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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헤드 신드롬의 정체

라디오헤드 신드롬의 정체
장호연 bubbler@naver.com | contributor
 

정규 앨범 발매에 앞서 mp3 파일이 인터넷에 유출되는 현상은 이제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놀랍다면 화이트 스트라이프스(The White Stripes)에서 최근 스피리추얼라이즈드(Spiritualized)에 이르기까지 mp3 파일 유출 관련 뉴스가 미디어의 중요한 기사거리로 자리잡은 속도와 (의도했든 안 했든) 그것이 갖는 홍보 효과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것이 뮤지션의 인기를 말해주는 한 척도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네임밸류가 높은 뮤지션일수록 뉴스는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유출 시점 또한 빠르다. 심지어는 잘못 확인된 음원이나 채 녹음이 완료되기도 전의 음원이 떠돌아다니기도 한다.

금년도 가장 기대를 모으고 있는 화제작인 라디오헤드(Radiohead)의 6집은 이런 소동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정식 발매일을 세 달이나 남겨둔 지난 3월말 믹싱도 마치지 않은 채로 인터넷에 등장한 [Hail to the Thief]는 네티즌들의 열렬한 관심 속에 폭발적인 다운로드로 이어졌다. 한편 이보다 조금 앞서 밴드는 정규 앨범에 앞서 소규모 투어를 갖겠다는 발표를 내놓았다. 영국과 아일랜드의 다섯 개 도시에서 열리는 이번 공연은 특히 6년 만에 처음으로 갖는 실내 공연이라는 점에서 팬들의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게다가 이미 인터넷에 공개(?)된 음원이 지난 앨범들이 보여준 지나친 실험성의 우려를 불식시키듯 좀더 대중친화적인 사운드를 담고 있었던 터라 기대가 더욱 컸다. 홈페이지를 통해서만 판매된 공연 티켓은 당연히 수시간만에 매진이 되었다. (한편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 티켓 역시 오프닝을 맡은 R.E.M.과 더불어 라디오헤드의 참가 소식이 알려지면서 기록적인 시간만에 매진되었다.)

지난 토요일부터 더블린에서 시작된 이번 투어는 예상대로 미디어의 대대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NME는 (그렇게 구하기 어려웠다는) 티켓을 경품으로 제시하며 독자들의 관심을 유도했고, 거의 매공연 리뷰를 신속하게 홈페이지에 올리는 열의를 보여주었다. 멀리 미국과 일본에서 이들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의 인터뷰까지 실으면서 말이다. 월요일자 몇몇 일간지들도 이들의 공연을 관심 있게 보도하는 등 이런 열기는 정식으로 앨범이 발매되는 6월초에 정점에 달할 전망이다. 그런데 대체 이런 열기의 정체는 무엇일까? 라디오헤드 '신드롬'이라 불러도 좋을 이런 열광에는 뭔가 별난 구석이 있어 보인다. 사실 대중성으로만 따지자면 라디오헤드만큼 음반 판매량이 유명세에 못 미치는 밴드도 없을 것이다. 물론 이들이 현재 거의 유일하게 영국이 세계에 내세울 만한 밴드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신드롬은 비단 영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록 음악의 미래라는 설명은? 미래를 진단하는 일에 일관된 합의를 끌어내는 것도 어렵거니와, 여기에는 록 음악이 현대 문화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설명해야 하는 까다로움 또한 따른다.

운이 좋게도 티켓을 구한 나는 셋째 날(5월 19일) 벨파스트(Waterfront)에서 공연을 보면서 나름대로 의문을 풀었다. 이는 잠시 뒤로 미루고 먼저 공연장 분위기부터 스케치하자. 이들의 인기를 실감했던 것은 벨파스트에서 공연이 열리던 날 시내 호스텔 예약이 일치감치 끝났다는 점이다. 물론 공연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성수기도 아니고 주말도 아니고, 유명한 관광 도시도 아닌 점을 생각한다면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공연장소를 확인하러 간 오전부터 공연장 주변에서 사진찍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 일본인들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실제 공연장에서는 수많은 인파에 묻혀 이들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일본에서 라디오헤드를 보러 많은 사람들이 떠났다는 소문이 사실인 듯했다. 모르긴 해도 유럽이나 미국에서 건너온 사람들도 제법 되었을 것이다. 라디오헤드의 팬덤이 국제적임을 새삼 확인한 순간이었다.

이들의 공연의 시작은 여느 공연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관객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등장한 이들은 첫 싱글로 결정된 "There There"를 시작으로 신곡들과 예전 곡들을 적절히 오가며 연주했다. 인터넷으로 얻은 첫날 공연리스트는 이들이 다른 곡들과 순서로 공연을 채운 탓에 별 쓸모가 없었다. 솔직히 첫 느낌은 과도한 기대에 다소 못 미쳤다. 경력에 비해 손발이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었고, 여기에 영국 밴드는 미국 밴드에 비해 라이브가 딸린다는, 경험상에서 얻은 편견이 더해졌다. 그런데 곧 나는 정신없이 이들에 홀려들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톰 요크(Thom Yorke)의 마술에 홀려들고 있었다.

한마디로 공연장에서 만난 라디오헤드(톰 요크)는 우리가 가장 편안하게 생각해온 예술가 이미지에 정확히 부합하는 밴드였다. 즉, 영감에 사로잡힌 천재이자 그들만의 세계의 창조자였다. 사실 천재니 영감이니 자율성이니 하는 관념들은 19세기 낭만주의 시대로부터 이어져온 미학으로 서구의 클래식 문화 전통의 우월성을 확보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는 20세기의 대중 문화와는 근본적인 충돌을 보였고, 그 과정에서 록 음악은 밴드 공동체와 진정성(authenticity)이라는 가치를 새롭게 만들어냈다. 즉, 록 음악은 개인의 산물이 아니라 밴드 멤버들 간의 공동 작업의 소산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동시대를 반영하는 산물로서 리얼리티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체계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러면 낭만적인 예술가상은 간단하게 폐기처분 되었을까. 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여전히 예술가에게 특별한 뭔가를 기대한다. "예술가는 시대의 예민한 촉수"라는 말을 굳이 꺼내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예술가, 특히 음악가가 본질적으로 자기들과 다른 세계를 갖고 있을 것이라도 믿는다. 이는 저널이나 아티스트 전기물에서 '표현'이라는 말이 여전히 득세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은데, 아마 이것이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은 공연장일 것이다. 여기서 모든 사운드는 마치 보컬리스트의 '직접적인' 표현인 것처럼 연출되고 경험된다.

라디오헤드의 공연장에서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철저하게 톰에 집중된다. (물론 모든 공연이 그런 것은 아니다. 화이트 스프라이프스의 공연은 맥과 잭의 주고받음으로 긴장감과 재미를 높이고 있고, 욜라 텡고(Yo La Tengo)의 경우 악기를 서로 바꿔 연주함으로써 멤버들간의 평등한 관계를 잃지 않는다.) 이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톰 요크의 목소리다. 독특한 울림과 풍부한 표현력을 자랑하는 그의 목소리는 이들의 음악에 담긴 다른 멤버들의 아이디어와 노고를 '간단히' 그의 표현으로 만들어버린다. 풍부한 성량과 카리스마로 무장된 목소리가 신들린 듯한 제스처와 만날 때, 무대에는 오직 톰 요크밖에 보이지 않는다. 즉, 라디오헤드는 그의 메신저에 불과한 것이다.

사실 이런 점은 이들의 음악에서도 어느 정도 확인될 수 있다. 라디오헤드의 곡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도처에 분석이 불가능해 보이는 즉흥성이 발견된다(특히 [Kid A] 앨범이 그렇다). 블러(Blur)의 음악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고민 끝에 이뤄낸 사운드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드는데, 라디오헤드의 경우 멤버들이 만나 사운드를 하나하나 구축해가는 광경보다 톰이 영감에 홀려서 혹은 꿈속에서 계시를 받아 적어낸 사운드라는 비유가 더 적절해 보인다. 물론 우열을 가리자는 의미가 아니라 음악 구조가 환기시키는 이미지가 전혀 다르다는 뜻이다. 그만큼 라디오헤드의 음악은 곡 진행을 예측하기가 어렵고 화성이나 선율 진행이 독특하다.

이들의 사운드가 [OK Computer]부터 점차 세상과 거리를 두고 우주적인 사운드스케이프로 이동하는 것도 이런 심증에 힘을 더한다. 몽롱하고 수수께끼 같은 사운드와 톰 요크 특유의 웅얼거리는 보컬은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라디오헤드만의 세계의 징표가 되었다. (꿈, 무의식이야말로 예술가를 상징하는 기표가 아닌가.) 그래서 이들이 커버곡을 연주한다는 것은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우며, 다른 밴드가 라디오헤드의 곡을 연주하는 것 역시 선뜻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라면, 한때 자발적인 표현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간주되었던 테크놀로지가 라디오헤드의 경우 표현성을 드높이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칸트의 말대로 "천재는 스스로에게 부과된 하나의 법"이므로 천재를 규율할 수 있는 것은 천재 자신밖에 없다. 그래서 라디오헤드 이후는 있지만 라디오헤드 이전은 없다. 라디오헤드에 대한 열광은 거의 [OK Computer]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앞서의 두 음반이 그런지와 느슨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데 비해 이 음반은 전혀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혹은 개척한 것처럼 들렸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동시대의 트렌드나 로컬 씬과 무관한, 말 그대로 스스로 규율을 창안해낸 창조자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라디오헤드가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말은 거의 들리지 않은 반면, 트래비스(Travis)로부터 콜드플레이(Coldplay)에 이르기까지 1990년대 중반 이후 등장한 영국의 기타팝 밴드들은 다들 라디오헤드의 적자로 거론되는 상황을 맞이했다.

톰 요크의 퍼스낼러티 또한 낭만적인 예술가상에 더없이 잘 들어맞는다. 그의 예민한 목소리는 세상과의 불화를 혼자 짊어진 듯 들리며, 왜소한 체격 또한 병을 앓듯 마른 체형을 선호했던 낭만주의 예술가 신화에 부합한다. 천재는 시대로부터 외면을 받는다는 말은 이들의 컬트적 팬덤과 연결되며, 예술은 시공을 초월한다는 통념은 팬덤의 국제적 양상과 일치한다. 예술가 신비주의는 이들의 인터뷰가 톰보다는 다른 멤버들에 의해 주로 이뤄짐으로써 유지된다. 게다가 그의 목소리와 무대에서 보여지는 제스처에서 예술가의 상징인 정신분열적 양상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또한 진정한 예술가는 대중에 영합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의 음악에서 업템포의 발랄한 댄스 곡을 찾기 어렵다는 점과 연결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공연장 입구에 붙은 모싱을 금지한다는 안내말은 사실 불필요했다. 이들의 음악은 모싱은 고사하고 박수조차 치기 어렵다.

이상이 라디오헤드의 공연을 보면서 나름대로 얻은 해답들이다. 정리하자면, 수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영감에 찬 초월적 예술가라는 이미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있으며, 이는 라디오헤드의 경우 록 이데올로기의 정반대편에서 극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영화 담론에서 작가주의 관점이, 영화 자체의 산업적인 속성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공연장에서 연출되는 이미지와 실제 모습과의 거리라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으며, 이렇듯 예술가상을 강화하기 위해 연출되는 콘서트가 비단 라디오헤드만은 아닐 것이다. 다른 점은 (그리고 이점이야말로 이들에 대한 이상 열기를 설명해주는 것일 텐데) 그 '강도'에 있다. 그래서 이런 해석에 의구심을 품는 사람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애석하게도 하나밖에 없다. 라디오헤드의 공연을 직접 보면서 톰 요크의 마술에 홀려들어 보라고.

한 가지 말하고 싶은 점은 톰 요크가 모차르트로 대표되는 천재 음악가상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이다. 모차르트처럼 음악적 재능은 탁월하지만 사회적으로 무능한 사람도 아니고, 또 로큰롤 초기부터 있어왔던 기인(奇人)과도 구별된다. 그는 사회와의 소통에 실패해 자폐적인 세계에 함몰되는 사람이 아니라 철저히 자신의 광기를 통제하는 사람이다. 뭔가에 홀린 듯 신들린 제스처와 목소리를 들려주다가도 곡이 끝나고 불이 꺼지면 다시 평정심을 되찾는 통제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그런 극단적인 정서를 오가려면 엄청난 신경쇠약을 감내해야 할 것 같다.) 기타의 조율 상태나 사운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연주 도중 무대를 떠나버리는 괴팍함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이내 다시 무대로 돌아와 곡을 연주했다. 종종 청중들에게 말을 건네기도 했고 간간히 유머를 던져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결코 동시대와 떨어진 세계에 살지 않는다는 점이다. 로스 엔젤레스 거리에 붙은 포스터 광고로 화제를 모은 "We Suck Young Blood"는 헐리우드에 대한 경멸을 담은 곡이고, "The Gloaming"을 연주할 때 톰은 "We need to stop them"이라고 말하면서 부시 행정부에 대한 불편함을 토로했다. 아니 모든 것은 앨범 제목 속에 잘 드러나 있다. [Hail to the Thief]에서 도둑은 앨 고어로부터 대통령 직을 빼앗아 간 부시를 가리키는 말로, 부시의 취임식 때 일부 청중들이 내던진 말이라고 한다. 20030522

 

www.weiv.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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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질문들

♧ What is truth? How or why do we identify a statement as correct or false, and how do we reason? (진리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진술에 대해 어떻게 그리고 왜 옳거나 그르다는 판단을 내리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무언가를 추론하는가?)

♧ Is knowledge possible? How do we know what we know? (지식이란 가능한가?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는가?)
♧ Is there a difference between morally right and wrong actions (or values, or institutions)? If so, what is that difference? Which actions are right, and which wrong? Are values absolute, or relative? In general or particular terms, how should I live? (도덕적으로 옳은 행위와 옳지 않은 행위 (또는 가치, 또는 제도)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가? 만약 있다면 그 차이는 무엇인가? 어떤 행위들이 옳고, 어떤 행위들이 그른가? 그 가치들은 절대적인가, 상대적인가? 일반적인, 또는 구체적인 말로 하자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What is reality, and what things can be described as real? What is the nature of those things? Do some things exist independently of our perception? What is the nature of space and time? What is the nature of thought and thinking? What is it to be a person? (현실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것들이 현실적이라고 말해질 수 있는가? 그것들의 본성은 무엇인가? 어떤 것들은 우리의 지각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가? 시간과 공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사유와 생각하는 것의 본성은 무엇인가?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What is it to be beautiful? How do beautiful things differ from the everyday? What is Art?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름다운 것들은 일상적인 것들과는 어떻게 다른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여러 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묻는 질문이란다. 물론 '철학이란 무엇인가?'도 포함되어야겠지만, 여기에 제시된 것들은 그나마 '구체적인' 것들이라고. 인터넷 백과사전 철학 항목에서 보고, 심심해서 옮겨 놓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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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

radiohead - kid A(2000)

한 곡만 듣고 놀래 자빠졌는데, 다 들어보니 그 정도는 아니었다는.


yo la tengo - i can hear the heart beating as one(1997)

꿈같은 'autumn sweater'.

 

boris - pink(2005)

'electric'으로 집약되는 포스트록의 한 극단, 그리고 중독성.

 

audioslave - out of exile(2005)

보컬과 연주가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만으로는 무난함과 평범함을 극복할 수 없음.

 

porcupine tree - lightbulb sun(2000)

shesmove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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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늦었어, 이제 가봐야겠다. 난 지금 자수하러 가는 거야. 하지만 난 내가 무엇을 위해서 스스로를 내주려는지 모르겠다."

   굵은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렀다.

   "울고 있구나. 내게 손을 줄 수 있니?"

   "그걸 말이라고 해?"

   그녀는 그를 꼭 껴안아 주었다.

   "고난을 당하러 가는 것 자체가 벌써 범죄의 반을 씻는 것은 아닐까?" 그녀는 그를 꼭 안고서 그에게 입 맞추고 외쳤다.

   "범죄라고? 어떤 범죄 말이냐?" 그는 갑작스럽게 격분해서 외쳤다. "내가 더럽고 해로운 <이> 같은 존재, 아무에게도 필요치 않은 고리 대금업자 노파를 죽인 범죄 말이냐?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즙을 빨아먹은 그 여자를 죽였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40가지의 죄도 용서해 줄 거야. 과연 그런 게 범죄일까? 난 그런 것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아. 죄를 씻을 생각도 없어. 모두들 사방에서 내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말하지, <범죄다, 범죄다!>라고. 하지만 그 불필요한 수치를 향해 가기로 결심한 지금에서야 비로소 나는 내 소심함과 어리석음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어! 난 단지 비열함과 무능함 때문에 가려고 결심한 거야. 그리고 또 그…… 뽀르피리가 제안한 것처럼 그것이 유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

   "오빠, 오빠,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하지만 오빠는 피를 흘리게 했잖아!" 두냐는 절망한 목소리로 외쳤다.

   "모든 사람들이 흘리고 있는 피야." 그는 거의 미친 듯이 그 말을 잡아챘다. "지금도 흐르고 있고, 언제나 세상에서 폭포수처럼 흘렀던 피, 샴페인처럼 흐르고 있는 피, 덕분에 카피톨리움 신전에서 월계관을 쓰고, 훗날 인류의 은인으로 칭송받게 한 그 피야. 그래, 똑바로 쳐다봐, 잘 들여다보란 말이야! 난 사람들을 위해서 선을 원했던 거야. 나 자신은 이 어리석은 일, 아니 어리석다기보다는 그냥 적절치 못했던 이 일 대신에 수백, 수천 가지의 착한 일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왜냐하면 내 사상은 실패한 지금에 와서 생각하듯이 그렇게 어리석은 것만은 전혀 아니니까……. (실패했을 경우에는 모든 것이 어리석게 보이지!) 그 어리석은 행위를 통해 난 다만 나 자신을 독립적인 위치에 올려놓을 수 있는 자금을 얻기 위한 첫걸음을 떼고 싶었던 것뿐이야. 그렇게 되었더라면 모든 일은 그와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의 무한한 이로움을 안겨 주어서 모든 것을 상쇄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그런데 난, 난 그 첫걸음을 견뎌 낼 수가 없었던 거야. 왜냐하면 난 비열한 녀석이니까! 바로 이게 문제의 전부야! 어쨌든 너희들의 생각대로 세상을 보지는 않을 거야. 만일 내가 성공했더라면, 내게 월계관을 씌워 주었을지도 몰라. 그런데 난 지금 함정에 빠져 있으니!"

   "하지만 그건 아냐. 전혀 그런 게 아냐! 오빠,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아! 형식이 이래서는 안 되었어. 내가 행한 일이 그렇게 미학적으로 훌륭한 형식은 아니었어! 하지만 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왜 폭탄으로, 포위 공격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더 존경할 만한 형식이라고 하는 거지? 미학적인 두려움은 무력함의 첫번째 징후야……! 난 이것을 지금보다 더 명확하게 의식해 본 적은 한번도 없어. 그리고 난 지금보다 더 나의 범죄를 잘 이해한 적은 없어! 난 지금보다 더 나의 범죄에 대해 강한 확신을 느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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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바로 이 순간 이반 일리치는 나락에 떨어져 빛을 보았고, 빛을 보는 순간 자신이 살아온 삶이 그래서는 안 되는 삶이었지만 아직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믿었다. 그는 '그게' 무엇인지 자문하다 입을 다물고 귀를 곧추세웠다. 여기서 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손에 입을 맞추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뜨자 아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들이 가여워졌다. 아내가 다가왔다. 그는 아내를 쳐다보았다. 아내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고, 눈물은 그녀의 코와 뺨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절망적인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가 안쓰러워졌다.

   '맞아, 저들에게 내가 몹쓸 짓을 하고 있는 거야'라고 그는 생각했다. '저들에겐 미안하지만 내가 죽는 게 저들에게도 나을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힘이 없었다. '가만 있자. 말이 무슨 소용이야. 행동하면 되지'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눈으로 아내에게 아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데리고 나가…… 안쓰러워…… 당신도……."

   이어서 그는 '미안해'라고 말하려다 그만 "가게 둬"라고 하고 말았다. 그는 그 말을 정정할 힘이 없었지만 알아듣는 사람은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한 손을 저었다.

   그러자 갑자기 자신을 괴롭히며 나오지 않는 모든 것이 두 방향, 열 방향, 모든 방향에서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게 분명히 보였다. 저들이 불쌍해, 저들이 힘들어하지 않도록 해주어야 해. 저들을 해방시켜주고 나도 이 고통으로부터 해방돼야 해. '얼마나 좋아, 얼마나 간단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근데 통증은?' 하고 자신에게 물었다. '어디로 간 거야? 어이, 통증, 너 어디에 있는 거야?'

   그는 귀를 곧추세웠다.

   "아, 저기 있구만. 뭐, 어때. 통증은 그대로 있으라고 하지, 뭐."

   "근데 죽음은? 죽음은 어디에 있는 거지?"

   그는 예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찾아보았으나 발견하지 못했다. 어디에 있는 거지? 죽음이라니? 그게 뭔데? 그 어떤 두려움도 없었다. 죽음도 없었기 때문이다.

   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었다.

   "바로 이거야!" 그는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좋을 수가!"

   한 순간 이 모든 일이 일어났고 그 순간이 지니는 의미는 이후 결코 바뀌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의 임종의 고통은 두 시간 더 지속되었다. 그의 가슴속에서 뭔가 부글거렸다. 쇠약해진 육신은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다 부글거리는 소리, 쌕쌕거리는 소리는 점차 잦아들었다.

   "끝났습니다!"

   누군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그 말을 마음속으로 되풀이했다. "죽음은 끝났어"라고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그는 숨을 한차례 들이마셨다. 절반쯤 마시다 숨을 멈추고 긴장을 푼 후 숨을 거두었다.

 

─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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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데이즈

'재밌게 봤다'고는 말 못하겠다. (ㅋㅋ) 그러나 보기 전부터 어차피 '기억에 남을 만한 작품'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만은 짐작하고 있었다. 마지막에 기타를 치며 부르는 노래는 정말 좋았다. 마이클 피트가 직접 작곡한 것이라고.

 

 











 

 

아래는 보너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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싹트는 생명

싹트는 생명 -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 원제 Germinal Life : The Difference and Repetition of Deleuze (1999)

키스 안셀 피어슨 (지은이), 이정우 (옮긴이) | 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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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에 대한 해설서/연구서들 중에 가장 관심이 가는 것 중 하나. 내가 관심을 가지는 분야인 베르그손-생명철학-들뢰즈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차이와 반복>>에 대해 해설한 [국내에 번역된] 거의 유일한 연구서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생물학 공부의 압박 또한 만만치 않다. 결국에는 해야 하는 것인가보다. 학문이 이렇게 분화된 현대 사회에서는, 인간 존재의 본성에 대해서는 생물학이, 우주의 근원에 대해서는 물리학이 철학보다는 더 그럴 듯한 대답을 내놓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말하면서도 꽤나 허무하군.

 

아래는 책 소개와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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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사유를 다윈과 바이스만으로부터 베르그송과 프로이트에 이르는 근대 생명철학의 한 갈래에 놓고서 그 특성을 밝히는 책이다. 아울러 레이몽 뤼예, 질베르 시몽동, 야콥 폰 웩스퀼과 같은 다양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상가들의 사상까지 포함, 풍성한 바탕에서 들뢰즈의 사유를 사유한다.

 

저자는 들뢰즈 철학의 세 가지 계기인 <베르그송주의>와 <차이와 반복>/<의미의 논리> 그리고 <천의 고원>을 분석함으로써 들뢰즈의 생명철학을 일관되게 구성한다. 들뢰즈가 체계적인 생명철학을 전개한 적은 없다는 점에서, 책은 단지 들뢰즈가 구성해놓은 이론의 주석을 넘어 들뢰즈를 주제로 저자 자신이 일관되게 구성한 생명철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저자는 오늘날의 생명철학 일반에 대한 폭넓은 식견을 바탕으로 현대 생명철학의 장 전체에 들뢰즈를 위치시키고 있다. 그것을 통해 들뢰즈(와 가타리)의 생명론이 현대 생명 이론들 일반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으며 또 현대 생명론 전체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과학과 철학의 벽을 넘어 포괄적인 생명론의 한 관점을 제공해준다.

 

서론| 들뢰즈의 차이를 반복하기

 

제1장 베르그송의 차이 개념:지속과 창조적 진화
서론
직관의 방법
직관과 지속
지속이란 무엇인가? - 잠재적인 것의 시간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
들뢰즈와 '생명의 약동'
결론:베르그송을 넘어가는 들뢰즈 - 창조적 진화의 윤리학으로

 

제2장 차이와 반복:사건의 싹트는 생명
서론
선험적 조우들
개체화:시몽동과 다윈의 차이
개체화[의 이론]에 따른 윤리학
반복의 현상과 시간의 세 가지 종합
죽음충동:바이스만과 프로이트
금의 유전과 니체의 우월한 회귀 사건에 무대를 마련하기
결론:바이스만을 넘어선 들뢰즈 - 사건의 문제

 

제3장 한 베르그송주의자의 회상:창조적 진화에서 창조적 행동학으로
서론
복잡성과 유기체
탈기관체와 유기체
다양체란 무엇인가? - 베르그송주의와 네오다위니즘
혼효면으로서의 自然
창조적 절화
자기조직화의 기계적 다질생성
'behavior'의 행동학에서 배치들의 행동학으로
인간의 동물-되기
들뢰즈의 웩스퀼 독해:장점과 단점
기억을 넘어선 되기들 - 바이스만과 하디
결론:절대적 탈영토화로서의 철학

 

결론
주름과 초주름
주름으로서의 회귀
인간을 넘어서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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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의 기호 사상

퍼스의 기호 사상 - 현대사상의 모험 15 | 원제 A System of Logic, Considered as Semiotic

찰스 샌더스 퍼스 (지은이), 김성도 (옮긴이)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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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기호학의 두 원천 중 한 명. 다른 하나는 물론 소쉬르다. 들뢰즈의 언어학은, 다른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이 소쉬르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과는 다르게, 이 퍼스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제목이 저래서 우리나라 학자가 풀어 쓴 입문서나 개론서인 줄 알았건만, 지은이가 퍼스 자신인 걸 보니 그저 그의 여러 글들(1차문헌)을 한데 묶어 번역해서 출판한 모양이다. 읽을수는 있을 정도로만 어려웠으면 좋겠는데,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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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해제] 퍼스 사상의 지평 및 기호학의 위상

1. 들어가기
2. 퍼스의 기호학 관련 저술
3. 퍼스 기호학의 철학적 토대
4. 퍼스의 현상학과 범주론
5. 현상학적 범주론
6. 퍼스의 전기 및 지성사
7. 논리학에서 기호학으로
8. 여러 과학들에서 기호학의 위상
9 기호학의 분할
10. 표상 이론으로서의 기호학
11. 기호의 삼원적 분석
12. 기호 유형론
13. 기호의 분류
14. 퍼스의 의미 이론
15. 퍼스의 인지 이론과 진화론적 우주론

 

퍼스의 기호론과 현상론 선집
들어가기

 

[1] 현상학
1. 현상 또는 파네론
2. 범주들: 일차성. 이차성. 삼차성
3. 일차성은 감정과 성질의 범주
4. 이차성은 경험, 대결, 그리고 사실의 범주
5. 삼차성은 사고와 법칙의 범주
6. 이차성과 삼차성이 변질된 경우들

 

[2] 기호이론
1. 기호
2. 세미오시스 또는 기호의 작용: 해석제
3. 기호의 삼분법
4. 도상 기호
5. 지표 기호
6. 상징 기호
7. 발화 기호 또는 준명제
8. 기호들의 분화

 

[3] 현상학적 기호학
1. 마음의 기본 요소
2. 지각과 지각 판단

 

[4] 기호 이론 관련 서간문
1. 웰비 여사에게 보내는 서한(1904년 10월 12일)
2. 웰비 여사에게 보내는 서한(1908년 12월 14일)
3. 웰비 여사에게 보내는 서한(1908년 12월 23일)

 

[부록- 퍼스의 초기 논문 두 편]
1. 새로운 범주 목록에 관하여(1867년)
2. 인간이 가질 수 있다고 주장되는 몇 가지 능력과 관련된 물음들(1868년)

 

참고문헌
인명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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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2

일단 구호부터. 평택은 광주 이래 처음으로 주민들을 상대로 한 군사 작전이 벌어진 곳이다. 이것은 살이 떨리고 눈이 뒤집힐 일이다. 그러나 소위 대한민국 국민들은 어찌하여 여기에 별로 분개하지도 않고, 되려 보상금 운운하며 자신도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을 지껄여대는 것일까. 왜 지금 이 나라는 노무현 탄핵 때보다도 더 조용한 것일까. 일단 여기에 첫 번째 방점이 찍힌다.

 

분석은 '사실'에서부터 시작하자. 다수의 대중들은 평택의 투쟁을 '반미꾼'들의 선동으로 보고 있다. 이 사실은, 인정하기 싫지만, 결코 무시될 수 없다. 왜냐하면 투쟁이 대규모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심각하게 낮추기 때문이다. 하긴 그 때 광주의 시민들은 빨갱이 소리를 들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권의 조작이었지만,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한다. 도대체 지금 이 순간에 반미가 왜 등장하는가? 물론, 평택의 투쟁이 미국과 매우 관련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미국에 의한 한국의 종속도 엄연한 '사실'이라 주장할 지 모른다. 또 어떤 이들은 평택이 '신자유주의 군사세계화'의 전략적 교두보가 되었다는 것을 '사실'이라고 선언할 지 모른다. 이것들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진정으로 압도적인 사실은 지금 평택 주민들의 땅을 뺏기 위해 경찰과 군대가 대규모로 투입되었다는 것이다! 반미나 신자유주의 논쟁은, 지금 바로 이 상황에서는, 오히려 논점을 흐리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반미주의자들의 책임으로 돌려야 한다는 말인가. 어느 정도 그렇다. 그들은 물론 가장 '용감하게' 싸우고 있다. 하지만, 평택이 다수 대중의 절대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그걸 얻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반미주의자들은 분명 책임이 있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은 구조적 설명이 필요한 시기가 아니다. 실존적 설명만이 필요할 뿐이다. 평택의 현 위기는, 거기에 나중에 미군 기지가 들어설 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바로 이 순간에 그곳이 무차별적인 폭력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

 

두 번째 방점은 폭력에 대한 감수성에 찍힌다. 평택은 폭력에 의해 침탈당했다. 자기가 평생 농사지어 온 땅을 군화발로 짓밟는 이들에게 죽자사자 매달리는 것은 폭력이 아니다. 마지막 남은 보루였던 대추분교를 지키기 위해, 거기서 끌려나가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발버둥치는 것은 폭력이 아니다. 이것은 삶을 망가뜨리는 폭력에 대한 저항이며, 따라서 생명 그 자체의 발산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보았다. 그리고 분노했다. 그런데 이 분노를 어찌할 것인가. 이 분노를 또다시 폭력에 사용할 것인가?

 

목숨을 걸고 대추분교를 사수하다가 끌려나는 것과, 미대사관으로의 '행진'을 막는 전경을 폭행하는 것은 같은가. 아니다, 이것은 같지 않다. 후자는 분명 폭력이다. 물론 이것은 정당한 분노에 의한 폭력인지 모른다. 그러나 정당한 분노에 의해서 폭력을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그 폭력은 행사되자마자 거꾸로 소급되어 분노 자체도 정당하지 못한 것으로 만든다. 논밭에 들어오는 굴착기를 막기 위해 온 몸을 던지는 것과, 미대사관으로 그저 조금 더 가보겠다고 전경을 밀치고 때리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같은가? 시위 지도부는 시위대가 위험한 상황에 더 크게 노출되고, 사람들이 더 많이 잡혀가고 끌려가는 것으로써 평택에 대한 부채감을 덜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분노에 찬 대규모의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도 시원치 않은 판이다. 그러나 그 시민들이 전경을 때리고 군인을 죽이고 청와대로 진격해서 관리들을 폭행하는 것을 우리는 바라는가? 도대체 우리가 바라는 게 무엇인가? 그것이 평화라는 사실을 잊었는가? 우리는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을 배워야 한다. 폭력에 대한 분노는 절대로 폭력적으로 표출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방식을 모른다. 그래서 또 다른 폭력을 저지른다. 물론 이 폭력은 정부의 폭력이 없었다면 발생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유야 어찌 됐든 시위대의 폭력 역시, 시위에 참여하고픈 사람들, 평택과 함께하고픈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 폭력이 시위를 축소시키고, 정부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를 머뭇거리게 만든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기분이 참담하다. 할 것이 많다. 그러나 막막하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큰 힘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우리는 대중에게 배워야 한다. 그들은 말하고 있다. 폭력은 싫다고. 반미는 싫다고. 우리의 선택지는 둘 중 하나다. 대중의 무지를 비판하고 사안의 심각성에 대해 설교하거나, 대중이 원하는 것에서 우리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를 깨닫고 이 투쟁을 철저하게 대중의 투쟁으로 만들어 나가거나. 여기 남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그리고 대중들에게 떳떳해야지만, 평택 주민들의 필사적인 몸부림이 '폭력'이라고 오해받지 않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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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1

어제 날맹이 연행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내 마음은 쿵쾅거리기 시작하더니 쉽게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기 때문이었는데, 평택에서 벌어진 일들 뿐만 아니라, 날맹이 지금껏 해 왔던 일들, 또 평택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내 기억으로만도 1년은 넘게 자보를 붙이고 퍼포먼스를 했던 적극적 평화행동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했던 그러한 활동들이 쉴 새 없이 떠올랐다. 그 모든 것들이 갑자기 자극으로 다가왔나보다. 심장을 콕콕 찔렀다.

 

그간 나는 집회에 가지도 않았고, 운동판에서 하는 일에도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아니, 그런 척을 한 게 아니라 진짜로 그랬었다. 집회는 가기가 싫었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강연회, 토론회, 퍼포먼스, 액션 등등에 참여하기에는 시간적인 여유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곳에 가야만 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지 않고 버티려면, 사실은 꽤나 정교하고 탄탄한 정당화가 필요하다. 내가 그렇게 확신을 갖고 행동하는 편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였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특히 더 확신이 없었다. 집회하는 방식이 싫다고 집회에 가지 않는 게 과연 맞나. 가지도 않으면서 괜히 잔소리만 늘어놓고, 오히려 운동을 갉아먹는 꼴이 아닌가. 내 입장을 아슬아슬하게 옹호하면서도 항상 찝찝했는데, 이 일로 그간 나를 정당화해 왔던 많은 말들이 중심을 못 잡고 한꺼번에 허물어져 버렸다. 나는 뭐라도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당화하기 위한 것들 중 가장 크고 중요한 것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일단 나는 나를 '공부하는 사람'으로 정체화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꼭 몸으로 활동이나 집회에 참가하지는 않지만 그것과는 다른 방식의 투쟁을 기획하거나 실천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공부하는 것이 투쟁과 너무나 관계없는 것으로 보일 때도 많았다. 그럴 때는 투쟁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혹은 '정치적 예속'이 아닌, 좀 더 넓고 보편적이며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인간학적 예속'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것도 투쟁이다!"라고 외치기는 싫었다. 그저 어느 정도의 부채감을 느끼며, 그 부채감이 나를 계속해서 자극하기를, 내가 무엇을 하든 나의 근본적인 추동력은 바로 이것이기를 바랬다.

 

또 다른 것은, 집회 방식에 대한 나의 느낌인데, 이것은 거의 혐오에 가깝다. 이 느낌을 꺼내어서 풀어놓아야 할 것이고 추상적이나마 대안도 제시해야겠지만, 생산적인 논의는 조금 뒤로 미루어 놓자. 그저, 나는 이러한 자기 정당화의 기제들이 한 순간에 무너져버린 직후에, 무엇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게 바로 어제 당일 저녁 7시에 있었던 광화문 집회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 기제들이 허물어졌다는 말에 내가 방점을 찍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다. 그 단단한 조각들은 엉성한 체계를 이루고 있었기에 허물어졌을 뿐이며, 어제 집회를 다녀오는 와중에 또다시 어느 정도 재구성되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바로 이 재구성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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