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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11/12
    [펌]더욱 열심히 일하라! 그러면?
    바람이분다
  2. 2004/11/08
    [퍼옴]이 시대 최후의 식민지, 어머니(1)
    바람이분다
  3. 2004/10/16
    뻘소리1
    바람이분다

[펌]더욱 열심히 일하라! 그러면?

더욱 열심히 일하라! 그러면?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역시나 하는 실망감으로 바뀌는 경우를 노무현 정부 아래에서 우리는 너무 자주 보고 있다. 얼마 전 발표된 ‘한국판 뉴딜’ 은 경기부양의 효과를 도모한다고 했지만, 결국 국민들의 호주머니에서 적립된 국민연금, 사학연금, 공무원 연금 등 공적 연기금을 건설투기에 쏟아부어, 결국 일부 극소수 자산가들의 배만 살찌우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시작도 하기 전에 비판받고 있다.

지난 10일 발표된 ‘일을 통한 빈곤탈출 지원 정책’이라고 명명된 국정과제의 수행계획도 마찬가지이다. 이른바 ‘일하는 빈곤층’의 존재는 자못 심각하다. 이들은 대부분이 실업과 반(半)실업, 취업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이들이다. 따라서 정부 실업통계에서도 이들은 제외된다. 이들은 대부분 일용직이거나, 임시적인 일자리에 종사한다. 또한 이들 중 대부분은 건강보험, 고용보험, 산재보험, 국민연금 등 4대 사회보험 적용 대상이긴 하지만 이러한 혜택에서 제외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연금은 23%, 산재보험은 42%, 고용보험은 18% 정도가 그 혜택을 받고 있다고 보고된다. 그리고 임금도 지극히 낮거나 불규칙하게 지급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생활수준은 매우 낮다.

이러한 ‘일하는 빈곤층’이 132만 명쯤 된다고 한다. 한국노동연구원의 한 연구원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 빈곤 가구 비중은 4년간 20.6∼21.5%에 이른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리고 16.5%는 ‘항상적인 빈곤’을 경험하고 있다고 한다. 문제는 빈곤가구 중에서 취업자가 있는 가구의 비중이 절반을 넘는다는 것이다. 즉 일을 하더라도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일하는 빈곤층’의 존재는 노동시장 유연화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노동시장 유연화를 촉진시키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언제든지 필요한 노동력을 공급받을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해고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임금 수준을 높이지 않아도 된다. 최근에 들어와서 이들의 존재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를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되기도 한다. 생활수준을 영위하지 못하는 임금과 불안정한 일자리를 가진 노동자도 많은데 ‘배부른 소리’ 한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하지만 ‘일하는 빈곤층’의 존재가 자본과 권력에는 또 다른 짐으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이들의 생활실태와 삶에 대한 불안, 그리고 이로 표출되는 자살자의 증가 등 사회적 문제는 정권과 자본을 위협하는 조건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의 삶의 어려움을 해소할 수 있는 대책을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정부 산하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에서 제출한 ‘일을 통한 빈곤 탈출 지원 정책’ 또한 그러한 요구 속에서 제출된 것이다. 보고서에서도 이는 그대로 표현된다. “최근 실업률은 안정되었으나 빈곤율은 상승”되었다고 하면서 그 원인을 “산업구조와 노동시장의 양극화에 따라 일을 해도 빈곤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근로빈곤층이 증가”에 두고 있다. 그리고 생산적 복지에 따라 구축된 사회안전망도 “근로빈곤층 문제에 대해서는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위원회에서는 일하는 빈곤층에 대한 교육·의료·주거지원 확대, 근로소득보전세제(EITC)제도 도입 추진, 사회적 일자리 확충, 자활지원정책 대상 확대 및 내실화, 저소득층 창업 지원 제도 혁신 등을 주된 전략으로 제출하고 있다. 이러한 전략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더욱 열심히 일하라’라는 것이다. ‘일자리가 곧 복지이다’라는 것의 재천명이다. 즉 ‘일을 열심히 하면 빈곤에서 탈출한다’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왜 ‘일하는 빈곤층’이 실업과 취업을 반복할 수밖에 없고, 왜 이들은 항상 저임금 상태에 놓여있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항상 빈곤의 상태에 처할 수밖에 없는지를, 스스로 ‘노동시장 양극화’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이에 대한 처방은 없다.

비록 5가지 방향으로 제출된 전략이 단돈 만 원이 아쉬운 이들에게, 당장 일할 자리가 필요한 이들에게는 가뭄에 단비를 만난 것과 같은 효과를 낳을 지는 모르지만, 가뭄 해갈에는 턱도 미치지 못할 수 있다. ‘일하는 빈곤층’이 사라지거나 줄어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위 5가지 전략은 유럽이 복지국가 모델에서 점차로 ‘일과 연계된 복지’로 전화하는 전략을 취한 것과 이미 70년대부터 이를 구체화한 미국의 사례를 따라 이를 모방하는 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렇다고 하여 미국 사회에서 빈곤을 탈출한 계층이 늘어나 빈곤율이 줄어 들었다는 보고는 없다. 참고로 미국에서는 국가에서 건강보장을 해 주는 메디케이드, 메디케어와 직장에서 민간보험 가입을 통해 혜택을 받고 있는데, 이 모두에서 제외되어 있는 사람이 4천만 명이나 된다. 이는 최근에 더욱 더 늘어나는 추세이다.

일을 안 하거나, 못 하거나 혹은 덜 열심히 해서 ‘빈곤’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을 통한’ 빈곤 탈출 전략은 ‘사후 약방문’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아니면 일시적인 대증요법으로 지속적인 악순환을 야기해 병의 골만 더 깊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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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옴]이 시대 최후의 식민지, 어머니

이 시대 최후의 식민지, 어머니 술 마시고 담배피는 ( ) 연애하고 싶어하는 ( ) 살의를 느끼는 ( ) 자위행위를 즐기는 ( ) 위의 ( )안에 만약 성인남성을 넣어보면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싱겁게 느껴진다. 그러나 만약 ( )안에 어머니를 넣게 되면 문제는 달라진다. 사람들은 ‘술 마시고 담배피는 어머니(“세상에, 아이를 생각하셔야죠!”), 연애하고 싶어하는 어머니(“남편이 없나봐. 자식에게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살의를 느끼는 어머니(“세상에서 가장 자애로우셔야할 분이... 끔찍해라.”) 자위행위를 즐기는 어머니(“어머나, 이 말은 못 들은 걸로 할께요”)’라는 문장을 읽어 내려가면서 고개를 갸우뚱하고 징그럽게 느껴지기도 하며 진저리를 치게 된다. 자애로운 성모마리아를 연상시키는 ‘모성본능’이라는 신화는 일터와 생활공간의 분리를 동반한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이다. 그것은 ‘오염된 세상을 구원하는 안식처’로서의 가족과 생산성과 효율성에 기반한 삭막한 일터라는 극단적인 상징체계와 함께 이루어진다. 생산, 정신, 이성과 합리성, 효율성, 일터는 남성성과 결합하게 되고, 소비, 육체, 감성, 애정, 가족은 여성성에 적합한 것으로 정의된다. 역사적으로 처음으로 여성과 남성이라는 범주가 강조되고 가족과 일터에 상응하는 대조적인 특징들이 ‘발명’된다. 이전까지 남성과 함께 집 안팎에서 함게 일했던 여성은 자본주의화가 진행되면서 청천벽력같은 “내가 하루 종일 일터에 가서 돈 벌러 나갈테니 집에 있으라”는 통고를 듣게된다. 중간계급 이상의 여성들은 집에 남아서 아이들을 돌보는 ‘성스러운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것은 ‘아이는 더없이 소중하고 깨지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에 각별한 보호를 필요로 한다’는 아동기의 탄생과 함께 이루어졌다. 걸음마만 할줄 알면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막걸리 주전자를 갖다 주며 농사일을 거드는 노동자이자 작은 어른으로 간주되었던 아이들이 거듭나게 된 것이다. 아동기의 탄생은 ‘만약, 이때 특별한 보살핌이 주어지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논리로 연결된다. 이것은 남편이 일터로 출근한 집에 아이들과 함께 남겨진 중간계급 여성들의 존재를 정당화 하는 논리이다. 동시에 어린 자녀들과 떨어져서 일하는 어머니들을 불안하게 하면서 그녀들을 비난하는 이데올로기로 발전하게 된다. 어머니는 자녀의 성장과 발달에 일차적인 책임자라는 모성이데올로기는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를 강력하게 뒷받침하고 있지만 가장 은폐되어 있다. ‘모성본능’이라는 신화는 여성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 밥을 하고 체육복과 운동화를 세탁하는 것, 방청소 하는 것을 노동이라고 보게하지 않는다. 배 고프면 밥 먹고 싶은 식욕이 생겨나는 것처럼 사랑스러운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하게되는 본능적 행위라는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어머니는 인간이 아니라 자동판매기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분노와 비난의 근거는 자판기에서 설탕프림커피라는 명령버튼을 눌렀는데 블랙커피라는 결과가 나왔을 때의 황당함에 비유될 수 있다. “어떻게 엄마가 그럴 수 있어?”라고 비난을 받는 어머니는 그런 비난을 하는 당사자가 한 인간으로서 자연스럽게 갖고 있는 욕구들의 일부에 잠시 관심을 가졌던 여성들이다. 자식의 이름으로 된 버튼을 누르면 신속하게 보답할 것으로 기대되는 어머니들의 보살핌 행위가 노동이 아니라고 간주되기 때문에 노동시장에서 여성노동자들은 차별받는다. 대형마트 식품매장에서 하루종일 서서 “지나가시는 고객여러분, 맛 있는 젓갈 한번 드셔보고 가세요”라고 소리치는 여성들의 노동은 저숙련노동으로 평가되어 저임금으로 연결된다. 그것은 가족에서 “아가야, 이거 한번 먹어봐라”라는 모성본능에 입각한 행위를 장소만 옮겨서 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별다른 노력과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초등학교는 아이의 안전을 책임지며 그들을 보호해야 하는 일차적인 주체는 어머니로 상정하고서 모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자녀들의 등굣길에 횡단보도에서 서서 자동차 사고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녹색어머니회가 있다. 그러나 녹색아버지회는 없다. 그리고 초등학교 1, 2학년을 대상으로 대부분의 학교에서 실시되는 어머니급식 당번 제도는 어머니들의 취업 유무와 상관없이 2주에 한 번씩 반강제적으로 어머니들을 불러서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밥과 국을 푸게 한다. 어머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후의 식민지이다. 가족, 학교와 교회, 노동조합, 노동시장, 국가는 모성본능, 자녀양육의 1차적 책임자(전문가)라는 이름으로 어머니들의 노동을 무급으로 착취하고 있다. 도대체 ‘미혼모’는 있는데 ‘미혼부’는 어디에 있는가? ‘부성본능’은 없는데 왜 ‘모성본능’만 이 거리를 활보하는가? 이윤추구와 생산성을 속성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모성본능’이라는 신화에 입각하여 여성노동자를 다양하게 차별하고 있다. 따라서 어머니를 식민지화하고 자신이 식민지 종주국으로 군림하고 있는 자신의 행위를 성찰적으로 반성할 때 변혁을 논의할 수 있지 않을까? 혹시 우리가 ‘신성’해야 할 어머니가 ‘속물근성’을 보인다는 이유로 그녀를 비난하고 있거나 “어머니!”라고 외치며 영원한 향수의 대상으로만 그녀를 고정시키고 있다면, 착취의 메카니즘에 눈을 감고 있는 있는 것이다. 어머니가 자신의 욕구와 권리의 주체가 될 때, 자판기가 아닌 인간으로 대우받을 때, 우리들은 여태까지 볼 수 없었던 진정한 진보를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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뻘소리1

블로그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블로그를 좀 열심히 애용해 볼 생각으로 이것저것 꾸며봤다. 아직은 서툴러서 어떤 기능이 있고, 어떻게 써먹으면 좋을 지 구상만 하고 있는 중이다. 인터넷 상에 내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진 것은 그리 오래전은 아니다. 그건 내가 종이 위에 한 글자 한 단어 생각해보면서 오랜 시간동안 글을 쓰던 버릇을 자유롭게 떠오르는 생각과 말들을 평소 말투처럼 바꾸어 풀어내던 때부터, 남 몰래 일기장에 글을 쓰고 혼자만의 공간에서 되돌아보기를 하던 습관에서 불특정 주변인에게 속 이야기를 풀어내고 일상을 같이 공유하는 것이 자유로워 진 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난 조심스러운 글 쓰기를 고수하고 있고, 그것은 내 말투와 행동만큼이나 스스로를 억압하고 강제하고 있기도 하다. 블로그란 공간은 그런 나에게 있어서 좀 다른 생활방식을 열어준 공간이 동시에, 여전히 나의 이야기를 소극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공간이다. 포스트라는 기능에 익숙하지 않아서 최근의 내 글이 전면에 드러나는 것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이것이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남의 이야기로 되었을 때에는 타인의 생각과 고민에 빠져들게 만드는 것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기능상의 문제인지, 포스트의 기능이 원래 그런 것인지 먼저 던져진 타인의 생각과 고민에 난 단지 덧글만 붙일 뿐이고, 내 블로그 공간 이외에 타인의 공간에 글을 남길 수는 없다. 블로그가 쌍방향의 의사소통 공간이고 공유의 장인 것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방적 소통공간으로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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