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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11 대만에서의 첫 날

배낭이 한국에 있는지, 대만에 왔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지만, 여하간에 잘 곳을 찾아야 했다. 벌써 밤 10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 대만 공항 버스들은 새벽 1시 까지 다닌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얼른 공항을 빠져나가 시내에서 숙소를 찾지 않음 위험하다. 처음 와본 나라인데다, 중국말은 “니하오마” “씨씨에” “이얼산스” 밖에 모르는 상황이니 말이다. 대만은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이고 수도인 타이페이는 합리와 효율이라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미덕을 가진 도시일테니 대충 영어를 하고 돈이 있으면 크게 문제될 건 없을 거라고 생각되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 내 배낭이 처한 상황을 보면 그것도 확신할 수가 없는 것 아닌가.

 

일단 대만 돈이 필요하다. ATM 기계를 찾았다. 처음으로 국제현금카드를 이용해 해당 국가의 통화를 인출하는 경험을 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했지만, 웬걸,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 써있는 대로 다 누르긴 했는데, 돈이 안나오는 것이다. 그나마 먹히는 버튼을 눌러봤더니, 전표만 딸랑 출력되는데, 통장에 얼마 있는지 써있었다. 필요 없는데...
할 수 없이 ATM을 포기하고 환전을 하기로 했다. 오기 전에 아빠가 챙겨주신 것도 있고, 집에 있는 외화들을 들고 나온 것에다 여선이가 생일선물로 준 것도 있으니, 달라는 여러 종류로 구비하고 있었던 셈. 공항 환전코너에서 환율 좋은 100달러를 환전해서 3,233 대만 달러(NTD)를 손에 넣었다.

 

타이페이 외곽의 국제공항은 청사가 몇 개로 나뉘어 있는데, 그 중에 마이너 항공사인 에바항공이 들어온 청하는 규모가 별로 크지 않아서 버스 표 파는 곳을 찾는 것도 식은죽먹기. 사실 대만 공공시설에는 거의 대부분 영어가 표기되어 있는데다, 한자도 중국처럼 간자를 쓰지 않고 우리와 같은 정자를 쓰고 있어서 영어가 없이도 어느 정도는 식별이 가능하다. 인터넷으로 봐 둔 대로 미리 점찍어둔 숙소가 있는 타이페이 메인 스테이션 까지 가는 표를 사고(110NTD) 바로 앞에 있는 정류장으로 나가보니, 그 버스는 11시 15분이나 되어야 온다고 한다. 이런이런... 한 시간 조금 넘게 시간이 생겨버린 것이다. 다시 공항 청사로 들어와서 좀 진정하고 화장실에 갔다가, 집에 전화를 한번 해보기로 했다. 출국 전에 인천 공항에서 시간이 있어서 배낭에 항공사에서 주는 네임태그를 붙이고 집 전화번호를 써놨으니, 혹시 문제가 생겼다면 연락이 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아까 공항 짐 찾아주는 사람들도 네임택은 있냐고 물어보지 않았던가. 국제전화가 된다고 써있는 전화기에서 신용카드로 전화걸기를 시도해보았으나 또 불발. 아무래도 신용카드 말고 전화카드가 있어야 하나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콜렉트 콜을 어떻게 거는 지 알아보고 올걸. 카오산 같은 곳은 국제전화 가능한 공중전화 마다 친절하게 콜렉트 콜 거는 방법이 써있더만, 여기선 그런걸 기대하긴 무리겠지. 안쪽으로 더 들어가보니, 거의 모든 전화기에 신용카드 사용을 위한 별도의 단말기(?)가 달려있지만, 다 작동이 안된다고 테이핑이 되어 있다. 그러려면 뭐하러 달아놓은 거야, 쳇. 전화카드 팔 만한 곳을 찾아 조금 돌아다녔는데, 알고 보니 아까 환전했던 곳에서 파는 것이다. 퉁명스런 환전소 아저씨에게 100NTD 짜리 카드를 하나 사서 드디어 공중전화기 신호음을 들을 수 있었다.


공항에서 헤어진 지 몇 시간 지나지도 않아 전화를 하니 참 이상했다. 가방에 대해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인천공항에서 뭔가 문제가 있어서 비행기에 실리지 않은 것 같다는 이쪽 공항의 설명은 전하고 날이 밝으면 인천공항 쪽으로 한번 연락을 해주십사 부탁해놓고 끊었다.
그리고 혹시 그 사이 배낭의 행방을 찾아냈을까 해서 짐 찾는 사람들이 준 쪽지를 꺼내들었다. 200미터도 안떨어진 곳이지만, 입국장을 이미 빠져나온 관계로 전화를 해야 하는 이 심정이란... 여하튼, 별 기대도 안하고 전화를 해서 접수번호를 댔더니, 가방을 찾았다며 어디로 보내줄까 묻는다. 내가 벌써 숙소를 잡았을 것 같으냐! 버럭 하는 심정이었어야 하는데, 너무 기쁜 나머지, 나 지금 공항에 있으니까 나를 찾아서 제발 좀 전해달라고 플리즈 까지 붙여서 이야기했다. 내가 있는 장소를 영어로 설명하다가 수화기 이쪽저쪽에서 속 터져 죽는 줄 알았다. 뭐 좁은 공항인데 어떻게든 찾겠지. 초조하게 입국장에서 나오는 사람을 하나하나 눈으로 쫒으며 내 가방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이놈들, 인천공항에서 어쩌구 하더니 다 핑계였구만 하는 생각이 그제서야 들었다. 그래도 가방을 받아들고 “쏘리”라는 말을 들으니 맘이 다 누그러들었다.
그리하여 내 배낭은 무사히 나의 품으로 돌아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설명해주었다고 한 들 그들의 이상한 발음과 나의 부족한 영어실력으로, 알아듣지 못했을 가능성이 더 컸겠지만.

 

집에서 걱정하실까봐 배낭을 찾았다고 다시 전화를 하고, 대충 시간에 맞추어 다시 버스정류장으로 가서 배낭과 함께 버스에 올랐다. 가장 큰 문제도 해결되었으니, 다음부턴 일사천리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약간의 사기(?)를 한번 더 당해야 했으니, 별 거 아닌 그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공항에서 시내까지 한 시간 조금 넘게 걸린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한밤중의 타이페이 거리를 계속 달리기만 하는 버스가 영 불안해서 옆에 있는 아주머니에게 메인 스테이션으로 가는 거 맞냐고 물어보았더니 맞다면서, 같이 내리면 된다고 했다. 그러더니 더 큰 친절을 발휘해서 어디를 찾느냐고 물어보시길래 집에서 뽑아간 호스텔 주소를 보여드리고 있는데, 내릴 때가 되었다. 먼저 내린 아주머니는 달려가더니 택시를 잡아주신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라고 분명히 알고 있어서 (선택의 가장 큰 기준 중 하나였다), 괜찮다고 걸어서 찾아갈 수 있다고 만류를 해도 아주머니는 이미 택시 문을 열고 나를 손짓해 부르신다. 이쯤 되면 친절을 거절할 수도 없고, 어차피 짐도 무거우니 그냥 탈까 하는 생각으로 택시에 올라탔다. 아주머니가 기사양반에게 친절히 주소를 알려주신다. 그리고 택시 출발. 왜 그런지 아까 버스 타고 온 길을 한참 거슬러 올라가더니, 유턴을 해서 다시 내려온다. 그리곤 길가 상점에 붙어있는 번지수를 일일이 확인하며 천천히 달린다. 기사양반도 주소만 듣고는 몰랐던 것이다. 아니, 사실 알았지만 그랬을 수도 있다. 편하고 기분 좋은 여행을 위해서 좋게좋게 생각하고 쓸데없이 분노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떠났건만, 여러 정황을 두고 판단해보건데, 타이페이 시내에 오자마자 작은 사기를 당한 것이 분명한 것 같다. 여하튼, 아까의 버스 정류장에 거의 다 왔을 무렵 가까운 번지수가 나왔고, 여기서 걸어가라고 세워준다. 미터기 요금은 벌써 100NTD가 넘었다. 제기랄, 욕이 나왔지만, 짐과 내가 완전히 빠져나오기 전에 택시기사에게 잘못 보였다간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꾹 참고 지갑을 꺼냈다. 아, 잔돈이 모자라서 큰돈을 냈더니, 자기도 잔돈이 없다며 바로 앞에 있는 편의점에 가서 바꿔오란다. 걸어서 3분도 안걸리는 거리를 그렇게 돌면서 느릿느릿 기어왔으면서, 전혀 미안한 기색도 자진해서 거스름돈을 마련할 기생도 없다. 어이가 없지만, 너무 피곤하고 실망한 나머지 그냥 시키는 대로 했다. 겨우 찾은 배낭을 태우고 아저씨가 튀지 않기만을 바라며 편의점까지 질주해서 돈을 바꾸어 110NTD를 지불했다. 한국 돈으로 4,400원.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버스 요금과 같은 가격이었다.

 

내가 가고자 했던 Happy Falily Hostel은 택시에서 내린 편의점에서 코너를 돌아 몇 발짜국만 골목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허름한 건물에 있었다. 어두운데다 제대로 간판도 달려있지 않아 하마터면 지나칠 뻔 했지만, 번지수를 보고 찾다가 창문에 붙어있는 썬탠지를 겨우 발견했다. 고가도로 밑 어두운 골목에, 허름한 문이 닫힌 채였다. 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을 열고 들어가서 더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가방을 끌어올리다시피 해서 2층 까지 올라갔지만, 안쪽 문도 닫힌 채였다. 하긴 새벽 한 시가 되어가는 시간이니 당연한가. 문을 두드리며 조금 더 소음을 냈더니 아저씨가 나오신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왠일이냐는 표정이었지만, 체크인하겠다는 손님을 무시할 수도 없었겠지. 3층에 있는 방으로 안내해주신다. 도미토리에 묵을 거라고 했는데, 지금 도미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쓰지 않고 있으니 그냥 싱글룸을 줄테니 도미 가격(300NTD)만 내라고 한다. 아싸!

 

아주아주 허름한 방에, 침대와 책상, 작은 선반 같은 것 만으로 가득차 있고, 문 맞은편 좁은 면으론 창문이 크게 나있는데, 이게 문짝이 다 달려있지 않아 제대로 닫히지 않았다. 고가도로 아래, 타이페이 기차역 앞 대로변에 면해있는 창문이어서 벌레나 추위도 걱정이었지만, 소음이 제일 큰 문제였다. 그래도 창문이 없는 것 보단 낫지 뭐. 화장실은 공용이지만, 싱글룸이라 여러모로 편했다. 굴러다니느라 고생했을 배낭을 펼쳐놓으니 책상 위가 꽉 찬다. 배낭 안을 정리하는 건 거의 동생이 했기 때문에 배낭 안이 낯설다. 필요한 것들만 꺼낸 것 같은데, 좁은 방이 이미 너저분. 사실 연수를 염두에 두고 사다놓고 안보던 영어 책들이며 이것저것 너무 많이 챙겨와서 집이 상당히 많고 무겁다. 이걸 가지고 도미에 묵었어도 문제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좁은 싱글룸. 시트는 깨끗했다. 창 너머엔 큰 찻길의 화려한 가로등. 

침대 위에 보이는 주령이가 선물해준 잠바는, 대만까지 가는 길의 좋은 친구였다.

 

집에서 걱정이 되시는지 숙소를 잡고 나서 연락을 하라고 했었고, 좀 출출하기도 해서 예의 그 편의점으로 나가봤다. 마침 국제전화 가능한 공중전화가 바로 앞에 있어서, 전화카드도 기왕 샀겠다, 전화 한 통 한 다음 (이제 자주 전화 못한다는 이야기를 남기고) 요구르트를 사서 들어왔다. 작은 유산균 음료는 내가 어느 나라를 가던 사먹곤 하는 간식. 양이 많지 않아 부담스럽지는 않지만, 당장의 허기를 달래주고, 소화도 잘 되고 맛이 어느 정도는 보장되면서도 각 나라 별로 차별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대만 요구르트는 그렇게 맛있는 편은 아니었다.

 

낯선 공동 샤워실(그래도 온수기는 있다)에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잠을 청했다. 예상 보다 쌀쌀한 타이페이의 공기가 간간히 들리는 오토바이 소음과 함께 참을 수 있을 만큼 방안을 들락거린다. 내일은 여유있게 일어나서 소장님이 소개해주신 대만 활동가에게 연락을 해보고, 고궁박물관을 중심을 타이페이 시내나 좀 구경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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