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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_창간준비 1호] 왜 지금 혁명당 건설을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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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지금 혁명당 건설을 말하는가?

 

 

- 고민택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1년 9.11 사태가 발생한 후 한 때, 세계의 역사는 2001년 9.11 전과 후로 나뉜다는 말이 등장했다. 미국 본토가 외부 세력에 의해 무참한 공격을 받는 전례 없는 일이 벌어지고 그를 계기로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외치며 비대칭 전략이라는 새로운 세계전략을 들고 나오자 서방은 물론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사실상 전 세계가 이를 지지함으로써 미국이 주도하는 단일 세계경영 시대가 열리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염두에 둔 일종의 정치적 수사라고 할 수 있다.   

 

  2001년 9.11과

  2008년 가을

  그러나 9.11이 보여준 정치적 진실은 미국의 패권이 강화되기는커녕 오히려 미국의 힘이 약화, 몰락하는 전초를 드러낸 것에 있다. 9.11 사태가 벌어진 것 자체가 미국이 갖는 허점을 보여준 것으로 미국이 결코 철옹성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미국의 힘의 약화가 무엇을 계기로 어떤 양상을 띠고 나타날지가 아직 불분명했지만 그것은 이제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시간이 갈수록 미국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음이 드러나면서 그 일단이 비쳐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미국의 힘이 약화되었다고 단정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점이 없지 않았다. 더구나 세계는 여전히 신자유주의가 대세를 이루고 있고 그와 함께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아직 건재한 듯이 보임으로써 미국을 정점으로 한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시대정신’을 일거에 무너뜨린 것은 다름 아닌 2008년 가을 홀연히(?) 솟구친 미국발 금융위기이다. 참으로 그것은 느닷없이 닥친 일처럼 보였지만 실은 이미 그 전부터 축적되고 있었던 바가 현실로 등장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것이 홀연히 등장한 것처럼 비쳤던 것은 그렇게 믿고 싶거나 비록 현실이더라도 현실로 받아들이기 힘든 정치적, 심리적 작용 때문이었으리라.

 

  그 뒤의 상황은 우리가 현재 목격하고 있는 바 그대로다. 그것은 단순한 금융위기만도, 자본주의에서 늘 반복해서 나타나는 주기적, 순환적 위기만도 아닌, 그것들까지를 포함하는, 1929년 벌어진 세계공황에 버금가는 심급의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위기가 폭발한 것이다. 자본주의 심장부 미국에서, 그 어떤 외부의 작용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원인에 의해 일어난 폭발이다.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에 불과한 쌍둥이 빌딩 정도가 무너지는 9.11 사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차원의 것이다. 단지 상징이 아니라 본체가 무너지는, 단지 미국만의 문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를 위기로 몰아가는 엄청난 대사건이다. 9.11이라는 징후는 결국 그렇게 본 모습을 드러냈다. 미국의 패권과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동시에 뿌리부터 흔들리게 된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러나 지금의 세계공황은 단지 신자유주의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만약 신자유주의가 아니었다면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그 전에 위기를 맞이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앞세워 위기를 관리해 왔으며, 폭발을 유예시켜 온 것이다. 신자유주의만을 원인으로 삼거나 그것에만 책임을 묻는 것은 자본주의에 면책을 주거나 그것을 옹호하는 것일 뿐이다. 단지 신자유주의만을 반대한다면 신자유주의조차 패퇴시킬 수 없다는 것이 진실이다. 오늘날 자본주의한테는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그 어떤 대안도 없다.

 

  공황, 전쟁, 혁명

  1929년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다시는 맞이하고 싶지 않은 악몽 같은 해다. 1929년은 세계대공황이라 일컬어지는 대사건이 발발한 해다. 이 공황과 함께 케인즈주의 경제학이 등장했으며, 이 공황으로 인해 파시즘이 발호했다. 자본주의 지배계급은 케인즈주의 경제정책, 즉 뉴딜정책이 마치 이 공황을 극복하게 한 것이며, 파시즘에 대한 정치적 승리라고 강변하지만 이 공황은 전대미문의 제2차 세계대전의 살육과 파괴를 통해서만 겨우 진정될 수 있었다. 그 전 제1차 세계대전 또한 그 당시의 자본주의 공황과 맞물려 벌어진 것으로 자본주의와 전쟁은 한 몸이라는 사실, 그리고 사멸해 가는 자본주의의 숨통을 노동자혁명으로 끊어내지 못하는 한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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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공황은 전쟁만을 낳는 것이 아니라 전쟁과 함께 혁명적 정세를 조성한다는 것을 또한 보여주고 있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이 바로 그러한 정세의 산물이다. 물론 혁명이 언제나 승리로만 끝나지는 않는다. 1923년 독일 혁명이 실패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혁명적 정세는 불가피하게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의해 주어진다. 여기서 불가피하다는 것이 핵심이다. 주체가 혁명적 정세를 스스로 만들 수는 없다. 그렇더라도 진짜 중요한 것은 객관이 아니라 주체의 의지와 태도다. 주체의 전략과 전술이다. 주체의 일상적 정치활동과 조직적 태세다. 객관적으로 형성되는 정세를 읽어내는 주체의 능력이 혁명에서 가장 커다란 변수다. 객관은 언제나 주체의 프리즘을 통해서만 의미를 갖는다. 

  주체가 혁명적 정세를 스스로 만들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곧 주체는 수동적 일 수밖에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수동적이어서는 이미 늦는다. 객관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오직 주체의 능동적 대응만이 사태의 전개와 흐름을 바꿀 수 있다. 볼셰비키당은 분명 러시아적 현상과 특수성이 반영된 조직 형태지만 주체의 능동적 역할이 무엇이며 그것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가를 증명해보였다. 그렇더라도 볼셰비키 조직 형태와 정치활동을 그대로 이식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 필요한 것은 또 다른 볼셰비키다. 그럼에도 볼셰비키 조직 형태와 정치활동을 대체하거나 능가할 수 있는 또 다른 볼셰비키가 그 뒤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지금 전 세계 혁명세력이 안고 있는 문제이자 숙제다.
 
  자본주의 후진국 또는 식민지 나라들에서 나타난 민주주의 혁명 또는 반제 민족혁명은 모두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성장 전화를 이루지 못했다. 프랑스, 스페인 등 자본주의가 발전된 나라들에서도 인민전선에 의해 혁명이 패배하는 역사를 기록했을 뿐이다. 민주주의 혁명이든, 반제 민족해방혁명이든 모두 프롤레타리아 혁명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들을 이끈 인격체가 아무리 고귀한 품성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참여한 인민의 노력과 희생이 도덕적으로 아무리 숭고하다고 해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아닌 이상에는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모든 형태의 2단계 혁명 전략은 프롤레타리아의 전략이 될 수 없다. 사실 러시아 혁명조차 바로 이 2단계 혁명 전략에 의해 좌초될 위기를 맞이할 뻔 했다.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권, 칠레의 아옌데 정권이 보여준 비극도 중요한 참고가 된다. 자본주의 반혁명에 대비하지 않은 혁명, 노동자계급에 의한 권력 장악을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한 혁명의 말로가 어떻게 끝장나는가를 이 두 사례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 뒤 브라질 PT(노동자당), 베네수엘라 차베스정권, 최근 프랑스의 NPA(반자본주의신당) 등이 선을 보이고 있지만 브라질 PT는 이미 부르주아 정치 질서로 편입된 지 오래며, 차베스정권은 무늬만 사회주의일 뿐 그 실상은 변종된 지배계급에 불과하다. 프랑스 NPA는 아직 완연한 개량주의 정당이라고 단정 짓기는 이르지만 현재 세계가 부딪치고 있는 근본적 문제에 정면 대응하지 않거나 아래로부터의 노동자투쟁에 의한 권력 장악을 공공연하게 밀고 나가지 않는다면 NPA 시도는 조만간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노동자계급은 사실상 혁명과 단절됐다. 전후 자본주의 부흥기가 가져온 정세의 산물이자 동시에 혁명세력이 후퇴하고 개량주의 세력이 득세한 역사적 결과 때문이다. 냉전체제가 또한 여기에 한몫했다. 냉전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체제 대립이라는 외피를 띠었지만 실은 미국과 소련을 정점으로 한 서구 자본주의와 동구 ‘가짜 사회주의’ 사이의 경쟁 체제에 불과했다. ‘제3세계’라 불린 블록 또한 반서방 색채를 띠었지만 결코 반자본주의로 나간 적이 없다. 그들 나라의 노동계급 역시 착취의 대상이었으며 노동계급이 전체 인구의 다수가 되지 못한 상태에 머물렀다. 노동자계급 투쟁과 혁명운동이 세계적 차원에서 오랜 침묵과 굴종의 시기를 맞이한 것이다.
 

  혁명 세력의 부재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정세는 큰 틀에서 볼 때 자본과 부르주아 국가가 노동자 민중에 대해 절대적 우위를 점했던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 자본주의 역사상 이토록 오랜 기간에 걸쳐 자본과 부르주아 지배계급이 순탄했던 적이 별로 없다. 적어도 2008년 이전까지는 그랬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전에도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부르주아 지배계급의 노동자 민중에 대한 통치력이 마냥 증대된 것만도 아니다. 자본과 부르주아 국가 역시 크고 작은 위기를 주기적, 간헐적으로 맞이했다. 그러나 자본과 부르주아 국가가 심각한 위기에 처하는 결정적 국면은 형성되지 않았다. 그 핵심적 이유는 제국주의 나라의 노동자투쟁이 약화된 것과 함께 그들 나라의 혁명 세력이 지지부진한 상태에 놓여 있었던 데 있다. 비제국주의 나라의 투쟁이나 지역적 차원에 국한된 투쟁만으로 자본주의 세계 체제를 위협하기에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거의 두 세대에 걸쳐 노동자계급은 어둡고 긴 터널 안에 갇혀 있었다. 그로 인해 맑스주의 전통과 이론은 현실 노동계급 운동과의 연결 고리가 끊기게 되고, 혁명의 현실성과 가능성은 거의 무망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노동자계급 중심성론이나,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 사상은 강단에서의 학술 논문의 주제나 소재 정도로 전락했다. 그런 공백과 지형을 비집고 레닌주의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맑스주의에 대한 수많은 갈래의 비판적, 부정적 이론이 우후죽순처럼 번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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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스-레닌주의는 사실상 버려졌다. 맑스-레닌주의의 정수이자 핵심인 혁명, 계급, 당, 전략/전술과 같은 실천적 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그러한 실천의 이론적, 철학적 기초인 역사유물론, 유물변증법을 포함하여 사회주의/공산주의로의 이행 등을 다루고 탐구하는 풍토 자체가 사라졌다. 그 자리를 이른바 거대 담론을 부정하는 의미에서 등장한 미시 담론이 대신 차지했다. 미시 담론은 예컨대 인간을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 보지 않았다. 또한 사회를 총체성 차원에서 보지 않음으로써 사회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현상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성과 유기성이 사라지고 대신에 그것들은 그저 고립분산적, 원자적으로 존재하는 우연적, 우발적 현상으로 받아들여졌다. 부르주아 국가가 강제하고 억압하는 현실에 눈감았다. 당연히 적대관계, 적대전선 자체가 희미해지거나 아예 사라졌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맑스주의로부터의 이탈, 포기의 근원은 노동자투쟁이 약화된 데 있다. 아니다. 그 또한 결과일 뿐이다. 원인을 노동자계급에게 돌릴 수는 없다. 사실 노동자계급은 어떤 형태로든 투쟁을 멈춘 적이 없다. 가시적이든 아니든, 크든 작든, 폭발적이든 그렇지 못하든 투쟁은 끊임없이 있어 왔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이듯이 노동자투쟁을 꿸 수 있는 조직과 노동자투쟁을 진전시킬 수 있는 전략과 전술, 노동자투쟁의 방향과 목표를 제시하는 강령이 없었던 게 진짜 문제다. 한 마디로 혁명 세력의 부재가 문제의 근원이다.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현실과 ‘사노위’ 시도

  한국 노동자투쟁과 사회주의 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거의 공백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랬다가 87년 노동자대투쟁이 벌어지면서 세계 노동자계급과 사회주의 세력으로부터 관심과 이목을 받게 되었다. 한국의 87년 노동자대투쟁은, 앞서 말했듯이, 세계적 차원에서 의미 있는 노동자투쟁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 속에서 일어난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한국에서의 노동자투쟁은 87년 이후 97년 노동악법철폐를 위한 전국 정치총파업투쟁 때까지, 95년 프랑스 공공부문 노동자투쟁과 함께 세계 노동계급에게 새로운 가능성과 전망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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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그 뒤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한국에서의 노동자투쟁은 세계사적 임무와 역할을 선도적, 지속적으로 밀고 나가지 못하고 극복했어야 할, 바람직하지 못한 의미에서의 세계사적 보편성, 즉 노동운동의 제도화, 관료화의 길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 길에 빠지게 된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정말 쉽게 어쩌지 못하는 커다란 장벽으로 서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노동조합이 가지게 되는 한계가 가장 큰 작용을 했지만 거기에도 정도와 수준이 있는 바, 그 책임의 주요 소재는 오늘날 ‘진보대통합’을 말하고 있는 그들 개량주의 정치세력에게 있다. 노동조합 또는 노동운동의 제도화. 관료화와 개량주의 정치세력의 발호는 서로가 서로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회주의 세력이 이 과정에서 어떤 정치활동을 펼쳤는가를 보는 일이다. 한국 사회주의 세력은, 물론 국가 탄압이라는 외생적 변수가 없지 않았지만, 노동자계급 투쟁을 적어도 개량주의 정치세력에게 완전히 빼앗길 수밖에 없는 조건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루지 못했다. 그 수많은 노동자투쟁이 있었음에도, 한국의 정치지형이 서구 제국주의 나라들처럼 아직 안정화되지 못한 상황에 처해 있었음에도 그런 조건들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 초기 민주노동당이나 지금의 진보대통합 세력에 대한 추상적, 일반적 비판, 즉 의회주의, 개량주의, 대리주의라는 개념을 문제 삼는 것을 넘어 현실투쟁에서 그들과 차별되는 전략과 전술, 나아가 노동자 권력 장악과 사회주의 정치를 향한 정치적 대안과 전망을 제출하기를 주저하고 머뭇거렸다. 그렇다고 이데올로기 차원에서라도 분명하고 선명한 정체성을 확보, 확립하지도 못했다. 기껏해야 전투성, 비타협성만을 반복적으로 주장하고 외치는 투쟁부대, 투쟁세력 이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 스스로가 사회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을 전면화, 대중화하기를 시기상조라는 이유를 내세워 꺼려했으며, 정파를 극복하고 당건설을 이루려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정치행위를 펼치지 못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노위 시도는 바로 한국 사회주의 세력이 처한 이 같은 현실을 더는 지속할 수 없다는 절박한 상황 판단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운동을 위한 운동, 조직보존을 위한 운동을 과감히 떨치고 나아가 개량주의 세력에 대한 불만 세력을 넘어 한국의 정치지형과 계급세력관계를 바꾸어 낼 수 있는 객관적인 정치세력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조직적 조건을 확보하고자 한 시도였다. 이 점에서 사노위 시도 자체는 한국 사회주의 운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물론 결과적으로 사노위 운동은 실패했다. 그러나 그 실패는 사노위가 시도하고 추구하고자 하는 바를 공공연히 천명하고 실천에 옮긴 사실 자체에 비하면 결정적인 실패가 아니다. 사노위 실패에 대해서는 좀 더 시간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토론하고 평가해야겠지만 사노위 실패가 곧 당건설 운동 그 자체의 무망함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니 그 반대다. 사노위 실패는 오히려 혁명당 건설이 왜 필요하고 중요한 것인가를 역설적으로 강조할 뿐이다. 사노위 시도는 그 어떤 것과 비교해서도 이후 혁명당 건설에서 참고해야 할 중요한 교과서다. 사노위 실패는 당건설 경로와 과정에서나, 혁명운동의 대중화와 현실화를 위해 기존 것을 적당히 합하거나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정파적, 조합주의적 정치와 과감히 단절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사노위 출발도 그를 목표로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의 조직화, 현실화에 성공하지 못했다. 단지 이질적인 세력이 모였기 때문에 나타난 당연한 결과가 아니다. 그건 하나마나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사노위에 동의하지 않으려면 그와 다른 당건설 노선과 경로를 총체적이고 종합적으로 제출하는 것을 통해서 대안을 주장해야 한다. 그렇지 않거나 할 수 없다면 지엽적이고 부분적인 논평은 될지언정 의미 있는 쟁점은 형성될 수 없다.

 

  왜 지금 혁명당 건설인가?

  적어도 2008년 가을 이후, 세계는 혁명의 시대로 돌입하고 있다. 그렇다. ‘혁명의 시대’다. 자본주의 철폐, 사회주의 건설 운동은 언제나 세계적/국제적 정세와 시야 속에서 진행해야 한다. 각국/일국이 처한 구체적 상태와 조건은 국제주의 관점에서 해석되고 배치해야 한다. 그 어떤 각국/일국도 아직은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지만 북아프리카나 중동에서 표출되고 있는 투쟁이나 유럽에서 나타나고 있는 투쟁도 사회주의로의 연속 혁명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승패를 떠나 유일한 침로이다. 각국이 처한 정세의 산술적 합이 세계정세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지구적 차원에서 형성되고 있는 정세, 즉 세계공황이 각국/일국의 정세를 규정하고 있음을 오늘 우리는 생생하게 목도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적어도 2008년 이후 세계정세는 지난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이후 또 다시 명증하게 ‘야만이냐, 사회주의냐’를 제기하고 있다. 그것은 그러나 단순 반복을 넘어 그 당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범위와 강도로 형성되고 있다. 말 그대로 전지구적 차원에서 ‘이행’, 즉 ‘혁명’이 현실의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러시아의 경험을 단지 답습하는 것을 넘어, 그 경험을 참고하되, 오늘의 현실에서 필요하고 요구되는 혁명 강령과 혁명 전략을 창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이유에서든 혁명적 과정을 통한 자본주의 철폐, 혁명당 건설을 통한 노동자계급 조직화, 노동자계급 투쟁을 중심으로 한 적대전선 형성을 회피하는 맥락에서 들고 나오는 ‘새로운’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그 허구성이 증명된 가장 낡은 것일 뿐이다.    
   
  한국은 지난 시기 동안 사회주의 운동의 주변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세계 사회주의 운동의 주요변수가 되지 못하고 종속변수, 즉 부차적 지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지금에서는 비록 핵심 지위는 아니더라도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나 유의미한 변수가 될 수 있는 위치에 이르렀다. 특히 동북아는 세계 자본주의의 주요 지역으로 떠올라 있을 뿐만 아니라 지정학적으로도 세계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잠재력을 안고 있다. 한국이 동북아 지역에서 사회주의 대중화와 혁명운동을 이끄는 견인차가 되어야 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적어도 87년 이후 한국사회는 여전히 대중(계급)투쟁이 사회변화를 이끄는 주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럼에도 현실적으로 한국 사회주의 역량은 아직 취약하다. 그러나 이것이 사회주의 대중화, 혁명당 건설을 미루거나 유보해야 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 아니 사회주의 역량이 열악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 전면적인 사회주의 운동을 펼치지 못한 것이 오늘의 현실을 낳게 한 주요 원인이다. 다행히 아직 진보정당, 즉 개량주의 세력이 노동자계급 속에 완전히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고, 비록 약화되긴 했지만 노동자투쟁의 경험이 이미 잊혀진 과거가 아니라 현실적 맥락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비정규직 운동을 포함한 촛불투쟁, 등록금 투쟁 등 대중(계급)투쟁의 양상이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 혁명세력이 개입하고 조직할 수 있는 객관적 토대와 여건은 여전히 존재한다. 문제는 사회주의자, 혁명세력 자신이다.  

 

  한국 사회주의 세력은 비록 그 전체 역량이 아직 취약하고 각 세력은 더욱 열악하지만 적어도 사회주의를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으며, 각자의 구상과 계획은 다르지만 사회주의 당건설을 당면 과제로 삼고 있다. 이 점은 분명 이전에 비하면 진전된 것이다. 이제 어떤 사회주의 세력도 자신이 처한 상태와 조건과 무관하게 당건설 문제를 비껴갈 수 없으며 응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조차 벌써 현실에서는 또 다시 뒤쳐질 수 있다. 사회주의 당건설이라는 일반적 과제를 넘어, 다시 말해 그러한 일반적 과제가 구체적으로는 현실에서 혁명을 예비하고 혁명을 수행하려는 태세를 갖추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혁명정당 건설은 다른 한편으로 혁명 강령 건설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강령주의’ 문제는 별개로 하더라도, 누구든 자신의 강령을 가져야 하며 강령 수준에서 논쟁을 해야 하는 것이 이제 기본이 되었다. 이 또한 과거에 비하면 진전이다. 강령 또한 조직의 역사와 현실 그리고 세력관계를 감안한 정치적 산물이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거칠고 조야한 형태로 표출되는 측면이 불가피하게 나타날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강령 논쟁이 더욱 중요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계급투쟁에 대한 개입은 물론 개량주의 세력에 대한 대응에서도 사회주의 당건설과 강령이라는 무기를 들지 않고는 그 어떤 사소한 쟁점조차도 분명하고 명확하게 형성하기 어렵다. 물론 현실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필요한 것은 ‘구체적 상황에서의 구체적 전술’을 제출하고 이를 관철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정치적 방향(전략) 없는 전술이 갖는 한계 또한 분명하다. 어떤 면에서 지금까지 한국 사회주의 세력은 사실상 이런 운동에 익숙해져 있다. 그조차 전술이 지도력을 획득하고 전략적 침로를 열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조합주의에 갇히거나 기껏해야 전투성 그 자체를 강조하는 이상으로 나가지 못했다. 사회주의 세력이 전술 주체로 서지 못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당과 강령으로 무장하지 않고는 꽁무니 전술과 정치적 대기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혁명정당은 ‘인민의 호민관’이 되어야 한다. 노동조합 운동의 배후세력에 머물러서는 결코 지도력을 확보할 수 없으며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없다. 국제주의 관점과 시야, 전 계급적인 쟁점에 대한 정치적 입장과 방침 제시, 무엇보다도 ‘구체적 상황에 따른 구체적 전술’을 구사할 수 있는 태세와 능력을 갖춰나가야 한다. 직접적 당건설을 당면 목표로 분명히 할 때만이 그러한 정치적 긴장과 행동을 형성할 수 있다. 혁명정당 건설을 분명한 목표로 삼아야 비로소 그를 위해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을 강화해야 하는지가 명료하게 드러날 수 있다. 만약 그것을 유보하거나 기각한다면 모든 것은 안개에 갇힌 것 마냥 흐릿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모든 일상 활동과 정치토론을 혁명당 건설과 혁명운동 현실화를 위한 도상 위에서 펼쳐야 한다. 여기에 그 어떤 머뭇거림도, 주저함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시간은 혁명의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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