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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8/04/24

마르크스주의의 국제주의, 탈국가적 상상력 ③

III.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대안세계화, 그리고 국제주의

 

1. 냉전 이후의 세계와 국제주의의 새로운 소생

 

  냉전의 종식과 금융세계화의 추동, 그리고 신자유주의 압력의 전지구적 확산은 분명 기존의 사회운동의 위기이자 대중의 삶의 조건에 대한 전면적인 위협이지만, 동시에 이전까지 국제주의적 연대를 억압해온 조건들이 완화되고 새로운 연대의 조건이 만들어 질 수 있는 계기이기도 했다. 그것은 중심-주변을 나누던 분명한 분할선들이 약화되고 중심부 내의 주변부적 특성의 증가, 주변부 내의 일부 소수 지역에서 부의 집중에 따라 중심부적 특징의 등장 등이 나타나며, 또한 냉전 시기 정치적 이유하에 추진되어 온 발전주의가 중단되면서 국가의 역할의 균열과 동요가 발생하고, 코포라티즘적 보호의 틀이 무너지는 일들이 진행되고 있다.
  EU의 등장처럼 새로운 지역주의의 등장, 그리고 전쟁의 형태 변화 등에 따라 과거의 쟁점의 공간적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움직임들이 중요해지고 있다.
  변화된 조건 하에서 국제주의의 소생 가능성은 역설적으로 문제의 지형이 20세기를 우회해 다시 19세기적 조건 속에서 초민족적 연대의 형성가능성이라는 형태로 제기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20세기를 거치면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라기보다 사회주의 국가들사이의 국제적 연대(그런 점에서 어떤 경우에는 매우 보수적 함의의 국제관계의 외양을 띠기도 한)였던 한계를 넘어서 다시 노동자계급을 분할시키는 경계들을 넘어서려는 노력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기도 하다.

 

2. 동일성의 위기

 

  그렇지만 이런 변화가 그 자체 새로운 국제주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로 새로운 국제주의가 불가능해지는 상황이 오히려 커지고 있다. 각종 인종주의, 배타주의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 그 하나의 표지이다.
  이는 한편에서 이전에 사회적인 동일성을 형성하게 만든 유사-동일한 공통지반들이 붕괴해 가면서 사회적 동일성의 조건들은 취약해지는 반면, 국가적 동일성의 취약화에 대한 반사물로서 동일성 형성의 요구는 오히려 강해지는 역설 속에서도 관찰된다. 국가적 동일성의 불가능성이 커지는 속에서 다른 동일성에 대한 욕구는 강화된다는 점은, 역설적으로 국가를 넘어서 초민족적 동일성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오히려 그 이하적인 배타적인 동일성의 형성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3. 대안세계화운동

 

(1) 대안세계화 운동의 등장

 

  2000년대 들어서면 사회운동의 위기를 넘어서서 이전과는 다른 전지구적 범위를 아우르는 사회운동이 등장하게 되고, 여기에 스스로 대안세계화운동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시작한다.
  그 가장 두드러진 계기는 2001년 2월 브라질 포르토 알레그레에서 개최된 세계사회포럼이었다. 이 세계사회포럼은 정당조직을 배제하고 중앙집중성을 배제한다는 새로운 조직구도를 보여주었으며, 자본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기존의 모든 운동 유형들을 결합하여, 지방, 지역, 국가, 초국가적 형태의 다양한 조직을 포괄하였다. 여기에 참여한 조직들의 기반은 신자유주의의 결과로 나타난 사회적 재난과 맞서 싸운다는 공동의 목적과, 서로에게 닥친 우선과제들을 서로 공히 존중하는 것이었으며, 특히 중요한 점은 남(제3세계)과 북(선진국)의 운동을 하나의 단일한 틀 속에서 결합되었다는 것이었다. 세계사회포럼 결성을 주도한 비아캄페시나와 아탁이 남과 북의 운동을 각각 대표하고 있었다는 점도 이를 잘 보여준다.
  세계사회포럼은 다음과 같은 측면을 포괄적으로 담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사회운동과 접근방식을 달리 하고 있다. ①세계화에 대한 이론 분석  ②이행과정의 구도를 전지구적 사고하는 국제주의를 강조한다는 점 ③대중 창의성과 주도성 중심의 연합적 사고를 보인다는 점 ④소유의 문제를 수단으로 파악한다는 점 ⑤집권의 문제를 전술적으로 파악한다는 점 ⑥대중 구성의 변화에 주목한다는 점 ⑦정파/현장을 넘어서는 연합적 조직틀을 제시한다는 점 ⑧경제/정치/사회 혁명의 구분을 지양한다는 점 등이다.
  2006년에 다중심적 형태로 전개된 세계사회포럼에서는 체계적 선언문의 발표와 네트워크의 확산이라는 새로운 움직임들이 관찰되었다. 선언문 중 대표적인 것은 “민중의 반둥회의”라는 이름 하에 반둥회의 50주년 기념으로 말리의 바마코에서 개최된 세계사회포럼에서 사미르 아민의 주도로 80여명의 대안세계화 활동가와 이론가들이 발표한 ‘바마코 호소’였다.
  이 바마코 호소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담았다. ① 경쟁이 아닌 연대를 바탕으로 한다. ② 시민권과 양성의 평등을 전적으로 옹호한다. ③ 모든 다양한 구성원에게 창조적인 발전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보편적인 문명을 구축한다. ④ 민주주의를 통한 생산과 재생산의 사회화 ⑤ 자연·자원 및 농지의 시장화를 거부한다 ⑥문화적 산물, 과학적 지식, 교육, 의료의 상품화를 저지한다 ⑦ 제한 없는 민주주의, 사회진보, 각 나라와 개인의 자율성을 포함하는 정책을 촉진한다 ⑧ 반-제국주의에 기초한 국제주의와 남-북반구 민중의 연대를 강화한다.
  물론 대안세계화 운동에는 단일한 세력만 참여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이질적인 세력들이 끼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안세계화포럼을 주도하고 있는 사미르 아민은 현재 대안세계화운동에 결합해 있는 세력들에는 크게 네가지 상이한 세력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문제가 되는 세 가지는, 첫 번째 부유한 사회의 무기력 대안세계화 운동, 둘째 가난한 사회의 무기력한 대안세계화 운동, 셋째는 중산층의 대안세계화 운동이다(이는 자본주의에 비판적이기는 하지만 저소득층에 대한 고민 없은 없고, 남반구에 대한 고민도 크게 없는 세력이지만, 상대적으로 부유하기 때문에 세계사회포럼에는 가장 많이 참석하며, 향후 운동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세력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대립되는 네 번째 세력은 진보적 대안세계화 운동이라 할 수 있다.

 

(2) 방향을 둘러싼 새로운 모색

  대안세계화 운동의 출현과 더불어 기존의 사회운동 내에도 새로운 모색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존의 사회운동의 한계를 넘어서, 대안세계화운동의 방향으로의 전환을 모색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는데, 특히 중요한 점은 이런 변화가 사회주의에 대한 표상의 변화와 당의 위상에 대한 재검토를 중심으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그러한 변화중 하나는 프랑스 내의 제4인터내셔널계의 트로츠키 조직인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LCR)이다. 다니엘 벤사이드가 주도하는 이 조직은 가장 두드러진 유럽 내 대안세계화운동 세력인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재건당(PRC)이나 프랑스에서 등장한 아탁 등과도 긴밀한 관계에 있다. LCR의 변신 방향은 전위정당에서 사회운동적 정당으로 전환 노력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2006년 이 조직의 기관지 "공산주의적 비판"에서는 ‘전략’ 논쟁이 전개되었다(Artous, Durand, Sitel, Callinicos 등이 개입). 주요 논지를 담은 벤사이드의 글은 기관지인 공산주의 비판에 게재되었는데, 그 번역본이 사회주의노동당 계열 기관지인 IS에 게재되었고, 제4인터내셔널 기관지인 International Viewpoint에 그대로 다시 게재되었다.
  벤사이드의 주장이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전략논쟁이라는 구도 하에서 진행되었다는 점인데, 벤사이드는 전지구적 전략과 특정 지역내 권력장악과 관련된 ‘제한된 전략’을 구분해서 보고 있다. 즉 전지구적인 정세와 지역적 정세를 구분하는 동시에 결합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 전략이란 복제하고 따라야 하는 ‘모델’이 아니라, 과거 경험에서 나오지만 새로운 경험과 의외의 상황에 개방되고 수정될 수 있는 ‘전략적 가정들’로서 일종의 가이드라인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여기서 나아가 벤사이드의 논의가 특히 강조하고 있는 것은 대중의 주도권을 평의회적 전통을 통해 복원시키려 하는 것이다. 벤사이드는 대중적 주도권을 확장할 수 있는 계기들을 중시하여, 니카라과 혁명에서 ‘국가 평의회’ 억압 비판하고, 포르토 알레그레에서 예산 확정 위한 시정부기구(선거로 선출)과 참여위원회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 중시하는 등의 논지를 제기한다. 이행적 요구들에 대한 강조 또한 그것이 도구적 위상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벤사이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용어의 언어의 물신주의 벗어날 필요 있음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는 정치체계의 근본적 단절과 차이를 강조(특히 꼬뮨적 형태에 의한)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용어가 낡았기 때문에 이를 꼬뮨, 소비에트, 평의회, 자주관리로 이해하여 본래의 정신을 강화할 것을 주장한다.
  다음으로 벤사이드의 논의에서 중시되는 것은 당의 역할이다. 벤사이드는 당이 국가에 포섭된다는 점을 살펴볼 때, 그 동형성이 자본의 구조와 거기에 종속된 노동자 운동의 구조 사이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임금 투쟁과 고용의 권리는 자본/노동 관계에 종속된 투쟁인데, 정치적 영역에서 당 또한 이런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렇 관점에서 벤사이드는 전위당의 관점을 벗어나서, PT, 공산주의 재건당, 포트투갈의 좌파 블록의 강조한다. 이런 당의 조직 형태는 미리 정해져있지 않으며, 대중적 조직 내에서 활동하는 요소들로서, 정세에 따라 조직형태가 달라질 수 있다. 동맹이 누구이며 동맹의 동학이 어떻게 변화되는가에 따라 조직의 존재 형태가 조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네트워크로 조직된 유동적 조직형태와 친화성을 갖는 집단의 논리(헤게모니 논리에 대한 반대로서)를 수용하는 것은 아닌데, 이런 종류의 유동성은 현대 컴퓨터화한 자본, 유연적 작업, ‘유동성 사회’의 완벽한 동형성일 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
우리가 국제주의를 새로운 형태로 보편성의 재구축의 기획으로 이해한다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전히 존재하는 계급분할의 선을 넘어서 새로운 보편성의 지평 속에서 이 분할의 선을 극복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여기서 핵심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중심과 주변 사이의 공간적 분할, 그리고 성차, 인종, 지식의 분할선이 핵심이 될 것이고, 그 한계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가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국가는 다시 이런 분할의 재생산의 중심축에 놓여있다.
이 때 특히 강조할 점은 이는 새로운 동일성의 형성, 또는 동일성의 다차원성을 통해 문제를 풀려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공동체 내의 ‘관계’의 전화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접근을 제기하려 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이를테면 노동자운동의 페미니즘적 개조). 다시 말해 어떤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내려는 것이 아니라, 잠재적으로 공동체 일반을 변혁하려는 것이다(에티엔 발리바르, "대중의 공포", 542쪽) 


4. 동아시아

 

동아시아는 국제주의의 연계를 막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현실적으로 우리 사회의 국제주의의 논의의 출발점이 될 수 밖에 없는 조건이다. 동아시아에서 민중적 국제주의의 논의가 봉착한 난점은 대립적 역사, 그리고 국가규모의 상이성, 그리고 위계적 경제구조 등의 이유 때문에 수평적 논의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논의는 다양한 방식으로 제기될 수 있는데, 여기서 몇가지 중요한 문제를 제기해 보면, 동아시아 내에서는 이주노동과 신자유주의라는 현재적 쟁점에서부터 출발해, 장차 20세기초 역사적 경험으로 나아가는 구도 속에서 함의를 키워갈 수 있는 영역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5. 장기 21세기와 국제주의

 

새로운 세기에 들어선 세계에서 국제주의는 지금까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 지녀온 자본주의 역사와 변혁에 대한 지배적 형상의 재구성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지배적 형상의 교체는 고민의 무대를 세계로 확대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이렇게 고민의 무대가 세계로 확대되면 우리는 장기21세기라는 이행의 시대라는 관점에 서게 된다. 이는 마치 자본주의로의 이행의 시기를 전지구적 차원에서 200여년에 걸쳐 형성된 유럽세계경제의 형성과정으로 보는 관점과도 유사한 관점이 된다. 이럴 경우, 국제주의 또한 좀 더 넓어진 전지구적 차원에서 사고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런 장기21세기라는 사고는 첫째로, 이행이 장기간의 세계적 과정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둘째로, 이 이행은 사전에 예정된 필연적 경로를 거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 통과점과 부정적 통과점으로 분화될 수 있으며, 그 긍정적 통과점을 향해 가도록 하는 것이 운동의 과제임을 강조하게 된다. 셋째로, 기존의 이행의 역사에서 그 세계적 확장은 전체 동시적 변화 아니라 헤게모니 지역으로부터 파급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는데, 지금 또한 세계적 변화가 세계의 동시적 변혁으로 반드시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중시할 수 있다. 넷째로, 국가가 이행에서는 문제가 되고 있는데,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국가를 통해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공고화하고, 그것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형성에서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면, 21세기의 이행은 그 반대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다섯 번째는 현재의 이행의 시대에 나타나는 구조적 위기가 자본주의 자체 내의 쇄신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이유를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여섯째는 이행에서 소유제의 문제는 부차적이라는 점, 일곱째는 이행의 시대에는 삼중의 위기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은 수취구조의 위기, 국가의 위기(또는 통치의 위기), 그리고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위기이다.
장기 21세기는 지금까지 정세적으로 계급을 계급으로 일시적으로 통일시켜온 다양한 동일성들 자체가 동시에 위기에 처하는 시기이기도 하고, 그러나 그로부터 새로운 동일성의 형성, 그리고 새로운 보편성의 형성을 통해 평등-자유의 권리가 보편적으로 확장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에 대한 사고를 확장해 가야할 필요성이 커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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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의 국가주의, 탈국가적 상상력 ②

II.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와 국제주의

 

  여기서는 역사적 자본주의 속에서 역사적으로 유지·변천해 온 마르크스주의가 국제주의라는 쟁점을 어떻게 제기해 왔고, 또한 어떤 아포리아들에 부딪혀 왔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늘 국제주의는 단순한 구도 속에서 제기되어 온 것은 아니고, 당시의 매우 구체적 정세와 연관된 구체적 쟁점 속에서 문제로 등장하였다. 이는 국제주의의 쟁점이 국가인가 반국가인가라는 단순한 쟁점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분할을 넘어서는 통일적 경향을 형성할 수 있느냐라는 쟁점으로 등장했고 매시기 이는 매우 구체적 정세 속에서 제기되는 쟁점이었기 때문에 그 대응 방식과 쟁점은 시기별로 매우 상이하게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다루는 쟁점들은 마르크스주의 역사의 모든 쟁점을 다 다루는 것은 아니고 몇 가지 중요한 주목되는 쟁점들을 다룰 것이다.

 

1. 프랑스혁명과 보편적 권리

 

  역사적으로 재해석된 프랑스혁명은 마르크스주의의 국제주의에서 매우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그것은 프랑스혁명 자체가 민중혁명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하나의 이유와, 프랑스혁명과 더불어 보편적 권리라는 쟁점이 본격화되었다는 또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이유가 결합되는 지점은 보편적 권리로서 ‘평등-자유’라는 쟁점이 제기되었다는 점에서 발견된다. 평등은 자유가 있을 때만 가능하며 자유는 평등이 있을 때만 보장된다는 자명한 논리로서 ‘평등-자유’는 그렇지만 현실 속에서는 그 권리가 특정 공동체의 일정한 경계 속에 봉합된다는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 한계가 늘 그 평등-자유의 논리에 의해 부정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평등-자유’는 그 자체로 늘 진정한 국제주의적 확장을 가능케하는 경계부정의 논리로 작동한다.
  현실에서 이 ‘평등-자유’ 테제를 한정된 공동체 속에 유예하고, 그 다음 단계로 평등과 자유를 분리 시킨 후 평등과 자유의 함의를 보수적으로 한정하는 논리가 작동하게 된 것은, 프랑스혁명이 발발하게 된 조건과 무관하지 않은 유럽의 세력균형이라는 ‘보수주의적 국제주의’(또는 국가간관계의 현실주의)와 그리고 프랑스혁명의 지양 속에서 자리잡은 영국 중심의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영향력 확대라는 맥락 속에서였다.

 

2. 「공산주의자 선언」과 「독일이데올로기」의 계기 --계급의 등장, 그리고 지배의 비대칭성

 

  보수적 또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와 다른 노동자계급 또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쟁점이 된 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출현과 더불어서였다. 「공산당선언」은 자본주의 시대에 대한 분석을 통해 국제주의가 ‘형제들의 유대’라는 모호한 구호로부터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로 넘어가게 됨을 선언하였다. 국제주의는 이제 초계급적 언사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계급의 ‘발견’과 더불어 계급으로 분할된 세계 속에서 특수하지만 그 때문에 매우 보편적인 함의를 지니는 담론으로 등장하게 된다. 「공산당선언」은 한편에서 자본에 의한 세계의 통일화의 경향과 다른 한편에서 노동자계급의 궁핍화와 분할이라는 비대칭성(그렇지만 또한 대칭성)의 쟁점에서 출발하고, 이 때문에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국제주의의 책임을 자본이 아니라 노동에 안기는 것이 정당함을 주장하는 논리를 전개한다(즉 자본의 국제주의는 이미 주어진 것으로서의 조건이며, 반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달성되어야 하는 목표로서).
  그런데 이 「선언」의 시기에는 매우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상이한 논리들이 공존하고 있고, 그것이 사실상 국제주의의 난점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선언」은 한편에서 생산의 사회화와 노동자계급의 궁핍화라는 논리를 통해 노동자계급 동질화의 주장을 전개한다. 이것이 사실 노동자계급의 국제주의가 가능할 수 있는 논리적 기반이 된다. 그렇지만 이보다 앞선 시기에 같은 저자 중 한 명인 엥겔스의 주요한 저작인 "영국에서 노동자의 상태"는 매우 중요하지만 그 이후 오랫동안 묻혀버린 쟁점인 ‘아일랜드 노동자’와 그에 의한 영국 노동자계급 내부의 분열이라는 쟁점을 제기한다. 마르크스에게 덜 두드러졌고, 엥겔스에 의해 훨씬 더 부각된 이 아일랜드 노동자라는 쟁점은 후기 엥겔스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고민까지 이어지는 계기였다고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쟁점이며, 자본의 통일성과 노동의 분열이라는 비대칭성에 대한 최초의 주목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이주노동자라는 쟁점은 그리 사소한 것만은 아니었던 것이, 「선언」에서 노동자계급 통일성의 두 가지 논리인 생산의 사회화와 노동자계급의 궁핍화는 현실 속에서는 세계경제의 공간적 분할을 따라 지역적으로 상이한 지역에 배정됨에 따라, 국제주의의 형성을 막는 지역적으로 노동자계급 존재형식의 공간적 분리와 그에 따라 사회운동의 대응형태의 지역적 이질성으로 이어지게 된다.
‘계급’은 발견되고 등장하자마자, 국가와 인종에 의해 분할된 존재로 인식되지 않을 수 없었고, 그에 따라 이러한 계급의 통일성과 국제주의라는 쟁점은 아포리아로 작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3. 제1인터내셔널과 아나키즘 -- 지배의 비대칭성과 국가장치

 

  「선언」에서 "자본"에 이르는 과정은 자본의 추상화에 좀 더 초점을 맞추면서 이런 노동자의 내부적 분할의 동학을 설명하는 논리를 추가해 가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동시에 이 시기 마르크스는 차티즘에서 출발하여 각종 노동조합 결성으로 이어지는 노동자계급의 대중운동의 중요성에 점점 더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중요하게 등장한 쟁점 중 하나가 아나키즘의 문제였다. 그것은 처음에는 프루동주의에 대한 대립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바쿠닌주의에 대한 대립으로 제기되었다.
  두 경우 모두 아나키즘이 국가를 무시하는 또는 국가를 우회하는, 그럼으로써 결국 국가의 물질적 존재성과 그 작동을 해체시키지 못하는 무능력을 문제삼는 것이 쟁점이었다.
  두 경우 모두 국가는 계급 재생산의, 그리고 자본주의적 축적의 생산과 재생산의 필수적 고리임이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국가 ‘외부’라는 사고, 또는 국가를 우회한다는 사고는 결국 국가를 넘어서지 못하고 매우 국가적인 구도 속에서 진행되는 계급의 재생산을 다시 반복할 뿐임이 두드러지게 강조되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은 특히 파리코뮨과 그에 수반해서 제기된 ‘국가장치’라는 쟁점, 그리고 국가의 ‘전화’라는 쟁점 속에서 드러난다.

 

4. 제2인터내셔널과 1차대전 -- ‘국민적 동일성의 형성을 넘어’

 

  제1인터내셔널에서 제2인터내셔널로 이어지는 시기는 운동의 발전임과 동시에 운동에 새로운 질곡이 발생하는 시기였다. 그것은 ‘국제노동자협회’라는 개인들의 연합체 수준의 운동이 <독일사회민주당>이라는 매우 잘 조직된 정당에서 출발해 전세계적 정당조직의 기반을 가지는 운동으로 확산되면서 ‘진정한’ 인터내셔널로 발전하는 시기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에서 ‘국가적’ 특성보다는 ‘초민족적’ 성격을 강조한 제1인터내셔널이 민족당에 기반한 민족당들의 국제적 연합체인 제2인터내셔널로 전환되면서,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국가간체계 내의 모순들이 사회운동들 사이의 모순으로 곧바로 이전될 가능성을 늘려간 시기이기도 하다.
  모순은 1차대전이 발생하면서 증폭되었고, 전쟁공채에 동조하는 좌파가 늘어나면서 문제가 된 ‘조국방위’ 구호가 결국 제2인터내셔널을 붕괴시키기에 이르렀다.
  1차대전이 촉발되자,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은 전쟁에 대한 태도를 놓고 분열되었는데, 다수가 자국의 운동을 살리기 위해서는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라는데 동의를 하게 되었고, 그것이 결국 국제주의를 붕괴시켰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결성된 찜머발트 좌파는 국제주의를 다시 내걸었고, 이는 러시아 혁명에서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구호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 모순 속에서 등장한 1차세계대전은 노동자계급 국제주의에 새로운 계기를 던져준 것도 사실이다. 특히 이 시기는 ‘제국주의’라는 시대 규정을 둘러싼 논쟁과 더불어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피압박인민들로 국제주의의 전선이 확대된 시기였다. 이는 19세기 영국 중심의 세계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에 대한 전지구적 대응이라는 맥락에서 독해될 수 있는데, 여기서는 세가지 쟁점이 동시에 시기적 규정성으로 제기되었다. 첫 번째는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위기라는 쟁점, 두 번째는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라는 쟁점, 세 번째는 평화라는 쟁점이었다. 사회주의혁명과 식민지해방운동이 같은 동시대적 과제로 제기될 수 있던 것이 이 시기 국제주의의 매우 독특한 맥락이었다.
  「선언」에서 제기되었으나, 구현되지 못한 국제주의가 현실성으로 등장한 것은 이 시점이었는데, 그 이유는 「선언」이 강조하였지만 공간적으로 실현이 분리되어 나타난 특징들이 이 시점에 이르러서는 모순의 응축 속에서 공간적으로는 상이한 맥락이 작동하더라도 전지구적으로는 하나의 전선을 형성해 낼 수 있는 조건이 등장하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이 쟁점들을 정리해 낸 방식은 상이했고, 그리고 이런 모순들이 러시아혁명과 ‘사회주의 혁명’관을 형성한 배경이 되었지만, 회고해 볼 때 그것은 오히려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민주주의’라는 쟁점으로 제기될 수 있는 것이었고, 그리고 그것은 두드러지게 평화와 소비에트라는 매우 중요한 쟁점과 조직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5. 러시아혁명과 중국혁명 -- ‘사월테제’와 「임박한 파국」의 대립

 

  20세기초 세계자본주의의 모순은 여러 가지 형태의 이른바 ‘사회주의혁명’으로 귀결되었다. 그 모든 ‘사회주의혁명들’은 모두 세계혁명으로 발언되었고, 추진되었지만, 그 과정은 세계혁명으로 귀결되지 않았고, 일국사회주의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결국 사후적으로 이들 혁명은 혁명후 국가들을 세계체계의 주변부에서 반주변부의 위치로 상승시키는 효과를 낳고, 그 효과를 충분히 발휘한 후 이들 국가를 다시 세계경제에 핵심적 동력으로 다시 ‘접궤’(接軌)시키는 것으로 역설적으로 끝맺음하게 되었다.
  이 과정은 다음 부분에서 이야기할 미국헤게모니의 확립과정과도 긴밀한 연관성을 갖는데, 이 과정을 통해 20세기적인 국가주의-발전주의쌍이 자리를 잡게 된다.
  그러나 이 과정이 자동적인 것은 아니었고, 여기에는 이를 고착화하게 되는 내적으로 대립적인 상이한 두 가지 사고의 대립이 공존해 있었다. 러시아혁명의 과정에서 보자면 이는 레닌의 사고 속에서 나타나는 ‘4월테제’와 「임박한파국,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사이의 대립 속에서 드러난다.
  후기 레닌에게서 나타나는 이행기론의 쟁점은 세 가지 상이한 저작들 속에서 등장한다. 첫 번째로 ‘사월테제’는 소비에트라는 쟁점을 제기하며, 두 번째로 "임박한 파국"은 이행의 물적 토대라는 쟁점을, 세 번째로 "국가와 혁명"이나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의 정치와 경제” 같은 글들은 사회주의 하의 모순의 문제, 그리고 국유화와 사회화의 구분이라는 쟁점을 제기한다.
  여기서 두 번째 저작인 "임박한 파국"은 다른 저작들과 다소 모순적인 관계에 놓인다. 특히 ‘사월테제’는 소비에트를 특권화하고, 당은 중심적 위치에 놓이지 않고, 이에 적합하게 당의 사업을 전환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사월테제’ 이후의 레닌의 저작들은 당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성장전화’의 청사진을 제시한다는 차이점을 보인다. 이런 점에서 ‘사월테제’는 이례적인 저작이며, 사실은 이 테제가 발표된 당시나 그 이후 모두 체계적인 오해의 대상으로 남았던 저작이다.
  ‘사월테제’에는 정리해 보자면 세 가지 내용이 포함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첫째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라는 구호가 핵심이 된다는 점, 둘째로 당의 위상은 소수파이며, 소비에트에 대한 지지에 일관성을 가져야 한다는 점, 셋째로 국유화에 부차적 중요성만 부여한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그런데 ‘사월테제’이후 10월혁명으로 가는 과정에서 볼세비키의 현실적 집권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사월테제’의 쟁점은 뒤로 밀려나면서 오히려 "임박한 파국"의 문제제기가 전면에 부각된다.
"임박한 파국"은 사회주의와 구분되는 민중민주혁명의 시기를 명시화하는 방식으로 독해되었다. 여기서 레닌은 "두 가지 전술" 시기와 다르게 이행강령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특히 핵심은 조건이 붙은 국유화 강령이었다. 그것은 세 측면의 내용을 갖는다. 첫째는 독점자본의 국유화가 사회주의로 가는 물질적 토대가 된다는 점, 둘째는 민주주의적 요구들이 최소강령에서 이행강령으로 전환되는 제국주의 시대의 규정들로 인정된다는 점, 셋째는 그 결과 사회주의에 대한 ‘성장전화’론이 등장한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규정된 레닌의 이행기론은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일정한 비판의 준거점을 보여주는 동시에, 사회주의로 성장전화와 여기서 민중민주주의 혁명의 불가피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정한 선긋기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시기 레닌의 논지는 우클라드론의 전제에서 나온 결론들이었는데, 쟁점은 그럼 국유화란 무엇인지, 국유화된 부분은 사회주의적인 우클라드인지라는 질문이 다시 제기된다. 특히 ‘사월테제’와 더불어 수면위로 부각되었던 이행기의 ‘정치’라는 쟁점은 이 시기에 다시 수면 아래로 잠복한다는 문제가 숨겨져 있었다. 물론 이후 레닌이 줄곧 강조했듯이 국유화와 사회화는 구분되며, 현실 사회주의 하에서 사회화의 과제는 미해결로 남아있다는 쟁점이 남아있음에도, 국유화 우위의 사회주의 해석이 일반적으로 정착되는 효과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런 구도에서 볼 때 국독자론은 사실 일국일공장제의 기반이 될 수 있었는데, 전국에 대한 경제통제가 가능하다는 생각, 그리고 이는 전 산업이 아니라 일부 핵심 부문만 국유화하더라도 가능하다는 생각에 의해 이 구도는 강화될 수 있는 것이었다.
  네프 시기 들어 이데 대한 일정한 사고의 전환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 시기에 소비에트에 대한 강조가 복권되지는 않았다. 이 시기에는 혁명이 강요한 자기제약이 작동하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일단 일정에 오른 혁명을 실패로 돌릴 수 없다는, 그리고 장악한 국가권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자기 제약이었다. 그 때문에 ‘사월테제’는 부활하지 않고, 대신 현실적 문제에 대한 조치로 당내 정풍과 대중민주주의에 대한 강조가 등장한다. 그 결과 관료제의 문제는 모호하게 남으며, 잉여가치 전유 메카니즘의 질적 구조의 문제, 또는 다시 말하자면 자본주의적 노동 분할의 내적 구조에 대한 문제제기는 은폐된다. 결국 소비에트의 우위 대신 당이 지도하는 대중의 재교육 사업이 중요한 방식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정리된다.
  그러다 보니 대중 조직과 관련해 ‘당,’ ‘소비에트’, ‘노조’ 셋이 동시에 문제되고, 이들 사이의 관계 또한 문제가 되었지만, 결국 당의 우위 하에 다른 두 가지 조직의 문제제기가 봉쇄되는 결과가 발생한다. 1920년대 초반의 구도에서 대중조직의 발전의 제약은 세 가지 조직 발전의 억압으로 나타난 바 있는데, 소비에트, 레드 페트로그라드, 수병반란이 그 세 측면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것이 중국혁명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된다는 점이다. 이는 1927년 마오의 「호남성 농민운동 조사보고」와 1930년대말 이후의 신민주주의론 사이의 대립에서 유사한 형태로 발견된다. 마오에게 잊혀졌던 이 쟁점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1960년대 문화대혁명과 더불어서인데, 문화대혁명 시기에 이 「호남성 농민운동 조사보고」가 주요 저작으로 다시 광범하게 학습되었던 것도 우연은 아니다. 문화대혁명의 국제적 영향력의 전파도 이런 점에서 다시 재해석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여기서 잠시 중국혁명의 길의 독특성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이후 동아시아에서 국제주의의 문제를 논의할 때 중요해지는 부분이다. 여타 사회주의 국가의 성립과정의 경험에서는 기존의 국가의 위기 속에서 대안적 정치세력으로 사회주의 정당이 출현하여 짧은 정치적 이행과정을 거쳐서 새로운 집권세력으로 등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는 구국가의 붕괴 이후 사실상의 국가부재 상태가 오래 지속되었고, 그 속에서 새로운 국가보다 먼저 오히려 당이 건설되었고, 이 당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갔다는 특징을 안고 있다. 이는 중국공산당이 여타 사회주의 정당에 비해 대중적 토대가 강하다는 것을 보여줄 뿐 아니라, 왜 중국에서 당의 존재가 국가의 존재와 거의 동일시 되는지, 중국에서 여러 가지 정치적 위기가 출현함에도 왜 당이라는 경계를 넘어서기 어려운지를 설명해 준다.

 

6. 미국헤게모니와 발전주의

 

  19세기말의 영국식 자유주의의 위기는 20세기 30년대 미국의 뉴딜과 더불어 미국식 20세기 자유주의가 재탄생하면서 극복되었다. 사실 미국이 새로운 헤게모니로 부상하는 것은 미리 예측할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19세기 영국 중심의 자유주의가 노골적인 유럽중심주의를 드러내는 ‘문명론적 자유주의’라고 한다면, 20세기 미국자유주의는 전세계의 ‘미국화’의 가능성과 필수성을 역설하는 ‘발전주의적 자유주의’로 등장한다. 그 발전의 단위는 국가가 되며, 그 국가의 관리학으로서 사회과학의 포괄적 중요성은 미국 헤게모니와 더불어 증가한다. 19세기까지 국가들 사이의 관계의 구체적 질서가 없이 외형상 ‘세력균형’이라는 보수적 국제주의나 자유시장경제라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에 내맡겨져 있던 것에 비해, 20세기는 명시적으로 UN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정치’질서를 만들어 냈다.
  그 영향은 생각보다 매우 광범하였다. 한 예로 사회주의 국가들의 혁명과정에서도 그 영향은 두드러지는데, 중국 혁명의 경우에도 1930년대 줄곧 관철되어 나타나던 세계혁명적 관심이 1940년대 들어서는 줄어들면서 대신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의 증가와 더불어 일국사회주의의 가능성에 대한 언사가 눈에 띄게 늘어나기 시작한다. 그만큼 발전주의-국가주의 담론은 사회주의에 폭넓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이후 이런 ‘미국화’의 영향력은 전지구적으로 폭넓게 확산되며, 그것이 결국 20세기를 넘어선 이후 국제주의의 재형성의 질곡으로 작동하게 된다.
  또한 냉전시기 이후에도 이런 미국 중심의 발전주의적 질서의 재편은 매우 중요해졌는데, 심지어 이러한 상황 속에 등장한 다양한 형태의 제3세계주의조차 국제주의라기보다 국가주의에 핵심적으로 포섭된 부분적 국제주의로서 나타났다. 다만 이런 제3세계주의는 중심-주변 문제를 징후로서 포착해낸 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7. 평화를 향한 대장정

 

  사회주의와 국제주의 사이의 모순은 처음에 두드러지지 않다가 냉전질서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점점 더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소련의 국가 존속의 논리에 세계혁명의 논리를 종속시켰다는 비난이 곳곳에서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그 정점은 군사적 논리로 혁명의 논리를 대체하는 데서 발견되었다. 미국의 위협론에 대응하는 논리로서 핵개발이 정당화되면서 이 문제는 좀 더 두드러졌다.
  2차대전 종전 후 핵무장과 핵무기에 대한 반대운동이 세계적으로 확산되지 못한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소련의 핵무장이었다. 소련은 1949년 핵실험에 성공하였고, 미국 핵보유에 대한 억지력을 갖기 위해 핵무장을 정당화하였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핵폭격 위협에 노출된 중국 또한 핵개발을 추진하였으며, 중소분쟁이 가속화하는 과정에서 핵보유의 논리를 더욱 정당화하여 1964년 핵실험에 성공하였다.
  여기서 모두 핵보유는 ‘국가생존’의 차원에서 정당화되었으며, 소련의 핵보유는 소련이나 소련 외부에서 모두 사회주의 운동이 핵무장에 반대하는 싸움을 전재할 수 없는 자기무력화의 원천으로 작용하였다. 무엇보다 ‘사회주의 조국을 방위’해야 하기 때문에 핵무기 개발을 용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자기파괴적이었다. 핵보유는 결국 국가간체계의 논리를 사회주의 국가들에 깊숙이 내장시키는 핵심 기제로 작동하였으며, 국가권력의 논리가 대중보다 우위에 서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문제는 핵보유가 대중운동을 희생하는 대가로 국가를 생존시키고 국제주의를 억압하는 계기이자 논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반대로 국가권력의 지속성을 위험에 노출시킬 수 있더라도 운동을 소생시키고 국제주의로 나아가는 길은 봉쇄되었던 것이다. 세력의 비대칭성을 운동을 통해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간체계의 동학을 통해 쉽게 세력균형의 틀 속에 들어감으로써 비대칭성을 극복할 수 있다는 환상이 커졌던 것이다. 그 가장 극단적 사례로서 초대형 수소폭탄 개발 프로젝트인 ‘짜르 봄바’의 개발은 그 역설을 가장 잘 보여준다. 짜르봄바는 소련을 보호한 것이 아니라 결국 체르노빌 사건으로 이어지는 출발점이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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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와 국제주의, 탈국가적 상상력 ①

마르크스주의와 국제주의, 탈국가적 상상력

백 승 욱 (중앙대 사회학과)

 

I. ‘국제주의인가 야만인가’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어느 때보다 국제주의 문제를 다시 부각시키고 있다. 개별 국가의 틀 속에서 풀 수 없는 문제들이 늘어가고, 국가들 자체가 문제로 부각되고 있으며, 각종 분할의 선들이 늘어나면서 단결과 통일을 향한 운동의 전환이 국제주의의 이름의 새로운 보편성의 요구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이런 요구와 일치하기보다는 오히려 배치되는 모습으로 나타나, 현 시기에 국제주의를 향한 집단적 움직임은 전혀 전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국제주의인가 야만인가’는 그 어느 때보다도 현실을 바꾸어 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구호일 수밖에 없는데, 이 글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를 통해 국제주의의 쟁점이 어떻게 형성, 변화되어 왔으며, 현재 국제주의가 어떤 함의를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본론에서 논의할 핵심적인 쟁점들을 사전에 정리해 두고 시작하기로 하자.
  우리가 국제주의를 개별 국가를 넘어서는 더 큰 단결과 통일의 틀로 사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제주의를 ‘국가에 대한 반대로서 반(反)국가 일반’의 언사라고 볼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국가에 반대하고, 국가를 거부하는 사고가 그 자체로서 국제주의로 표상되는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국제주의의 쟁점은 사실 매우 복잡해지는데,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 보자면, 국제주의가 쟁점이 되던 시기에 중요하게 부각된 바 있던 쟁점 중 하나는 아나키즘과에 대한 반대였고, 마르크스주의보다 훨씬 더 반국가의 입장에 선 아나키즘이 현실적으로는 더 국제주의적이었다고 할 수 없는 점도 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
문제가 이처럼 복잡해지는 이유는 무엇보다 국제주의는 국가라는 쟁점,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분할이라는 쟁점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앞서 나가서 다시 말해 보자면, 마르크스주의 역사에서 국제주의, 좀 더 명확하게 말해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자본의 분할에 대응한 ‘프롤레타리아’ 통일 경향을 향한 언사였다. 그리고 이 문제는, ‘프롤레타리아’와 ‘자본에 의한 노동의 분할’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매우 상이한 그림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쟁점이다.
  우선 문제는 노동에 앞서 그보다 먼저 훨씬 더 ‘국제주의적’인 것은 자본이라는 점에서부터 나온다. 세계시장을 무대로 벌어지는 자본축적은 이미 장기16세기에 걸쳐 세계경제로서 자본주의 세계체계가 등장하던 시절부터의 끝없는 자본축적의 특징이었다. 이런 점에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자본의 국제주의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그에 앞서 세계를 통일적으로 구성하고 지배하는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자본 축적의 범위는 늘 초국경적이었다.
  그런데 역사적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초국경적이라는 자본 축적의 일반적 특성은 구체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다른 교차점을 만나 복잡해진다. 그것은 영토주의적 경향이 매개되면서 나타나는데, 영토주의적 경향의 매개 없이 자본은 진정한 초민족적 자본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계경제를 향한 자본들간의 경쟁 때문에, 대자본들은 세계경제에서 더 큰 몫을 향한 싸움을 벌이고, 이 싸움에서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자본들간의 경쟁은 더 강한 국가를 배경으로 한 정치․군사적 투쟁을 항상 수반하였다. 따라서 자본의 초국경적 팽창은 늘 영토주의적 논리와 자본주의적 논리의 변증법적 교직 속에서 진행되어 왔으며, 이것이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에 독특성을 부여했다. 자본의 국제주의는 늘 자기 자신의 한계로 작용했는데, 특히 헤게모니 국가에 의해 새로운 자본축적과 국가간체계의 질서가 수립된 시기에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초국경적 자본축적이 작동하지만, 그 헤게모니의 쇠퇴와 새로운 헤게모니를 둘러싼 경합이 벌어지는 시기에 들어서면 초국경적 자본주의의 논리는 개별국가들로 이루어진 국가간체계에 기반한 영토주의의 논리와 충돌하게 된다.
  그렇지만 자본축적의 전지구적 위기나 또는 자본축적의 지역적 위기 속에서 발생하는 정세에 대응하는 노동자계급의 운동은, 자동적으로 국제주의를 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본의 국제주의가 자본의 본성상 출현하는 것이었다면, 노동자계급의 국제주의는 달성해야할 목표로서만 표명되고, 그리고 그것이 달성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자본주의의 지양임을 표명하는 것임을 뜻하였다.
  이는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자본과 노동의 관계가 대칭적이지 않음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자본과 노동은 거울상이 아니고, 자본의 직접적 부정이 노동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노동은 자본과 동일한 형태의 국제주의를 형상화해 낼 수는 없다. 이는 ‘자본의 추상화, 노동의 구체성’라는 비대칭성의 문제로 나타난다(이에 대해서는 에티엔 발리바르, "대중들의 공포: 맑스 전과 후의 정치와 철학", 도서출판b, 2007, 297쪽을 볼 것). 이 두 쌍은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 된다. 자본은 자본일반이라는 특징 속에서 추상화됨으로서만 등장한다. 그리고 자본축적의 조건이 재생산되는 것은 국가를 통해 그 자본주의의 지배계급이 통일됨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자본의 추상화와 통일성은 그 축적의 측면과 지배의 측면에서 모두 관찰된다. 이에 비해 그 반대 측면에서 노동은 분할됨으로써만 자본축적을 가능하게 만든다. 노동의 통일은 자본의 지양이며, 자본축적은 분할된 노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노동이 분할됨으로써만 노동은 자본에 포섭될 수 있으며, 자본의 지배를 받게 되고, 그럼으로써 착취될 수 있다. 그 분할선은 성별, 인종, 지식, 국적에 따를 것이며(그리고 많이 인식되면서도 많이 경시되는 것으로서 중심-주변의 분할), 국가는 여기서 늘 한편에서 지배계급을 통일시키는 동시에 피지배계급을 분할하는 장치로서 작동한다. 그 작동은 특히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를 통한 분할된 ‘국민’이라는 허구적 동일성의 형성 속에서 잘 드러난다.
  노동자계급의 국제주의가 프롤레타리아 통일성의 경향을 지칭한다는 말은 이처럼 분할된 구체적 노동자들의 존재조건들을 넘어서는 통일적 경향의 수립이 자본에 의한 노동의 지배를 넘어서는 길임을 반복해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파악된 노동자계급의 국제주의는 결국 새로운 보편성의 형성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의 국제주의는 국가 대 반국가라는 단순화한 구도로 형상화할 수 없다. 그것은 국가일반의 부정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전화’를 요구하는데, 왜 그런가 하면 이미 국가에 의해 재생산되는 분할된 노동자들의 존재조건이 국가를 거부함으로써 극복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렇게 이해된 국제주의는 국가 ‘외부’에서 사고하는 논리라기보다는 국가의 ‘경계’에서 사고하는 논리로 규명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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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에 맞선 사회운동 ③

III. 사회주의와 당이라는 쟁점

 

1. 러시아혁명의 쟁점

 

1) 제2인터내셔널의 유산-- 러시아혁명의 배경 (특정한 방식--즉 카우츠키류--의 마르크스 독해의 공고화)


①경제주의적 마르크스 이해: ‘생산력주의’ (그 핵심으로서 ‘정세’ 개념의 소실, 계급분석과 괴리된 계급의 이해)
②계급과 민중의 변증법에 대한 몰이해
③조직형태로서 민족화한 정당들의 출현

 

2) 레닌의 이행기론 해석의 문제

 

- 이행기 레닌에게 중요한 세가지 글 중에서 "임박한 파국"에 강조점
  ①4월테제(소비에트) ②임박한 파국(이행의 물적 토대) ③("국가와 혁명" +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의 정치와 경제”(사회주의 하의 모순. 그리고 국유화/사회화)

- 4월테제와 그 이후 저작들 사이의 차이 (4월테제는 소비에트를 특권화하고, 이를 위해 당의 사업을 전환할 것을 요구): 그 이후의 저작은 당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성장전화’의 청사진을 제시한다는 점  (특히 소비에트 내 소수파로서 볼세비키 대 다수파인 멘세비키와 SR)
 *특이점: 테제 내용 ①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②당의 위상은 소수파. 소비에트 지지의 일관성 ③국유화의 부차성

- 「임박한 파국」 중심의 논지: 사회주의와 구분되는 PDR의 시기를 명시화 (사실은 ‘4월테제’와 일정한 긴장관계 -- 우리에게 모호하게 남았던 것: 우리가 ‘전위’가 아니었기 때문에 -- 이중의 규정 속에서 ①현실 사회주의 비판 ②사회주의로 성장전화)
  --> t.t. 시기와 달라지는 것으로 이행강령이 제기됨. 특히 핵심은 (조건 붙은)‘국유화’ 강령 ①독점자본의 국유화가 사회주의 가는 물적토대 된다 ②민주주의적 요구들이 최소강령에서 이행강령으로 가게 되는 제국주의 시대의 규정들 ③그 결과 ‘성장전화’론

- [그럼에도 국독자론은 일국일공장체제의 기반이 됨. ①전국 경제통제 가능 ②모든 것을 국유화하지 않고, 핵심만 국유화하더라도]
①소비에트가 물러난다 ②‘청사진’이 중요해짐(특히 국유화) ③과정 관리자로서 당의 역할 중요

 

3) 네프시기 레닌의 반성과 한계

 

- 핵심은 ①계급동맹 ②국유화/사회화(여기서 국유화건 국독자건 소유제 개조가 문제가 아니다) ③문화혁명(국가장치의 문제) --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의 국가자본주의’라는 규정

- ‘사회주의(이행기)의 계급투쟁’: 그 대상과 조직은?(소비에트가 복권되지는 않는다)

- 혁명에 의해 강요된 자기제약이었다(실패해서는 안된다는, 장악한 국가권력 유지의 강박): 그러나 ‘4월테제’가 부활하지는 않고, ①당내 ‘정풍’과 ②대중민주주의를 강조한다 (여기에는 핵심적으로 ①관료제의 문제는 모호하게 남고 ②상대적 잉여가치 질적구조 문제, 또는 달리 말하자면 자본주의적 기술의 지적차이의 문제에 대한 고려가 없다) --> 소비에트 우위가 당이 지도하는 대중의 재교육 차원으로 정리됨 [사회화 쟁점이 약함. 그리고 그 복잡성 보지 못함. 즉 자본-국가에 의한 재생산 보지 못함 --> 이론의 난점과 동시에 정치의 난점]
  ‘당’, ‘소비에트’, ‘노조’ 셋 사이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문제가 되나, 당의 우위 하에 다른 두 가지 조직의 문제제기가 봉쇄되는 결과를 낳음


2. 중국 문화대혁명이 남긴 것-- 현존 사회주의에 대해 제기하는 광범한 쟁점

 

①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 민족적 공산주의/ 대중노선/ 정치우위라는 세 가지 상이한 흐름의 절합과 교착이 낳은 독특한 정세

 

② 당형태
- 대중노선, 그러나 대중 이니셔티브를 인정하지 않는 당에 의한 계급 대립의 독점을 넘어서서 당의 파괴로, 그러나 그 딜레마로
- 중국에 부재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그 1927년의 계기). 그러나 문혁의 딜레마는 그것을 일관되게 표상하는 ‘조직’은 있었는가?(당이 아니라면, 홍위병? 조반파? 어떤 안정된 조직형태도 지속되지 못했다)

 

③ 생산관계의 전화로서 정치우위와 교육혁명(새로운 산업혁명을 위한 지적차이의 극복이라는 쟁점)
- 대중정치의 이니셔티브가 억제된 상태에서 다소 위로부터 진행된 역설도 있었음
  모델의 경험과 그것을 넘어서는 역사적 계기라는 차이점

 

④ 이데올로기혁명과 국가장치. 대중적 주도성
- 이데올로기 혁명으로서 문화대혁명
- 프랑스 혁명 논쟁과 마찬가지로 중국혁명 또한 세계혁명으로서 이데올로기 혁명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사회주의에 대한 마오의 재해석에 기반하여야 그 출발점을 찾을 수 있다)

 

⑤ 대중의 공포와 폭력이라는 문제.
- 이 또한 프랑스 혁명과 연관되는 주제: 정치의 자율성과 변혁이 대중 자신의 자율성을 얽매는 것으로, 대중 자신에 대한 공포로 귀결되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
(한편에서 문혁 과정의 이론화의 부재라고 한다면, 그것을 이론 내의 문제로 해결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 다시 이론의 이데올로기화에 작동하는 또 다른 계기, 즉 대중들 사이의 윤리적 관계라는 쟁점은 여전히 남는다.
  문혁의 딜레마는 계급적대나 자본주의의 ‘구조’의 문제를 ‘주자파’로 의인화 하고, 그것의 동일성 형성을 통해서 적대를 표출한것. 리처드 크라우스를 받아 딜릭이 말한대로 ‘계급’이 투쟁의 지침이 아니라 투쟁의 장이 되어 버린 것에 있다.
  동일화와 탈동일화의 동시적 사고라는 시민인륜의 정치라는 강조점이 등장하는 이유


* 논의의 난점들

① 당은 국가의 포섭에서 벗어나 있는가? (더욱이 국가간체계의 동학)-- 아니다, 당은 국가권력 장악의 수단이고,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임 (국가 외부에 또 다른 당을 만드는 시도는 불가능 --> 그러나 그 국가의 경계가 문제되는 곳에서 당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새로운 운동 출현 가능도)

② 대중운동에 의해서 당의 쇄신이 가능한가? 그것이 당을 당 아닌 것으로 바꾸어 내더라도? 그럼 그 조직은 당과 같은 한계에 봉착하지 않는가? (그 지속성, 이데올로기적 혁신은 어떻게 가능? -- ‘변혁’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직은?)

③ 그럼 당은 불필요한가? 당을 중심에 두지 않는 것은 국가에 대한 무시를 의미하는가? 아나키즘인가?  (집권에 대한 태도는, 목적은?)

④ 집권하지 않으면서도 효과적 개입을 가능하게 하고, 운동을 유지시키는 방법은 가능한가? (사회운동적 정당은?)

⑤ 쟁점은 일국적이지 않다. 지역적으로 다른 쟁점에 처해 있음.


3. 유럽과 제도권 정당의 한계들
- 2인터내셔널의 쟁점들의 복귀/ 그리고 68년의 쟁점들

 

(1) 국가권력의 환상
- 권력장악과 사회개혁의 환상과 관료화

 

(2) 법률적 틀의 환상
- ‘제도개선’의 법적 틀의 안주
- 기술관료적 개선책들의 제시

 

(3) 대중우위의 포기
- 사회조합주의의 틀로의 귀결
- ‘생산관계’에 대한 사고, 그리고 ‘경제투쟁’에 뿌리박은 ‘정치운동’이라는 사고의 부재

 

(4)

 

(5) 계급투쟁의 장소들을 ‘정치’로 한정하고, 그것으로부터 대중의 탈정치화로
- 이데올로기의 다차원적 공간을 사고하지 않음

 

(6) 소련과의 관계 또는 그와 연관된 민족국가적 한계의 난점
- 단적으로 평화문제와 식민지 독립의 문제에서

 

(7) 인종적 틀의 난점

 

 

IV. 대안세계화 운동

 

1. 논의의 쟁점들

- 새로운 이론적 논의로서/새로운 조직적 실천으로서/새로운 지정학적 효과로서: 서로 결합된 효과들


2. 새로움의 측면들


①세계화의 이론 분석
②전지구적 이행과정(국제주의) : 남과 북의 결합
③대중 창의성과 주도성 중심의 연합적 사고
④소유의 문제를 수단으로 파악
⑤집권의 문제를 전술적으로 파악
⑥대중 구성의 변화에 주목
⑦정파/현장을 넘어서는 연합적 조직틀
⑧경제/정치/사회 혁명의 구분의 지양
⑨공동체 한정성에서부터 공동체내 관계의 전환으로(‘노동자운동의 페미니즘적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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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에 맞선 사회운동 ②

II. 국제주의라는 쟁점

 

1. 노동자운동의 질문들

(1) ‘노동운동’과 ‘노동자운동’이라는 말의 차이는 무엇인가?
- 통념적 이해의 문제

(2) 왜 노동운동이 자본주의에서 중심적이라고 하는가? (자동적으로? 환원되는? 점점 더 늘어나는?)
- 프롤레타리아 신화 아니라 생산관계가 곧 착취관계라는 쟁점

(3) ‘전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로 가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모든 사람을 노동자계급으로 변화시키는가?

(4) 노동자계급과 프롤레타리아의 관계는 무엇인가?
- 역사철학과 정세의 대립

(5) 노조-당이라는 조직적 틀은 꼭 필요한 것인가? 어떤 문제를 낳는가?

(6) 19세기와 20세기 노동운동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7) 노동자들은 왜 단결하지 못하는가?

(8) 중국 문화대혁명이 제기한 쟁점(①재생산 ②지식노동/육체노동 -- 자본주의 고유한 생산력 구조와 산업혁명)

 


2. 국제주의라는 쟁점 -- 먼 미래의 것이 아니라 현실의 운동을 통일시키는 경향으로서

 

1) 자본의 국제주의와 노동의 국제주의의 차이점

 

- 국가에 의한 지배계급의 통일과 그 이면에서 국가에 의한 노동계급의 분할이라는 경향
--> 자본은 전지구적으로 통일된 추상적 자본일반으로 작동하며, 국가는 지배계급사이의 분할을 통일함으로써 지배를 유지한다(이를 자본의 추상화라고 부른다). 반면 노동력을 분할함으로써만 자본의 통일은 수행된다(그것은 저임금 노동력의 착취를 위해서도, 노동자의 내적 단결을 봉쇄하는 것을 위해서도, 자본에 대한 공격을 노동자들 사이의 공격으로 돌리는 것으로도 작동)

- 자본의 국제주의는 자본축적의 확장에 따라 그 본성상 출현한다면, 노동의 국제주의는 달성되어야 할 목표로서만 제시된다.

- 국가 일반의 부정 아니라 국가의 전화를 요구하는 사고임

 

2) 계기들


①프랑스 혁명과 보편적 권리: 권리의 경계로서 국민국가를 넘어서는 사고의 필요성
②‘프롤레타리아’의 동질화 경향과 현실에서 노동자들 사이의 내적 분할(특히 인종/민족적 분할)
③당운동의 등장과 민족적 동일성에 기반한 운동의 문제
④사회주의 혁명에서 대중 주도성의 우위라는 쟁점

 


3. 국제주의 문제를 봉합하고, 노동자운동을 가로막은 쟁점들

 

1) 생산력에 대한 생산관계 우위


- 노동의 기술적 분할에 대한 노동의 사회적 분할의 우위. 그렇지만 후자는 전자를 통해서만 관철됨
(기술적 재배치를 통해 문제가 해결 될 수 없는 경제적/이데올로기적/정치적 투쟁의 중요성: 그 사회적 분할의 역사적 형태를 분석해야)

 

2)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관계

 

- 전자는 자생적, 후자는 목적의식적이라는 이분법이 가져오는 오해들

- 경제투쟁이 착취의 본질을 건드리기 때문에 더 포섭되기 어렵다
(예: 프랑스혁명 후 부르주아적/프롤레타리아적 요구가 정치제도로 포섭되는 것은 수월했으나, 노동자 경제투쟁에 대해서는 용서가 없었다. 1791년 르샤플리에법은 모든 결사를 금지시킴. 2백인 이하 노동자의 합법적 권리는 1968년에 달성)

- ‘이른바 정치적 계급투쟁은 경제적 계급투쟁에 깊이 뿌리내려야 한다’

- 알튀세르의 "재생산을 위하여" 에서 말하는 “지배계급이 두려워하는 단계들” (이 책을 꼼꼼히 읽어볼 필요가 있다)
①노동자 정치조직들 사이의 정치적 통일(경계태세)
②노동조합 사이의 조합적 통일(긴급태세)
③이 두 단위 사이의 통일(계엄령)
  --> 노조의 분할과 짝을 이루는 노동자 정치조직의 분할들은 부르주아지의 변함없는 전술들이다

 

3) 법률적 형식의 환상

 

- 생산관계는 법률적 관계가 아니다. 따라서 법률관계의 변화에 따라서 생산관계가 바뀌지는 않는다

- 사회주의의 시기가 소유제의 변화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 공공성의 예도(네가지 측면 이상 ①민영화반대 ②비정규직 문제 ③서비스의 테일러주의적 통제 ④사회조합주의적 틀의 사회정책)

 

4) 지배의 다차원성에 대한 고려

 

- 억압적 장치와 별도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강력한 존재

- 투쟁에 의해 그 외부에 있던 것들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내부로 들어오겠지만, 그것은 그럼으로써 그 통제 하에서 작동하게 됨을 무시할 수 없다

 

5) 당의 물신화


- 노조/당의 이분법. 대중운동이 당에 종속되지 않는 경험들

 

6) 공동체의 정체성의 몰입과 그것을 넘어서기- 새로운 공동체 만들기와 그것을 넘어서는 보편성 만들기라는 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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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사회운동 ①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사회운동

  - 국제주의라는 쟁점을 중심으로 -
백 승 욱(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I. 87년 이후 한국 사회의 조건

 

1. 87년 정세의 자유주의적 봉합과 그 균열

1) 대중적 주체의 탄생

- 다시 광주로: 광주/ 87년 6월/ 7-9월의 공통점
  --> 소극적으로는 억압에 대한 저항을 말할지도 적극적으로는 대중적 주체의 등장 (남이 나를 대신해 나를 해방시킬 수는 없다. 해방은 자기 자신에 의해서 --> 프랑스 혁명 이후의 쟁점)
  ==> ‘해방’

- 그러나 그 이후 과정:
 ①제도화(대리) -- 조직하지 않고, 학습하지 않고, 연대하지 않는다
 ②그 다른 표현으로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의 균열 (정부와 함께하는 신자유주의 NGO운동/ 경제적 이익 집착하는 조합주의 운동)

 

2) 운동과 이론의 결합: ‘변혁’이라는 사고

* 여기서 다른 한 쟁점: ‘전태일’ 이후의 쟁점 -- 한국자본주의 그 모순의 근원은?

- 구조적 변화 없이 모순의 해결 어렵다

- 무엇이 어떻게 변화중이며,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 80년대 사회성격논쟁 (어떤 사회/어떤 자본주의 ->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 ‘변혁’
[자본주의가 어떻게 문제인가? --> 세계화 왜 문제인가?
도식적으로 ①정치에서 ‘개량화’ 문제 ②경제에서 3저호황에서 97년 위기로 ③군사세계화 ④이른바 파편화한 주체들과 연대의 파괴]


2. 자유주의의 위기와 대응

 

1) 위기 속의 자유주의

 

- 신자유주의는 자유주의 아님 -- 자유주의 위기에 대한 정치적 보수주의/시장 자유주의의 대응

- 코포라티즘이라 부르는 제도적 포섭의 틀 사라짐

- 거기에 제도적 저항 또한 약화됨: 양보의 필요성 적어짐
  -- 경계의 확산(여성/이주노동자/비정규직)
①분할 통치(소수의 제도적 편입)
②이미지 선동형 포퓰리즘(감정호소형 정치: 적대적 타겟의 인위적 창출)
③정치의 소외: 해방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복지 수혜의 객체화(통치의 대상이 됨 -- 정치의 실종의 자리를 NGO가 대체)

 

2) 다시 87년으로


① 대중 운동의 복원 -- ‘해방’
② 사회성격 논쟁의 재활성화: 어떤 자본주의인가(세계 + 역사로서) -- ‘변혁’
==> 전노협에서 민주노총으로 가는 역사의 해석 필요(적어도 기층에서 ①학습과 조직의 결합--그 상징으로서 노조 이외의 노동운동 단체의 결합 ②지노협의 경험이 적절하게 전달되었는가?)
③ 어떻게 자율적 주체간의 관계 가능한가 (올바르다는 것, 타인의 관계, 이성의 관계, 외국인에 대한 관계를 어디서 배우는가?)
  어떻게 관계 맺고, 연대가 가능한가? (만인의 평등-자유가 자신의 조건인)
==> 대중의 역능의 형성이 ‘민중’이라면(해방과 변혁의 결합), 대중 사이의 윤리적 관계맺음이 ‘시민’(시민성, 시빌리테)이라고 볼 수 있음(왜 시민운동에 시민이 없는지)
-> 민중도, 시민도, 형성되어야 할 것이며, 두 개의 다른 것이 아니다
- 87년 체제의 상속이 아니라, 87년 정세에서 열어젖힌 것을 발전시켜야

* 당운동이 문제이더라도 그것을 좁은 정치 영역에 한정하는 방식으로는 전진 불가능
* 위기가 3중의 위기인 이유: 민노동-민주노총-민중연대 모두에서
 : 대중역량 강화 아니라 제도권 역량강화에 초점 맞춘 위기

- 87년 정세의 제도화에 기여하는가 아니면 그 정세 하의 가능성을 대중의 자기변화를 통한 사회변혁 속에서 달성하는가?


3. 당이라는 쟁점

- 당관념이 상정하는 것들: ①지도-피지도 집중성 ②강령과 일관성 ③당원/조직

- 당이 문제가 되는 이유: ①이론적 단일 중심성 ②조직적 중심성(당내: 이것은 첫 번째와도 연관되는 ‘분파형성권’이라는 쟁점) ③타운동에 대한 지도성과 중심성  [그리고 그것이 종합적으로 문제되는 것은 ‘국가권력 획득’이라는 전략 속에서 나타나는 당의 국가화의 분명한 표현임. 권력장악 이전에도 국가장치가 아닌가의 쟁점은 존속, 그것이 더 분명해지는 계기가 국가권력의 장악이라는 측면] -- 그 과정이 선거를 통한 평화적 이행이건, 아니면 무력적 봉기에 의한 것이건 큰 차이는 없다는

* 사회주의 역사: 당과 혁명의 관련으로 해석되어 온(프랑스혁명 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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