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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_창간준비 8호] <도시철도> 박원순과 시민사회에 기대지말고 기관사 노동자를 조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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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철도]

 

박원순과 시민사회에 기대지 말고

 

기관사 노동자를 조직하자!

 

 

- 김창연 (도시철도노조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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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3월 12일 도시철도에서 故이재민 기관사가 불과 몇 시간 전 자신이 운행했던 그 선로에 걸어 들어가 숨졌다. 그런데 이 사건은 9년 전 故서민권 기관사의 죽음과 너무도 닮아있다. 두 분 모두 기관사 생활에서 얻은 정신질환으로 고통을 받았으며, 실적경쟁을 강요하고 강압적이며 폭압적인 노무관리로 배려는커녕 적절한 치료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었고, 노동조합은 기댈 언덕이 되지 못해 결국 죽음으로 내몰렸다. 안타까운 고인의 죽음을 대하는 정권의 하수인, 즉 공사 경영진들의 행태 또한 10년 전과 비교해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진심어린 사과와 책임은커녕 빈소에 찾아와서 “사과할 수 없다”고 난장을 피우거나, 고인들이 가정불화 같은 개인적인 신변비관으로 죽었다는 둥 용서할 수 없는 망언을 내뱉었다. 
  노동조합의 대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노동조합은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투쟁에 들어갔으며, 그 결과 시민사회의 여론에 힘입어 최소한 산재인정과 유가족 피해보상을 합의할 수 있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처음 故서민권 기관사의 경우는 조합원의 조직된 힘을 바탕으로 2년여 간의 투쟁과 ‘공황장애’란 신종직업병을 알려내는 여론전을 병행한 반면, 이번 故이재민 기관사의 경우는 조합원의 조직된 힘을 마련하지 못하고, 10년 전 투쟁을 통해 폭로된 시민사회의 이해에 힘입었고, 이른바 노동자 서민의 후보로 당선된 박원순 서울시장의 조문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잡은 것 정도이다.1)

 

 

죽음으로 도시철도공사에서

산재환자에 대한 비인격적인 처우를 고발하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 벌어진 기관사 건강권 투쟁은 ‘휴/병가 사용의 자유’, ‘기관사 정신질환 산재인정’, ‘특별임시건강검진’, ‘산재요양 후 업무복귀 프로그램’ 등 결코 작지 않은 성과를 냈었다. 그러나 2006년부터 이명박의 측근인 음성직 사장이 부임하면서 상황은 급변하였다. 음성직 공사 사장은 인사권, 경영권을 공세적으로 활용하여 이 성과들을 하나하나 박살내었다. 더욱이 노동조합 조직체계에서 승무본부의 고립, 낮아지는 조합원의 투쟁의식과 이에 굴복한 일부 민주파 활동가들의 노사협조주의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그 결과 휴가는 철저하게 통제되었고, 병가는 금지되었으며, 산재자는 ‘업무부적응자’로 낙인찍혀 배제 당하였다. 3년간 싸웠던 결과로 만들어진 대부분의 대책은 오히려 악용되어 아픈 사람을 색출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이제 아픈 사람은 자신의 병을 숨겨야 했고, 실낱같은 희망으로 사측의 요구에 순응하여야만 했다. 故이재민 기관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고인은 자신의 병에 대한 기록2)은 숨기고, 오직 하급관리자들이 시키는 대로 처분을 기다렸다. 아프긴 하지만 집에서 자신만을 바라보는 아내와 자식들을 버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또한 ‘병신’이라고 낙인찍히고 따돌림 당하는 것보다는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혼자 울더라도 사실을 숨겨야 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공기업 적자해소를 위해 노동조건은 더욱 악화되었다.

 

  건강권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가 파괴되어 가는데, 노동조건은 2003년보다 더욱 후퇴하였다. 노무현이나 이명박이나 “적자공기업 구조조정”을 외치며 이데올로기 공세를 펼쳤고, “공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임을 내세워 스스로 한계를 설정하는 몰계급적 조합활동의 결과로 기관사들은 고립되었다.
  도시철도 기관사들은 2003년과 마찬가지로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하루 5시간 가까이 혼자서 1,000여명 승객의 안전과 민원을 감내하여야 했다. 그리고 2003년에는 없었던 각종 실적으로 살벌한 경쟁체제로 내몰려야 했다. 심지어 야간근무를 마친 후에 ‘봉사활동’3)이라며 각종 행사에 끌려 다녀야만 했다. 이러한 실적은 이명박정권이 강화한 성과급4)으로 연결되었다. 다수의 기관사는 낙오하지 않기 위해, 작년만큼의 수입을 유지하기 위해 하급 관리자들의 요구에 순응하였다. 2011년 故이재민 기관사는 2003년 故서민권 기관사보다 훨씬 더 열악하고 폭력적인 노동조건에서 일을 해야만 했다.

 

 

고인은 죽음으로 노동조합 활동가들에게 정신 차리라고 했다.

 

  故이재민 기관사의 죽음은 도시철도공사, 특히 승무 분야 활동가들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왜냐하면 노동조합 활동가들은 음성직 사장에 의해 많은 조합활동의 성과가 박살나긴 했어도 그래도 조금은 남아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소한 공사 경영진들이 적어도 사람이 죽어나가는 문제에는 일말의 양심을 갖고 대할 것이라 믿었었다. 그러나 그 믿음은 10년 전과 똑같은 죽음을 맞으면서 깡그리 부서졌다. 적들은 전혀 변한 게 없었고, 오히려 자신들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드는 노하우와 경험만 축적했다.
  물론 활동가들이 특별히 산안문제, 건강권 문제에만 소홀했던 것은 아니다. 다수의 활동가들은 투쟁을 두려워하였고 노사협조주의의 유혹에 흔들렸다. 움직이지 않는 조합원을 탓하며 한스러워 했고, 분열되는 ‘민주파’에 서운함을 느끼거나 운동판을 떠나버리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주저함과 무기력함에 대해 고인은 죽음으로써 질타한 것이다. 정신 차려!

 

 

다시 시작하는 건강권 투쟁 방향설정이 중요하다.

 

  다행히 도시철도 노동조합은 정신을 차리고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기관사 건강권 쟁취를 위한 공대위를 구성하여 실태조사와 2003년부터 공황장애 등 직업병의 원인으로 지적된 2인승무 등 대책마련을 서울시에 요구하고 있다. 또한 기관사 처우개선을 위한 노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협의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런 활동에 대해 현장에서는 기대와 우려가 섞여있다. 공대위가 주장하는 내용은 현장의 요구로 받기에는 너무 멀게만 느껴지고 있다. 노사특별위원회도 과거 수차례 경험한 것처럼 별다른 성과 없이 흐지부지 끝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공사의 경영진, 특히 승무분야는 음성직 시절 ‘승승장구’ 하던 자들이 그대로 남아있고 교섭 상대로 앉아 있다. 휴/병가 통제 수단을 만들고, 현장을 치열한 실적경쟁 구조로 만들어 놓은 장본인들이 스스로 반성해서 개선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2005년만 해도 “딴 데 다 필요 없고, 승무본부만으로도 싸울 수 있다”던 조합원들의 자신감은 바닥으로 떨어진지 오래이다. 이는 현재 도시철도공사에 있는 4개 노동조합 중 유일한 민주노조(나머지 3개 노조는 어용이다)의 승무기관사 조직률이 3-40%대에 머물고 있는 데서 드러난다.

 

  이처럼 낮은 조직률은 노동조합 활동가들에게 투쟁보다는 협상과 시민사회에 기대는 활동을 고민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명백히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박원순 시장이 노동자 서민 후보, 노동자 서민을 대변하는 시장이라는 환상을 깨야 한다.
  또한 시민사회에 의존하는 활동도 극복해야 한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들은 노동자들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조합원이 빠꼼이가 되었다고 한탄하며 조합원을, 기관사를 조직하는 것을 포기하다시피 했다. 짙은 패배감에 사로잡혀 투쟁해도 성과가 없다는 푸념을 깨버리지 않는 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을, 이미 올 초 노사합의 과정5)에서 충분히 깨달은 것 아닌가.

 

 

현장에서 기관사를 재조직하자.

서울지하철을 비롯해 전국 도시철도의 모든 기관사와

연대하여 싸우자!

 

  지난 4월 6일 한 기관사가 열차를 정차하고 차내방송을 통해 자신의 부당한 인사를 호소하는 일이 벌어졌다. 전무후무한 일이다보니 9시 뉴스에까지 실황 보도됐다. 그 기관사는 12년 동안 근무하던 곳에서 사전에 아무런 통보도 없이 마치 치워야하는 짐짝처럼 다른 사무소로 날려버렸다. 그 기관사는 관리자들에 대한 분노를 노동조합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분출하고 폭발시켰다. 그런 점에서 故이재민 기관사의 죽음과 이 4월 6일 사고는 궤를 같이한다. 이처럼 지금 현장의 노동자, 기관사들의 불만은 이미 목까지 차올랐다. 이를 조직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한다.

 

  또한 시민사회에 기관사의 고통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알려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서울지하철을 비롯한 기관사의 연대와 투쟁을 조직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아직 “기관사 건강권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에는 서울지하철 노동조합, 혹은 승무지회의 조직적인 결합이 없지 않은가? 단지 노동조합의 참여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직접 서울지하철의 현장을 조직할 방법을 고민해야만 한다. 서울시민의 서명을 받는 것이 아니라, 기관사 100명이라도 조직하여 서울시에서 집회를 벌이는 것이 더욱 큰 힘을 발휘하지 않겠는가!
  복수노조, 필수공익 사업장 파업권 박탈 등 힘들다는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자. 패배의식은 이제 떨쳐버리고, 싸워야 할 때다. 투쟁을 조직할 때다. 현장에도 투쟁의 기운이 조금씩 올라오고 있지 않은가. 이 얼마만의 일인가!

 

 


 

<후주>

 

1) 도시철도 노동조합이 박원순 시장에 의존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없는 역량을 쥐어짜 2번의 집회를 한 점, 나아가 엄혹한 현장탄압 속에서 복수노조임에도 조합을 가리지 않고 참석한 동료기관사들의 투쟁에 대해서는 정당한 평가가 있어야 한다.

 

2) 고인을 진료했던 한의사는 방송과 인터뷰하며, 고인이 자신의 병명을 극구 적지 말아줄 것을 요구했다고 밝혔다.(3월 20일 KBS 생생정보통) 사회적 불이익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처지를 호소한 고인의 요구에 따라 한의사는 증상만을 기록하는 진단서를 발급했다.

 

3) 봉사활동 시간도 실적이 되자, 월 근무시간보다 봉사활동시간이 더 많은 기관사가 나타났다! 이 기관사의 근무시간, 봉사시간을 계산해보면 하루평균 8시간의 근무와 8시간의 봉사활동을 했다! 이런 살인적인 봉사활동과 업무시간은 2010년 결국 한 기관사의 목숨까지 앗아갔다. 2010년 40대 후반의 기관사는 야근 출근을 준비하며 샤워하다 갑자기 돌아가셨다. 물론 이 기관사는 산재인정조차 받지 못했다.

 

4) 공기업은 2011년부터 성과급체계가 강화되었다. 같은 직급 같은 호봉임에도 불구하고 연봉에서 1,000만원까지 차이가 났다. 물론 공사는 단 한푼도 추가로 지급한 것이 없다. 즉 공기업의 총액인건비는 변동이 없었다. 공사는 9,10,11월 월급에서 각종수당을 모조리 삭제하고, 그 3달치 수당을 모아서 연말에 성과급으로 분배하였다. 동료의 3달치 임금(수당)을 떼어서 한사람에게 모아주는 것이다!

 

5) 도시철도 승무본부는 올해 1월 실적경쟁 중 하나였던 수동운전을 노사합의로 폐지했다. 그러나 노사합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관사들은 수동운전 실적경쟁을 중단하지 않았다. 음성직 사장 5년 동안 노사합의가 단지 종이쪼가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수차례 보아 왔고, 현장은 하급 관리자들에 의해 장악되었기 때문이었다. 승무본부는 이 투쟁을 평가하면서 조합원들이 참여하여 만들어낸 노사합의가 아니라면 변화하는 것은 없다는 중요한 교훈을 공유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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