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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사랑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 것이다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내가 너무나도 쓰레기같아서 잠이 안 오는 그런 밤이 있다. 그런 밤에는 다리가 여럿 달린 흉측한 그리마 한 마리가 벽을 가로질러 달아나고, 나는 굳이 휴지를 둘둘 뭉쳐 꾹 눌러 죽이고서는 누가 누구를 죽였는지 누가 죽었어야만 했는지 궁금해한다. 선풍기 소리가 머리를 꽉 채워서 시끄러운 여름밤.
요즈음 나는 아무래도 내 안의 곤충들과 싸우고 있나 보다.
흉측하지만, 존재하기를 그만둘 이유는 없는 것들. 끊임없이 출몰하는 것들. 이 공간의 주인이지만, 헤드폰을 쓰고 입바른 소리를 하는 별 것도 아닌 동물에게 쫓겨다닐 뿐이다. 항상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
어떤 사람들은 원하는 대로 산다. 사방을 둘러싼 의무의 벽 속에서도, 그나마 하고 싶은 걸 한다. 밥값을 아껴서 딸애 학원비로 쓰기도 하지만, 원해서 그리 하는 것이다. 밥값을 아끼는 것보단 딸애 학원을 못 보내는 게 더 괴로운 것이다. 괴로움을 피하고자, 그렇게 한다. 그들은 괴로움을 피하고자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진짜로 원하는 걸 찾아 나선다. 그들이 보기에는, 원하는 대로 사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사실 그들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 아니다. 진짜로 원하는 걸 찾는 사람들은 원하는 대로 사는 사람들을 비웃는다.
원하는 대로 사는 사람은 항상 원하는 대로만 산다. 주어진 조건 아래서는 원하는 대로만 산다. 그러나 진짜로 원하는 걸 찾는 사람들은 결코 진짜로 원하는 것을 찾아내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것을 하고 살 뿐이다.
물론 조건이란 건 변화한다. 그러나 변화의 원인은 절대로 예측할 수 없다. 여기에 매달리는 것은 미신이다. 대신에, 우리에겐 학문-종교가 필요하다.
진짜로 원하는 것을 찾는 사람들은 일상을 견뎌내지 못한다. '의미 있는' 어떤 일의 발견은 그 일 이외의 모든 일의 의미를 삭제한다.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산다는 말은, 예외적인 능력 없이는 공허한 말이다. 의미를 겹겹으로 쌓아 두텁게 만드는 화려한 수사들에 속고만 살 수는 없다. 이점에서, 책은 꼭 읽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쉽게 속이기 때문에.
악세사리라고, 이 모든 게. 나는 치장하는 중일 뿐.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이 문장의 의미는 명확하지 않다.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신이 없다면"이라는 조건절로 은근슬쩍 가리고 있는 신의 존재여부에 대한 작가(도스토예프스키)의 생각이고, 또 하나를 들자면, 만약 다른 텍스트를 활용해서 신에 관한 작가의 입장을 밝힌다 하더라도 이를 저 문장에 적용시켰을 때 도출되는 직설적 결론이 저 문장의 의미를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가의 여부이다. 다시 말하면, 도스토예프스키가 저 명제를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신은 없으므로 모든 것이 허용된다", 또는 "신이 있으므로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두 개의 문장 중 어느 것과도 정확히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이 명제를 제시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이반에게 가 보자. 물론 이 말을 하면서 이반이 가졌던 생각과 작가의 생각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 불일치 자체가 곧 작가의 생각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도 있다. 이반은 일단 무신론자다. 그러나 신을 부정하지는 않는 무신론자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반은 신이 꼭 필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반이 볼 때 우리 인간들은 본성적인 기질상 우리의 자유를 견뎌내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중요한 어떤 일을 오로지 우리의 판단에 의거해 결정해야 한다는 중압감(그리고 아마도 그에 따르는 책임감)을 이겨내지 못한다. 인간은 단순히 자유로운 존재라기 보다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다. 우리의 자유는 우리의 짐이다.
따라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마땅한 전능한 신의 존재는 인간의 보다 나은 삶에 필수적이다. 신은 인간에게서 자유를 빼앗고 복종을 강요하지만, 사실 인간은 기꺼이 자신의 자유를 헌납하고 신 앞에 바짝 엎드릴 준비가 되어 있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여야 더욱 해방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 인간에게는 자유로부터의 해방이 가장 절실한 과제다. 요컨대, 이반은 신이 없다고 믿지만 동시에 신이 필요하다고 믿으며, 신의 필요성에 대한 그의 믿음이 신의 존재여부에 대한 그의 판단을 압도한다. 신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신은 존재해야만 한다.
따라서 이반에게서 위의 명제는 다음과 같은 보충적인(동시에 중심적인) 의미를 갖는다. 만약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므로, 인간은 그와 같은 절대적 자유를 견뎌내지 못하고 자멸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은 인간의 보존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하다.
이와 같은 제안은 다소 기만적이다. 왜냐하면 사실은 ①신이 존재하지 않지만, 일반 사람들은 이를 알 필요가 없고 그저 ②신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를 견디지 못하는 일반 사람들에게 이를 적용할 때 전자(①)는 후자(②)의 아래에 억압되어 있지만, '신의 부재'를 알고 있는 이반 자신에게 이 모순적 명제를 들이밀면, 억압되었던 '신의 부재'는 결코 완전히 소멸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반드시 남아서 이반의 자의식(우월감)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부터 이 기만적 명제의 의미는 삐걱거리게 된다.
이 명제의 의미가 결국 파열하게 되는 지점은, 의미화될 수 없는 어떤 것, 곧 '실재'가 이반의 명제에 틈입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이다. 상징계 안에서 신의 부재는 엄연한 사실이며, 이 사실과 윤리적 강령이 가까스로 봉합되어 있는 것이 이반의 명제였다면, 작가는 이 봉합의 끝 매듭을 살짝 건드리므로써 '사실'이란 상징계 안의 어떤 것에 불과하다는 점, 그리고 그 사실은 실재의 어떤 것이 불가피하게 누락되었기 때문에(의미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사실로써 존재할 수 있었다는 점을 폭로한 것이다. 끝 매듭이 풀린 봉합은 단번에 해체되었다.
그 실재는 곧 스메르쟈코프의 범죄이다. 이반의 '사상적 아들'인 스메르쟈코프는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으므로" 그냥 한 번 표도르 카라마조프(이반의 아버지)를 죽여 본다. 이반은 자신의 이론이 '실제로' 아버지의 몸 위에서 시연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조차 (상징계 안에서는) 할 수 없었으므로,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미쳐버리고 만다(상징계로부터 벗어남). 작가인 도스토예프스키는 바로 여기에서 이렇게 이반을 단죄하므로써 이반의 명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반의 단죄는 '신의 부재'라는 사실의 거부를 의미한다(①의 소거). 또한 상징계의 한계와, 상징계는 실재의 배제를 통해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 따라서 그렇게 배제된 부분이 사실은 상징계 전체의 의미를 좌우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볼 수도 있다. 이반은 자신의 아버지의 육체가 '모든 것이 허용된' 인간의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실재)을 의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자신의 이론(상징계)을 구성했다.
'신의 부재'가 부정됨으로써 도스토예프스키의 저 명제는 분명하게 유신론으로 읽힌다. 또한 이론이 아닌 실재의 신앙, 실재의 윤리학으로도 읽힌다. 우리의 삶(과 신앙)에는 가타부타를 따질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삶에 대한 이론은 그러한 것들의 배제를 매개로 해서 구성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바로 이론화할 수 없는 것들, 이론의 찌꺼기, 곧 순수한 삶 그 자체이다. 윤리는 직접적으로 삶에 적용되는 것이다.
덧) 스메르쟈코프도 (확실히 밝혀지지는 않지만) 아마 표도르의 아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반의 이론으로 침입한 실재, 곧 그의 이론을 지탱하면서 결코 이론화되지는 않았던 가장 근본적인 사실은 바로 '부친살해'가 된다. (스메르쟈코프가 표도르의 아들이 아니더라도, 결과적으로 이반의 사상에 의해 살해된 것이므로 부친살해가 맞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프로이트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1. 전에 미당에 관한 고종석의 글을 인용했었다. 정치적으로(혹은 윤리적으로) 올바르지 못했던 미당의 삶과, 문학적으로 최고 수준의 성취를 보여주는 그의 시를, 모순 없이 일관되게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 혹은 그렇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 혹은 일관된 설명을 위해 사실을 훼손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요지로 하는 글이었다.
2.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 도스토예프스키를 넘어선다'는 말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머리와 손으로 위대한 언어를 쏟아내지만,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작품은 아닐 수 있다는 것. 즉, 자기가 썼되 그 결과물에는 자신이 표현/반영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죄와 벌>>은 누구의 사상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손을 빌어 세상에 외출한 것일까. 그 누구가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라면, 그는 '인간 도스토예프스키'보다 깊고 풍부하며 복잡하게 사고할 줄 아는, 그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일까?
3. 텍스트에서 작가의 무의식의 징후를 발견할 수 있는가? 그 작가는 인간으로서의 자신과 구별되는가? 징후는 작가에게만 적용되는가? 작가는 이 세상엔 없는가?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 | 원제 Hegel (2000)
정 가 : 48,000원
출간일 : 2006-07-31 | ISBN : 8956440832
양장본 | 1088쪽 | 233*162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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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되기 전에 사 놓아야 할 텐데, 가격과 분량이 너무 무겁다. '이제이북스'는 (아주 약간 과장해서) 숭배받아 마땅한 출판사.
음악을 모아두는 곳을 마련했어요.
너무 좋아서 (누군가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노래가 생길 때마다, 그저 혼자라도 듣고 또 들으면서 끙끙대기만 했었는데, 이런 방법이 있었네요. 네이버에 새로 블로그를 만들어서 열심히 노래들을 수집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심심하면 들러주세요.
요 옆의 <놀러오세요~>를 클릭하시고, "뮤직뮤직사랑방"을 또 한 번 클릭하시면 됩니다.^^
←
이게 다, 아래 애슬린 데비슨의 노래 덕분이에요. 이렇게 새 집까지 장만할 줄이야. 하지만 자꾸 이렇게 말하면 기대가 너무 커져서 노래가 그다지 좋게 들리지 않을 수도 있으니... 음, 노래가 사실 별로 좋지는 않습니다... ~(-_-;;)~
aselin debison - sweet is the melody(2002)
쥬얼 이후로 이런 느낌은 처음인 듯.ㅠㅠ
어찌어찌하다가 생각났는데, 예전에(대학에 오기 전에) 끄적거렸던 것들을 폴더 하나에 모아서 그걸 숨김 파일과 같은 형식으로 속성을 변경해서 "내 문서" 폴더 아래에 쳐박아 두었었다. 물론, 끄적거렸던 것들 중에서도 숨겨야만 했던 것들, 그러니까 은밀한 고민이나 비밀, 개똥철학 같은 것들이 여기에 들어있다. 그런 게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다가, 최근에 발견했다.
어제는 인터넷이 안 돼서 하릴없이 쭉 읽었는데, (예상대로) 매우 재미있었다. 과거의 나를 간접적으로나마 다시 보는 일은 참 간질간질하면서도 스릴있다. 부끄러우면서도 대견하다. 이런 글쪼가리들도 나중에 보면 그런 느낌을 줄까? 언제까지 그럴까. 나는 언제까지 변할까. 이런 변화도 성장일까.
이런 글이 있다. 2000년 9월 12일에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1 가을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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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이 복잡해 졌다. 당연한 일이지만...... 무엇을 해도 머리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없으니 살아서 더 오래 숨쉬는 만큼 머리속이 복잡해지는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는 다르겠지. 모든 일을 머리를 쓰며 하려고 하는 사람은 그만큼 더 복잡해 질 수밖에. 타고난 성격이라 고칠 수는 없어도 숨길 수는 있다. 남을 의식하며 숨기려고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복잡한 사고 과정중의 하나가 아닐까? 이렇게 따지면 난 머리속이 복잡해지기 위해 태어났나보다. 남들은 '이중인격'이라 말하지만 난 나만의 신조가 있다. 'Grin and Bear it' - 웃으며 참자는 말이다. 내 본마음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 남들에게 알려지지만 않는다면 난 평생 '다듬어진 나'로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 이미 반년 동안은 잘 버텨왔던 일이고 앞으로도 자신이 있다. 이미 밝혔듯이 난 머리속이 복잡해지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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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는 특히 '이중인격'이라는 말에 집착했던 것 같다. 나 자신을 이중인격자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그걸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여기기도 했다. 조금은 낙관적인 갈등이었나보다. 다음은 같은 해 11월 22일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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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나의 행동기술의 범위와 수준은 중학교 3학년 1학기 말 때를 절정으로 하고 있다. 나는 유머있어 보였으며 친근해 보였고 카리스마있어 보였으며 지적인 듯이 보였고 사려깊은 것처럼 보였고 남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는 것처럼 보였으며 남이 힘들어 할 때 같이 힘들어 해 주는 것처럼 보였고 자존심있어 보였고 인정할 것은 인정할 줄 아는 듯이 보였다. 나는 나와 관계있는 모든 사람에게 잘 대해 주었고 그 모든 사람들이 나에 대해 나쁜 감정이 없으리라는 것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는 한 편과 다른 편의 중재적 역할을 하였고 그 어느 쪽에 속하든지 어색하지 않았으며 나와 너무도 다른 사람들을 잘 이해했고 나와 뜻이 맞는 사람들을 앞장서서 잘 이끌어 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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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부분은 너무 재수없어서 생략. ㅎㅎ
아, 나는 이렇게 살았구나.
똑같은 것 같다. 지금이랑. 저게 다 해당된다는 건 아니고, 그냥 생각하는 방식이라든지, 어떤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이라든지. 혹은 어떤 기질이나 성향이.
그냥 이렇게 멍하니 서서, 어디로부터 왔나, 어디로 가고 있나, 한 번쯤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이 짓을 너무 많이 해서 문제인 것 같기도 하지만.
이건 고2 여름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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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목적과 장래 희망…… 삶의 목적을 정해 놓고 삶을 시작한다는 것도 참 우스운 이야기다. 삶을 사는 과정에서 느끼고 깨닫는 것이리라. 바로 지금, 난 장래희망이 불분명하다. 내가 커서 무엇을 해야겠다는 확고한 개념이 세워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런 것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물론 지금도 하고 싶어하는 것도 있고, 되고 싶은 것도 있다. 하지만 어느 때 부턴가 높다랗기만 한 현실의 장벽을 실감하게 되고, 어쩌면 나 자신이 결국 현실과 타협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만큼 무엇인가가 꼭 되어야 하겠다는 욕심이라든가 야망이 없어졌다는 말이다. 욕심은 꼭 필요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자신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가치를 지향하려는 욕심을 야망이라 한다. 아집이나 독선 따위와는 다른 것이다. 야망이 없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성취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성취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청소년기에 이런 욕심이 없다는 것은 자신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눈부신 가능성을 썩혀버릴 수 있는 위험한 행위인 것이다. 청소년기는 그것이 불가능함을 먼저 생각하기 보다는 일단 그것에 도전해 보는, 가장 용기있고, 또 아름다운 인생의 시기이기에…… 하지만 나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이런 생각을 한번 쯤 해 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즉, 이것이 나를 잠시 거쳐가는 생각일 뿐인 것을 나 역시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참 재미있다. 거쳐가는 생각인 줄 알면서도 그것에 신경을 쓰고. 그만큼 인간은 무기력한 존재일 것이다. 다행히 나는 왜 내가 청소년기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이런 생각이 거쳐가는 과정에서 그것이 나에게 무엇을 남기고 가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성공 ― 나는 이 단어에 처음으로 회의를 느낀 것이다. 그것이 아무 의미없는 물질적 충족만을 구하는 행위임을 - 그리고 그것의 종점임을 - 어렴풋이 알아챈 것이다. 겨우 이따위 물질적 풍요를 나의 생의 목적으로 세우기에는 마음 한 구석이 너무나 아쉽기 때문이다. 나의 생의 목적은 '성공'이 아니다. '인격의 완성'이다. 아니, 그보다는 평생을 두고 인격의 완성을 위해 자신을 도야하는 한 인간의 평온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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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좀 슬프다. 이건 겉으로만 단호할 뿐, 체념의 정서가 그득하다. 이런 생각은, 그 때의 내 감정을 아직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까. 아릿한 기억.
그 시절에 난 왜 그리도 많은 것에 치이면서도 끊임없이 뭔가를 갈구하고 받아들이려 했을까. 그러면서도 왜 나를 둘러싼 악조건보다도 그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나의 무기력을 더 미워했을까. 미워하면서도 그걸 끝끝내 감싸안고 어쩔 줄 몰라했을까. 내가 아무런 힘이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라도 분명하게 만들어 놓음으로써 얻었던 그 만족감, 그런 만족감이 내가 하루 하루를 버텨내는 유일한 원동력이었다니. 이 고민들은 이제와 모두 부질없는 것이 되었기에 돌아갈 곳을 잃고 허둥대는 작은 짐승처럼, 보기에 못내 안쓰럽지만, 그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이들이 나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내 몸집보다도 더 커다란 짐을 등에 지고 낑낑대는 나의 모습... 작은 방에서 허리를 굽히고 뭔가를 끄적이며 한숨을 내쉬던 그 시절의 내가 한없이 못나 보이고 바보같고 철없고... 가끔은 사랑스럽다.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선사해준 것은 누구일까. 누구인지 모르지만 감사드린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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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의 내 글을 기억하는지. / 너무나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있고, 내가 그 일을 해야 할 의무도, 할 수 있는 권리도 가지고 있지만, 나는 그것을 하지 않겠다는.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나의 '태생적' 한계 때문이라는. …… 이제 자명한 것은, 나의 한계는 '태생적' 한계가 아니라, '종교적', 또는 '신앙적' 한계라는 것이다. 굳이 한계라는 말을 사용한 이유는, 정말 나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선택할 수 없는 기로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 한없이 무지하고, 나약한 자신을 발견했다. …… 빛이 닿지 않는 어두컴컴한 곳에서, 나는 조그만 희망을 아껴서 먹고 사는 한 마리의 작은 짐승이다. 나를 이 세상에 보내주신 분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하고, 그 뜻을 따르고 싶어 하지만, 너무나 무지해서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그래서 좌절하지만,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의 사랑을 먹고 연명하는, 언젠가는 빛을 보게 되리라는 마음 속 깊은 소망을 안고 사는, 한마리의 작고 순한 짐승이다. […] (2003년 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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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ork - debut(1993)
"비트와 현", 그리고 목소리.
tortoise - tnt(1998)
멜로디 없는 장난감나라. 장난감들은 용도를 알 수 없다.
mahavishnu orchestra - birds of fire(1972)
진정한 자유. 'one word'
the velvet underground - white light / white heat(1967)
뭐지? 이 의외의 편안함은...
radiohead - pablo honey(1993)
평범한 밴드의 괜찮은 작품. 혹은, 라디오헤드는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the clash - london calling(1979)
딱히. 가사와 함께 다시 들어야 할 듯.
radiohead - the bends(1995)
결코 독특하다고 할 수는 없는 밴드의 아주 뛰어난 작품. 절정의 균형감각.
the doors - the doors(1967)
그의 목소리는 다른 선택지를 제시하지 않는다.
skunk anansie - paranoid & sunburnt(1995)
견디기 힘든 불쾌한 목소리를 가진, 두말할 필요 없는 최고의 보컬. 메탈도 듣고 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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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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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뮤직뮤직사랑방의 상호명은.... 너에게 있군..부가 정보
p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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