 코앞에 온 듯하다. 걱정되는 점은 가상공간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반전.반자본의 정치적 저항을 사이버테러 집단으로 뭉뚱그려 취급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대표적인 군사연구기관인 랜드연구소는 최근 정규군이 벌이는 가상공간의 전쟁을 '사이버전'이라고 이름지으면서 테러범.마피아.해커들이 벌이는 저강도 인터넷전쟁을 '네트전'이라고 정의했는데, 인터넷 사회운동조직도 이 네트전을 일으킬 수 있는 부류로 분류해놓고 있다. 선의의 사회운동 단체들이 돌연 테러집단으로 대접받을 수도 있는 셈이다. "지나친 피해망상은 사물에 대한 분별력을 떨어뜨린다." 이광석 뉴미디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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