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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_창간준비 8호] <현장기고> 2012년 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해 어떻게 투쟁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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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기고] 

 

2012년 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해

 

어떻게 투쟁할 것인가?

 

 

강종숙


 

[2012년 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해 어떻게 투쟁할 것인가.hwp (41.50 KB) 다운받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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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강종숙 동지(현 전국학습지산업노조 위원장)가 지난 호에 이어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한 99% 희망광장’을 비롯하여 그 동안의 ‘희망’ 운동에 관한 두 번째 현장기고 글을 보내왔습니다. <혁명> 창간준비 7호에 실린 첫 번째 글 “두 갈래 길 앞에 선 ‘희망’운동”과 함께 읽어보길 독자들께 권합니다.

 

 

‘길 그 끝에 서서’

우리 앞에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건 제대로 걸어온 거야
언제나 길의 끝에 섰던 사람들이 우리가 온 길을 만들어 온 것처럼
눈앞에 빛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제 우리의 시간이 온 거야
먼저 간 사람들의 빛을 따라 온 것처럼 이제 우리가 스스로 빛이 될 차례야
이제 끝이라고 희망은 없다고 길을 찾을 수 없어 빛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숨 쉬고 절망하지 마
그건 우리가 옳은 길을 걸어온 걸 확인하는 거야
이제는 우리가 길을 만들 차례야 이제는 우리가 빛이 될 차례야
그렇게 왔잖아 우리 당당하게 이제 진짜 우리의 시간이 온 거야

 

  이 노래는 지난 3월 10일부터 3월 31일까지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한 99% 희망광장>이라는 이름을 걸고 서울시청광장에 모인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의 테마송이었다. 하루아침에 정리해고 되어 8년째 투쟁하고 있는 코오롱 정투위 동지도, 그 당시만 해도 21명의 동료를 잃은 쌍용자동차 동지들도, 1,895일을 싸워 복직을 눈앞에 두고 있는 기륭전자 동지들도, 희망광장 직전에 대법원에서 ‘패소’한 콜트-콜텍 동지들도 이 노래에 맞춰 한 판 신나게 율동을 하고는 했다. 목 놓아 부르면서 내가 그리고 우리가 옳은 길을 걸어온 것이라고 곧 우리의 시간이 올 거라고 스스로를,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고는 했다. 그럴 때면 정말 말 그대로 ‘희망’광장 같았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는 정말 말 그대로 “살기가 죽기보다 더 힘든” 삶이,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은 응어리들이 있다. 투쟁의 현장에서는 목청껏 희망을 외쳐보지만 자신의 삶과 가족, 친구, 이웃과의 관계는 점점 절망이 되어버려 시간이 지날수록 회복시켜 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 그러한 끔찍한 아픔들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싸워 이겨야 한다. 이제 다시는 속지 말고 정말 제대로 싸워 이겨야 한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로 결집시켜 반드시 이겨야 한다.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은 가능하다!

  

정리해고 요건 강화. ☞ 결국 정리해고 하겠다는 거다!
비정규직 차별 해소. ☞ 결국 비정규직 철폐하지 않겠다는 거다!

 

  이번 총선에 임한 각 정당들과 후보들의 이와 같은 공약은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한 99% 희망광장> 참가자들의 생각과 본질적으로 다른 지점이다. 총선에서 누가 ‘승리’하더라도 불변이다. 대선에서 누가 ‘승리’하더라도 역시 불변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 앞에 놓인 분명한 ‘현실’이다.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 절대불가!!
왜? ☞ 그래야 자본주의가 유지되니까!
누구를 위해서? ☞ 사장들을 위해서!

 

  이 분명한 ‘현실’ 앞에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이제는 더욱 분명하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들이 말하는 ‘현실’은 결코 우리의 현실일 수 없다. 그들이 말하는 ‘현실’은 우리에게는 끝없는 죽음의 행렬이고, 수백억 손해배상 소송이고, 감옥행이고, 영원한 해고자이고, 길바닥농성 2,000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이와 같은 사장들의 ‘현실’을 온몸으로 거부한다. 왜 1%를 위해 99%가 모든 고통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냐고 반문하며 지금 이 시간에도 맨바닥에 침낭 하나 덮고 한뎃잠을 자고 있다. 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은 충분히 가능하고 그것이 옳기 때문에!

 

 

우리가 왜 사장들의 ‘현실’에 수긍하며

자본주의를 유지시키기 위해 노예로 살다 죽어야 하는가?

 

  그래서 사장들이, 정치인들이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원하지 않는다면, 학자들이, 위원장님들이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이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다면,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할 때이다.
  1%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하에서는 ‘더 어려운 정리해고, 차별이 줄어든 비정규직’이 결코 가능하지 않다라는 것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싸워야 한다.

 

이 정부는 나의 생존을 위한 모든 기운을 없애버렸다, 국가로부터 그 어떤 도움도 없이 35년 동안 내가 대가를 지불하면서 내 스스로 만들어온 나의 존엄의 자리를. 없애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이 정부에 대해 어떤 식으로도 강력하게 대응할 수 없는 늙은이이다, 그래서 내 스스로 나의 삶을 끊는 것만이 내 존엄을 유지하며 인생을 끝내는 길이라 생각한다. 나는 내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쓰레기통들을 뒤적거려야만 하는 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다. 내가 보기에 이 땅의 젊은이들에겐 어떤 미래도 없다, 단지 어느 날 이 나라의 배신자들을 교수대로 보내기 위해 모두 총궐기 무장하는 수밖에… 마치 1945년에 나치 무솔리니정권에 대항했던 이탈리아인들처럼

 

  이 글은 지난 4월 4일, 35년 동안이나 연금을 불입하고도 국가로부터 받는 돈으로는 기본적인 생계조차 유지할 수 없게 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권총 자살한 77세의 그리스 노인이 남긴 유서이다. 이 노인은 99%에 속했다 해도 그 맨 위쪽에 있을 법한 약사였는데도 생활고로 자살을 택해야만 했다. 그래서 정부의 긴축정책에 항의하며 격렬하게 투쟁하고 있는 그리스의 노동자, 시민들은 이 죽음을 ‘긴축살인’이라 부르며 분노하고 있다.

 

  “해고는 살인”이라 외치며 정리해고를 철회하라고 77일 동안 공장을 점거한 채 투쟁해야 했고, 그 점거투쟁 이후에는 알려진 것만 22명의 ‘사회적 타살’당한 쌍용자동차 동지들과 저 멀리 그리스 민중들의 처지가 다르지 않다. 이래도 우리가 사장들의 ‘현실’에 수긍하며 “정리해고 요건 강화”라는 헛소리에 팔려 언제 짤릴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숨죽여 살아야 하나? “비정규직 차별 해소”라는 사탕발림에 넘어가 영원히 비정규직으로 살아가야 하나?
  결코 아니다. 그래서 이 끔찍한 세상을 온몸으로 거부하며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하나로 뭉친다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이 끔찍한 ‘현실’에 분노해 해고노동자,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희망버스, 희망텐트, 희망뚜벅이, 희망광장에 함께했던 이들이 소중하다. 그러면 이제 이처럼 소중하고 중요한 우리들의 의지와 요구를 어떻게 저들의 ‘현실’로부터 해방시킬 것인가? 그 답은 지난 ‘희망’운동들에 있다.

 

 

우리의 희망을 이제는 현실로 만들자!

 

  지난 ‘희망’운동들은 분명 새로운 경험들이었다. 그 새로움은 이제 어느덧 1년을 향해 가고 있다. 이쯤에서 새로운 운동에서 부족했던 점들을 살펴보며 더 강력한 운동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함께 모색해 보자.

 

  첫째, ‘희망’운동의 주체 형성이 필요하다. 그 주체는 다름 아닌 정리해고 당사자, 비정규직 당사자들이다. 희망버스 마무리 국면을 돌이켜보면 이는 사활적으로 중요하다. 어정쩡한 국회권고안이 아니라 정리해고 완전철폐, 해고자 전원 즉시 복직이라는 우리의 요구는 이럴 때만 가능하다. 작년 광화문 KT앞의 ‘희망의 소금꽃밭’과 이번 1차 ‘희망광장’을 비교해본다면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투쟁사업장의 노동자들이 대안주체임을 자임하고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투쟁기획, 전술논의, 실천행동 등 모든 지점에서 단순참가자의 위치에 머물 것이 아니라 가장 깊숙이 개입해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부족한 기획력과 현실적 준비상태에 투쟁을 내맡기다 보면 항상 그 타령에 머무르고 만다. 능력과 경험은 실천을 통해서만 축적된다.

 

  둘째, 정치적으로 더욱 분명한 태도를 견지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공표하고 실천해야한다. 1차 희망광장을 굳이 3월에 진행했던 이유가 있었다. 바로 총선 국면에 대한 대응 때문이었다. 하지만 1차 희망광장에서 총선 대응은 부족했다. 거의 없었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 부족했다. 대응할 거리는 이루 헤아리기조차 버거울 만큼 많았는데 왜 이러한 결과가 나타났을까? 야심찬 의도와 달리 기성정당은 물론이고 이른바 진보정당으로부터도 철저히 외면당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의 목소리를 우리 스스로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당과 후보 모두 이구동성으로 정리해고 철폐가 아니라 “해고요건 강화”를 말하고 비정규직철폐가 아니라 “사용사유제한, 치별해소”을 말하는데도 우리는 제대로 대응하지 않았다.
  반면 희망광장 참가자 개인은 희망광장 시작 전에도, 과정에도, 그 후에도 여러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의견표명을 했다. 개인이나 소속단체, 대응을 위해 급박하게 모인 단위에서의 의견 표명은 이루어지는데 왜 희망광장 이름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었을까?

 

  희망광장 참가자들 사이에서 이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암묵적으로 이러한 시도를 회피했기 때문이다.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이 어떠한 세상이고, 어떻게 하면 쟁취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서로의 생각을 모아나가려는 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노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광장’의 취지에 너무 기울어 ‘희망’이 설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리해고, 비정규직 문제로 고통 받는 이들은 누구나, 이 문제에 공감하는 이들도 누구나 모이자는 취지는 옳다. 하지만 이들이 모인 광장은 서로간의 끈끈함과 서로에 대한 친밀감을 넘어서는 무엇이 더욱 필요했다.

 

  그것은 바로 분명한 정치적 입장이다. 치열한 논의를 통해 우리의 입장을 갖고 해고요건만 강화하겠다는 저들을 광장으로 오도록 해야 했다. 왜 비정규직 철폐가 안 된다는 것인지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으면서 광장에 모인 모든 이들이 누가 우리 편인지 누가 우리 적인지 분명하게 알도록 해야 했다. 그래야 광장에 모인 이들이 우리의 ‘희망’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우리의 ‘희망’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다.

  따라서 2차 희망광장에서는 우리의 생각을 모아 분명한 정치적 입장을 갖기 위한 노력을 배가해야 한다. 문화제 일색이 아니라 ‘정리해고 철폐, 과연 불가능한가?’, ‘비정규직 철폐, 가능한가?’, ‘쌍차 8․6 합의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모든 사내하청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라는 요구는 비현실적인가?’, ‘특수고용노동자는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열자. 학자도 부르고, 정치인도 부르고, 그 누구라도 부르자. “동의한다”라는 두루뭉수리한 립서비스에 당하지 않으려면, 8․6 합의가 불가피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에 맞서 제대로 된 주장을 펼치려면 투쟁주체들도 더 빡세게 준비해야 한다. 이 빡센 준비를 위한 과정에서 우리 스스로도 더욱 분명해 질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있을 때 우리는 ‘광장’에서 ‘희망’을 볼 수 있을 것이고 질긴 싸움을 통해 그 ‘희망’이 우리 앞에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셋째, 우리가 소수파임을 잊지 말고 소수파임을 두려워하지 말자.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시청광장 잔디밭 여기저기에 돗자리를 깔고 벼룩시장이 펼쳐졌다. 선거를 축제로 만들겠다는 '개념찬 콘서트'를 위해 대형 호화무대를 설치하고 리허설을 하고 있다.
그리고 또 그 둘레에선 파업 중인 언론노동자들이 부스를 설치하고 투쟁기금 마련을 위한 사업이 한창이다.
그리고 시청광장에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깃발이 펄럭인다.

 

그리고.
시청광장 맞은편 환구단 공원 앞에는 수시로 철거상황에 대비해야하고 혹한기에도 스티로폼과 비닐로 버텨야했던 1570일차 재능천막이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맞은편 대한문 앞에는 고통과 절망의 깊이를 헤아릴 수조차 없는 쌍용차노동자들이 스물두 번째 향을 피우는 분향소가 있다. 대한문 앞 동지들의 눈엔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돗자리 한 장, 침낭 하나 온갖 드잡이를 해도 들여오지 못하고 행여나 또 다시 고인들의 영정이 훼손될까 늘 불안하다. 플래카드 세 장을 걸기위해 세 명의 동지들이 응급실에 실려 가야만 했다. 그렇게 플래카드 세 장은 동지들의 몸값이 되었다.

 

시청광장엔 수많은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파업 중인 유명 언론노동자들과 사진을 찍고 즐거워했다.
그리고 시청광장에선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깃발이 펄럭였다.

우리도, 시청광장 밖의 우리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조합원이다!!

 

  전국학습지산업노동조합 재능교육지부 조합원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우리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조합원이다. 우리만의 투쟁이 아닌 우리 모두의 투쟁으로 만들자! (쌍용자동차 해고자)
가슴 절절이 다가옵니다. 반드시 함께 승리합시다.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해고자)

 

  위의 글에 대한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의 댓글이다.

 

  이것이 지금 77일 간의 “영웅적 투쟁”을 전개한 쌍용자동차 동지들의 ‘현실’이다. 1,600일을 길거리에 나앉아 구사대에게, 용역깡패들에게 짐승처럼 당해온 재능교육 노동자들의 ‘현실’이다.
  이러한 아픈 ‘현실’은 우리가 소수파임을 인정하고 그 바탕위에서 싸워나갈 때 바뀔 수 있다. 80만 조합원을 자랑하는 민주노총 지도부가, 산별노조 지도부들이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한 99% 희망광장>을 외면하더라도 정리해고자, 비정규직노동자들은 싸울 수밖에 없다. 바로 그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을 만들어 낸 당사자들과 야합을 한 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해서 그들이 당선되면 정리해고,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하는 그들에게 제대로 당한 터라 그들의 말을 절대로 믿을 수 없기에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한 99% 희망광장>에 참여한 정리해고자, 비정규직노동자들은 싸워야 한다.
  대다수가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고 하고 잘못됐다고 하더라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 투쟁당사자인 우리가 우리의 독립적인 요구를 내걸고 싸우는 것에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 소수파가 다수파가 되는 것은 시류를 거스르는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광장에 모여들었던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영원한 소수파로 머물 생각은 추호도 없을 것이다.
  우리 생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숨겨가면서 어설프게 그들을 견인하려 하지 말고 더 큰 목소리를 내며 싸워나갈 때만이 우리의 주장이 다수에게 다가갈 수 있다. 우리는 현재 소수파다. 하지만 영원한 소수파는 결코 아닐 것이다.

 


장면 1.
지난 10일 하루 종일 비가 내렸습니다. 그 날 대한문 옆에는 영정을 부여안은 채 6일째 맨바닥에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 앉아 있었고, 혜화경찰서 앞 집회신고 대기 장소에는 5일째 똥오줌을 그 자리에서 싸가며 재능교육 해고노동자가 앉아 있었습니다. 물론 비를 피할 수 있는 것은 달랑 비닐쪼가리가 전부였습니다. 그 빗속에서 대한문 앞에서는 기도회가 환구단 앞에서는 거리강연이 열렸습니다. 수업을 하다가 문자를 보냈습니다. 답이 왔습니다. 그래도 영정은 비 안 맞는다는…….

 

장면 2.
지난 4월 15일 허세욱 열사 5주기 추도식이 있었습니다. 열사께서는 이명박 정권하에서가 아니라 2007년 노무현 정권 때 한미FTA 체결 반대를 외치며 분신하셨습니다. 그래서 참 기괴한 장면이 펼쳐졌습니다. 민주노총 위원장, 통합진보당 이정희 공동대표가 추모사를 낭독했습니다. 반면 그의 묘지로 올라가는 길 입구에 ‘허세욱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는 단체의 젊은이 4명이 검은 옷을 입고 열사의 뜻을 이어 받아 제대로 한미FTA 철폐투쟁을 벌이자고, 총선에 올인하며 한미FTA 철폐를 말하는 것은 기만이라며 피켓시위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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