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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관의 전환
전통적인 언어관은 근원주의, 토대주의라고 하는 언어관에 의해 체계를 이룬다. 언어를 하나의 대상에 대한 보편적인 언어를 통해 의미를 부여하는 유명론이나 경험론, 실증주의등은 언어를 통해 '객관적인 실재의 반영'으로 보았으며 본질론이나 합리론, 현상학은 언어를 '우리의 의식안에 현존하는 관념의 표현'으로 본다.
이와 같은 언어관을 토대주의(a foundational theory of language)라고 말하며 언어의 의미가 외적 실재나 내면의 의식상태 혹은 언어외적인 근원에서 유래한다는 세계관을 갖는다. 데리다는 이러한 토대주의를 해체한 반토대주의(antifoundationlism)의 입장에서 언어 자체에 대한 의미부여, 본질 찾기가 아닌 용어들간의 관계(차이, 대립, 상관)에 의해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데리다의 해체(deconstruction) 이론은 이와 같은 토대주의적 전통 철학의 서열적 모순을 까발리고 이를 전도(reversal)단계와 제거(displacement) 단계로 구성하여 설명한다.
소쉬르의 기호학적 관점인 빠롤( 능기 : 개별 발화자의 발화행위)와 랑그( 소기 : 언어사용의 사회적 규칙) 간의 고정된 구조( "모든 언어는 고정됐다!")를 해체하는 도구로 차연이라는 언어를 사용한다. (언어는 용어들 사이의 유기적 관계를 통해 의미가 부여되며 이를 통해 그 구조(의미, 규칙)는 끊임없이 지속된다.)
차연(differance) - 스펠링 안 틀렸음.. ^^;
차연은 의미에 대해 기호들간의 공간적 차이(spatial difference)와 시간적 지연(temporal deferment)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고정적이고 완결된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흐름, 관계에 따라 끊임없이 순환한다.
즉, 차연 = 차이 + 지연
왜 '차이'가 아닌 '차연'인가?
'차이'는 근본적으로 우열, 이분법 관계를 함의하고 있다. ( ex : SKY IS DIFFERENT!! - 스카이가 더 좋다는 의미를 내포) 즉, '차이'는 본질적인 두 개 이상의 대상간의 '우열' 혹은 '서열'의 세계관에 반해 '차연'은 시공에 대한 '다름'으로 전도시킨다.
아메리카 주변의 어느 작은 섬에선 부모가 50세가 되면 자식이 부모를 죽였다고 한다. 그것은 재화가 한정된 작은 섬에서 인구가 높아지면 재화에 대한 분배 문제로 불화가 생기기 때문에 종교를 빌린 인구 안정화 정책이다. (이들은 내세를 믿었으며 내세엔 죽은 형상 그대로 살아간다고 믿었다. 따라서 적당히 건강한 수준의 50세) 우리나라나 일본의 고려장과 매우 유사하지만 서양인들이 이들의 습속을 보았을 때 경악했다고 한다. 지금의 우리도 마찬가지다. - 시간과 공간의 다름에서 오는 관념의 '차이'
개인적으로 나는 많은 부분에 대해 다른 사람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어떨 땐, 사람들이 너무 일관된 생각을 갖고 있어 내가 변탠가 착각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 '다름'에 대한 토론은 곧바로 '우열'로 전이된다. 그래서 싸우게 된다. 냉전적 이분법..
'다름'에 대해 '우열'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자신을 '우'에 놓기 위해 싸우게 된다. (주관된 우열의 법칙을 객관화시키기 위한 에러상황이다.)
나는 데리다를 살짝 배웠으므로 싸우고 싶지 않다. 어떤 의사결정 상황이 있을 경우는 어쩔 수 없지만 ... 난 평화주의자다..!
편 가르기 그리고, 회색빛 세상 보기
이게 불만이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을 택하라는 협박, 그렇다/아니다, 참/거짓, 적/아... 이렇듯 조급하게 규정하기를 강요하는 분위기..
이렇게 흑백TV 속에 사는 사람들(그리고 시스템)은 끊임없이 선택을 강요한다. 그리고 이 선택의 이면엔 옳고/그름, 즉 '다름'이 악마처럼 도사리고 있다. (선택과 동시에 바람처럼 나타나서 줄곧 심판한다.) - 난 솔직히 4지선다에 자신이 없다.. ^^;
데리다의 차연에서도 보듯이 사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흑과 백 사이에 수많은 회색들이 있다. 퍼지이론은 이 사실관계에서 시작한다. 1(true), 0(false)로 모든 연산과 표현으로 처리되는 컴퓨터를 통해 인간의 사고를 모방할 수 없다.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인공지능 분야의 이론이 Fuzzy 이다. 퍼지 이론에 따르면 모든 논리는 모호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1과 0 사이에 수많은 0.n을 인정하고, 어떤 규정이란 결국 근사 추론 (approximate reasoning)에 의해 정리된다고 한다. 차연과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다.
우리의 관념들은 해체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관념의 수단 또한 해체되어야 한다. 해체 작업이 진행되다 보면 언젠간 새로운 지평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겠지..............
나중에 작정하고 데리다의 '차연'에 대해서 정리할 계획인데...
한국에서 '다르다'(차이)의 의미는 이성으로서 납득하기 힘든 부조리를 함의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동성애자, 양심적 병역거부자, 비전향 양심수들 그리고 페미니즘.... 등등 상당히 여러 형태로 '다름'에 대한 폭력이 만성화되어있습니다.
위해성이 없고 공리에 해를 주지 않으며 질서를 깨뜨리지 않는 범위에서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할 것입니다. ( 물론 이 자유를 구속하려는 사람들은 질서에 위해하다고 생각하시겠지만... )
목신의 오후란 카페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양심의 자유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 모두가 천편일률적으로 밥을 먹는 사회가 있다고 치자. 그리고 사회는 모두에게 오로지 밥 위주의 식생활을 헌법으로 규정했다고 치자. 하지만 그 집단에 속한 몇몇 개인이 "쌀은 싫다! 난 라면 먹겠다!"라고 자꾸 주장할 때 (라면 안 먹게 해주면 굶어죽겠다는 비장함까지 보이면서) 사회에서 "그렇다면 니들은 라면 먹어라" 하는 겁니다. ..."
여기 이 여러 '자유' 중 사상의 자유때문에 감금되어있는 송두율 교수가 있습니다.
촌극에 가까운 지난 일년간의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에게 '다름'에 대한 관용?, 인식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전 송두율 교수가 석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보다 더 조국 통일에 관심을 갖고 여러 연구와 활동을 한 그 입니다.
아시다시피 독립운동가 중에는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등등 여러 이즘들이 혼재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숙원은 우선 '독립' - 지금으로선 통일 - 이었습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버나드 쇼는 '사상의 자유는 그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터무니없다고 할지라도 표현하고 주장할 수 있는 자유다'라고 말했습니다. 사회주의 사상가 로자 룩센브루크는 '나에게 자유란 언제나 정치적 반대자의 자유를 의미한다'라고 합니다.
전 이 사회가 다채로움 속에서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합의를 통해 구성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랑 생각이 다르면 빨갱이.... 이런 냉전적 문화는 우리가 버려야할 독재적 이대올로기의 소산입니다.
암튼... 송두율 교수는 석방되어야 합니다.. ^^;
http://bbs2.hani.co.kr/Board/ns_labor/list.asp?sTable=NSP_005002000"> 한겨레 토론 마당 : 보안법 철폐 토론방
http://freesong.jinbo.net/maybbs/list.php?db=freesong&code=statement">
http://freesong.jinbo.net/kr//images/logo.gif">>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40040528165008&s_menu=사회">
송두율, 잊혀지는가?
<시론> "그를 가두는 것은 우리 자신을 가두는 것이다"
출처 : 관점이 있는 뉴스 프레시안 에서..
격동의 와중에 놓여 있는 한국사회에서 <송두율>이라는 이름은 어느새 잊혀지고 있는가? 그의 귀국이 몰고 왔던 충격파에 비해 오늘날 그가 영어(囹圄)의 몸이 된 현실에 관심을 돌리는 이는 참으로 적다. 사상의 자유와 인권에 대한, 각질 두꺼운 무감각의 소산이다.
냉전시대의 독소적 지배 장치인 국가보안법의 족쇄에 묶인 그의 처지는 한국사회의 정신적 좌표가 여전히 넘지 못하고 있는 경계선의 진상을 보여주고 있다. 같은 민족이면서도 서로 다른 역사적 경험을 해왔다는 것이 소모적이고 적대적인 분열을 낳아온 우리 현대사의 모순을, 이제는 청산하고 다음 단계로 가야 함에도 과거의 논리와 법의 주도권은 난공불락(難攻不落)같은 구시대의 파수병이 되고 있다.
국가보안법, 냉전시대의 독소적 지배장치
분단시대의 갈등을 조화로운 통일의 영역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어려운 해외생활 속에서도 치열한 사상적 고뇌를 해온 한 뛰어난 지식인의 인생과 가치는 돌아온 조국에게 이렇듯 처참하게 짓밟히고 있다. 송두율은 그에 대한 비난의 근거로 지적되고 있는 북한 노동당 가입, 북한의 자금 수수와 관련하여 당시의 사정을 내세우지 않고 실정법 위반에 대한 법률적 책임을 지겠다는 의사를 이미 밝혔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한다는 이 나라의 법정신과 정치이념은 그의 내재적 이해에 따른 북한체제 연구를 “반체제적 위험물”로 인식하고 있다. 통일의 미래를 내다보는 이 나라 민족 성원이라면 그 누구라도, “상대의 자리에 서보는 내재적 이해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이를 적대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기존질서가 용인하는 “일방적 관점”을 옹호하지 않으면 송두율과 동일한 운명에 처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것은 “정치사상적 이견자”에 대한 탄압과 침묵의 강요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국가보안법의 반인권적/반민주적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대목이다.
분단현실이 존속하는 한, 남쪽 체제의 우월성과 정당성을 일단, 그리고 우선 지지해야 한다는 전제가 담긴 일방적 관점 이외의 것은 법적으로 허용할 수 없다면 그것은 북한의 역사적 경험과 현실을 모두 먼저 부정하라는 이야기이다. 이는 어느 하나가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를 죽이든지 아니면 모두 공멸하는 데까지 가보자는 무서운 상극의 논리이다.
상대에 대한 내재적 이해를 적대시하는 것은 상극의 논리
국가보안법은 바로 이 상대에 대한 절대부정을 통해 남쪽 체제의 안전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며, 그 안전이라는 것도 서로가 이해하고 협력하면서 평화적으로 통일하려는 이들의 안전이 아니라 자신의 기득권을 통일 이후에도 그대로 연장하려는 자들의 안전이다. 그것은 통일이 아니라 상대를 점령, 지배하려는 전략의 변형일 뿐이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이는 제거해야 할 “체제의 적”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법체계가 기본질서가 되어 있는 상황에서 남과 북의 진정한 대화와 이해의 과정을 위해 노력하는 지적 진실성과 열정은 기대할 수 없다. 그 결과는 상대에 대한 무지요, 그로 인한 오해와 갈등의 심화이다. 통일의 길은 그렇게 해서 자꾸 멀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송두율>의 의의는 너무도 중차대하다. 그것은 이 문제와 관련한 그의 사상적 투신이 무의미한 대립과 소모적인 충돌, 그리고 상극으로 치닫는 상대에 대한 부정을 차단하고, 남과 북의 보다 심화된 정신적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길을 앞서 열어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사회는 송두율의 그러한 노력과 헌신을 높게 평가하고 그에 기초한 남북간의 내재적 이해의 쌍방성을 심화시키기 위한 작업을 해나갈 일이지, 이렇게 법의 굴레를 그에게 뒤집어 씌워 그의 마음과 육신에 깊은 멍이 들게 하고 비탄의 절규를 할 일이 결코 아니다. 이건 명백한 반문명이다.
송두율의 손과 발을 묶고 그의 입을 봉하게 하는 사회는 기존체제의 논리만 발언권을 가지겠다는 반민주적 사회이며, 인식론적으로 외눈박이 사회이다. 그것은 미래를 위한 이 나라의 지적 역량을 빈곤하게 만들겠다는 것이자, 필요하면 언제든 하나의 잣대로 모든 것을 재단하겠다는 전체주의적 야만의 정치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송두율을 가두는 사회, 자신의 미래를 가두는 사회
그 정치의지가 법으로 무장하고 있을 때, 그 희생의 고통은 이루 말 할 수없이 크다. 일단 걸리면 법의 포박을 벗어나기란 어렵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이 사회는 진실의 전모를 볼 수 없는 철학적 후퇴를 강요당하게 된다. 그 철학적 후퇴는 분단시대 이후의 미래를 감당할 수 있는 정신적 역량의 고갈을 뜻하는 것이다.
통절한 마음으로 부르짖는다. 부디 송두율을 옥에서 풀어내라. 분단시대극복을 위한 사상적 모색에 한 평생을 바쳐온 한 지식인을 이런 식으로 가두는 것은 곧 이 나라의 미래를 가두는 것이다. 지식인의 자유를 박탈하고 그의 신체를 수인(囚人)되게 하는 것을 허용하며 침묵하고 있는 사회의 양심은 이미 병들었다. 우린 그런 우리를 이대로 방치하고 말 것인가?
한때 이 나라의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몸담았다는 이들이 허다하게 정치인이 되었는데, 그들은 송두율에 대하여 입을 다물고 있다. 온당치 않다. 무엇을 사리는가?
어느새 6월의 태양이 저만치 떠오르고,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나 6.15 선언을 하면서 손을 굳게 잡은 날이 다시 다가오는데 바로 그런 현실이 오라고 자신의 생애를 바쳐왔던 한 지식인은 지금 차가운 철장 뒤에서 속히 지나가지 않는 밤을 뒤척이며 가슴을 찢고 있다. 그런데도 우린 그저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편안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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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호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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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잘 배워갑니다~ 아 그런데 예로 든 것 중에서 고려장이라고 하는 풍습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고 민족정신 말살 정책의 일환이었습니다. 수정해주세요~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