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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나는 어떤 특정한 날을 잡아 무언가 기념하는 행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무슨 대단한 원칙이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모든' 기념일을 다 싫어하는 것 같지도 않으므로 아마 내가 게으름뱅이, 요즘 말로 귀차니스트여서 그럴 터이다. 기왕 챙기려 마음먹으면 너무나 많아지는, 허다한 기념일들을 모두 기억하는 것 자체가 내겐 어려운 일이다. 무릇 기념일이란 나 혼자만 기념해서 되는 날이 아니므로 항상 다른 사람들과 기념의 수준과 내용을 소통해내야 하는데 그 또한 나에겐 어렵고 귀찮은 일이다. 물론 가장 싫은 건 기념 '행사'이다. 설사 그 행사가 뻔한 요식행위를 넘어 감동할 만한 내용으로 모두의 환호 속에 진행된다고 해도 역시 싫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행사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노래 부르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 아무리 좋아하던 노래라도 그것을 행사에서, 다른 사람들과 한목소리로 불러야한다면 많이 질색해 하는 편이다. 이야기를 주욱 늘어놓고 보니, 나는 게으름뱅이일 뿐 아니라 아주 까다로운 성격의 소유자인 것 같다. 하여튼, 그렇단 얘기다.

 

 

그러므로 당연히, 나 자신의 생일에 대해서도 특별히 기념할 의욕이 없이, 그리고 다른 이들도 내 생일을 네버 마인드해주길 바라며 평생을 살아왔었다. 강력한 추진력과 교섭력을 지닌 룸메이트들과 함께 살기 시작했던 십여년 전 정도까지는 말이다. 며칠 전, 당사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내 생일파티가 열렸다. 말이 파티지, 나의 예전 룸메이트와 현재 룸메이트가 보쌈집에 나를 보쌈해다 놓고 셋이서 함께 밥 먹은 것이 전부다. 케이크에 촛불도 지폈고 선물증정식도 있었으니 파티가 아주 아닌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물론 해피버스데이투유 노래는 속으로만 불렀다. 나도 그것까지 용납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리 까다로운 나이지만 그래도 그러한 룸메이트들의 마음에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선물이 너무 후해서였냐구? 뭐, 꼭 그래서만은 아니고......

 

 

그들에게 감사한 건 감사한 거고, 여전히 난 내 생일이 그리 달갑지 않다. 그날로 말하자면, 대제국의 수장이 획기적인 정책을 발표하여 자본주의의 수명을 지금까지도 연장시킨 날이고, 제국주의에 맞서던 변방의 한 운동가가 사망한 날이며, 제국들 끼리의 처참한 전쟁에서 한 대도시에 기념비적인 공습이 개시된 날, 반제국주의의 기치를 앞세웠으면서도 주변의 약소국들을 짓밟은 또 하나의 제국에 항거해 민중봉기가 일어났으나 실패해 지금껏 수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어떤 나라의 슬픈 기념일, 세계적으로 기려지는 노동계급의 투쟁과 연대의 기념일을 외면하고 지배자들에 의해 기획되어 최근까지 잔존했던 변방 어느 나라의 노동기념일, 그리고 남반부 어느 나라의 늙은 독재자가 무려 7선을 한 날 등등이다. 물론 길고 긴 인류역사상 그날 일어났던 가장 안좋은 일은 나라는 놈이 태어나버린 일일 터이다.

 

 

자, 그래도 그 흉일은 이미 지나갔으므로 다시 기운을 차리고 일단 열심히 살아보는 거다. 내년에 다시 닥쳐올 그날에 대해선 그 때 다시 열심히 우울해주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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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북이눈은 거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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