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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5/02
    언어
    pug
  2. 2006/05/01
    목적론 비판
    pug

언어

"자연상태에서 생각하면 우리의 단순 감각들은 좀더 적은 항상성을 나타낼 것이다. 어렸을 때는 좋아했으나 지금은 혐오스럽게 느끼는 냄새나 향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경험된 그 감각에 동일한 이름을 부여하며, 향기와 냄새는 동일하게 남아 있고 내 취향만 바뀐 것처럼 말한다. 따라서 나는 아직도 그 감각을 응고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동mobilité이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될 정도의 명백성을 획득하게 되면, 그 변동을 추출하여 그것에 별도의 이름을 부여하고, 차례가 오면 그것을 취향goût이라는 형태로 응고시킨다. 그러나 실제로는 동일한 감각도 다수의 취향도 없다. 왜냐하면 감각과 취향은 내가 그것을 떼내서 명명하자마자 나에게 사물처럼 보이나, 인간의 영혼 속에는 진행progrés 이외의 것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감각은 반복되면서 변하며, 그것이 나에게 조변석개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가 지금 그 감각을 그것의 원인인 대상을 통해서, 그것을 번역하는 단어를 통해서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야 한다. 감각에 대한 언어의 그런 영향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다. 언어는 우리에게 감각의 불변성을 믿게 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경험된 감각의 성격에 대해서도 우리를 속인다. 그리하여 고급스런 맛으로 소문난 요리를 먹을 때, 그것에 부여된 찬사가 가득 실린 그 요리의 이름이 나의 감각과 의식 사이에 개입한다. 조금만 노력하여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 반대임이 드러날 수 있는 데도 나는 그 맛이 마음에 든다고 믿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분명히 확정된 윤곽을 가진 단어, 즉 인류의 인상들에서 안정되고 공통적이며, 따라서 비개성적인 것을 저장해 놓은 난폭한brutal 단어는 개인적 의식의 섬세하고도 사라지기 쉬운 인상들을 말살해 버리거나 또는 적어도 덮어 버린다. 대등한 무기로 싸우기 위해서는 그런 인상들이 정확한 단어들로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단어들은 형성되기가 무섭게 그것들을 낳은 감각에 대항하는 쪽으로 총구를 되돌릴 것이며, 감각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증언하기 위해 발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감각에 그들 자신의 안정성을 강요할 것이다.
   직접적 의식의 그러한 말살이 감정의 현상들에서만큼 충격적인 곳은 없다. 격렬한 사랑이나 깊은 우울증이 우리의 영혼을 침입한다. 그것은 수천의 다양한 요소들이 명확한 윤곽도 없이, 서로에 대해 외화하려는 경향은 조금도 없이, 상호 융합하고 상호 침투한 것이다. 그러한 대가를 치르고 그 감정들의 독창성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가 그 혼동의 덩어리 속에서 수적 다수성을 분간해 낼 때, 그것들은 이미 왜곡된다. 우리가 그것들을 서로로부터 고립된 것으로서 동질적 장소—그것을 이제 시간이라 부르든 공간이라 부르든 원하는 대로이다—에 펼쳐 놓는다면,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방금 그들이 자리잡고 있던 곳으로부터 그들 각각은 정의할 수 없는 색채를 빌려왔다. 그들은 이제 탈색되어 이름을 받아들일 만반의 태세가 되어 있다. 감정 자체는 살아 있고 발전하며, 따라서 끊임없이 변하는 존재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 우리를 점차적으로 어떤 결정으로 향하게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감정이 살아 있는 것은 감정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지속이, 그 지속의 순간들 서로가 스며드는 지속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순간들을 서로로부터 분리시키면서, 즉 시간을 공간에 펼쳐 놓으면서 그 감정들의 생기와 색채를 잃게 한 것이다. 우리는 따라서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그림자를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분석한다고 믿었으나, 사실은 죽은 상태들의 병치로 그것을 대체한 것이었다. 그 상태들은 말로 번역될 수 있으며, 그 각각이 주어진 어떤 경우에 사회 전체가 느끼는 인상들의 공통적 요소, 따라서 비인격적 잔여물을 이루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상태들에 대해 추리하고 그것에 우리의 단순한 논리를 적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상태들을 서로로부터 고립시켰다는 오직 그 사실만으로도 그것들을 유genres로 세우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것들을 미래의 연역에 봉사하도록 준비한 것이다. 이제 어떤 과감한 소설가가 우리의 상투적인 자아의 교묘하게 짜인 직물을 찢고 그러한 외견적 논리 아래에서 근본적인 부조리를 보여주고, 단순한 상태들의 그와 같은 병치 아래에서, 명명하는 순간 이미 존재하기를 멈추어 버렸던 수만의 다양한 인상들의 한없는 침투를 보여주면, 우리는 그에게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라고 칭찬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가 우리의 감정을 동질적 시간 속에 펼쳐 놓고, 그 요소들을 말로 표현한다는 사실 자체에 의해, 그 역시 그의 차례가 되어 우리에게 그 감정의 그림자만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단, 그는 우리로 하여금 그 그림자를 투사한 대상의 특별하면서도 비논리적인 본성을 의심케 하도록 그것을 배치했다. 표현된 요소들의 본질 자체를 이루는 그런 모순, 그런 상호 침투의 뭔가를 외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우리를 반성으로 초대했다. 그에 의해 고무되어 우리는 잠시 우리와 우리 의식 사이에 개입시킨 막을 걷어 제쳤다. 그는 우리를 우리 자신 앞에 다시 세운 것[뿐]이다."

 

─ 베르그손,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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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론 비판

"그러나 여기에서 이러한 오류들의 기원을 인간 정신으로부터 보여주는 것은 적절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것, 즉 모든 인간은 사물의 원인에 대해 무지한 채로 태어나고 모두 다 자신의 이득을 얻으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욕망에 대해 의식하고 있다는 것들을 논의의 기초로 삼으면 충분할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다음 사실들이 따라나온다. 첫째, 인간들은 그들이 자유롭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그들의 의지(volition)와 욕망에 대해서는 의식하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욕망하고 의지하도록(will) 결정한 원인들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으므로, 그 원인들에 관해서는 생각해보지도, 심지어 꿈꿔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둘째, 인간들은 항상 어떤 목적을, 즉 그들이 얻고자 하는 이득을 위해 행동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제나 이루어진 일들의 목적인만을 찾게 되며 그것을 찾으면 만족해하고, 물론 그 이상의 의심은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그러한 목적인을 어떤 외부적인 근거로부터 찾아내지 못할 경우 그들은 의지할 데 없이 그들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며, 자신들로 하여금 어떤 목적이 보통 그와 비슷한 행동을 하게 하는가를 고찰하기에, 그들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정신을 그들 스스로에 의해서 판단하게 된다. 게다가, 인간들은 자신들의 안팎에서 그들의 이득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매우 편리한 수단들─예를 들면, 보기 위한 눈, 씹기 위한 이, 먹기 위한 곡물과 짐승, 빛을 쬐어주기 위한 태양, 물고기를 번식시키기 위한 바다─을 대단히 많이 발견하므로, 그 결과 그들은 자연의 모든 것들이 자신들의 이득을 위한 수단인 것처럼 여기게 되었다. 인간은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자신들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러한 수단들을 그들이 사용하도록 만들어 준 다른 누군가가 있다고 믿게 된다. 인간은 사물들을 수단으로 보고 있기에 그 사물들이 스스로 창조되었다고 믿을 수가 없으며, 그들이 자신을 위해 만들어왔던 익숙한 수단들로부터의 유추를 통해서 그들은, 인간들의 모든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전념하며 모든 것을 그들이 사용하도록 만들어놓은 인간적 자유를 가진 어떤 자연의 주재자 혹은 주재자들이 있다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그 주제에 관한 어떠한 정보도 없으므로, 그들은 또한 스스로 이 통치자의 성격을 짐작해 볼 수밖에 없고, 그래서 그들은 신들이 인간을 속박하여 그들에 의해 최고의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 모든 것을 인간이 사용하도록 명령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각각의 개인들은 신에게 경배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고안해내고, 이러한 방법을 통해 신이 자신을 다른 이들보다 더욱 사랑하기를, 그래서 자연 전체를 인간이 사용하도록 명령하여 그것들이 자신의 맹목적인 소유욕과 그치지 않는 탐욕을 위해 봉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오류가 미신으로 발전했으며 인간의 정신에 깊숙히 뿌리박힌 것이었고, 이런 이유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가장 진지하게 모든 것들의 목적인을 설명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연은 헛되이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즉, 인간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할수록, 인간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만을 보여주는 듯하다. 즉, 자연과 신들이 인류처럼 미쳤다는 것을."

 

─ 스피노자, <<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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